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 묘역은 서울의 묘지 터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193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되었다. 최창조 교수에 따르면 일제가 조선왕조의 맥을 완전히 끊고자 역대 임금의 능이 모인 동구릉 발치를 골랐다는 것이다.
“1933년 하필이면 조선 왕조의 능들이 밀집한 동구릉 자락에 공동묘지를 잡은 일제의 행패가 가증스럽다”·····최창조의『풍수잡설』중에서
이곳의 묘지는 한때 42000基에 달했으나 화장과 이장 등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현재는 19만평의 산에 28000基의 묘소가 있으나, 1973년 이후로는 새로운 묘의 조성은 금지되었으며 현 상태에서의 유지와 보수만 가능한 형편이다.

2006년 11월 찾아간 망우리 공동묘지는 이전의 음침하고 황량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변모해 있었다. 망우산을 한 바퀴 도는 5.2Km의 산책로 “사색의 길”이 조성된 이후로 초등학생들은 거북이 마라톤을 하고 중학생들에게는 자율학습장이 되었다. 북망산 가던 설움의 길이 수많은 탐방객들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산책과 운동을 하면서 그야말로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 공유하는 생동감 넘치는 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봄이면 철쭉과 벚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고운 단풍과 낙엽이 어느 유명 관광지에 손색이 없다. 그리고 산책하다가 지루하면은 전봇대에 붙은 번호를 보고 전화하면 짜장면과 소주가 오토바이를 타고 총알같이 달려오니, 대학 캠퍼스 잔디밭이 부럽지 않다.

술을 한잔 먹고 있노라면 수많은 무덤들이 충고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사는 인간들아! 재벌도 거지도 죽으면 우리처럼 한 줌 흙으로 돌아갈 것인데, 무엇이 그리 잘났다고 아등바등 다투느냐?” 중랑구청에서는 서울시와 함께 이곳을 “나들이 공원”이라는 좀 더 친숙한 모습으로 꾸미겠다고 한다. 아마 그때쯤이면 유럽의 어느 공원묘지 못지않을 것이다.
각설하고 풍수로 돌아와서 이곳을 살펴보자.
이곳 묘역은 주산인 망우산(281m)을 기준으로 크게 2개의 권역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한쪽은 한강과 잠실이 내려다보이는 남향을 하고 있고, 다른 쪽은 봉화산과 불암산·삼각산이 바라보이는 북향의 경사면이다.

<남향 묘소>

두 곳의 묘를 쓴 년도를 비교해 보면 背山臨水하여 南向을 한 지역부터 차례차례 묘를 쓰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쪽에 애국지사들의 묘가 몰려 있는 것이다. 송촌 지석영, 설산 장덕수, 죽산 조봉암,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등등 그러다가 남향 지역이 포화상태가 되자 차츰차츰 북향의 경사면을 쓰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초창기 1930년대에는 한강이 바라보이는 남향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산에는 面背가 있게 마련이므로, 과연 남향이 面인지 살펴보자.
 <북쪽 사면에서 바라본 망우산>
산책로 “사색의 길”을 걸으며 양쪽의 경사면을 볼 것 같으면, 야트막한 산인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암석이 많다. 수락산과 불암산을 거쳐 이곳 망우산까지 오면서 아직까지 殺을 덜 벗고 있음이다. 특히 남쪽사면의 바위들이 험하고 지저분한 형태이다. 그러나 북쪽 경사면의 바위들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때를 벗고 몽글몽글해 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剝換의 과정인 것이다. 다음은 두 곳을 비교하여 정리한 것이다.

위의 도표를 보면 망우산은 북향의 경사면이 面이 되고 남향은 背가 됨을 알 수가 있는데, 혈과 명당은 산의 면에 형성된다는 것은 풍수의 가장 기본적인 철칙이다. 이곳 망우산의 북향사면은 능선이 길게 빠져 나와서 햇빛을 받는데 전혀 지장이 없으며, 오히려 웅장한 수락산과 불암산을 마주하면서 빼어난 回龍顧祖의 형세가 되었다. 특히 봉화산은 균형 잡힌 모습으로 기가 막힌 안산을 이루고 있다.

이곳 북쪽사면에서는 正龍과 傍龍, 본신과 지각을 구분할 수 있고 過峽과 起伏을 살필 수 있으며, 主從의 질서와 생동감을 볼 수 있다. 근심을 잊는다는 忘憂山에서 최고의 명당은 과연 어디쯤인지 풍수이론을 하나하나 대입하며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공부가 될 것이다. 한편 이곳에서 40년 넘게 관리인으로 일을 하신 원OO氏(70세)의 말에 의하면 남향의 묘지보다는 북쪽의 묘역에서 황골을 훨씬 많이 보았다고 한다. 본인의 글 “황골 나온 묘소들”에서 소개한 곳도 북쪽과 서쪽사면에 위치한 묘소들이다. 이로 말미암아 백골의 상태는 坐向보다는 산의 변화가 많은 곳이 좋은 것을 알 수가 있다. 결국 해방 무렵의 풍수는 산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다는, 배산임수의 풍광을 중시하는 감상적 경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음이다.
본인은 이곳을 10년 넘게 약 30회 정도 답사한바 있는데, 처음 10번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자 쫒아 다니기에 정신없었고, 그 후 부터는 나 홀로 명당을 찾았다고 우쭐하곤 하였다. 그리고 다시 10번을 더 오르니 이전에 명당이라 했던 것들을 모두 버려야만 했다.
이곳은 하남 장용득 선생님과 정암 김종철 선생님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한 수많은 風水高手들이 공부하던 곳이며, 조상의 뼈를 묻은 곳이기도 하다. 특히 최창조 교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무엇에 이끌리듯 이곳을 자주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는 체계적으로 풍수를 공부할 결심으로 서울대 지리학과를 들어갔다고 하니, 실로 무서운 집념이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 이곳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지석영 선생 묘소>

<정운찬 前서울대 총장 부모님 묘소>

<소파 방정환 선생 묘소> 묘가 특이하여 자세히 보니 火葬을 하여 모신 것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 묘소> 出家하기 前 부인의 묘와 함께 하고 있다.

<竹山 조봉암 선생> 묘소.
비석의 뒷면에 아무런 글이 없다. 이러한 형태를 無字碑라 하는데, 마치 억울한 죽음에 無言의 시위라도 하는 것 같다.

명나라 14대 황제 “주익겸”의 無字碑 명나라를 패망케 한 황제의 비석에는 아무것도 남겨둘 것이 없다하여 비석에 아무런 글씨가 없다.

서쪽 경사면에 70세의 노인이 2005년부터 돌탑을 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5년을 예상한다고 하는데, 노인의 바람처럼 마이산의 돌탑에 버금가는 명물을 조성하시기를 기원해 본다.

바위를 잘라내고 돌 틈 사이에 묘를 쓰기도 하였다.

커다란 바위 3개를 의지하여 묘를 썼는데, 吉인지 凶인지 모르겠다.

<詩人 박인환 묘소> 대표작 :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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