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럽에는 아시아 식당이 넘쳐 난다. 웬만한 도시에는 한 블록마다 스시 뷔페가 하나쯤 있고 다양한 스타일의 중식당도 성업 중이다.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케밥 집이나 독특한 분위기의 타이 레스토랑도 많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한국 식당은 보급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그나마 교민들이 운영하는 식당은 현지인 손님에 비해 한국 관광객 비율이 아주 높은 편이 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에 가면 현지인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끄는 한국 식당을 찾을 수 있다. 20년째 유럽에서 생활한 한국인 요리사 김소희(42)씨가 운영하는‘킴 코흐트(Kim Kocht)’ 다. 직역하면‘김 씨가 요리한다’는 뜻이다. 가게 이름처럼 김소희씨가 모든 요리를 직접 만들어 내놓는다. 이곳의 메뉴는 육류를 가급적 배제한 코스 요리다. 약 초로 맛을 내고 수제비를 곁들인 도미 회, 인삼을 넣은 비빔밥 등 한식을 위주 로 하되 퓨전 스타일로 외국인의 입맛 에도 잘 맞는다. 게다가 건강식이어서 아주 인기가 높다. 그녀는‘빈의 요리 여왕’이라는 닉네임을 얻을 만큼 요리 계에서는 국제적인 유명 인사다. 유럽 TV의 요리 전문 프로그램 단골 패널이고, 그녀가 만든 요리책은 지난해 ‘월드 쿡북 어워드’에서‘세계 최고의 아시아 요리책’으로 선정된 바 있다.
남다른 성공 스토리가 궁금해 킴 코흐트로 전화를 걸어봤다. 마침 그녀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서울 청계천에서 열렸던 국제푸드페스티벌 참가를 위해 한국에 왔다가 며칠 전 유럽으로 돌아갔단다. 그녀는 힘들고 바쁘겠다는 안부 인사에 간드러지는 목소리로“어데예~” (아니요, 괜찮아요)라고 대답한다. 본인의 말 을 빌리면‘부산에서 나고 자란 원조 경상도 아지매’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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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맛 좋은 엄마 밑에서 컸더니 입맛은 좀 깐 드로와예. 그래도 다른 사람 밥 해주는 건 참 재밌고 적성에 맞거든예.”
잘나가는 셰프라는 얘기만 듣고 아주 서구적 인 데다 왠지 도도할 것 같은 이미지를 예상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구수한 부산 사투리와 순박한 목소리가 무척 인상적이다. 젊은 시절 한때는 뭔가 고급스러워 보이고 싶어 표준어를 흉내 내기도 했는데 주위 교민들이‘평양 사투리 쓰는 여자’라고 수군대는 바람에‘마, 고마 생긴 대로 살자 싶어서’포기했단다.
그녀는 어떻게 유럽에서 요리사가 됐을까. 사 실 학창 시절 꿈은 디자이너였다. 고등학교 2 학년 때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나 디자인 학 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7년간 의상 디자이너 로 일했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 보니 뭔가 불만족스러웠다. 패션 피플들의 자유분방한 라이프사이클도 왠지 자신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원해 온 길인데도 현실로 다가오니 흥미를 잃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결국 디자이너 일을 그만두고 동업자와 함께 일식집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요리사로 서 첫출발이었다. 하지만 첫걸음은 실패로 끝났다.
“밥장사를 하면 그래도 밥이야 먹고살겠지 싶어 식당을 했어요. 기쁘든 슬프든 세상 사람들은 하루 세 끼를 다 먹어 야 하니까 망하지는 않겠다 싶었죠. 어 머니한테 어깨너머 요리를 좀 배워서 자신도 있었고, 밥이야 못 하겠느냐 싶었으니까 무턱대고 덤볐죠. 그런데 막 상 해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주방장을 따로 고용하고 자신은 경영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주방장의 음식 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장사도 잘되지 않았다. 가게에는 늘 파리만 날렸고 가끔 손님이 찾아와도 몇 숟가락 뜨고는 수저를 내려놓기 일쑤였다. 이에 보다 못한 그녀가 결국 주방장 을 내보내고 직접 손님을 대접하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김소희씨는 자신감 하나로 덤볐다. 요리는 틈틈이 김소희씨는 감칠맛 나는 손맛을 인정받아‘빈의 요리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독학하며 파고들었다. 연어를 궤짝 째 사다 놓고 한 달 내내 밤을 새워 가며 회 뜨는 연습만 한 적도 있다. 칼질이 제법 손에 익은 후에는 요리 스쿨에 등록해 정식으로 조리사 자격증 을 따고 여러 재료를 활용해 퓨전 스타일 음식 만드는 노하우를 익혀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 덧‘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성 스시 요리사’라 는 꼬리표를 달게 됐고, 식당에도 하나 둘 손님이 들기 시작했다.
킴 코흐 트는 일주일에 딱 3일만 문을 연다. 손님을 받는 시간도 6시와 8시로 정해져 있다. 식당 규모도 작을뿐더러 그녀가 요리를 모두 도맡다 보니 손님을 많이 받을 수가 없다. 예약은 1년에 딱 네 차례, 3개월분을 한꺼번에 받는다. 손님 중 상당수가 고위 공무원 등 유 명 인사인데, 여기서는 장관이든 수상이든 똑 같이 줄 서서 예약하고 3개월을 기다려야 그 녀의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오스트리아 재무장관이 꼬박 석 달을 기다려 그곳 에서 저녁을 먹었고, 대통령이 그녀를 집으로 불러 만찬을 부탁했을 정도다. ‘ 요리 여왕’이 라는 호칭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녀의 요리 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 재료와 요리 스타일은 한국식이지만 유럽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를 준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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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람한테 무조건 김치 먹으라고 들이미는 게 한국 문화의 전파는 아니잖아요. 그렇다 고 어쭙잖게 유럽 스타일 조리법을 따라 할 수 도 없고요. 그래서 두 개를 적당하게 섞어 봤어요. 예를 들어 고추장이나 참기름으로 소스를 만든다거나, 샐러드 만들 때 풋고추나 상 추, 호박씨 기름으로 맛을 내는 거죠. 그것도 한국의 맛이에요.”
유럽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주식도 고기다. 하지만 그녀는 생선과 채소를 주재료로 삼고 여기에 한방 재료를 더해 건강 메뉴를 만든다. 일반적으로 정해진 요리 매뉴얼에 따르기보다는, 수많은 재료 사이의 궁합 을 연구하고 새로운 메뉴에 도전한다. 물론 늘 퓨전 스타일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을 앞두고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오이를 썰어 넣은 달달한 비빔국수에 회를 얹어 준다. 한국에 서 먹는 방식 그대로다. 하지만 이럴 땐‘국수 면발처럼 길게, 달콤새콤하게 살아라.는 덕담 도 함께 건넨다. 그러면 누구라도 단골이 될 수밖에 없다.
“요리의 기본은 사람이 사람을 정성껏 대접하는 거잖아요. 여기에 저는 손님 성향에 맞는 음식을 찾아 주기도 해요. 몸이 안 좋아 보이는 사람이 와서 기름 진 음식 해달라고 하면 저는 돈 받지 않고 안 해줘요.”(웃음)
요리사의 피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 모친 은 남편과 헤어진 후 혼자 부산 자갈치시장 에서 억척스레 일하며 딸을 키웠다. 그녀의 어머니는 요리 솜씨가 남달랐는데, 평상시 장 담그는 것은 물론 김치에 들어가는 젓갈 하나까지 전부 제 손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같이 밥 먹을 식구라 곤 딸 하나뿐이었지만, 김치 하나를 담가도 재료와 양념을 바꿔 가며 다섯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 상에 올렸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손맛을 타고날 수밖에.
김씨에게‘어머니’는 절대적 존재였다. 요리 사가 된 것도“밥장사 하면 어디 가서 굶어 죽 진 않는다”던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서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외동딸을 혼자 키우면서 겪었을 마음고생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하지만 모친은 아쉽게도 딸의 성공을 보지 못 한 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소희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자신이 싸준 상추쌈 을 맛나게 입에 물던 장면을 떠올리며 잠시 눈물을 떨어뜨렸다.
“사람들이 저보고 음식 맛있다, 요리 잘한다 칭찬해 주지만 사실 어머니한테‘우리 딸 손 맛 참 좋구나’하는 칭찬은 못 들어 봤잖아요. 엄마한테 인정받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참 아쉽네요.”
정신적 버팀목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방황하며 혼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요즘은 든든한 지원군을 얻어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리고 있다. 바로 남편 윌리 발 란유크(49)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소 믈리에다. 김소희씨가 요리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와인 공부를 시작하던 중 만나 사랑을 키워 오다 지난 8월 결혼해 현재 신혼의 단꿈 에 빠져있다. 그녀가 먼저“오십 되기 전에 내 가 살려줄까?”하고 프러포즈를 건네 결혼에 골인했단다. 요즘 킴 코흐 트는 요리사 아내의 손맛과 소믈리에 남편의 안목이 더해진 만찬 을 즐기려는 이들로 날이 갈수록 붐빈단다. 집념과 정성으로 유럽의 입맛을 사로잡은 그 녀의 요리 솜씨가 슬쩍 궁금해진다. 그녀는 앞으로 기회가 되면 한국에서도 자신의 요리를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