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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다음날 아침이 되자 라혼은 회의를 소집하여, 군사를 나눈 뒤 봉수부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행군하여 무력 시위 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우르하 부족은 이곳 진토인들의 방식에 따라 모두 라혼 개인의 노예로 삼았다. 진토인들의 전쟁이란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진토인들의 방식과 다른 것은 남자를 죽이거나 또는 거세를 하는 것인데, 라혼의 입장에선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두고 물론 아내도 빼앗지 않았다. 우르하족도 이미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승자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그것으로 라혼은 이 첫 번째 토벌로 진토인들이 주축이 된 반란을 제압하는 방식을 알아냈다. 그리고 라혼은 드디어 드워프 마을에 가서 차분하게 지낼 여유를 확보했다. 라혼은 가니아와 함께 도깨비 숲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노, 놀랍군요. 다, 당신은 신선(神仙)인가요?”
“확실히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신선은 속세에 관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지 않나요?”
“내가 신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신선들의 규칙을 지킬 이유는 없다오. 나는 신선이지만 또 한편으론 신선이 아니거든.”
라혼이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한 곳은 귀림(鬼林)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드워프 마을로는 직접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가 되지 않았다. 다만 홍칩의(訌蟄蟻)란 개미들의 개미집이 우글거리는 개미지옥만 피했을 뿐이었다.
“음? 이상하군요. 저쪽에서 저와 불새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초록 용이 사는 곳인가요?”
“아니, 이곳에 살던 초록 용은 신룡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오. 그리고 그곳은 드워프, 그러니까 토지신들이 사는 마을이 있는 방향이오.”
“….”
라혼의 설명을 들은 가니아는 마치 소녀가 된 듯 좋아했다.
“음?”
“왜? 아!”
라혼의 감각에 어디선가 싸우는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라혼에게 매우 익숙한 기운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라혼의 반응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가니아는 비로소 뭔가 떠올랐는지 탄성을 토해냈다.
“누군가 근처에서 죽임을 당하는군요.”
“….”
“가서 도와요.”
가니아는 라혼이 지금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로 한 번에 갈까 아니면 신법으로 뛰어갈까 고민하는 것을 도울까 상관하지 말까 하는 것으로 오해해 그들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것은 라혼의 고민을 끝내게 했다.
“어머!”
라혼이 가니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으며 그대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백호영의 독문신법(獨門身法)인 풍운조화신법(風雲造化身法)이었다. 풍운조화신법은 여의금강공(如意金剛功)의 공력의 바탕이 된 여의조화신공(如意造化神功)의 이치를 담은 절세의 경공으로 한 줌 진기로 주변 대자연의 기(氣)를 이용해 달리는 신법이었다. 가니아는 허공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밀림 위를 달리는 라혼의 몸을 붙잡았다.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리는 듯했지만 살갗으로 느껴지는 바람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라혼이 결계를 쳐서 엄청난 풍압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밀림을 이루는 나무 위, 수해(樹海)를 20리(二十里)쯤 달리자 두 무리가 한창 살육전을 벌이는 전장 바로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단 도착하고 보니 참으로 난감했다. 누구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유운검법(流雲劍法)?”
바로 라혼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익숙한 기운을 사용하는 묘령(妙齡)의 미녀(美女)가 다름 아닌 라혼이 만든 유운심법(流雲心法)을 기초한 유운검법을 펼치며 여인으로만 이루어진 진토인들을 주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토인 여인들은 무장한 모습으로 침입자들과 맞싸우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역시 무장을 한 트롤(Troll)이 그런 진토인 여전사의 부림을 받아 이곳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과 연합한 진토인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차레족의 여전사들은 무공을 모르는 듯했지만 그녀들이 부리는 트롤(Troll)은 웬만한 고수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뭐 하세요! 어서 저들을 도와요!”
“누굴 말이오?”
“저들은 여인 부족인 차레족이에요. 저들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선량한 부족이에요.”
“하지만 그 차레족을 공격하는 쪽은 나와 인연이 있는 듯한데….”
“아니에요, 저들이 바로 남례 일족의 고수들이에요.”
앳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127년을 허투루 산 것이 아닌 가니아는 그동안 지내오며 라혼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한 듯했다. 빚을 지고 살지 못하는 라혼에게 사정이 있어―드워프들의 지식을 갈취하는 일 때문에― 미뤄두었던 빚의 일부(?)를 갚을 기회가 왔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허리춤에서 그동안 쓰지 않았던, 설화의 나비를 뜻하는 호접검(蝴蝶劍)과 쌍을 이루는 말벌을 뜻하는 호봉검(胡蜂劍)을 뽑아들고 그대로 살육전이 한창인 전장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헉!”
라혼은 백호영의 독문보법인 군림천하보(君臨天下步)를 밟으며 보법에 맞춰 약간 초식을 바꾼 유운검법으로 전장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라혼의 호봉검은 검면이 좁은 협봉검인데 낭창낭창한 연검이기도 해서 검편(劍鞭)으로도 볼 수 있는 기병(奇兵)이었다. 그러나 들판에 평범한 풀잎 하나로도 라혼의 손에 들리면 신병이기와 다를 바 없으니……. 군림천하보는 만력이 창안하고 라혼이 보완한 것으로, 매우 공격적인 보법이었다. 어찌 보면 보법인 동시에 독립된 하나의 권법이었다. 거기에 라혼은 피어(fear)를 가미해 더욱 위력적으로 만들었다.
―쿵! 쿵쿵쿵쿵쿵쿵쿵쿵….
―퍽!
―쿠워엑~!
군림천하보(君臨天下步)는 지축이 울리는 듯한 특유의 육중한 소리와 그런 보법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가볍기 그지없는 검법은 어찌 보면 상호 보완이 잘되는 듯했다. 라혼은 되도록 사람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특유의 검경(劍勁)으로 상대를 쳐나갔다. 라혼 특유의 예리함을 죽인 검경에 맞은 상대는 만근 바위에 맞은 듯 사방으로 흩어져 나뭇등걸에 처박혔다. 그것은 아무리 맷집 좋고 웬만한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하는 트롤이라 해도 별수 없었다. 흉성을 드러내며 이빨을 드러낸 트롤들은 라혼이 휘두른 호봉검(胡蜂劍)에 맞는 순간, 괴성과 함께 허공을 날다가 땅바닥에 처박히면서 혀를 길게 내밀고 기절했다.
“누구? 서, 설마 유운검법?”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극 절세 고수가 장내에 난입하자 그 위세에 밀려 한순간 전투는 멈췄다. 그리고 그가 구사한 검법이 누군가와 꼭 닮았다는 생각에 차레족을 핍박하던 무리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정작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녀였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싸움을 힘으로 중단시킨 초극 절세 고수는 오연(傲然)한 자세로 좁은 검면의 협봉검(陜蜂劍)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의 시선이 계속 한곳에 머물러 있자 그 시선이 머문 자리 옆에 있던 검은 피부에 큰 눈 그리고 하얀 치아가 인상적인 청년이 앞으로 나서더니 읍(揖)하며 물었다.
“고인의 청수를 방해된 것에 사과드립니다. 혹 고인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을는지요?”
“나는 라혼이다.”
“잠깐요. 당신은 해노 할아버지와 어떤 관계죠? 당신이 사용한 검법은 함관검부의 조사께서 만든 원류 유운검법이 분명해요?”
라혼은 검부의 한포포가 분명한 그녀에게 자기가 바로 해노(海老)라고 밝히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신분을 대충 꾸며서 대기로 했다.
“유운검법을 쓰는 것을 보니 당신은 한포포가 분명하구려.”
“맞아요! 제가 동인성 함관부에 있는 검부의 한포포예요!”
흑의 경장 차림을 한 한포포는 상대가 자신을 아는 듯하자 기쁜 듯이 눈빛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대무도경의 전인이오!”
“헉!”
“음!”
대무자(大武子) 해노야(海老爺)의 위명은 과거 18년 전 천하를 진동시켰다. 지금은 웬만한 세력을 가진 문파라면 대무자의 대무도경(大武道經)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내용의 현묘함에 아직까지 많은 고인(高人)들로 하여금 머리를 싸매게 했다. 그리고 대무자 해노야의 무공 우위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몇 가지가 있었으니 과거 검부의 혈사(血史)의 원인이 된 검부를 둘러싼 돌로 된 성벽 전체에 대무도경의 구문을 새겨 넣은 것이나 그에게 사사한 좌우무공(左右武公) 한씨 형제의 무공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한씨 형제는 대무자의 독문무공은 전해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대무자의 전인이라면….
“할아버지는 안녕하신가요?”
“안녕하오.”
라혼이 한포포와 대화하는 사이 남례 일족의 소야(少爺)는 수하에게 라혼이 바로 백호나한임을 보고받고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하하하, 천하의 백호나한이 대무자의 전인이었을 줄이야! 소생은 남례 일족의 예하(藝河)라 하오. 이렇게 만나서 매우 반갑소이다.”
라혼은 자신을 아는 척 접근하는 예하라는 사내를 무시하고 한포포에게 물었다.
“한 소저는 남례 일족과 무슨 관계요?”
“어머? 당신이 백호나한?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와 남이 아니에요. 저는 백수회의 남례 총타주의 신분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남례 일족은 잠정적으로 우리 백수회와 손을 잡고 있는 관계구요!”
라혼은 일주일쯤 전에 봉수 태수 돈석을 통해 백수회와 손을 잡자는 뜻을 밝힌 적이 있었다. 아마 그 이야기를 스스로 남례 총타주라 밝힌 한포포가 알고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남이 아니라니 묻겠소! 무엇 때문에 이들을 핍박하는 것이오?”
“그, 그건….”
“이곳 귀림에 산다는 토지신은 이미 나와 관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이곳을 공격할 이유가 없을 텐데?”
“….”
라혼은 자신을 예하라고 밝힌 사내가 흠칫 놀라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그러한 사실은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라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슬쩍 떠보았다.
“혹, 장생불로의 묘약이라도 찾고 있는 것이오?”
“….”
라혼이 보기에 그들의 겉모습은 별 동요의 기색이 없었지만 그들의 기운은 그들이 드워프, 토지신들이 가지고 있을 불새의 깃털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역시 그렇군. 그러나 그것은 주인이 따로 있으니 포기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쿵!
마지막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라혼은 그들에게 고르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가니아, 이젠 내려오시오.”
라혼은 그런 그들을 그대로 두고 나무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가니아를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수법으로 땅으로 내려오게 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홍발천녀(紅髮天女)의 모습은 너무나 신비로웠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차레족 여전사들은 저마다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그들과는 벌써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알고 지내던 관계였다. 과거 한때는 우르하족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우르하족의 주모(朱母)는 차레족에게도 신성한 존재였다.
“주, 주작의 무녀? 주작의 무녀가 어찌 백호나한과…?”
가니아가 상처입은 차레족을 치료하는 모습을 경악을 금치 못하며 쳐다보던 예하는 백호나한이 이야기한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뜻을 사무치도록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얀빛으로 가슴과 복부에 이어진 생명이 위중한 상처를 감쪽같이 치료하는 모습을 보자, 그동안 들인 공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남례 일족의 소야(少爺) 예하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리고야 말았다.
“보물의 주인은 언제나 하늘이 정하는 법! 귀인대(鬼人隊)는 주작의 무녀의 신병을 확보하라!”
“흥! 감히 우리 백수회를 무시하는 겁니까? 예하 공자?”
“한 줌도 안 되는 백수회 따위는 무섭지 않다.”
“네놈이…?!”
한포포는 남례 일족의 소야 예하의 앞을 검을 세우며 막아서다 정신이 핑! 도는 느낌과 함께 몸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크크크, 혼미산(魂迷散)이란 것이다. 색도 냄새도 없는 아주 요긴한 물건이지! 그리고 해독제까지 따로 있어서 써먹기도 편하지. 음!?”
―퍽!
―쿵!
쓰러진 한포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한순간 한눈을 팔던 예하는 눈앞에 발바닥을 본 순간, 번쩍하는 느낌과 함께 허공을 날아 나뭇등걸에 처박혔다. 그것을 시작으로 라혼의 인정사정없는 살풀이가 시작되었다. 우습게도 소야 예하의 혼미산(魂迷散)은 라혼에게 확실한 적아(敵我)를 구분하게 하는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설화와 꼭 닮은 가니아 앞에서 차마 살상을 저지를 수 없어 무공을 폐하는 수준에서 쓰러지지 않은 모든 인물들의 무공을 폐해버렸다. 무인에게 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는 형벌이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있는 존재라고는 오직 라혼과 불새의 무녀인 가니아만 남게 되었을 때 가니아는 주변을 돌면서 차레족 여전사와 라혼과 관계 있는 자들을 깨웠다.
“감사드려요.”
―포아, 오랜만이구나! 내가 그때 괜한 짓을 해서 네 아비를 죽였구나!
“?!”
라혼의 전음성에 한포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만히 미소짓는 그의 모습에 한포포는 앞에 있는 이 헌헌미장부가 해노야, 라혼 할아버지임을 알고 크게 놀랐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맞나요?
―겉모습이 바뀌긴 했지만, 네가 할아버지라 부르던 해노가 바로 나다. 네 오빠들의 이야기는 소문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네 안부가 궁금했는데, 강무가의 그 사람이 나의 의도를 제대로 알았구나.
한포포는 앞의 젊은 사내가 양부인 낙왕 강무산이 들려준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 의심을 떨쳐버렸다.
―그렇군요. 해노야 할아버지는 당신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위장했던 것이군요.
―…?
라혼은 한포포의 전음을 받고 그녀가 일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고 느꼈다.
―아무리 무공이 극한에 이르러 반로환동한 고수라지만 치아가 그렇게 깨끗할 순 없어요. 더 이상 절 속이려 들지 말아요. 전 더 이상 그때의 조금만 계집아이가 아니에요!
라혼은 그 건에 대해선 그대로 덮어두기로 했다. 지금 이 모습으로 말만한 처자에게 할아버지 대접받는 것도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라혼이 아무런 대꾸나 반박을 하지 않자 한포포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을 굳혔다. 그러자 괜스레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며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고 보니 옷을 홀딱 벗고 그의 손에 씻기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인간이라면 유아기 때 기억이 희미할 것이나 수인(獸人)들은 유아기 때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한포포는 수인(獸人)이었다.
한포포는 귀가 머리에 튀어나온 모습으로 쫑긋거리며 라혼을 외면한 채 부하들에게 기절한 남례 일족을 포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1대는 저것들을 포박하고, 2대는 부상자와 시신을 수습해라!”
“존명!”
백수회의 무사들은 남례 총타주인 한포포가 고양이 귀를 드러내고 쫑긋대며 지시하자 무척 화가 난 모양이라고 수군대며 빠른 몸놀림으로 장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은공(恩公)!”
차레족의 족장인 쿠차레는 어려운 지경에 처한 자신들을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는 삼단 같은 고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내려 화려한 색상의 새 깃털로 장식하고, 검고 탄력 있어 보이는 피부와 싸우는 전사임을 증명하듯 굴곡이 선명한 허벅지와 팔의 근육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탄력 있는 몸매를 봐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으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었는지 눈가에 중년 이상의 나이를 먹은 듯 잔주름이 눈에 띄었다.
“저희들을 도와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갚는 것은 당연한 법. 저희가 은혜를 갚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말이오?”
은혜를 갚겠다고 하니 거절할 라혼이 아니었다. 뭔가를 얻어서 손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희들이 오늘 밤 잠자리를 뫼시겠습니다.”
“….”
“무슨 소리야!”
라혼이 할 말을 잠시 잊은 동안 옆에서 라혼과 차레족 족장 쿠차레의 대화을 엿듣고 있던 한포포가 먼저 반응했다. 한포포가 끼어들자 차레족 여전사들은 언제라도 무기를 꺼낼 듯 경계했고, 족장인 쿠차레가 일침을 가했다.
“흥! 너는 아직 우리의 적이다! 다만 은공과 관계가 있고 동료에게 배신을 당한 것 같아 은원을 잠시 접어두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일에 끼어들지 마라!”
“아니, 뭐야?”
“포아! 그만 해라!”
“대가!”
얼떨결에 손녀였던 한포포가 호칭을 할아버지에서 대가(大哥 : 오라버니)로 바꾸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라혼의 신경은 그런 소소한 것에 신경쓸 만큼 예민하지 못했다. 그리고 차레족의 요구에 응할 라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니아의 말이 일언지하에 거절하려는 라혼의 말문을 막았다.
“라혼,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면 그들을 모욕하는 겁니다.”
“….”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여인이 먼저 잠자리를 하자고 청했는데, 남자가 거절하면 확실히 모욕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었다. 차레족의 이러한 은혜 갚는 전통은 그들이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여인 부족이기 때문이었다. 부족을 번성시키고 부족을 이어가려면 남자가 필요했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주변 부족의 전사를 약탈해 관계를 가진 후 죽였다. 물론 그 전사는 종마(種馬)가 되어 마을의 임신 가능한 모든 여인과 동침하고 죽어갔지만 사랑이 없는 관계는 여인들에게 고역이었다. 다만 피를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고통스런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어 은혜를 갚기 위해 관계를 갖는 것은 비록 사랑은 아닐지라도 단순히 부족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를 낳기 위해 관계를 갖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된 라혼은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다.
“좋소.”
“대가!”
라혼의 수락하는 말에 한포포는 발작했지만 차레족의 여전사들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라혼의 말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안 되오! 한 달 후 봉수성으로 오시오!”
“그러나 저희는 귀림을 떠날 수 없습니다.”
백호영의 홀아비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던 라혼은 이 밀림을 떠날 수 없다는 말에 그 묘수가 무산되자 다시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차레족 여전사들 사이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줄줄이 엮어서 묶은 남례 일족의 사내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나는 몸을 함부로 굴리는 사람이 아니오. 그러므로 그대들의 요구는 거절하오. 단, 여인을 내가 거둘 수 있다면 생각해보겠소.”
“….”
약간의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강요할 수 없다는 듯 쿠차레가 한발 물러섰다.
“은공께서 정 그러시다면 전사 한 명을 드리겠습니다. 그가 은공과 죽을 때까지 같이하며 은혜를 갚을(?) 겁니다.”
“그럼 내가 이 중에서 골라도 되겠소?”
“은공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혼은 족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가장 아름다운 한 명의 차레족 전사를 골랐다. 그러자 차레족의 족장 쿠사레는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어? 그, 그는….”
“이 아이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도 필요 없소!”
그러나 라혼의 강경한 어조에 족장 쿠차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들은 이제 무공이 폐지되었소. 그리고 저들로 인해 그대들의 영역이 더럽혀졌으니 저들은 그대들이 알아서 하시오. 포아, 너는 그 예하라는 놈만 데리고 밀림을 떠나라. 나는 이곳 토지신(土地神) 마을에 볼일이 있으니까 다음을 기약하자. 그리고 이 차레족 아이도 네가 좀 돌봐주거라!”
“알았어요.”
한포포는 대가의 일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생각하고는 아름답게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주작의 무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불새의 깃털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포포의 머리 속에, 라혼이 차지하는 것은 바로 백수회가 차지하는 것이란 도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무공이 폐지된 남례 일족의 무사들은 차레족이 차지했고 아직까지 인사불성인 남례 일족의 소야 예하는 한포포가 이끄는 백수회 무사들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라혼을 따르게 된 차레족 전사도 일단 라혼의 첫 번째 명에 따라 한포포의 백수회 일행을 귀림 밖으로 무사히 안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라혼은 드디어 불새의 무녀 가니아와 함께 귀매지림(鬼魅之林)의 드워프 마을로 들어갔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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