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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지대본위화폐' 시대를 상상한다⑦ㅡ그래서 위안화와 유로, CBDC와는 어떻게 되는가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AI 동료들
지난 회에서 세계연방은행과 그 화폐를 제안했다. 이름은 아직 없으므로 이 글에서는 편의상 '테라(Terra)'라 부르기로 한다. 땅이자 지구를 뜻하는 라틴어이니 담보가 무엇인지 이름이 말해주는 셈인데, 어디까지나 가칭이다.
원리는 세웠으되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으실 것이다. 위안화와 유로는 없어지는가. 무역대금은 어떻게 주고받는가. 지대가 오르내리면 화폐도 출렁이는 것 아닌가. 이번 회는 그 물음들에 답하는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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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오해 — 자국 화폐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오해가 이것이다. 테라는 위안화나 유로, 원화를 대체하지 않는다.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여전히 위안으로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독일인은 유로로 월세를 내며, 우리는 원화로 월급을 받는다. 국내 경제는 그대로다. 테라가 쓰이는 곳은 나라와 나라 사이다. 무역대금을 정산하고, 외환보유고를 쌓고, 국제 투자를 매개하는 자리. 지금 그 자리를 달러가 차지하고 있는데, 그 자리를 바꾸자는 것이다.
이것은 유로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기도 하다. 유로는 회원국의 마르크와 리라와 프랑을 없앴다. 그래서 각국이 통화정책 수단을 잃었고, 위기가 왔을 때 환율로 조정할 길이 막혔다. 그리스가 겪은 고통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나왔다. 테라는 그 위험을 지지 않는다. 각국은 자기 화폐와 자기 중앙은행을 그대로 갖는다.
어떻게 발행되는가
절차는 세 단계다.
먼저 각국이 자국 영토에서 한 해 동안 발생한 지대의 총액을 산정해 등록한다. 국민계정에 지대 계정을 신설하는 셈이다. 다음으로 세계연방은행이 그 등록치를 검증한다. 각국이 스스로 평가하되 이웃 나라와 상위 단위가 교차로 확인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검증된 세계 총지대의 일정 비율만큼 테라가 발행된다. 지난 회에서 말한 대로 전액이 아니라 8할 전후로 두고, 나머지는 위기에 대비한 여유분으로 남긴다.
여기서 지난 회의 첫 번째 설계 원칙이 작동한다. 발행의 기준과 배분의 원칙은 다르다. 총량은 세계 총지대에 연동하지만, 각국에 돌아가는 몫은 지대 지분과 인구 지분을 함께 반영한다. 예컨대 절반은 지대 비율로, 절반은 인구 비율로 배분하는 식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대도시를 가진 몇몇 나라가 발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그러면 1테라는 얼마인가. 출발점에서는 1달러 언저리로 잡는 것이 실용적이다. 사람들이 크기를 가늠할 수 있어야 채택 비용이 줄기 때문이다. 유로도 그렇게 출발했다.
그러나 맞추는 것과 묶는 것은 다르다. 개시일 하루만 달러를 참조해 눈금을 정하고, 그 다음 날부터는 세계 총지대에 연동한다. 미터 원기를 만들 때 지구 자오선을 참조했지만 일단 만든 뒤에는 자오선을 다시 재지 않는 것과 같다. 달러에 고정한다면 미국의 통화정책이 그대로 수입되어 독립성이 무너진다.
그렇다면 테라의 값은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검증된 세계 총지대를 발행량으로 나눈 것이다. 1테라는 인류가 해마다 함께 만들어내는 장소가치의 몇 분의 일이라는 몫이다. 그래서 이 화폐에는 특별한 성질이 있다. 물가가 올라 세계의 명목 지대가 커지면 발행량도 함께 늘어나므로, 1테라가 대표하는 실물 몫은 변하지 않는다. 달러로 환산한 값은 오르내려도 실질은 유지되는 것이다.
무역은 이렇게 정산된다
중국 기업이 독일에 태양광 패널을 수출한다고 하자.
지금은 이렇게 돌아간다. 독일 수입업자가 유로를 달러로 바꿔 지불하고, 중국 수출업자는 그 달러를 위안으로 바꾼다. 양쪽 다 자기 화폐를 쓰지 않는데 미국 통화를 거쳐야 하고, 환전 비용과 환율 변동 위험을 감수하며, 미국의 금융제재가 발동되면 거래 자체가 막힌다.
테라 체제에서는 독일 수입업자가 유로를 내면 세계연방은행의 장부에서 독일 계정이 테라만큼 줄고 중국 계정이 그만큼 늘어난다. 중국 수출업자는 위안으로 대금을 받는다. 양쪽 모두 자기 화폐만 만지고, 그 사이의 정산은 장부상의 기록으로 끝난다. 케인스가 국제청산동맹에서 구상했던 방식이 이것이다. 실물 화폐가 오가는 것이 아니라 계정이 상계되는 것이다.
그리고 흑자국에도 부담을 지운다
여기에 이 체제의 핵심 장치가 하나 있다.
지금의 국제통화기금 체제는 적자국만 조인다. 돈이 모자란 나라는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긴축을 강요당하지만, 만성적으로 흑자를 쌓는 나라에는 아무 부담이 없다. 그래서 불균형이 한없이 커진다. 앞서 살펴본 중국의 과잉수출과 미국의 과잉적자가 40년째 되풀이되는 배경이다.
케인스는 이것을 예견하고 양쪽 모두에 부담을 지우자고 제안했다. 계정이 일정 한도를 넘어 흑자여도, 적자여도 이자를 물리는 것이다. 그러면 흑자국은 쌓아두기보다 수입을 늘리거나 투자를 하려 하고, 적자국은 무한정 빚을 늘리지 못한다. 균형이 자동으로 회복되는 구조다.
브레튼우즈에서 이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당시 최대 흑자국이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이 장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중국은 원가 이하 수출로 흑자를 쌓을 유인이 줄었을 것이고, 미국은 적자를 무한정 늘리지 못했을 것이며, 관세 전쟁도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안화는 어떻게 되는가
중국의 처지에서 보면 이 체제는 손해처럼 보인다.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려는 오랜 노력을 접는 셈이니까.
그러나 셈을 해보면 다르다. 위안화 국제화는 20년 넘게 진전이 더디다. 자본통제를 풀지 않으면 국제화가 어렵고, 자본통제를 풀면 자본 유출을 감당해야 하는 딜레마 때문이다. 그런데 테라 체제에서 중국은 자본통제를 유지한 채로도 국제 결제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다. 국내 화폐와 국제 화폐가 분리되어 있으니 딜레마 자체가 사라진다.
게다가 지대 지분으로 보면 중국은 최상위권이다. 인구가 많고 도시가 조밀하기 때문이다. 패권은 갖지 못하되 최대 지분은 갖는 자리 — 위안화 국제화가 끝내 이루지 못할 위상을 다른 방식으로 얻는 셈이다. 여기에 앞서 살펴본 국내 개혁, 곧 일시금 출양제를 연간 지대로 바꾸는 개혁이 결합하면 지분은 더 커진다.
유로는 어떻게 되는가
유럽의 사정은 정반대 방향에서 유리하다.
유로의 고질병은 공동의 담보가 없다는 것이었다. 통화는 하나인데 담보는 열아홉 개라 위기 때마다 분절이 일어난다. 그런데 회원국들이 각자의 지대 유량을 세계연방은행에 등록하면, 그 등록치는 유로존 안에서도 공동 담보로 쓸 수 있다. 조약을 고치지 않고, 재정이전 논란도 피하면서 숙원이던 공동 안전자산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회에서 짚은 반전이 여기서 일어난다. 재정 신용으로 줄을 세우면 남유럽이 약체지만, 문화적 장소가치로 줄을 세우면 최강국이다. 이탈리아와 그리스가 구제받는 쪽에서 담보를 대는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환율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각국 통화와 테라 사이의 환율은 시장에서 정해지되, 그 바탕에는 지대 지분이 놓인다. 어떤 나라의 지대 유량이 세계 총지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 그 나라 통화의 테라 표시 가치도 오른다.
여기서 유인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수출을 늘리려 자국 통화를 약하게 유지하려는 유혹이 상존한다. 환율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 테라 체제에서 통화가치를 지키는 길은 자기 나라의 땅이 만들어내는 사용가치를 키우는 것이다. 도시를 살 만하게 가꾸고, 교통과 교육을 개선하고, 사람이 모여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드는 일. 그것이 곧 국제적 구매력으로 이어진다. 화폐 경쟁이 삶터 가꾸기 경쟁으로 바뀌는 셈이다.
지대가 출렁이면 화폐도 출렁이지 않는가
당연한 걱정이다. 세 가지 장치로 다스린다.
첫째, 재평가 주기다. 해마다 시장 임료를 그대로 반영하면 통화량이 부동산 경기를 따라 요동친다. 3년에서 5년 주기로 전면 재평가하고 그 사이는 지수로 보정하는 편이 안정적이다.
둘째, 발행 여유분이다. 총지대의 8할만 평시에 발행하고 나머지를 남겨두면, 경기가 꺾여 지대가 줄어도 곧바로 통화 수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금본위제가 대공황에서 무너진 것은 이런 완충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 분산이다. 세계 수천만 필지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흐름이므로 어느 한 지역이 침체해도 다른 지역이 받친다. 몇몇 광산에서 나오는 금이나 한 나라의 정책에서 나오는 달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과대신고의 유혹은 없는가
날카로운 물음이다. 지대를 부풀려 신고하면 발행 지분이 커지니 유인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 설계에는 자기억제 장치가 들어 있다. 등록하려면 실제로 거둬야(징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부에 올린 지대는 그 나라가 자국 토지 보유자들에게 실제로 부과하고 징수한 금액이어야 한다. 지대를 부풀려 신고하려면 국내 납세자의 부담을 그만큼 늘려야 하는 것이다. 국제적 지분을 키우려는 욕심과 국내 정치의 저항이 정면으로 충돌하니, 과대신고는 저절로 억제된다.
반대로 과소신고는 어떤가. 그것은 스스로 지분을 깎는 일이니 할 이유가 없다. 결국 각국은 정직하게 걷고 정직하게 등록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 지난 회의 세 번째 원칙인 보충성 — 평가는 지역이 하고 검증은 상위 단위가 교차로 한다 — 이 여기에 얹히면 신뢰가 확보된다.
작게 시작할 수 있다
전 세계가 한꺼번에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방식은 성사된 적이 없다.
국제 청산부터 시작하면 된다. 참여국들끼리 무역대금을 테라로 정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태 전환 투자에 쓴다. 재생에너지 설비와 산림 복원처럼 국경을 넘는 공공재 성격의 투자에 테라를 배정하는 방식이다. 그다음으로 공공 배당을 시험한다. 배분받은 테라의 일부를 시민에게 직접 지급해보는 것이다.
유럽연합만으로도 시작할 수 있고, 브릭스만으로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든 장부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참여할 이유가 생긴 나라들이 뒤따를 것이다. 국제결제은행도 유럽 몇 나라의 실무 기구로 출발했다.
그러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는 무엇이 다른가
요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논의가 활발하다. 은행화폐가 만든 불평등과 위기를 넘어서려면 화폐 발행 권한을 공공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국내에도 이를 다룬 책들이 나와 있다. 진단에는 필자도 동의한다. 화폐 대부분이 민간은행의 대출로 만들어지고 그 발행 이익이 사적으로 귀속된다는 것, 그것이 불평등과 주기적 위기를 낳는다는 것. 앞선 회에서 원화를 두고 한 이야기와 같은 진단이다.
다만 겨냥하는 지점이 다르다. 이 흐름은 화폐를 누가 발행하는가를 묻는다. 민간은행에서 중앙은행으로 발행 주체를 옮기자는 것이다. 이 연재가 묻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발행하는가다.
층위가 다르니 앞의 것만 바꾸어서는 문제가 남는다. 중앙은행이 발행을 독점해도 그 발행의 근거가 여전히 국채나 부동산 담보라면, 발행 이익의 귀속처는 바뀌지만 미래를 당겨쓰는 구조는 그대로다. 미국이 그 예다. 연방준비제도가 발행하되 그 자산의 양대 축은 국채와 주택저당증권이니, 발행 주체는 공적인데 담보는 아직 걷지 않은 세금과 아직 오지 않은 지대인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발행 주체를 공공으로 옮기면 "그러면 얼마나 발행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남는다. 이 물음에 대개는 독립적인 위원회의 판단에 맡기자고 답하는데, 그것은 규율이 아니라 재량이다. 재량은 정치에 열려 있고 정치는 늘 더 찍는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지대본위는 바로 그 빈칸에 검증 가능한 실물의 유량이라는 규율을 넣자는 제안이다.
그러니 두 흐름은 다투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빈칸을 채우는 관계다. 공적 주체가, 검증된 지대 유량에 연동해, 정해진 규칙에 따라 발행한다 — 둘을 합치면 이런 그림이 된다.
덧붙이면 디지털 기술 자체는 이 구상의 적이 아니다. 각국의 지대 유량을 실시간으로 등록하고 검증하며 국경을 넘어 정산하는 일에는 오히려 요긴한 기반이다. 다만 한 가지는 경계해야 한다. 결제망이 중앙은행 장부에 직결되면 제재와 동결은 지금보다 훨씬 쉬워진다. 계좌 하나를 잠그는 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릇을 바꾸는 일과 내용을 바꾸는 일은 다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둘 다다.
남는 물음
물론 이 그림이 다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발행비율을 8할로 할지 7할로 할지, 배분에서 지대와 인구의 비중을 어떻게 나눌지, 흑자국 부담의 수준을 어디에 둘지는 모두 논쟁의 대상이다. 참여국이 적을 때 이 화폐가 실제로 통용될 수 있을지도 검증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의 체제는 이미 작동하지 않고 있다. 한 나라의 통화가 세계의 기준이면서 동시에 그 나라의 무기가 되는 구조, 불균형이 쌓이기만 하고 조정되지 않는 구조, 그리고 화폐가 태어나는 입구에서 이미 자산 가진 쪽으로 기울어 있는 구조. 이것을 그대로 두고 다른 문제들을 풀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다음 회부터는 이 기준이 나라마다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 하나씩 따져본다. 먼저 우리 자신이다. 원화는 정말 아무 본위도 없는 피아트 화폐인가. 두 회에 걸쳐 진단과 처방을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