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 3:15~17(327)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2023.11.19
아동문학 작가였던 이탈리아 작가 카를로 콜로디(Carlo Collodi, 1826-1890)라는 분이 있습니다. 카를로 콜로디라는 이름을 알거나 외우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집필한 소설의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콜로디가 쓴 소설이 바로 전 세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피노키오의 모험(The Adventures of Pinocchio)’이라는 동화입니다.
이 피노키오 동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 나무와 깡통으로 만들어진 인형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에게 말합니다. “할아버지, 나도 할아버지처럼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안 나오고, 날카로운 송곳으로 팔을 찔러도 피가 안 나와요. 할아버지, 제 눈에서 눈물이 나오고 제 팔에서 피가 나올 수 있도록 인간이 되게 해 주세요”
그냥 쉽게 넘길 수 있는 부분이지만, 사람이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기준을 정해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기쁘거나 슬플 때에는 눈에서 눈물이 나오고, 무엇에 찔리거나 상처를 받으면 피부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만이 가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눈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이 모든 것이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요, 내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증거입니다.
피토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에게 ‘피와 눈물이 나오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한 것이 바로 피노키오의 작가였던 콜로디의 자기 경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육군 소령이었던 콜로디는 현역 장교 시절 1848년부터 1860년까지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토스카나 대공국의 지원병으로 참전합니다.
그리고 1857년 두 번째 독립전쟁에서 부상을 입게 되어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이때에 문병을 온 친구들이 콜로디에게 ‘병상에 누어있는 기분이 어떠한가’라고 물어 봅니다. 그때에 콜로디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기쁘다네, 내가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기쁘다네!”
평범한 말이지만, 살아 있기에 고통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기에 피를 흘리고 아픈 것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자신의 경험이 피노키오의 동화에 녹아 들어서 피노키오가 제페테 할아버지에게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김장로님께서 감기에 심하게 걸려 목소리도 잠기어 있고, 몸의 기력도 쇠약해져 힘들어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장로님이시기에 주일을 범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셨고, 그 마음이 아픈 몸을 이끌고 주일예배에 참석하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속으로 감사한 것은 ‘몸을 아프게 하고 기력을 떨어뜨리는 심한 감기라고 하더라도, 장로님이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하였다’는 것입니다. 감기의 아픔을 심하게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더 큰 질병이 아니기에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내가 감기에 걸리더라도, 내가 더 큰 질병에 걸려 아파하더라도, 내가 두 발을 걸으면서 교회를 찾아 나와 나의 자리에 앉아서, 내가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발로 움직일 수 있음을 하나님에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내 입을 열어 하나님에게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들을 보십시오. 일반 병실에 입원해 있는 분들은 가볍게 병원 안을 돌아 다니기도 합니다. 비록 팔뚝에 링거가 꼽혀 있고 손으로 링거 병이 달려 있는 지지대를 밀고 힘겹게 다니지만, 나름 건강한 분들이 병원 안을 돌아 다닐 수 있습니다.
병원의 중환자실을 보십시오. 같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이지만,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분들은 아예 거동조차 못합니다. 팔 하나 손 하나 드는 것도 버거워하는 위중한 분들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습니다. 중환자실에 방문한 가족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잔소리하고 못살게 굴어도 좋으니 제발 두 발로 걸으면서 중환자실을 벗어 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중환자실 보다 더 안타까운 곳이 또 있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돌아가신 고인을 두고 가족들이 안타까워하는 말이 있습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더라도 조금만 더 살다가 돌아가시지 무엇이 그리 급해서 빨리 이승을 하직하였느냐?” 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에게 건강이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 두 발로 여기저기 내가 가고 싶은대로 움직일 수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 두 손을 가지고 음식을 먹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할 수 있는 제목을 끄집어 내면 감사의 제목이 많아질수록 내 삶이 더 윤택해지고 부유해집니다. 없다고 불평하고, 힘들다고 불평하고,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내 건강이 사라지고, 내 생명이 없어지고 나면, 내가 불평하였던 것조차 호사스런 행동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2023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365일 52주의 주일의 많은 날들이 있지만, 저는 추수감사주일은 주일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 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나요?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강대상 앞을 장식하는 오곡백과가 풍성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또한 이런 오곡백과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성도들의 헌신과 사랑의 모습이 있어서 또한 풍성하고 더 감사하게 여겨집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정하였습니다. 15절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냥 감사하라는 말로도 설명이 충분하지만, 바울은 또한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감사하라’는 말은 명합니다.
복잡하고 짜증나는 일이 많은 이 시대에 감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비결이 어려운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다같이 ‘날 구원하신 주 감사’를 찬양합니다. “1)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2)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헤쳐 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3)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사랑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아질 때 감사가 시작됩니다. 어려운 상황과 여건 가운데도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감사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1. 평강을 이루는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히말라야 슈바이처’는 강원희 의료선교사님(1934-2023)이 출간한 책입니다. 193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뒤 1.4후퇴 때에 한국에 내려옵니다. 그리고 1961년 연세의대를 졸업한 강선교사님은 1970년 강원도 무의촌에 처음 병원을 열어서 의료 진료를 합니다.
그리고는 1982년 네팔로 건너간 이후에는 약 40년간 네팔·방글라데시·스리랑카 등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펼첬던 분입니다. 네팔에서 사역할 때, 자신의 피를 수혈해 중환자를 살려내고, 환자가 퇴원하면 식료품을 사 들고 집에까지 찾아가는 열정으로 현지인들은 그를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라고 불렀습니다. 올 5월 26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네팔 사람들은 오른손으로 식사하고 왼손은 화장실에서 휴지 대신 사용합니다. 물이 부족한 국가라서 손을 깨끗이 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손으로 음식을 만듭니다. 음식에 대장균이 많은 줄 알지만 선교사이기에 함께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강 선교사는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달았습니다. 대한민국 안에 있을 때에는 대한민국이 얼마나 살기 좋고 좋은 곳인지 몰랐지만, 대한민국보다 더 낙후된 곳에 가서 40여년간 사역하다 보니 대한민국이라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함을 느낀 것입니다.
강선교사님의 이런 판단과 생각은 해외를 나가 보신 분들이라면 이구동성으로 느끼는 감정과 판단입니다. 방구석에 숨어서 바깥세상 구경하지 못하고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마구잡이로 욕합니다. 대한민국이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백성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기쁨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평만 하면 그 불평의 끝은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할 제몫을 찾고 감사할 내용을 찾으면 감사는 불평이 주지 못하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 주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의 곳곳에서 “항상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상반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쉽게 풀이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세상 물정과 욕심 때문에 흔들리고 어지럽혀진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내 마음과 생각을 이끌고 내 행동을 이끌게 되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가진 세상의 욕심이 내 마음을 주장하게 되면, 그때부터 내 생활에는 지옥이 펼쳐지게 됩니다. 내가 가진 음란한 생각이 내 행동을 주장하게 되면, 나는 입에 담기도 더러운 성범죄자가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곳곳에서 마약 문제가 심각합니다. 마약을 한번이라도 접한 사람은 마약에 대한 욕구를 절대 끊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약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되면, 세상 지위가 있고 돈이 넉넉하게 부족함이 없어도 마약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약이 내 마음과 생각을 주장한 참담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된 팡안과 평화가 내 마음에 있는 성도라면, 당연히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성도입니다. 우리 모두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 인생에 모진 비바람과 파도가 몰아친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다면 나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마음과 행동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감사의 모습이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2. 모든 일에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17절 말씀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하는 성도들이 드러내어야 하는 행동의 기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상반절에 보면,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권면합니다. ‘무엇을 하든지’라는 말은 교회 일을 하든지, 내 개인의 일을 하든지, 그리고 직장에서 회사 생활을 하든지, 내가 집에 머물면서 가정 일을 하든지, 내가 살아 숨을 쉬는 내 삶의 모든 공간에서 행하는 행동이 다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행동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중심’이라는 한마디 말로 함축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일을 예수님 중심으로 행동하는 성도는 예수님이 주시는 힘을 입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를 힘입어’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어,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똑똑해서, 내 신앙이 좋아서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이끌어 주지 않아도 나는 내 의지와 생각으로도 나는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의지만 가지고 하나님에게 감사하지 못한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이렇게 감사 할 수도 있지만, 이런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는 감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깨닫는 은혜로 드려지는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는 점을 절대 잊지 말도록 합시다.
16절 보세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가 드러내는 행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은혜가 내 속에 풍성하게 거하게 되면 나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16절의 이런 행동과 모습이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들의 행동과 모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할 수 없는 가운데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최악의 상황에도 모든 일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감사함을 드릴 때,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나에게 풍성하게 임하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있을 18세기 미국 남부 텍사스주 대 저택에 잭슨(Jackson)이라는 불리는 흑인 여자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농장주의 가정에서 집안일을 돌보는 가정부로 일을 하게 됩니다.
대저택에다가 매우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던 백인 농장주는 그 인근 지역에서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농장주 집안에는 항상 불화와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돈 문제로 복잡했는데 가정 문제도 심각하여 부부간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농장주는 항상 술을 먹어야 잠이 들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에서 가정부로 힘들게 일하는 잭슨의 얼굴은 언제나 명랑했고 입술에서는 노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날카로운 채찍이나 매질이 돌아왔지만, 잭슨은 웃음과 미소, 그리고 노랫소리를 항상 잊지 않고 생활합니다.
하루는 무섭고 사나운 농장주가 잭슨을 불러서“나는 돈이 있어도 걱정이 이리 많은데, 너는 노예로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데 왜 기쁘게 찬송하는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주인의 말에 놀라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잭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돈이 없으니 잃어버릴 걱정이 없고요, 늘여야 하는 집이 없으니 불이 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사회적으로 나는 노예의 신분이기에 명예가 없으니 누가 나에게 욕할까 하는 걱정이 없어요. 설령 나에게 죽음이 다가와서 하나님 곁에 간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천국이 예비되어 있으니 저는 기쁘게 찬송할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농장주는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은 돈과 명예와 세상적 지위를 다 가졌지만, 노예 여자보다 더 궁핍하고 쪼달리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러면서 발걸음을 끊었던 교회로 다시 나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였고, 자신의 농장에 있는 모든 노예들에게 나라 법을 어기지 않는 한도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은 2023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1월 1일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에게 감사함으로 찬양과 기도함으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모두가 남아 있는 2023년도의 모든 시간도 더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길 소망합니다. 더 많은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도록 노력했으면 졸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