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오늘 얻은 깨달음이면 그것이 가능할 거라 믿었다.
"어떻습니까?"
그림자의 말에 마철령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경 수백 장이나 되는 넓은 공간에 시체가 가득했다.
적어도 천여 구에 달하는 시체였다. 마철령과 그림자는 그 시체들의 한 가운데 있었다.
"철강시로는 그럭저럭 쓸 만하군. 흐으으."
"혈강시가 필요합니다."
그림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마철령이 코웃음을 쳤다.
"크크크. 혈강시를 너무 우습게 아는군. 혈강시를 만들려거든 최소한 십대고수는 데리고 와야지. 흐으으으."
마철령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림자를 빤히 쳐다봤다.
"아니면 네놈이 재료가 되든가, 크흐흐흐."
그 말에 그림자가 마철령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철령은 그런 그림자의 행동을 보며 통쾌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크하하하!"
마철령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닥에 쌓여 있는 시체를 둘러봤다. 어중이떠중이는 필요 없었다.
그 어떤 시체로도 철강시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살아생전의 능력이 뛰어날수록 더 좋은 철강시를 만들 수 있다.
지금 마철령이 데리고 있는 예순셋의 철강시는 살아 있는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과 수준을 맞추려면 상당히 뛰어난 시체를 구해야 한다.
마철령은 시체들을 쭉 살피다가 눈을 빛내고 손가락을 한 번 까딱였다. 그러자 시체 중 하나가 위로 튀어 올랐다.
마철령의 간단한 손짓에 그 시체가 허공을 날아 한쪽에 떨어졌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아무리 살펴도 이 정도가 한계로군. 흐으으."
그림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철령이 골라 놓은 시체들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서른두 구의 시체가 있었다. 천 구가 넘는 시체들 중에서 고작 서른두 구만 고른 것이다.
"이 많은 시체들 중에 쓸 만한 게 고작 저것뿐이란 말입니까?"
마철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한 번 휘저었다.
화르륵!
마철령의 손길을 따라 불길이 일었다. 그 불길은 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시체들 사이에 떨어졌다.
펑! 화르르륵!
불꽃에 닿은 시체들이 거세게 타올랐다. 불길은 순식간에 커지며 주변의 시체들을 낼름낼름 삼켰다.
그림자는 마철령의 행동에 크게 당황했다. 설마 이렇게 불을 질러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철강시를 만들 수 없다면 쓸모 없는 시체들이다.
"가자."
그림자는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다가 마철령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철령은 어느새 골라 놓은 시체들을 허공에 띄운 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림자는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아직 임무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림자의 임무는 마철령을 도와 가잇를 만들고 그 제조법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지.'
그림자가 강렬한 눈빛으로 마철령의 뒤통수를 쏘아봤다.
강옥조는 환한 얼굴로 길을 나섰다. 그녀의 뒤에는 거무튀튀한 피부를 가진 사내 넷이 커다란 수레를 끌며 따라오고 있었다.
수레에는 뭔가가 가득 실려 있었는데, 바퀴가 바닥에 깊은 자국을 만드는 걸로 봐서 상당히 무거운짐이 실린 듯했다. 그런데도 사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수레를 끌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정협맹이었다.
"이 정도면 성공이야. 한 번 거래로 금 이만 냥을 얻었으면 된 거지."
강옥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무거운 짐을 정협맹에 넘겨 버리고 무한을 뜨고 싶었다. 벌서 도망갈 곳은 마련했다. 아마 몇 년간은 숨죽이고 살아야 할 것이다.
'뭐, 한 삼 년쯤 숨어 있다가 정협맹이 망한 다음 다시 나오면 되지.'
강옥조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수레를 끄는 네 사내를 바라봤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저들이 강시라니 믿을 수가 없네.'
그들은 철강시였다. 그녀가 몇 년 동안 숨을 곳과 관계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녀가 이번에 한 일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녀의 명이라면 설사 스스로의 목을 자르라고 하더라도 즉시 이행하게 되어 있다.
강옥조는 든든한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정협명에 도착한 강옥조는 접객당에 앉아 서문공복을 기다렸다. 본래 이런 일은 내당주인 모용강과 외당주인 서문공복이 함께 처리해야 하지만 그녀는 서문공복만 불렀다.
처음부터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었다.
수레에 실렸던 짐은 금이 가득 담긴 철궤짝이었다. 강시들은 그것들을 옮겨 그녀가 머무는 방에 차곡차곡 쌓아뒀다.
그들은 강옥조 뒤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강옥조가 그렇게 세워둔 것이다.
강시들이 맹 내에서 활보하는데도 아무도 그들이 강시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말로 대단한 강시들이야. 이들이 철강시라고 했던가?'
철강시는 놀랍게도 숨까지 쉬었다. 물론 별 의미 없는 행동이긴 했지만 그것이 강시를 정말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모든 강시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산채로 강시로 만든 경우에만 그랬다. 지금 강옥조를 따라온 강시들이 바로 그랬다.
그렇게 일 각쯤 기다리자, 접객당 문이 열리고, 서문공복이 들어왔다. 서문공복은 안에 들어서자마자 번득이는 눈으로 강옥조 뒤에 서 있는 강시들을 노려봤다.
"지금 제정신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건가?"
서문공복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그는 강옥조에게 성큼 다가가 강렬한 살기를 뿌렸다.
강옥조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그 살기를 이겨냈다.
예전 같았으면 오줌을 지렸겠지만 지금은 철강시들이 그녀를 돕고 있었다. 철강시들이 기세를 뿌려 서문공복의 살기를 일부 차단한 것이다.
서문공복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어느새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서문공복은 강시들을 하나하나 노려봤다.
"저런 마물을 당당히 정협맹으로 끌고 오다니, 배짱 하나는 알아줘야겠군."
"저들이 강시란 걸 어떻게 알았죠?"
"생기(生氣)가 전혀 없는 자들을 사람이라고 우기면 누가 믿어준다던가?"
서문공복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감탄했다. 자신 정도되는 고수라야 알아차리지 그렇지 않다면 아마 누구도 저들이 강시라는 걸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강시를 만들 수 있는 자가 아직도 남아 있었던가?"
강시를 제련하는 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수백 년 전에 나타났던 혈교의 난에나 등장하던 마물들이었다. 당시 천하는 혈교의 강시들에게 철저히 유린당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요?"
강옥조가 화제를 돌리자, 서문공복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하긴 그렇지. 일은 잘 되었나?"
강옥조가 요염하게 웃으며 한쪽을 바라봤다. 서문공복은 강옥조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수많은 궤짝들이 쌓여 있었다.
"모두 금이에요. 삼만 냥은 될 거예요."
금 삼만 냥이라는 말에 서문공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뭘 그리 놀라시나요? 그나마도 헐값에 매각한 거예요. 무한이 어디 그리 작은 도시던가요? 그 절반을 팔아서 만든 돈인데 이 정도는 너무 모자라죠."
그제야 서문공복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풀었다. 어차피 이제 더 자신은 정협맹에 미련이 없다. 그는 정협맹의 사람이 아니라 혈왕의 사람이다.
물론 그것을 아는 자는 혈왕과 그의 그림자뿐이겠지만.
'그리고 저 여자가 조금 눈치를 채고 있겠군.'
아직 강옥조에게는 정확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치가 빠르니 어느 정도는 알아챘을 것이 분명했다.
"흐응. 이제 일 이야기는 이쯤 하죠."
강옥조가 묘한 코소리를 내며 서문공복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뜨거웠다. 서문공복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여인은 아무리 봐도 이런 느낌이 들지 않는데 강옥조에게만 다르게 반응했다.
"이런 곳도 참 괜찮지 않은가요?"
강옥조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옷을 벗었다. 서문공복의 눈에 핏발이 섯다. 그 역시 옷을 하나하나 벗으며 강옥조에게 다가갔다.
이내 접객당 안에 뜨거운 폭풍이 몰아쳤다. 그 안에 열기를 느끼지 않는 것은 묵묵히 서 있는 강시 네 구뿐이었다.
남궁무학은 심각한 얼굴로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들의 표정도 남궁무학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상황이 정말로 어렵게 됐소. 은왕곡이라는 변수가 지나칠 정도로 크오."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만 흑사맹 쪽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모용강의 말에 장로들의 안색이 약간 밝아졌다. 하지만 남궁무학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서둘러 흑사맹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우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오. 그러니 이번에 총 공세를 펼칩시다."
남궁무학은 그렇게 말한 후,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인 것이다.
전쟁이 지나치게 길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협맹뿐 아니라 정협맹에 줄을 대고 있는 다른 무가들 역시 무너질지도 모른다.
"각 무사에 연락해서 최대한 무사를 끌어모으고, 맹 내에 있는 무사들도 몽땅 끌고 흑사맹을 치겠소."
남궁무학이 말에 모두의 얼굴이 긴장감이 스쳤다.
"하면 맹을 비우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거의 그렇게 될 거요. 이번 기회에 그들을 물리치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지 않겠소?"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긍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은왕곡이라는 정체불명의 적도 상대해야 한다.
그들은 등장하자마자 흑사맹과 정협맹을 동시에 공격했다. 그런 그들의 목적이야 자명했다.
"은왕곡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하지 않겠소?"
장로 중 한 명이 말하자, 남궁무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들을 견제해야만 하오. 해서 그걸 뇌룡장에 맡길 생각이오."
"뇌룡장?"
뇌룡장이라는 이름에 장로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최근 뇌룡장에 대한 소문이 여러 가지로 퍼져 있었다.
십대고수가 둘이나 있는 곳이라는 소문에서부터 막강한 무사단이 몇 개나 된다는 소문까지. 뇌룡장이 나서면 천하에 군림할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 지경이었다.
그런 뇌룡장이 가세해 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것이다.
"뇌룡장이 돕기로 했소이까?"
남궁무학은 장로들의 표정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뭐라 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뇌룡장이 가세한다면 좋은 건 사실이니까.
"아직 말도 꺼내지 않았소. 하지만 그들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소? 아마 거의 확정적이라 해도 될 거요. 그들이 은왕곡만 견제해 준다면 별 무리 없이 흑사맹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요."'
남궁무학을 비롯한 모두의 뇌리에 뇌룡장이 은왕곡을 상대하면 거의 무너질 거라는 판단이 섰다.
은왕곡은 비록 기습이라고는 하지만 흑사맹과 정협맹을 한꺼버넹 상대하면서도 둘을 압도했다.
뇌룡장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그런 상대를 견제하면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아마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로군.'
은왕곡과 뇌룡장이 함께 무너져 준다면 적이 사라진다. 흑사맹도 없고, 혈마맹도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무림맹이 남겠지만 그들은 있으나마나한 존재다. 남는 것은 정협맹뿐이다.
남궁무학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매달렸다. 그 미소는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 다른 장로들의 입가에서 연달아 맺혔다.
무영은 거의 보름 동안을 주먹질에만 매달렸다.
그동안은 아예 신선단을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아침부터 밤까지 주먹질만 했다. 어떤 날은 잠도 자지 않고 밥도 거를 정도로 수련에 몰두했다.
그렇게 수련하는 무영을 가끔 세 여인이 한 번식 보고 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가끔 와서 보고 갔다. 하지만 무영의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사람은 금령뿐이었다.
금령은 몇 번이나 무영의 수련을 확인했다. 볼 때마다 무영의 실력이 또 다른 경지에 올라가 매번 놀라야 했다.
지금도 무영은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한없이 느린 주먹질이었다. 그것을 보는 누구나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무영 스스로는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무영이 수련을 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바로 정성이었다.
예전 금령이 해준 말이 아직도 무영의 뇌리에 맴돌았다. 정성을 담고 의미를 되새기라는 말이었다.
주먹질에 정성을 담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에는 정성을 쏟지만, 막상 주먹이 뻗어나가는 동안에는 신경을 덜 쓰게 된다. 그래서야 반쪽짜리 정성일 뿐이다.
무영은 주먹을 완전히 뻗을 때까지 온전히 정성을 쏟는 걸 수련했다. 그 수련법이 바로 지금 하는 수련이었다.
무영은 느릿느릿 주먹을 뻗었다.
어린애라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린 주먹질이었다. 주먹을 완전히 뻗은 후, 그것을 천천히 회수했다. 주먹을 회수하는 동작에도 정성을 가득 담았다.
그렇게 단순한 동작을 한 없이 정말로 한없이 계속했다.
정성을 쏟는 건 주먹에 국한되지 않았다. 정말 제대로 정성을 쏟으려면 주먹을 뻗는 동작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몸의 모든 부분에 정성을 담아야 했다.
그건 정말로 어려웠다. 무영이 지난 보름동안 침식을 잊으면서 수련을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몸에 정성을 쏟는 수련이었다. 무영은 이 수련을 마치면 분명히 커다란 벽 하나를 부술 수 있다고 믿었다.
츠릿!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주먹질이었는데도 바람소리가 일었다. 제법 날카로웠다. 무영은 환한 표정으로 정성껏 주먹을 회수한 후, 다시 내뻗었다.
슈팍!
주먹의 속도는 여전히 똑같았지만 바람소리가 좀 더 커졌다.
그렇게 수백 번을 반복했다. 무영은 점차 커져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무영은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연무장에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연무장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무영은 여전히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속도도 점차 빨라져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치 무영의 주먹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무영은 주먹질을 멈췄다. 사라졌던 소리가 서서히 돌아왔다.
그러다가 무영이 몸을 비틀기 시작하자, 소리는 다시 아련히 사라져 갔다. 무영은 몸을 완전히 비튼 후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
소리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폭발이 일어났다. 사방을 막고 있던 연무장 벽이 모조리 가루가 되어 버렸고, 그 여파가 벽 너머까지 밀려나 바닥에 깔린 흙과 돌이 위로 솟구쳤다.
"후우우우."
무영이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참상을 바라봤다. 연무장을 비롯해 그 주변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그저 주먹질 한 방으로 만든 결과였다.
'만일 뇌기까지 싣는다면......'
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주먹질에 뇌기가 깃든다면 끔찍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어쩌면 뇌룡장 자체가 날아가 버릴 지도 모른다.
무영은 주먹을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리며 살폈다. 왠지 뿌듯했다.
'결국 얻었구나.'
방금 전 주먹질을 한 순간,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면서 신선단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엿봤다. 이제는 그것을 확인할 차례였다. 만일 그것을 이룬다면 주먹질이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휴우, 그래도 일단은 쉬어야지."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렸다.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 때로는 여유가 필요하다. 여유와 휴식이 새로 도약할 힘을 주기도 하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
무영은 오랜만에 집무실로 향했다. 그동안 거처와 연무장만 왕복했는데, 오늘은 연무장에 갈 필요 없이 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무영의 집무실은 사실 연단실 연장이었다. 연단실이 따로 있긴 했지만 상당히 많은 작업을 집무실에서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집무실이 워낙 넓어 연단에 관련된 것들은 그리 많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
무영이 집무실에 도착해 안에 들어가니, 무영보다 먼저 집무실에 와서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영은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이군."
"오라버니, 드디어 오셨네요."
"이제 수련은 끝나신 건가요?"
"정말 오래 기다렸어요."
세 여인이 동시에 말하니, 무영은 일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보아하니 매일 이곳으로 와 자신을 기다린 듯했다.
"오라버니께서 수련이 끝난 걸 알면 다들 몰려올 텐데......"
서하린이 눈을 빛냈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영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현재 뇌룡장에는 이래나저래나 하며 무영을 기다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최근 무림 정세가 심상치 않기 때문에 그 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뇌룡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 일을 결정하려면 무영의 판단과 허락이 필요했다.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마 지금쯤이면 우르르 몰려오고 있을 것이다.
"오라버니, 우리 밖으로 놀러가요!"
서하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그렇게 외쳤다. 어차피 무영은 무림의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무영과 한가로이 지내고 싶었다.
서하린의 마음을 알았는지 모용혜와 당비연도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무영에게 우르르 달려가 각자 무영의 팔과 허리를 안고 무영을 끌어 당겼다.
"자, 잠까! 이, 이러면......"
무영은 당황해서 허둥댔다. 하지만 그녀들을 뿌리치지 못했다. 결국 그녀들에게 이끌려 집무실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집무실을 벗어나자 일사천리였다. 무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양팔을 뻗어 세 여인의 허리를 동시에 휘어 감았다.
"어멋!"
세 여인이 무영의 적극적인 행동에 놀라 작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몸을 비틀거나 반항을 하는 여인은 한 명도 없었다.
무영은 빙긋 웃으며 하늘로 뛰어올랐다.
집무실 지붕에 내려선 무영은 순식간에 지붕을 박차고 비스듬하게 위로 솟구쳤다. 무영의 몸은 그대로 뇌룡장을 벗어났다. 실로 놀라운 도약이었다.
무영의 팔에 안긴 세 여인은 발 아래로 멀어지는 세상을 보며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뇌룡장을 순식간에 벗어난 무영은 세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무영의 물음에 서하린이 빙그 ㅅ웃으며 두 여인과 눈을 마주쳤다. 세 여인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산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영이 걷기 시작했다. 세 여인은 행여 뒤쳐질세라 서둘러 무영을 따라 걸어갔다. 그렇게 일행은 무한에서 가장 가까운 산으로 올라갔다.
산정에 도착한 무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숨과 함께 산의 기운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얼마 전에 주먹질을 완성한 이후, 일상의 모든 것에 정성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이렇게 숨을 쉬는 것에도 정성을 기울이려 노력했다.
그 대가는 참으로 컸다. 산의 기운을 몸에 가득 채운 무영은 숨을 길세 내쉬며 그것들을 다시 산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이내 산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무영은 산 그자체가 되어 산의 모든 것을 즐겼다.
그렇게 무영이 산과 하나가 되어 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세 여인은 그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이 보기에 무영은 마치 신선 같았다. 고작 보름 만에 마치 딴 사람처럼 변해 버린 것이다.
"오, 오라버니......"
서하린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무영을 불렀다. 무영은 그제야 산과의 일체감에서 벗어나 그녀들을 바라봤다.
"미안. 오랜만에 산에 오니 너무 좋아서, 자, 이제 뭘 하지?"
막상 산에 오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영은 그동안 산에 오면 언제나 약재를 채집하는 것이 일이었다. 이렇게 그냥 놀러온 적은 거의 없었다.
세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그저 무영과 함께 있고 싶어서 온 것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영은 그 침묵마저도 좋았다. 그렇게 잠깐 동안 침묵의 기분을 만끽한 후, 무영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할까?"
무영의 말에 세 여인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신선주요?"
"가져오셨나요?"
세 여인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신선주의 맛은 한 번 보고 나면 절대 잊을 수가 없다.
"가져오진 않았지만......"
무영의 말을 들은 그녀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번졌다. 하지만 이어진 무영의 말에 다시 표정이 환해졌다.
"만들면 그만이지. 잠시만 기다려."
무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날렸다. 방금 전에 산과 일체가 되었기에 어느 어느 곳에 물이 있고, 그 중 어떤 물이 가장 괜찮은지 파악한 상태였다.
순식간에 옹달샘 하나를 찾아낸 무영은 근처에 보이는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집었다.
손가락으로 돌덩이를 몇 번 만지니 훌륭한 술병이 되었다. 기(氣)를 이용해 돌덩이 내부를 완전히 녹여버린 것이다.
무영은 그 안에 샘물을 가득 채웠다.
"후우우.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군."
지금은 낮이다. 신선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밤에 약초를 캐야 한다. 하지만 무영은 지금 바로 신선주를 만들고자 했다. 오늘 얻은 깨달음이면 그것이 가능할 거라 믿었다.
무영이 한 손을 바닥으로 향했다.
우우우웅!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래로 향한 무영의 손바닥에 거무스름한 기운이 어렸다.
그 기운은 점차 커져갔다. 기운의 크기가 어른 머리만 해졌을 때, 무영은 손을 들어 그 기운을 술병에 갖다 댔다.
스르륵.
검은 기운이 술병 안으로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무영은 양손으로 술병을 살짝 감싸 안았다.
파지지직!
무영의 손에서 일어난 뇌기가 파직거리며 술병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반 각 정도 뇌기를 주입한 무영은 다시 한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기이이잉!
이번에도 역시 공기가 진동하며 기운이 손바닥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새하얀 기운이었다. 마치 빛무리가 모여드는 듯했다.
무영은 그렇게 모은 빛무리를 술병으로 가져갔다. 환한 빛이 술병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무영은 술병을 흔들었다. 마치 안에 넣은 것들을 잘 섞으려는 것처럼. 술병을 흔드는 무영의 손에서 연방 뇌기가 번득였다.
세 여인은 무영이 사라진 후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들은 한편으로는 기대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무영이 신선주 만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봐 왔다. 신선주는 만드는 데 꽤 많은 시일이 소요된다. 약초를 이용해 만든 술을 숙성시키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한데 무영은 지금 술을 담그러 간다고 했다. 그동안 만들던 것과는 꽤 다른 신선주를 만들어 올 모양이었다.
"얼마나 걸리실까......"
서하린이 바위에 걸타앉아 손으로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무영과 함께 있으려 뇌룡장을 빠져나왔는데, 또 떨어져 버렸다.
왠지 힘이 빠졌다. 그것은 서하린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용혜와 당비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세 여인은 측 늘어진 모습으로 무영을 기다렸다. 각자 바위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서 이 각쯤 기다렸을 때, 홀연히 무영이 나타났다.
세 여인은 놀란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아무런 기척도 소리도 심지어는 공기의 움직임도 느끼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도달하신 거지?'
세 여인은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무영은 정말로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듯했다. 물론 그녀들의 수준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오래 기다렸어?"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슬쩍 들었다. 무영은 제법 커다란 술병 하나를 쥐고 있었다.
술병의 모습은 상당히 투박했다. 세 여인은 그것이 그냥 커다란 돌덩이를 깎아서 만들었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벌써 만들어 오신 거예요?"
"생각보다 잘 되더라고."
무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세 여인은 의아한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들이 신선단이나 신선주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양이 적으면 시간이 얼마 안 걸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술잔이 있어야겠군."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에 떨어져 있던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어른 주먹만 한 돌이었는데, 무영의 손에 닿기가 무섭게 겉이 깎여나갔다.
세 여인은 순식간에 만들어진 술잔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돌로 만든 술잔은 상당히 매끈했다.
그저 돌을 깎기만 한게 아니라 완전히 녹였다가 굳히면서 무영이 어떤 처리를 했는지 매끈했다. 마치 도자기 술잔을 보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세 여인의 눈이 이번에는 무영이 들고 있는 술병으로 향했다. 술병 역시 술잔과 마찬가지였다.
돌을 깎아 만들었음이 분명했는데, 그것 역시 마치 도자기처럼 매끈했다. 얼핏 보면 돌을 깎아 만들었다고는 절대 생각지 못할 것이다.
무영은 놀라는 표정을 지은 세 여인에게 술잔을 하나씩 건넸다. 근처 돌멩이 세 개가 순식간에 술잔으로 변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잔을 받은 세 여인은 어느새 잔을 가득 채운 신선주를 보며 침을 꿀꺾 삼켰다. 그러고 보면 최근 한동안 신선주를 마시지 못했다.
뇌룡장에 있는 신선주는 강악과 당백형이 완전히 장악했기에 마시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행여 다른 사람이 신선주를 마실까봐 둘만 아는 공간에 바위를 숨겨 놓고 몰래몰래 마셨다.
세 여인은 눈을 빛내며 신선주를 담숨에 삼켰다.
찌르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방금 마신 술은 예전에 먹던 신선주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저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온몸에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게다가 혀에 남은 맛의 여운이 계속해서 뇌리를 뒤흔들었다.
"하아아."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세 여인은 눈을 빛내며 술잔을 내밀었다.
'이분과 평생 함께한다면 언제든 원할 때 신선주를 마실 수 있을 텐데.'
당비연은 갑자기 든 생각에 얼굴을 붋혔다.
그리고 이내 잔에 신선주가 차오르자 이번에는 조금씩 음미하듯 마셨다. 그렇게 마시니 또 다른 색다른 맛이 느껴졌다. 정말로 굉장한 술이었다.
무영은 신선주를 마시는 세 여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저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런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물밀 듯 밀려왔다.
무영이 다시 뇌룡장으로 돌아온 것은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산에서 신선주를 몇 병이나 마신 덕분에 세 여인은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고, 기분 역시 하늘을 유영했다.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얼굴 한가득 담고 뇌룡장으로 들어선 네 사람의 눈에 그들이 오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사람이 보였다.
"장주님! 오셨습니까!"
표중산의 정중한 인사에 무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오래 기다리신 듯합니다."
무영의 말에 표중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 수련은 모두 끝나신 것입니까?"
"일단 마무리는 지었습니다. 앞으로의 서서히 수련하면 되니 이번처럼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영의 말에 표중산이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무영이 보름이나 수련에 빠져 있는 덕분에 처리해야 할 일 몇 가지가 아직도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제가 없어도 충분히 결정을 내리실 수 있으실 텐데, 굳이 제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영은 사실 장원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자신이 없더라도 아무런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면 부담도 줄고, 표중산이나 소명학처럼 뛰어난 사람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표중산은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뇌룡장은 무영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무영이 장원에 더 정을 붙이고, 궁극적으로 홀연히 떠나지 않게 만들 것이다. 표중산이 원하는 것은 오직 그거 하나뿐이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표중산의 말에 무영은 집무실로 향했다.
무영이 움직이자, 함게 있던 세 여인도 따라 움직였다. 표중산은 가장 뒤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어쨌든 그녀들도 뇌룡장의 일에 대해 알 자격은 충분했다.
"정협맹에서 힘을 빌려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표중산이 말했다.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당비연이었다.
"또요? 얼마 전에도 도와줬다고 하지 않았나요?"
당비연의 말에 모용혜와 서하린도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정협맹이 너무 노골적으로 뇌룡장을 이용해 먹는 듯했다. 아무리 인연이 있는 곳이라지만 이건 좀 지나쳤다.
"또 흑사맹과 싸우는 문제입니까?"
무영의 물음에 표중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극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번에 정협맹은 맹의 모든 무사들을 이끌고 나갈 모양이더군요. 아마 마지막 싸움이 될 듯 합니다. 흑사맹 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무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영뿐 아니라 세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모용혜가 나서서 물었다.
"은왕곡은 어떻게 되었죠? 은왕곡 때문에 싸움이 멈췄던 것 아니었나요?"
대외적으로는 은왕곡의 개입으로 싸움이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다고 알려졌다.
아직도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그것을 확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확인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표중산이었다.
"그 은왕곡을 견제해달라는 청을 받아습니다."
"은왕곡을요?"
표중산은 심각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정협맹과 흑사맹이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양측 무사들이 거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고 물러선 듯합니다."
표중산의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인가요? 제가 듣기로는 세 개의 세력이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던데요."
당비연의 말에 표중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저 소문일 뿐입니다."
정협맹과 흑사맹은 필사적으로 소문을 흘렸다. 아직까지 자신들이 건재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특히, 흑사맹은 맹에 소속된 문파들 간의 유대감이 약하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만일 출전한 무사들 대부분이 궤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맹 자체의 존속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얼마 전 장주님의 사형되시는 분으로부터 들은 말로 몇 가지를 유추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유추한 사실을 조금씩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표중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현재 흑사맹 측은 자중지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녹림 때문입니다. 정협맹 역시 무림맹으로 인해 마찬가지 일을 겪고 있습니다."
무영이 놀란 표정을 짓자 표중산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은왕곡은 한 발 물러서서 정협맹과 흑사맹의 힘이 약해지는 걸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무당파에서 적극적으로 나선 덕분에 무림맹 쪽은 조금 괜찮은 듯합니다만......"
무영은 무림맹에서 만났던 청수진인이 떠올랐다. 그가 일을 잘 해준 모양이었다. 잠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무영은 눈을 빛내며 표중산을 바라봤다.
"무림맹을 서둘러 구해야겠군요."
무영의 말을 표중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무림맹이 이대로 은왕의 손에 계속 놀아난다면 앞으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무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은왕이 먼저 손을 쓰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장주인, 혹시 지금 무림맹으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무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표중산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정협맹의 요청에 대한 답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무영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제가 다녀올 때까지 시간을 끄세요.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 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표중산은 그 말에 대한 답을 할 틈도 없었다. 어느새 무영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무영의 집무실에 남은 표중산과 세 여인은 그저 멍한 얼굴로 방금 전 무영이 앉았던 자리만 바라볼 뿐이었다.
무림맹은 터지기 직전의 벽력탄과 같은 상황이었다. 특히 맹주의 집무실은 그 분위기가 더욱 험악했다.
"맹주! 그건 안 될 말이오! 은왕의 목적이 무엇인지 진정 모르시겠소!"
청수진인의 외침에 옥청학은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면, 우리 보고 그냥 죽으란 말이오? 아니지, 무당파는 별 피해가 없으니 상관없다 이거요? 듣기로 무당파의 장문인과 장로 몇 사람이 금제에서 벗어났다고 하던데."
옥청학의 말에 청수진인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눈치를 살피니 옥청학뿐 아니라, 지경복이나 안균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함께 있던 옥청운은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허어, 뇌룡장주가 약이라도 좀 넉넉히 주고 갔다면 좋았을 것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림맹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은왕에게서 벗어나겠단느 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은왕이 정해준 시한이 벌써 다 되어가고 있소. 더 이상은 무리요. 은왕의 금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오."
옥청학이 그렇게 말하며 청수진인을 노려봤다. 청수진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뇌룡장에는 이미 연락을 넣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아직 뇌룡장에 청수진인의 연락이 채 닿지도 않았을 테니까.
'은왕이 설마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이야.'
은왕은 무림맹에 압력을 넣었다. 정협맹을 치라고 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정협맹과 손을 잡고 흑사맹과 싸우라고 종용하던 것과는 너무나 달라진 명령이었지만,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왕의 명을 듣는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우리를 살려둘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소?"
청수진인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말을 꺼냈다. 청수진인이 보기에 은왕이 노리는 것은 무림의 공멸이었다.
하지만 옥청학과 다른 장로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거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진행시킬 이유가 없었다.
"은왕이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한단 말이오? 지금 겉으로 드러난 은왕곡의 힘만으로도 우리와 정협맹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소. 게다가 흑사맹의 뒤에 은왕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소."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실상은 무영의 스승인 천복의 존재 때문에 벌어진 일들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니 혼란이 가중될 뿐이었다.
옥청학은 약간 짜증이 밴 얼굴로 청수진인을 바라봤다.
"은왕의 금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약은 아직 멀었소?"
청수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것이 있다면 이런 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무림맹이 정협맹을 공격한다면, 정체성을 잃게 된다. 세상의 눈이 무림맹을 달리 보게 될 것이다.
'자칫하면 무림맹이 파락호 집단으로 매도당할 수도 있는 일이거늘.'
청수진인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안타까웠다. 무림맹은 정파의 기둥이다.
비록 지난 이십 년 동안은 유명무실했지만, 그 모든 과정을 겪은 지금은 더 튼튼해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물론 그 기반의 상당 부분에 은왕의 입김이 닿아 있었지만.
청수진인은 고개를 들고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을 살폈다. 특히 그들의 눈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두려움인가.'
청수진인은 그들의 눈을 보며 확신했다. 이곳에 모인 모두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은왕의 힘과 금제가 주는 두려움, 그리고 은왕이 과연 자신들을 끝까지 죽이지 않고 데려갈지의 여부를 모르는 데 대한 불안감이었다.
'이보게, 늦었네. 너무 늦었어. 지금 당장 자네가 나타난다면 모를까.'
청수진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무영을 떠올렸다. 이 자리에 무영이 나타난다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같이 밖에서 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청수진인은 마음에 격정이 휘몰아치는 걸 느꼈다. 왠지는 모르지만 묘한 기대감이 일었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하지만 다른 장로들과 옥청학의 반응은 짜증뿐이었다.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라는 걸 모르느냐!"
옥청학의 일갈에 무사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청수진인이 그것을 막았다.
"기다리게!"
무사가 멈칫거리자, 청수진인은 옥청학을 향해 빙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손님이 누구인지 확인은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청수진인의 너무나도 부드럽고 평온한 태도에 옥청학과 다른 장로들은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수진인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져 모두 놀라고 있었다.
청수진인은 일어나서 집무실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무사의 모습이 보였다.
"혹, 손님이 뇌룡장에서 오셨다고 하지 않던가?"
청수진인의 물음에 무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 맞습니다. 뇌룡장주시라고......"
청수진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모시게."
"예?"
"이리로 모셔오란 말일세."
"아, 예. 아, 알겠습니다."
"조금 서둘러 줬으면 좋겠군."
"예, 그, 그리 하겠습니다."
무사는 청수진인의 말에 쏜살같이 달려갔다.
청수진인은 그런 무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 짓다가 이내 돌아서서 궁금함과 못마땅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드디어 금제를 풀 수 있게 되었소이다."
청수진인의 말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청수진인은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맹주와 장로들의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78.저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끄으아아아악!"
"끄어어어어!"
옥청학을 비롯한 장로들은 핼쑥해진 얼굴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무림맹의 수뇌부들이었다. 무림맹 무사단의 단주와 부단주들을 모아서 무영이 건네준 신선단을 먹였다.
"진인, 정말로 뇌룡장주가 준 그 약을 먹으면 금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맞소?"
옥청학이 보다 못해 청수진인에게 물었다.
청수진인 역시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영은 신선단을 잔뜩 만들어 주고 다시 사라졌다. 모든 것은 이제 청수진인이 알아서 해야했다.
'설마 그 고통이 저 정도일 줄이야.'
무영은 신선단을 넘겨주며 청수진인에게 미리 당부를 했다. 신선단을 먹으면 고통이 찾아올 거라고. 하지만 몸에는 별 이상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먹였다. 원래는 옥청학을 비롯한 장로들에게 먼저 먹이려 했는데, 그들이 한사코 거부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은환을 먹은 맹의 고수들에게 먼저 먹였다.
청수진인은 옥청학과 장로들의 표정을 힐끗 살폈다.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몇몇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다.
"대체 언제까지 저러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안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금제를 풀기 위해 이런 고통까지 감수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왕을 믿을 수만 있었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끄응, 이번 일만 아니라면......'
너무나 무리한 요구였다.
은왕의 명은 무림맹의 미래를 송두리째 지우는 일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정협맹의 힘을 깎아먹고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안균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은환의 금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이후도 문제다. 은왕이 그들은 얌전히 내버려둔다는 보장이 없다. 아마 그 이후로도 계속 은왕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것이다. 목숨을 다할 때까지.
"허억, 허억."
"헉헉헉."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고통 가득한 비명소리는 없었다. 바닥을 뒹굴던 무사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얼굴에는 묘한 성취감이 떠올랐다. 그 지독한 고통을 이겨낸 자신이 대견한 듯했다.
"몸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라."
옥청학의 명에 무사들이 저마다 주저앉아 운기조식을 하여 스스로의 몸을 살폈다.
이내 다시 일어난 그들의 눈에 정광이 일었다. 몸이 날아갈듯 가벼웠다. 신선단을 먹은 덕분에 혈맥에 쌓인 탁기의 일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상 없습니다."
무사들 중 대표로 한 명이 나서서 맹주에게 보고했다. 사전에 들었던 대로 은환으로 만든 내공이 모조리 사라진 것 외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옥청학은 보고를 듣고서는 입맛을 다시며 청수진인을 바라봤다. 청수진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맹주께서도 이걸 드셔야 하지 않겠소?"
옥청학은 청수진인이 내민 손바닥 위에 놓인 신선단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크흠. 이상이 없는 건 확인했지만, 금제를 푼 것을 확인하지는 못하지 않았소. 그냥 내공만 태워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어서......"
옥청학은 막상 신선단을 먹으려니 왠지 꺼려졌다. 확실히 금제가 풀리는지 확인도 안 되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특별히 뇌룡장주를 믿을 이유도 없었다.
어쩌면 신선단이라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금제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은가.
"일단 복용하시면 금제에 대한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소.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니 확실하오."
청수진인의 말에 옥청학을 비롯한 장로들은 더 이상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내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선단을 하나씩 입에 넣었다.
"크으으윽!"
옥청학은 눈을 부릅떴다. 보는 눈도 많고 체면이 있어 다른 사람들처럼 바닥을 구르지는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정도로 괴로웠다. 그 괴로움이 끊임없이 솟아나는데, 전혀 면역이 되지 않았다. 점점 더 고통스러워졌다.
다른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몸서리칠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체면을 지키느라 바닥을 구르지 않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이미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지 오래였다.
청수진인은 신선단을 복용한 맹주와 장로들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급한 불은 끈 것이다.
무림맹이 전체적으로 조금 약해지긴 하겠지만 더 이상 은왕에게 끌려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청수진인은 신선단을 가득 넘기고 서둘러 돌아간 무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에게 있어 무영은 은인이었다.
"무량수불."
나직이 진언을 읊조린 청수진인이 무영이 사라진 방향을 가늠해 돌아선 후, 그의 마음을 가득 담아 정중히 반장한 채 허리를 숙였다.
옥청학은 머쓱한 표정으로 정로들을 둘러봤다. 확실히 신선단을 먹고 그 모진 고통을 이겨내고 나니 청수진인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금제는 분명히 사라졌다.
"크흠. 이제 은왕의 금제에서 벗어났으니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졌소."
옥청학의 말에 장로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제를 풀긴 했지만 은환으로 얻은 힘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예전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뿐 아니라 무림맹의 웬만한 고수들이 모두 그랬다.
옥청학과 장로들은 자신들이 속한 문파에 지급으로 신선단을 보내 은환을 복용한 모두가 그것을 복용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아무튼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끈 셈이니 이제야 잠시 안도할 수 있었다. 옥청학은 조금 느긋한 심정으로 장로들을 둘러봤다. 가만히 장로들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슬며시 딴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뇌룡장주가 영단을 만들 수 있었지?'
은환의 금제에 당하고 있을 때는 어차피 가질 수 없는 힘이었기에 애착이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은환의 힘을 잃고, 금제도 사라졌다.
옥청학은 속으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며 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실질적으로 우리 무림맹은 십여 년을 다시 퇴보한 것과 같소. 앞으로는 더 자중하고 힘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만 하오."
옥청학의 말은 당연했다. 하지만 장로들은 그 말을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말은 쉽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과연 은왕이 가만히 있겠소? 우리가 가만히 힘을 키울 시간을 주겠소? 생각해 보면 은왕은 우리에게 투자만 하고 얻은 것은 하나도 없지 않소."
은왕이 구대문파와 무림맹에 투자한 것은 비단 은환만이 아니다. 그들의 성장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까지 않았다.
이십 년 전 구대문파와 무림맹은 거의 몰락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은왕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고 지금의 무림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무림맹을 은왕이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갖지 못할 바에는 모조리 부숴 버리른 게 은왕이다. 아마 무림맹 역시 그렇게 될 공산이 컸다.
옥청학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거요. 그러니 우리는 조금 더 빨리 힘을 키워야 하오. 은왕이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지금이 기회요."
장로들이 의아한 눈으로 옥청학을 바라봤다. 빨리 힘을 키울 수 있으면 좋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옥청학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뇌룡장주가 영단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잊었소?"
옥청학의 말에 장로들의 안색이 환해졌다. 영단을 만들 수만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더구나 뇌룡장주는 영단을 만드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고 한다.
"정협맹이 조금만 은왕곡의 시선을 끌어주면 충분히 승산이 있소. 어차피 은왕이 득세하면 뇌룡장도 무사하지는 못할 터, 뇌룡장주도 내 제안을 외면하지 못할 거요."
옥청학의 자신 있는 말에 장로들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청수진인만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을 뿐이다.
청수진인은 옥청학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 혼자서 바꾸거나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청수진인의 한숨소리가 장로들의 소란에 묻혀 버렸다.
무영은 뇌룡장에 돌아오자마자 표중산을 찾아 자신의 생각을 알렸다.
은왕곡을 자신이 막기로 결정한 것이다. 무영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뇌룡장의 주요 인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무영은 갑자기 집무실로 몰려론 사람들을 보며 잠시 당황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그들의 눈동자에 가득한 의지가 무영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결정났습니다. 모두 장원에서 쉬고 계십시오."
무영의 말에 강악과 당백형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혼자서 은왕곡을 어떻게 막아? 네놈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강악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치자, 당백형과 엽광패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어떻게든 무영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이런 큰 싸움이라면 자신들의 힘을 최대한 발휘해 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서하린과 모용혜, 당비연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무영의 말도 안 되는 신위를 목격했다.
운남에서 빙궁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무영이 보여줬던 모습은 말 그대로 뇌신(雷神)이 강림(降臨)하는 듯했다.
'인간 세상에 강림한 뇌신이 천벌을 내리는 모습이었지.'
그녀들은 무영이 홀로 은왕곡을 막아선다면 상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심 무영이라면 충분히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만큼은 절대 장주님의 명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말리지 마십시오."
표중산의 단호한 말에 옆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무영과 함께할 생각이었다.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영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혼자 가겠습니다."
무영의 표정이 너무나 진중해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영의 단호한 의지가 가슴에 와 닿았다. 하지만 의지는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장주님!"
표중산이 또 뭔가를 말하려는 찰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금령이었다.
금령이 나서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방 안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금령은 입을 다문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방해되기 때문이냐?"
금령의 물음에 사람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금령은 그들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직 힘을 제대로 조절할 수 없느냐?"
무영이 그제댜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질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하지만 뇌기는 그렇지 않았다. 제대로 힘을 쓰게 되면 적아를 구분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금령의 말은 들은 서하린은 운남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무영은 굳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사방으로 벼락을 쏟아냈다. 적들이 막 담을 넘는 찰나였기에 시기도 딱 맞아 떨어졌다.
'그럼 그게......'
그것은 세 여인과 빙궁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서하린을 비롯한 세 여인은 당시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전 기다릴게요."
서하린이 가장 먼저 말했다. 모두의 눈길이 서하린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놀람이 어려 있었다. 가장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우길 거라 예상한 사람이 가장 먼저 포기했으니 놀랄 만했다.
서하린이 그렇게 말하자, 모용혜와 당비연도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도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일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굳었다.
세 여인이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금령은 세 여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여자들이군."
그렇게 말한 금령은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사람들도 몇 보였다.
"그렇게도 너희들의 장주가 미덥지 못한가?"
금령의 말에 몇몇이 발끈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언제 장주님을 못 미더워 했습니까. 다만 우리도 도움이 되고자......"
금령이 한 손을 들어올려 소명학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금령의 몽에서 일어나는 칼날 같은 기세에 소명학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너희들은 이곳을 지키는 게 가장 큰 도움이다."
금령의 말에 몇몇이 또 발끈했다. 하지만 금령은 그들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그곳에는 내가 따라간다."
모두의 입이 다물어졌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금령의 강함을 알고 있다. 금령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덤벼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금령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얘기 끝났으면 모두 돌아가도록."
금령의 말에 대부분이 미적거리며 돌아섰다. 금령의 기세를 마주 대하고도 그의 말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돌아가자, 무영이 난감한 표정으로 금령을 바라봤다.
"그렇게 보지 마라. 난 그냥 따라가기만 할 뿐이니까. 네 힘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려는 것뿐이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은왕곡을 우습게 보지 마라."
무영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남궁무학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이 생각했던 대로 풀리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엇나가던 무림맹의 태도가 다시 협조적으로 바뀌었고, 뇌룡장이 은왕곡을 막아 주기로 했다. 이제 흑사맹을 박살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후우, 너무 길었어."
흑사맹과의 싸움이 너무 길어져 정협맹은 현재 피혜해질 대로 피혜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서둘러선 안 된다. 서두르다가는 지금까지 들인 공이 모조리 무너질 수도 있다.
"신중해야재. 암,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남궁무학이 그렇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누군가 맹주의 집무실로 다가왔다. 남궁무학은 기척을 느끼고 입가에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지만, 지금처럼 정협맹이 바닥으로 추락했는데 웃음기를 함부로 보일 수는 없었다.
"맹주, 외당주요."
서문공복의 목소리가 들리자 남궁무학은 그제야 약간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서문공복이 안으로 들어섰다. 서문공복의 차가운 표정을 확인한 남궁무학이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어찌 사람이 저렇게 변하는 건지. 하긴, 세가가 완전히 무너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그래, 무슨 일이오?"
"곤란한 일이 벌어졌소."
"곤란한 일?"
남궁무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간신히 수습해 놨는데 또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절로 한숨이 새 나왔다.
"후우, 무슨 일인지 한번 들어봅시다."
"상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
서문공복의 말에 남궁무학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지금 고작 일개 상인들의 움직임에 신경 쓰라는 말이오?"
"일개 상인이 아니오. 정협맹 휘하에 있던 상인들이오."
그제야 남궁무학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정협맹 휘하에 있던 상인들이라면 정협맹의 사업체를 관리하는 상인을 말한다. 그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앞으로의 일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대체 그들이 어떻게 움직인단 말이오?"
"우리 무사들을 무시하고 있소. 마치 정협맹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소."
"그게 무슨 말이오? 감히 그놈들이 죽고 싶지 않은 바에야......!"
"좀 더 알아보니, 그들의 뒤에 다른 세력이 있는 듯하오."
남궁무학이 이를 갈았다.
"으드득, 그러니까 다른 세력이 우리를 건드리고 있다 이거로군. 그래, 어떤 놈들이오? 힘에는 힘으로 맞서 주는 게 강호의 도리지."
서문공복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오. 그들은 정당하게 사업체의 권리를 인수했소."
남궁무학의 얼굴에 핏기가 살짝 가셨다. 등줄기를 짜릿한 뭔가가 훑고 지나갔다.
"그, 그렇다면......!"
"아무래도 채금상단 그놈들이 일을 벌인 모양이오."
애초에 채금상단을 부추겨 정협맹의 사업체를 뇌룡장에 팔아먹으라고 지시한 것이 남궁무학과 서문공복이었다. 그 대가로 황금을 무려 삼만 냥이나 받지 않았던가.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나면 나중에 뇌룡장이 가진 사업체들을 회수할 작정이었다. 그들이 가진 권리서가 위조라고 우기면서 말이다.
"대체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오!"
"나도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삼만 냥이나 되는 금을 받았는데 계속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고 말이오. 지금 우리는 전쟁 중이지 않소."
"끄응."
남궁무학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서문공복의 말이 옳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흑사맹과의 전쟁에서 이겨도 문제 아닌가. 거점이 완전히 붕 뜨게 생겼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은밀히 움직여서 다시 빼앗으면 어떻겠소?"
서문공복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방금 남궁무학이 한 말은 정파로서 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선을 넘겠다는 소리였다.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다면 그게 사파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사실 서문공복으로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건 상관없었다. 서문공복이 원하는 것은 새로운 서문세가였다.
자신이 죽지만 않으면 가능했다. 정협맹이야 망하건 말건, 혹은 사파 무리로 전락을 하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남아 있는 게 나으려나.'
그렇게 생각한 서문공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좀 더 알아보겠소. 그들의 뒤에 도사린 세력이 무엇인지."
서문공복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남궁무학은 서문공복이 집무실에서 나가자,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떻게 키운 정협맹인데!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으드득."
남궁무학은 이를 갈며 눈을 빛냈다. 섬뜩한 살기가 뿜어져 나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무영은 뇌룡장의 정문을 나섰다. 무영 옆으로 금령이 천천히 따라붙었다.
"오라버니."
서하린의 부름에 무영은 몸을 돌렸다. 정문 안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가장 앞에 서 있는 것은 세 여인이었다.
그 뒤로 강악과 당백형이 보였고, 그 뒤에 나머지 사람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었다.
무영은 그 모든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무영은 가장 앞에 서서 애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 여인을 쳐다봤다. 무영은 그녀들에게 안심하라는 듯 한 번 빙긋 웃어준 후, 몸을 돌렸다.
무영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금령이 잠시 무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뇌룡장 사람들을 바라봤다. 금령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행여 몰래 쫓아오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은왕을 우습게보지 마라. 그가 뇌룡장을 멀쩡히 내버려 들 거란 생각도 버려라. 우리가 없는 틈을 타서 반드시 온다."
금령은 그렇게 말하고 당비연을 바라봤다. 당비연은 금령과 눈을 마주치자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금령은 그런 당비연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라."
"예? 제, 제가요?"
당비연은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 하지만 이내 손을 뻗어 금령이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작은 구슬이었다.
"섬뢰에 장착해라.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섬뢰를 적에게 쓰지 말고 하늘에 쏴라."
금령의 말에 당비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금령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곳에 있는 누구도 금령이 어떻게.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지 못했다. 강악과 당백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괴물이 따로 없구나. 그나저나 저런 괴물도 꺼려하는 은왕이라는 작자는 대체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당백형의 중얼거림을 들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당비연만은 소매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쇠막대를 만지작거렸다.
'대체 내게 섬뢰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그보다 이 쇠구슬이 대체 무엇이기에 섬뢰에 장착하라는 걸까?'
당비연은 상념에 잠겼다가 이내 섬뢰를 꺼냈다. 그리고 손에 든 쇠구슬을 섬뢰로 가져갔다.
놀랍게도 섬뢰 중간쯤에서 쇠구슬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당비연은 놀란 얼굴로 그곳에 쇠구슬을 갖다 댔다.
딸깍.
쇠구슬은 마치 원래 그곳에 있어야 할 것처럼 딱 맞았다. 구멍에 완전히 빠지지도 않았고, 아예 안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섬뢰를 이리저리 흔들어 봤지만 구슬은 다시 빠지지 않았다.
"호오, 놀랍구나."
당백형의 말에 당비연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당백형은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인자하게 웃었다.
"섬뢰는 원래 우리 당가의 것이 아니다. 잠시 당가에 몸을 의탁했던 장인이 만든 것이다."
당백형이 말은 상당히 놀라웠다. 세상에 어떤 장인이 있어 당가에 암기를 제작해 준단 말인가. 당가의 암기 제작술은 이미 그 자체로 천하제일이었다.
"그 사람 덕분에 당가의 암기 제작술이 한 차원 높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섬뢰는 그 사람이 당가에 준 선물이다."
"대체 그가 누구인가요? 유명한 사람인가요?"
당백형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그가 천기비록(天氣秘錄)이란 걸 완성하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 뿐이었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당가에서 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들이는 일은 거의 없을 텐데요."
모용혜의 말에 당백형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대단했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어. 비록 내가 아주 어릴 때여서 제대로 진면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사람이었지."
당백형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아무리 당비연이 졸라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결국 뇌룡장 사람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쉬움을 담아 무영이 사라진 방향을 한 번 쳐다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무영은 동정호 근처에 와서 걸음을 멈췄다. 이제 걷는 법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러 예전보다 훨씬 빨라져, 뇌룡장을 떠난 지 한 시진정도 만에 동정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제대로 배웠다."
금령은 상당히 감탄했다. 아직 자신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한 시진 만에 무한에서 동정호까지 달려 갈 수는 있다.
제대로 경공을 펼치면 그보다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영처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금령은 내심 어쩌면 사부보다 무영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부와 함께 걸을 때도 이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던 듯했다. 물론 사부가 모든 힘을 발휘한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말이다.
"저쪽이로군요."
무영은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많은 기운들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적어도 수천에 이르는 무사들의 기운이었다. 무영은 기감을 확장했다. 그들은 세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저쪽이 정협맹이고, 이쪽이 은왕곡이로군요."
금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쪽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들이 몰려오고 있다."
무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무림맹이로군요."
"언제 움직일 생각이냐?"
정협맹이 요구한 것은 은왕곡을 막아 달라는 한 가지였다. 뇌룡장이 은왕곡을 막는 사이 싸움을 결판낼 계획이었다.
무영이나 금령이 생각하기에는 무모한 계획이었지만 뭔가 다른 생각이 있을 거라 믿었다.
"일단 정협맹 쪽으로 가서 알리고 그들과 협의를 해야 할 듯합니다."
그 말에 금령이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짓이다. 차라리 시간을 정해 그냥 은왕곡을 치는게 났다."
금령의 말에 무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얼마나 강한지 그들이 아느냐? 정협맹 놈들에게 힘자랑이라도 할 생각인 것이냐? 뇌룡장에서 온 것이 너 혼자라고 하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금령의 말에 그제야 무영은 자신이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령의 말이 옳았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 가죠."
무영의 말에 금령이 희미하게 웃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중천에 뜬 해가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싸우기 좋은 날이군."
금령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둘러 무영의 뒤를 쫓았다.
"결국 맹주님은 오시지 않았군."
모용강의 말에 서문공복이 차갑게 웃었다.
"맹을 지킬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흑사맹과는 여러모로 다르지."
서문공복은 그렇게 말하며 흑사맹측 진영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새로 흑사맹주가 된 혈수사 조양이 기세를 마구 흩뿌리며 당당히 서 있었다.
혈수사 조양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흑사맹 하남지부의 군사역할을 하다가 맹주가 된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능력이 있으니 맹주가 되었겠지만, 그래도 예전 마염공 동방극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뭐, 은왕곡 놈들만 없다면야...... 별것 아니긴 하지. 혈마맹도 이젠 더 이상 힘을 못 쓰니......"
현재 흑사맹은 고수의 수가 현저히 적다.
녹림을 삼키긴 했지만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는 바람에 위태롭게 흔드릴고 있었다. 이 상태로 정협맹과 무림맹의 협공을 받으면 그대로 무너질 공산이 컸다.
모용강도 서문공복도 그래서 이번 싸움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은왕곡이 변수일 뿐이었다.
'아직 정체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으니......'
모용강은 걱정스런 눈으로 은왕곡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모용강 정도 되는 고수의 눈은 그곳을 돌아다니는 자들의 얼굴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음?"
모용강은 은왕곡을 바라보다가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왕곡이 술렁이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이 바쁘게 뛰어다녔고, 여기저기에서 검광이 번득였다.
꽈르릉!
뇌성벽력과 함께 벼락이 떨어지는 광경이 보였다. 그제야 모용강의 뇌리에 뇌룡장이 떠올랐다.
"이런! 서둘러야겠구나! 전원 전투 준비!"
모용강의 외침에 정협맹이 깨어났다. 사방이 술렁이며 무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대열을 정비했고, 언제라도 돌격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다!"
모용강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흑사맹 쪽을 바라봤다. 그들 역시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협맹에 비해 상당히 움직임이 어수선했다. 지금 돌격하면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듯했다.
"돌격!"
모용강은 그렇게 외치며 경공을 전개했다. 쏜살같이 쏘아져 나가는 모용강의 뒤로 수천의 정협맹 무사들이 달려 나갔다.
서문공복은 그 와중에 차가운 눈으로 정협맹과 흑사맹, 그리고 은왕곡 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서문공복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무영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저 은왕곡 무사들이 진치고 있는 곳에 다가가기만 했을 뿐이었다. 한데 은왕곡 무사들, 흑귀들은 무영을 발견하자마자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쩌저저저정!
무영의 주먹이 눈부신 속도로 움직였다. 흑귀들의 눈에는 무영의 주먹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일단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니, 사방을 주먹으로 장악해 버렸다.
흑귀들은 달려드는 것보다 배는 빠르게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무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흑귀들은 아무리 큰 부상을 입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덤벼들었다.
자연스럽게 무영의 주먹에 조금씩 더 힘이 들어갔고, 결국 나중에는 주먹 한 방에 가슴이 박살 날 정도가 되었다.
흑귀들은 가슴이 움푹 들어가 폐가 터진 상황에서도 비척거리며 일어나 무영에게 달려들었다.
그제야 무영은 지금의 상황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무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금령을 바라봤다. 금령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팔짱까지 낀 채로 무영이 흑귀들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아압!"
꽈르르릉!
무영은 온몸으로 뇌기를 뿜어냈다. 주변에 있던 흑귀들이 뇌기에 휩싸여 사방으로 나가 떨어졌다.
무영을 중심으로 반경 십여 장이 텅 비어 버렸다. 그 안에 있던 흑귀들이 모조리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무영은 가만히 서서 흑귀들의 상태를 살폈다. 흑귀들은 언제 벼락을 맞았느냐는 듯 다시 일어나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마치 짐승 같았다.
'마치 이지를 상실한 것 같지 않은가.'
흑귀들은 그저 덤비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생전에 무공을 익혔던 기억은 있는지 검을 휘두르는 거나 몸놀림은 날카롭고 위협적이었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공격 일변도인 무사들은 전혀 두렵지 않은 법이다.
'내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크아아앙!"
흑귀 한 명이 포효했다. 마치 맹수가 싸우기 전에 전의를 다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흑귀 하나가 괴성을 지르자, 나머지 흑귀들도 저마다 소리쳤다.
"크아아아아아!"
그 소리에는 내력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만일 이 자리에 무영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면 낭패를 면치 못했으리라.
무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피부를 가르는 듯한 살기가 밀려왔다. 무영은 기감을 퍼트려 흑귀들의 상태를 살피고자 했다.
'어둡다.'
흑귀들의 기운은 어두웠다. 너무나 어두워 제대로 아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죽어가는 사람 같았다. 아니, 죽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생기는 분명히 느껴졌다. 그들의 어둠은 깊고 무서웠다.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무영은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무영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천천히 주먹을 내질렀다.
우르르르.
무영의 주먹을 중심으로 뇌기가 휘몰아쳐다. 아니, 뇌기뿐 아니라 세상 모든 기운이 모여들어 휘몰아치는 듯했다.
"하아압!"
무영의 기합과 함께 주먹이 끝까지 뻗어나갔다.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렸다.
꽈과과광!
무영은 주먹을 내지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무영의 주먹 끝을 시작으로 수십 장이 초토화되었다. 그 사이에 있던 흑귀들은 형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무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영은 주먹을 회수하고 천천히 걸었다. 사방에 퍼트린 기감에 수많은 살기가 잡혔다. 그리고 그 살기들 틈에 공포에 질린 기운 하나가 숨어 있었다.
무영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백여 명의 흑귀들이 보였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눈에서 사나운 기운을 내뿜으며 무영을 향해 살기를 보냈다.
무영은 그들 틈에 있는 멀쩡한 사람 하나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쉬익!
빠지직.
무영의 몸이 공간을 갈랐다. 무영이 서 있던 자리에 뇌기가 번득였다. 무영은 순식간에 흑귀들 틈에 몸을 가리고 있던 흑령과 자신과의 공간을 없애 버렸다.
흑령은 놀란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눈도 깜짝이지 않았는데 무영이 앞에 있었다. 실로 귀신도 울고 갈 정도의 신법이었다.
흑령은 도망가기 위해 발끝에 내력을 모았다. 그것을 폭발시키기만 하면 어떻게든 도망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곳에는 백 명이 넘는 흑귀들이 있으니 그들을 움직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펑!
내력이 폭발했다. 하지만 흑령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어느새 무영이 그의 목을 쥐고 있었다. 흑귀들은 흑령이 붙잡혔는데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크윽!"
"저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영의 물음에 흑령이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무영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영의 능력은 흑령 열이 덤벼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흑령은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이 없었다. 무영은 흑령의 목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다.
파지직.
뇌기가 흑령의 목으로 스며들었다. 흑령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따끔따끔한 고통이 목을 타고 온몸으로 번졌다. 참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었다.
"크으윽! 쳐라!"
흑령은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흑귀들에게 명령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에 서 있던 흑귀들이 눈을 번득이며 무영을 향해 돌아섰다.
"크아아앙!"
흑귀들이 포효했다. 그들은 검ㅇ르 휘둘러 무영을 공격했다. 흑령이 다치건 말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마구 검을 휘둘렀다.
무영은 흑령을 이대로 죽일 수 없어서 재빨리 몸을 피했다. 마치 물로기가 물을 거슬러 오르듯 부드럽게 흑귀들 틈을 빠져나갔다.
흑령은 자신을 쥐고도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무영에게 질려 버렸다.
"크으윽."
흑령의 입에서 신음이 새 나왔다. 그리고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무영은 흑귀들 틈을 빠져나다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채 손을 쓰기도 전에 흑령의 목숨이 날아가 버렸다. 아무리 무영이라도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었다.
흑령의 입에서 시커먼 핏물이 흘러나왔다.
무영은 흑령을 바닥에 내려놨다. 흑령의 입에서 흘러나온 독혈이 그의 입 주변과 목 근처를 치직대며 녹여 버렸다. 실로 지독한 독이었다.
무영은 그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단호하게 목숨을 내버리는 흑령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개를 몇 번 저은 무영은 달려오고 있는 흑귀들을 바라봤다. 남은 흑귀는 백 명이었다.
'천막 수에 비해 흑귀들이 너무 적다.'
은왕곡이 진치고 있는 곳의 천막만 보면 적어도 이천은 넘는 인원이 머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다 합해 이백도 채 되지 않는 듯했다.
고작 이백의 흑귀로 정협맹과 흑사맹의 전력을 이끌어낸 것이다.
"크아아앙!"
무영은 흑귀들의 포효를 들으며 상념을 접었다. 일단 저들을 처리해야 했다. 어렵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적의 수가 훨씬 적었다. 무영은 주먹에 뇌기를 모으며 천천히 내질렀다.
우르르르.
콰과과광.
남은 흑귀들을 향해 벼락이 쏟아져 나갔다. 강렬한 뇌전 다발이 흑귀들을 휘감았다.
빠지지지직!
흑귀들은 그대로 새까맣게 타버렸다. 흑귀들은 그렇게 까맣게 타서 쓰러지고 나서도 몸을 꿈틀거렸다. 실로 놀라울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대단하군."
무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은왕곡이나 흑사맹은 악인들이 뭉쳐 만든 집단이다.
그들이 세상에 끼친 패악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 자들을 처단했음에도 무영은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만히 서서 흑귀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무영에게 금령이 천천히 다가갔다.
"마음을 좀 더 단련해야겠군."
금령의 말에 무영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금령은 바닥에 흩어진 흑귀들의 잔해를 무심히 쳐다봤다.
"어차피 죽었어야 할 자들이다. 아니, 이미 죽은 거나 다름 없던 자들이다. 그러니 네가 마음 쓸 필요 없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놈들 몸에 남아 있던 건 그저 혈기(血氣)일 뿐이다. 생명력이 아예 없었다."
"그럴 리가......"
무영은 믿을 수 없었다. 무영이 살피기에 분명히 생명력이 있어다. 하지만 금령은 단호했다.
"네가 잘못 알았다. 아마 감각이 둔한 탓이겠지."
혈기는 말 그대로 피의 기운이다. 마기에 더 가깝지만 피에서 나온 기운이기에 잘못하면 생명력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혈왕과 관계되었을 수도 있다."
혈왕이라는 말에 무영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혈왕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아마 혈교와 관계된 일인 듯헀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이놈들이 그 계획의 일환인 것 같다."
무영은 눈을 빛내며 금령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금령은 무영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혈교의 강시를 만들기 위한 재료일지도 모르지."
무영이 눈이 커졌다.
어찌 살아 있는 사람을 재료로 강시를 만든단 말인가. 이미 죽은 시체를 가지고 만들어도 용서하기 어렵거늘 산 사람으로 만든다니 절대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나저나......."
금령은 고개를 돌려 정협맹과 흑사맹이 싸우는 쪽을 바라봤다. 그들은 정말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얼필 보면 백중세를 유지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흑사맹 쪽이 조금씩 밀리는 중이었다.
처음에야 머릿수로 밀어붙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수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정협맹과 무림맹의 고수들이 점차 활개를 치면서 흑사맹과 녹림을 압도해갔다.
"그래도 쉽게 끝날 싸움은 아니군."
무영도 그 말에 동의했다. 무영은 더 이상 정협맹과 흑사맹의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다. 지금 무영의 머릿속은 은왕과 혈왕, 그리고 그들이 만든다는 강시에 대한 걸로 꽉 차 있었다.
"어쩌면 여기서 죽은 흑귀들은 운이 없는 놈들이었는지도 모르겠군."
금령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막이 잔뜩 쳐진 곳을 바라봤다. 이곳에 있던 흑귀들의 역할은 아마 오늘까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정협맹의 전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아마 철수하기 직전에 무영과 마주쳐 싸운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주먹질 두 번에 흑귀 이백을 물리치다니......'
금령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예상보다 수가 적어서 무영의 실력을 완전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금령은 씨익 웃었다.
'재미있군. 과연 은왕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그리고 저 녀석이 과연 혈왕을 상대해 이길 수 있을지도 궁금하군. 재미있어."
"이제 뇌룡장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래야겠지. 어쩌면 그쪽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니까."
금령은 그렇게 말하며 무한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령이 바라보는 것은 무한의 하늘이었다. 만일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당비연이 섬뢰를 하늘로 날릴 것이다.
'내가 준 뇌구(雷球)를 장착했다면 여기까지 날아오겠지.'
금령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품에서 작은 철패 하나를 꺼냈다.
철패의 표면에 순간적으로 뇌기가 일렁였다. 지금부터는 그것을 꺼내 놓고 다녀야 했다.
무영은 금령의 손에 든 철패를 힐끗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자 금령이 턱으로 천막들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들을 치우고 가는 게 좋을 거다."
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막들은 은왕곡이 이곳에 있다는 표식이다.
정협맹이 휘둘린 이유가 저 천막들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 은왕곡이 보여준 힘이 그들의 눈을 가리긴 했지만.
손을 슬쩍 들어올린 무영은 단전의 뇌기를 움직였다.
우르르릉!
은은한 뇌성이 울렸다. 무영의 손에 새하얀 뇌기가 모여들었다.
꽈르르릉!
벼락이 쏟아져 나갔다. 그 벼락은 수백 줄기로 갈라지며 천막들 전체를 뒤덮었다.
화르르륵!
벼락이 스치고 지나간 천막에 불이 붙었다. 수천 명을 아우를 수 있는 천막들이 모조리 불타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금령은 그 광경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정도라면 흑귀 수백이 달려들어도 단숨에 처리할 수 있을 듯했다.
'물론 은왕이나 혈왕 정도 되는 고수가 끼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금령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앞으로의 일이 정말로 기대된다는 듯이.
접형맹과 흑사맹의 싸움은 결국 정협맹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흑사맹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도망쳤기 때문이다.
특히 혈수사 조양을 잡지 못한 것은 정협맹의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번 싸움으로 녹림은 전멸하고 말았다. 흑사맹도 거의 괴멸이나 다름없는 피해를 입었다.
물론 아직 참여하지 않은 사파가 많이 있기에 무사를 더 충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흑사맹은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이미 몰락한 흑사맹에는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사파들은 그런 흑사맹을 따를 정도의 의리를 가지지 않았다.
정협맹과 무림맹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수의 무사가 죽거나 다쳤다. 비록 승리를 하긴 했지만 피해가 너무 극심했다.
무림맹측의 무사들은 장로급을 제외한 대부분을 잃었다.
실로 뼈아픈 피해였다. 그렇지 않아도 힘을 잔뜩 잃었는데, 이런 피해까지 입었으니 앞으로 무림맹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정협맹의 피해는 더 심각했다. 정협맹은 맹에 속한 무가들에서 무사들을 잔뜩 지원받았다.
그렇게 지원받은 무사들은 모두 잃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은 장로급 고수들과 무림맹 소속 무사단의 고수들뿐이었다.
이래서는 이겨도 이겼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용강은 피곤한 얼굴로 남아 있는 정협맹 무사들을 바라봤다. 모두 피와 피로에 절어 비틀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서문공복이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장로들도 보였다. 장로들 중 몇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목숨을 잃은 듯했다.
'피해가 너무 크구나.'
이건 너무 심했다. 이 정도 피해라면 정협맹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었다.
이번엔 모용세가에서도 상당수의 무사를 보냈다. 살아남은 모용세가 무사들은 어떻게든 다시 세가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가에서 온 무사들 역시 돌아갈 것이다. 어쨌든 흑사맹은 이제 끝났다.
더 남아서 정협맹의 힘을 키우는 것보다 세가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나마도 피해가 커서 돌아갈 무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후우, 정말로 큰일이구나."
모용강의 푸념을 들은 서문공복이 차갑게 웃었다.
"싸움도 끝났으니 이만 맹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이 피비린내 나는 곳에서 쉬었다간 몸이 더 악화될 거요."
서문공복의 말에 모용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갑니다."
정협맹에서 온 무사들은 무한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돌아가는 도중에 각 세가나 무가에서 증원한 무사들은 중간쯤에서 각각 본가로 갈라졌다.
그렇게 이러저리 갈라지고 나니 결국 정협맹으로 돌아간 무사는 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거의 몰락에 가까웠다.
무림맹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무림맹은 이번 싸움에 맹주까지 움직였다. 그 이유는 뇌룡장에 들러 무영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남은 무사의 수가 너무 적었다. 무림맹으로서도 상당히 무리를 해서 끌고 온 무사들이었는데, 그 대부분을 잃었으니 앞으로 그 힘을 되찾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서서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첫댓글 ㅎ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즐감
즐독...감사...꾸벅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