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3대 종교는 유교 불교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2백여 년에 불과 하지만 불교와 유교는 1천 년 이상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현대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려면 우리 문화와 역사 속에 살아있는 이 세 종교를 알아야 합니다. 주체적인 삶이 되려면 나를 알아야 하고, 나를 알려면 내가 태어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기원전 624년경 지금의 네팔지역에서 태어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유교는 기원전 551년에 중국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의 가르침이요 기독교는 로마제국 시대에 팔레스타인의 유대나라에서 태어난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려면 어느 책이 좋은가 했을 때 많은 분이 권하는 책 가운데 하나가 금강경입니다. 화엄경은 80권으로 너무 방대하여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데 금강경은 한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짧은 분량이라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경전 속에 불교의 핵심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읽어가면서 불교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옛 인도말인 산스크리트어로 적힌 인도의 불경이 중국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기에 모든 경전이 한문으로 되어있습니다. 요즘엔 한글로 번역된 책들이 나와 있지만 불교철학적 용어들이 우리말로 번역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중요개념은 한자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空이니 색色이니, 상相, 또는 열반涅槃 등을 우리말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기에 한글 번역이라 해도 완전한 우리말 번역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불경을 이해하려면 한문과 한자를 어느 정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 한민족이 1천 년 이상 읽어온 불경은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이므로 풀이도 그런 한역경전을 대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우리 한국불교의 한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요즘 학자들은 한역 이전의 불경 즉 인도의 산스크리트 경전을 공부하여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도 있지만 이미 우리 문화 속에 1천 년 이상 스며든 한역본의 영향을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한역본에도 구마라집(344-413)의 번역본과 그보다 2백여 년 후에 나온 당나라 현장(602-664)의 역본이 있는데 우리는 보다 널리 알려진 구마라집의 역본을 가지고 공부 하겠습니다.
공부를 어떻게 시작할까 생각하다 모든 공부는 쉽고 재미있게 하는 것이 좋다 하여 문득 새로운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비우면 비울수록 더 풍성해지는 이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가르치면 두 번 배운다는 속담처럼 남에게 알려주려 노력할수록 더욱더 자기 공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매주의 실천으로 바꿔보는 것입니다. 틈틈이 읽고 공부한 것을 주간 단위로 모아서 나눠보자는 것입니다. 요새는 인터넷이 발달하여 어디에 있어도 컴퓨터만 있으면 서로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나눌수록 적어지나 우리의 마음이나 지혜는 나눌수록 풍부해집니다. 샘물을 퍼내면 퍼낼수록 솟아나듯이 우리 맘속의 지혜도 퍼낼수록 솟아나고 나눌수록 풍부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어떤 의미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진실로 비움이 되어야 순수의 빛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수의 빛을 계속 살리려면 늘 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노자는 이와 같은 의미로 허실생백虛室生白이라 했습니다. 방은 비울수록 환해진다는 것입니다. 빈방이라야 빛으로 가득 차게 되지 무엇이 가득 차 있다면 빛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더욱 풍성한 생명의 빛을 얻기 위해서는 자꾸 비우고 비우는 일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 마음을 어떻게 비울까요? 그것은 바로 경전을 읽고 묵상하다가 어떤 지혜가 떠오르면 그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얻은 생각을 도반들에게 알리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올려드린 소식이 친구들의 마음에 울림이 되고 거울처럼 반사되어 메아리로 되돌아와 들을 수 있다면 더욱더 제 마음도 열리고 울림도 크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거울을 들여다보는 지혜의 풍성함으로 더욱 속사람은 맑아지고 밝아지고 커지게 될 것입니다.
다석 류영모(1890-1981)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금강경의 핵심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한 마디입니다. 중국의 6조 스님으로 알려진 혜능선사(638-713)가 금강경의 이 구절을 듣고 대오大悟하여 육조가 되었답니다. 응당 머무를 바가 없는데 그 마음이 살아나서 빛난다는 것입니다.
응당 머무를 바가 없다는 것과 그 마음을 빛내라는 것, 이 두 가지에 대해 제 스승이신 김흥호(1919-2012)는 늘 금강석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나무가 땅속에 들어가서 수만년 머물게 되면 물기가 빠져 석탄이 되고 무연탄이 되고 끝내는 빛나는 금강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땅속에 들어가서 견딜 수 없는 압력과 뜨거운 열을 견디다가 마침내 모든 불순물이 사라지고 순수 결정으로 재생되어 영원히 변치 않고 빛나는 금강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금강석으로 변화가 되어야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나무는 본래가 태양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태양의 아들이었던 나무가 땅속에 들어가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드디어 순수한 빛을 발하는 금강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빛을 스스로 발하는 금강석은 태양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태양의 아들인 나무가 땅의 고난을 통하여 결국 아들로서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고 작은 태양으로 빛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풀이는 또한 ‘응무소주이생기심’이란 말을 장자의 ‘참만고일성순參萬古一成純’, 만고에 참여하여 하나의 순수함이 된다는 뜻에 비추어 풀이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만고萬古는 오랜 세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온갖 고생을 뜻하는 만고萬苦이기도 합니다. 나무가 어떻게 순수한 빛이 되는가? 마치 돌덩이인 금광석이 용광로에 들어가 뜨거운 불에 녹아 잡석은 다 타버리고 순금이 되어 나오듯이, 풀무에서 단련된 쇠가 강철로 변하듯이, 만고의 고난을 겪어야 진리의 빛을 빛내는 인격이 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무소주應無所住, 응당 살 수 없는 그런 역경속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그때 생기심生其心, 그 마음을 일으켜라. 그 마음이란 순수한 빛이요 창조적 지성이요 우주적 지혜의 본성, 그 없이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장차 큰일을 맡기려 하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과 육신의 고난을 겪게 한다는 맹자의 사상과 상통하는 풀이입니다. 또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는 기독교 사상과도 같은 맥락에서 풀어본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잘 드러낸 한시를 소개합니다. 황벽선사(?-850)가 지은 것입니다.
塵勞逈脫事非常(진로형탈사비상)
緊把繩頭做一場(긴파승두주일장)
不是一番寒徹骨(불시일번한철골)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
- 황벽黃檗
먼지와 땀방울로 이뤄진 속세의 감옥을 벗어나는 일이 보통 긴급한 일이 아닙니다. 한바탕 눈앞에 늘어진 밧줄을 붙들고 올라가는 씨름이 없이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매화나무가 매서운 겨울의 추위를 겪지 않으면 봄에 향기로운 꽃을 피워낼 수 없듯이 어찌 고난이 없이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누군가 고난 중에 있습니까. 아니, 세상에서 고난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치고 고난을 겪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은 고난 속에 있습니다. 크건 작건 일체가 고난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일 가운데 고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지금 어떤 고난 속에 있습니까? 나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나의 고난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시작이라 봅니다. 인생이 고난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진실한 인생을 시작하는 출발입니다. 인생의 고난이 무엇인지 알아야 인생을 진실하게 살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면 소망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이처럼 소망을 주는 의미 있는 것이요 소중한 것이라면 고난을 회피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고난이 그저 무의미한 고통이요 피해야 될 원수라 생각지 않고 우리가 내 몸처럼 함께 끌어안고 가야만 하는 것이라 여기고 그 고난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나아갈 때 우리는 더욱 순수하게 될 것이요 그 순수함을 통해 새로운 지혜와 생명의 빛이 솟아날 것입니다.
그 마음이란 하늘이 주시는 그이의 마음입니다. 위에서 주시는 그 빛이 빛나는 그 마음을 얻게 된다는 그 희망의 빛을 바라보고 고난을 겪어 나아갈 때 우리는 오늘의 고통과 고난이 제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인내와 소망보다 더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강경이란 한 마디로 고난 속에 있는 인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이요 복음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선인들은 기쁨의 소식을 복된 소식, 복음이라 했습니다. 고난에 짓눌리지 말고 그 고난을 받아들여 이겨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 고난을 통하여 영원히 빛나는 금강석으로 변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희망의 메시지가 곧 금강경이 아닐까 기대하며 읽어보겠습니다.
2008. 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