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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의 두 추수
요한계시록 14장 14-20절 / 14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15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17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8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본문은“또 내가 보았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요한은 이렇게 무엇인가 보고 그 놀라움으로 외쳤다. 우리 한글성경은 번역을 생략하고 있지만, 원문에는 요한이 크게 놀라워하며 외치는 소리인‘보라!’(behold)라고 하는 감탄사가 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또 보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번에 보고 있는 환상이 14장 1-5절에서의 어린양 예수의 뒤를 따름에 있어 땅 위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인 14만 4천이 기쁨의 새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에 대조 되고 있는 것으로 14장 6-13절에서의 세 천사의 전갈에서 보게 되는 큰 성 바벨론의 멸망, 곧 짐승을 따르며 우상을 숭배하고 이마나 손에 그의 낙인을 받은 자들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에 이어지고 있는 것에서 이다. 여기서 요한이 크게 놀라워하며 자신도 모르게‘보라!’라고 외치게 된 것은 14장 1-5절과 관련하여 14-16절의 환상을 보고, 14장 6-13절과 관련하여서 17-20절의 환상을 보는 것에서 이다.
요한은 먼저 14장 14-16절에서 한 천사가 금면류관을 쓰시고 손에 예리한 낫을 들고 구름 위에 계신 그리스도께 마침내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리고, 그리스도께서 낫을 땅 위에 휘둘러 곡식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왔는데 그도 예리한 낫을 들고 있다가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땅의 포도가 다 무르익었으므로 포도송이를 거둘 것을 알림으로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성 밖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내던지자 포도주를 만드는 틀에 짓밟힌 포도송이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 무려 천 육 백 스다디온(약 320km)에 이르는 거리를 뒤덮는 엄청난 양인 것을 보았다.
요한이 본 이 환상에서의 곡식과 포도의 추수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자에 의해서 있게 되는 마지막 때의 추수가 보여주는 종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중에서 요한이 본 첫 번째 추수 환상인 곡식 추수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자들에게 일어날 마지막 때를 상징하고 있다. 땅 위에 있는 동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따랐던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주로서의 죽음에 의해 흘리신 피로 구속 받고 생명의 부활을 약속받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수인 14만 4천에 채워져 마침내 곡식을 추수하듯이 그들 모두를 거둘 때가 됨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낫질을 하시니 한 곳에 모아진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의해 있게 될 곡식 추수 환상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금면류관을 쓰신 모습과 연관되어 있다. 요한은 1장 5-6절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첫 열매되신 분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려고 피를 흘리신 분이시라고 소개하면서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다고 하였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실 것으로 예언되고 있는 분으로 본문에서 구름 위에 계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그리스도께서 머리에 면류관을 쓰신 모습은 영광스러운 지극히 존귀하신 분으로 승리의 왕 되신 분이심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면류관이 교회에 주신 약속인 생명의 면류관의 근원이 되고 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에서는 장차 임할 환란으로 겪을 박해에서도 끝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충성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자들이 머리에 쓸 면류관으로 생명을 굳게 약속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이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다(계 2:10; 3:11). 사도 야고보는“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라고 하였으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딤후 4:8) 라고 말하여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굳게 설 것을 권면하였다. 이렇게 말해지고 있는 면류관의 실체는 월계수로 만들어지거나 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곧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라고 말하였다.
요한은 주께서 보이신 환상에서 금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분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음에 있는 영광에 휩싸이는 마지막 때의 추수를 보았다. 교회의 구원은 그날이 임하기까지 보존되어 오며, 마침내 자신들이 따랐던 그리스도와 함께 면류관을 씀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 면류관이 자신들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따라서 자신들이 인정받을 공로로 되어진 것이 아닌,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은혜로 주신 것에서 주어진 것임을 잘 알기에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 보좌 앞에 바치며 찬양에 있을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한편, 요한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있는 곡식 추수에 이어 그리스도로부터 임무를 부여 받은 사자, 곧 천사에 의해 시행되어지는 마지막 때에 있는 또 하나의 추수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포도 추수로 묘사되고 있는 환상이다. 한 천사가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예리한 낫을 들고 있었고, 다른 천사에 의해서 포도가 무르익어서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포도 추수에 들어갔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포도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내던져져 짓밟혔다. 그러자 포도주 틀에 가득 담겨 짓밟힌 포도에서는 피가 무려 천 육 백 스다디온(약 320km)이나 쏟아져 나왔다. 이는 마치 부천에서 함평에 이르는 거리(322km)의 긴 강이 홍수로 넘쳐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요한이 본 추수 환상에서의 이 두 번째 포도 추수는 두 짐승을 따르며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일어날 마지막 때를 상징하고 있다. 이들은 큰 성 바벨론의 모습 하는 것에서 거대한 나라를 이루고 있으니,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온 세상을 다니며 미혹하는 짐승을 따르며 우상숭배에 있는 자들, 곧 짐승의 이름이 새긴 인을 이마나 손에 받은 자들이 어찌 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곡식으로 무르익어 마침내 추수할 때에 이르는 것같이, 이들은 탐스런 포도송이로 알알이 열매 맺어 마침내 풍성한 포도를 거두어들일 추수 시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렇게 추수된 포도의 운명이 자세히 묘사되었다. 포도주를 만드는 거대한 틀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용되고, 추수된 포도는 모두 여기에 던져졌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의 큰 틀에 담겨진 추수된 포도는 짓밟혀서 포도주가 되어 나오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큰 틀에서 나오는 것은 포도주가 아닌 피이다. 이 피의 양이 얼마나 엄청난지 장장 천 육백 스타디온에 이르러 넘쳐 흘렀다.
추수 시기까지 탐스럽게 열매 맺으며 무르익어 간 포도는 짐승의 이름을 새김 받음으로써 자신들이 짐승을 따르는 자들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있다. 추수된 포도의 실체는 짐승의 미혹을 받아 우상숭배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온 세상에서 열매 맺어지니 그 수가 꽉 666의 거대한 모습을 드러냄으로 마침내 천사에 의해서 추수된다. 이들은 땅 위에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적대함으로써 그들을 피 흘림에 있게 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그리스도를 죽음에 있게 하였으나 온 세상의 죄를 속량한 구속의 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인은 이 구속의 피를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심에 있으므로 죄 사함의 은혜를 입는 새언약에 들어와 있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고난에 참여 하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5)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요 10:17)
라고 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그대로 따른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롬 16:4)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 2:30)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살전 2:8)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6)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와 그분을 따름에 있는 자들이 흘린 피는 하나님의 복음과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위해 목숨도 걸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하는 것이 역력하다. 이 피 흘림을 보며 용과 용을 따르는 짐승과 그들의 미혹을 받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마치 포도주를 마시듯이 마셔 취하며 자신들의 악행을 즐긴다. 그러나 그들이 마신 의로운 자들의 피는 그들에게 갚음이 되니 의로운 자들의 피가 그들의 머리에로 쏟아지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된다.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들을 한 곳에 모을 때까지 의로운 자는 더욱 의롭고 거룩한 자는 더욱 거룩함으로 무르익어 가 추수 때를 기다림같이 악한 자들 또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큰 틀에로 내던져지기 위하여 불의한 자는 더욱 불의하고 더러운 자는 더욱 더러움으로 무르익어 가 추수 때를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휘둘러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낫에 의해 추수된 포도처럼 되어 그 운명이 거대한 포도주 틀에로 모아진다. 이러한 그들은 더 이상 웃지 않으니 의로운 자를 박해하여 흐르는 피를 포도주 마시듯이 한 그대로 자신들 또한 짓밟혀서 흐르는 피가 온 땅의 거리를 뒤덮은 포도주처럼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슬픔과 고통으로 통곡하는 소리가 온 땅을 진동할 것이다.
두 추수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때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하신 종말 강화에서도‘인자(메시야)가 오시는 날’을 말씀하시며‘깨어 있으라’라고 하신 여러 비유인 밭에서 일하는 두 남자와 맷돌을 가는 두 여자, 그리고 충성된 종과 불충한 종,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 그리고 양과 염소를 들어‘데려감을 당할 자와 버림을 당할 자’인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의인과 영원한 형벌 받을 곳으로 쫓겨날 악인을 말씀해 주셨었다(마 24-25장).
사람은 땅 위에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와 그렇지 않고 짐승을 따름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자로 처신해 간다. 그에 따라서 생명 있는 일을 해 나간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하는 열매를 맺으며 생명 없는 일을 해 나간 자는 사망의 부활을 하는 열매를 맺는다. 이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어느 날 홀연히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 행한 행동을 추수하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생각 없이 그렇게 맞이한 그에게 주어진 삶의 궁극적 결과는 하늘에서 그가 영원히 겪게 되는 생각하지 못한 사망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깨어 있어 항상 그리스도 예수께 마음을 두고 행한 행동에 있은 자에게 주어진 삶의 궁극적 결과는 하늘에서 그가 의식을 갖고 바라봄에 있어온 약속 받은 생명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항상 깨어 있으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언제나 깨어 있을 것’은 아무리 상기하고 되새기며 열심을 품어도 마음을 바짝 쪼여 긴장을 갖게 하며 마땅히 품을 바의 생각을 집중하게 한다. 느슨히 할 수 없는 것이 주께서 오시는 날과 그 시간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참으로 어느 날에 주께서 임할는지 바로 앞의 내일을 알지 못하는 오늘에 족한 우리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