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마5:5절)
8복에서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이 아닙니다. 8복은 천국시민의
절대윤리의 근간이기 때문에 땅에서 난 인간의 형상에 의한 성품이 아닙니다.
이 온유는 진리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거듭난 자로 성령 안에서
영의 허기를 호소하지만 여전히 거추장스러운 겉 사람으로 인해 애통하므로
성령의 위로를 받는 체험이 있는 자들이 맞닥뜨리는 단계가 바로 온유입니다.
인간으로서 온유의 모델은 먼저 모세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모세 자신이 자평한 말입니다.
모세가 성격이 좋은 사람입니까? 따뜻하고 부드럽습니까? 그래서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까? 아니죠 모세는 성질나면 사람도 죽여 버립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열을 받아 하나님께 받은 돌비도 깨뜨립니다. 다만 계시로 그리스도를 멀리서
보고 믿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데 있어서 당대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의 온유는 세례 요한입니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요1:27)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거친 말로 회개를
촉구하고 헤롯에게 담대하게 대드는 성격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생쥐와 같습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온유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유를 시범으로 보이셨습니다.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다 주께서 와서 멍에를
매는법을 배우라고 하시고는 자신은 온유하고 겸손하게 항상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멍에를 매고 이 땅에 육신으로 행하시는 짐이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마11:28-30)
주님께서 항상 아버지를 나타내십니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내 속에서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다 등으로 오직 아버지입니다.
종교인이나 인문학적인 교육이론으로 가르치는 이들은 온유를 사전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휴머니즘은 선악과의 독성에 찌든 아담의 자손들이 선을 추구하는 미학입니다.
자유의지라는 말을 쉽게 사용하는 사람들은 양의 문에 들어간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피동이 되어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행자지할 수 있다는 망언은 결코 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한국의 신학의 수준에 의해 전 세계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이
그 나라의 주류신학에 의해 아웃사이드가 됩니다. 아프리카는 영국이 뿌린 신학에
의해, 남미나 동남아 등은 미국신학에 의해, 중국은 이미 그 속에 자생한 영성에 의해
한국 선교사는 겨우 돈으로 교회 건물을 짓거나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짓는 선(善)한 일을
하는 선교를 할 뿐 진리의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宣敎)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미국에서 자생한 신사도주의에도 쩔쩔매는 모습이 목도되는 실정입니다.
여러 나라에 나가 고생하는 있는 선교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게 바로 모기지인
한국의 신학의 현재이기에 독학이라도 하여 말씀으로 그 나라의 중심에 침투해야죠.
한국교회를 보면 어릴 때에 기차놀이를 한다고 끈을 허리에 두르고 앞장 선 사람이
운동장을 빙빙 도는 놀이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건 회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본인은 회개를 한다지만 하나님의 기준의 회개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의한
선악간의 회개가 되어 아담 안에 빼앗긴 땅에 그대로 서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주 역사하시 않으시고 밖에서 나타나시는 은사와 표적뿐인 겁니다.
아직 신앙의 본 게임이 시작도 안 된 상태입니다. 교회에 모여서 훈훈하고 다정한
메시지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돌아가지만 그만 개구리 낯짝에 물 끼얹기가
되고 맙니다. 그건 아무리 조심조심하지만 그 자리는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땅이라
삐거덕하면 사망이 급료로 지급이 되고 사망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그 상쾌함이나 기쁨이 사라지고 원인 모를 불쾌감과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항상 뒤 따르게 됩니다. 이를 떨쳐버리려고 특새니 일천번제니 하지만 그건 교회의
생존 몸부림일 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신승리뿐입니다.
눅15장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일, 한 드라크마를 찾고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오는 일들이 회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15:7,10) 찾는 자에게 찾음이 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집 나간 탕자가 그 자리에서 땅을 치고 통곡하고 뉘우치며
회개한다고 참 회개가 되는 게 아닙니다. 비록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기다리는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에 회개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빼앗긴 들에서 아무리 통회 자복해도 그건
고해성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온유는 굴복, 자기를 낮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회개를 배워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에 자신을 얹어 팔고 주를 주인으로 사들이는 것이 바로 온유(exchange)입니다.
인간이 말하는 회개는 선악간에서 이루어지지만 성경의 회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야만 이루어집니다. 먹지 말라는 걸 먹고 죽어 사망과 음부에 빠진
인간들의 참 회개는 먹고 살라고 주신 그 아들을 먹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십자가를 내가 지고 그의 살으심에
연합이 되는 온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아담 안에 있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새 사람으로 거듭난 자로 옛 땅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땅으로 환승하여 하늘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놀랍게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사망과 음부에서 먹고 자고 일어나 출퇴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 증거는 육체의 비오스의 생명을 위해 배가 신이 된 사람, 정신승리에 안간힘을
쓰는 푸쉬케의 생명을 찾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류가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조에의 생명은 오로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가 새로운 땅에서 다운받는
복입니다. 그 새 땅에서는 드디어 그리스도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으로 인해 간절히
주의 나타나심을 구하므로 영의 배부름으로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마5:6-7) 그래서 온유한 자는 새 땅으로 환승하는 복 된 사람입니다.
첫댓글 좋은 성경 자료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