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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교회 / 20160221 주일오전예배 / 정광수목사님 | |
분류 | 주일오전예배 |
제목 | 주께 하듯 하라 |
성경 | 에베소서 6:1~9 |
정리 | 성지교회 청년부 |
성경말씀(에베소서 6:1~9)
1.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녹취자료 |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른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하여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을 옮깁니다. 그 모든 행동의 결과는 자신이 다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수많은 행동에 결단을 하면서 자신의 가치관과 욕구를 채워나가는 삶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직장인들이 직장가면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그것도 선택해야 합니다. 아침에 무슨 신발을 신고 갈 것인가 무슨 화장을 할 것인가 무슨 옷을 입을 것인가 계속 선택의 연속들입니다. 이런 사소한 것만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학생은 내가 어느 대학을 갈 것인가 어느 직장을 갈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어디로 이사 갈 것인가 인생의 진로가 달린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국가의 대통령이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 국가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죠. 기업체사장이 그 사람의 판단에 따라가지고 회사가 경영이 살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작은 유익을 위하여서 코닥같은 경우에는 그 필름을 놓치지 않고 있다가 결국은 디지털 카메라의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회사가 조용히 사라져버리는 경우까지 나오죠. 무엇을 판단하는 것인가? 문제는 어느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데 있는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 선택의 결과는 바로 다 자신의 몫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판단의 기준이 어디서 가지고 있는 것인가. 바로 창세기 3장과 6장과 11장에 근거를 두고서 얻은 것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창세기 3장 5절 말씀에서 네가 이 열매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그 말을 그래서 모든 판단기준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내 유익이고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가 판단을 하는 겁니다. 자신이 가졌던 경험이나 자기 상식이 이것이 최고인줄 알고 판단하는 부분들입니다. 여러분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집니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단 한번도 해가 뜨고 해가 진적이 없어요. 가만히 있는데 지구가 돌아가는 거지.. 내 눈에 착시현상이야 내가 그렇게 본 것이지 그게 진실을 아니거든요.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상식을 절대화시켜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틀렸어요. 그 기준이 무엇이기 때문에, 나 기준이기 때문에.. 판단기준에 6장으로 흐르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질 중심으로 쾌락중심으로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어요. 돈이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판단기준이 창세기 11장이 되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서 성공을 위하여서 여기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겁니다. 성공하기 위하여서 범죄도 서슴지 않고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겁니다. 왜? 성공해하니까..
그러나 성도의 판단기준은 창세기 3장, 6장, 11장 속에서 나와서는 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 속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세상적인 기준으로 풍류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인간의 근본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으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겁니다. 성도의 판단기준이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성경이 기준이지만 먼저 어디에 우리가 판단기준을 두어야 되는 것인가?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어느 것이 복음에 유익한 것인가? 어느 것이 교회 덕을 세우는 것인가? 이 기준 속에서 우리가 말씀을 봐야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때 우리는 100% 우리가 성공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있는 것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답을 찾아야 되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답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분명히 갈 길을 인도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성령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나를 위하여 완벽하게 계획하신 일들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내일일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계획을 세우셨기 때문에 말씀 따라, 그분의 인도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왜 실패할까요? 말씀따라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순간순간 마다 기도하면서 결정해야 합니다. 그걸 두고 우리가 무시기도라고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순간순간 말이죠.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넥타이 매는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 무슨 넥타이를 매는 것이 복음에 유익할까요?’ 라고 물었어요. 혹시 여러분 그렇게 기도해보셨습니까? 오늘도 무슨 옷을 입을지 순간순간 마다 판단기준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알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정시기도를 왜 하죠? 정시기도는 그 날 있어야 할 일을 두고 미리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인도받기 위함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결정을 해야 부분이 생기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깊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오늘 장로님께서 기도하시면서 오늘 강단 메세지 통해서 답을 얻게 해달라고... 맞습니다. 내가 어떤 부분을 결정해야 할 때에 즉흥적으로 결정하지 말고 말씀, 강단 메세지를 통해서, 또 기도수첩의 메시지를 통해서 인도받는 것이 신자의 신앙 생활하는 모습이지, 그렇지 않게 되면 전부 내 기준, 내 상식, 내 경험이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도 자기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을 앞세워서 이것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틀린 겁니다. 사람을 권면할 때도 무엇으로 해야 합니까? 말씀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의 기준입니다.
1. 성도는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성도는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합니다. 장로는 장로다워야 합니다. 권사는 권사다워야 합니다. 집사는 집사다워야 합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만나서 몇 마디 해보면 나보고 목사 냄새가 난대요. 그 말 들을 때 나쁘지는 않아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목사다운 목사가 맞는 것인가? 나를 스스로 생각해볼 때 아직도 목사답지 못한다는 생각을 많이 갖거든요. 성도다운 삶을 산다고 하면 거의가 착하고, 정직하고 싸우지 않고 양보하고 덕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고 성도답다고 말합니다. 틀린 것을 아니지만 틀렸어요. 그 기준으로 성도답다고 하면 여러분들보다도 훨씬 더 정직하고 남을 구제하고 봉사를 많이 하는 불교도도 많구요. 카톨릭신자들도 많아요. 그것은 성도다운 모습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성도답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아..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 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저렇게 되는 거구나!’ 성도다운 삶이 바로 이렇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처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적이 있었는데 20장에 그랄 땅에 거하면서 또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요. 그래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내를 빼앗아 가버렸어요. 그 날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셨어요. ‘왜 내 종 아브라함의 아내를 데려왔느냐?’하니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분명히 누이라고 해서 데려왔습니다.’했어요. 하나님께서 ‘그래 맞다. 네가 누이라고 설명을 듣고 데려왔기 때문에 살려주는 것이지 만약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 데려왔더라면 너는 오늘 밤에 당장 죽을 것이다. 당장 돌려주어라.’ 이 사건 때문에 아비멜렉 집안의 여자들이 다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불임하도록 만들어버리셨어요. 이걸 두고서 대신 아브라함이 기도해서 불임을 풀어주는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 21장에서 100세된 아브라함에게 90세된 사라가 이삭을 낳았어요. 아비멜렉이 겁을 먹고 찾아 옵니다. “여호와께서 정녕 너와 함께 함을 보았다.” 고요. “우리와 화친을 맺자, 다시는 나와 내 자손들에게 거짓말 하지 않기를 내게 맹세하라.” 고.. 왜 그러죠?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집이 망할 뻔 했거든. 창세기 26장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나요? 흉년 때에 이삭이 그랄 땅에 거하면서 7-11절을 보면 애비 닮아서 또 이삭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누이라고 속여 놓고서 그다음에 12절 말씀에 뭐라고 나오는 것인가 하면은 그해에 농사를 지어서 백배의 결실을 얻었데요. 우리가 정말 복음을 누린다고 하는 얘기는 착하게 살라는 것만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 나타나는 겁니다. 샘의 근원을 얻지요. 그래서 나중에 아비멜렉이 와서 뭐라고 하는 것인가 하면은 “나와 화친을 맺자. 여호와께서 정녕 너와 함께 하심을 보았다.” 여러분 요셉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안에 있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요셉 까닭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게 만드셨고 요셉이 하는 모든 일들마다 복되게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우리가 성도다운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나를 통해 보여져야 되는 겁니다.
다니엘은 어떻죠? 다니엘서 6장을 보면은 국사에 대해서 흠잡을 데 없을 만큼 다니엘이 완벽하게 총리직분을 다 감당했어요. 다니엘을 시샘하는 사람들이 다니엘을 죽이려고 그러니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다리오왕에게 청하여서 왕 이외에 다른 신에게 예배하거나 기도하는 자가 있으면 다 죽이는 것으로 이렇게 법을 만들었어요. 그것도 변경하지 못하도록 어인을 찍도록 만들었어요. 누구를 죽게 만드려고요? 다니엘을 죽이려고요. 그런데 임금님은 다니엘을 미처 생각 못하고 도장을 찍었네? 다니엘이 하루에 3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을 트집잡아가지고 다니엘을 사자굴속에 던져 넣게 됩니다. 그때 다니엘을 왕이 뭐라고 표현하는 것인가 하면은 왕이 다니엘에게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실 것이다.” 라고 혹시나 다니엘이 죽었을까 싶어서 이튿날 슬피 울면서 사자굴 앞에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시는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라고.. 누가 알고 있다는 겁니까? 임금이 알아요. 임금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라는 것은 성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하게 이 땅에 축복받고 잘사는 것 이것만이 기준이 아닙니다. 내 삶이 바뀌어 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내 삶속에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정말 회복되고 복음 누림 속에 들어간 자들에게 하나님은 이 증거를 주셨어요. 뭔가 열심히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그랄 땅에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는 가나안 땅에 거한 것은 가나안에서 뭐했다는 겁니까? 복음 누림 속에 있었더니 그해 농사를 지어서 백배의 결실을 얻은 겁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했더니 부자가 되었다.”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열심히 하지 말라는 이야기 입니까? 그 말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정말 이해하고 체험하고 누리게 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들이 내 삶속에 나타나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말씀을 하죠. 전도 이전에 여러분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보여지게 되면 그게 전도입니다. 남편은 예수 안 믿는데 부인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되고, 부인 기도하는것 때문에 일이 되어진다면 그러면 남편은 뭐하게 되는 것인가 하면은 새벽이 되면 아내를 발로 톡톡차며 새벽기도 가라고... 왜요? 봤거든요. 보거든요. 그 남편이 예수님 믿을까요? 안 믿을까요? 시간표 따라서 믿게 되있어요. 뭐가 나타나게 된다고요? “야 우리 마누라 보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구나.” “성지교회 다니는 아무 아무게 장로를 보니까 정말 하나님 살아 계시는 것이구나.” 그게 성도다운 삶이요. 거기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복음을 누리게 되면 내가 가는 곳곳마다 어둠이 물러가고 흑암세력이 꺾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빛이 비춰지게 되지니까.. 성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은 내가 선하고 의롭고 정직하고, 덕을 세우고.. 이것도 다 필요 합니다. 이것도 열매로 맺혀 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 노력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함께하는 부분들이 내 인생 가운데 나타나지는 겁니다. 언제 이루어 진다고요? 복음을 정말 이해하고 체험하고 누림 속에 들어가면 이 축복 속에 살아가도록 불러주신 겁니다. 성도다운 삶이 이제 내 가정에 사회생활에도 이것이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2. 성도다운 삶이 가정과 사회생활에 나타나야 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은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자녀들이 어디에서 상처를 입을까요? 가장 큰 상처는 자녀들 미안하지만 가정에서 다 입어요. 엄마 아빠 통해서 다 상처 다 입어요. 그래서 부부관계나 가정의 문제나 사회생활의 문제나 근본 원리를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부부간의 관계를 뭐로 표현했지요? 그리스도와 예수의 관계 속에서 순복하고 사랑하라고. 이게 되면은 뭐가 이루어질까요? 가정의 평화를 하나님께서 부부간의 행복을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겁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자녀가 부모를 뭐하도록? 공경하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들에게 자식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공경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정말 자녀가 복음을 진정 깨닫게 되면은 그 부모를 통하여 내가 이 땅에 생명 얻은 것만 갖고도 하나님 앞에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 유교의 원리에서 보면은 효하고 충하고를 같이 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임금에게 충신이 된다고 충성한다고 같이 보는 겁니다. 불효자식은 임금에게도 안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원리는 같은 겁니다. 하나님 사랑을 정말 깨닫게 되면, 부모에게 공경하게 되어 있는 부분들입니다.
우리는 연약했고 죄인 되었고 하나님 원수 같은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건져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깨닫게 되면은 하나님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부모 공경에는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뭐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하고 동일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내 구원을 완성시키시며 내가 잘못된 길로 걸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연단하셔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다듬어 가시는 겁니다. 그 사랑으로서 뭐하라는 이야기 입니까? 자녀를 사랑하라고 요구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들을 정말 바르게 양육하라고 우리들에게 요구를 하는 겁니다. 정말 아름다운 가정은 무엇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하며 양육하며 기도하며 이 아이를 키워나가게 되었을 때에 이 아이들에게 있었던 모든 그 상처들과 이 모든 부분들이 치유함을 받게 되고 이 속에서 가문의 흐르는 저주가 무너지게 되고 가장 행복한 가정으로 회복되는 역사들을 여기서 지금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한줄 한줄 보게 되면서 우리는 무엇을 체크하는 것인가? 내 가정이 정말 가정 축복이 되어 있냐? 어디에서 문제가 생겨난 것인가? 부부간의 문제가 어디서 온 것인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왜 이런 것이 생겨난 것인가? 성경 말씀 속에 우리가 답을 얻어야 그래야 크리스천다운 가정이 되잖아요. 성도다운 부부가 될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 속에 들어가게 되면은 파괴된 가정까지도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종 제도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종이란 것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 온 포로들이 거의 종입니다. 로마에도 로마 시민은 사실 3분의 1도 안 됩니다. 3분의 2가 종입니다. 종은 어떻게 하라고요? “종은 두려워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리고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그들을 위협하지 말라.”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그들과 너희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다고 말씀을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종 제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용인과 고용주 관계는 있지요. 지배하는 자와 지배를 받는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꼭 같은 사람이지만 고용인과 고용을 받는 자의 그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늘 성경에서 우리들에게 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피 고용인들 지배를 받는 자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눈가림을 하지 말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누구에게 하듯이 하라? 주께 하듯이 하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직장의 상사나 나를 지배하는 사람을 누구처럼 섬겨라? 예수님께 하듯이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아마 아멘 하실 분들이 얼마 안 나올 것 같아요 그죠? 아멘이 안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주님께 하듯이 그 상전을 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약속입니다. 겨우 월급 받을 만큼도 일 안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지 말고, 회사가면 300% 열심히 하세요. 자기 맡은 일에 있어서.. 하세요. 상전이 여러분들을 싫어하고 미워해도 그럴수록 더 하세요. 악한 주인일수록 더욱 더 섬기세요.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제 말이 아니고 누가 하신 말씀이죠?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하기시기를 네 윗사람을 누구처럼 섬겨라? 그리스도께 하듯이, 주께 하듯이 섬겨라. 반대로 상전은 아랫사람을 정말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 사람을 뭐 해 주어라? 대접하고 섬겨주어라. 왜? 그가 무엇이 됐기 때문에? 그도 꼭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해 줘야 합니다.
근데 우리가 이 일을 진짜 하게 되면 부산의 한 장로님이 회사를 인수를 했는데, 장로님이 직원들하고 술도 한 잔씩 먹고 하면 좋은데, 장로님이 이것을 안 해주니까 회사 안에서 이 장로님을 괴롭히는 세력들이 생겨서 사사건건 일을 틀어지게 만들고 골탕 먹이는 식구들이 생겨났어요. 그래서 이들의 집안 들을 조사해 보니까 맨날 술 퍼마시고 회사 것 훔쳐서 술 먹고, 집에는 돈도 제대로 안 가져다 주고해서 아이들은 학교도 제대로 못가는 그런 형편이더라. 그래서 장로님이 그들의 가정을 위해서 장학제도를 만들어서 이 아이들을 불러서 장학금 주고 학교 보내고 몰래 고기도 사서 집안에 보내고.. 이들이 어떨까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회사의 정상화하는데 누가 힘쓴 것인가? 이 골탕 먹이던 사람들이 나중에 회사의 충신이 다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회생활의 원리입니다. 윗사람을 무엇처럼 섬겨라? 주께 하듯이 하고, 네 아랫사람에 대해서는 네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사랑으로 대해주고 섬겨라. 이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도다운 삶의 모습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위기만 갖춰지게 되면 자, 직원은 어떨까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회사를 위해서 생명 걸고 일 하게 됩니다. 서로 이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 오늘 말씀을 정말 마음에 새기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사장이 된다면 이 자세를 가지고 아랫사람을 대하게 되면 그 속에 무엇이 임하는 겁니까? 내가 섬기는 직장 속에 나 한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누가 보상할까요? 주인이 나를 끝까지 괴롭힌다?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나를 축복해요. 하나님이 보상하시게 되어 있는 겁니다.
3. 어떻게 해야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성도다운 삶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본질적으로 우리의 본성으로는 성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어요. 성도다운 삶을 살라고 강조하게 되면 거의가 율법으로 흐르게 됩니다. 착하게 정직하게 살고 노력해서 된다고 하면 되겠지만, 노력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사실은 없어요. 하려고 노력하면은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이 요구하는 성도다운 삶을 사실 살아지지 않아요. 한 여인이 간증이 지금도 머리 속에 남는 것은, 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혼기를 놓쳐서 규모 있는 집안에 재처로 시집을 갔는데, 그전 부인이 애기를 낳다가 죽었어요. 갓난아이가 불쌍하죠. 가서 살다보니 자기도 아기를 낳았어요. 그런데 둘이 한 살 터울로 같이 자라게 되니까 아이가 너무 안타까워서 잘 해주고 싶은데 막상 좋은 것이 딱 생기니까 누구 줄까요? 내 아들, 내 새끼 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분이 복음을 깨닫고 난 후에, 예수 믿고 난 후에, 이것이 본인은 너무 힘든 겁니다. 왜 안되냐 이거에요. 똑같이 사랑해주고 싶은데, 안 되더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들이거든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안 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못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중직들을 보면서 안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될 때는 사실 제가 화가 나더라고요. 아니, 장로가 되가지고 저것도 안한다고 싶으니까 세상에 그냥 화가 나는 거예요. 저럴 수가 있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가 생각이 바뀌어졌어요. ‘아하, 중직들이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못 하는 것이로구나.’ 못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니까 생각이 싹 바뀌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내가 도와줘야 되겠구나.’ ‘할 수 있도록 사람을 만들어야 되겠구나.’ 지금 하고 싶어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못 하더라고요. 내 영적상태 자체가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그 말이에요. 성도다운 삶을 살고 싶어서 발버둥을 쳐도 안 돼요. 왜요 내 본성이 지금 어디에 갇혀있기 때문에? 내 중심으로, 물질 중심으로, 이 성공지상주의로.. 이것이 내게 각인되어 있고, 과거의 나의 경험과 내 상식과 여기에 사로잡혀져서, 이것을 못 벗어나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게 되는..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여기서 나오는데, 이것이 안 바꿔지는 것이란 말이에요.
더 무서운 것은 이것으로서 내 인생을 사로잡고 있는 어둠의 세력들입니다. 이것이 내게 뭐가 되어있다는 이야기입니까? 영적문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영적문제가 되게 되면, 알아도 내가 못해요. 알콜 중독자가 술을 못 끊고, 마약 중독자가 마약이 안 끊어져요.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고요. 도박에 빠진 사람이, 이것이 손가락을 자르고도 가서 또 해요. 이것이 무엇인가? 본인이 못 벗어난다고요. 나는 할 수 없다는 부정의 생각에 사로잡혀져서 마음과 생각이 여기에 잡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한계를 못 뛰어 넘어요. 어떤 사람은, 누가 우울증 걸리고 싶어서 걸리나요? 누가 불면증 앓고 싶어서 불면증을 앓나요? 누가 결벽증을 앓고 싶어서 결벽증에 묶이나요? 이게 사로잡혀요. 그분들 보고 안 한다고 책망해서, 안 하는 게 아닙니다. 못 하는 겁니다. 어떤 것은 가문을 통해서 개인에게 내려오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못 벗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내 모든 죄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죄 값으로 찾아온 내 인생의 모든 죄와 형벌뿐만 아니라, 내가 영적문제로 사로잡혀 있는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그 분이 해결하셨습니다. 다른 것으로 답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내 개인과 가정과 내 삶의 현장 속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 내가 할려고 해도 안 되는 그 부분들.. 영적문제화 되어 있는 내 인생의 모든 문제들.. 그 문제를 누가 해결하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속 썩이는 내 자식문제 누가 해결하셨습니까? 내 가정의 경제문제 누가 해결하셨습니까? 그 분이.. 내가 갖고 있는 이 질병의 문제 누가 해결하셨습니까? 그 분이.. 유일한 해답은 그리스도만 해답인 것을, 우리가 이것을 바르게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미 영세 전에 있었던 그 마귀 사단의 손에 내가 장악되어 있는 겁니다. “나에게 하는 구원의 길”을 읽어보게 되면 여러분들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며 나갑니다. 구원 받았으면은 법적으로는 불신자 6가지 상태에서 다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 있다고요? 여전히 여기에 묶여서 그냥 있어요. 자기 자신의 문제를 우리가 바르게 진단을 해야 되는 겁니다. 너무나도 오랜 기간 동안 이것이 내게 뭐가 되었습니까? 각인되고 뿌리내리고 체질화 되어져 버렸어요. 여기에 맞혀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냥 살아가죠.. 그래서 하고 싶어도 안 돼요. 여기에 묶여있게 되니까, 나도 모르게 여기로 돌아가는 겁니다. 뭔가 열심히 하면 제대로 될 것 같죠? 그것 지나면 또 돌아가요. 여러분이 휘어있는 가지를 억지로 피면 피어지죠? 손을 놓으면 어떻게 되죠? 다시 되돌아가요. 피었을 때는, 은혜 받았을 때는 괜찮은 것 같죠? 은혜 떨어지면, 과거로 또 돌아가버려요. 그것이 내 모습이라고요. 그래서 우리들에게 왜 집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서, 집중훈련을 받어라, 집중해라, 집중해라.. 왜 강조를 하는 것인가? 이것이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에 내 속에 각인되고 체질이 되고 뿌리가 내려 있는 부분들입니다. 바꿔나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기도수첩을 해라, 3오늘을 해라, 왜 강조하는 것인가? 이것 고쳐나가야 되는 겁니다.
큰 웅덩이에 계속적으로 시궁창 물이 들어와 가지고, 그 웅덩이가 썩었어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시궁창에 그 지저분한 물이 흘러오는 그 더러운 물은 물길을 돌려서 다른데로 돌려야 되요. 안 들어오게 막아야 되겠죠? 그렇죠? 그러면 거기다가 뭐할까요? 계속 맑은 물을 공급하면은 그 지저분한 물이 씻어나가서 맑은 물이 되겠죠? 그런데 문제는 밑에 가라앉아 있는 이것이 문제에요. 그러면 가라앉은 것은 뭐해야 됩니까? 휘저어야죠 그냥.. 그래가지고 맑은 물이 또 들어가서 또 씻어내야 된단 말이에요. 웅덩이 물이니까요. 하나님이 때로는 여러분들에게 뭐 하는 것인가?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이것을 들쳐 내려고.. 환란과 문제와 사건을 일으켜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소용돌이 치도록 만드는 겁니다. 왜요? 인생의 문제를 왜 주는지 압니까? 그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그것 들쳐내서 씻어내려고.. 너무 오랜 기간 동안에 밑에 지금 가라앉았어요. 이것을 끄집어 내라.. 집중하는 것은 이것을 뒤집는 방법입니다. 더러운 물이 들어오는 것, 계속적으로 세상적인 것에 취하여서 그냥 맨날 텔레비전만 보고, 그것만 보고 앉아 있으면 계속 뭐가 들어오는 겁니까? 꾸정물이 계속 들어오는 겁니다. 막아야 되요.
그리고 어디로 들어가야 된다는 말입니까? 복음 메시지 속으로 계속 들어가게 될 때에, 뭔가 열심히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복음을 체험하고 누림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제가 서론 부분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뭐 다니엘 쭈욱 제가 설명을 했어요. 이들이 뭔가 열심히 했더니 거부가 되고, 열심히 했더니 총무가 되고가 아니에요! 전부 다.. 그러면 열심히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그것하고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정말 내가 복음누림 속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뭐하신다는 이야기입니까? 나를 축복의 자리로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주는 겁니다. 매 순간순간마다 뭐하라는 이야기입니까? 말씀을 통하여 그분의 인도를 받아서 갔더니 어느 순간엔가 내가 서밋이 되고 축복의 자리에 있어야 맞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메시지를 가슴에 담고서, ‘그렇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힘쓰고 애써도 내 영적문제를 해결을 못 합니다. 내게 뿌리, 각인, 체질 된 것이 안 바뀌어 집니다. 그래서 뭐하라는 이야기입니까? 이제는 삶의 방법을 바꿔야 되요. 지저분한 것이 내 속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물길을 틀어서 막고.. 울산의 태화강을 살릴 때 어떻게 살렸죠? 물길을 지저분한 것, 더러운 것이 공단에서 오수 들어오는 것, 다 막았잖아요. 그래서 상류에서 맑은 물이 내려오니까, 태화강에 지금 온갖 고기들이 연어 때같이 올라와요. 우리가 바꿔나가야 되는 부분들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무언가 열심히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복음 체험하고 복음 누림 속에 있었더니, 어느 순간에 되어져야 맞는 것이 아닙니까? 복음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을 때에? 복음 누림 속에 들어갔을 때에, 가만히 있어도 농사를 지었는데 백배가 와요. 샘의 근원이 만나지게 되어져요. 르호봇을 만나게 되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들입니다. 이것을 하면 뭐가 나타나게 되는 겁니까? 성도다운 삶의 모습이 여기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우리가 집중할 것인가? 3오늘을 우리가 왜 해야 될 것인가? 그 이유를 알고서 정말 한번 사는 인생입니다. 정말 멋있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으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 성도다운 삶의 원리를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서 깨닫게 만드셨습니다. 성도다운 삶은 말씀 따라 성령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삶인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참고상으로 받지 아니하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결단하여서 이와 같은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주님이 저희를 권고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말씀의 축복을 바르게 깨닫고 복음을 체험하고 누림 속으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와 같은 축복 속으로 이끌어 주시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왜 집중해야 할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멋있는 크리스찬으로 세워지도록 주께서 저희를 권고하여 주옵소서. 오늘 말씀을 내 마음에 담고서 결단하도록 주님께서 저희를 권고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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