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창안자의 사유와 창작
-이상옥의 디카시
이상옥의 디카시집 『고성가도 』 에는 모두 50편의 디카 포착 사진과 시가 실려 있다. 한결같이 디카시의 교본을 지키려는 표정과 어투가 편만해 있다. 시도 시려니와 카메라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어서는 빼어난 디카시를 산출하기가 어렵겠다는 느낌이 먼저다. 그러기에 앞에서 '작은 종합예술'이라 덧붙였던 언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카메라의 순간 포착, 디지털화 하는 표현 기법, 영상에 결부된 시적 상상력과 언어의 조합, 그리고 교묘한 지면 배치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곧 한 작품의 연출자임이 역력하다.
얇은 속옷 같은
어둠이 은은히 드리워진
봄밤의 캠퍼스
늦은 강의동 몇몇 창들만 빤히 눈을 뜨고
-「봄밤」
이 시와 결부되어 있는 사진에는 어두운 전체 화면 가운데 대학강의동의 몇몇 창틀에 불빛이 서려 있을 뿐이다. 그 어둠과 빛의 공존을 두고, 시인은 '얇은 속옷'의 '봄밤'을 떠올렸다. 아니면 그 두 개념에 캠퍼스의 야경을 불러 왔는지도 모른다.
고야가 자꾸 물을 마시던 웅덩이
봄날 아침 떠 있는 개구리 형상
저 물풀 예사롭지 않다
우주의 무슨 부호?
혹, 계시의 말씀
-「물풀」
이 시와 짝을 이루는 사진은 수초가 떠 있는 물웅덩이다. '고야'는 다른 시를 보면 그가 기르는 강아지인 모양이다. 물풀을 두고 우주의 부호나 계시의 말씀을 떠올리는 그의 상상력을 카메라가 잘 뒤따라갔는지가 문제다. 이 대목에서 기계는 신의 창작품인 인간의 두뇌 작동과 거리를 두기 마련인데, 어쩌면 디카시는 이 간격을 좁히려는 도전적 의욕에서 말미암는지도 모른다.
하루치의 슬픔 한 덩이
붉게 떨어지면
짐승의 검은 주둥이처럼
아무 죄 없이
부끄러운 산
-「낙조」
산자락 한 편만 보이는 서산의 일몰이다. 희부연 낙조의 태양만 눈동자처럼 떠 있다. 거기서 붉은 '슬픔'을 보고 아무 죄 없는 '부끄러움'을 본다. 누구나 다 스스로의 시선으로 일몰을 보겠지만 이 시인. 아니 이 카메라의 눈은 평상의 자연 가운데서 매우 친숙한 감정의 편린들을 걷어 들인다. 그렇게 그림과 글이 되고 그 묶음이 시가 되어 '디카시'라는 제품이 된다.
비 오는 오월
스승의 날
아침산은 벌써
새하얀 찔레꽃 한 다
마련해 두셨다
-「찔레꽃」
화면에 맑고 흰 찔레꽃잎들과 연초록 잎사귀가 가득하다. 스승의 날이 들어 있는 계절, 그 꽃다발을 아침산이 준비한 형국이다. 필자 개인에게는 이 찔레꽃과 스승의 날이 한꺼번에 가슴을 쳐왔다. 이태 전 '찔레꽃'이라는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시다가 유명 (일)明)을 달리하신 선생님 생각에 금방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것은 독자가 누리는 행운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상옥의 디카시에서 보듯, 디카시는 작고 소박하지만 순간적이고 강렬한 것을 지향한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은 무슨 큰 교훈이나 주의에서 오지 않는다. 이름 없는 친숙한 것들이 얼마든지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 그것으로 성취에 이른 문학 장르에 우리의 단행시조도 있고 일본의 하이쿠도 있다.
이제 현대문학의 새로운 얼굴로서 유년을 넘기고 있는 한국의 디카시가, 축약되고 정돈된 모양만이 아닌, 절제되고 정제된 의미의 깊이를 웅숭깊게 구현해 낼 때가 되었다. 그렇게 도사리고 있는 의미화의 영역이 존재하고서야 비로소 창작 분량의 문제를 넘어 문학적 수준의 문제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사에 기록될 새 장르의 개척이 오히려 부차적인 항목이 되고, 늘 곁에 있던 일상과 새롭게 열리는 탈일상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의미의 깊이와 감동의 힘이 중점 항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디카시는, 한국문학의 뜻있는 지평으로 영예롭게 부상하리라 본다.
김종회교수의 디카시 강론 [디카시, 이렇게 읽고 쓴다] 중에서
2024. 11. 15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