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19:21~41
매월 목회기획팀 회의. 논의 전에 근황 토크. 지난 주, 공통적으로 다이어트 작심. 무언가를 작정할 때, 작정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힘으로 작동하는가? 작심삼일. 작심은 마음을 먹는 것, 그런데 삼일 밖에 가지 못하는 힘으로 했다는 것. 어떤 힘으로 작정할 것인가가 중요. 주일 날 무언가를 작정하고 나갈 때 어떤 힘으로? 21절, 바울이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마음에 있기를 항상 노력했을 것이다. 내 마음은 요동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이 걸어갈 수 있는, 또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도 설치지 않고... 주님의 길에 나를 두려는 노력. 지금 내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로 결정한 상태에서 에베소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생긴 일. 23절, 적지 않은 소동. 더운 오후에 쉬는 시간이 있음.(오전 11시~4시간) 그 시간 동안 성경을 가르침. 2년 내내 그렇게 했음. 에베소 교회. 이렇게 일관성 있게 활동하면 반대급부로 이를 경계, 위기의식을 느끼는 세력이 있음. 최근 한국 기독교는 성장하지 않고 있음. 수평이동일 뿐. 수평이동으로 생기는 부흥 말고, 진짜 부흥이 있는 곳은 술집, 매춘업 등이 타격을 받게 되어 있듯이. 그래서 영적각성이 있는 곳에는 싸움이 시작됨. 1) 자신과의 싸움, 2) 진리와의 싸움으로 나누어짐. 자신과의 싸움은 영적각성이 일어나면서 이루어짐. 진리와의 싸움은 욕망을 내려놓을 때. '이 도로 말미암아 발생했다.' 사실은 예수님의 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것. 마치 과속방지턱 때문에 사고 난 것을 과속방지턱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것(자신의 부주의한 운전 때문인 것을 양심은 아는데도).
24~29절, 신상(우상)을 만드는 일에 타격을 입음. 결국 돈 문제. 자기 확신이 있으면서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 자기가 손해가 있을 때 사람은 앞에 나서고 소동을 일으킴. 아데미 신을 은으로 만들어 파는 주인, 데메드리오라는 사람. 그 이름조차 농경의 신의 이름을 차용. 이름은 문제가 안 되지만... 어쨌듯 신상 제조업으로 번창했는데, 복음이 에베소에 전해지자 사업에 문제가 발생한 것임. 직원들도 호경기를 누림. 거기서 얻은 부로 사회적 활동, 기여도 했음. 그런데 복음으로 매출이 떨어지고, 타인들로부터의 시선도 달라짐(그동안 없었던 안쓰러운 시선). 그 이유를 규명해 보니, 바울이 있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의 주장 때문. 이럴 때 아주 드물게는 '도대체 어떤 힘이 길래 수 백년 해오던 것이 바뀔 수 있지?'라고 질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분개. 미국의 어떤 여자 저명한 사람. 동성애 지도자. 어느 날 감리교 신자와 티타임. 이런 평화는 대체 무슨 힘일까? 이 평안의 힘이 무얼까? 서로 너무 다른데... 그러면서 나를 움직이는 힘의 끝은 무얼까? 라는 질문으로 확산하여 거기서 복음을 찾음. 그리고 모든 이제까지의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대가를 기꺼이 감당함. 그러나 데미드리오는 그럴 수 없었음. 바울의 복음을 파괴해야만 회복가능하다고 생각. '도대체 이런 힘은 뭐지?'라고 질문했더라면...... 진리 안에서 사업적 수완을 발휘한다면 새로운 세계가 얻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직업들을 모아 놓고 "선동"함. '어디서 바울이라는 듣보잡이 와서 우리를 망쳤다.' '우리의 위대한 신전인 아데미 신전을 돌무데기로 깍아 내리는 이러한 행동을 참아야 합니까?' 선동. 의도는 '돈'을 지키려는 것. 자존심, 적개심, 생계 등을 적절히 섞어서 사람들을 fishing. 원형경기장에 바울 그룹을 몰아넣고 공격. 당시 군중들, 그들을 거기에 가게 한힘은 무엇인가? 또 우리 각자도 여기 모아 둔, 가게 된 힘은 무엇일까? 집단의식에 몰려간 건가? 선동 당해서 몰려 간건가? 성도는 몰려가서는 안된다. 가만히 성찰해야 한다. 과연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인가? 힘과 능력, 세력, 권력을 버리고 가신 예수님의 길. 함께 물어야 됨. 물을 겨를 없이 유행에 따라 움직이는 자?
30~32절) 여신의 이름을 광적으로 외치는 사이에 바울일행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러나 바울은 최소한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들어가는 이유는 두려움이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또 복음을 한 마디라도 하기 위해. 바울은 두려움이 아니라 어떤 진리의 뜻에 의해 움직인다. 진리라면 내 뜻에 반하는 공동체의 뜻을 듣기도 하고... 그저 우르르 몰려가는 일, 거기서 어떤 선한 일이 있을까? 자기 확신에 강할수록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힘도 강해야만 함. 사람은 자기 확신이 강한 성향이 있음. 그럴수록 자기객관화 필요. 세계착시경연대회. "내가 봤다니까?" 라고 하면서 절대적 확신. 그러나 눈이 착시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착각하는 것. 뇌가 그렇게 하고 싶은 주관적인 판단이 있음. 뇌가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지배.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 바울은 자신을 대적하거나 시기했던 이들에게 일부러 간다. 자기성찰 뿐만 아니라 함께 성찰하는 공동체를 존중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한다면서, 나와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왜 모멸하나? 33~34) 갑자기 회당 유대인들이 나섬. 혹시 이들이 사주한 것은 아닌가? 이들이 사주한 것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 아닌가? 유대인인 바울 때문에 자신들에게 불똥이 떨어질까 두려워서. 아무튼 그 구절에서 아무것도 들으려는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 바울이 나서서 해결하지 못함. 에베소 서기장이 해결 "공감, 공감하면 틈이 벌어짐, 거기로 파고들어, 직면시키고, 해법 제시, 경고로 마무리." '나도 안다. 에베소 여신을 위협한다. 그런데 바로 그 위험 때문이라도 겸손해야 함. 이런 초법적인 방식이 아니라 법적인 방식 등으로 해라. 불법적 집회로는 위상도 깎이고 로마로부터 책임을 추궁받을 수 있다.' 이제부터 바울이 법적절차를 밟아감. 그 과정 중에서 법관들이 대부분 바울에게 호의적.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바울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임.
내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무언지? 믿음의 힘인지, 내 욕망인지, 어정쩡한 느낌으로 몰려가는 힘인지. 신실하게 걸어가야(나와 함께 걷는 사람과). 착각하기 쉬운 우리의 눈과 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