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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번 藩主 모리氏의 하기城 터가 위치한 指月山(좌측 상단 바다쪽으로 돌출한 부분)과 성밑거리(城下町). 마쓰모토川과 하시모토川이 감싸고 있다. |
히라다派 國學과 후기 미도學에 대해선 뒤에서 재론하겠지만, 여기서는 먼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無知했던 역사의식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明治維新(명치유신)의 주체세력인 조슈 인맥이 쇼인으로부터 사상적 세례를 직접 받은 그의 제자들인데다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晉三)조차 『나 자신, 吉田松陰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고방식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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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전파하는「月刊 松下村塾」창간호(2004)에 실린 아베 신조의「應援 메시지」. |
< 魯(러시아)·墨(미국)과 강화를 했지만, 우리가 이를 결연히 파기함으로써 夷狄(이적)에게 信을 잃어서는 안 된다. 다만 章程(장정)을 嚴히 하고 信義를 두텁게 하면서, 그 사이에 國力을 배양해 取하기 쉬운 朝鮮·滿洲·支那를 복종시키고, 열강과의 교역에서 잃은 國富와 토지는 鮮·滿에서 보상받아야 한다>
『歐美 열강과의 조약은 지키고, 그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조선 및 만주에서의 영토 확장으로 만회해야 한다』는 쇼인의 아시아 침략 구상은 후일 帝國日本의 국책으로 현실화된다. 다만 쇼인의 征韓論에는 약간의 전제 조건이 붙어 있기는 했다.
쇼인은 『朝鮮과 滿洲를 손에 넣으려면 艦(함)이 아니면 不可하다는 것이 나의 本志인데, 이는 天下萬歲(천하만세)를 이어 가야 할 業(업)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즉, 조선·만주에의 침략구상을 견지하면서도 『지금은 아직 국력이 이에 미치지 못한 즉 巨艦을 보유해야 할 것』이므로 그 실시는 잠시 유보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쇼인은 일본의 사무라이가 페리의 위압에 대해 싸움 한번 벌여 보지 못하고 굴복하고 만 것은 그 마음(心)이 바르지 않고, 뜻(志)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情況(정황)에서 긴요한 과제는 대포 및 군함을 만들기에 앞서 志를 단련하고, 氣를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쇼인의 논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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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像(京都대학 부속 도서관 소장). 그는 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을 육성한 國粹主義 사상가였다(사진 왼쪽). 1854년 3월 시모다(下田) 감옥에 수감된 쇼인. 6개월 후 그는 하기(萩)의 野山獄으로 이감되었다(사진 오른쪽). |
잘못된 역사의식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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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이 육성된 요시다 쇼인의 松下村塾(쇼카손주쿠). |
이어 그것은 『우리 國體가 외국과 다른 所以』를 명확히 하는 것에 의해 성취된다고 했다. 日本이 日本다운 까닭, 國體의 究明(구명)에 쇼인은 자기 나름으로는 골몰했다. 그리고 쇼인은 日本의 독자성을 中國과의 對比로 해명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易姓革命(역성혁명)으로 왕조를 바꿔 온 中國에 대하여 萬歲一系(만세일계)의 천황이 중심이 되는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하려 했다. 즉, 「天下는 天下의 天下」라는 중국에 대하여 「天下는 一人의 天下」인 일본이 비교우위에 있다는 발상이었다. 「人民이 있은 후에 天子가 있다」는 中國에 대하여 일본 本然의 모습은 「神聖(신성)이 있은 연후에 蒼生(창생)이 있다」, 즉 천황이 존재하고 나서 인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中國에 있어서 신하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主君을 구해 거취를 정하는 「품팔이 奴婢(노비)」인 것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譜代(보대)의 家臣이고,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흔쾌히 죽는, 절대적 君臣관계라고 했다. 이것은 앞서 萬歲一系의 천황이 영원불변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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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인이 野山獄에서 풀려나와 幽閉되었던 그의 生家. |
그러나 이런 소설적 史書를 비판적으로 읽을 만한 능력이 없었던 쇼인으로서는 國體가 顯現(현현)해 천황 親政(친정)이 시행되었던 일본의 古代에 있어서 조선의 諸國(가야·신라·백제·고구려)은 천황에게 朝貢(조공)을 했는데, 國體의 쇠퇴와 함께 「朝鮮 諸國」이 교만해지게 되었다고 믿었다.
쇼인은 國體가 손상된 武家政權期(도쿠가와 幕府 시절)에 있어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정벌이 『神聖의 道에 부합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쇼인은 『神功皇后(신공황후)나 히데요시야말로 皇道(황도)를 밝게 하고 國威를 신장한 것으로서 「神州의 光輝(광휘)』라고 稱揚(칭양)했다. 征韓은 「神聖의 道」이고, 「皇道」를 명확하게 한 것, 「立國의 體(체: 본질)」에 合致(합치)되는 것으로서 이념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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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下村塾의 내부. |
< 疆域(강역)을 소중히 하고 조약을 嚴히 함으로써 二虜(2로: 미국과 러시아)를 羈?(기미: 制御함)하고, 그 틈을 타 蝦夷(하이: 北海道)를 개간하며 琉球(유구: 오키나와)를 손에 넣고, 朝鮮을 取하고, 滿洲를 꺾고, 支那를 누르고, 印度에 臨(임)함으로써 進取의 勢를 펴고, 이로써 退守(퇴수)의 기반을 굳히고, 神功과 豊國(풍국: 히데요시의 나라를 의미하는 듯함)이 아직 달성하지 못한 바를 이룩해야 한다>
이런 쇼인의 관점에서 朝鮮 침략은 단순히 歐美와의 관계에서 잃었던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取하기 쉬운 곳을 取하자는 것이 아니다. 쇼인에게 있어 조선을 복속시키는 것은 天皇 중심적 日本의 본 모습, 國體의 불가결한 일환이었다. 따라서 征韓은 日本人다운 것, 代를 이어서 추구해야 할 숭고한 사업이라고 했다. 國體論에 의해 이념화된 조선침략론, 그것이 바로 征韓論인 것이었다.

「감옥을 강의실로 만든」 吉田松陰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일찍이 『새로운 가치관의 창출이 필요한 지금의 시대야말로 吉田松陰 선생의 松下村塾이 신선하게 느껴진다』(2004년 10월27일 발행 「月刊 松下村塾」의 격려사 중에서)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松下村塾(송하촌숙·쇼카손주쿠)는 어떻게 개설·운영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쇼인은 밀항미수罪로 野山獄(야산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1854년 10월)부터 동료 囚人(수인)들을 가르쳤다. 이런 면에서 보면 쇼인은 타고난 교육자라고 할 수 있다. 조슈번의 野山獄은 사무라이 신분의 감옥으로서, 오늘날의 교도소와는 달리 엄격하게 관리되지는 않았다.
囚人들은 그 가족이나 친척의 요청에 따라 수감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가족이나 친척이 집안 내부의 「말썽꾼」이나 「위험분자」를 세상에서 격리시키기 위해 수감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엄혹한 連坐制(연좌제) 사회였다. 따라서 囚人들 스스로는 죄의식이 없었지만, 언제 출옥할지 알 수 없었던 만큼 절망적 상태였다.
쇼인은 囚人들을 위해 우선 하이쿠(俳句·배구: 일본의 短型詩)와 書道(서도) 공부 모임을 열었다. 이어 「孟子」의 강의를 시작했다. 이것이 후일 「講孟余話(강맹여화)」로 정리되었다. 출옥 후 松下村塾의 助敎授(조교수)가 되는 도미나가(富永有隣)도 여기서 만났다. 간수들도 쇼인의 강의를 들었다.
나중에 쇼인의 애인이 되는 다카스 히사코(高須久子)도 옥중에서 만났다. 사무라이였던 남편이 죽은 후 사미센(三味線: 일본 전통 현악기)에 취미를 붙여 사미센의 선생을 집에 불러들였는데, 이런 행실을 염려한 친척들의 요청에 의해 野山獄에 입옥된 여성이었다.
野山獄에 수감된 쇼인에 대해 「처벌 수준이 너무 엄하지 않느냐」 하는 의견이 藩內에 나돌게 되었다. 쇼인의 장래에 기대를 걸고 있던 藩主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 역시 그러했기에, 조슈번은 『병에 걸려 自家(자가) 치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쇼인을 출옥시켰다.
본가인 스기(杉)家의 「幽人室(유인실)」로 주거가 한정된 쇼인은 우선 친척들을 상대로 「孟子」 강의를 출옥 후 3일째(1855년 11월17일)부터 재개했다. 幽人室에서의 「孟子」 강의는 단순한 句文의 해설이 아니라 쇼인의 독자 해석으로 「재미있다」는 소문이 하기(萩) 城下로 번져나갔다.
그때 쇼인의 숙부 타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열었던 松下村塾은 이웃에서 塾을 운영하던 구보(久保五郞左衛門)라는 사람이 그 간판을 승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쇼인의 강의를 구보가 청강함으로써 쇼인은 자연스럽게 塾主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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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인이 동료 죄수들에게「孟子」를 강의했던 野山獄 터. 野山獄은 松下村塾의 前身이었다. |
쇼인의 아버지 스기 유리노스케(杉三百合之助)의 첫째 동생인 다이스케(大助)는 藩의 兵學 사범 요시다(吉田)家의 養子로 들어갔다. 다이스케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다家와 兵學을 잇기 위해 쇼인을 養子로 맞았다. 그러나 쇼인은 여섯 살 때 養父 다이스케가 사망했기 때문에 山鹿流(야마카류) 병학 師範(사범)의 가문을 잇게 되었다. 여기서 스기의 둘째 동생 타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등장한다.
쇼인은 그때까지 親父로부터 「四書五經」 등을 배우고 있었다. 다이스케의 제자이기도 했던 文之進은 쇼인을 훌륭한 兵學者로 키우는 것이 형이자 스승인 다이스케에게 보답하는 도리라고 믿고 여섯 살짜리 조카 쇼인에게 스파르타式 교육을 강행했다. 그 스스로 개설했던 松下村塾에 쇼인을 기숙시키고 하루라도 빨리 요시다家의 堂主에 걸맞은 인물로 키우려고 면학을 독려했던 것이다.
그 결과, 쇼인은 10세 때(1839년) 조슈번의 교육기관 明倫館(명륜관)의 교단에 섰고, 11세 때는 藩主 다카치카와 많은 家臣들 앞에서 「武敎全書(무교전서)」 戰法編을 강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로부터 하기 城下에는 「마쓰모토(松本)村에 天才가 났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松下村塾의 교육기본과 敎授 방식
쇼인은 松下村塾에서 조슈번의 자제들을 교육하면서 「討幕(토막)사상」을 전파했다. 쇼인이 松下村塾에서 숙생들을 가르쳤던 기간은 1856년 8월부터 1858년 12월까지 불과 2년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하생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쇼인은 『이곳 마쓰모토村으로부터 많은 인재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지만, 明倫館의 前 교수였던 쇼인의 밑에는 하기뿐만 아니라 조슈번 전체로부터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여성스런 목소리로 『공부하세요』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철야 강의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열강을 하고 난 다음 날 아침엔 강의실 구석에 곯아떨어져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쇼인의 교육기본은 「魂(혼)과 魂을 통한다」는 것이었던 만큼 村塾에 들어오면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상급 사무라이도, 아시가루(足輕·족경: 졸병)도, 平民도 차별 없는 교육을 받았다.
「학문이라는 것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알고,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는 힘을 기른다」-이것이 쇼인의 교육방침이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문제를 생각해 간다는 모습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쇼인은 塾生들과 함께 밭일을하는 등 몸과 마음의 兩面을 교육했다.
松下村塾에는 정해진 시간표가 없었다. 塾生이 오면 수업이 시작되어 일대일 교육을 하고, 숙생들이 모이면 강론을 했다. 강의 수업은 실내에서, 議論·역사·독서 등은 야외에서 지도하기도 했다.
숙생은 통학 가능한 하기 城下 거주 무사계급이 많았고, 松本村에 사는 숙생도 26명이나 되었다. 수는 적지만, 멀리서 오는 숙생도 있었다. 통학이 어려운 숙생은 城下에 하숙하든지, 村塾에서 기숙하기도 했다.
수업은 쇼인뿐만 아니라 助敎授들도 맡았다. 쇼인이 野山獄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알게 된 도미나가(富永有隣), 쇼인의 4촌인 구보(久保淸太郞), 숙생 중 최고 우등생인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등이 助敎授의 역할을 했다.
정보의 중요성 강조
松下村塾의 기둥에는 「飛耳長目帳(비이장목장)」이라는 공책이 걸려 있었다. 쇼인이 교류하는 사람 및 오사카를 다녀오는 상인 등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기록해 두는 것이다. 이로 인해 쇼인은 현재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그 구체적 내용을 시골 구석인 하기에 있으면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숙생에게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숙생들에게 정보수집을 명하기도 했다.
조슈번에서는 쇼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松下村塾의 숙생 4명을 포함한 6명을 정보수집을 위해 京都에 파견했다. 쇼인이 추천한 젊은이가 藩의 업무로 교토(京都)·에도(江戶)에 파견근무 또는 출장을 가면, 쇼인의 정보망으로서 최신의 정보를 기록한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松下村塾은 간단한 구조이다. 나무로 기둥 두 개 위에 판자 지붕을 올려 만든 대문, 대나무로 대충 엮은 나지막한 담 안에 들어선 목조 건물이다. 처음에 강의실은 다다미 3개가 깔린 방 2개와, 다다미 4개 반이 깔린 방 1개 등 모두 3개였었다. 넓은 강의실이 필요할 때는 방 사이를 막고 있는 장지문을 떼내어 통방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숙생들이 늘어나자 옛 강의실에 잇대 다다미 8개짜리 방 하나를 증축했다(1858년 3월). 증축 강의실은 쇼인과 제자들이 몸소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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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의 탄생지에서 내려다본 성밑거리 모습. |
30세의 나이로 斬首당한 까닭
그러나 松下村塾은 곧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간다. 1858년 미국의 요구에 몰린 막부는 美日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요코하마·나가사키·하코다데·니가타·효고(兵庫)의 개항과 에도·오사카의 무역 등을 결정했지만, 美國에만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어 막부는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도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大老(대로: 비상시 막부 최고의 役職)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천황의 칙허도 없이 조약에 비준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1858년 11월, 京都에서 하기로 돌아온 松下村塾의 숙생으로부터 막부 老中(노중: 平時 막부 최고 역직이지만 비상시엔 大老를 보좌하는 副首相) 마나베(間部全勝)가 攘夷派를 엄혹하게 단속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쇼인은 격노했다. 그는 마나베 암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이 나중에 쇼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쇼인은 조슈藩廳에 마나베 암살을 위한 무기·탄약의 제공을 요청하면서 하기에 남아 있던 숙생들로 요격대를 편성했다. 당시 에도에 있던 구사카 겐즈이 및 다카스기 신사쿠에게도 편지를 보내 계획에의 참가를 지시했다. 이에 대해 에도의 제자들로부터 「지금 움직이는 것은 時機尙早(시기상조)」라는 답장이 왔다. 쇼인은 격노했다.
더욱이 조슈번의 上役인 주후(周布政之助)도 쇼인을 방문하고 과격한 행동을 중지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쇼인은 듣지 않았다.
쇼인의 위험한 행동에 조슈번은 松下村塾의 폐쇄를 명했다. 그리고 1858년 12월5일, 쇼인을 野山獄에 再수감했다. 쇼인이 1859년 1월1일의 궐기를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로부터 쇼인을 에도로 호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쇼인이 에도로 보내지게 된 이유는 「안세이(安世)大獄」에서 옥사했던 「尊攘志士」 우메다 운빙(梅田雲湃)이 『하기에서 쇼인을 만났다』는 말을 남기고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1858년의 안세이大獄은 攘夷를 부르짖으며 막부를 흔드는 과격파를 막부의 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피의 숙청을 감행한 사건이다. 오바마藩(지금의 福井縣)의 藩士 우메다는 尊王攘夷의 이데올로그 중 하나였다.
막부의 최고재판소인 評定所(평정소)가 쇼인에게 신문한 것은 1856년 겨울에 운빙과 만나 대화한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京都의 皇居에 막부 타도를 선동한 편지를 투입한 사실이 있는지 하는 두 가지 질문이었다. 여기서 만약 쇼인이 발뺌을 했다면 무사할 뻔했다.
그러나 쇼인은 『막부 타도를 촉구하기 위해 公卿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막부의 老中 마나베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고 자백했다. 評定所의 관리들은 예상도 하지 못했던 老中 암살계획에 깜짝 놀랐다. 評定所의 판결은 「死罪」였다. 판결 당일(1859년 10월27일)에 그는 참수되었다. 그때 쇼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쇼인은 에도로 호송되기 직전 野山獄에 갇혀 있을 때 숙생들에게 편지를 보낸 바 있는데, 그 내용을 현대문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幕府 및 諸藩 무사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신분에 관계없이 풀숲과 같은 곳에 사는 민초를 일으켜 세워 체제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草莽?起(초망굴기)」이다. 쇼인의 「초망굴기」는 훗날 다카스기 신사쿠 등 숙생들에 의해 실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