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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창숙(金昌淑 1879∼1962) |
호 |
심산(心山) |
본관 |
의성 |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사월리 |
주요활동 |
조국독립과 반외세, 반분단, 민주주의 수호 운동에 앞장선 유림출신 민족운동가이자 성균관대 설립자 부친 김호림(金頀林)과 모친 인동(仁同)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양친으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16세 때에는 부친으로부터 노비해방과 계급타파 등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 새로운 국가관을 갖게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요로 체결.공포되자 큰 충격을 받고 영남 유학자인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서울로 가서 조약에 참가한 을사5적을 목벨 것을 상소하였다.
하지만 광무황제(고종)의 회답이 없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통곡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1908년 30세 때에는 애국계몽운동 조직의 하나인 대한협회(大韓協會) 성주지부를 결성하고 총무를 맡아 낡은 구습타파와 차별적 계급타파 운동에 앞장섰다.
이듬해에는 '한일합방론'을 제창한 매국노 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 등을 성토하는 건의서를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또 1910년 초에는 향리의 청천서당(晴川書堂)에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투에도 불구하고 1910년 나라가 일제침략하에 들어가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모친의 교훈에 따라 각종 경서와 서적을 섭렵하는 등 학문에 매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영남 및 충청도 유림을 규합하여 137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휴대하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우송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 사건 즉, 파리장서 사건이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의 의원(경북대표)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중국국민혁명의 지도자 손문(孫文) 등과 회합하여 한.중 양민족의 협력과 공동투쟁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에 황무지를 빌려 개간한 후에 새로운 독립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1925년에는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와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 후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차에 걸쳐 수감생활을 하고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하였으나 옥중에서도 투쟁을 계속하여 일제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후 해방이 되자 선생은 신탁통치 반대투쟁과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주도하였으며,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또 1946년 9월 유림의 지원을 토대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맡아 교육운동에 투신하고 정부의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다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투철한 국가관을 가지고 살다가 생을 마친 김창숙 선생은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철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을 고수한 진보적 유학자요 민족주의자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선생의 투철한 애국애족 정신은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만년에 지독한 가난으로 병원비 조차 없이 서울 변두리 허름한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다, 62년 한 병원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
어록 |
병든 몸 구차스레 살려고 안했는데 달성감옥에서 몇 해를 묶여 있구나 어머니 가시고 아이는 죽으니 집은 망했고, 아내는 흐느끼고 며느리 통곡하니 숨결에도 놀라는구나
病夫非是苟求生 豈科經年繫達成 母死兒亡家已覆 妻啼婦哭夢猶驚
사방득같이 기구한 신세 도망친들 무엇이 좋으랴! 문천상의 강개한 심정이면 죽어도 영광이리, 화복과 궁통은 명수에 정해진 것 병든 몸 구차히 살려고도 아니하노라.
崎嶇枋得逃何樂 慷慨天祥死固榮 禍福窮通元有命 病夫非是苟求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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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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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부친 김호림(金頀林) |
주변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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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
경상북도 성주군 사월리 의성 김씨 집성촌 |
묘소 |
서울시 우이동 산 127번지 (두번째 등산로) -4.19묘지위 등산로 |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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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출처 |
네이버지식, 네이버블로그(blog.naver.com/himammo) |
<자료원문>
독립운동과 반독재 선봉에 평생을 바친 심산 김창숙 선생
선생은 1879년(고종 16년) 7월 10일, 대가면 칠봉동 사도실에서 김 호림(金頀林)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 또는 벽옹, '벽'은 '앉은뱅이 벽'자로 일제의 고문에 의해 불구의 몸이 되어 이런 호를 붙였다.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선조 때 명신, 동강 김우옹선생의 13대 종손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유학(儒學)을 배웠으며 문장에도 능했다. 면우 곽종석에게 수학(修學), 1903년(광무 7년) 성명(星明) 학교를 세워 후진을 가르쳤으며, 1905년(광무 9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매국오적청참소 (賣國五賊請斬疏)와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성토한 죄로 옥고를 치렀다.
유림의 독립 청원에 앞서 1919년 3월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儒林)들이 3·1운동에 참가하지 않음은 큰 민족적 수치라 중망(衆望)있는 인사를 추대하여 단결된 유림의 이름으로 독립 청원을 할 계획을 곽대연(郭大淵), 이중업(李中業)등 동지들과 함께 세워서 거창(居昌)에 있는 전 의정부참찬 곽종석을 찾아가서 그의 승낙을 얻어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한국독립청원장서(韓國獨立請願長書)'를 품에 숨겨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 활약, 1920년,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왜경에게 잡혔다가 출옥되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망명 중의 독립운동
1921년,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와 함께 독립운동지 천고(天鼓)를 발행하고, 이어 백암 박은식(白岩 朴殷植)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자주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 선전 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중국의 손 문(孫文)과 교섭하여 광복운동 자금 57만원을 제공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으로 의열단원(義烈團員) 나석주(羅錫疇)에게 폭탄을 주어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를 폭파하고 중국 정부의 풍옥상(馮玉祥)과 교섭, 만몽국경수원포두(滿蒙國境綏遠包頭) 지방의 간황지(墾荒地) 100여만평을 빌어 독립군 양병에 힘쓰는 한편, 주만독립군군사고문(駐滿獨立軍軍事顧問)으로 활약하였다.
옥중생활
1927년, 신병으로 상해 홍제의원(弘濟醫院)에 입원 중 왜경에게 잡혀 6월 18일, 대구로 압송되어 14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大田刑務所)에 복역, 모진 고문으로 하반신 불구(下半身不具)가 되었으며, 1945년, 건국동맹사건(建國同盟事件)으로 왜관경찰서에 구금되어 해방 후 출옥되었다.
해방 후의 활동
해방후에는 백범 김 구(白凡金九)와 같은 노선을 취했으며, 1946년 민주의원 의원(民主議院議員),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을 세워,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 성균관장, 성균관 대학 초대학장을 지냈다.
6·25 사변 후 1951년 리승만 대통령 하야경고사건(李承晩大統領下野警告事件)으로 40일간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자유당 정권의 부정불의를 국민들에게 일깨워주었다.
1952년, 정치 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李始榮), 김성수(金性洙), 조병옥 (趙炳玉) 등과 국제구락부사건을 주모하여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 테러를 당했다.
1953년, 종합 대학, 성균관 대학 총장, 1957년 총장을 사임하고, 1960년 백범 김 구(白凡 金九)선생 및 일성 이 준(一醒 李儁) 열사 기념사업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 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重章)을 받고 그해 5월 10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노환으로 별세, 사회장(社會葬)을 지냈다.
심산 기념관
1974년, 군청 뒤에 심산 기념관이 세워지고 그 앞뜰에 심산 김 창숙 선생 사적비(心山金昌淑先生 事蹟碑)를 세웠다.
김창숙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는 추기경
(수유리, 2004, 5. 24)
[출처] 마지막 선비 - '심산 김창숙 선생'이 독립군 군사고문을 지낸 까닭|작성자 햇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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