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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며 헤진 부산항(釜山港)
근대 부산항을 거쳐 강제 징용되었던 사람들의 애달픈 심정을 표현한 대중가요.
구성
「울며 헤진 부산항」은 부산항에서 출항을 앞두고 밤바다를 바라보며 정든 땅, 사람들과의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한다. 조명암(趙鳴岩)이 작사하고, 박시춘(朴是春)이 작곡하였으며, 남인수(南仁樹)가 노래하였다.
내용
1절의 가사는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는 연락선 난간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정들인 사람끼리 음”이다. 2절의 가사는 “달빛 아랜 허허 바다 파도만 치고 부산항 간곳없는 검은 수평선/ 이별만은 무정터라 이별만은 야속터라 더구나 못 잊을 사람끼리 음”이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의 고난을 노래한 드문 곡 중의 한 곡이다. 일제의 검열을 의식하여 ‘징용’ 이나 ‘일본’ 같은 단어는 쓰지 못하였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이 곡을 징용의 설움을 노래하는 곡으로 받아들였다.
참고문헌
옛날가요보존회(http://cafe.naver.com/chonguk49)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남인수~울며헤진 부산항 1940. 녹음.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1918~1962.
'울며헤진 부산항' 영화제작 1963.
감독 강대환 최무룡 김지미 주연.
▶남인수 - 울며 헤진 부산항 - Daum 카페
연락선은떠난다(連絡船은떠난다)
박영호(朴英鎬) 작사, 김해송(金海松) 작곡, 장세정(張世貞) 노래의 대중가요.
내용
1937년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한 음반에는 박영호 작사, 김송규(김해송의 본명) 작곡으로 표기되어있다. 일제가 36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함과 동시에 대륙침략의 도구로 이용하였던 관부연락선에 얽힌 노래이다. 대한해협을 오가는 연락선은 우리 민족에게는 한과 비애의 대상이었고, 일본인들에게는 기쁨과 희망의 연락선이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는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눈물의 뱃길로, 이런 서민감정을 표현한 감성적인 노래이다. 평양의 한 백화점의 여점원이던 장세정은 이 노래 한 곡으로 불세출의 정상급 가수가 되었다. 전형적인 일본의 단조음계로 구성된 엔카풍(演歌風)의 노래이다. 8ㆍ15광복 후 작사자 박영호는 월북하였고, 작곡자 김해송은 K.P.K악단이라는 쇼단을 구성하여 미국의 재즈음악과 우리나라의 민요를 접목시킨 음악으로 개성 있는 무대를 꾸몄다. 불행히도 6ㆍ25동란 때 납북되어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다. 1951년 일본의 인기여가수 스가와라 쓰즈코(菅原都都子)가 「연락선의 노래(連絡船の唄)」라는 제목으로 취입, 크게 유행시켰는데, 작곡자 이름을 가네야마(金山松夫)로 표기했다. 엔카풍의 노래라서인지 지금도 일본에서는 그들의 작품으로 알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 가요사 1』(박찬호, 미지북스, 2009)
『가요60년사』(황문평, 전곡사, 1983)
『노래백년사』(황문평, 숭일문화사, 1981)
『문예총감』(최창봉 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
『가요반세기』(한국문화방송 편, 성음사, 1975)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0, 70 情과 음악 쉼터 | 장세정 - (연락선은 떠난다)(1937) - Daum 카페
해운대 에레지(海雲臺에레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해운대 바다를 배경으로 청춘 남녀의 이별을 내용으로 한 대중가요.
구성
「해운대 에레지」는 전체 3절의 장절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절은 사랑의 맹세와 다짐에도 연인이 떠났음을 서러워하는 내용, 2절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연인을 잊기로 하고 미련을 버리겠다는 내용, 3절은 실연당한 연인이 정든 해운대를 떠나겠다는 내용을 각각 담고 있다. 1961년 가수 손인호가 불렀으며, 백영호가 작곡하였고 한산도가 작사하였다.
내용
1절의 가사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더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이다. 2절의 가사는 “백사장에서 동백섬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오고 또 가는 바닷물 타고 들려오네 지금도 이제는 다시 두 번 또 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 버리자 저 바다 멀리멀리”이다. 3절의 가사는 “울던 물새도 어데로 가고 조각달도 기울고/ 바다마저도 잠이 들었나 밤이 깊은 해운대/ 나는 가련다 떠나가련다 아픈 마음 안고서/ 정든 백사장 정든 동백섬 안녕히 잘 있거라”이다.
의의와 평가
1960년대 해운대 백사장 과 동백섬에서 헤어지지 말자고 약속하였던 연인이 떠나고 난 뒤의 슬픔을 담고 있다. 바다, 백사장, 동백섬 등 노랫말의 소재가 해운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해운대는 1960~1970년대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신혼 여행지였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 사이에 여행해 보고 싶은 선망지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부산박물관, 『부산의 근대를 이야기하다』(영신애드, 2007)
박찬호, 『한국 가요사』2(미지북스, 2009)
사랑하는사람들의 인생 | 해운대 엘레지♬ / 손인호 - Daum 카페
손인호 노래비 「해운대 엘레지」부산광역시 해운대 백사장에 있는 손인호의 노래비 「해운대 엘레지」이다. 1961년에 불러진 이 가요는 해운대 바다를 배경으로 청춘 남녀의 이별을 내용으로 한 대중가요이며, 전체 3절의 장절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6·25 전쟁 때 흥남 철수 작전을 통해 부산으로 넘어온 피난민의 애환을 그린 대중가요.
구성
1절은 흥남 부두에서 피난 오면서 금순과 이별하게 된 과정을 표현한다. 2절은 부산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지내는 화자가 영도 다리에서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표현한다. 3절은 헤어진 가족, 연인과의 상봉을 염원하는 내용이다. 작사는 강사랑, 작곡은 박시춘이 하였고 노래는 현인(玄仁)이 불렀다.
내용
1절의 가사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이다. 2절의 가사는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 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 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이다. 3절의 가사는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 다오 북진 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 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 보자”이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에서 발생한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린 대표적인 곡이다. 6·25 전쟁 기간 동안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최고의 히트곡 가운데 하나이다. 영도 다리[영도 대교]가 흥남 철수 작전에서 헤어진 가족들이 만나기로 한 장소가 될 만큼 전국적으로 유명한 랜드 마크였음을 증명한다.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영도 다리가 가사에 담겨 있어, 영도 대교가 부산광역시의 중요한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되어야 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참고문헌
박찬호, 『한국 가요사』2(미지북스, 2009)
「김종욱의 부산 가요 이야기: 6·25 전쟁과 부산」(『국제 신문』, 2012. 6. 22)
「김종욱의 부산 가요 이야기: 현인」(『국제 신문』, 2012. 7. 27)
춘하추동 방송(http://blog.daum.net/jc21th)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보았다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2.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데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3. 철의 장막 모진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의 너와 난데 변함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범국민단소불기운동본부 | 굳세어라 금순아(현인) - Daum 카페
「이별의 부산 정거장」 [離別-釜山停車場
6·25 전쟁 당시 피난민의 부산 생활의 애환과 부산을 떠나는 상념을 표현한 대중가요.
구성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3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1, 2절의 화자는 떠나는 피난민이다. 1절은 피난살이의 생활에 대한 회상을 담는다. 2절은 피난살이에서 맺은 인연에 대한 아쉬움을 담는다. 3절은 남은 부산 사람이 화자가 되어 떠나는 피난민에 대한 미련을 노래한다. 유호가 작사하고, 박시춘(朴是春)이 작곡하였으며, 남인수(南仁樹)가 노래하였다.
내용
1절의 가사는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2절의 가사는 “서울 가는 십이 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에 기적이 운다/ 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이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3절의 가사는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유리창에 그려 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두 자 봄소식을 전해 주소서/ 몸부림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 시기 부산 지역 피난살이의 심정을 담은 대표적인 곡이다. 피난살이가 힘들었지만 부산 사람과의 인연이 힘이 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만남과 이별의 공간이었던 부산역을 소재로 한 곡 중 가장 인기를 얻었다. 부산 피난살이를 소재로 한 곡 중 가장 인기 있는 노래로 1950년대 최대의 판매고[5만여 장]를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박찬호, 『한국 가요사』2(미지북스, 2009)
「김종욱의 부산 가요 이야기: 부산역과 그 시절의 노래」(『국제 신문』, 2012. 6. 1)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트롯 한마당 | 이별의 부산 정거장/남인수 - Daum 카페
윤일로 노래 *추억의 영도다리*
이후 대중가요 중 영도다리가 노랫말에 등장하는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그 까닭은 영도대교가 부산근현대사의 상징으로 우뚝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굳세어라 금순아’(현인), ‘함경도 사나이’(손인호), ‘고향의 그림자’(남인수), ‘경상도 아가씨’(박재홍), ‘부산행진곡’(방운아), ‘고달픈 청춘’(안정애), ‘손금 보는 내력’(박재홍), ‘영도다리 비가’(박재홍), ‘끊어진 영도다리’(박재홍), ‘이별의 부산항’(손인호), ‘여수의 부산항구’(손인호), ‘부산은 내 고향’(손인호), ‘추억의 영도다리’(윤일로), ‘눈물의 영도다리’(백야성), ‘울고 넘는 영도다리’(시민철), ‘이별의 영도다리’(이상열), ‘들지 않는 영도다리’(여운), ‘잠들은 영도다리’(이성남), ‘사랑의 영도다리’(진성), ‘다시 걷는 영도교’(최라성), ‘부산사나이’(김진) 등등 부지기수이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영도다리 테마 노래 가운데 가장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추억의 영도다리’(이철수 작사, 이재현 작곡, 윤일로 노래, 1958) 한 편을 음미해보기로 한다.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쳤네/
안개 낀 부산 항구 옛 추억만 새롭구나/
몰아치는 바람결에 발길이 가로 막혀/
영도다리 난간 잡고 나는 울었네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쳤네/
차디찬 부산 항구 조각달이 기우는데/
누굴 찾아 헤매이나 어데로 가야하나/
영도다리 난간 잡고 나는 울었네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쳤네/
눈물진 부산 항구 이슬비만 나리는데/
매디매디 사무치는 그 옛날 과거사가/
오늘 밤도 애처로이 나를 울리네
작중화자는 전쟁시절 피란민으로 부산에 내려와 3년 세월을 보내고 환도 이후 떠난 실향민이다. 그는 눈물의 시절을 추억하면서 영도다리를 먼저 찾아왔다. 피란생활의 쓰라린 추억을 떠올리노라니 당시의 아픔과 절박하던 심정이 왈칵 떠올라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소외와 방황, 절규와 비애로 흠뻑 젖은 채 눈물 짓는 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영도다리는 가장 힘든 전쟁 시기 피란민들의 지치고 피로한 삶을 잠시나마 기대고 의지하는 의탁(依託)의 장소였다. 다리의 상징성은 고통의 이쪽에서 극복의 피안으로 건너가는 장소성(場所性)을 지닌다. 서산대사 휴정스님이 썼다는 ‘회심곡(回心曲)’에는 사람이 살아생전 쌓아야 할 여러 공덕 중 월천공덕(越川功德)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약한 자를 업어서 하천을 건네 주었거나 나룻배, 혹은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강이나 바다를 건너다닐 수 있도록 도와준 공덕을 말한다.
중년의 나침판 | 윤일로(尹一路) - 추억의 영도다리 - Daum 카페
고봉산의 용두산 엘레이지 이야기
1957년 꽃잎이 난분분하던 늦은 봄날. 고봉산(본명 김민우)은 부산 중구 우남공원(현 용두산 공원)을 숨가쁘게 오르고 있었다. 한발 두발 일백구십사계단-.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공원에 오르자 눈앞에 부산 앞바다가 펼쳐졌다. 뿌웅~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뱃고동이 길게 울려 퍼졌다."어떻게 그런 배신을 할 수 있어. 그 동안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 이 노래를 연습했는데, 다른 가수에게 음반 취입을 시키다니…." 고봉산이 연습한 곡은 이재호 작사·작곡의 '울어라 기타줄'이었다. 그런데 지방공연에 매달려 있는 사이 그 곡이 인기 가수 손인호에게 넘어갔다. 고봉산은 울분을 재우며 다짐했다. "작곡을 못해 생긴 일인데 누가 누구를 탓일 것인가. 작곡을 해야 해. 내곡을 만드는거야!"(작사가 정두수의 글 '가요 따라 삼천리'에서 일부 인용)
그날 이후, 고봉산은 피아노와 씨름을 하며 작곡에 몰두한다. 그러면서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항구의 정서를 익히고 노래를 만든다. 당시 부산은 6·25 전란을 겪고 팔도민이 모여들어 삶을 재건하던 도시였다. 가요계에선 부산에서 뜨면 전국에서 뜬다는 말이 돌았다. 1961년 고봉산은 마침내 출세의 길을 여는 히트곡 하나를 발표한다.'무역선 오고 가는 부산항구 제2부두/ 죄 많은 마도로스 항구가 무정더라/ 닻줄을 감으면은 기적이 울고/ 뱃머리 돌리면은 사랑이 운다/ 아아아- 항구의 아가씨/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김진경 작사, 고봉산 작곡·노래 '아메리칸 마도로스' 1절)
뉘라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 것인가. 항구의 사랑과 이별을 절묘하게 녹인 이 노래 덕분에 '부산항구 제2부두'는 두고두고 '추억의 처소'가 되었다. 노래 가사 중 '닻줄을 감으려니 기적이 울고, 뱃머리 돌리려니 사랑이 운다'는 대목은 절창이다. 항구의 아가씨를 울리고 떠나는 마도로스가 차마 무정하지만, 그마저 항구의 일임랴.
2. 추억의 용두산
1927년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6·25때 남하한 고봉산은 악극단 등을 따라다니며 가수의 꿈을 키워 끝내 꿈을 이룬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며 한 여자를 만나 달콤한 사랑에 빠졌고 쓰라린 이별을 맛 봤다. 그리고 다시 찾은 용두산-. 항구를 굽어보며 7년 전의 쓰라린 경험을 반추하던 그는 옛 사랑을 찾듯 용두산을 호명한다.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 그때 악상 한줄이 뇌리에 꽂혔다.1964년 아세아 레코드사 최치수 사장이 용두산을 다룬 가사를 건네자 고봉산은 가슴에 갈무리해둔 곡을 끄집어낸다. 이것이 '용두산 엘레지'(일명 '추억의 용두산')다. 곡이 완성되자 고봉산은 죽어라 연습했다. 용두산에 올라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노래를 불렀고, 뱃고동에 맞춰 소리를 내질렀다.'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 말자/ 한발 올려 맹세하고 두발 디뎌 언약하던/ 한 계단 두 계단 일백구십사 계단에/ 사랑 심어 다져놓은 그 사람은 어디 가고/ 나만 혼자 쓸쓸히도 그 시절 못 잊어/ 아- 못 잊어 운다'.(1절)
노래는 히트했다. 이후 '용두산 엘레지'는 나훈아, 최정자, 하춘화, 주현미 등 내로라는 가수들이 한번쯤 부르는 명곡이 되었다. 용두산에 추억 한올 사랑 한줌이라도 묻은 사람은 이 노래를 더욱 잊지 못한다. 사랑 하다 실연한 청춘들은 아픔을 달래기 위해 부르고, 고향 떠나 삶이 힘겨운 사람들은 추억을 헤집으며 이 노래를 부른다. '용두산 엘레지'는 이처럼 50여 년의 세월을 건너 끝없이 레코딩 되고 있다.
동 천 산 악 회 | 용두산 엘레지 / 고봉산(1964)... - Daum 카페
아메리칸 마도로스
김진경 작사
고봉산 작곡
고봉산 노래
무역선 오고가는 부산 항구 제2부두
죄많은 마도로스 이별이 야속트라
닷줄을 감으면은 기적이 울고
뱃머리 돌리며는 사랑이 운다
아~ 항구에 아가씨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마도로스 아메리카 마도로스
꽃물결 넘실대는 부산 항구 제2부두
술취한 마도로스 항구가 무정트라
깃발을 올리며는 기적이 울고
테프가 끊어지면 사랑이 운다
아~ 항구에 아가씨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마도로스 아메리카 마도로스
이용득의 부산항 이야기
우리는 흔히 선원을 지칭할 때 영어의 '씨맨(Seaman)'이란 말보다는 네덜란드어인 '마도로스(Matroos)'에 더 익숙하고 친밀감을 느낀다. 마도로스는 일본을 거쳐 전해진 대표적인 외래어의 하나로서 우리는 흔히 외항선원을 일컬어 이렇게 불러왔다. 마도로스라는 직업이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바다의 욘사마'로서 그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종가를 쳤던 적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초 해외여행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마도로스는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글로벌 맨'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 선원인력 수출이 본격 시작된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다. 초창기인 1965년의 경우 총 21척의 외국적 선박에 781명의 선원이 해외취업을 하였고, 전성기인 1978년 무렵에는 총 2496척에 무려 4만2514명의 선원이 취업을 해 세계 제1위의 선원국이 되었다. 더구나 해외송출 바람을 타고 해기사의 몸이 금값으로 치솟아 갈수록 우리에게 인식된 마도로스는 의협심이 강한 사내의 표상이자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일꾼이었다. 여기에다 관문을 드나드는 낭만파 멋쟁이의 대명사로까지 군림을 하다 보니 그 당시 마도로스는 뭇 여성들에게는 한 번쯤 순정을 보낼 만한 대상이기도 했다. 숱한 사내들에게도 하얀 제복과 금태 선명한 캡틴 모자는 누구나 한 번쯤 쓰고 싶은 선망의 물품이었다.
그래서일까?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마치 그 시대를 반영이나 하듯 자그마치 100여 곡이 넘는 마도로스 노래가 만들어졌다. 그러다보니 당시 내로라하는 남녀 가수 중 한 번쯤 마도로스 노래를 불러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는 60년대 초 선원송출이 우리나라 경제개발계획에 일조를 하면서 부산항을 떠나야하는 이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정서와 맞물려 있었다.
1962년 백야성의 대표곡 '잘 있거라 부산항'은 바로 이러한 부산항의 분위기를 담아 인기가도를 달렸다. 1963년에는 남일해의'첫사랑 마도로스', 이듬해인 1964년에는 고봉산의 '아메리칸 마도로스'가 연이어 그해의 히트곡이 됨으로써 부산항은 그야말로 마도로스의 정든 항구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여기에 1964년에 개봉된 영화 '마도로스 박'은 부산에서 촬영된 액션물로서 관심을 끌었고, 이 영화의 주제가는 선창가 술집에서 심심찮게 불리어지던 애창곡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던 마도로스는 오늘날에 와서는 마치 빛 바랜 유물이 된 것처럼 우리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흔히 '마도로스 생활은 창살없는 감옥과 같다'고 말한다. 가족과 떨어져 정처없이 떠돌며 거친 파도와 싸우는 동안 심신은 외로움과 그리움에 지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닻(Anchor)은해저에 박혀 선박의 안전을 유지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일을 하면서 이들은 '앵커 스피릿(Anchor spirit)'으로 가족과 조국을 위해 버틴다고 한다. 부산항은 해풍에 그을린 마도로스들의 이야기가 녹아있는 해항도시다.
그래서 누군가 부산항 어딘가에 마도로스 카페라도 하나 열기를 바라본다. 또 그 카페의 LP판에서 추억의 마도로스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너무 낭만적인가?
부산세관박물관장
7080 통기타 코러스 ( Live Concert ) | 아메리칸 마도로스 / 백야성 & 고봉산 ( 악보 ) - Daum 카페
2022-01-27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