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길을 알았으니 매일 즐기며 기쁘게 걸어야죠.”
불교 책 펴내는 과학자 서울대 이기화 명예교수
▲ 이기화 명예교수는 염불선 수행자다.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다보면 어렵잖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삼매에 이른다고 한다.
‘무엇이 우리를 불교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가’
(종사르 잠양 켄쎄 지음, 이기화 옮김, 예지)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불교의 사법인(四法印 : 제행무상 諸行無常, 일체개고 一切皆苦,
제법무아 諸法無我, 열반적정 涅槃寂靜)을 중심으로
불교의 진수를 설명하는 책이다.
책은 티베트 불교 스님인 저자가 초기 불교에 무게 중심을 두고
불교를 풀어낸 책이지만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봉은사가
신자 교육용으로 이를 대량 구매, 주목을 끌었다.
책을 번역한 이는 이기화 서울대 자연과학대 명예교수.
대한지구물리학회 회장과 명예회장을 지내며 학문적으로도
탄탄한 업적을 쌓았던 이 교수는 지난 2006년 정년퇴임식에서
기념논문집 대신 자신이 번역한 불교 책
‘운명을 바꾸는 법-정공법사의 요범사훈 강설’(불광출판사)을 증정,
화제를 모았다. 이에 앞서 그는 중국 명나라의 고승 우익스님의
저서인 ‘아미타경요해’를 ‘왜 나무아미타불인가’(불광출판사)란
제목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자연과학 연구로 입신한 학자가 불교에 심취하고도 모자라
불교 서적을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이 교수는 “불교 공부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내가 느끼는 즐거움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며 말을 시작했다.
부친이 공무원이었던 집안에서 자라 큰 탈 없이 서
울대 물리학과를 나오고, 유학을 다녀오고,
30대 때 서울대 교수가 됐던 그가 불교를 만난 것은 40대 초·중반.
“예기치도 않았던 가정적 어려움을 만나 심하게 방황했습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헤매다 고향친구로
당시 법련사 주지였던 현호(전 송광사 주지)스님을 만났지요.
그에게 불교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소개해 준 몇 권의 책을 읽으며
불교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 들었습니다.”
불교 공부와 다른 공부를 비교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다고 한 이가 철학자 쇼펜하우어였던가.
그는 불광사를 설립했던 광덕스님의 반야심경 해설을 시작으로,
불교책을 닥치는대로 섭렵했다. 국내에 번역·해설된
여러 종류의 반야심경과 금강경, 원각경, 천수경, 관음경 등의
경전과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은 물론이고 영문으로 된
불교 서적에까지 관심이 자랐다.
그러면서 송광사 방장이었던 구산스님과 일각스님을
차례로 만났고, 일타스님으로부터는 법명도 받았다.
재미는 있으되 책을 읽을수록 불교의 바다는 광대했다.
나는 무엇인가, 도대체 나란 놈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줄기를 잡지 못한 채 헤매기를 여러 해,
2500여년 전 부처님이 처음 법을 편 이래 수천년 흘러오며
8만4000가지로 설명된 길 중에서 어느 길을 걸어야 할지 막연했다.
“처음 불교를 만났을 당시 구산스님으로부터 참선을 권유받았는데,
스님이 열반하시면서 제대로 해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인연이 모자랐던 것이겠지요.”
이렇게 불교의 바다에 빠져 있기를 여러 해,
당시만 해도 마음의 교만이 컸음인지 친구인 현호스님의 조언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길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아미타경 요해’ 영역본을 읽다
염불선이야말로 심오하면서도 광대한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수행법임을 알게 된 것이다.
“현재 한국 불교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참선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도 그중 하나라고 봅니다.
선은 마음이 충분히 정화된 상근기(上根機)의 사람들에게
적당한 수행법입니다.
그렇지 않은 중·하근기의 사람들에게는 어렵고
무미건조한 화두가 들어올 여지가 없어요.
전문 수행자도 힘들어 대부분 포기하는 화두를
보통 사람들에게 권하다 보니 사람들이
자연히 불교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중과 유리된 불교가 어떻게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 교수는 흔히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사람들이
지성이 낮고 우매한 사람들로 알려진 것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했다.
불교에서 깨침으로 인도하는 길은 참선뿐 아니라
밀교, 교학, 염불, 위파사나 등 여러 가지가 있고,
거기에는 우열의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근기에 따른 적합한 방편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참선은 최상의 근기를 요구하고 밀교는 번다한 의식이 필요해요.
교학을 하더라도 충분한 학식이 필수적이지요.
여기에 비해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수행은
최상의 근기에서 최하 근기, 일자무식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쉽고 간편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또 수행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마장이 생겨
수행의 길에서 물러나는 수가 많은데
마장이 없고 안전하며 물러서지 않는 것도
아미타불 수행의 장점입니다.”
그는 말로만 염불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이 실제로 시간이 날 때마다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외며
염불을 한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집중돼
어렵지 않게 염불삼매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염불선에서 공부의 맛을 느낀 뒤 근기에 따라
‘염불하는 이놈이 무엇인가?’하는 의심을 챙기면서
간화선과 결합하면 기존의 간화선보다 빨리 화두를 들 수 있는
장점도 있다고 말한다. 불교의 출발이 ‘내가 무엇인가’에 있는 만큼,
나를 알아가는 것은 참선이나 교학이나 염불선이나 같고
종국에는 이들이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대학에서 정년 은퇴한 뒤 자신의 전공분야와 관련해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있는 그는
올해 중 이 작업이 끝나는 대로 불교 공부와 수행에 매진할 생각이다.
책을 읽으며 좋은 책을 알리는 일,
현재 일반인들에게 지나치게 어지럽다고 느껴지는
불교의 기본원리를 쉽고도 간명하게 설명하는 책을 쓰는 일도
그의 바람 중 하나다. 봉은사 주지인 명진 스님의 부탁으로
오는 10월부터 이 사찰 부설 불교 아카데미에서
강의할 계획이 잡힌 것은 벌써부터 그를 들뜨게 한다고 털어놓는다.
“젊은 시절, 자연과학연구에 빠져 있을 때는
전공 분야 연구만 최고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40대의 예기치 않았던 방황이 불교와의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지요.
이제 길을 알았으니 매일 즐기며 기쁘게 걷는 것만 남았습니다.”
2009. 5. 1.
김종락 기자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