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 5
향기로운 꽃 향을 가슴으로 마시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산골 카페를 감싸던 하루의 소란은 모두 잠잠해졌고, 마지막 손님이 떠난 뒤에는 고요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난롯불은 붉은 숨결을 내쉬며 타오르고 있었고,
창밖에서는 계곡물이 밤하늘의 별빛을 품은 채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소진은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계곡물 소리와 함께 은은한 국화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그 향기는 낮보다 더 깊고,
더 조용했다.
마치 하루 동안 산과 바람이 품고 있던 모든 향기를 이제야 세상에 풀어놓는 것 같았다.
지영은 주방에서 마지막 찻잔을 씻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마저 계곡과 하나가 되어 들렸다.
그는 일을 마친 뒤 조용히 국화차 두 잔을 준비해 창가로 가져왔다.
"오늘도 수고했어."
소진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받았다.
"당신도."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셨다.
밤에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지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가 있을게."
"당신은?"
소진은 웃으며 노트를 들어 보였다.
"오늘도 조금만 더 쓰고 갈게."
"너무 늦지 마."
"응."
지영은 늘 그랬듯 더 묻지 않았다.
글을 쓰는 시간이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이 조용히 닫히고,
카페에는 소진 혼자 남았다.
그녀는 천천히 노트를 펼쳤다.
오늘 하루가 한 장면씩 마음속에 떠올랐다.
아침,
산허리에 머물던 솜털 같은 구름.
점심,
계곡물에 마음을 띄워 보내던 시간.
오후,
뜨거운 물속에서 다시 피어나던 국화꽃.
저녁,
둥지로 돌아가며 하루를 노래하던 산새들.
그리고 지금,
국화 향기와 계곡물 소리가 함께 흐르는 고요한 밤.
모든 순간이 하나의 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속에 머물고 있었다.
소진은 만년필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솜털 같은 구름은 산허리를 감싸 안고
계곡은 맑은 마음을 싣고 쉼 없이 흘러간다.
이름 모를 산새는 하루를 감사하며 노래하고
국화꽃은 말없이 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위로한다.
잠시 펜을 멈춘 그녀는 창밖의 별을 바라보았다.
멀리 계곡에서는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기도처럼 잔잔했다.
그녀는 다시 천천히 글을 이어 갔다.
귓가에 스미는 물소리는 마음을 씻어 주고,
코끝에 머무는 꽃 향기는 지친 영혼을 쉬게 한다.
사랑도 이와 같아서
소리 없이 곁에 머물며
향기처럼 삶을 따뜻하게 물들인다.
글을 쓰던 소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평생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수많은 이별을 지나왔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사람은 행복해서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는 것을.
그녀는 마지막 장을 천천히 채워 나갔다.
향기로운 꽃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마시는 것이다.
계곡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흐르는 것이다.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함께 숨 쉬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그녀는 가장 천천히,
가장 정성스럽게 적었다.
'오늘도 나는 국화 향기를 마신 것이 아니라 삶을 마셨고, 계곡물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비추어 보았다. 자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게 가장 깊은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노트를 덮은 소진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국화 향기는 아직도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계곡이 변함없이 흘렀고,
산은 말없이 별빛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늘도 참 아름다운 하루였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도 한 잔의 국화차와 닮아 있었다.
뜨거운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향기가 피어나고,
조용히 음미할 줄 아는 사람만이 그 깊은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밤,
산골 카페에는 국화꽃 향기와 계곡물 소리,
그리고 한 사람의 따뜻한 미소가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