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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삼짇날 1
지함과 박지화는 화담산방으로 화담을 모시러 갔다.
화담은 산방 처마 밑을 유심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벌써 제비가 날아와
부지런히 흙과 지푸라기를물어다가
집을 짓고 있었다.
"생각도 없는 저런 미물들이 때를 알고
제 집을찾아드니 신기하지 않은가."
삼월 삼짇날,
어느새 봄이었다.
화담계곡의 얼음도모두 풀려
잔잔한 물소리가 산방을 그윽하게 두르고있었다.
산 아래쪽의 나뭇가지들은 새 잎을 틔우고
부지런히 물을 빨아올리며
긴긴 겨울의 잔해를털어버리고
여린 연두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있었다.
"선생님. 그만 떠나시지요.
부지런히 걸어야
내일해지기 전에 한양에 도착할 텐데요."
" 재촉하지 말게.
떠날 때가 되면 다 떠나게 되어있는 게 인생 아닌가.
자네는 준비를 다 했는가?"
"준비라고 특별히 한 것은 없지만
각오는 되어있습니다."
"이제 큰 공부를 하는 걸세
. 물산(物産)과지리(地理)와 인물,
이보다 큰 것은 없네."
"어서 떠나시지요."
지함이 화담을 채근했다.
이제 영원히 떠나려는 산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문턱에 앉아 있던 화담은
가벼운 봇짐을 짊어지고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생명의 기운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인지
늘 투명하던 화담의 얼굴빛이 누렇게바래 있었다.
그렇게 앞장 선 걸음만은
지함이나박지화 못지 않게 날렵했다.
개나리며 진달래가 며칠간 내린 봄비에 짓물러
진흙탕 길을 붉게 물들일 때 송도를 떠났는데,
한양에는 아직 봄은 오지 않고
안개 같은 봄빛이 서려있을 뿐이었다.
봄기운에 휘감긴 골목마다
푸근한저녁 햇살이 따사하게 내리고 있었다.
한양에 들어서서는
한양 지리를 잘 아는 지함이앞장섰다.
지함은 가는 길목이기도 하고
혹 형 지번이청풍에서 돌아와 있을까 싶기도 해서
가회동 형의집부터 들러보았다.
송도에서 화담문집을 정리하려고
선비들을찾아다니던 중에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지방으로좌천되었거나 귀양갔던 사람들 가운데
한양으로복귀하거나
풀려난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은까닭이었다.
대문을 두드리자
지함이 양주 봉선사로 길을떠나고,
형 지번이 청풍으로 떠나고,
형수와조카들마저 홍성으로 떠난 빈 집을
혼자 지키고 있던하인이 달려나왔다.
하인은 지함을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였다.
화담과 박지화를 사랑으로 모시게 해놓고
함은내당으로 갔다.
문이 열리더니 형 지번과 형수의얼굴이 나타났다.
그 사이 세월이 흐른 탓일까,
지번은 핼쓱한얼굴이었다.
지함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지번이고 보면
이제쉰도 멀지 않았다.
많은 나이차 만큼이나
얼굴에세월이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지함은 지번에게로 갔다.
지번이 청풍으로 떠날때도 보지 못했으니
근 사 년만인 셈이었다.
"그래, 어떻게 지냈느냐?"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부모처럼 지함을돌봐주던 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함의 실력을 높이 사,
자신은 말단 관직에 그칠 만한 작은그릇이지만,
지함은 본래 큰 그릇이니
지함이 집안을일으켜야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 그러면서
지함이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부족함 없이뒷바라지 해주던 형이어서
지함은 자못 죄스럽기만했다.
과거를 작파하고 대체 무엇을 할 거냐고
호통을 칠법도 하건만
지번은 그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고
그동안의 안부만 물었다.
"형님께서는 별고 없으셨습니까?"
워낙 조용하고 은근한 성품이긴 했지만
지함에게만은 가차 없던 지번이었다.
특히 공부에관해서는 더욱 그랬다.
그 지번이 자신과 상의도 없이
과거를 작파하고 사라져버린 지함에게
아무런 말도없었다.
"늘 그렇지. 너는 어떠냐?
벼슬도 마다 하고 돌아다녔다니
그래, 뭐라도 찾은 게냐?"
" 찾았다기보다는 찾고 있는 중이지요."
"그래. 나도 명세의 죽음을 떨쳐버리기가 쉽지않은데
너야 오죽했겠느냐.
요즘은 네가 부럽구나.
나도 훌훌 다 벗어던지고 떠나버렸으면 싶구나.
사는게 왜 이리 구질구질한지.
백성을 이끌어야 할벼슬아치들은
죄다 제 탐욕에 눈이 벌겋고 자리만탐내고 있으니
과거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긴 명세의 죽음이 지함에게만 상처를 남긴 것은
아닐 터였다.
말수가 적고 조용한 지번이지만
마음만은 지함이나명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명세처럼 불의에 대해죽음으로 항거하지는 못했어도
지번은 벼슬길에 대해환멸을 느낀 것이었다.
과거에 급제만 하면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을 것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번이 입궐하여 본것은 무엇이었던가.
피비린내 나는 살륙뿐이었다.
그 사이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여기저기서 죽어가고,
유랑민이 먹을 것을 찾아 길을 가득 메워도
조정에서는 아무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전염병이크게 돌아
나무토막 쓰러지듯 백성들이 곳곳에서나자빠져도
조정에서는 훈구 대신과 사림의 싸움만
계속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배고픈 백성, 가난한 백성을 쥐어 짜
세금을 거두어들여서 호의호식하는
조정 대신들사이에서 숨을 죽이고 일만 해온 지번은
늘 고뇌 속에 빠져 있어야 했다.
싸움이 일단 끝나면 지방에서 올라오는 대신들은
세금이 적다느니 진상품이 형편 없다느니
하는 불평을늘어놓았다.
고을 이름에 해(海)자나 도(島)자라도들어가면
무조건 해산물을 진상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래서 충청도 진천의 해산(海山) 같은 고을에서는
나지도 않는 조기를 마련하기 위해
일부러 해안까지가서 조기를 사다가 진상하는
진풍경도 생겨났다.
그런 것을 본 지번이 분기탱천한 명세의 혈기를따라
특정기를 지어 실록(實錄)에 넣는 것을 도왔다가
지방 군수로 좌천당하였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것이
명세는 지번이 관련된 것을
목이 잘리는순간까지도 비밀로 해
지번이 목숨을 보전할 수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풍파를 겪은 지번이
동생 지함의 속사정을모를 리 없어
대과에 급제하고도 방랑하는 동생을
굳이 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문의 흥망이란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느냐.
세상이 이 지경인데 그 흙탕물 속에 빠지지 않는다고
욕할 조상님도 없으실 게다.
너는 네 뜻대로 살거라.
너야 총명했으니 부지런히 공부하다 보면
뭔가 잡히는게 있을 게다."
"형님은 어쩌시렵니까?"
"나야 늘 이렇게 사는 것밖에 길이 있겠느냐.
불만은 많다만 너처럼 그것을 박차고 나올 기개는없으니
이대로 숨죽여 살 밖에.
네 처자는 걱정말거라.
호의호식은 못해도 굶주리게 하지는 않을테니...
돌이켜보면 참으로 처량하구나.
작은 재주나마벼슬길에 올랐을 때는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뭔가해보겠다는
소박한 꿈이 있었는데
이제 벼슬길이 밥벌이밖에 되지 않는다니 말이다."
"형님."
"물러가 쉬거라."
요 몇 년 사이에 지번은 몇 십 년을 건너뛰어
부쩍늙어버린 것 같았다.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며
지번은 벌써부터 그의 인생을 정리하는 듯했다.
지함은 조용히 지번의 방을 물러나왔다.
지번의 말이 옳았다.
뛰쳐나올 기개가 없으니
지번은 그 안에서 홀로 절망하고 고뇌하는 수밖에.
그러나 뛰쳐나온 자신은 또 뭐란 말인가.
자신 앞에 기다리는 것 역시 지번과 다르지 않은고통이었다.
지번과 지함이 다른 점이 있다면
지함은고통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반면
지번은미래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었다.
화담이 지번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지번의 집은 연일 한양의 이름난 선비들로북적거렸다.
특히 화담산방에서 공부를 한 좌의정 박순은
화담이죽음을 눈앞에 두고
산방을 폐쇄했다는 이야기를두고는
몹시 섭섭해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선생님께서 일신을 보전치 않으시고
제자들을돌보심이 너무 지나치셨습니다."
그러나 화담은 박순에게도 빙그레 웃으면서
웃음으로 화답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 같았다.
"선생님, 주기론이니 주리론이니
성리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많습니다.
한 말씀 해주십시오."
"내게는 아무 말도 묻지 마시게
. 이제 나는 명을 다하고
한가로이 유람이나 다니는 객일세.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그물에서 벗어났다네."
그뿐,
화담은 내방객들의 질문에 일체 응답하지않았다.
이틀간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가자,
화담은지함에게 말을 해서
한적한 후원에 나가 별당에서쉬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사흘만 쉴 터이니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게나.
음식도 소용치 않으니 자네도 오지 말게나.
내가 할일이 좀 있네."
화담은 그렇게 말하고 별당에 들어가서는
사흘간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박지화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여
별당 앞으로 가서 인기척을 내보았으나
화담은묵묵부답이었다.
혹시나 그러다가 임종을 하면 어쩌나하면서
노심초사했으나,
그래도 지함과 박지화는
화담이 도가 수련을 하기 위해서
그러고만 있을것이리라고 믿었다.
사흘 동안 화담을 찾아온 선비가 몇몇 더 있었으나
아무도 화담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사흘이 지나자,
화담이 스스로 별당에서나왔다.
사흘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은 화담이었건만
혈색도 그대로고 기운도 정정했다.
별당에서 나온 화담은 곧바로 지함을 불러
여행을재촉했다.
내가 한가하게 성리학에 중독된 학자들 하고
공론(空論)이나 하러 예까지 온 것은 아닐세.
어서길을 떠나세."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화담 일행은지번의 집을 떠났다.
지함이 한양에 온 소식을 전해들은 아내가
아들산휘를 데리고 지번의 집으로 왔다.
그러나 지함은 막길을 떠나는 중이었다.
이제 제법 의젓해진 아들 산휘는
공손하게 인사를여쭐 뿐
지난번처럼 매달려 울지는 않았다.
어린아이지만 매달린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알아버린까닭일까,
아니면 밤손님처럼 불쑥 왔다가
홀연히가버리는 아비에게
정이 들지 않은 탓일까.
한양을 벗어나 수원 쪽으로 길을 잡자
탁 트인들판이 시원하게 드러났다.
밭 둑에는 여린 새 싹이 마른 풀들을 헤집고 나와
고개를 쏙 내밀고 있었고,
먼 들판에는 아지랑이가한들거리고 있었다.
지함은 가슴을 활짝 열고 대지의 기운을 모두빨아들일 듯
힘차게 숨을 들이쉬었다.
구수한 땅냄새,
용솟음치는 나무의 신선한 냄새가
온 몸으로 순식간에퍼져나갔다.
아지랑이 속에 둥둥 떠 있는 아스라한 길을
세사람은 급할 것도 없이 천천히 걸었다.
띄엄띄엄 서있는 초라한 농가에선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개들이
인기척에 느릿느릿 주위를 둘러보다가
해를 끼칠사람이 아니다 싶었는지
맥없는 울음을 한 번토해놓고
다시 까무룩히 잠이 들고
, 바지개에 갇힌노란 병아리들이
애처롭게 삐약거리고 있었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겨우내 통통하게 살이 오른황소를 끌고
논을 가느라 분주했다.
사람도자연만물처럼
겨울의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것이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농부들을 보고 있자니
지함은화담 산방에서 보낸 지난 세월이
마치 꿈결처럼,
그림속의 먼 산처럼 아득하게 여겨졌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따뜻했지.
따뜻해서 돈없는사람에게야 좋은 겨울이었지만
그때문에 더 추운 올겨울을 보내게 될걸세.
모름지기 겨울은 추워야 하는법.
보게나, 지금 싹이 돋고 잎이 나오지만
힘이 약하지 않은가.
여름 태양을 받아 이롭게 쓰려면
그 힘을 받아 이길만큼의 힘이 있어야 되는데
수기(水氣)가 약했으니걱정일세.
수기가 약하면 화기에 눌려 더 오그라드는 법인데...
게다가 수기가 약하면 전염병이 돌기쉽다네.
화기가 적수없이 마구 날뛰니 그럴 수밖에."
그러고 보니 화담계곡을 찬란하게 물들이던
작년봄에 비해더 화사해야 할남녘의 봄이
어딘지 맥없어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지함이나박지화로서는
그 미묘한 기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릴수가 없었다.
해마다 오는 봄인데도 그때마다 난생 처음인 듯
물오르는 나뭇가지가 신비롭고,
먼 들판의 아지랑이에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질 뿐이었다.
박지화가 숨막힌 듯한 나즈막한 탄성을 지르더니
길가에 수줍게 피어난 진달래 꽃잎을 따들었다.
멀리서 오는 봄을 기다리다 못해 성급하게 뛰쳐나온놈이었다.
" 참 신기합니다, 선생님.
이 꽃이 겨우내 어디에숨어 있다가 이제사 나오는 것인지..."
마흔이 가까운 나이,
건장한 체구에 턱수염이무성하게 돋은 박지화가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애틋한목소리로 말했다.
"조물주의 신비로운 주머니를 여는 열쇠꾸러미가
수기와 온기에 숨어 있다네."
"그렇다면 수기와 온기 아니고는
만물이 성장하지못한다는 얘깁니까?"
지함이 끼어들었다.
"그렇고 말고.
겨울을 나지 않은 볍씨는 싹이 돋지않거나
돋는 힘이 약하다네.
콩이고 팥이고 진달래고들가의 풀이고
모든 만물이 다 그렇다네.
그저 봄이 되었으니 저절로 피는 것이 아니라
겨울의 수기를통해 성장을 시작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만물의 생을 주관하는 수기란무엇입니까?"
세 사람은 조금 전 봄기운에 취했던 기분을 다잊어버리고
날카로운 질문을 주고 받으며 느릿느릿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들길을 걸었다.
"수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얘기할 새가 있을걸세.
정말 수(水) 속에 파묻혀서."
잠시 말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