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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칸에 인질로 억류된 샘물교회 23명의 인질로 인해 한국교회가 많은 욕을 얻어 먹고 있다. 마치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이 네티즌들이 한국교회와 박은조목사님과 샘물교회를 욕하고 있다. 이에 과연 불신자들이 그렇게 욕할 자격이 있는지 선교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초대교회 선교의 역사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그 처음부터 순교자의 희생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오순절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된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하였다.
부흥의 원인을 살펴보면 1)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강림하시니 제자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14개국어의 말(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되었던 자가 40여년 만에 일어나 걷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러저러한 기적이 일어나고 능력이 나타나면서 자연히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2)가난한 과부를 구제하는 사랑의 공동체였기에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3)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나누는 아름다운 교제가 있었기에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초대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을 하였다.
이에 교회의 부흥을 시기하는 두 번의 큰 박해가 있었다. 먼저 유대교주의자들이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고 성내에 있는 성도들을 잔해하는 핍박이 있었고 나중은 헤롯왕이 직접 나서서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마저 죽이기 위해 옥에 가두는 박해가 있었다.
이에 사도들 외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웃 나라로 피해 흩어졌다. 흩어진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니, 피난처에 교회가 세워졌고, 핍박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복음이 더 널리 퍼져나갔다. 악을 선으로 바꾸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흩어진 그들 가운데 일부가 당시 로마제국 3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안디옥에 교회를 세웠다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착하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를 교회의 지도자(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의 지도를 받아 큰 부흥을 이루고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을 한다.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은 그들이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함으로 기독교의 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이처럼 선교의 역사는 스데반과 야고보의 순교로 부터 시작이 되었고 이후 세계선교의 현장에는 항상 순교자들의 피가 흘려졌다. 이번 아프칸에서도 배형규, 심상민 두 분의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한국 선교의 역사
이번 선교팀은 왜 전쟁과 가난의 나라인 아프칸에 갔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세계2대 선교대국인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역사를 알아야 한다.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들어 온 것은 의사인 알렌이 입국한 1884년 9월 20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토마스선교사의 순교가 있었다. 1866년 중국선교사로 와 있던 토마스선교사가 조선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통역관 자격으로 대동강을 따라 올라왔다. 이때 평양의 병사들과 전투가 일어나고 이 전투에서 그는 죽는다. 그는 죽으면서 준비해 간 한문성경을 자기를 치는 병사에게 전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나중 가져가서 읽던 중 회심하여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또 성경의 내용도 모른 채 찢어서 자기 집의 도배를 하였던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으니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알렌의 의료선교와 갑신정변
토마스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조선 땅에는 1884년 9월20일 의사인 알렌선교사가 입국하여 미국 공사관 의사로 공식적인 일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점은 알렌의 입국일을 기준으로 한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에 일어난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에서 당시 조정의 실력자인 민영익이 7군데나 칼을 맞고 중태에 빠진다. 어의를 비롯한 많은 한의사들이 그를 치료하였지만 한의로써는 한계가 있어 사경을 헤멜 때 알렌이 끊어진 혈관과 찢겨진 살갗을 잘 치료하여 살려낸다. 이에 민대감은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극진히 대우한다. 이런 인연으로 고종은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곧 제중원으로 개명된다)을 세우고 이것이 오늘날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이 땅에 서양식 의료의 역사가 시작된다.
언더우드의 입국과 교육선교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가 영광스럽게도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제물포항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부부와 함께 입국하면서 참된 선교의 역사가 시작이 된다. 함께 입국한 아펜젤러목사의 부인이 임신 중이라 미국공사관에서는 갑신정변의 혼란이 아직 있는 조선에서 임신한 여인이 생활하기엔 위험하다하여 그들 부부를 다시 일본으로 돌려 보낸다. 이에 언더우드 혼자 한양으로 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한양에서 떠도는 고아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돌보는 고아원을 시작하면서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경신학교를 세워 후일 입국하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 교육과 사회사업의 초석을 쌓게 된다. 이화학당(스크랜튼 여사), 배재학당(아펜젤러) 및 지방에 서양식 교육기관을 세운다.
당시 소수의 양반자제들에게만 국한되었던 서당의 한문교육에서 일반 서민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서양식 교육이 보급되면서 조선은 급속히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개화와 근대화, 문명화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한국의 근대화와 문명화는 선교사들의 고아원과 교육기관 설립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헤론과 의료선교
1886년 6월 의료선교사인 헤론이 입국한다. 그는 테네시의과대학을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여 모교 교수직을 제의 받으나 조선 선교를 위해 거절하고 의과대학 교수의 딸과 결혼하여 조선으로 오게 된다. 그는 알렌이 주미조선공사관 통역관으로 파견되면서 빈 제중원의 2대 원장으로 부임한다. 그는 자기 몸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조선의 병자들을 돌보고 저녁에는 성서번역과 문서선교에 헌신하다가 이질에 걸려 한국에 온 지 5년만에 33세의 젊디 젊은 나이에 죽는다. 죽기 이틀전에도 백리길을 만다않고 왕진을 다녀왔다고 하니 그의 조선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만하다.
오늘날도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된 직업인데 당시 의대교수라는 존경받는 직을 마다하고 가난하고 알려지지 않은 땅 조선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33세의 젊디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이들을 남겨두고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는 그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비슷한 시기에 감리교 목사겸 의사인 스크랜튼부부가 입국을 하고, 남녀7세 부동석의 사회관념상 여자가 외국인 남자에게 자기 몸을 보이며 진찰한다는 것이 힘이 들던 때에 여성들을 위해 여의사인 엘러즈와 하워드가 입국하면서 조선땅에 서양식 의술의 역사가 활발하게 전개된다.
곧 오늘날 병원의 역사, 한국의 서양식 의료의 역사는 바로 선교사들의 헌신과 순교로 시작이 되었던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억류된 샘물교회 봉사단
이처럼 한국 선교역사에서 의료선교와 교육선교, 고아원 중심의 사회사업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번 아프칸 봉사팀 역시 의료선교와 고아원, 교육기관 봉사를 주목적으로 하였다. 이슬람 원리주의가 극심한 아프칸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복음선교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비자로 입국한 것이 아니라 의료봉사를 위한 NGO비자로 입국하였다. 마치 알렌과 언더우드가 조선에 처음와서 의료와 교육부터 시작한 것과 같다.
현지에서 활동 중인 한 NGO 관계자에 따르면, 분당샘물교회 봉사단은 북부 마쟈리샤리프 지역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해온 다른 NGO들과 협력해 한 주간 동안 의료봉사와 고아원 방문을 통해 구제 봉사활동을 펼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 NGO 관계자는 또, 분당샘물교회 봉사단은 종교활동 보다는 방문목적에 따라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대민 봉사활동에만 충실했다고 전했다.
선교대국 한국선교사들의 헌신
한국은 지금 미국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이다. 그들이 선교지에 나가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우리들은 너무 모르고 있다.
작년 여름에 우리교회 노병호전도사님이 캄보디아에 우물선교를 하고 왔다. 캄보디아는 1975-9년까지 5년동안 폴포트정권의 크메르루즈군이 장악하면서 전 인구 700만명 가운데 약 200만명을 학살한 킬링필드(집단학살 당한 무덤을 가르키는 말)의 나라이다. 크메르루주 폴 포트 정권은 행정, 관리, 문인 등의 모든 지식인들을 포함해서 조금이라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깡그리 색출해 무참히 학살했다. 손이 곱고, 얼굴이 깨끗하면 지식인으로 낙인찍어 사살했고, 총알을 아끼기 위해 사람들을 생매장 시켰고, 우물에 마구 집어넣어 죽이기도 했다. 살인 도구로는 곡괭이, 대나무 창 그리고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시켜 살해 했다. 심지어 부모가 안고 있는 아이를 빼앗아 공중에 던져 사격연습용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러니 지금 캄보디아의 가난과 낙후함은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동네에 화장실이 없어 이곳저곳 아무 곳에나 대소변을 보아 마을에 들어가면 온통 인분 냄새로 숨을 쉴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또 마을에 우물 하나가 없어 빗물을 받아 먹고 더러운 강물을 먹고 마셔서 전염병으로 해마다 수천명이 죽어 가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다. 우물 하나 파는데 30만원이 드는데 한국 선교사들이 현지에 가서 이 일을 많이 감당하고 있다.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의료봉사를 하고, 각종 기술을 가르치는 일들을 통해 문맹과 가난, 질병에 시달리는 그들을 섬기고 있다.
이런 낙후한 나라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지는 우리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유독 교육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진다. 그래서 조금만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을 선진국으로 유학시키는 것이 요즘의 풍토이다. 오죽 했으면 기러기 아빠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런데 캄보디아 같이 교육환경이 열악한 나라에서 자녀를 키워야 하는 선교사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희생이 얼마나 큰 지 우리가 능히 상상할 수 있다. 지금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는 선교사 자녀들을 생각하면 선교사들의 희생과 고마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 이상호 한의사 선교사의 죽음
몇 년전 설교를 준비하다가 너무도 안타까운 선교사의 순교를 본 적이 있다. 스리랑카에 파송된 의료선교사 이상호 선교사의 이야기이다. 누구나 가기를 부러워하는 경희대 한의대와 석박사 과정까지 마친 한의사. 서울에서 다른 동료들처럼 개업을 하면 부와 명예가 함께 하는 한의사의 길을 접어두고 늘상 35도를 넘나드는 불교국가 스리랑카에서 봉사하다가 짧은 삶을 마감한 것이다. 우리는 며칠만 35-6도를 오르내려도 불볕 더위다 열대야다 뭐다 하는 고온다습한 나라에서 많게는 하루에 3000명씩 환자를 돌보았으니 어찌 과로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자기만을 믿고 멀디 먼 이국 땅까지 따라온 아내와 10살 된 아들, 5살 된 딸을 두고 눈을 감아야 했던 남편과 아버지로써 그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죽음의 고통이 극심한 순간, 떠 오르는 아내와 두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하며 눈을 감았을까?
선교와 순교의 의미
왜 이상호 선교사는, 헤론선교사는 쉽고 편안하고 존경받으며 살 수 있는 길을 버려두고 가난하고 열악한 나라로 달려 가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기독교 역사 이래 수많은 선교사들이 외지에 나가서 온갖 박해와 핍박을 받으며 복음과 사랑을 전하게 했는가?
그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알기 때문이다. 먼저 구원 받은 자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복음에 대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선교현장으로 달려 간 것이다. 무지와 가난, 여성에 대한 불평등이 가득한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을 위해 생명을 바친 선교사들이 오늘날 한국의 기초를 세웠다. 의료, 교육, 복지, 문화를 가져다 준 외국 선교사들에 빚진 자된 우리는 이제는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들이 세계를 향해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번에 아프간에 나간 봉사팀도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한국교회와 선교에 대해 욕을 하는 많은 분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 세계와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있는가? 3000원만하면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한달을 먹을 수 있다는데 그 3000원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루 양식을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어린 소녀들, AIDS에 걸린 몸으로 가족 부양을 위해 오늘도 몸을 팔아야 하는 어린 소녀들의 현실을 보고 그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아니 알고나 있었고 관심이나 가진 적이 있었는가? 탤런트 정영숙 집사, 김혜자 권사의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 돕는 봉사활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자기 돈과 , 건강을 드려서 봉사를 하고 있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들에게도 권하고 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죽기까지 섬기신 예수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라야 쓸 데 있는 것이라며 병든 자의 친구로 오신 주님. 주님의 정신을 믿는 우리가 아니면 누가 실현하는가?
교회만큼 그런 일에 적극적인 곳이 어디 있는가? 헌신적인 기독교인 외에 누가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봉사하고 있는가? 타 종교인들이, 무신론자들이? 운동권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는 세상 사람들이?
그들은 자기 배 채우기에 급급하고, 땅 투기에 골몰하고, 자기 아들 미국유학 보내고, 딸 좋은 곳에 시집보내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자기희생하고 이름나지 않는 그런 곳에는 단 한 푼어치의 관심도 가져 본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을 욕할 수 있는가? 그들이 가난하고 무지한 제 3 세계국가와 국민들에 대해 어떤 책임을 가지고 봉사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일본을 욕한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라하면 싫어하는 경제대국인 그들이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세계를 향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악한 민족이 되고 말 것이다. 세계인의 손가락질 받는 일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민족이 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스데반 집사와 야고보 사도의 순교 이래로 선교의 역사에는 항상 충성된 일꾼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흘렀다. 토마스선교사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의 피가 조선 땅에 근대화와 복음화의 기초가 되었던 것처럼 고 배형규목사와 심성민 성도의 순교의 피가 아프간의 평화와 현대화, 복음을 가져다 주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지금 19명의 인질들이 잡혀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일까?
야고보 사도를 잃고 베드로 사도 마저 죽음의 위기에 있을 때 교회는 모여서 기도했다. 기적적으로 옥문이 열렸다. 우리도 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탈레반의 감시와 악한 기후와 열악한 환경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강함이 필요하다. 온갖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세상 문은 사방으로 다 막혀 있어도 하늘 문은 열려 있다.
아프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2명의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이번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선교와 봉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 끝까지 계속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