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국권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절망의 시대 한가운데서 자유와 희망을 보다
산제비 박세영 |
남국南國에서 왔나,
북국北國에서 왔나,
산상山上에도 상상봉上上峰,
더 올를수 없는 곳에 깃드린 제비.
너이야 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이 몸을 붓들 자 누구냐,
너이 몸에 아른체할 자 누구냐,
너이야 말로 하늘이 네것이요, 대지가 네것 같구나.
녹두綠豆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몸으로 화살같이 하늘을 꾀여
마술사의 채쭉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너이는 장하고나.
하로아침 하로낮을 허덕이고 올라와
천하를 내려다보고 느끼는 나를 웃어다오,
나는 차라리 너이들같이 나래라도 펴보고 싶고나,
한숨에 내닷고 한숨에 솟치여
더날를 수없이 신비한 너이같이 돼보고 싶고나.
창槍들을 꽂은 듯 히디힌 바위에 아침 붉은 햇발이 비칠제
너이는 그꼭대기에 앉어 깃을 가다듬을것이요,
산의 정기가 뭉게뭉게 피여 올를 제,
너이는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휘정거리며 씻을것이요,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들을것이다.
묏돼지가 붉은 흙을 파헤칠제
너이는 별에 날러볼 생각을 할것이요,
갈범이 배를 채우려 약한 짐승을 노리며 어슬렁거릴제,
너이는 인간의 서글픈 소식을 전하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알려주는
천리조千里鳥일것이다.
산제비야 날러라,
화살같이 날러라,
구름을 휘정거리고 안개를 헤쳐라.
땅이 거북등같이 갈러졌다.
날러라 너이들은 날러라,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을 위하여
구름을 모아는 못 올까,
날러라 빙빙 가로 세로 솟치고 내닫고,
구름을 꼬리에 달고 오라.
산제비야 날러라,
화살같이 날러라,
구름을 헷치고 안개를 헤쳐라.
출처 《박세영 시전집》(2012) 발표 《 낭만》(1936. 11)
박세영 朴世永 (1902~1989)
사회주의 예술단체인 염군사(焰群社)와 카프 등에 참여했고 아동 잡지 《별나라》의 책임 편집을 맡기도 했다. 1927년 《문예시대》에 <농부 아들의 탄식>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한 후 시집 《산제비》(1938), 《 횃불》(1946, 공저) 등을 발간했다. 1946년에 월북하고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갔으며 북한의 국가인 <애국가>를 작사한 시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일체의 전제 세력과 항쟁하고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 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내걸고 1925년 창설되었던 카프는 1931년 만주사변을 전후하여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같은 해 6월 1차 검거 사건을 겪게 된다. 이어 1934년에는 카프 산하의 극단이던 신건설사(新建設社)에 대한 2차 검거가 이루어졌고, 카프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1935년 5월 지도부가 경찰 당국에 해산계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당시 카프 내부에서는 조직의 해체에 찬성하는 해소파와 이에 반대하는 비해소파가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비해소파에 속했던 박세영은 카프의 해산 이후에도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열정과 이상을 잃지 않았다. 박세영은 해소파와 전향자들을 향해 "인류를 사랑하자던 마음은 / 나만 알자로 되어버리고, / 사회를 위하여 이 몸을 바치자던 생각은 나의 향락만을 위하게 되어 / 너는 요술사와 같이 한 가닥 남은 양심조차 속이었다."(<나에게 대답하라>)라고 비판했고, "폐허가 된 어지러운 싸움터"(<화문보로 가린 이충>)에 남아 감옥에 간 동지들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이상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음에 이르는 영웅의 모습을 그리면서 <하랄의 용사>, <최후에 온 소식: 어느 여인의 애사(哀史)> 등)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궁핍한 생활을 면할 길이 없었던 그는 충청북도 보은에 살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러 찾아가지만 막상 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속리산 구경만 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심선옥, 2008: 205-207). 이처럼 한치 앞조차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속리산에 들렀던 박세영은 그곳에서 영감을 얻어 <산제비>를 썼다. 박세영이 등단 후 처음으로 출간한 시집의 표제작이면서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 마침내 맞을 자유와 희망을 꿈꾸며
이 시는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제비를 바라보는 시적화자의 찬탄으로 채워져 있다. 산에서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 "더 올를수 없는 곳에 깃드린" 제비는 물리적으로만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붙들리지 않는 "자유의 화신”으로 시적 화자에게 인식된다. 제비는 하늘과 대지, 세상의 모든 것을 제 것인 양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이며, '녹두만한' 눈으로 천하를 내려다 볼 수 있고 '주먹만한' 몸으로 화살처럼 거침없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작지만 역동적인 에너지를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허덕이며 산에 올라거기서 내려다보이는 것들에 감탄하기 급급한 화자에 비해 제비는 보다 더 높은 곳을 날면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즉, 제비는 시적 화자가 꿈꾸는 이상을 선취하고 모든 현실적인 장벽을 훌쩍 넘어서 있으면서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알고 있는 신비로운 존재인 것이다. 6연에서는 땅 위의 생명체들이 원초적인 욕구에 굴복해 "붉은 흙을 파헤치고 "약한 짐승을 노릴 때, "별에 날러볼 생각을" 하고 "인간의 서글픈 소식을"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전해 주는 역할에 충실한 기상을 갖춘 제비는 시적 화자에게 찬양받아 마땅한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5연에 이르기까지 시적 화자가 처해 있는 현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늘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산제비는 6연에 이르러 "인간의 서글픈 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 전환된다. 그러다 7연부터는 본격적으로 현실의 모순을 헤쳐 나가려는 화자의 염원이 투사된 대상으로 호명된다. 산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을지언정 결코 땅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과 대비되어 자유를 표상하던 자연적 존재인 산제비가 인간의 세계로 편입되면서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에 맞게 시의 어조도 변화한다. 감탄의 뜻이 수반되는‘~구나’로 끝을 맺던 문장의 서술부는 명령의 뜻을 나타내는 '~어라/~아라'가 대신하게 된다. 이제 화자는 산제비에게 "화살같이 날"라고, "구름을 휘정거리고 / 안개를 헤치라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자신을 대신해 암울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전사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식민 치하의 민중이 처해 있던 참담한 현실은 "땅이 거북이등 같이 갈러"지는 가뭄에 비유된다. 가뭄은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당대의 민중들을 극심한 굶주림으로 밀어 넣는 재해였기 때문이다. 화자는 산제비에게 가뭄으로 메마른 대지에 비를 뿌릴 "구름을 모아" 오라고 엄중하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7연과 9연에서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 "산제비야 날러라, / 화살같이 날러라"와 눈앞을 가린 '구름'과 '안개'를 헤치라는 단호한 명령은,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바라는 미래가 오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제비였을까?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제비는 참새와 함께 우리나라 곳곳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던 새였고 봄의 전령이라고도 불렸다. 이러한 제비를 민중의 희망을 실현할 전사의 형상으로 빚어낸 데에서도 박세영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소설가 이기영은 시집 《산제비》의 서문에 "현하의 정세에는 건실한 이상을 붙여 주는 것만도 우리는 값 높이 사지 않으면 안될 줄 안다." (이기영, 1938:2-3)라고 적었다. 시인이 <산제비>를 비롯한 여러 시편들을 통해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자유와 해방에의 의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보여 준 것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북한문학사에서는 이 시를 "산제비에 의탁하여 우리 인민의 자유와 행복에 대한 갈망을 상징적 수법으로 진실하게 노래한 작품" (박종원·류만, 1988; 이동순·박영식, 2012: 644 재인용)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세 연에서 서로 다른 "구름"의 이미지가 충돌한다는 점을 근거로 박세영이 <산제비>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전망이 구체적이지 않다고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한만수, 2008: 68-71). 가뭄을 해소할 비를 내려 주므로 모아 오고 달고 와야 할구름과 하늘을 가리고 세상을 어둡게 만들기에 헤쳐 가야 할 구름이라는 상반된 이미지가 연이 바뀔 때마다 교차되는 것이 혼란스러우며, 가뭄을 겪는 농민의 절박함을 안다면 비구름을 헤치라는 표현은 쓸 수 없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그러나 충돌하는 구름의 두 이미지가 새롭거나 낯설지 않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7~9연의 구름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면서 구름을 헤치는 것도 구름을 모아 오는 것도 산제비에게 주어진 과업임을 조화롭게 받아들이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 새들의 비행, 그 다양한 의미
하늘 높이 비상하는 새를 바라보며 자유를 꿈꾸는 것은 문학사에 드문 일이 아니며 대중가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그러나 개별 작품 속에 담긴 새의 이미지는 닮은 듯 다르다. 박세영은 산제비를 하늘을 호령하는 자유의 화신이자 낙관적인 미래를 꿈꾸게 하는 전사로 형상화했지만, 김수영은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푸른 하늘을>>고 노래했다. 김수영은 얼핏 보이는 자유로운 모습 이면의 고뇌와 고독에까지 주목하면서 혁명과 자유의 본질적 의미를 통찰하려 했던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 인간은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향유하는 동경의 대상으로만 표상되었던 것도 아니다. 혹자는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강조하기 위해 새를 한계를 지닌 존재로 그리기도 했다. 빠르고 강하게 하늘을 가로지르는 매조차 한 번에 넘지 못하는 험준한 고개라 하더라도 임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단숨에 넘을 것이라는 결의를 노래한 사설시조가 그 예이다. 한편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 1위에 선정되기도 했던 대중가요 <봄날은 간다> (손로원 작사·박시춘 작곡)에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는 봄의 정경 속을 경쾌하게 날고 있는 '산제비'가 등장한다. 1950년대 시골 마을의 조용한 풍경에 담긴이 '산제비'와, 박세영이 노래한 거침없고 역동적인 이미지의 '산제비’를 비교해 봐도 좋겠다. | 김미혜
참고문헌
•2004년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는 현역 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우리 대중가요에서 가장 좋은 노랫말을 세 편씩 꼽도록 한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당시 시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1위에 선정된 곡이 작사가 손로원이 쓴 가사에 박시춘이 곡을 붙인 <봄날은 간다>였다(오광수, 2004),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9. 25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