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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발 집필이지만 개성 관광객들에게 도움되길” <작가의 말> ‘이병태의 개성이야기를 연재하며’
이병태 (이병태치과의원 원장)
치과군의관 시절(1970년) 앰뷸런스를 타고 최전방지역에서 대민(對民) 진료를 했고 백마고지가 보이는 GP에 가서 근무자들에게 발치(拔齒)를 하며 순회진료를 했습니다. 이것이 저에겐 지리적으로 북한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큰 사건이었습니다.
35년이 지났습니다.
치과진료를 통한 교류는, 중국(길림성 연변 제2인민병원 구강과)과는 10년이 넘었으며 북측과는 꾸준히 접촉을 시도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여러분. 이 ‘개성이야기’는 돌발 집필입니다. 2003년 통일뉴스에 연재한 ‘방북기’는 더 더욱 돌발 집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평양과 개성은 도저히 밟을 수 없는 에베레스트나 남ㆍ북극 같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1990년)도 금강산(2000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산과 등산을 즐겨온 저는 평생 백두산, 금강산을 오르거나 볼 기회가 전혀 없을 것으로 확신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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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하류 건너편 개성 조강리 모습 [사진 - 이병태] | | 저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한강하류 건너편 개성땅 조강리(북측)를 봅니다. 일찍이 고성(남측) 통일전망대가 일반에게 공개되기 전에, 그곳(OP)에 올라가 금강산을 바라본 후 수시로 가 보곤 했습니다. 동강난 조국 강산(江山)이 안타깝고 그리워서였습니다.
그런데 백두산은 비록 중국땅을 통해 밟았지만 10회가 넘도록 올랐고 금강산도 3회나 다녀왔으니 꿈만 같습니다. 또 평양도 개성도 가 보았습니다.
금강산도 육로로, 개성 평양도 휴전선 철조망 사이를 남북이 허락한 가운데 갔다 왔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 글도 그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10시간도 체류하지 못한 개성에 관해 ‘개성이야기’를 쓰자니 ‘코끼리 다리만 만진 격’이 되겠습니다.
서울과는 달리 밤이면 캄캄하고 손들어 잡아타는 택시와 주유소가 없다는 식으로만 쓴다면 흥미도 관심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개성이야기’ 연재 직전(2005. 7. 16)에 남측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과 현대아산 김윤규 부회장이 북측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 후 ‘백두산ㆍ개성ㆍ내금강 관광에 관한 8ㆍ15 실현 발표’는 막연한 기대가 실제 상황으로 전개되는 아주 반가운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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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 가면 북측 안내원 리정수 형을 또 만나고 싶다는 필자(왼쪽) [사진 - 이병태] | | 개성관광이 실현되면 이 글이 개성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특히 필자도 첫팀으로 가서 북측 안내원 리정수 형(兄)을 또 만나면 좋겠습니다.
이번 통일뉴스의 청(請)으로 연재되는 이 글에 강호제현(江湖諸賢)의 너그러운 시선을 부탁드립니다.
2005년 7월
이병태 拜上
<이병태 약력> |
이병태는 1942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67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 동 부속병원 보철과에서 인턴ㆍ레지던트를 마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ㆍ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수필가(월간 현대문학 문인주소록 등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산악회 회장, 한국산서회 회장, 한국애서가 클럽 부회장 역임. 현재 이병태치과의원 원장, 월간 치과연구 발행인ㆍ편집인, 서울대학교 동창회 이사, 교통친절봉사단 고문, 대한치과의사협회회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대한치과의사학회 명예회장, 중국길림성 연변제2인민병원 명예원장, 서울대학교 대학원 보철학전공 동문회장, 금강산사랑운동본부 공동대표, 경희대학교 치과대학과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출강(치과의사학)하고 있으며, 1987년에는 치과의료 문화상(대한치과의사협회), 1991년에는 제1회 교통봉사상 특별상(서울신문ㆍ교통부), 2000년 제8회 공로대상(서울특별시치과의사회)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치과보철기공학>, <치과보철용어해설집>(공저) <임상치과도재학>(역서), (편) <치주과학용어해설집>(공저), <치과의학사전>, <서울특별시치과의사회 會史>(편ㆍ편찬위원장), <재미있는 치의학역사산책>, <한국 근ㆍ현대 치의학의 역사박물전>(편ㆍ편찬위원장), 치과영역 논문 17편 수필집 <깍두기로 통하는 나> 중국기행 <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 등산수필<깍두기의 설악산 식사당번> 실록 <우리는 신협을 이렇게 세웠다. 그리고 나는 이런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회갑기념 <이대로 저대로 제대로> 알프스 책 <마터호른 이야기>(번역) 현재 <이치의학사전>(가제, A4 2500쪽 이내) 8교중. |
1. 지명풀이 = 개성, 송도 지명풀이와 판문점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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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로도 불리는 개성. [사진 - 이병태] | | ☞ 개성/지명풀이
개성을 한자로 開城으로 쓴다. 이 개성은 995(고려 성종14)년에 開城府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開는 ‘새로 시작한다’는 뜻이 있는데 이것을 보면 개성은 새 서울, 새 수도 그리고 새로 시작되는 왕도(王都)임이 확실하다.
開자의 뜻은 개천절(開天節)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고려 개국(開國)부터 태조 王建이 開州(개주)라고 하였고 그 후 960(광종11)년에 開京이라 했다. 開자는 고려와 깊은 관계가 있다.
☞ 송도/지명풀이
송도를 한자로 松都라고 쓴다. 이 송도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가 1394년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기면서 개성을 개칭하여 생겨났다.
소나무는 절개(節槪)와 지조(志操), 곧고 굳은 선비정신과 민족정기를 나타내는 나무이다. 그래서 송도는 소나무 같은 기상이 대대로 남아 전해지는 옛 서울 땅이란 뜻이다.
이 소나무는 애국가 가사 중에 “남산 위에 저 소나무”로 우리의 마음과 가슴속에 깊이깊이 박혀있다. 그리고 이 남산은 개성에도 경주에도 그리고 서울에도 있어 동서남북의 중심은 다변적(多邊的)이다. 예나 지금이나 도읍(都邑)에는 南山이 있음을 알자.
송도는 지성과 낭만에 더하여 민족적인 이름이다.
☞ 판문점과 판문군은 6.25때 생긴 신조어
동의보감(東醫寶鑑)에 판치(板齒)라는 말이 나온다. 이 판치는 위에 있는 큰 앞니를 가리킨다. 그 이(齒)를 민간에서는 ‘대문(大門)니’라고도 한다.
우리들이 넓적하고 얇은 것을 말할 때 ‘널판지’라는 말을 수시로 쓴다. 이 널판지의 ‘판’이 板이다.
그런데 판문점과 판문군은 6.25전쟁 때문에 생긴 신조어(新造語)라는 점을 알면 조금은 국가관과 역사관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오늘의 판문점은 원래는 ‘널문리’였다. 이 ‘널문리’ 세 글자를 살펴보면 ‘널’은 널판지의 ‘널’이고 ‘문리’는 그냥 ‘門里’로 볼 수 있다.
<개성연표>에서 보듯이 휴전회담에 중국 인민지원군 대표가 참가해서인지 ‘널문리’가 板門店으로 변하고 말았다.
‘민족 고유의 한글이름이 외세에 못 이겨 한자(漢字)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필자의 과민일까? ‘널문리’의 뒤 두 글자 ‘문리’는 門里라 할지라도 “널문리? 우리 몰라해 이거”해서 바뀌었다면 지명과 말조차 뺏겨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필자는 16년째 경희대학교 치과대학, 지금은 경희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에서 치과의사학(齒科醫史學)을 강의해왔다.
비록 아주 짧은 몇 번의 강의이지만 板齒(앞니)와 널문리와 板門店, 6.25전쟁과 휴전성립, 6.25전쟁과 구강악안면 외과 수술 그리고 그 치과 보철에 관하여 잠시 언급하고 지나간다.
참으로 여러 가지가 통탄스럽고 애석한 경과라고 믿는다.
☞ 널문의 유래
그 옛날 그냥 살아가는 백성들이 오가며 들르는 주막집이 지금의 판문점에 있었다. 소문난 그 집이 널문을 달아놓고 사람을 맞이했다 해서 ‘널문리’가 됐다.
또 하나는 임금이 행차하던 길에 목이 탔는데 갈증을 풀고 지날 수 있게 됐다. 아주 시원하고 맛있게 마신 샘을 못 잊어 돌아오는 길에 또 떠 마시려고 널문을 해 달았다 하여 널문리가 됐다는 것.
이 널문 유래를 보면 널문에는 민초(民草)도 군주(君主)도 같은 생활이 어려있음을 알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