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시계획 이야기1>
한국 전쟁부터 서울 재건?으로 시작하는 서울의 발전사를 수필처럼 편하게 써나갔다
일제강점기 때의 얘기도 나오니 서울을 중심으로 한 근현대사 쯤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 하다.
특히 서울시장이나 도시 건설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 그 당시 정치인들과 정치 상황에 대한 얘기들도 엮여 역시나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한 서울이야기가 아무래도 적절할 듯 하다.
김현옥 서울시장에 대해 저자가 큰 인상을 받은 듯.
1권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을 지나 1960년 대 강남개발 시작 즈음까지 다룬다.
재밌다.
21. 6.25전쟁 이전의 자료는 전란을 통해서 거의 없어졌다. 부산 피난 중의 자료는 정부가 서울로 되돌아올 때 법령상의 영구보존문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폐기하고 돌아왔다. 1961년 5월 16일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당시의 군사정부가 각 부처, 기관, 단체를 시켜 '폐지수집운동'을 벌였다. 그때 각 부처가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자료가 '폐지'로 공출되었다.
23. 군사문화가 행정에 도입된 것으로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면, 서기년호의 사용, 한글전용, 정원과 조직관리, 근무평정제도, 인사고과제도, 계급정년제도, 기획조정관제도(기획관리실) 등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선 군사문화 제1호는 '차트행정'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차트로 된 수업 자료들이 많았다..... 관련 있을까?
38. 구지라는 것이 구의 안내책자 같은 것이 아니다. 그 구의 5천 년간의 발자취, 현재의 모습, 미래상을 집대성하는 작업이다.
92.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1.4후퇴가 있었던 1951년, 그리고 다음 해인 1952년의 한국인 1인당 GNP라는 것은 숫제 통계마저 찾을 수 없었다. 겨우 1953년의 것을 찾았는데 '67달러'였다.
97. 서울 도시계획에서 일제가 남기고 간 유산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7개 지구의 구획정리사업이었다.
100. 한국전쟁이 끝나자 서울의 전재복구(전쟁재해)는 우선 시체처리부터 시작되었다.
102. 1952년 2월 11일에 당시 서울에 살고 있던 주민에게 시민증이 발급 되었다. 오늘날의 주민등록증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당시의 주민들에게는 '공산당이 아님을 증명하는 딱지'로서 생명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었다. 이때 주민증이 발급된 시민의 총수는 32만 1,626명이었는데....
104. 한국정부는 1953년 2월 8일에 제 1차 통화개혁을 단행하는데 100대 1로 평가절하하고 통화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통화개혁을 한 탓으로 달러에 대한 공정환율은 60대 1이었다. 즉 60환이 1달러였다. 그러나 달러의 암거래 시세는 1달러 250환이었다. 1954년 11월 17일에 달러의 공식환율이 180대 1로 조정되었다.한꺼번에 3배를 올린 것이었으니 국민경제라는 낱말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112. 조선총독부가 1936~40년에 경성부 시가지계획을 수립했을 때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그동안 서울은 그 명칭이 경성부에서 서울특별시로 바뀐 것 이상의 엄청난 변화기 있었다.
115. '서울 도시계획 가로변경 · 토지구획정리지구 추가 및 계획지역 · 변경'이란 이름의 서울 전재복구계획이 발표된 것은 1952년 3월 25일자 내무부 고시 제 23호였다.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도시계획이었다.
126. 1953년 2월 14일에 100 대 1로 평가절하하여 환이 되고, 5 ·16군사쿠데타 이후인 1962년 6월 10일에 다시 10대 1로 평가절하하여 원이 되었으니, 지금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150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당시의 달러환율은 6천 대 1이었으니 15억 원은 25만 달러였다. 그러나 6천 원 1달러는 어디까지나 공식환율이었고 실제 암달러 시세는 2만 5,100원이었으니 15억 원이라는 금액도 6만 달러도 안 되는 작은 금액이었다.
130. 아직 중앙정부가 부산에 있고 육군본부가 대구에 있던 1952년 말 서울의 인구수는 71만 6,865명이었는데, 중앙정부가 서울에 정식으로 돌아오는 1953년 말 서울의 인구수는 101만 416명이었다.
131. 지금의 강남구 ·서초구 ·강동구 ·강서구 ·관악구 ·구로구 ·금천구 ·도봉구 ·노원구 ·은평구 등은 경기도에 속해 있었고 10년도 더 지나서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161. 능동에 있던 이 나라 최초의 골프장 "서울컨트리클럽을 없애고 그 자리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라"는 지시가 내린 것은 1970년 12우러 4일이었다. 워커힐을 오가는 길에 보게 되는 한가로이 골프를 치고 있는 족속들의 꼴이 볼썽사나워서 내린 지시였다고 한다.
169. 이런 거금을 한반도 경제침략의 본거지였던 식산은행으로부터 빌렸다는 것은 바로 '일제 침략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서약을 한 것을 의미했다.
195. 1960년에 / 한 가구가 거주하는 주택평수는 겨우 6평 정도에 불과했다.
196. 국민 1인당 소득수준이 1만 달러를 넘는 지금(이 책은 1996년 경 씌어졌다)의 시점에서도 한국인 한 가구당 평균거주면적(대지)은 20~25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224. 서울의 기능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정치와 행정인데 이를 입법 ·사법 ·행정으로 구분하여 입법부를 남서울(현 강남 ·서초구)에, 사법부를 영등포에 입지케하고, 행정부는 용산일대에, 그리고 현 행정중심부인 세종로지역은 대통령부로 하여 대통령관저 및 대통령 직속기관을 배치토록 한다.
232. 1966년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나는 해였다. 이 제1차 5개년계획이 끝나면서 그 지긋지긋한 '보릿고개' '절량농가'라는 현상도 끝이 났다.
236. 모형이 거의 완성되어갔을 때부터 청와대 경호실 사람이 출입했습니다. 작업장에서 전시회장까지 갈 때에는 경호실에서 호송을 했습니다. 전시회장에서 조립을 끝냈더니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작업반원 전원을 내보냈어요. 저도 그 자리에 있지 못하도록 해서 부득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시가 끝난 뒤에는 경호실에서 그 모형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간첩들이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모형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248. 서울에 환도하면 독립된 의사당을 건립하겠다는 논의는 국회가 부산에 있을 때부터의 절실한 과제였다. / 1950년대 전반에는 거의 종묘 앞 광장으로 확정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249. 조선총독부가 소개도로를 개설할 때 그에 저촉된 토지 ·건물 보상비는 경성부 예산에서 지급되었다. 아마 총독부가 경성부에 보조금을 지급했을 것이다. / 그것이 경성부 자금으로서 지급되었으므로 그 토지소유권은 당연히 경성부 즉 서울특별시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인 소유토지의 등기를 경성부로 고치기 이전에 일본이 패전하고 광복을 맞았다. / 서울시가 챙겼어야 하는 그것을 챙기기에 앞서 국유재산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251. 그런데 이 국회의사당 남산입지는 1960년에 4 ·19가 일어나 민주당 정부가 수립되고, 1961년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이 수립되면서 다시 백지화되어 버렸다. / 1963년에 새 국회가 시작되자 국회의사당 건립후보지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에도 국회측에서는 종묘 앞 광장과 사직공원 중 한 곳을 희망했고, 서울시는 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이나 강남 쪽에 입지할 것을 권유했다. / 지금 여의도에 입지한 국회의사당 부지는 정확히 10만 평이다.
256. 김현옥이라는 시장은 우리가 흔히 대하는 그런 행정가가 아니었다. / 첫 1년 즉, 1966년은 지하도와 보도육교, 도로의 신설 ·확장에 미쳤으며, 1967년은 세운상가를 비롯한 이른바 민자유치사업이라는 것에 미쳤다. 3년째 되는 1968년에는 한강개발과 여의도 건설에 미쳤고, 1969년에는 시민아파트 건설에 미쳤다.
263. 이 기공식에 참석한 김 시장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흰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하여 큰 글씨로 '세운상가'라는 휘호를 썼다.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294. 1960년대의 말부터 1970년대의 전반기까지, 김현옥 ·양택식 두 시장에 의해 한강 제방도로가 축조되기 이전의 한강은 홍수 때의 강 넓이가 1,800m~2,000m나 되었다. 잠실섬을 중심으로 한 일대는 현재의 지하철 구의역에서 석촌호수 남단까지가 한강이었으니 그 강 넓이는 3,500m가 넘었다. 홍수 때는 그렇게 넓었지만 갈수기에는 겨우 50~100m 정도의 좁다란 물줄기였다.
301. 소양강 ·충주의 2개 댐에서 각각 5억 톤의 물을 조절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서울의 수해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은 비록 갈수기라 할지라도 1초당 355톤(한강인도교 기준) 이상의 물이 늠름한 모습으로 흘러 1년 내내 유랍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한강은 오나전히 관리되고 있고 한강물은 효율적 이용이 가능한 자원이 된 것이다.
303.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일에 미쳤던 김현옥 시장은 재임 4년간을 통하여 해마다 그 정열의 초점이 달랐다는 점이다. 처음 부임했던 1966년에는 교통소통에 주력했다. / 1967년에 들어 그가 한 일은 세운상가 ·파고다아케이트 ·낙원상가 등 이른바 도심부 재개발사업이었으며 이 사업들은 민자유치라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경영행정이라는 것이었다. 재임 3차년도인 1968년의 업적은 여의도윤중제 공사가 중심이 된 한강개발사업이었다. 그리고 재임4차년도인 1969년에는 이른바 서울 요새화계획이라는 것을 내걸고 남산 1 ·2호 터널을 뚫었으며 아울러 400여 동에 달하는 시민아파트를 건설했다. 그의 정열의 대상은 해마다 이렇게 변화했지만 도로의 신설 확장만은 재임 4개년간 계속 되었다. / 당시는 도로건설이 가장 전시효과가 많이 나는 행정이었기 때문에 위로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아래로는 시골 군수에 이르기까지 도로건설에 주력하는 경향이 있었다.
308. (강변로에 대해서) 그런데 이 도로에는 또 한 가지 특색이 있었다. 그것이 유료도로였다는 점이다. 보통의 도로는 자동차도 다니지만 일반인도 걸어다닌다. 그런데 자동차 전용도로는 자동차만 다닐 수 있으니 일반인이 낸 세금으로 만들 수 없다. 혜택을 보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서울 시민 수는 400만 며잉었고 자동차는 2만 대였다. / 수혜자 비용 부담의 원칙에 의하여 도로를 유료로 한 것이다. 김 시장이 즐겨 쓰는 경영행정이었다. / 이 강변1로는 이 나라 안 유료도로 제1호였다.
310. 기술인력 부족이 어느 정도 해소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 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에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이 학업과 병역을 마치고 직장에 들어가 10여 년의 수련을 겪게 되는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일이다.
321. 강남개발이 모습을 처음 드러내는 것은 1968년부터 시작한 경부고속도로 개통 때였다. 강남을 개발케 한 원인은 경부고속도로의 용지보상비를 지주들에게 지불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강남개발도 김현옥 시장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김 시장은 재임기간 내내 이 일에는 냉담했고 끝내 미치지를 않았다. 강남개발은 그의 뒤를 이은 양택식 시정(1970.4.16.~1974.9.3.)의 공적으로 돌려야 했다.
한강개발 3개년계호기의 중심은 여의도개발이었다.
325. 한강 북안을 '강변로'로 통일하고 남안을 '강남로'로 통일한 것은 강남이 개발되기 이전의 서울시민에게 강변이라는 개념이 한강 북안뿐이지 결코 남안이 아니라는 점기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또 강변4로만은 대건로라는 이름을 병용하기로 했다. /천주교 측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326. 한강강변도로는 1980년대에 들어 또 한 차례 크게 그 모습을 바꾸었다. 즉 1982년 9월 28일에 기공하여 1986년 9월 10일에 준공된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올림픽대로가 건설되었던 것이다. 올림픽대로는 서울의 동서를 연결하는 자동차전용 고속화도로로 김포공항에서 잠실 올림픽경기장까지 무정차주행을 가능하게 하여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에 대비함은 물론이고 서울 동서의 교통체증을 해소하는 효과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 올림픽대로가 완성되고 난 뒤 / 강변도로는 1 ·2 ·3 ·4의 구분을 없애고 전구간을 강변대로로, 강남구간은 전구간을 올림픽대로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 그러나 강변주민들에게는 종전과 같은 강변에의 접근이 봉쇄되어버림으로써 / 1980년대의 제2차 한강개발에서는 여러 군데에 고수부지공원을 만들어 시민의 접근이 쉬워질 수 있도록 고려했다.
331.한명회가/ 한강변 두모포 대안의 작은 구릉 위에 정자를 세운 것은 아마 세조 2년(1456년)경일 것이다. 근느 그 다음해 이조판서를 하면서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당시 명나라 제일의 문인이었던 한림학사 예겸에게 한강 남안에 지은 정자에 이름을 붙여달라 부탁했다. 그렇게 지어진 이름이 '압구정'이다. 그때부터 한명회의 시호도 구정으로 바뀌었다. / 고종 때는 금릉위 박영효의 소유였는데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 후에 박영효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이 정자도 철거해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