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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스티브
권준우
음악재생기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슬픈 목소리의 여가수가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슬픔을 바람결에 날렸다. 그녀가 목소리를 내지를 때마다 구식 스피커가 찢어질듯 신음소리를 냈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골동품 거리에서 어렵게 구한 스피커였고 더 이상 예전 타입의 스피커를 찾는 것도, 살 돈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방안은 어두웠지만 나는 불을 켜지 않았다. 차라리 어둠이 내려와 이 작은 방 안을, 아니 이 세상을 모두 덮어버렸으면 했다. 창밖의 광고판이 깜박일 때마다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 당신이 왠지 싫어요.”
침대 위에 웅크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내가 말했다. 오랫동안 침묵해서 가래가 걸린 목소리였다. 맞은편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던 폴이 병에서 입을 뗐다. 볼록해졌던 그의 볼이 쑤욱 들어갔고 입에 담겨있던 술은 꾸울꺽 목젖을 타고 내려갔다. 무릎 위로 눈을 내놓은 채 노려보기만 하자 그는 말없이 술병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왜 싫죠?”
“당신이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
폴은 피식 웃었다.
“그래요. 모든 것을 알고 있죠. 당신이 개구리를 잡겠다고 뛰어다니다가 오물통에 빠졌던 것도 알고 있고, 에밀리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후 그게 소문이 나서 웃음거리가 됐던 것도 알고 있어요. 난 당신의 첫 번째 섹스 상대가 누구인지도, 아내와 결혼 후에도 정비소의 미란다와 뜨거운 밤을 보낸 것도 생생하게 알고 있죠. 그게 마음에 안 드나요?”
목구멍 언저리에서 구역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금세라도 달려들어 주먹을 날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싱글거리던 폴의 입 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나라고 당신이 좋은 줄 알아요? 스티브? 나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정말 역겹다고요.”
폴은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며 다시 술병에 입을 갖다 댔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술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데.”
“2년 후면 좋아하게 될 거요.”
“쳇. 간암으로 죽었다더니, 알만 하군.”
나의 말에 폴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고 그 끝은 항상 기침이었다. 폐 속 깊은 곳에서 아기라도 낳으려는 듯 안간힘을 쓰며 쿨럭였다. 입가에 흐른 침을 손등으로 닦아낸 그가 물었다.
“우리는 뭘까요?”
“무슨 뜻이오?”
폴은 술병을 빙글빙글 돌렸고, 안에 들어있는 술이 찰랑거렸다.
“이미 오리지널 스티브 레이너는 죽었어요. 대신 카피 두 명이 남았죠. 우리는 뭘까요? 가짜일까요?”
“난, 스티브 레이너요. 누가 뭐래도.”
“그럴까요, 과연?”
폴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가 앉아있는 탁자 옆에 거울이 걸려있었다. 창밖 광고판이 켜지자 내 얼굴이 나타났다. 옅은 갈색머리였고, 요즘 살이 빠져 광대가 도드라져보였다. 거울 옆에는 나와 같은 얼굴을 가진, 아니, 닮은 외모를 가진 폴이 쿨럭쿨럭 기침에 술을 튀기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 불콰해진 얼굴로 그는 씨익 미소를 날렸고 나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것을 피했다. 불현듯 한 달 전 이 시대에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힘들지만 그래도 썩 괜찮았던 나의 인생이 절망과 고통만으로 덧칠해진 그 시간이.
“오늘은 2093년 3월 24일입니다.”
샛노란 빛이 눈앞에서 나풀거렸다. 저것은 나비일까, 아니면 말로만 듣던 반딧불이일까. 그 노란 빛은 다시 발갛게, 파랗게 물들어갔다. 몽롱해지던 나의 의식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지(四肢)의 통증에 번뜩 놀라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이 얽혀 얼룩져있던 시야가 명료해지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온 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 짜릿짜릿해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쿵쾅대는 심장박동에 어지럼증마저 느꼈다.
조금 있으면 나아질 테니 참아요. 이름이 뭐죠?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부스스한 곱슬머리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하늘색 모자를 쓴, 덩치 좋은 흑인여자가 껌을 짝짝 씹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뻣뻣해진 턱을 놀려 겨우 대답했다.
“스티브……. 스티브 레이너입니다. 방금, 오늘이 며칠이라고 하셨죠?”
“2093년 3월 24일이요. 당신 같은 시간이주자들은 날짜부터 물어보더군요. 매번 똑같아요. 그리고 한 번 더 물어보는 것까지 항상 같은 패턴이죠.”
그녀는 콧바람을 내며 피식 웃었다. 들고 있던 얇은 모니터에 뭔가를 쓱쓱 쓴 그녀는 ‘스티브 레이너씨가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그 모니터를 종이처럼 반으로 착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저는 시간사무국 직원인 카렌에요. 시간이주자들을 맞이하고 시간재활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지요. 원래 당신도 제가 재활센터까지 안내를 해야 하지만, 당신은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좀 있네요. 변호사가 곧 도착할거에요.”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사무국은 뭐고 시간재활은 뭘 말하는 걸까. 그리고 오늘이 2093년이라니. 그 누구도 이렇게 긴 시간을 이동할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갑자기 몰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티벤스 회사와 계약을 했어요. 그 회사가 나를 미래로 보냈다고요. 티벤스 회사 직원을 연결해줘요.”
카렌은 이미 예상했던 요구라는 듯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스티브. 티벤스라는 회사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라졌어요. 곧 변호사가 도착할 테니 그와 상의하도록 하세요.”
청천벽력 같은 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나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유리벽 바깥에서는 수십 명의 연구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포위하듯 나를 둘러싼 커다란 기계들은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으르렁댔다. 흰 수염이 덥수룩한 연구원 하나가 마이크를 잡고 물었다. 스티브 레이너씨. 준비 됐나요? 불빛이 그의 안경에 반사돼 번뜩였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곧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겁니다. 당신은 인류 최초의 시간여행자가 되는 거예요. 긍지를 가지세요.
눈을 감았다. 이 실험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듣자하니 실험체를 분자상태로 변환한 후 미래에서 다시 되돌린다던데, 그 과정이 잘못되면 나는 갈가리 찢겨져 죽는 게 아닐까.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병실에서 산소 튜브를 코에 끼운 채 거친 숨을 쉬고 있는 아들 리키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나려 했다.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실험 대상자로 참가한 것도 리키 때문이었다.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아들의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티벤스 회사는 리키의 수술비를 하고도 남을 정도로 파격적인 계약금을 제시했다. 한 번의 모험으로 아들을 살릴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내가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분자조각들이 된다 한들 내 아이가 건강하게 회복될 수만 있다면 아쉬울 것이 없었다. 기계에 세팅된 날짜는 열흘 후였다. 만에 하나 실험이 성공하여 내가 미래에 가게 된다면, 건강해진 아들과 재회하게 될 테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카운트다운 시작합니다.
긴장감으로 손이 땀에 젖어갔다. 내 선택은 그르지 않아. 난 행복한 세상으로 떠나는 거야. 더 이상 가난하지 않고 가족이 아프지 않은 저 미래로!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있던 과학자들이 확 사라졌다. 붉은 빛. 온통 영롱한 붉은빛뿐이었다.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신체는 사라지고 정신만 남은 유체이탈 같은 느낌. 시야는 이내 새파랗게 변했다가 여러 가지 색으로 영롱하게 물들어갔다. 그렇게 설렘에 가득차서 미래로 떠난 것이 바로 몇 분 전의 일이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2093년이라니.
카렌 옆의 공간에 파란 빛이 떠올랐다. 그 빛은 사람 키만큼 커지더니, 정말로 그 빛에서 사람 하나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나는 가슴을 붙잡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이러다 정신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스티브 레이너씨? 반갑습니다. 저는 변호사 에디 맥레이입니다. 2093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갑작스럽게 환경이 바뀌어 힘드시겠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카렌이 내민 모니터에 쓱쓱 사인을 하더니 내게 산책을 권했다.
“좀 걸으면서 얘기할까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티벤스 회사와 계약을 하고 실험에 참가했습니다. 티벤스 회사가 사라진 것이 확실한가요? 아니, 그보다, 가족이 있습니다. 제 아내와 아들을 만나게 해 주시겠습니까?”
“바로 그 문제로 이야기를 하려는 겁니다.”
변호사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죽었어요. 레이너씨.”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이 모든 것들이 환상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말을 믿고 싶을 정도였다.
“제가 죽었다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그럼 제가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은 환상인가요? 여기는 사후세계인가요?”
“아뇨. 당신은 살아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오리지널이 죽었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도 그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변호사는 종이를 하나 꺼냈다. 그것은 순식간에 스스로 쫙 펴지더니 표면에 글자가 떠올랐고, 그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스티브 레이너씨. 최초로 시도된 인간 시간여행자군요. 조금 일찍 오셨더라면 굉장한 이슈메이커가 되셨을 텐데 너무 늦게 도착했어요. 2045년에 출발하셨으니 48년 후에 도착하신 셈이네요. 하긴 그때에는 시간여행 계산하는 공식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니까 그럴 만도 하죠.”
티벤스 회사에서 말했던 것은 겨우 열흘이었다. 열흘 후의 미래에 도착할 것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계산하면 열흘이 48년이 되는 거지? 계약서를 내밀며 만면에 웃음을 짓던 티벤스 직원의 멱살을 잡고 싶어졌다. 울컥대는 화를 진정시키는 동안 변호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가족이 있으시죠? 레이너씨.”
그제야 가족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가족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들은요? 수술은 잘 됐습니까?”
“네. 모두 건강합니다.”
잡힌 팔을 빼내며 그가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난 멋쩍게 손을 내리며 바짓단을 매만졌다.
“당신이 미래로 떠난 직후, 티벤스 회사는 계약했던 금액을 지불했습니다. 그 돈으로 당신의 아들은 수술을 받았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 다행이군요.”
나는 웃었다. 그것이 내가 미래로 온 후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다. 변호사도 미소를 지었으나 어딘가 쓴맛이 배어 있었다. 걸음을 멈춘 그는 허리에 손을 턱 얹었다.
“자, 이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스티브 레이너씨. 티벤스 회사는 당신과의 계약을 성실히 이행했습니다. 다만 회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죠. 실험을 시작한 후 당신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었죠.”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는 여기, 미래에 도착했는데요.”
“그러니까, 당신이 둘이 된 것입니다. 2045년 실험실에 남아있는 스티브 레이너와 2093년으로 떠나버린 스티브 레이너로 말이죠.”
내가 둘이라고? 나는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입을 오물거리며 뭔가 질문을 하려 하자 그가 재빠르게 내 말을 가로챘다.
“티벤스 회사는 2045년에 남아있는 스티브 레이너씨에게 계약한 금액을 지불했습니다. 레이너씨는 그 돈으로 아들의 수술비용을 댔고, 아들은 건강해졌지요. 그 후 티벤스 회사가 제안한 몇 개의 실험에 참가하면서 당신은 경제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72세가 되던 해에 간암으로 사망했죠. 2077년의 일입니다. 가족들은 당신을 사랑했고, 간암 치료에도 적극적이었으며 당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2045년의 스티브 레이너씨는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죠.”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는 마치 빛이 나는 듯 형형했다.
“그런데 그 죽은 스티브 레이너가, 2093년에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마치 유령처럼.”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유령이라고? 이미 죽어버렸다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나는 한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입에서는 그저 어, 어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미안한 이야기입니다만, 당신의 가족은 또 다른 스티브 레이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2045년의 스티브 레이너를 떠나보내면서 이미 그에 관한 추억도 정리된 상태지요. 같은 몸이기 때문에 당신도 간암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간암환자를 간병하는 그 힘든 과정을 또다시 겪는다는 것은 참 비참한 일이지요. 같은 고통을 또 한 번 겪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해하셨으면 좋겠군요.”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의 가족이, 당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레이너 일가의 가족이 아닙니다.”
체념이 빠른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변호사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타임머신은 미래로만 이동가능하고 아직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시간이동을 해서 둘이 되어버리는 경우, 그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이 오리지널이고 미래로 간 사람은 카피가 되며, 카피는 법적으로 오리지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기막힌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만약 그러한 법에 수긍하지 못할 경우 오리지널을 보호하기 위해 카피를 구속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가족을 만나게 해 주세요. 변호사에게 애원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드님께서 만남을 거부하셨습니다. 부인께서는 이미 사망하셨고요.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미래로 온 게 아니라 환각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다들 짜고 나를 놀리는 걸까? 갖가지 생각을 떠올렸지만 지금 이 상황은 너무나 또렷한 현실이었다. 울상을 지으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변호사는 가만히 서서 괴로워하는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마치 불법이민자처럼 나는 재활센터로 쫓겨났다. 시간을 이동해온 사람들이 현실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라 했다. 이곳에서 나는 맨주먹으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런 재산도, 가족도 없었다. 시간 재활센터는 단출한 건물이었다. 허름한 건물 모양새가 2045년과 비슷해 보여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름이 뭔가요. 재활센터 창구의 직원이 물었다.
“스티브 레이너입니다.”
직원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흘끔 바라봤다. 3초 후,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직원은 다시 고개를 숙여 서류를 작성하고는 일어섰다. 따라오라는 손짓에 그를 쫓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휴게실로 보이는 꽤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고, 직원은 손뼉을 짝짝 치며 말했다.
“자, 새로 센터에 들어온 신입을 소개시켜드리겠어요. 이름은 스티브 레이너씨고요. 누구 센터 구경을 좀 시켜줄 사람?”
마치 정지화면이라도 된 듯 사람들이 그대로 멈춰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위화감이 방안에 둥둥 떠다녔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씩 뒤를 돌아보았고,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가 하도록 하죠.”
“좋아요. 부탁해요. 폴.”
예상했다는 듯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방을 나갔다. 직원을 따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나는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자마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온 남자를 보고는 질겁했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손을 뻗어 다가오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당, 당신은 죽었다고 하던데 왜 여기…….”
“누가 죽었다는 거죠? 아, 2045년에 남은 스티브? 그건 제가 아닙니다.”
내 눈앞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두 명의 스티브가 재회하는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아니, 아주 똑같지는 않았다. 내 눈앞에 서 있는 나는 조금 더 주름살이 많고 수척해보였다. 제대로 다듬지 않은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내 물음에 그가 대답했다.
“나는 폴 레이너라고 합니다. 2년 전까지는 스티브 레이너였죠.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스티브.”
“제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요? 당신은 누구죠?”
“2년 전에 도착한 스티브 레이너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요?”
내게 의자를 권하며 그는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에 나는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첫 번째 실험에서 내가 사라지지 않자 과학자들은 실험이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 후 같은 실험을 반복하였는데, 이때 다시 미래로 보내진 나는 2091년, 지금보다 2년 먼저 도착해 재활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당신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저는 개명을 했어요. 어차피 당신이 오면 둘 중 한명은 이름을 바꿔야 할 테니까. 이제 저는 폴 레이너입니다.”
“아…….”
“좋아요. 스티브. 센터 구경이나 좀 해볼까요?”
폴은 센터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내가 소매를 붙잡는 바람에 멈춰 섰다. 그가 나를 바라보자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도……. 가족이 만남을 거부했나요?”
폴은 싱긋 웃었다.
“그렇지 않다면 재활센터에 처박혀있을 이유가 없겠죠. 멋지게 거절당했습니다. 당신도 똑같은 일을 겪었겠지요. 억울하지만 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죠.”
“아들을 만나보지 못했습니까?”
“금지되어 있어요. 가까이 갔다가는 감방에 처박힐걸요. 그냥 얌전히 사는 게 좋습니다. 스티브, 나는 당신을 이해해요. 2년 전, 지금 당신이 겪는 상황을 저도 겪었어요. 결국 아들과의 인연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겠지요.”
재활센터에서의 생활은 무료했다. 새로운 시대의 기계 사용법을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나는 이해할 수도, 이해할 마음도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분노가 치밀었다가,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듯 우울해지기도 했다. 처음엔 다들 그래요. 사람들은 나의 우울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폴조차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이 그 우울증을 이겨냈으니 나도 그럴 거라며 웃어넘겼다. 나는 그런 폴의 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2년 후가 되면 저렇게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폴은 나에게 음악재생기를 하나 구해다주었다. 골동품가게에서 어렵게 구한 물건이라 했다. 내가 떠나온 2045년 시대의 음악과 비슷한 분위기의 노래들이라 그 음악을 듣다보면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
하지만 불쑥불쑥 그런 우울과는 다른 감정이 솟구쳤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센터에 입소했을 때, 나를 이해해주는 폴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됐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날 쏙 닮은 그가 사람들과 웃으며 잘 지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화가 치밀곤 했다. 그것은 질투였을까 아니면 시기였을까. 똑같은 스티브 레이너인데 왜 폴만 보면 이렇게 불쾌해지는 걸까.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렸다.
“나, 당신이 왠지 싫어요.”
“나라고 당신이 좋은 줄 알아요? 나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정말 역겹다고요.”
친절하던 폴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의외였다. 그는 내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 눈동자. 내가 수십 년 동안 보아왔던 내 눈동자. 나와 똑같은 사람이 날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났다. 내가 스티브 레이너야. 저 사람이 아니라 내가 스티브 레이너라고! 나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동물처럼, 영역싸움을 하는 살쾡이처럼. 우리는 뭘까요. 폴이 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슨 뜻이오?”
“이미 오리지널 스티브 레이너는 죽었어요. 대신 카피 두 명이 남았죠. 우리는 뭘까요? 가짜일까요?”
“난, 스티브 레이너요. 누가 뭐래도.”
폴은 웃었다.
“난 2년 동안 생각해봤어요. 도대체 뭐가 옳은 것인가 하고 말이죠. 나는 분명히 존재하고 2045년까지의 스티브 레이너와 똑같은 신체,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죽은 스티브 레이너와 같은 권리를 가져야 하겠죠.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동화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마법의 거울이 있습니다. 청소를 하는데 너무 일이 많아서 마법의 거울에게 부탁했어요. 나를 둘로 만들어줘! 라고 말이죠. 그래서 마법의 거울에서 나와 똑같은 사람이 하나 걸어 나왔어요. 둘이 열심히 일해서 청소를 마쳤죠. 다시 마법의 거울에게 외칩니다. 이제 둘은 필요 없어! 라고 말이에요. 자, 그러면 누가 다시 거울 속으로 들어가야 할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폴은 예상했다는 듯 빙글빙글 웃었다.
“당연히 나온 놈이 들어가야겠죠. 그게 상식이에요. 카피니까. 복제품이니까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세상은 오리지널이 중심이죠.”
“당신, 취했군.”
“네. 취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 말이 틀리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하죠? 카피씨.”
나는 옆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무방비상태로 얻어맞은 폴이 비틀대며 의자에서 넘어졌고, 그 바람에 술병마저 쓰러져버렸다. 술이 탁자에 흘러내렸다.
“웃기지마. 누구보고 카피라는 거야.”
“당신이 카피가 아니라고요? 킥킥. 2093년이에요. 이미 스티브 레이너는 죽었다고요!”
나는 침대를 박차고 나와 문을 벌컥 열고 나가버렸다. 위태위태하게 벽에 기대 있던 폴이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고 있었다.
세상은 따스한 불빛이었다. 나를 위한 시간, 나를 위한 공간은 없었지만 나는 또한 시공간 그 자체였다. 세포 하나하나가 흩어져서 세상 곳곳에 스며들고 있었다. 비처럼 젖어가는 도시는 눈이 녹듯 분해되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갔다. 행복했다.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 마치 천상의 노랫소리처럼 내 웃음이 번져갈 때, 누군가 내 뒤에 서 있었다. 낡은 갈색 양복을 입은 노인. 나무로 깎아놓은 듯 툭 튀어나온 광대 위로 쭈글쭈글한 피부가 덮여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앙상한 팔은 연신 흔들렸고 구부정한 모습은 언제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했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노인은 히죽히죽 웃으며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달릴 수 없었다. 노인은 지팡이로 땅을 쿵쿵 찧었다. 네 시간으로 돌아가. 그가 말할 때마다 입에 들어있는 틀니가 덜그럭거렸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었다. 내 몸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다리를 내려다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내 손, 내 몸! 나는 그저 허공이었다.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시트가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가 내 머리뼈 안에 담배연기라도 불어넣은 듯 몽롱하고 혼탁했다. 그 노인네를 본 거요? 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걸 어떻게 알지?”
“나도 예전에 노인네 꿈을 많이 꿨죠. 갈색 양복을 입었죠? 틀니를 하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겠죠. 어차피 당신과 내가 쌓아온 지식은 비슷합니다. 상상해봤자 거기서 거기죠.”
“당신과 똑같은 꿈을 꾼다는 것이 더 불쾌하군.”
나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 노인이 누구였는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나, 내 모든 것을 가지고 사라져버린 스티브 레이너.
그 사람도 우리와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겠죠. 마흔 살까지의 기억은.
폴이 넋두리하듯 말했다.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마흔 살까지 힘들게 살아온 기억을 송두리째 뺏겨버린 허탈함. 어쩌면 내가 그의 기억을 훔쳐온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기억을 훔쳐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나, 점점 자신이 없어져.
거짓이 아니었다. 왜 이런 상상하지도 못한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죽어버린 그 노인네와 똑같은 사람인데 왜 이런 허름한 건물에 갇혀 있는지, 나와 똑같이 생겼지만 술주정뱅이에 불과한 폴을 바라보아야하는지 너무나 답답했다. 2년 후 내가 저 꼴을 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더욱 더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이름을 바꿨는지 알아요?
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찰랑. 찰랑. 술병이 천천히 흔들렸고 얼마 남지 않은 술은 술병에 부딪히며 노래를 불렀다.
“이름을 바꾸면 다른 사람이 될 거라 생각했죠. 이미 스티브 레이너란 이름은 그와 함께 저승으로 가버렸으니까. 비록 마흔 살까지의 기억은 공유하더라도, 그 이후의 삶은 내가 살아가기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었죠.”
“그래서, 다른 사람이 됐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내 의지대로 살아간다고 믿었죠.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요.”
“어째서?”
“당신이 하는 행동이, 2년 전 내가 했던 행동과 똑같으니까.”
등줄기를 타고 벌레가 수십 마리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손톱으로 등가죽을 긁어 그 징그러운 벌레들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어느새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나도 그랬어요. 그렇게 침대에 앉아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처박곤 했죠. 밤마다 노인네가 나타나 나를 괴롭혔어요. 노인네를 붙잡고 싶어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죠. 당신도 그럴 거예요. 같은 꿈을 꾸고 있겠죠.”
“그까짓 꿈 따위.”
“난 오랫동안 생각해봤어요.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나는 존재하긴 하는 걸까. 아니, 존재해도 괜찮은 것일까. 이미 목적은 이루어졌어요. 나는 실험에 참여해서 계약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아들은 건강해졌죠. 남은 건 실험의 원치 않은 부산물뿐이에요.”
폴은 술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문득 그의 눈이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동화는, 거울이 마법을 없애야 끝나게 되죠. 거울에서 나왔던 사람은 다시 거울로 돌아가야 하는 법.”
“웃기지마.”
“당신도 나도 카피일 뿐이죠.”
“웃기지 말라고!”
나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탁자가 넘어지며 술병이 바닥을 뒹굴었다. 마치 피가 흩날리듯 술이 바닥을 적셨다.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어가고 목의 핏대가 솟아올랐지만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팔을 축 늘어뜨린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붉은 실벌레가 모여들듯 눈에 핏발이 설 때까지 있는 힘껏 그의 목을 졸랐다. 그의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나는 뱃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가슴속 답답하게 내 심장을 짓누르는 무언가를 토해내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셔츠를 뜯어내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톱으로 아무리 파내어도 붉게 생채기가 날 뿐 가슴의 통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목 놓아 울어버렸다. 가슴에서 피가 줄줄 흐르도록 긁어대면서 나는 울음으로 그 응어리를 뱉어버리기라도 할 듯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폴도 기침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쿨럭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음침한 뒷골목이었다. 건물은 가죽이 벗겨진 맹수처럼 철근과 뼈대를 드러내며 거친 숨을 쉬었고 오래된 전단지와 신문지 나부랭이들이 여기저기 흩날렸다. 센터를 뛰쳐나온 나는 밤새도록 정처 없이 도시를 헤맸다. 주황색 아침 해가 뜬 어느 골목길, 꼬질꼬질하게 때가 낀 점퍼를 입은 사내 하나가 건물 사이 볕이 잘 드는 벽돌담에 앉아있었다.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진 채 먼지투성이였고, 마른 낙엽조각들이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밤새 거리를 헤맨 나는 졸음과 피곤 때문에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었다.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벽돌담에 기대앉자 그가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여긴 내 구역이야. 꺼져.”
천천히 바닥에 모로 누웠다. 무릎을 세워 새우처럼 웅크렸다. 화가 난 부랑자는 욕지거리를 뱉었다.
“씨벌놈. 왜 대답이 없어?”
밀려오는 졸음에 대꾸할 기운이 없었다. 저 부랑자가 덤벼들어 나를 짓밟는다 해도 나는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 내게 의지라는 건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너 어디서 온 놈이야?”
2045년…….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달싹여 겨우 말했다. 뺨에 땟국이 흐르는 부랑자는 더 이상 나에게 욕을 하지 않았다. 쳇. 그는 나와 반대쪽으로 벌렁 드러누웠다. 나는 혼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코트 깃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군가 나에게 코트를 덮어주었고, 내 머리맡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굳이 고개를 돌려보지 않아도 그가 폴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여기에 있으리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죠?”
폴의 입가에서 담배연기가 흐물흐물 피어올랐다.
“내가 센터를 뛰쳐나오면 어디로 갈까 생각해봤죠. 여기가 딱 마음에 들더라고요.”
역시…….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역시, 역시 그는 스티브 레이너였다. 아무리 이름을 바꿔도 그와 나는 스티브 레이너였다.
“어제는 미안했어요.”
폴은 대답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별 일 아니라는 표정이었지만 목의 멍 자국은 선명했다.
따라와요. 보여줄 것이 있어요.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서는 그를 따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딱딱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잠을 잔 탓에 온몸에서 두둑 소리가 났다. 그는 어느 허름하고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보수공사중인지, 철거중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히 전기는 끊기지 않았는지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옥상에 올라간 그는 뚜벅뚜벅 난간 쪽으로 걸어가더니 난간에서 일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폴은 장난꾸러기처럼 미소를 지었다. 모르겠는데요.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 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에요.”
“네?”
“내가 살던 집. 아내가 저녁마다 밥을 지어주던 곳, 내 아들 리키가 배밀이를 하고 걸음마를 하던 그 아파트가 여기에요. 2045년 당시의 지도를 구했어요. 이제는 알아볼 수 없지만 GPS 위치로 지금의 지도와 비교해봤죠. 여기가 우리 집이 있던 곳이에요.”
나는 천천히 그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폴은 황금빛으로 높게 솟아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는 놀이동산이에요. 기억나요? 리키는 놀이동산을 참 좋아했었죠. 공룡시대를 처음 타던 날, 무섭다며 오줌을 지렸죠. 녀석을 안고 화장실로 뛰는데 얼마나 황당하던지.”
나는 그 때 기억이 떠올라 낄낄거렸다. 폴도 웃음을 터뜨렸다.
“저기는 원래 호수가 있던 곳이에요. 에밀리와 첫 키스를 했었죠. 난 에밀리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양다리일 줄이야. 날 가지고 놀다니.”
“나쁜 년.”
웃음소리가 번졌다. 아내와 자주 가던 레스토랑, 친구들과 낚시를 하던 호수, 내가 좋아하던 조깅 코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를수록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기저기를 가르쳐주던 폴은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저기, 저 멋진 아파트가 뭔지 알아요? 원래 상가였어요. 친구들이랑 술을 엄청 마시고 집에 오는데 갑자기 배가 아팠던 그 날 생각나요? 화장실에 가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화장실이 보이지 않아서 결국 저 건물 안에 있던 휴지통 안에다 쌌었죠.”
그 때 일이 떠올라 나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아, 그때는 내 정신이 아니었어.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한 번 터진 웃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웃은 후에야 우리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한참 기침을 쿨럭 거리던 그가 나에게 담배를 하나 건넸다. 불을 붙이자 담배가 발갛게 타올랐다.
우린 이렇게 그대로인데, 왜 세상은 이리도 많이 변한 걸까요.
갑자기 오한이 밀려왔다. 어깨를 움츠리며 천천히 담배연기를 들이마셨다. 따뜻한 연기가 폐 속 깊숙이 퍼져나가자 조금 기운이 났다. 돌아앉아있는 폴이 손등으로 눈을 훔치는 것이 보였다. 나도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담배는 천천히 재가 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옥상 난간으로 걸어가 그 위에 올라섰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위태롭게 흔들렸다. 나도 그를 따라 난간에 올라섰다. 평소라면 무서워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무 것도 겁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자 나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낯선 사람, 낯선 건물, 낯선 시간에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어쩌면 이 시간에 있어 우리는 불필요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누구도 원치 않는 부자연스러운 존재.
우리는 뭘까요.
폴, 아니, 스티브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명의 스티브는 줄타기하듯 난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2093년에도 봄은 존재했다. 꽃은 향기를 흘리며 흐드러지게 피었고 나무는 싱싱한 잎들을 내밀었다. 사람들은 추억을 만들고 있었고, 옛일을 기억했으며 앞날을 기대했다.
달은 떠오르고, 바람은 불고,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