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되지 아니하면 … 못하리라
마태복음 18:1~4 / 고신일 목사 / 2010-05-02 / 주일 낮 4부
할렐루야!
평안하십니까?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사실 어린이는 [어린이 날]에만 주인공이 아니라 모든 날의 주인공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 모두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다 어린아이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역사의 작품 속에 우리 모두 다 주인공입니다.
내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지금 있게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옆에 계신 분들이 하나님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옆의 분과 인사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 모두 주인공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작품에 출연중인 주인공임을 믿으시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역사라는 긴 세월에 비추어 보면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 나이를 먹었어도 웃어른은 여전히 계시고,
- 배우고 또 배워도 모르는 것 투성이고,
-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경험한 일이 많았다고 해도
못해 본 일, 못 가본 곳이 많습니다.
-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어도
앞뒤 돌아보면 여전히 모르는 사람, 낯선 사람투성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배우고, 더 자라야 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2000여 년 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께 직접 배우고 익힌 제자들도
예수님 앞에서는 철없는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오늘 본문(마 18:1~4) 전에 있는 마태복음 17장 24~27절에서
예수님은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으나
‘성전세’를 걷는 사람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성전세를 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그곳을 통치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집권하면
그 옆에서 한 자리씩 꿰차고 앉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지만(17:22-23)
제자들은 천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만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
윗자리에 앉을 사람이냐를 놓고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그때에(마 18:1)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 …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 갖고 있지만
예수님은 천국백성의 자격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크고 작은 것을 논하기 전에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아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논쟁은 마태복음 20장에서도 나타납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구합니다.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은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마 20:24)
예수님의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물었지만
우리들은 세상에서 누가 큰 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 누가 더 높은가?
- 누가 더 높은 사람과 가까운가?
- 누가 더 넓은 집/좋은 집에 사는가?
- 누가 더 비싼 차를 타는가?
- 누가 더 명품이 많은가? 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하심보다 세상적인 일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어린이들 모두가 백지처럼 곱고 깨끗하지만은 않습니다.
사람의 성품을‘성선설(性善說)’과‘성악설(性惡說)’을 말하는데
제 생각에는 사람이 원죄(原罪)를 갖고 태어나서 그런지
본성이 악한 것 같습니다.
아기들도 보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기 마음에 안들면 화내고, 심술부리며, 울고,
못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어린이집’에서도 보면 옆의 친구들을 못살게 굴고, 때리고,
이로 물고, 괴롭히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은 아주 영악합니다.
5~6살 되는 애들이 모르는 게 없어서 선생님들을 당황케 합니다.
사실 아이들이 너무 영악하면 애 같지 않아서 … 안예쁩니다.
사도바울도 어린아이 때는 성숙치 못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서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 때의 모습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중에 여전히 심통 부리고,
욕심 많은 애같은 어른들이 많습니다.
안정감과 사랑의 욕구가 강합니다
신생아는 아무거나 먹여도 안되고, 아무거나 입혀도 안됩니다.
한시도 손을 뗄 수가 없습니다. 잘 지켜봐야 합니다.
신생아 단계는 귀엽기는 하지만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돌본 이도, 돌보는 이도 힘이 덜 듭니다.
예수님이 자라시던 모습을 기록한 누가복음 2장 40절에 보면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아이가 예쁘더라도 자라지 않으면 안됩니다.
강해야 합니다. 지혜로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하는 사람 중에 ‘신생아’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야 당연하지만
오래 믿고 직분 받아 봉사하는 사람 중에도
<신생아 크리스챤>이 있습니다.
영의 양식을 스스로 먹지 못하고, 먹여줘야만 합니다.
먹어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떼를 씁니다.
비위를 맞춰야 하는 사람, 전화해야 교회 오고,
권해야 예배 참석하며 성경공부 하는 사람은‘영적 신생아’입니다.
우리교회에도 보면 신생아 같은 집사, 권사, 장로가 있습니다.
설교준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시범적으로 한 사람을 세워서
‘신앙생활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망신을 준다면 …
그렇게 무안당해도 예배마치고 난 후에
‘감사합니다’라고 웃으며 얘기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누가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장로님들은 주로 1부예배를 참석하시니까
어떤 장로님 한 분을 세워서 그렇게 해보면 괜찮을까?
많은 사람 앞에서 갑자기 망신을 당해도
마음 상해하지 않을 분이 누가 있을까?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강대상에서 이름이 불려지면
‘영광스런 자리에서 이름이 불렸다고 10,000원씩 장로회비를 냅니다.’
그래서 어떤 장로님은 제게
‘목사님 요즘 장로회비가 모자라는데 장로님들 이름을
강대상에서 쭉 ~ 한번 불러주시죠’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이름 불러 책망을 해도 … 감사할 분이 계실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 부를 자신이 없었습니다.
누구를 부르면 좋을까요?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세요.
‘나는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가?
나는 정말 어떤 경우에도 상처받지 않고 믿음 지키고,
영적인 자세도 지키고, 내 인격도 지킬 수 있는가?’
우리 자신들 모두 영적인 신생아,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과시를 하기 시작합니다
신생아에서 조금 벗어난 아이들은
자기 과시(self-display)를 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집중해 주기를 바라고
박수쳐 주고 인정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스꽝스런 말이나 행동도 거침없이 합니다.
TV주인공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만화 영화 주인공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심방을 하고 급한 걸음으로 골목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손들어!”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멍하니 걷던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쪼그만 녀석이 장난감 총을 저를 향해 겨누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것을 사람한테 겨누면 안돼”라고 했더니
“대장, 이놈이 말을 안듣습니다.”하며
곁에 있던 아이들 네 명이 한꺼번에 큰 총을 들고
또 손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쏴라”라는 말과 동시에
조그마한 비비탄이 제 몸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안되겠다 생각하고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 애들하고 싸워서 뭐하겠습니까!
아이들은 자기 이외의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된 모습을 갖기 원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카우보이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군인이 되기도 하고, 경찰이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보자기를 둘러쓰고
슈퍼맨인 것처럼 노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과시’란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남에게 자기를 과장하여 나타내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기과시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상황이 악화돼도 값비싼 귀금속이나 사치품들이 더 잘 팔리는 현상을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라고 합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은
가격이 높을수록 더 많이 사려고 한답니다.
얼마 전에 모 그룹의 회장 일가가 언론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백화점에는 많은 전화가 왔답니다.
그룹회장이 입은 양복, 큰 딸이 들고 나온 손지갑,
둘째딸이 입은 코트와 핸드백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탤런트가 입고나온 옷, 액세서리 등도 매진될 정도로 잘 팔린다고 합니다.
그 모두 외모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행동입니다.
또, 요즘에는 ‘어디사세요?’라는 질문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그래서 꼭 거기 살지 않아도 되는데 서울 강남의 원룸에서
보증금 1000만원에 100만원씩 월세 내며 사는 사람들,
소득의 절반을 집세로 내면서도
‘강남 사람’이라는 소리 듣는 것을 행복해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부 자기과시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도 ‘자기 과시욕’이 가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자기 이름 드러나야 일하고, 박수 받아야 하고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어야 하는 사람 …
어린아이 같이 성숙되지 못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땀 흘림과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날 것을 믿고 누가 알아주든, 않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가 너무 많이 드러나면 하나님은 가려집니다.
제가 1985년에 이스라엘에 처음 갔을 때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제가 직접 카메라 다리를 세워놓고 많이 찍었습니다.
‘내가 왔다 갔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요즘같이 디지털 카메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가방에 필름이 한가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인화를 해보니 사진마다 제가 있었고,
어떤 곳은 제가 너무 크게 나와서
그곳이 어디였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제 모습이 너무 크게 찍히다 보니 배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카메라를 갖고 다니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우리가 너무 크게 드러나면 하나님이 가려집니다.
내가 나를 가리고 숨기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호기심과 탐색의 욕구가 가득합니다
어린이에게는 자기 과시를 하고자 하는 것과 함께
호기심과 탐색의 욕구가 강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알고 싶은 것, 해 보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당연한 것이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때때로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선 안되는 것까지 알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잘 가르쳐야 합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도 호기심과 탐색하는 마음과 함께
잘못된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도 보고, 가지 말아야 할 곳도 가고
말해야 하는 지, 입 다물어야 하는 지,
할 일인지, 말아야 하는 일인지”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교회에 대해, 목사에 대해
몰라도 되는 일, 알 필요도 없는 일에 관심 갖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와 장소를 구별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제가 우리교회에서 매년 한 번씩은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 임원/직분자들의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는 책임의 대부분은
그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우리교회 어린이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선생님들이‘목사님 설교 말씀 잘 듣고 잘 해야 한다’고
가르치니까 아이들이 저를 좋아합니다.
제가 어쩌다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면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집사, 권사인 부모들이 아이들 앞에서
‘우리 교회는 이게 틀렸고, 저게 틀렸고 …
우리 목사님은 이게 틀렸고, 저게 틀렸고 …
왜 그래, 이상해 …’라고 말한다면 그 아이는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부모들이 교회와 목회자에 대해 비난하고 불평하는 말을 들은 아이들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주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목사의 설교를 들을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교회를/목사를 … 멀리하게 되고
결국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디에서 어떤 말을 하고 사는 지 조심하며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모방의 욕구가 강합니다
어린아이는 흉내 내고 싶어 하는 모방의 욕구가 강합니다.
닮고 싶어 하고, 흉내 내고 싶어 합니다.
말도 행동도 옷 입는 것도 흉내 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스타를 좋아합니다.
유명한 배우, 개그맨, 가수들을 찾고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를 닮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스타는 대부분 ‘부모’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말에나 일에나 다
아이들에게 바른 모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닮고 배울 수 있도록 잘 가르쳐야 합니다(히12:2).
미국 사회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폭력적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들의 70% 이상이 또 폭력을 휘두른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폭력에 상처받고 우는 어머니를 붙들고 울면서,
‘나는 이 다음에 절대로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 아들이 커서 아버지가 된 다음,
아내와 자녀들에게 똑같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 혹은 폭음 때문에 가정이 어려움을 겪으며,
‘나는 이다음에 커서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던 아들이 커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술 때문에 그 가정에 엄청난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이,
일반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보다
알코올 중독자가 될 확률이 4배나 높다는 사실이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의 말투, 표정, 태도, 몸짓, 습관 등
모든 것이 훗날 여러분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처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먼저 믿은 사람들을 닮으려’합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사람들을 닮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잘 해야 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일성수를 바르게 하는지, 예배를 귀중히 여기는지,
교회와 목회자를 귀중히 여기는지 다 보고 배웁니다.
여러분 가운데 먼저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잘해야 합니다.
자기 의지(self-will)가 강합니다
어린이는 자기 과시 욕구, 호기심과 탐색의 욕구
자기 의지(자기 주장)이 강합니다. 고집이 셉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안되면 주저앉아 발버둥치며 웁니다.
그런 행동이 계속되면 자기중심(self-centerdness)적인 아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외면당합니다. 미움 받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귀엽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귀여움을 받을 수 있도록 키워야 합니다.
지나치게 자기 의지가 강해 고집 세고
자기만 아는 아이는 책망을 해서라도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잠언 23장 13절에 보면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잠23:13)고 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교육전도사로 있었을 때
‘심한 장난꾸러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살면서 그렇게 장난꾸러기 아이는 처음 봤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 ‘신현갑집사’입니다.
그때 얼마나 짓궂게 장난치고 말썽 부리는지 어머니인 정경심권사님이
잠언 23장 13절 말씀을 읽으면서 회초리로 때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현갑집사는 막 울면서
‘성경에 뭐 그런 말씀이 있느냐’고 소리쳤답니다.
그래도 말씀의 터 위에서 신앙생활 잘하며 자란 신집사가
지금은 멋진 가장이 되었습니다.
잠언 22장 15절에 보면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22:15)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의 권위를 독단적으로 사용하여 폭력을 행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24)고 했습니다.
가르친다고 해서, 때린다고 해서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고
감정이 실지 않은 상태에서 손바닥 한 대를 맞더라도 …
‘내가 잘못해서 맞는구나’라고 느끼도록 잘 설명해 주고 벌을 주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 중에도 징계를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만 아는 사람,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자기 하고 싶은 것 다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티를 벗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허물이 많고 부족하고
성숙하지 못한 어린이를 세워 놓고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철이 없거나 어리석거나
성숙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치켜세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겸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 어린아이들은 부족한 점이 많지만 겸손합니다.
자신이 잘못했을 때, 잘못한 점을 인정하고,
허약하고 부족한 점을 인정합니다. 겸손합니다.
그래서 무서운 일이 생기면 어른에게 달려갑니다. 해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자라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는 때 묻지 않았습니다.
순수하고 꾸밈이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배우려 하고 닮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고 했고,(욥 2:29)
- 겸손한 자들을 붙드신다고 했습니다.(시 147:6)
-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잠 3:34)
- 겸손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잠22:4)
-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높이신다고 하셨습니다.(벧전 5:6))
여러분 모두가 어린아이 같은 철없는 신앙이라면
성숙한 신앙으로 달라지시기 바랍니다.
크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으로 가득찬 마음을 가졌다면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서 가정, 일터, 교회 …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함을 가진
하늘 백성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교회에서나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왜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간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지
마음속에 새기고 우리들 자신이 어린아이 같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배우려 하고, 닮으려 하는 순수함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둥교회 성도들의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아이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쓰임 받는 기둥 같은 일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둥교회에서 자라난 어린아이들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 하나님 나라의 큰 기둥으로
우뚝세워지는 복된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 되라고 가르치신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아이들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우리들은 은혜 받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0년 5월 2일 주일낮4부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