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불교를 만나다] / 송창식의 ‘푸르른 날’
세상은 무상하기에 이 순간을 소중히 가꾸어야 한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어느덧 벚꽃도 모두 지고 온 산하가 연초록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요즘이다.
올해는 벚꽃이 예년보다 10일 정도 일찍 폈다 한다.
아무래도 봄을 무척 그리워한 것 같다.
몇 해 전 벚꽃으로 유명한 하동 쌍계사에 간 적이 있다.
활짝 핀 꽃을 기대했지만, 모두 지고 푸릇푸릇한 잎들이 나오고 있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밀려왔다.
순간 새롭게 올라오는 나뭇잎을 즐기지 못하고
이미 져버린 벚꽃에 집착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꽃이 피고 지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기면 되는 일인데,
그러지 못하고 지나간 과거에 마음을 뺏기고 있었던 것이다.
무상(無常)한 이치에 어두운 나 자신이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무상은 글자 그대로 영원한(常) 것은 없다(無)는 뜻이다.
이러한 삶의 무상함을 노래하는 가요들이 적지 않다.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 없듯이 가는 세월 역시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다는
서유석의 ‘가는 세월’은 무상의 이치를 잘 전해주는 노래다.
가사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자라나서 어른이 되는 것도 삶이 무상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해간다는 동물원의 ‘변해가네’도 이와 관련된 곡이다.
더원이 ‘나는 가수다’에서 불러 유명해진 김범수의 ‘지나간다’ 역시 마찬가지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장맛비도 끝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아프고 힘든 고통의 시간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내용이다.
이번에 소개할 송창식의 ‘푸르른 날’은
무상의 의미를 시적으로 멋스럽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곡이다.
이 노래를 부른 송창식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역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작사와 작곡, 노래 모두 대단한 실력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한국적 정서가 배어 있는 음악과 그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목소리는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긴다.
실력 있는 동료들이 그의 음악적 천재성에 감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뛰어난 음악성은 어린 시절부터 드러났는데,
사람들은 송창식을 가리켜 ‘모차르트’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당시에는 모차르트가 누구인지 몰랐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정말 자신이 모차르트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송창식은 70~80년대 청바지와 통기타로 상징되는 포크가요계를 맨 앞에서 이끈 가수다.
윤형주와 함께 트윈폴리오를 구성하여 ‘하얀 손수건’으로 데뷔했지만,
윤형주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솔로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세시봉 출신으로 ‘피리 부는 사나이’를 비롯하여
‘한번쯤’, ‘고래사냥’, ‘왜 불러’, ‘사랑이야’, ‘토함산’, ‘나의 기타 이야기’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여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우리의 국악을 대중가요에 접목시켜 만든 노래들이 인상적이다.
아직도 그의 노래 ‘가나다라’는 대중들이 입으로 중얼거릴 정도로 많은 인기를 모은 곡이다.
알려진 것처럼 ‘푸르른 날’은 시인 서정주의 시에 송창식이 곡을 붙여 만든 노래다.
그는 중학교 시절 서정주의 강연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당시 시인은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곧바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고이 간직했다가 감동의 조각들이 나올 때 비로소 펜을 든다고 했다.
이 강연을 들은 어린 송창식은 노래 역시 즉흥성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는 성인이 된 후 서정주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허락을 받고 ‘푸르른 날’에 곡을 붙여 세상 밖으로 내보낸다.
오늘날 송창식은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OST에 참여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정훈희와 함께 부른 ‘안개’는 감동 그 자체였다.
그야말로 익을 대로 익은 고수들의 향연이었다.
노래란 무엇이며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가요계의 후배들에게 보여준 명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다음은 ‘푸르른 날’의 노랫말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저기 저기 저 가을 끝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내가 죽고서 네가 사는 이치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명제뿐이다.”
무상의 이치를 간명하게 표현한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 1919~2011)의 명언이다.
무상은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와 함께 불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가르침이다.
흔히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를
합쳐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각종 서류를 작성할 때 틀림없다는 의미로 도장(印)을 찍는 것처럼,
세 가지 법(三法)이 분명하고 확실한 인생의 진리라는 뜻이다.
이러한 무상을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삶이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누군가의 갑작스런 부고 소식을 들으면 ‘인생 참 무상해!’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에는 인생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하지만 무상의 가르침에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의미는 조금도 없다.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르침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으며,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고 성실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산다면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따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와 정 반대로 흘러간다.
과거와 미래에 발목 잡혀 현재라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나간 벚꽃에 집착하여 현재의 푸르른 잎들을 즐기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눈앞의 현실에는 잎이 있는데, 마음에는 여전히 꽃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더 마음 속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마음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마음속에 있는 벚꽃을 쿨하게 보내고 눈앞에 펼쳐진 연초록 잎을 즐겁게 맞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서운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벚꽃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벚꽃 타임이 아니라 연초록 타임이다. 그 순간순간을 아낌없이, 후회 없이 즐기면 된다.
송창식의 ‘푸르른 날’은 무상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교재다.
거리에 흩날리는 벚꽃이 지고 나면, 온 세상이 연초록 잎들로 곱게 단장을 한다.
이 시간이 지나면 뜨거운 여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뜨겁게 불타오르던 한여름의 태양도 때가 되면 가을 서리에 주연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노랫말처럼 저 가을 끝자리 초록이 지치면 단풍이 들게 된다.
단풍 또한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한겨울에 내리는 눈발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다이내믹하게 변화하는 세계의 참 모습이며,
이를 상징적인 한 단어로 압축한 것이 바로 무상이다.
이처럼 순간순간 변하는 흐름을 있는 그대로 즐기면 되는데,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고 자꾸만 과거나 미래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간다.
그래서 가수도 걱정을 한다.
단풍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벌써 눈이 내리면 어떡하느냐고 말이다.
이런 사람은 눈이 내려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또 다시 봄이 오면 어이하느냐는 걱정이 앞서는 이유다.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이들에게 가수는 무상의 소식을 전해준다.
내가 죽어야 네가 살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이치를 말이다.
철쭉이 죽어야 한여름이 살고 가을이 죽고서 겨울이 오며,
겨울이 죽어야 비로소 봄이 온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강조하는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이다.
그러니 단풍이 졌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겨울이라는 새로운 인연을 반갑게 맞이하면 되는 일이다.
이처럼 내가 죽고서 네가 사는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저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해야 할까?
이미 져버린 벚꽃에 집착하는 것은 새로운 인연, 연초록 잎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현재를 사는 나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
그래서 가수는 노래하는 것이다.
이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말이다.
아니 한발 더 나아가 그리운 사람에게 연락을 하거나 직접 만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혹여 지금 이 순간 그리운 사람이 떠오른다면, 주저하지 말고 휴대폰을 들어보자.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지금 이 순간도 다시는 오지 않을 귀한 찰나다.
붓다는 마지막 순간 제자들에게 삶이 무상하다는 실상을 직시하라고 유훈을 남겼다.
무상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수행자는 정진해야 하며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한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지금 그리워할 것이지 기약 없는 다음으로 미루지는 말자.
사랑, 우정, 그리움 같은 귀한 가치들에
‘다음에’라는 예의상 멘트는 어울리지 않는다.
‘가요계의 모차르트’ 송창식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곳에서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2023년 5월 9일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불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