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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33코스
무안황토갯벌랜드 입구-유투마을-가입마을-마산마을-삽다리마을 입구-
성재마을-용정골마을-수양저수지-두동마을-석북마을-수양촌마을-상수장마을
20230111
1.아름다운 함해만 무안해안길
서해랑길 32코스를 마치고서 곧바로 33코스를 출발한다. 33코스를 개략적으로 살펴본다. 해제면 유월리 무안황토갯벌랜드 입구에서 출발하여 유투마을을 거쳐 현경면 가입리로 넘어간다. 현경면 가입리의 가입마을, 마산리의 마산마을과 신기(새터)마을, 약천동마을, 용정리의 성재마을과 용정골마을, 수양리의 두동마을과 석북마을, 수양촌마을을 거쳐 현경면 송정리 상수장마을에서 33코스는 끝난다. 해제면에서 시작하여 주로 현경면 지역의 함해만을 돌아서 탄도만이 가까이 있는 현경면 송정리 상수장마을이 33코스의 종점이다. 종점인 현경면 송정리 상수장마을은 서해랑길 23코스 종점인 용정리 봉오재마을과 가까이 있다.
해제면 유월리 무안 황토갯벌랜드 앞에서 국도77호선 현해로 수암교차로로 나왔다. 유월리 물암마을 방향으로 현해로를 따라가면서 오른쪽 방향 서쪽을 바라보면 탄도만이 보인다. 서해랑길 24코스 때 물암마을을 거쳐 탄도만으로 내려와 해안을 걸었던 그 탄도만 해안이 현해로 서쪽에 펼쳐져 있고, 멀리 24코스의 종점인 해제면 창매리 매당마을이 있는 중매산(매령산)이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새로운 곳을 가면서 이미 체험한 곳을 가까이서 확인하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24코스를 걷던 그 날의 추억이 새 길을 걷는 기쁨 위에서 출렁거린다. 미지의 새로운 길에서, 걸었던 길도 새로운 길이 되어 길손의 가슴을 벅차게 한다. 걷는 길은 모두 새로운 길로 빛나야 한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윤동주의 '새로운 길' 전문) 길손의 서해랑길 탐방은 새로운 길인 듯 낯익은 길인 듯 계속 새롭게 이어질 것이다.
33코스 탐방길은 탄도만과 함해만을 가르는 무안군 해제반도 현해로를 따라가다가 동쪽 함해만 해안으로 나가 무안 동쪽, 함해만 서쪽 해안을 돌아나간다. 서해랑길 24코스 때 여명 속에 걸었던 홀통해안이 탄도만 남쪽에서 손짓한다. 홀통해안을 거쳐 마산리 홀통교차로로 나와 국도77호선 현해로를 따라 북쪽 가입리 가입마을로 걸어오며 탄도만과 함해만을 양쪽으로 살피던 그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가입마을 입구에서 동쪽 함해만 너머로 솟아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버라보며 감격하여 흥분한 일이 오늘 아침의 일 같다. 무안군 현경면 북쪽과 해제면 남쪽을 잇는 가느다란 몸통이 탄도만과 함해만을 가르며 해제반도 북쪽으로 벋어간다. 그 몸통의 서쪽 탄도만 해안을 24코스에서 걸었는데, 33코스에서는 그 몸통의 동쪽 함해만 해안을 걷는다. 무안 현경면과 해제면 지형이 이제서야 머리 속에서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서해랑길 33코스에서 조망의 즐거움과 지리적 위치 확인의 기쁨에 감격하게 한 곳은 마산마을에서 함해만으로 돌아나가는 언덕이다. 이 언덕에서는 함해만과 탄도만을 가르는 국도77호선 현해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산리의 간척지 들녘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현해로 건너 홀통해안과 그 맞은편 창매리의 중매산(매령산)이 가까이서 호응하는 모습이 정겹다.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가입마을에서 함해만 해안으로 나와 지금까지 걸어온 해안길과 32코스에서 걸었던 삼복산 산줄기와 신만마을 앞 이성산이 새벽 어둠과 아침빛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용정골마을 앞 내룡들 언덕에서의 풍경 조망이 단연 손꼽힌다. 풍경은 바다로 활짝 열려 있다. 바다로 돌출한 달머리(月頭) 곶(串)과 두동 곶(串)이 남북으로 갈라져 가까이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불편한 만남을 소닥거린다. 달머리와 두동을 간편하게 이어주려는 듯 소당섬과 승도(升島)가 두 곶(串)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함해만은 두 곶(串)을 무지개 모양으로 길게 돌아서 이어준다. 언덕의 들(野), 해안, 곶(串), 섬(島)이 어우러진 함해만 무안군 풍경의 아름다움에 길손의 호흡이 멎는다. 황홀하다. 한 곳을 더 추가하라면 두동마을 뒤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경, 함해만의 동서 해안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이정목을 32코스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항에서 송계산으로 오르면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이정목은 33코스 끝지점까지도 이어진다. 이정목은 거리와 위치를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이정목은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탐방객은 이 이정목이 '문화생태탐방로'의 이정목이면서 '이야기가 있는' 이정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 곳에 이 지역의 문화와 생태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아쉬움이 이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솟아올랐다. 탐방객은 이 지역의 위치와 문화 이야기를 모르는 채 스쳐간다. 그런데 이정목과 문화생태 이야기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면 탐방객은 발걸음을 멈추고 안내판을 통해 이 지역을 조금이라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역의 문화관광을 홍보하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탐방에서 탐방 위치 확인의 기준이 된 곳이 여렷 있다. 그 중에서도 봉대산이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한다고 길손은 생각하였다. 23코스를 봉대산 아래 봉대마을이라고도 불리는 봉오재마을 입구에서 마쳤다. 24코스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봉대산을 돌아나갔다. 그래서 봉대산의 역할을 분명히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 33코스를 탐방하면서 봉대산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경면 마산리에서부터 봉대산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용정리로 들어오는 길목인 유월리 삽다리마을 입구에서 봉대산이 가까이 보이며 위치를 확인시켜 주었다. 용정리 성재마을 위에서 봉대산이 이 지역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산봉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용정리를 돌아서 수양촌들녘으로 나와서 봉대산이 이곳의 요충지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봉대산은 현경면 용정리와 수양리, 해제면 유월리에 둘러싸여서 해제반도 길목을 지키는 수호자이다. 그래서 봉대산을 넘어가는 봉오재가 고갯길로서 중요함도 알게 되었다.
이번 탐방에서도 어김없이 멀구슬나무가 해안지역의 겨울 풍경을 이루었다. 해안길에서, 해안의 언덕에서, 마을에서 멀구슬나무가 노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서 빛난다. 이 풍경은 이 지역 겨울 풍경의 명품이라고 생각한다. 봄날 남파랑길 고흥 지역에서 멀구슬나무가 연보랏빛 꽃을 피워 은은한 향기를 바람에 날리는 풍경에 감탄했다. 그때 멀구슬나무를 처음으로 알았다. 가을날 서해랑길 무안 지역을 탐방하면서 푸른 멀구슬나무 열매를 보았다. 싱싱한 푸른 열매가 청춘처럼 활력이 있었다. 아, 멀구슬이 이런 거였구나. 꽃과 푸른 열매의 멀구슬나무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겨울날 무안 함해만 해안에서 만난 노란 열매의 멀구슬나무는 노년의 모습처럼 포근하다. 삶의 노년은 포근하고 평화로워야 한다. 멀구슬나무 노란 열매들이 평화의 새처럼 날개짓한다. 가슴에 가득히 평화의 물결이 흐른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0.6km
전체 탐방 시간 : 5시간 16분
서해랑길 32코스를 마치고 곧바로 33코스 시작점 표지 앞에서 33코스 탐방을 출발하여 만송로를 따라간다.
대형 비상급수차가 서해랑길 무안 32·33 코스 안내도와 무안갯벌생태센터 표석 앞에 주차되어 있다. 오른쪽 가로등 기둥에 서해랑길 33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왼쪽 길은 용산마을 가는 만송로, 오른쪽은 황토갯벌길이다.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무안황토갯벌랜드 앞 만송로를 따라 수암교차로 방향으로 나간다.
"유월리(柳月里)는 니성산을 주산으로 각 마을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해제면소재지로부터 현경면 방면으로 2㎞ 정도 떨어져 있다. 남으로 현경-해제를 잇는 24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본래 유월리는 조선시대에는 함평현에 속했다가 조선조 말에는 목포부 해제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이후 1914년 오류동, 물암리, 월암리, 어은동을 합하여 무안군 해제면에 편입되었다. 오류와 월암의 이름을 따서 유월리라 불렀으며 지금은 오류, 용산, 물암, 언창, 월암, 유투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유월리는 1980년대만 하여도 왕족인 전주 이씨 영풍군 후손 50여세대가 거주하였다. 영풍군 후손은 전국적으로 107세대인데 이중 50여 세대가 이곳에 거주함으로써 가장 많은 세대가 거주한 곳이 되었다. 주산인 니성산에는 영풍군의 단과 배위 군부인 순천박씨의 묘가 있으니 전남에서는 유일하게 왕자의 단과 군부인 묘소가 있는 곳이다." - 무안문화원
왼쪽으로 꺾어 국도77호선 현해로를 따라간다.
"유투정(柳投井)은 유월6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유투(柳投) 외 신촌, 송촌, 잿등 마을로 이루어졌다. 유투정은 유투로도 불려지는데 지명의 유래가 확실치 않다. 주민들도 유투정의 유래를 확실히 모르고 있는데 마을유래지와 주민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두 가지 유래가 전해 온다. 예전에 마을에는 인근에 널리 알려진 샘이 있었다. 용산이나 물암, 오류촌 주민들이 사용했던 샘이다. 샘 옆에는 아름드리가 넘는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샘에 떨어져 있는 버드나무 잎의 모습이 좋아 유투정(柳投井)이라 이름 지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마을 서편에 앵소유지(鶯巢柳枝)라는 묘지가 있는데 꾀꼬리들이 버드나무 가지를 물고 오다 이 마을에 떨어뜨려 버드나무가 무성해졌다 하여 유투정이라 불렀다는 설이 그것이다. 하여튼 이 마을은 버드나무와 풍수적 지형인 앵소유지(鶯巢柳枝)와 관계가 있다. 앵소유지(鶯巢柳枝)는 꾀꾀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집을 짓는 형국을 말한다." - 무안문화원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지역이 펼쳐져 있다.
서해랑길 24코스에서 탐방한 탄도만 해안이 길 건너편에 보인다. 왼쪽 맨 뒤에 해제면 창매리 매령산(중매산)이 가늠된다.
현해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농로로 진입한다. 도로 앞 왼쪽에 보이는 곳이 해제면 유월리 물암마을회관으로 서해랑길 24코스 탐방길이다. 24코스는 앞 물암마을회관 앞 현해로를 횡단하여 탄도만 해안으로 나간다.
앞의 언덕을 넘어 해안으로 내려간다. 앞의 언덕에서 오른쪽 길은 현경면 가입리 가입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해제면 유월리 물암마을을 거쳐 현경면 가입리 가입마을에 이른다.
해제면 유월리 새원들 농로를 따라 함해만 해안으로 내려간다.
함해만의 무안군 현경면 가입리 해안이 동북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해랑길은 함해만 가입리 해안에서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가 가입마을로 이어간다.
왼쪽에 무안황토갯벌랜드, 왼쪽 뒤에 이성산, 오른쪽 뒤에 삼복산, 범바위산, 망대봉, 송계산 등이 가늠된다. 오른쪽 끝에 도리포와 칠산대교를 어림한다. 함해만의 무안군 해제반도 북서쪽 해안이 펼쳐져 있다.
해제면 유월리 지역이 함해만을 북쪽으로 에워싸고 있다. 오른쪽 뒤에 이성산, 오른쪽 앞에 무안황토갯벌랜드가 있다.
앞 이정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언덕으로 올라간다.
무안군 현경면 가입리 24-1 지역으로 서해랑길 33코스 시작점에서 2km 지점이다.
"가입리는 현경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해제면 유월리와 경계에 있으며 서로는 탄도만, 동으로는 함해만을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20세기 들어서야 목포부 다경면의 지역으로 가입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가입과 너물 두 마을이 있다. 가입마을은 상주 주씨의 집성촌이며 너물은 2000년에 가입에서 분리된 마을로 진주 강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1996년에 폐교된 수암국민학교가 있다.
가입이라는 지명은 더드리에서 비롯된다. 이 지역은 현경면에서 현경로를 따라 봉오재를 지나 해제면과 경계 지점 직전에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만날 수 있다. 지명의 유래는 조금 더 들어가면 볼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더드리를 한자로 표기 한 것이 지금의 가입리이다. 지금도 주민들은 더드리라는 예전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 무안문화원
현경면 가입리는 해제반도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동쪽은 함해만, 서쪽은 탄도만에 접하고 있다. 가입리 북쪽 함해만 해안이다.
언덕을 넘어 가입마을을 통과하여 가입마을 앞쪽 길로 내려왔다. 방조제가 길게 이어져 있고 습지가 조성되어 있다.
중앙 뒤 언덕을 넘어 가입마을을 통과하여 나왔다. 가입마을 맨 왼쪽 산에 폐교한 수암국민학교 건물이 보인다. 수암국민학교는 1996년 폐교하였으며 현재 외지인이 폐교 부지를 불하 받아 대안학교를 개교한다고 한다. 서해랑길 24코스에서 습지 건너편 왼쪽에서 함해만의 멋진 일출을 감상하고 해제면 유월리 물암마을로 향하면서 폐교를 바라보았었다. 그날 아침이 선명히 떠오른다.
"가입마을은 가입1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무안에서는 유일하게 상주 주씨 집성촌이다. 가입이라는 지명은 더드리에서 비롯된다. 이 마을은 현경면에서 현경로를 따라 봉오재를 지나 해제면과 경계 지점 직전에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만날 수 있다. 지명의 유래는 조금 더 들어가면 마을을 볼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더드리를 한자로 표기 한 것이 지금의 가입리이다. 지금도 주민들은 더드리라는 예전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마을의 형성 연대는 18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마을은 뒷산이라 부르는 산을 주산으로 하고 오른쪽에 안산, 왼쪽에 앞 잔등을 두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함해만이 펼쳐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마을에 다경면사무소가 있었다. 또한 이 마을 출신 주영욱(자-맹렬, 호-성헌. 1886-1922)이 다경면 초대 면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면사무소는 마을회관 아래에 있었다. 다경면이 현경면으로 바꿔질 때 더드리도 가입리로 마을이름이 바꿔졌다." - 무안문화원
서해랑길은 함해만 가입리 제방길을 따라 이어간다.
가입마을에서 방조제로 나와 방조제를 따라 이어왔다. 가입리 지역은 함해만 동북쪽으로 돌출한 곶(串)이다. 가입마을 맨 왼쪽 산 위에 폐교한 수암국민학교 건물이 가늠된다.
양식장은 왕새우양식장인 듯. 왼쪽 맨 뒤는 현해로의 홀통교차로인 듯, 24코스에서 홀통해안을 거쳐 마산리 홀통교차로로 나와 현해로를 따라오다가 가입마을로 진행하였었다. 양식장 건물 뒤쪽 도로가 현해로이며 그 해안이 탄도만 해안이다.
마산리 함해만 제방 옆에 양식장이 조성되어 있다. 서해랑길은 함해만 제방길을 이어간다.
현경면 가입리 함해만 해안 제방길을 따라 건너편의 마산리 마산마을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의 마산리 갯논들과 진안들 농로를 따라 마산마을을 올라가 왼쪽 위 언덕으로 이어간다.
마산리 진안들을 따라 마산마을 입구로 들어왔다. 함평 이씨 문중의 효자비와 효열비 3기가 세워져 있다.
"현경면 馬山里는 현경면소재지에서 해제 쪽으로 9㎞정도 떨어진 현경-해제 간 일반 국도 옆에 위치하고 있다. 마산마을은 조선시대 목장이 있었던 마을로 추정되나 기록이나 구술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단지 마을 주변에 말과 관련된 지명이 많아 목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마산리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을 보면 조선 중기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다경면 外馬山리, 內馬山리, 신기리로 나온다. 이어 목포부 다경면으로 바뀌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무안군 다경면 마산리와 신기동으로 나온다. 1917년과 198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현경면 마산리 신기동 마산으로 나오는데 현재의 행정 구역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신기동을 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된 것이며 마산과 신기,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광산 김씨와 함평 이씨가 살고 있는 마산마을에 1개의 정열각을 포함하여 효열비, 공덕비 등이 22개나 세워져 있다.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신기 마을에도 1개의 제각과 2기의 비가 서 있다." - 무안문화원
오른쪽 위 함해만 마산리방조제에서 마산리 갯논들과 바로 아래 진안들을 걸어와 마산마을 위 언덕길로 올라왔다.
현해로가 길게 이어져 있고 그 뒤쪽 해안은 탄도만이다.왼쪽 건너편 현경면 오류리 홀통과 맞은편 해제면 창매리 매령산(중매산)이 분명히 확인된다. 24코스는 앞에 보이는 홀통해안을 빠져나와 현해로 홀통교차로에서 현해로를 따라가다가 가입리마을로 진입하여 함해만 방향으로 진행하였다.
오른쪽 현경면 가입리 해안에서 왼쪽 마산리방조제로 이어지는 함해만 해안이 한눈에 조망된다. 해제반도로 길게 벋어나가는 현경면 마산리와 가입리 몸통이 가는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며 함해만과 탄도만을 가른다. 왼쪽 건너편은 탄도만이다.
현경면 가입리 함해만 해안이 건너편에 펼쳐져 있고 중앙 뒤쪽에 이성산, 그 오른쪽에 삼복산이 가늠된다.
겨울의 멀구슬나무가 그윽하다. 건너편은 함해만 가입리 해안이고 오른쪽 뒤에 해제면 만풍리 삼복산이 가늠된다.
마산리 해안에서 건너편 용정리 해안으로 함해만이 이어지고 있다. 마산리 '하루를봄' 민박집과 마산마을을 거쳐간다.
일본어 '하루'는 봄이라고 한다. '하루를봄'을 중의적으로 이해하면 더 흥미롭다. 하루를 본다. 봄을 본다.
건너편은 현경면 가입리 함해만 해안이다. 가입리 지역이 함해만으로 돌출한 곶(串) 모양임이 확인된다.
마산마을 뒤의 비룡산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빙 돌아서 마산마을을 거쳐 해안에서 올라왔다.
"마산마을은 마산1리에 속하는 마을로 큰마을과 너먼골, 배나무정, 진등, 걸안지로 이루어졌다. 馬山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인 비룡산에서 마을을 보면 마을을 둘러싼 안산의 지형이 마치 말의 형국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자리 잡은 곳은 말안장과 같은 지세로 안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이른바 龍馬地勢의 자리다. 마을을 둘러싼 지명에는 말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현경-해제 간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즉 이목정과 걸안지 사이에 말을 방목해서 길렀다는 放馬골(평)이 있다. 또한 마을의 동쪽 신기마을과의 사이에는 말에게 먹일 풀을 길렀던 草場골(평)이 있다. 또한 초장골 앞 이 마을 광산 김씨 입향조의 무덤이 있는 곳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三驛洞이라 칭한다. 해서 이곳에 목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 조선시대 함평현 다경면 소속이어서 함평문화원에 문의했으나 알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 무안문화원
마산리 신기마을로 가는 언덕길에서 뒤돌아보니 새목개라고 불리는 함해만 해안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아가고 있다.
"신기마을은 마산2리에 속하는 마을로 처음 들어온 사람이 새롭게 터를 잡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기마을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신기, 왼쪽에 약천동으로 이루어졌다. 약천동은 샘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가운데 있는 이 샘은 67, 68년도 대한해에도 마르지 않고 물이 넘쳐났던 샘이다. 약천이라 이름 붙인 것은 지나가던 스님이 이 물맛을 보고는 ‘장님도 눈을 뜰 만큼 약효를 지닌 물이다’ 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주민들이 약샘이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상수도가 발달된 지금도 주민들은 이 샘을 관리하면서 보호하고 있다.
신기마을은 마산이라 부르는 뒷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옆으로는 작은 삼역동이라 부르는 계란산을 두고 있으며 앞으로는 덕애산이라고도 부르는 덕유산과 그 너머 함해만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느껴지는 기운이 부드러운 것은 주민들의 말처럼 세 곳의 명당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인 듯싶다. 뒷산에는 반구명당(蟠狗-개가 웅크리고 있는 형국의 명당)이 있으며 광산 김씨 입향조의 묘가 있는 북쪽 부리의 삼역동 명당과 마을 입구의 수문새 잔등의 명당이 그것이다. 반구명당에는 나주 나씨가 이미 묘 자리를 잡고 있으며 주변이 마치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주민들은 뒷산을 암캐골이라 하고 맞은편의 용정 뒷산을 수캐골이라 부른다. 암캐골에는 옹달샘이 있는데 사시사철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바다 건너 용정마을 뒤에 있는 수캐골은 바다를 향해 길쭉이 나와 있는 지형이다. 삼역동 앞의 바다를 새목개라고도 한다." - 무안문화원
마산리 신기마을 맞은편 무애산 자락 들녘길을 따라 건너편 용정리를 향해 간다. 오른쪽은 오류리 검무산, 중앙의 낮은 산은 작은 봉대산, 왼쪽의 산이 봉대산, 서해랑길 33코스는 함해만을 돌아 용정리 봉대산 뒤쪽 탄도만 앞까지 이어간다.
현경면 마산리 687 지역으로 33코스 시점 8.3km, 종점 11.6km 지점이다. 왼쪽에 보이는 마을은 마산리 약천동마을이다.
오른쪽 위 무애산 자락길을 걸어 내려와 이곳으로 건너왔다. 마산 자락 왼쪽은 약천동마을, 오른쪽은 마산마을이다.
양배추밭들이 펼쳐져 있는 언덕을 넘어 국도 24호선 송마길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들녘으로 나간다. 맞은편 왼쪽에 봉대산, 오른쪽에 작은봉대산(옹산)이 가늠된다. 옹산이라 이르는 산이 봉대산인 것 같기도 하고 작은봉대산인 듯도 하다.
국도 24호선 송마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마산리 들녘으로 나왔다. 오른쪽에 보이는 산은 검무산, 맞은편에 보이는 마을은 현경면 오류리 삽다리마을이라 가늠한다. 24코스 탐방 때 새벽의 어둠 속에서 오류마을을 걸었기에 분명한 지리 감각이 없다. 삽다리마을 뒤쪽 오류마을을 거쳐 홀통해안으로 이어갔을 것이라 추정한다.
"삽다리는 오류5리에 속한 마을로 조선시대 봉화를 올렸던 옹산(작은봉대산)을 마주하고 있다. 삽다리라는 지명은 沙橋 즉 모래다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마을 앞의 지형이 만(灣)의 형태이다. 해서 현경에서 저승재를 넘어 해제 방향으로 갈 때는 마을 앞까지 들어온 바닷길을 돌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모랫길을 가로질러 가게 되는데 그때 붙여진 이름이 사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삽으로 모래를 모아 길을 내서 다녔기 때문에 삽다리라 했다 한다.
마을의 주산인 검무산은 해발 100미터가 조금 못 되는 높이의 산이다. 제일 높은 곳은 무재봉이라 하며 그곳에서 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아이를 못 낳는 집에서는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기원을,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주민들이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劍舞山은 예로부터 이 산의 기운을 받은 곳에서는 장군이 날 것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자세히 보면 장군이 칼을 들고 웃는 형국이라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산의 지형이 거미가 집을 지을 때, 가운데에 거미가 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 하여 거무산(거미산)이라고 했다 한다. 이 거무산이 한자어 표기에 의해 검무산으로 바뀌어 졌다는 것이다." - 무안문화원
현경면 용정리 성재들을 지나가고 있다. 멀구슬나무 아래에 송암거사 김공공적비가 흉물스럽게 세워져 있고, 그 뒤쪽에 호남아스콘산업이 있으며 오른쪽 뒤에 현경면 오류리 검무산과 삽다리마을이 보인다.
용정리 성재들을 거쳐 국도24호선 송마로 용정교 아래를 통과하여 성재길을 따라 올라왔다. 왼쪽에 봉대산이 있다. 서해랑길 33코스 종점은 용정리 봉대산 뒤쪽 탄도만 해안 남쪽의 송정리 상수장마을이다.
성재길을 따라 올라간다. 용정4리 성재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성재동은 용정4리에 속하는 마을로 신촌마을과 동쪽으로 마주보며 자리하고 있다. 성재동이란 지명의 유래는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땅이 기름지고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해서 成才洞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더 이상의 내용은 잘 모르고 있었다. 문헌으로 본 지명의 변천은 1789년의 호구총수나 1912년의 자료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17년의 자료에 비로소 현경면 용정리 성재동으로 나오며 이후 계속 같은 이름으로 표기된다. 일제강점기 초에 이 마을 주민들은 아동들의 교육을 위해 돈을 갹출해서 사립학교를 세웠다. 이후 현경북초등학교가 세워지면서 점차 쇠퇴해졌는데 얼마 전까지 학교터로 불렸던 곳이 주민들의 공동명의로 등기되어 있기도 하였다. 주민들 중 한 사람이 당시 학교에서 사용했던 종을 보관하고 있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종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맑고 웅장한 소리를 간직하고 있으며 종안에 글씨가 쓰여 있었으나 희미하여 확인할 수 없었다. 주민들은 종을 닦아 마을회관에 걸어두고 공동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마을은 봉화를 올렸던 봉산과 병사들이 주둔했었다는 병영산(비행기산으로 부르기도 함) 그리고 군량미를 저장해 두었다는 목골산에 둘러 싸여 있다. 마을의 지형이 예전에 산림이 우거져 있을 때는 조리형으로 비교적 아늑해 보였을 터이다." - 무안문화원
마을회관 앞 성재동 마을 유래와 회관 건립비가 세워져 있다. 그 비문 내용을 옮겨 적는다.
본 마을의 유래는 서기 1700년경 10여 호의 외소한 마을로 시작하여 점점 늘어나 20여 호가 됐을 때는 가칭 사립학교라는 학당을 세워 인근 마을 주민의 문맹 퇴치에 기여했고, 원래 주민은 성격이 온순하고 근검절약의 표본으로 풍요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부촌으로 명성이 나있어 지나가는 길손들이 이 마을에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집은 정부의 지원금과 출향인사들의 투철한 애향심과 마을 주민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이루어졌다. 이 고마운 뜻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이 비에 새겨 드립니다.
서기 2004년 12월 16일 세움
마을회관 앞 정자에서 약 25분 정도 이른 점심을 즐기고 출발한다. 왼쪽에 봉대산, 오른쪽에 작은봉대산(옹산)이 보인다.
성재마을 뒤 고개를 넘어 용정골마을로 이어간다. 고개에는 김해 김씨 삼현파 용정김문 납골당이 조성되어 있다.
'김해 김씨 삼현파 용정 김문' 정자각에 '김해 김씨 삼현파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을 옮겨온다.
우리 김해 김씨는 시조이신 수로대왕께서 금관가야국을 세워 대대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시고 치국안민에 노력하셨으며 13대 양왕 대에 이르러 국력이 쇠약해지자 신라에 귀순하셨다. 그분의 후손에서 민족불멸의 명장 김유신 장군이 탄생하시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시고 청사에 그 업적을 영원히 남기셨다. 우리 삼현파는 파조이신 관자 조상께서 고려조에서 판서 벼슬을 하시어 판서공파라 하였는데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 세 분의 걸출한 어진 학자가 배출되시어 삼현파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씨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으며 후손들을 위하여 조상들의 묘역을 확장 정비하여 후손들이 벌초라도 않고 조상님들을 모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진 10대조 호 둔암 자 자현 조상께서는 400년 전에 용정에 정착하시어 그분의 후손들이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한때는 50여 호가 살았으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가 되면서 각지로 흩어져 살고 있으며 용정에는 20여 호가 살고 있다. 후손들이여! 부디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서 성공하길 빌며 사회 각 분야에서 좋은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원한다.
2012년 임진년 4월 5일 호 둔암 자 자현 10대손 옥율 글씀(수로 71대)
오른쪽에 김해 김씨 삼현파 여러 비석들과 납골당이 조성되어 있고, 성재동마을이 아래에, 왼쪽 뒤에 작은봉대산(옹산)이 있다.
성재동마을 고개를 넘어오면 왼쪽으로 용정리 내룡마을이 보이고, 그 뒤쪽에 월두마을이 있다. 오른쪽 용정마을로 이어간다.
"용정리(龍井里)는 현경면 소재지에서 해제 쪽으로 4㎞ 정도 떨어져 있으며 남으로는 봉대산을, 북으로는 함해만의 바다를 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함평현 다경면에 속했다가 목포부 다경면의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성재동, 월두리, 신촌, 수양촌 일부를 합해 용정리라 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시켰다. 한 마을 앞에 샘이 있어 용샘 또는 용정골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里의 지명이 되었다. 용정리는 바다로 둘러 싸여 있는 반도형으로 농경지는 골짜기를 따라 펼쳐지고 있으며 새터, 용정골, 월두, 성재동, 봉대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무안문화원
왼쪽에 용정골 마을회관 건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비문을 옮겨 적는다.
어머님의 품처럼 아늑하고 우물물이 좋기로 이름난 이곳에 400여 년 전 김해 김씨 삼현파의 파조인 김관의 13세손(자현) 호 둔암이라는 분이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살아오고 있으며 현재 마을주민은 김씨를 중심으로 유씨, 양씨, 편씨, 임씨, 전씨, 서씨가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우리나라 전형적인 농어촌마을이며 마을 형태가 용의 형상을 하였다 하여 龍井으로 불렀다는 얘기가 있고 또 용이 사는 샘이 있으므로 이와 같이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존 마을회관을 폐쇄하고 주민 성금 및 도·군 보조금을 얻어 2016년 12월 18일 준공식을 했으며 후면에 성금과 방명록을 새기며 갸륵한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용정2리 주민일동
서해랑길은 용정마을 앞 봉월로를 따라 내룡마을 방향으로 이어가다가 언덕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내룡들로 나간다.
"용정마을은 현경면 소재지에서 해제 쪽으로 7㎞쯤 가면 만나는 토성목(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운하를 만들려고 했던 곳)을 지나 봉대산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수양리를 거쳐 용정리가 시작된다. 새터를 지나 양정교회 너머에 있는 용정마을은 현경면 용정2리에 해당되며 내룡마을을 안고 있다. 마을의 주산인 비행산이 마을을 감싸고 내룡을 거쳐 월두로 뻗어내렸다.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도산맷갓으로 부르는 무안 박씨들의 산이다. 그 산 밑에 용샘이 있다. 이른바 서해에서 승천하려고 하는 용이 잠시 마을 앞의 샘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 형국이다. 해서 샘 이름이 용정, 또는 용샘이라 하며 마을 이름도 여기서 비롯된다. 도산맷갓은 도산마을의 무안 박씨들이 소유한 산을 말하며 비행산은 산 정상에 헬기장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무안문화원
용정마을에서 내룡들로 나왔다. 왼쪽의 내룡마을과 중앙 뒤 월두마을이 가늠된다. 오른쪽 끝에 월두선착장이 보인다.
"달머리[月頭]는 현경면 용정3리에 있는 마을이다. 반도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이 마을은 현경에서 해제로 가는 4㎞ 지점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간다. 마을의 지형이 동서남북 어디에서 보아도 달 모양이라 달머리라 하였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서정적이고 맛깔 나는 우리말은 사라지고 한자 지명인 月頭라 쓰이고 있다.
월두마을은 달과 별자리에 관련된 지명이 많다. 큰마을(뜬달머리), 작은마을(진달머리), 조개미(조광리), 가라골(가락동), 도당섬(소당섬, 조왕등)이 있고, 달을 상징하는 계수나무와 마을의 수호목인 곰솔당산나무는 마을이 형성되기 전부터 이미 있었던 나무들이다. 또한 동쪽에 용진개, 서쪽에 숫개라는 개가 있어 물이 썰물일 때는 주민들이 개로 나가 수산물을 잡아 연명하였다(개바라질 하였다). 주민들은 두 개의 개를 연결하기 위하여 7월 7석날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일 년에 한 차례씩 연결을 시도하였으나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용정리 임 1-1번지의 대섬(죽도, 승도)과 똥섬, 도당섬(소당섬, 조광등) 큰마을 앞의 작은섬(소도)과 큰섬(대도)은 각각 초저녁 샛별, 새벽 샛별 위치를 하고 바다에서 생활했던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 무안문화원
왼쪽에 용정리 월두마을과 중앙에 월두선착장, 오른쪽에 수양리 두동, 중앙에 소당섬, 그 오른쪽에 승도가 보인다.
왼쪽 끝에 용정리 월두선착장, 그 앞에 소당섬과 승도(오른쪽), 맞은편 중앙에 돌출한 언덕에 수양리 두동마을이 보인다. 월두마을 주민들은 마을 앞의 바다를 보고 해제의 도리포 안이라는 뜻으로 ‘도래안’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양배추밭이 펼쳐져 있다. 서해랑길은 용정마을 앞 들녘을 돌아서 중앙의 언덕을 넘어 용정리에서 수양리로 건너간다.
용정마을 앞 농로를 따라 언덕을 넘어 용정리에서 수양리로 건너간다.
마을의 주산인 비행산이 용정마을을 감싸고 오른쪽 끝의 내룡마을로 뻗어내리고 있다. 비행산은 산 정상에 헬기장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용정리에서 수양리로 넘어왔다. 서해랑길은 중앙 뒤 수양저수지 앞 팔방길로 나가서 팔방길을 따라 두동마을 입구로 이어간다.
"수양리(垂楊里)는 현경면 소재지에서 해제면 쪽으로 4㎞ 가량 떨어져 있다. 해제 쪽으로 현경로를 타고 가다 봉대산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만날 수 있는 지역으로 세 개 마을 전부 2003년 팔방미인 정보화 마을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은 갯벌체험과 농산물 수확 체험장 그리고 행복마을로 널리 알려졌다. 봉대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함해만이 펼쳐져 있고 지형상 간척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농경지가 많다. 본래 목포부 다경면의 지역으로 1914년 석북리, 두무동, 용정동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시켰다. 수양촌, 석북, 두동 등 세 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 무안문화원
현경면 수양리 해안이 돌아나가고 중앙 언덕에 수양리 두동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서해랑길은 전봇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팔방길로 나간 뒤 두동마을로 이어간다.
팔방길로 나왔다. 팔방길 오른쪽 서쪽으로 수양저수지가 있다.
팔방길에서 왼쪽 동북쪽 맞은편으로 용정리 월두마을과 월두선착장이 보인다.
팔방길에서 오른쪽 석북길을 따라가면 석북마을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왼쪽 팔방길을 따라가다가 두동마을을 거쳐 빙 돌아서 석북마을로 내려온다. 석북마을 버스정류소와 오른쪽에 파평 윤씨 세장산碑가 세워져 있다.
왜 팔방길일까? 수양리의 세 마을인 두동마을, 석북마을, 수양촌마을이 모두 2003년 팔방미인 정보화 마을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로명을 팔방길이라 명명한 것 같다. 오른쪽에 죽산 안씨 세장산碑가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은 팔방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두동마을을 거쳐 중앙 맨 뒤의 오른쪽 길을 따라 석북마을로 이어진다.
중앙 뒤 두동마을을 돌아서 오른쪽으로 어어진다.
중앙 뒤 비행산 아래 용정마을에서 해안을 따라와 이곳으로 이어지는 길을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탐방로'라고 명명하고 있다. 서해랑길도 이 길을 따라오는 게 나을 듯. 왼쪽 뒤에 봉대산이 의젓하다. 봉대산 왼쪽 송정리 상수장마을이 목적지이다.
용정골마을 1.7km, 두동마을 920m 지점이다. 중앙 뒤에 죽산 안씨 사당과 그 오른쪽 뒤에 두동마을이 있다.
두동마을은 죽산 안씨 세거지인 듯. 왼쪽에 죽산 안씨 사당과 세장비, 죽산 안씨 두동파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중앙 뒤에 희미하게 보이는 곳은 함평군 함평읍 석성리 돌머리해수욕장이며 흰 건물은 스톤델리아호텔&리조트인 듯.
서해랑길은 두동마을을 거쳐 언덕을 넘어 석북마을로 이어진다.
바다의 섬은 소당섬과 승도(오른쪽)인 듯. 건너편은 함평군 손불면 일대인 듯.
"두동마을은 수랑골, 밤자골, 한아지로 이뤄진 수양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죽산 안씨의 동족마을이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문씨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 세대도 살고 있지 않으며 그들의 흔적도 없이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이후에 들어온 성씨가 죽산 안씨다. 경기도 파주에서 세거하던 죽산 안씨 중 일부가 임진왜란을 피해 충북 영동을 거쳐서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최초 입향자는 안정후(1564-1618, 자-수동, 호-구정)이다. 공은 삼강록에 등재될 정도로 효행이 지극하였다. 또한 마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수원 백씨는 120여 년 전에 장흥에서 함평 손불로 그리고 현경면 양학리를 거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입향조는 백기종(자-행명.1859-1929)이다.
斗洞이란 지명의 유래는 지형이 마치 쌀을 세는 말[斗]과 같이 생겼다 해서 비롯된 이름이다. 쌀을 세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홉인데 이 10홉이 모여 한 되[升]가 되고 10되가 모여 한 말[斗]이 되고 10말이 모여 한 섬이 된다. 마을 앞에 세 개의 섬이 있는데 모두 쌀을 세는 단위와 관계가 있는 이름을 갖고 있다. 즉 소스랑섬이 소두말을 가리키고 되섬[升島]이 되를 가리키고 소스랑섬 앞의 조그만 섬을 홉이라 한다. 하지만 이런 유래는 한자를 풀이하는 과정에서 나온 유래로 보인다." - 무안문화원
수원 백씨 화순공계 묘역이 언덕에 있다. '수원 백씨 화순공계 공적비' 비문의 내용을 옮겨 놓는다.
당나라 사부상서의 벼슬을 하시던 시조 송계공 백우경 선조께서 신라 선덕왕 원년에 우리나라로 건너오셔서 수원 백씨 일가를 이루셨다. 十六世 회자 정신제공 선조는 전북 장수에서 전남 장흥으로 옮기시고 유학에 전념하여 호조참판(장관급)을 역임하셨으며 장흥 용산 선산에 모시고 있다. 十七世 맹동 선조께서는 기유년에 진사급제하여 화순현감(군수급)을 역임하시고 계보를 화순공계로 분류하여 함평군 손불면 학산리 선산에 모셨다.
그 후 1820년 二十七世 효윤 선조께서 손불면 학산리에서 무안군 현경면 양학리에 터를 잡으신 후 일가를 이루셨는데 二十八世 만희 선조께서 연고가 있어 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으니 조상들의 큰 뜻을 받들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사회 발전에 공헌하는 후손들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적는다.
2007년 丁亥 5月15日 글 三十二世孫 敏弘
두동마을을 거쳐 바로 앞 나무숲 뒤쪽 언덕을 넘어 이곳으로 올라왔다.
수원 백씨 화순공계 묘역을 지나 왼쪽으로 꺾어 언덕길을 따라간다.
석북마을로 들어와 석북마을 뒤 걸어온 언덕길을 뒤돌아보았다.
석북마을 뒤 언덕길을 돌아 석북마을로 내려와서 걸어온 석북마을을 뒤돌아 보았다. 석북마을은 감풀마을로 불린다. 감풀이란 무슨 뜻일까? 감풀이란 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넓고 평평한 모래벌판 즉 '모래추'를 이른다고 한다.
"석북마을은 정부지원 사업을 많이 받았다. 처음 주변마을과 함께 정보화마을로 지정된 뒤 테마마을-한옥마을-행복마을로 지정을 받아 마을을 발전시켜 왔다. 특히 2007년 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감풀마을'이란 새로운 지명을 얻기도 하였다. 감풀이란 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넓고 평평한 모래벌판 즉 '모래추'를 말한다. 테마마을 지정 이전에도 주민들은 황등풀, 큰풀, 작은풀이란 지명을 갖고 있었다. 현재 한옥이 19채가 들어서 있고 정자가 3동이 있다." - 무안문화원
느티나무 앞에 석북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석북마을은 수양2리에 속하는 마을로 한자 표기는 石北으로 쓰기도 하고 席北으로 쓰기도 한다. 마을의 오래된 족보에는 石北으로 표기되었다. 席北이란 지명은 ‘또때’에서 비롯된다. 또때는 돛대를 강하게 발음할 때 나오는 소리로 마을이 배 형국이었음을 나타내준다. 席은 자리 석 또는 돛 석으로 불려지기도 하며 베[布]가 나오기 전 갈대나 띠를 엮어서 돛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 席北이라 한 것이다. 또한 마을 앞에 간척지가 이뤄지기 전에는 바다였는데 마을로 뻗은 모래추가 마치 돛대 형국이어서 席北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石北은 쌀과 관련된 지명이다. 쌀을 세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홉인데 10홉이 모여 한 되[升]가 되고 10되가 모여 한 말[斗]이 되고 10말이 모여 한 섬[石]이 된다. 수양리는 봉오산(봉대산)의 줄기를 잇는 주변의 형세가 홉 되 말 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그중에서 이 마을은 섬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마을이 북쪽을 향해 있다 해서 ‘石北’이라 칭한 것이다. 실지로 옆 마을인 두동마을 앞에는 세 개의 섬이 있는데 모두 쌀을 세는 단위와 관계가 있는 이름을 갖고 있다. 즉 소스랑섬이 소두말을 가리키고 되섬{升島]이 되를 가리키고 소스랑섬 앞의 조그만 섬을 홉이라 한다." - 무안문화원
이 길은 팔방길에서 석북마을로 들어오는 석북길이다. 서해랑길은 두동마을을 거쳐 함해만 동쪽 해안을 돌아 남쪽으로 내려와 석북마을을 거쳐 나가고 있다. 서해랑길은 앞의 축사가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수양촌마을로 이어간다.
식품 가공업체 영농조합법인 (주)초록마을 앞을 지난다. 멀구슬나무는 농익은 노란 열매들을 달고 겨울을 나고 있다.
수양촌길을 따라 수양촌마을을 통과하여 언덕을 오르면 수양촌마을회관이 나온다. 목적지까지 1.8km가 남았다.
"수양촌은 수양1리에 속하는 마을로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지명의 유래를 ‘소를 기르는 곳이라 해서 <소양>으로 불렀다고 하나 그 이후 마을에 버드나무가 많아 「垂楊村」으로 개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자료를 보면 마을의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아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지명이 나오지 않고 1912년의 자료에는 다경면 水良村, 1917년의 자료에는 현경면 수양리 垂楊村으로 나오며 이후엔 垂楊村으로 계속 나온다. 주민들에게 마을 이름이 水良村에서 垂楊村으로 변한 이유를 물어보니 뚜렷한 답변이 없다.
살펴보니 마을에는 물과 관련된 지명이 세 곳이 있었다. 지금은 메워졌지만 마을 앞 공동 우물을 비롯하여 시묘막샘, 갯샘 등이 그것이다. 이중 시묘막샘은 한 주민이 시묘살이를 하면서 시용했던 우물인데 그 물의 효용이 뛰어나 물맞이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샘들이 있어 마을 이름을 水良村이라 했다는 것에는 설명이 부족했다. 주민들은 마을 입구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어서 마을 이름이 그곳에서 연유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무안문화원
언덕에 수양촌쉼터에 조성되어 있으며 정자 앞에 수양촌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수양촌마을회관 입구에 한마음공원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함해만 맞은편 함평군 일대가 희미하게 보인다.
서해랑길은 맨 뒤쪽 물탱크와 숲을 거쳐 오른쪽 뒤 석북마을로 내려와 1.5km를 걸어 수양촌마을회관으로 왔다. 무안군 현경면 수양리는 함해만 서쪽 지역을 차지하고 함해만 동쪽의 함평군 일대와 마주하고 있다.
느티나무 아래 정자가 세워져 있는 수양촌쉼터가 수양촌마을회관 앞에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참솔고농장으로 향한다.
표고체험활동 연구단지이며 농촌체험교육 치유농장인 표고버섯 생산업체인 참솔고농장을 지난다.
수양촌 들녘의 농로를 따라 오른쪽 나무숲이 있는 국도24호선 송마로 맨 끝 지하통로 방향으로 이어간다.
참솔고농장에서 수양촌들녘의 농로를 따라 걸어왔다. 봉대산이 우뚝하다. 봉대산 뒤 용정마을에서 함해만을 오른쪽으로 빙 돌아서 이곳으로 왔다. 봉대산 왼쪽 용정리 봉오재마을(봉대마을) 입구는 23코스 종점이다. 봉대산은 조선시대 봉화를 올렸던 산으로 33코스에서 지표가 되어준 산이다.
송마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현경면 수양리에서 송정리로 넘어간다.
송마로 지하보도를 통과하여 현경면 송정리 상수장(上水長)지역으로 넘어왔다. 언덕의 멀구슬나무 옆 전봇대 아래에 서해랑길 34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오른쪽으로는 현해로로 나가는 길,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이어지며, 그곳에 서해랑길 무안 33·34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잘못하여 현해로까지 나갔다 되돌아왔다.
"松亭里는 현경면소재지에서 해제면 방향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서로 서해바다가 남으로는 망운면 목서리와 접해 있다. 본래 목포부의 망운면 지역으로서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소나무 정자'가 있었으므로‘松亭'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다경면 上水長洞으로 나온다. 이후 현경면으로 통합되면서 1970년대 초에 24번 국도가 지나면서 길을 경계로 상수장마을과 하수장마을로 나뉘어진다.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 의하면 함평현 다경면 松丁里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다경면 上水長洞으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현경면 송정리 상수장, 송정으로 나뉘어지면서 1987년의 자료에는 현재와 같이 송정리 상수장, 하수장으로 나온다." - 무안문화원
전봇대 아래에 34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앞에는 국도24호선 송마로가 달리고 있다. 서해랑길 무안 33·34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는 곳을 가기 위해서 전봇대 오른쪽으로 더 이어가야 한다.
맞은편 해안은 현경면 송정리 탄도만 해안, 앞쪽에 현해로가 달리고 있다. 이곳은 현경면 송정리 상수장 지역인 듯.
"상수장(上水長)'은 높은 데서 보면 마을이 현경에서 해제까지 연결되는 다리 모양으로 보이거나 대루(옛날 다리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전에는 현재의 길이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치 곱게 단장한 여자 머리의 가르마처럼 보였다고 한다. 왼쪽으로는 서해바다가 오른쪽으로는 함해만에 접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송정리 2구에 속한다. 松亭里란 지명은 마을이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고 또한 정자나무의 구실을 하는 소나무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현재도 당시의 울창했던 소나무 숲들이 군데군데 보이는데 대체로 묘지 주변의 숲들이다.
‘上水長’이란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주민들은 구체적으로 모르고 있었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앞 우물의 수질이 좋고 양이 풍부하여 ‘水長’이라고 불렀다’고 하나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전부터 있었던 지명이 아니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에 물길과 관련된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여겼으나 주민들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지명에 대해서 다른 의견도 있다. 지형적으로 마을을 봤을 때 노루가 졸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도덕산이 노루머리에, 송정교회가 노루목에, 안산이 노루 뒷다리에 해당되어 한자로 표현하면 睡獐(수장)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상수장은 노루머리에 해당된다.
상수장마을은 도둑골, 장자골, 새언안, 도머리, 웃둥지(토성목), 큰골, 뒷골로 이루어졌다. 도둑골은 지도나 해제사람들이 망운장을 보러 다닐 때 어려움을 겪었던 골짜기이며 장자골은 부처돌이 있는 곳이다. 실지로 큰 부자가 살았다 해서 장자골로 불리는 곳에 부처돌이 있었다. 웃둥지라고도 부르는 토성목은 현해로를 사이에 두고 함해만의 바다와 서해 바다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이곳을 파서 운하를 만들려고 하였다. 당시에 상당할 정도로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광복이 되면서 이 공사는 중단되었는데 그때 퍼냈던 흙이 마치 성벽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무안문화원
국도24호선 송마로 가드레일 왼쪽 바깥에 서해랑길 33·34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바다 건너는 함해만 함평군 일대이다.
국도24호선 송마로 가드레일 바깥에 서해랑길 무안 33·34코스 안내도와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거리/ 19.9km, 소요시간/ 6시간 30분, 난도/ 쉬움. 실제 탐방한 거리는 20.6km, 5시간 16분이 걸렸다. 서해랑길 33코스 안내도에 소개된 곳 중에서 수양저수지만 코스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