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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44) 2023. 10. 18
다윗을 선대한 세 사람
삼하17:24-29
<요단강을 건넌 다윗>
후새가 보낸 전령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에 의해 ‘아히도벨의 전략’, 곧 “군사 1만 2천 명을 이끌고 지금 습격할 수도 있다”는 정보를 전해 들은 다윗은 급히 그 밤에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요단강을 건너게 합니다. 실제로 아히도벨의 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만일의 일을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전략이 채택되지 못하자,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할 것을 예측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스스로 죽습니다.
<마하나임에 도착한 다윗>
요단강을 건넌 다윗 일행의 목적지는 마하나임이란 곳이었습니다
24절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마하나임은 요단 동편,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경계에 있는 성읍입니다. 이곳은 성벽과 성문이 있는 요새화된 성읍이었기 때문에(18:24), 다윗의 임시정부의 거점(據點)으로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다윗이 요단강을 건넌 지점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천연의 요새였습니다.
한편, 이 마하나임은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즉위한 이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삼하2:8~9).
마하나임의 유래 - 외삼촌 라반과 헤어져 고향으로 발길을 옮기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났는데,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부르고 그곳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습니다. 창32:1~2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이러한 천사들은 20년 전, 야곱이 하란으로 떠날 때 벧엘에서 나타나고, 또 귀향길에 나타난 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항상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심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착한 이후, 압살롬은 비로소 이스라엘의 온 군대를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후새의 제안(11절)을 따라 ‘단부터 브엘세바까지의 국민병’을 모집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넜다고는 하나, 그 동안에 다윗은 이미 반격의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아마사가 군장관이 됨>
한편, 압살롬은 ‘아마사’를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세웠습니다.
25~26절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그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26 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오해하지 말 것은 ‘대신하여’라는 말은, 요압이 한때 압살롬의 편을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다윗이 요압을 군대 장관으로 삼은 것에 ‘대응하여’ 아마사를 군대 장관으로 임명했다는 뜻입니다.
아마사와 요압은 서로 반대편의 군지휘관이 되었으나, 둘 다 다윗의 조카로 이종 사촌지간입니다.
‘아마사’는 다윗의 누이인 아비갈의 아들로서 다윗의 조카이며, 요압 역시 다윗의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로서 다윗의 조카입니다(대상2:9~17). 따라서 아마사와 요압의 관계는 이종 사촌지간이고, 압살롬과는 고종 사촌지간입니다.
훗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은 ‘아마사’를 그를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 장관으로 임명하였으나(20:10), 기회주의자인 요압에 의해 살해당하였습니다.
압살롬은 뒤늦게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 땅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길르앗은 방어막이 없는 평지입니다. 다윗은 이미 난공불락의 요새라 할 수 있는 마하나임에 진을 쳤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이미 전세가 다윗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후새의 계략에 속아, 때를 놓친 것이 압살롬에게는 치명적인 실수가 된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대접하는 세 사람>
한편, 오늘 본문은 다윗이 마하나임에 진 치고 있을 때, 다윗을 돕기 위해 나타난 세 사람에 대한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27~29절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28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29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첫째는 암몬 족속에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입니다.
암몬의 전왕(前王) 나하스의 아들이며 하눈의 동생입니다(10:1).
당시 나하스가 죽고 왕위에 오른 하눈은 다윗이 보낸 조문 사절단을 모욕하였습니다(수염을 절반 밀고,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잘라 모욕을 주어 돌려보냄). 결국 다윗에 의해 랍바 성이 함락당했습니다(삼하12:26~31).
소비는 바로 그 하눈의 동생입니다. 하눈 대신에 왕위에 올랐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는 자기의 형 하눈과는 달리 자기 아버지 나하스와 다윗 왕 간의 친분을 기억하고 다윗과의 교제를 유지하려고 한 듯합니다.
둘째는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입니다.
암미엘은 사울 왕의 집안이 몰락하는 와중에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몰래 숨겨준 사람입니다(삼하9:4, 5, 17:27).
아마도 그는 지난날 므비보셋에게 큰사랑을 베풀었던 다윗의 호의를 기억하고 지금 다윗을 도우러 왔을 것입니다. 즉 그는 다윗의 인격에 감명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이제 위기에 빠진 다윗을 생각하고 도왔던 것입니다.
셋째는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입니다.
로글임은 야베스 길르앗으로부터 북동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성읍입니다. 이들은 생활필수품인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 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습니다. 피난길에 지치고 굶주린 다윗과 그 일행에게 씻을 수 있게 해 주었고, 쉴 곳과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의 대접은 매우 극진했고, 풍성했습니다.
그럼 왜 이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다윗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였을까요? 그 답을 본문 29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29)고 그들이 다윗 일행을 도운 동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평소 심성이 어떠한지를 엿볼 수 있는 말입니다.
그들은 ‘긍휼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평생토록 살아왔던 그 모습대로 다윗 일행을 대했습니다.
특히 바르실래는 나이가 80이나 되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하러 직접 나왔습니다.
우리 말로 ‘애가 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애는 순우리말로 창자라는 뜻인데, 애가 끊어지는 마음, 애가 타는 마음, 애간장이 녹는 마음... 그렇게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인간에 대한 존중,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습니다! 바르실래와 그 일행의 생각이 그러했습니다.
작년(2022. 12월), 미국 뉴욕주 버펄로란 곳으로 여행을 간 한국인 관광객 9명이 폭설로 인해 고립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미국인이 고립되어 동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때 근처에 있던 미국인 부부(알렉산더 캠파냐씨 부부)가 자신의 집을 피난처로 내어주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곤경에 처한 낯선 관광객들이 2박 3일간 자신의 집에서 대피할 수 있게 하고 한국 요리를 즐기면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이 사연이 뉴욕타임스(NYT) 보도 등을 통해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한국관광공사는 한국인 관광객 9명에게 선뜻 자신의 집을 내어준 미국인 부부를 오는 5월 14일부터 일주일간 한국에 초청하여 한국인 관광객 9명과 재회하게 하고, ‘버펄로 폭설 영웅’ 메달을 수여하고, 다양한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관광공사 관계자는 “폭설 속에서 위기에 처한 한국인 관광객들을 구해준 미국인 부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초청하게 된 것”이라면서 “은혜를 잊지 않고 반드시 보답하는 대한민국의 이미지도 전 세계에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크게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의 비유(마18장)를 하셨습니다.
마18:23~35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런데, 이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광야에서 굶주린 무리들을 보시고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막8:2)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마음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이는 부자니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쫓기는 다윗, 패주하는 왕을 돕는 일은 부자였기에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후에 압살롬으로부터 가혹한 문책을 받을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에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다윗을 도운 일로 아히멜렉을 비롯한 놉 땅의 제사장 85명이 몰살당한 일이 있었습니다(삼상22장).
그런데 소비, 마길, 바르실래는 그러한 위험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다윗을 도왔습니다.
자신의 유불리를 떠나 어려운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식입니다.
<다윗의 초청과 바르실래의 겸손>
다윗은 이들의 배려와 사랑을 잊지 않았습니다.
훗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환궁하였습니다. 이때 다윗은 바르실래가 자신에게 베푼 진심 어린 호의에 고마워서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청합니다(삼하19:31-39).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가면 다윗이 바르실래에게 지난날 받은 충성에 대하여서 보답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르실래에게는 명예를 얻을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다윗 왕의 호의를 자신의 나이 많음을 들어 아주 겸손하게 사양합니다. 다만 바르실래는 다윗 왕에게 자신의 아들 ‘김함’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먼저 재물을 얻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많은 재물을 얻으면, 명예를 추구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르실래는 많은 재물 위에 명예를 더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물을 얻은 후에 명예도 갖기 위하여 하나님과 등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르실래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았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귀영화와 권세를 싫어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바르실래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세상의 풍조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17:7-10절에서 ‘종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눅17:7~10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진정한 ‘공궤’는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있는 사람에게 베풀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서의 하나님을 섬기는 마땅한 도리이자 은혜로운 특권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진 점을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베풀었어도,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시고 보상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최후의 날에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는 말씀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서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은혜를 기억한 다윗>
바르실래가 보상을 정중히 거절했지만, 다윗은 그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윗 왕이 죽음을 앞두고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는 중에 바르실래를 언급합니다(왕상2:1-9).
다윗의 유언은 크게 ‘하나님께 행할 일’(2~4절)과 ‘사람에게 행할 일’(5~9절)로 나뉩니다.
다윗은 먼저 여호와의 명령 곧 율법을 따르라고 당부하는데, 이는 옛적에 여호수아가 받았던 명령과 매우 유사합니다(참조 수1:8-9). 가나안 정복의 비결이 율법 준수였던 것처럼 왕권 유지의 비결 역시 율법 준수였는데, 이스라엘의 왕위는 하나님의 언약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행할 일을 유언하는데 세 사람에 대하여 유언을 합니다.
먼저 요압의 죄에 대하여 심판할 것을 유언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심복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른 사람이지만, 무고한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에 그 죗값을 치러야 했습니다(5~6절).
또한, 시므이는 사울 왕조를 지지하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윗을 모욕한 자였기에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8~9절).
그에 비해 바르실래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다윗을 도왔던 사람이기에, 그 아들들에게 솔로몬의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7절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
다윗은 죽을 때까지 바르실래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윗 왕은 왕자들에게 하듯이 ‘김함’(그의 형제들)에게 베들레헴 근처의 땅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게롯김함’(김함의 숙소,렘41:17)이라 하였고, 훗날 이 숙소는 요셉과 마리아가 잠시 머물렀다고 합니다.
바르실래에 대한 존경은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훗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에, 바르실래의 자손들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돕겠다며 귀환길에 함께 했습니다(스2:61, 느7:63-64 – 본문의 바르실래란 바르실래를 존경하여 바르실래의 딸과 결혼한 후 아예 바르실래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자의 자손).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비, 마길, 바르실래는 위험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다윗을 도왔습니다. 다윗에게 받은 은혜를 갚았습니다.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의 말씀에서도 바르실래와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는 삶을 사는 자에게는 하늘 하나님 아버지께서 후한 상과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25:34-36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다윗을 선대한 세 사람’과 같이 긍휼의 마음을 소유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서, 예수 그리스도 사랑을 널리 전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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