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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勿"字 형국과 주요 주택의 위치
풍수적 관점에서 양동마을은 ‘물(勿)’자 형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동네가 위치한 언덕과 계곡이 ‘勿’과 흡사한 모양을 갖추고 있음에 따라 붙여진 명칭이다. 양동마을은 주산인 설창산(雪倉山·161m)에서 갈라져 나온 4개 지맥(地脈) 사이사이에 집들이 들어서 있다.
양택지에 있어서 ‘물(勿)’자형 형국을 명당으로 치는데 이는 勿자 자체의 글자의 뜻은 별 의미가 없으며 글자의 모양이 좌우가 잘 감싸고 있는 형태가 되어 명당으로 치는 것이다.
‘勿’자 형국의 장점은 기후적으로도 4개의 언덕이 겨울에 찬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겨울바람이 양동마을에 이르러 온순해지게 되어 추위가 심하지 않게 된다.
‘물(勿)’자를 글자를 쓸 때의 획 순서에 따라 1,2,3,4번으로 번호를 붙이면 글자를 시작하는 곳이 설창산에 해당한다.그리고 1획이 끝나는 지점에 관가정이 위치하고 있다.그 중에서도 관가정은 우측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향단은 1획의 좌측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향단에서 보면 관가정이 백호의 역할을 한다.
여강이씨 종택인 무첨당은 3획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1획이 우백호가 되고 4획과 2획이 좌청룡이 된다.
서백당은 4획이 안산(안채의 안산)겸 백호가 되고 있으며 2획이 청룡의 역활을 하면서 크게 감싸고 가면서 사랑채의 안산이 되어 있다.그런 점으로 볼때 서백당이 다른 집보다 잘 감싸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양동마을 중에서도 월성손씨 종택이며 "손동만 가"로 알려진 서백당이 명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서백당은 세명의 현인이 출생한다는 삼현지지(三賢之地)로 알려져 있다.그중 2명은 우재 손중돈 선생과 월성손씨의 외손인 여강이씨(여주이씨) 회재 이언적 선생을 말한다.두분이 모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동방 18현에 오른 현인이다.
양동마을에 대하여 풍수적으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이집 저집 다니면서 본다고 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저 집구경을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따라서 양동마을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안산에 올라가서 마을 전체를 봐야 한다.
1. 관가정(觀稼亭)
이건물은 조선 성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우재 손중돈(1463ㅡ1529)이 세운 정자이다.
건물의 평면구조는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사랑채 나머지 안채로 구분된다. 안채 뒤에는 맛배지붕으로 된 사당이 있다. 안채는 중문 맛은편에 네모기둥을 사용하여 간소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사당과 누마루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에 길게 난간을 돌려 정자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대문의 왼쪽에 사랑방과 마루가 있다.
마루는 양면이 트여있는 누마루로 "관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마을 입구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며 주변경관을 한눈에 볼수있도록 한 이 정자는 사랑채의 건축형삭이 돋보이며 안채는 부억이 안방과 다소 떨어진 우익사 맨앞쪽에 새로로 길게 자리잡고 있어 공간구성이 이채롭다.
전통적인 □字形으로 행랑채가 없으나, 사주문(四柱門)이 있는 점을 보아 행랑 채가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안채 좌측으로 누마루가 있는 큰사랑채, 우 측으로 작은 사랑채를 날개 달 듯이 붙여놓은 세짝의 여닫이 문으로 멋스러운 건축이며, 한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안고, 농사짓는 들판과 마을로 오가는 사람들, 문자봉의 안산 , 안강들역을 바라보는 경관이 일품이다.
보통 대문은 행랑채와 연결되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있어 조선 중기의 남부지방 주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1981년 보수때 주위 담장을 쌓고 일각대문을 내었다
관가정은 "勿"字의 1획에 해당하는 능선에 위치해 있으며 "勿"字의 1획이면 글자의 제일 왼쪽에 해당하는 획이 되므로 청룡은 여러겹이 있으나 백호가 감싸주지 못하여 바람을 피할길이 없다.우측을 흐르는 기계천도 형산강과 만나는 곳까지 앞으로 직출하는 것이 보이므로 수구가 좋지않다.
<관가정에서본 안산>
2 . 향단(香壇)
이 건물은 조선 시대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ㅡ1553)이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있을때 모친의 병간호를 하도록 중종이 지어준 집이다.
두 곳에 뜰을 두고 안채 사랑채 행랑채를 붙어 전체가 "흥"자 모양을 이루어 독특한 평면형태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私家로서 건물 전체에 둥근 기둥을 사용하여 상류층 주택의 격식을 갖추었다. 원래 99칸이 었다고 전하나 일부는 불타 없어지고 현재 50여칸이 보존되어 있다.
회재선생의 아우 이언괄공이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노모를 모시고 집안을 꾸려 형의 출사(出仕)를 도왔는데 그의 손자의 호가 바로 향단이다.
사대부가의 공간 영역을 갖춘 이런 단독주택은 한국 종가사(宗家史)에서 흔지 않은 것으로 조선 선비들의 입지 및 정주관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 세거지로 평가되고 있다.
이 건물은 두 개의 작은 마당을 두고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서로 붙어 日字形의 한 건물처럼 배치돼 있는데 日字形은 위대한 인물이 탄생한다는 자형(字形)이라 한다. 행랑채와 안채사이의 안마당은 빛을수용하고, 식사를 준비 하는 부엌으로 그리고 집안일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마당으로 쓰인것이특색이다.
이 집은 "勿"字의 1획에 해당하는 능선에 위치해 있으며 다만 능선의 안쪽에 있으므로 밖에 있는 관가정이 있는 능선이 백호쪽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마을의 중심되는 혈이 될수는 없다
그러나 1970년도 보수할 당시 사랑채와 행랑채의 간격과 높이를 정확히 고증하였을까?. 안채의 형태도 의문투성이다. 동헌의 청마루며, 가둥의 높이는?.
우리의 문화유산은 최초의 원형대로 후손에게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향단>
한옥은 외부에서 보이는 건물의 형태가 아니라 내부에서 외부를 조망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양옥이 수직성과 외양을 강조했다면, 한옥은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수평성과 경치를 중시한다.
양옥이 외부에서 건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방어적 구조를 띈다면, 한옥은 폐쇄적이지 않고 포용하는 구조다.
우리네 옛선조들은 자연사상인 풍수사상을 중요시하여, 우리나라 자연환경에 적합하도록 남향이 주향으로 한 자좌오향(子坐午向)을 근본으로 배산임수(背 山臨水)의 한옥 터잡기로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뤄사는 곳 그곳이 바로 명당이라 한다.
결국 한옥에 담겨진 선조들의 조형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모두가 똑같 은 기와집이며, 끝내 관광용 상품으로 전략될 것이다.
<향단의 동헌>
3 . 무첨당( 無添當)
물봉(勿峰)골로 들어서면 보물 제411호인 무첨당이 보인다. 무첨당은 회재 부친 이번(李藩)공이 살던 집으로 1460년경에 건축한 여강 李氏 종가(宗家)집인데 별당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주택이다.
이 집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선생의 종가 별당으로 세운건물이다.
이 집은 상류주택에 속해있는 사랑채의 연장 건물러 손님접대 휴식 책읽기 등 여러가지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마을 서북쪽 산등성에 남향하여있다. 우측에는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ㅁ"자형 본채가 있고 그 뒤편 높은 곳에 사당이 있다.
이 건물에는 "ㄱ"자형 평면에 온돌방, 대청, 누마루를 두었으며 둥근 기둥과 네모기둥을 함께 쓴 것이 특징이다. 은퇴한 주인이 여생을 즐기는 별당으로 난간 조석 등을 화려하게 꾸몄을 뿐 아나라 공간의 확장등 다목적의 틀문을 적절히 시설하여 건물의 기능을 한껏 살린 뛰어난 집이다.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쏨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별당건축의 기능에 충실하게 지은 건축물이다.
"勿"字의 3획에 해당하는 능선에 있다."勿"字의 1획에 해당하는 능선이 우백호이며 "勿"字의 4획에 해당하는 능선이 청룡이며 2획에 해당하는 능선이 외청룡이면서 앞으로 감싸고 나와서 안산(案山)이 되고 있다.청룡과 백호가 잘 감싸고 있으나 마을의 중심은 아니다.
무첨당은 회재선생의 다섯 손자중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공의 호(號)이다. 즉, 조상에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전에 이 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竹)필 글씨인 좌해금서(左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 이라는 뜻이다.
<무첨당>
4 . 서백당(孫東萬氏 家屋)
월성손씨 종택이며"손동만 가"로 알려진 집이며 서백당은 그중 사랑채의 당호이다. 서백당은 ‘勿’자 형국의 양동마을에서 가장 뒤쪽, 그러니까 가장 배후에 있다. 이 동네에서 풍수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해당한다.
서백당은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청룡과 백호가 여러겹 감싸고 있는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뒤에서 내려 오는 맥 역시 세겹의 맥이 파도치듯 힘있게 밀려 온다.
흔히 ‘서백당’이라 불리는 경주 손씨 대종택은 20대, 550년의 역사를 지녔다. ‘서백(書百)’은 ‘참을 인(忍)자를 100번 쓴다’는 의미인데, 10만명에 달하는 손씨 집안 대종택을 지키는 종손이라면 그만큼 참고 인내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 가옥은 월성손씨 종택으로 양민공(襄敏公)손소(孫昭1433ㅡ1484)가 지은 집이다.
그의 아들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敦)과 그의 외손이자 동방오현중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다. 서백당(書百堂) 혹은 송첨(松詹)이라고도 불리운다. "ㅡ"자형의 대문채안에 "ㅁ"자형의 안채가 있는데 대청6칸, 안방3칸, 부억2칸이다. 아래채의 중심칸이 안대문이고 그 왼쪽은 2칸 마루 고방이며, 오른쪽은 큰사랑방과 사랑대청이다.
높은 돌기단 위에 있는 사랑 대청는 마루 둘레에 난간을 돌린 누마루이다. 사랑 대청 옆 정원쪽으로 짤막한 상징적 담장이 있으며 ,정원 위쪽에는 사당이 있다.
조선 초기 양반집의 일반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종가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춘 큰 가옥이며 사랑 마당에 있는 향나무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골 중앙에 자리잡은 중요 민속자료 제23호인 서백당은 양민공 손소(襄敏 公 孫昭)공이 1454년경에 건축한 월성손씨(月城孫氏)의 종가(宗家)집이다. 서백 당 또는 송첨(松詹)이라 부르며, 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忍) 자(字)를 백번쓴 다는 뜻' 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이다.
손소공이 집터를 고를 때 풍수가 '勿'字形을 이룬 문장봉의 혈맥이 뭉쳐있 다면서 위대한 인물이 3명 태어나리라 예언했다 하는데 청백리 우재 손중돈선생과 그의 생질이 되는 회재 이언적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한분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다하니 기대해 보자.
마당에는 수령 5백년이 넘은 향나무가 기품있게 서 있다.
<서백당>
다 . 良洞마을의 局勢와 삼대맥(三臺脈)
안산(案山)에서 전체적인 국세(局勢)를 살펴보면 설창산에서 양동마을로 들어오는 맥이 마치 물결치며 파도가 밀려오듯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맥이 세겹으로 대(臺)를 이루면서 파랑맥(波浪脈)으로 들어오고 있으므로 그만큼 마을로 들어오는 역량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설창산으로부터 세겹으로 밀려오는 힘있는 맥을 받아서 좌우로 두겹세겹 꼭꼭 감싼 자리에 있으며 맥의 기운이 넘쳐서 이를 땅속에 모두 감추지 못하고 지상으로까지 석맥(石脈)이 드러나 있는 산실로 연결된 氣脈은...........................................................!
이 모든 것이 서백당과 산실(産室)이 명당(明堂)임을 입증하는 혈증(穴證)이라고 생각한다.
<서백당내의 양동의 향나무>
1 . 서백당의 산실(産室)
서백당은 관가정과 더불어 월성손씨의 대종가로 사용되던 곳으로 풍수적인 설화에 의하면 이 곳에는 3명의 큰 인물이 태어날 것으로 점지되었는데 손중돈, 이언적이 그들이다.
지금도 시집간 딸들이 해산을 하러 오면 다른 일가집으로 보낸다고 한다. 즉 딸의 아들(외손주)이 손씨가 아닌 사람으로 이 집의 정기를 받고 위인이 된다면 그들이 기대하는 마지막 위인은 손씨 집안에서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살기좋은 곳의 기준을 첫째 地理, 둘재 生利, 셋째 人心 넷째 山水 즉 ① 풍수 ② 경제 ③ 인심 ④ 산수 이 네가지라 하였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였던가?-태극풍수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