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식은 근작에서 물질의 울림이 가져다주는 그 어떠한 속박으로부터도 훌쩍 떠나 가급적 개념과 물질의 결합체 구조를 파기하는 쪽으로 변모하고 있다. 지금 그는 아련하게 잡힐 듯 말 듯 한 예술을 향한 욕망을 ‘행위 그 자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풀어나가는 길을 찾고 있다. 자유롭게 떠다니는 예술가의 영혼을 구현하고자 하는 정광식의 행위는 베기, 썰기, 긁기, 긋기 등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퇴적된 모래가 굳어진 붉은 돌 두 덩어리를 긁어서 가지런하지 않지만 한 방향으로 반복된 선들을 남긴 것, 스무 장의 오석을 썰어서 반질반질하게 갈아낸 표면 위에 가지런한 수평선을 그은 것, 소나무를 베고 썰어서 만든 나무판재 아홉 개를 이어붙인 거대한 평면 위에 대각선을 축선으로 해서 타원형의 흔적을 남긴 것. 이것이 정광석이 돌과 나무에 조각가 주체로서 남긴 흔적의 전부이다. 글라인더로 돌이나 나무의 표면을 썰어 내는 ‘숙련노동예술행위’는 물질성과 작가 신체 간의 살뜰한 교감이 있어야 일이 제대로 되는 법이다. 정광식의 글라인더 톱날은 거의 칼날에 가깝다. 목판화에서 칼 맛을 이야기 하듯이 돌판과 송판을 썰어내는 정광식의 행위는 가히 조각에 있어서의 칼 맛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날카롭게 또는 둔탁하게 겉을 다듬어 내고, 부드럽게 이러지면서 유려한 곡선을 만드는가하면, 짧은 파편들을 남기는 선과 면들의 연쇄를 이루어 내며, 움푹 파여 쑥 들어간 속과 아슬아슬하게 돌출한 겉이 만들어내는 섬세한 운율은 표면 그 자체만으로도 강렬한 재현의 추억을 이끌어 내기까지 한다. 행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 정광식 칼 맛은 단단한 물질을 썰어놓은 입체작품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종이를 대고 색연필을 그은 일종의 탁본 작업에서도 잘 드러난다. 모종의 개념적 형상을 염두에 두지 않은 무작위적인 글라인더 질을 통해서 얻어낸 비정형의 형태(informal form) 속에서 또 다른 우연성의 평면을 얻어내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느 것 하나의 완결된 형식적 틀에 안착하지 않으려는 예술가 본연의 실험 정신을 위해 고정된 의미에 귀속하는 기호의 지시작용을 과감하게 걷어낸 것이다.

예술가는 스스로 생장하고 변이하는 생명의 메신저이다. 더불어 예술작품 또한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독자적인 텍스트임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업실 앞마당 잔디밭 군데군데에서 몇 년의 세월 동안 흙과 풀들과 마주하고 있는 그의 묵직한 돌조각 사이로 보랏빛 제비꽃이 곱게 피어났다. 정광식이 표현의 미학에서 행위의 미학으로 전이한 과정 속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마주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정광식의 손길을 거친 입체 덩어리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아울러 한 가지 더 헤아려 볼 것이 있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정갈하게 단단한 물질 덩어리를 썰어내는 작가의 마음에 관한 얘기다. 치열하게 작업하며 시대의 기쁨과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사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이 절실하게 대중과 함께 하길 바라는 것. 정광식의 작업노트에 적힌 독백이다. 절제된 표현, 혹은 그 표현마저도 접고 행위 자체의 흔적만을 보여주려는 차가운 작업 태도 이면에 존재하는 뜨거운 마음이다. 그것이 표현의 미학에 따라 완벽한 재현 시스템에 귀속하는 작업이든 아니면 행위의 미학에 뿌리 내린 재현과 서사의 부정에서 나온 작업이든 간에 예술가의 몸과 마음은 한결같이 진지하게 이 시대의 삶을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를 이루고 있음을 새삼 되새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