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꽃은 말이 없어서 한결 더 그윽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딘가에는 떨어지지 않고 바람에 불려 공기보다 가볍게 흩어지는 꽃도 있다. 몽실몽실 솜털 같은 꽃씨를 단 보랏빛 꽃. 여름이면 대초원에 지천으로 피었다가 어느 순간 후르르 날아올라 다시는 못 돌이킬 허공의 엇갈림으로 사라져간다.
사람들이 서상효(徐翔孝)의 일을 물으면 나는 늘 그의 시체 옆에 피어있던 그 말입술꽃이 생각났다. 그동안 그의 유고 시집을 위해 지인(知人)들을 만나면서 나는 여러 가지 험구와 비웃음을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시집도 나왔고 세상의 시비도 잠잠해져서 나의 이 한 무더기 어설픈 정회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서상효는 나의 대학 선배다. 눈썹이 시원스러운 잘 생긴 얼굴에 두뇌가 명석해서 학창시절 친구들의 기대를 모았다. 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 으레 그랬듯이 그도 헤겔과 맑스를 읽었고 한동안 학생운동에도 열심이었다. 87년 6월 항쟁과 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그런 청춘에 마침표를 찍어 주었다.
인생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갔고 시험 준비를 해서 언론사, 방송사, 정부종합청사, 검찰청사, 법원, 국회의사당, 정당사무실로, 혹은 입시학원이나 대학원으로 들어갔다. 서상효는 모(某) 대기업에 취직했지만 곧 사표를 던지고 모교의 국문과 대학원으로 돌아왔다. 속물스런 윗사람들 밑에서 승진과 돈벌이에 골몰하기보다는 학위 과정을 밟아 대학 강단에 서고 가끔은 시를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조용히 공부하며, 틈틈이 시작(詩作)에 열중했다. 그의 시는 참신한 표현과 반짝이는 아포리즘, 높은 격조를 가진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의 시는 통 빛을 보지 못했고 생활도 날로 궁핍해 갔다.
나는 그의 4년 후배였으나 그가 중간에 회사를 다녀서 대학원은 동기생이었다. 우리는 같이 강의를 들었고 자료를 강독하거나 이론서를 발제할 때도 붙어 다녔다. 똑같이 창작을 한다는 이유도 있어서 친구가 거의 없는 그에게 어쩌면 나는 가장 친한 벗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잘난 척 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소설가로 약간의 허명을 얻었다. 얼마 뒤에는 그런 허명 덕에 분에 넘치는 명문대학의 교수가 되어 강단의 말석을 더럽히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와 나는 서먹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다 아는 후배의 결혼식에서 만나도 나는 면구스러울 뿐이었다. 그의 재능과 문학적 포부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와 나의 자리가 바뀌었다는 부끄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서상효도 나를 보면 괴로운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는 초조했을 것이다. 박사과정에 들어갈 무렵 결혼을 하였으나 아이가 둘씩이나 되도록 이렇다 할 전망이 없었다. 잘 알지는 못하나 그가 괴팍한 언행과 술주정으로 지인들의 신망을 잃은 것도 이 무렵일 것이다. 그는 그 때 입시학원의 국어 강사로 나가고 있었다. 옛날 대기업의 동년배들은 이미 과장, 부장이 되어 있었고 그는 학위를 다 마치고도 삶의 후미진 뒷골목을 떠돌며 성마르고 버릇없는 아이들의 수능시험 준비를 거들고 있었다. 이러한 처지는 한 때 수재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자존심에 참을 수 없는 손톱 자국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상효는 홀연 몽골로 떠나버렸다. 몽골국립대학 한국어과의 교수로 자원해 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낙탁불우(落拓不遇)에 가슴이 아팠다. 몽골로 들어간 8세기 고구려 유민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던 나는 그 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몽골은 가난한 나라다. 몽골국립대학의 교수란 직함만 교수일 뿐 일주일 24시간 강의에 미화(美貨) 80불을 '월급'으로 받는, 한국의 시간강사만도 못한 자리였다. 그 후 그가 몽골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듬해, 그러니까 작년 여름 나는 다시 몽골에 가게 되었다. 옛날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을 고쳐서 단행본으로 출간하기 위해 마지막 취재를 하려 했던 것이다. 그 기회에 서상효를 만나보려 했던 나는 울란바토르 공항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몽골로 답사를 올 때마다 길 안내를 맡아주던 몽골국립역사연구소의 감볼트에게서였다.
"아, 국립대학의 서상효 선생요? 그 사람 이젠 여기 살지 않아요. 지난 학기에 시골로 옮겨 갔어요. 서부의 아라항가이로."
"옮겨 가다니?"
감볼트는 술냄새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히히히 웃었다. 언젠가 답사 중에 시골 아가씨랑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다음날 아침에야 돌아오면서 보여주던 그 웃음이었다.
"한국어과에 아우란치라고 눈부시게 예쁜 여학생이 있었거든요. 스물 한 살인데 흰 사슴처럼 쭉 빠졌죠. 그 여학생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서 같이 떠났어요. 지금 잘 살고 있대죠. 아라항가이에서."
"이봐. 당신 또 뭘 잘못 들었겠지. 서상효 선생은 처자가 있어. 한국에."
"아, 나도 알아요. 아우란치도 남편이 있었어요. 여기 사는 남잔데 나도 잘 아는 사람이라구요. 그 남편이랑 헤어지고 서상효 선생과 친정으로 돌아가버린 거예요. 아후우, 그 냥반 조오앖다."
힌티 항가이 싸이니. 운드르 세흔 노르누트. 호이트 주근 치미크 율쓴 (아름다운 항가이. 높고 고운 산들. 북쪽으로 대지를 수놓는 넓고 큰 강들 ) 감볼트는 수염이 거뭇한 턱을 쳐들고 나를 놀리듯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허탈했다. 남녀의 이합(離合)을 남이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감볼트를 붙들고 그런 얘기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고 다잡았다. 국립대학에 연락해서 아우란치라는 여자의 고향 주소를 알 수도 있었지만 서상효가 달가와하지 않을 것 같아 그것도 포기했다.
나는 나대로 일정이 빠듯했다. 몽골 사람들이 가장 좋은 목초지로 여기는 아라항가이 아이막(道)은 우리 나라보다 더 넓은 지역이다. 그 어느 쏨(郡), 어느 박(面)에 있다 한들 왠걸 거기까지 찾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이튿날 전세낸 지프차에 짐을 싣고 먼저 내 소설 끝부분의 무대가 된 8세기 돌궐 제국의 여름 야영지 '씨네 우쓰'로 출발했다. 그 곳은 망망대해 같은 초원을 덜컹거리며 울란바토르에서 서북쪽으로 600Km나 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서상효와의 인연이 다하지 않았는지 공교로운 일이 일어났다. 씨네 우쓰가 있는 볼간 아이막에서 하루를 묵고 난 1996년 8월 11일. 몽골 역사상 최초로 콜레라가 발생했던 것이다. 셀렝게 아이막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셀렝가 강을 따라 북진하여 불간에서도 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며칠 지나자 콜레라는 북부지역 전체로 번졌고 사망자는 더욱 늘어났다. 땅덩어리만 넓었지 인구는 260만에 불과한 소국(小國) 몽골은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당국은 우왕좌왕하다가 초강경책만 내어놓았다. 볼간과 셀렝게는 전 지역이 봉쇄되고 울란바토르로 들어가는 모든 기차들이 폐쇄되었다. 실탄을 장전한 군인들이 도로마다 지키고 있다가 봉쇄선 안으로 건너오는 가축들을 전부 사살하여 불태워버렸다.
나의 답사 여행은 씨네 우쓰를 끝으로 속절 없이 되어버렸다. 모든 도로가 봉쇄되기 전에 빨리 울란바토르로 돌아가야 했다. 길은 남쪽으로 크게 우회해 아직 콜레라가 발생하지 않은 아라항가이까지 내려갔다가 거기서 동쪽으로 달려 울란바토르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라항가이로 진입하자마자 우리 지프는 경찰에 의해 제지되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모든 차량은 방역반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답사 내내 밥도 설거지도 안 하고 딴전을 부리던 감볼트가 이 때만은 꼴값을 하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는 내가 한국인이고 당국이 학술조사를 위촉한 귀빈이라고 허풍을 치며 당장 통과시키라고 화를 내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리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똥색 경찰제복을 입은 중년 사내로부터 서상효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쏠롱고스(한국인)? 그저께 여기서도 쏠롱고스 남자가 하나 죽었는데 "
물어 물어 아우란치의 집을 찾아간 것은 그날 밤이 이슥할 무렵이었다. 나무 울타리를 둘러친 천여평의 초지 안에 네 채의 겔(몽고 천막집)이 있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자 겔 속이 수런거리며 사내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서 박시(서선생)'의 부음을 듣고 찾아온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아이들이 그들 가장의 겔로 나를 안내했다.
아우란치의 아버지 직지드수렌 씨는 한밤중이었음에도 옷을 다 차려입고 중절모까지 갖추어 쓴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어머니 토고후 부인이 마유주(馬乳酒)를 차려오는 동안 그는 괴로운 얼굴로 한국에 알리지도 못하고 장례를 치러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유족도 아닌 내가 그런 사과를 받기도 이상했으나 그의 태도가 워낙 진중하여 말부리를 딸 수 없었다. 겔 안에 들어가면 차려온 마유주를 다 마시는 것이 몽골의 예법이다. 나는 그저 마유주 그릇만 꿀꺽대었다.
잠시 후 그의 장성한 아들 바샨자부와 며느리, 딸 아우란치가 들어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 집의 데릴사위 격이었던 서상효의 빈소는 아우란치의 겔 안에 있었다. 나는 라마교 불단에 모셔진 그의 사진에 절을 하고 조의금을 놓았다.
그리고 나서야 아우란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서상효는 한 달전 말에서 떨어져 다쳤는데 별로 큰 상처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며칠 전 갑자기 고열이 일어나 어떻게 손을 써보기도 전에 '하늘로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콜레라가 아니냐고 마을사람들이 몰려왔어요. 한국에 알려야 한다고 했지만 빨리 시체를 없애라고 사람들이 막무가내였어요. 그래서 장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일타비히를 했어요."
나는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핼쓱하게 여윈 아우란치는 내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일타비히를 했다구? 한국 사람을?"
초장(草葬)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몽골의 풍습 대로 시체를 초원에 내어가서 들개들이 뜯어먹게 했다는 것이다. 초장은 라마교의 조장(鳥葬)이 몽골의 식생에 맞게 변형된 것이다. 사람들은 들개들이 시체를 빨리 먹을수록 좋은 내세가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그 광경이 너무 끔찍하다 하여 한 때 법으로 금지되기도 했으나 사회주의가 붕괴된 90년부터 다시 부활되었다.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세상에 서상효가 그렇게 되었다니. 마음의 부담이 없는 외국에서 만나 격의없는 정담을 나누려 했던 벗이 들개에게 뜯어먹힌 바 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때를 못 만나 강물의 나무토막처럼 이리저리 떠돌던 가난한 시인. 그런 그가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박복하다니. 막힌 정에 가슴은 아프고 오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잠시 후 아우란치는 슬그머니 일어나 부모의 겔로 자러 갔다. 그와 엇갈리듯 바샨자부가 들어와서 '시빔 아르히(우유주)'나 한 잔 하라고 했다. 감볼트는 새가 벌레 소리를 들은 것처럼 내 눈치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서상효의 서재이자 거실이며 침실이었던 4평 남짓한 겔을 둘러보았다. 솔표 약상자, 옷들이 들어 있는 농심 라면 빈 박스, 단추 같은 것을 담아놓은 동원참치 빈 캔, 도루코 면도기 주인을 잃은 사물들이 슬픈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유고(遺稿)라고 하기도 뭣한 서상효의 노트를 발견한 것은 그 참치 캔과 도루코 면도기가 놓인 세 뼘쯤 되는 작은 책상에서였다.
먼지가 소복히 쌓인 그 낡은 노트를 펼치는 순간 나는 금방 서상효의 글씨를 알아보았다. 국민학생처럼 각이 진 딱딱한 글씨. 그것은 지난날 대학원에서 스터디를 하며 서로 교환했던 그 수많은 복사물 속에 있던 바로 그 글씨였다. 만리 호지(胡地)에서 찾은 벗의 유필. 나는 눈물을 훔치고 노트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기였다.
1995. 3. 17.
후배 황석본이의 결혼식에 갔다. 신랑과 신부는 행복해보였다. 그들은 며칠동안이나 행복할까? 행복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하리라. 대마초 연기가 자욱한 아메리카의 어느 어두운 까페에, 사파이어처럼 푸른 밤바다가 있는 아프리카의 어느 항구에, 저 산맥 너머 어딘가에, 아니면 저 대양 건너 어딘가에 행복은 존재하리라. 그러나 이곳만은 아니리라. 인생에 대한 허무와 사회에 대한 환멸 속에서 결혼과 출산과 집장만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이 곳만은 아니리라.
오, 환멸에 길들여진 나의 마음. 허무에 길들여진 나의 마음. 가장 저열하고 가장 나쁜 반성없는 인생. 뻣뻣하게 무디어진 나머지 그 무엇에도 감격할 줄 모르고, 모든 것이 다 아는 것이어서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 없는 나. 말라빠진 시체의 나. 죽은 영혼의 계절을 살아가는 나여.
1995. 3. 22.
야, 이 자식아, 자라는데 왜 자꾸 찡찡대는 거야! 귀싸대기를 맞을 놈 같으니 건너방에서 두 아들을 때리는 아내의 쇳소리가 쨍쨍 울린다. 그저께 내가 55만원이나 하는 근대시사(近代詩史) 자료집 세트를 들여놓은 뒤부터 아내는 계속 저 모양이다. 내가 들어올 때마다 거칠게 문 쪽을 쏘아본다.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달라는 것인가? '당신 미쳤어요?'로 시작하는 아내와의 언쟁. 발갛게 피고름 덧난 이 일상이 이젠 지긋지긋하다.
특별히 아내가 미운 것은 아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어떠한 삶의 현상에도 따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아니 의미를 부여할 힘이 없다. 아내와 싸울 때도 나는 코 푼 손수건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멍청히 아내를 바라본다. 무심(無心)은 인생에 깨뜨려질 수 없는 가치란 없다는 것을 배운 사람이 갖게 되는 불가피한 자세가 아닐까. 그러나 아내는 그런 내가 자신의 인생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고 있는 악마라고 믿고 싶은, 밑도 끝도 없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큰 놈이 악을 쓰며 울고 있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찢어 구겨버린다. 지금부터 이 반지하 셋방을 걸어나가 골목 끝에서 두통약을 사먹을 생각이다. 그리고 찻길을 건너가 맞은 편 술집에서 오늘 일용할 취기(醉氣)를 얻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또 편도선이 부은 목으로 소릴 지르겠지. 그러나마나 나는 고꾸라져서 꿈을 꾸리라. 이 방구들이 무너지는 것을. 어떤 상징 하나가 숨가쁘게 일어서는 것을. 오, 이 막막한 삶, 이 밑바닥을 뚫어 다른 곳을 엿볼 한 점의 응축을 만날 수 있다면.
1995. 4. 10.
D여대에서 여학생에게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이 비슷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 강사라도 현대문학을 가르치는 젊은 선생은 묘한 환상을 준다. 가끔 리포트 사이에 편지를 끼워 넣는 학생도 있고 과자나 쵸콜릿 같은 것을 선물하며 카드를 곁들이는 학생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 기분에 취해 상투적인 암시를 던져 보는, 웃어넘기면 그 뿐인 편지들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강의가 끝난 뒤 한 여학생이 교탁 앞으로 다가왔다. 그 여학생은 출석을 확인하는 척 하더니 슬쩍 딱지처럼 접은 메모를 건내주었다. 거기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상효 선생님. 인생을 너무 미워하시는군요. 그러시면 못 써요. 세상을 불쌍히 여겨야지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을 가르치지도 못한대요. 사람은 자기를 가장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에게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우잖아요. 엄마나 아빠처럼. 전 문학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것도 인간을 더 깊이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 아닌가요? 김수련 올림.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할 말을 다해버린 이 메모. 그 너무도 오만한 짧은 문장들의 단호함이 놀라웠다. 한참 후에야 이 여학생이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사회주의 문학을 강의한 오늘 나는 좀 이상했다. 난 요즘 학생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애초에는 10분 안에 정리하고 넘어가려 했던 대목이었다. 그런데 막상 예상했던 그대로의 무반응을 접하자 화가 나면서 생각과 생각 사이의 연결 부분이 뚝 뚝 끊겨졌다. 그 사이로 평소에는 거의 내색하지 않았던 환멸감이 섞여들었다.
여러분들은 국제화, 전문화, 정보화의 21세기를 준비한다고 합니다. 그런 여러분들의 눈에 20년대 KAPF(한국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문학을 했던 이 시인들은 마치 외계에서 온 우주인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본질적인 것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21세기는 사람들을 홀리는 수사학적 마술일 뿐 2000년이 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보화 사회가 도래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역시 자본주의 사회, 정보 자본주의 사회일 뿐입니다.
흔히 정보화 사회에서는 세계의 모든 인류가 인터넷 웹 사이트에서 재화와 지식에 대한 투명한 정보를 공유하고 그에 따라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실로 유치한 백면서생들의 잠꼬대일 뿐, 현실에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꿈입니다. 어떤 자본가도 그런 사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투명한 시장에서는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대규모 이윤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겉으로 공정한 시장 경쟁을 주장하면서 안으로 투기와 독점의 욕망을 관철해왔습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정보화는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생산까지를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영원히 왜곡될 수 밖에 없어요 .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두었어야 했다. 여기까지도 시민사회의 자제들을 맡아 가르치며 그들에게 인생과 세계에 대한 안정된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하는 대학 강사로서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만두지 못했다. 그 순간 무언가가 꿈틀하며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내 얼굴의 얇은 껍질 밑에서 내 내면의 부패가 솟구쳤다. 환멸이 만든 추악한 부패. 마르크스주의에서 배웠으되 그 배후에 있었던 사랑과 휴머니즘은 다 잊어버리고 그 비판의 저열한 냉소주의만을 암세포처럼 증식시켜 자의식을 衰아먹어간 내 내면의 부패.
역사의 전환기마다 사회 발전의 지렛대가 된 것은 인간의 가장 사악한 정열, 즉 소유욕과 지배욕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제까지 분업, 경쟁, 제국주의적 시장 쟁탈, 새로운 시장의 독점, 전쟁, 정치적 협잡 등으로 인간의 이기적 충동들을 육성하며 발전해왔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독점과 폭리를 추구하던 자본주의가 단순한 컴퓨터 테크놀로지 때문에 갑자기 성자(聖者)들의 사회로 변한다는, 그런 황당무계한 소리를 여러분은 믿습니까? 오늘날 정보화 사회의 증후를 보여주는 경제 환경 역시 자본의 이기주의가 자신의 유연성과 절충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금융화'의 한 양상일 뿐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변할 수도 없습니다. 시는 이같은 인간의 망설임, 자신의 진면목이 자신의 의지와는 너무 다르다는 느낌 때문에 생겨난 하나의 망설임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같은 진실을 되받아 감당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이것이 시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
오늘 강의를 반추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에 몸서리친다. 나의 영혼은 앞으로 남은 일생을 다 살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늙고 추해졌다. 내 어린 날의 푸른 영혼은 미칠듯한 열정으로 항해를 하고나서 전혀 낯설은 섬에 도달해버렸다. 나의 섬엔 모든 이상(理想)의 폐허 속에 서로의 목을 물어뜯어 입이 더럽혀진 사람들만이 살고 있다. 나의 섬엔 순진했던 내 젊은 날의 모든 것에 유죄(有罪)를 선고하는 환멸만이 흘러간다.
나는 강단에 서서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것일까. 인간의 근원은 체액과 단백질이 만든 고깃덩어리였고 인간의 현재는 짐승이라고? 인간이란 저와 제 새끼들의 입에 들어가는 것에 골몰하며 돈에 미쳐 날뛰고 모든 이상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수렴하는 악랄한 짐승이라고? 인간이란 말이 표상하는 모든 고귀함을 믿지 않으면서 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가장 추잡한 밥벌이일 것이다. 오늘 미지(未知)를 향한 목마름으로 가득찬 이 젊은 영혼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생이라고 해서 무엇 하나 접어주는 것이 없는 이 당돌한 여학생은 대체 누구일까?
95. 5. 9.
D여대는 오늘 축제였다. 강의실에는 한 명의 학생도 없었고 5월의 향기가 흐르는 캠퍼스는 쌍쌍의 남녀들로 떠들썩했다. 모욕을 당한 느낌이었다. 축제면 축제라고 미리 알려주었어야 할 것 아닌가. 과(科) 사무실의 무성의에 화가 났지만 말할 기분도, 심지어는 생각할 기분조차 나지 않았다. 간밤에 마신 깡소주가 견고한 자학처럼 남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런데 그렇게 캠퍼스를 걸어나오다가 거짓말처럼 언젠가 출석부에 메모를 끼워넣은 그 여학생과 마주쳤다.
우리는 콜라 하나씩을 들고 북적거리는 축제판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 위 벤치에 앉았다. 기왕의 불쾌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수련은 영문과 4학년이었고 방과 후엔 신림동 달동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야학 선생이었다. "처음엔 학교 못 가는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했는데요, 요즘은 그냥 돈 없는 집 아이들 과외 선생처럼 되어버렸어요." 그래도 할 수 없지 않느냐는 얼굴로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6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는데 어느 쪽도 그녀를 맡아 기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거죠. 부모님은 학비며 용돈을 넉넉하게 부쳐 주시고 일체 간섭을 안 하세요. 그래서 전 어디고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떠날 수 있어요. 한 곳에 오래 사는 건 재미없잖아요. 나쁜 기억도 많아지고."
맑디 맑은 이슬 한 방울이 내 심장 위에 떨어졌다가 증발하는 느낌이었다. 수련의 하얀 이빨이 눈부셨다. 내가 앉은 벤치가 공중에 높이 들려올려진 느낌이었다. 세상은 까마득한 발 밑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수련이 일으키는 묘한 향기에 취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없었다. 벤치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시간은 다시 움직이기시작할 것이다. 내 현재의 삶이 되살아날 것이고 나는 또다시 똑같은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수련이 인사를 하고 가버릴 때까지 나는 내내 그렇게 취해서 앉아 있었다.
95. 5. 16.
수련이와 인사동에서 차를 마셨다. 은은한 초록빛 녹차 한 잔이 행복의 신성한 영접처럼 느껴졌다. 깜박거리는 수련의 속눈썹 사이로 사라진 젊은 날들이 일제히 깃을 치며 날개를 펴들었다.
95. 5. 23.
수련이와 버스를 타고 광릉 수목원에 갔다. 서늘해진 숲의 대기 속에서 생명의 고즈넉함이 너무도 사무쳤다. 물리도록 생명을 맛보고 돌아온 지금도 나는 그것들의 그 알콜같은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오늘에서야 깨달은 것인데 수련을 만난 뒤 나는 벌써 3주째 술을 끊고 있다.
95. 6. 14.
수련이가 2주째 내리 결석을 하고 있다. 호출을 해도 응답이 없다. 몸이 아픈 것일까?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혹시 정말 어딘가로 떠난 것인가? 어디고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떠난다 그 낯선 사랑법이 빨아들일 것 같은 매혹으로 가슴에 스며든다. 그나 저나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주책을 떨고 있는 것인가. 이건 나이값도 못하고 자기 암시에 속고 있는 것이다. 수련이의 메모가 만든 내 자의식의 파문에 내가 속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 중에 그녀가 나를 일깨우는 마법의 존재이며, 그녀의 마력에 의해 나는 내 인생의 무의미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감하는 것이다. 이 무슨 터무니 없는 망상이란 말인가.
1995. 6. 19.
1년이 넘도록 시 한 편 못 쓰고 있다. 대학의 시간을 뛰고 입시학원에서 시달리다 돌아오면 온 몸이 파김치처럼 퀴퀴한 땀냄새에 절어 있다. 자리에 누우면 천정에 내 인생의 남루가 어른거린다.
나는 친구들이 재능을 한 밑천 삼아 장사를 하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재능을 팔려고만 할 뿐 자신의 재능으로 진정한 무언가를 이룩해 보려 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정작 나야말로 재능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잦은 유보와 유보는 나의 재능을 무디게 만들었고 결국은 창작에 대한 의욕마저 앗아가버린 것이 아닐까.
얼마 전까지도 나는 내가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정말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점점 더 무겁게 나를 내리누른다. 예전에 쓰려고 했던 것들을 아쉽게 되씹어보지만 그 때의 착상, 그 때의 느낌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완전한 백지다. 아, 나는 너무 먼 곳에 혼자 있다. 나의 세계는 너무나 적막한 나머지 '산다'는 개념조차 없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1995. 6. 29.
수련이가 죽었다고 한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기말시험을 칠 때까지도 수련은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강의 시간 안에는 그녀를 아는 학생이 없었다. 참다 못한 나는 그녀의 과에 물었다. 그제서야 나는 수련이 지난 5월에 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창 주변건물이 철거중이던 신림동 달동네에서 그녀가 일하던 야학 교실이 갑자기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
일기를 거기까지 읽었을 때 쿵쾅 하며 겔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지진이 아니었다. 독한 우유주에 취한 감볼트가 겔로 들어오다 장막을 들이받으며 넘어진 것이다. 아까 가수 싸른토야의 노래들을 줄줄이 불러 제끼는 그의 고성 방가가 들려 올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 나는 일기를 덮고 눈살을 찌푸렸다. 감볼트는 네 활개를 뻗고 드러누워 술주정을 하며 끙끙거렸다.
이 박시, 걱정하지 마라. 이깟 놈의 봉쇄령이 다 뭐냐. 내가 책임진다.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이 시골 경찰놈들 사람을 너무 몰라본다. 경찰국장이 우리 큰아버지랑 사돈간이다. 오치르바트(대통령)가 우리 장인 영감 친구다. 나 감볼트가 집으로 못 갈 것 같으냐 답사 때마다 되풀이되는 일이었다. 닭털 침낭을 펴서 감볼트를 눕혔다. 감볼트는 또 일어나 뭐라고 소릴 질렀다. 알았다, 고맙다, 제발 좀 처자라고 한참 동안 실랑이를 하고 나자 머릿속이 다 황황해졌다.
바람을 쏘이려고 겔 밖으로 나오니 하얀 달이 은빛을 흩뿌리는 겔 앞의 초지에 바샨자부가 있었다. 그도 감볼트 때문에 잠이 다 달아나버렸던 것이다. 그는 내일 토산공사(土産公司)에 팔러가는 양모(羊毛)를 손질해 수레에 묶고 있다가 내 옆에 와서 담배를 나눠 피웠다. 내가 감볼트의 술주정을 사과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오랜만에 재미있는 손님이 와서 무척 반갑다고 웃어주었다.
나는 망설이던 말을 꺼내었다. 한국과 몽골은 풍습이 다르다, 친구의 시체를 저렇게 벌판에 버려둘 수는 없다, 내일이라도 서상효의 시체를 찾아 한국으로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바샨자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아침 아버지와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자신은 내일 토산공사로 가야 하니 안되고 여기서 20km쯤 떨어진 곳에 사는 큰 형이 안내해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두 손으로 따뜻이 악수를 하고 겔로 돌아왔다. 감볼트는 쿰쿰한 시궁창 냄새를 풍기며 자고 있었다. 그 옆에 침낭을 깔고 누웠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일어나 다시 서상효의 일기를 펴들었다.
1995. 8. 28.
여기가 울란바토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시 외곽의 이 아파트에서 보면 밖은 불빛이라고는 별빛밖에 없는 캄캄한 어둠이다. 하늘보다 좀 더 진한 초원의 어둠은 마치 나와 하늘 사이에 놓인 텅 빈 공간처럼 보인다. 나는 어떤 착각에 사로잡힌다. 내가 어딘가 낯익은 곳에 와 있고 먼 옛날로 되돌아와 있는 것만 같은 착각. 어두운 대지는 너무도 편안해서 마치도 내 신체의 일부처럼 따뜻하고 생생하다.
"거기 학과장이 그러는데 자네가 웬 여학생과 좋아지낸다고 소문이 안 좋게 났다더군.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네만, 대체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그런 소리를 듣고 다니나 잊어버리게. 또 기회가 있겠지."
D여대의 교수 공채에 탈락했다는 것을 들은 날이었다. 나를 힐난하는 지도교수는 나보다 당신이 더 답답한 얼굴이었다. 나는 몽유병자처럼 이리저리 걷다가 옛날 내가 공부하던 대학원 연구실로 들어갔다. 연구실에는 낯이 익지만 너무 후배여서 이름은 모르는 얼굴들이 내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창 밖으로 씁쓸한 미루나무가 흔들리는 모교의 교정을 바라보다가 문득 게시판에 붙은 "해외 한국학 파견교수 후보자 추천의뢰"라는 공문을 보았다. 그 공문을 보자 황량한 내 내면의 숲이 웅성거렸다. 수련이의 하얀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드디어 이 곳이었다. 푸른 대초원의 지평선, 그 위로 뭉게구름 천층 만층 피어오르는 몽골의 아득한 하늘이었다. 나를 보다 원대한 곳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힘이 꿈틀거리는 이 곳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아래 말발굽 소리를 내며 평지로 구릉으로 미친 듯이 달리고 싶구나.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구나.
1995. 8. 31.
서울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의 재단으로부터 받는 월 1600불의 현지생활비를 아내에게 돌리고 나는 월 100불의 교재연구비, 출국 때 받은 이전비, 몽골국립대 한국어과로부터 나오는 월급 등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여기서는 그 돈만으로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 같다. 아내는 그 1600불을 은행에서 찾았다고 한다. 모처럼 비아냥거리지 않는, 보통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울란바토르에 오고 일주일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아내를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 큰 그림자를 드리운 식구(食口)의 끈을 잠시라도 잊고 싶었나 보다
1995. 9. 3.
몽골국립대학에서 첫 강의를 했다. 몹시 황당했다. 성한 것이 하나도 없는 건물의 유리창, 흙탕물을 튀기며 강의실 옆을 질주하는 낡아빠진 지프들의 소음, 빗물이 새는 강의실, 복도에 노점상처럼 죽치고 앉은 학생들, 반 정도가 결석한 한국문학 강의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영어와 중국어로 간단한 인사를 했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썰렁했다. 괜히 강의 노트만 뒤적거리다가 더듬 더듬 내 과목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도 나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곤혹스러운 순간 다소곳이 앉아 내 말을 들어주는 학생이 있었다. 갈색으로 그을은 피부, 맑고 또렷한 눈동자,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에 하얀 셔츠를 입은 여학생이었다. 내가 얘기하면 그 학생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노트를 해주었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흘러내리는 밤색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그런 학생을 보자 자신감이 되살아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와 단 둘이 대화를 하듯 정신없이 강의를 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다른 학생들도 열심히 내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 출석을 부를 때 유심히 살펴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아우란치'. 얼굴만큼이나 예쁜 이름이었다.
1995. 9. 25.
강의를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소감은 절망이다. 환멸은 어느 곳에도 있었다. 한국에 가서 떼돈 벌 궁리를 하는 속악한 학생들을 데리고 나는 퇴계(退溪)와 이상(李箱)을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살자고 몽골에 왔던가. 자본주의에는 국경이 없다. 욕망과 상품의 저 위대한 보편성이 오래 사회주의를 겪은 이 순결한 초원에까지 군림하고 있다.
인간이란 얼마나 징그러운 것일까. 더 많이 일하고 더 세게 일하고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남기려는 욕망이 어느새 모든 것을 사로잡는다. 24시간 강의를 하는데 왜 파견교수라고 초과 강의수당을 주지 않는지 나는 그것이 못 마땅해 죽을 지경이다. 주당 22불도 안되는 그 돈을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누더기를 느낀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내 영혼의 비계와 군살.
95. 11. 11.
울란바토르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화력발전소에서 스팀을 공급하는 중앙난방식이다. 오늘 교실 밖은 영하 20도의 강추위. 아이가 감기 들었다며 결석한 여학생들이 너무 많았다. 몽골의 여자들은 17, 18세만 되면 거의 다 결혼을 하기 때문에 대학생들 중에도 아이를 가진 유부녀들이 많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진도를 나갈 수도 없어서 자유토론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졸업을 하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을 얘기해보라고 했다.
관광객 통역을 하고 싶다, 서울의 무역회사에 들어가 돈을 왕창 벌어보고 싶다는 소망에서부터 산사르TV에 취직하고 싶다, 오노드르 신문의 기자가 되고 싶다, {통갈릭크 타미르} 같은 국민소설을 쓰고 싶다 등등 벼라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아우란치에게도 얘기를 해보라고 했다. 아우란치는 담담하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울란바토르를 떠나고 싶어요. 남편은 반대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한국어는 인기 있는 외국어라서 고향의 중고등학교에도 얼마든지 자리가 있어요. 제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은 고향 집에서 말을 타는 거예요. 제 고향 아라항가이는 아늑하고 정겨운 초원입니다. 먼 지평선에는 항가이 산맥이 검은 띠처럼 이어져 들과 하늘을 잇고 있지요. 굽이굽이 초원을 감돌아 흐르는 강가엔 푸른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흰 구름 같은 양떼들과 한가로운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구요. 그 초원의 강기슭, 늙은 느릅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곳에 우리 집이 있습니다. 사방 5, 6Km 안에 다른 집은 없어요 "
아라항가이의 초원을 그리는 아우란치의 눈동자가 내게 휑한 메아리를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그 눈동자에 빠져들었다.
"아침 햇살에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풀잎에 이슬방울들이 빛날 때면 우리 집 앞, 그러나 누구의 것도 아닌 대초원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요. 온 가족이 불단(佛壇) 앞에 모여 아침을 먹고 바지, 모자에 가죽장화를 신고 가축들의 방목을 나갑니다. 오빠와 남동생들은 낙타떼와 말떼를 몰고 풀이 무성한 먼 곳으로 갑니다. 여덟 살 박이 여동생까지 말을 타고 양떼를 몰고 아침햇살이 빛나는 황금빛 언덕을 넘어갑니다. 어머니는 집 근처에서 아르갈(가축의 분뇨)을 모으고 젖을 짭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어 노을이 지고 초원이 연보랏빛으로 곱게 물들면 말들은 발길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옵니다. 익살스런 몽고개들도 어머니를 에워싸고 껑충거리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석양 속에 만경창파 붉은 풀파도가 넘실거리고 초원은 곧 적막에 싸입니다. 아, 나담(여름 축제)이 있을 때 우리 고향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짙은 초록의 대초원 위에 보랏빛 말입술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는 우리 고향을요."
학생들은 너 나 없이 턱을 괴고 눈만 꿈뻑거리고 있었다. 아우란치의 말에 취해버린 것이다. 그들 역시 여름이면 천막을 싸들고 도시에서 초원으로 나가 살고 싶어하는 몽골인들이었다. 아우란치의 말이 끝나자 교실은 잡담으로 웅성거렸다. "그래, 아라항가이가 좋지. 사람으로 고비에 사느니 개로 태어나도 아라항가이가 좋다잖아." "나도 고향으로 돌아가까? 어, 이거 왜 이래. 내 고향 호부트도 아라항가이 못지 않어. 부귀 따위야 말할 게 못 되지이."
나는 멍청히 아우란치만 바라보았다. 초원의 햇살에 그을은 갈색 피부 때문에 그동안 나는 깜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아우란치의 얼굴은 수련이를 빼다 박은 듯이 닮지 않았는가. 나는 아우란치의 눈을 응시하며 수업을 마쳤다.
95. 12. 24.
본토박이의 여자에 손을 댄 이방인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건 고대부터 항상 그래 오던 율법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예 시작을 말았어야 하는 건데 별로 후회가 되지 않는다. 스스로의 병신스러움에 대한 환멸로부터 이렇게 자유로워 보기도 처음이다. 아우란치의 배 위에서 느낀 오르가즘은 황홀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몽골의 여자는 그윽하고 힘차고 탄탄했다. 어머니 대지(大地)와도 같은 무엇이 있었다.
이 주일 전. 아우란치는 내게 남편이 북부 자르갈란트의 삼림지대로 곰사냥을 떠났다고 했다. 그 날 밤 나는 그녀의 아파트로 가지 말자고 4시간 동안이나 스스로를 타일렀다. 나 자신 정말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지도 의심스러웠다. 이런 감정의 사치에 빠질 형편이 못 된다고 다짐도 했다.
그러나 밤이었고 달빛이 나를 호명했다. 나는 녹은 눈 때문에 지저분해진 길을 가로질러 그녀의 아파트로 갔다. 그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나긋나긋한 팔이 천천히 나의 목을 감싸 안았고 촉촉한 입술이 나의 이마에 와닿았다.
그리고 오늘. 아우란치는 일본인 여자친구의 아파트로 도망갔고 나는 입을 꽉 다문 몽골인들에게 붙잡혔다.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았고 손가락이 부러졌다. 지금 글씨가 삐뚤삐뚤한 것은 그 때문이다. 왼손으로 쓰고 있으니까. 죽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 오늘 나를 두들겨 팬 몽골인들 중에 정작 아우란치의 남편은 없었다.
그는 자르갈란트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를 두들겨 팬 것은 그의 '동생들'이다. 아우란치의 남편 이루가이는 밀무역으로 돈을 버는 사나이다. 아우란치의 아파트에서 같이 자다가 우연히 그 '동생들'에게 들켰을 때부터 아우란치는 줄창 떨고 있다. 남편이 오면 죽을 거라면서.
이 순간 멀리서 개가 짖어대는 소리가 들린다. 이 밤중에 누가 이런 외진 아파트로 오는 것일까. 개소리가 견딜 수 없이 머리를 쑤신다. 정말 이런 분위기에 너무 잘 어울리는 배경음악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쓰는 마지막 글일지도 모르겠다.
96. 1. 19.
내 평생 이런 곳에서 정월을 맞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초원엔 눈이 엄청 내려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오가는 데에 닷새가 걸린다고 한다. 어디선가는 눈 덮인 하천을 건너다가 사람과 땀이 난 말들이 같이 얼어죽었다고도 한다. 이 곳은 아라항가이에 있는 아우란치의 집이다. 우리는 열흘 전 트럭을 얻어타고 도망치듯 울란바토르를 떠나 일주일만에 이 곳에 도착했다.
인간 세상과는 완벽히 절연된 겨울의 대초원. 아우란치의 겔 앞에 앉아 저 잔혹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초원을 보노라면 몽골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생명에 대한 무조건의 애정, 생명에 대한 무조건의 관대함이 결코 미개한 감상만은 아닐 것이다.
아우란치의 아버지 직지드수렌씨는 이래도 좋을까 싶을 만큼 나를 환대해준다. 설맞이와 함께 새로 사위를 맞았다면서 양초를 넣은 유리병 등불을 있는 대로 내걸었다. 어두운 밤에 화톳불을 피우고 양고기를 끓인 것을 후후 불며 같이 먹다가 나는 문득 불빛에 얼굴을 벌겋게 달구고 있는 아우란치의 오래비들에게서 형제애 같은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되었으니 파견교수로서의 모든 지원금이 끊기겠지만 나에겐 서울 H대학의 지역학 연구소로부터 송금받은 1500불 가량의 달러가 있었다. 그걸 직지드수렌씨께 드렸다. 한화로 백만원 남짓한 그 돈에 이 집 사람들은 과분하게 즐거워한다. 그들은 이 돈이면 여기서 2, 3년은 잘 놀고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뜻하지 않은 나와 딸의 출현에 이 집의 가축들까지 상기된 듯 귀여운 새끼양들이 화톳불가에 모여들고 장난꾸러기 망아지는 주둥이로 내 옷을 끌어당긴다. 이렇게 다정하고 귀여운 것들에 정이 들어버리면 영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이 초원에서 일생을 마치는 유목민이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96. 3. 24.
3월이지만 초원의 눈은 아직 녹지 않았다. 나는 이 곳에서 시를 쓴다. 이렇게 좋은 시들을 써 본 것이 얼마만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상(詩想)이 뇌리를 사로잡아 펜은 불이 붙은 듯 종이 위를 달린다. 어린 양의 모피를 뒤집어 쓴 온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내 자신의 인생이 이토록 명료하고 신선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과거와 결부된 어떤 주제를 건드려도 영감과 착상이 떠오른다. 이 시들은 시집으로 묶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지금 너무 행복하다.
시를 쓰다 지치면 소설 비슷한 것을 끄적거리고, 그것도 싫증이 나면 서울에서 가져온 책들을 읽고 또 가끔은 아우란치에게 한국문학을 가르친다. 후두룩, 후두룩 코뚜레질을 하는 말을 타고 아우란치와 겨울 방목을 나가기도 한다.
방목은 해가 따뜻한 10시부터 4시까지 6시간 정도만 할 수 있다. 찬 바람을 피할 수 있고 풀의 질이 좋은 곳으로 양들을 데려간다. 몽골사람들이 '흰 털이 나부끼는 바람'이라고 부르는 눈보라가 치면 얼른 산기슭의 안전한 곳으로 양들을 대피시켜야 한다. 1000여 마리의 양떼를 몰아가는 그 일을 아우란치 혼자서 능숙하게 한다. '부자 나라에서 온' 이 무위도식의 사내는 아직도 겨우 내 말 하나를 건사해 움직일 뿐이다.
너무 놀고 먹기가 미안해서 가끔은 축사로 들어가 아우란치의 동생이 어릴 때 빨던 우유병에 우유를 담아 망아지를 먹인다. 그러면 직지드수렌씨는 "우리 서 박시 우유를 먹은 망아지는 앞으로 산보다 더 클 거야." 하며 허허 웃는다. 이 집엔 개도 20마리가 넘는다. 나는 고깃덩어리를 큼직큼직하게 잘라 개밥을 만드는 일도 한다. 덕분에 개들이 나만 보면 꼬리를 치며 열심히 따라 다닌다. 승냥이며 늑대로부터 양떼를 보호하느라 얼굴 가득 흉터가 생긴 이 충직한 개들을 어루만지면 아무리 환멸에 찌든 인간도 정을 모른다고 하지 못하리라.
96. 4. 22.
봄바람이 불면서 이 집은 부산해졌다. 양들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거의 온 식구가 매달려 양의 출산을 거들었다. 그제는 검은 머리의 소 한 마리도 새끼를 낳았는데 직지드수렌 영감은 그 놈이 '가오란가이'라고 걱정을 한다. 제 새끼를 알지 못하고 젖을 주지 않는 어미라는 것이다. 갑자기 서울의 자식들이 생각났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영감은 젖을 짜서 새끼의 머리에 묻히고 어미에게 새끼 냄새를 가르치려고 하는데 어미는 완강하게 버티며 거부한다. 지치고 화가 난 영감은 몽둥이로 그 놈의 머리를 때리고 막사를 나가버렸다. 나는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를 들으며 놈의 머리통만 바라보았다. 고쳐지지 않는 막된 버릇이여, 불행의 원천이여, 막무가내여, 내 죽은 뒤에도 길게 빛날 업보여.
96. 7. 2.
오늘은 아우란치와 같이 소 떼를 몰고 멀리까지 나갔다.
풍경은 아스라히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물러서는 지평선, 청청한 하늘. 눈을 빨아들일 듯이 그 하늘의 깊이는 인간의 혼을 사로잡고 있었다. 인간의 뇌를 빨아들이는 아편의 위력처럼 영원한 유랑의 유혹을 혈관의 핏속에 불어넣어 돌돌돌 흐르게 하는 하늘. 그러나 나만은 저 하늘에 가 닿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전에 없이 강하게 느껴졌다.
하늘은 이 땅에 묶여 있는 나를 온 몸으로 밟으며 멀어져간다. 들꽃이며 풀잎이며 언덕이며 바위가 다 손에 잡힐 듯 했지만 내가 거기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내가 바라 보면 바위도, 풀잎도, 구름도 그 존재를 잃는다. 낡은 감동의 무수한 반복. 시는 멀어져 가고 내 마음은 이 곳에 미만한 터질 듯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집으로 말머리를 돌리려 할 때 아우란치가 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우리는 초원 한 복판에 오라가(소를 모는 긴 장대)를 꼿고 옷을 벗었다. 오라가가 있는 곳은 가축을 모는 목동들도 웃으며 멀리 돌아간다. 우리는 그렇게 알몸이 되어 풀향기에 취하며 사랑을 했다. 아우란치의 다리는 나의 쓸쓸한 등판을 휘감았고 손은 나의 어깨를 할퀴고 입술은 나의 가슴을 핥았다. 나는 빠른 속도로 시를 써내려갔다. 숨가쁜 운율을 토하며 종이가 흔들렸다. 나는 생전 처음 온 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쾌감에 목을 떨었다.
그녀의 젖가슴에 머리를 맡기고 나는 한참 동안 엎드려 있었다. 갑자기 묘한 생각이 들었다. 나의 둘레에 펼쳐진 이 풍경들과 이 냄새들, 이 소리들이 현실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라면 나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얼굴을 부비다가 눈 앞에 핀 연보랏빛 민들레 같은 꽃을 보았다.
"여보, 저게 뭐라는 꽃이 뭐지?"
"저것? 모리니호롤(말입술꽃)이예요. 연기보다 더 가벼운 꽃이죠. 바람이 불면 저 보랏빛 꽃씨들이 담배연기처럼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가 초원으로 흩어지거든요."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갑자기 대기는 짙은 풀냄새, 아니 혼탁한 수증기로 가득찬 듯 했다. 노을빛이 아롱지는 초원. 날개를 나란히 하고 잠자리를 찾아 날으는 새들. 물속에 들어온 듯 귀가 먹먹해지는 한 순간의 정적. 나는 세계의 한 발치에 쓰러져 내 살과 뼈의 무거움으로 그 무한(無限)을 느꼈다. 나도 그리로 가야 할 것이었다. 빗방울이 강물에 떨어지듯 나도 그것에 섞여 함께 흐르며 똑같은 리듬으로 굽이쳐 가야 할 것이었다. 연기보다 더 가볍게 흩어지는 저 말입술꽃처럼.
무한보다 더 예리한 송곳이 없나니 우수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의 생은 작고 초라하고 슬프고 허무했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우정과 배반과 회한, 고립,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소용돌이치며 긴 들판, 막막한 지평선, 찰랑이는 노을의 빛무리 속에 허무하게 타올랐다. 망망한 초록의 대초원에 찍힌 한 점의 보랏빛 응축. 공기도 아니고 흙도 아닌 저 이상한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살아서 무엇을 꿈꾸었던가. 나는 인생의 저편을 뚫고 들어갈 어떤 찬란한 응축을 꿈꾸었다. 결국은 바람에 불려 하늘로 사라질 꽃을 .
아우란치와 나는 옷을 입고 어둑어둑해진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모기를 붸기 위해 태우는 마른 풀 연기가 있고 넓은 하늘엔 보석을 흩뿌린 듯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서상효의 일기는 여기서 끝나고 있었다.
그의 일기를 다 읽고나자 어느 새 내가 앉은 겔의 장막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사방은 더할 나위 없이 조용했다. 나는 멀리서 반짝이는 태양의 붉은 빛을 두 그루의 느릅나무 사이로 아련히 바라보았다.
오전 나절은 서상효의 시체를 가져가기 위한 준비로 다 보냈다. 아이를 보내 북쪽에 사는 직지드수렌씨의 장남 이트겔테를 불러오고 대강이라도 그의 시체를 수습할 낡은 문짝과 종이상자, 천 등을 구했다. 우리 지프에 어떻게 시체를 싣고 가냐고 펄펄 뛰는 감볼트를 무마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나는 울란바토르 교외에 화장터가 있다는데 거기서 깨끗이 화장을 하면 된다고 그를 달래었다.
서상효를 초장한 곳으로 출발했을 때는 해가 중천에서 떠오른 정오였다. 초원엔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햇살이 탐욕스럽게 번뜩이고 있었다. 감볼트와 나, 직지드수렌씨와 이트겔테 부자를 태운 지프는 폭이 좁고 얕지만 물살이 빠른 강을 건너 일망무제의 들판을 덜컹거리며 달려갔다. 지프 뒤로 바퀴에 짓이겨진 풀잎들이 소롯한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프는 들꽃이 만발하고 풀빛이 짙은 비취빛 초원으로 들어섰다. 이트겔테는 한참 비탈길을 오르다가 갑자기 움푹 들어가며 내리막길이 시작하는 곳에서 차를 멈추라고 했다. 그곳이 초장터였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보자 그윽한 들꽃 향기가 풍기는 풀밭 사이 보일 듯 말 듯 희끗희끗한 것들이 있었다. 들개가 뜯어먹고 남긴 시체의 뼈다귀들이었다. 나는 그 풍경의 장엄함에 말을 잃었다.
솜처럼 부드러운 구름이 흘러가는 창천(蒼天), 두 눈이 쓰릴 정도로 강한 햇빛의 백열(白熱), 방초(芳草)의 육감적인 냄새가 코를 긁는 망망한 벌판, 그 위에 자는 듯이 조용히 누운 죽은 자들의 촉루(??) 어디서도 죽음의 입김을 느낄 수 없었다. 죽음은 아마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 모양이었다. 죽음은 뜨겁게 단 대초원의 신(神) 앞에 사람들을 내려놓고 아무런 기척도 없이 아주 조용히 사라져 버린 듯 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서상효를 찾아냈다. 신기하게도 서상효의 시체는 불과 며칠 사이에 말끔히 육탈(肉脫)이 되어 있었다. 초원의 건조한 공기에다 그 동안 날씨가 계속 맑았던 탓일까. 살점은 짐승들이 가져가고 체액은 강렬한 햇살에 휘발해 버려 누르죽죽한 뼈다귀에는 물기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프에서 내리는 순간 숨이 컥 막혔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들개들이 나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눈두덩이 위에 두 개의 하얀 점이 있어 마치 눈이 네 개처럼 보이는 흉측한 검은 털의 들개들이었다. 나는 지프에 등을 붙인 채 얼어붙어 버렸다. 한 마리가 나의 목을 물어뜯으려 뛰어올랐을 때 이트겔테의 날랜 몽둥이가 그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트겔테는 몽둥이를 휘둘러 개들을 붸아버리고 돌아서서 씨익 웃었다. 사람 고기에 맛을 들인 개들이라고 했다.
직지드수렌씨 부자는 서상효의 유체 옆에 낡은 문짝과 종이상자 천 등을 늘어놓고 향을 피웠다. 그 앞에 간단하게 준비한 음식들을 진설하고 불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제 주위엔 들개도 독수리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나도 서울에서 가져온 종이팩의 진로 소주를 은술잔에 따라 올렸다. 독경을 끝나자 우리는 장갑을 끼고 서상효의 유골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낡은 문짝 위에 천을 깔아 유골을 모으고 종이상자를 찢어 덮고 보자기로 묶으려다 나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서상효가 누웠던 그 자리에 해를 향해 동그란 머리통을 쳐든 말입술꽃이 하나 피어 있었다.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 꽃을 조심스럽게 꺾었다. 어젯밤에 읽은 그의 일기가 생각나서였다. 그 꽃을 유골과 함께 수습하려고 상자로 가져오는데 돌연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이 일었다. 말입술꽃은 보랏빛 꽃씨로 후루루 흩어지며 초원의 하늘로 불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