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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레닌: 고독한 사유가 빚어내는 혁명의 정치학
박영균(건국대 HK교수), pp. 43-97.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월의 봄, 2013, P. 560.
# 제2장, 블라디미르 레닌: 고독한 사유가 빚어내는 혁명의 정치학
박영균(건국대 HK교수), pp. 43-97.
제1절 오늘날 레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45
레닌(Lénine, 1870-1924)(쉰넷)
‘레닌’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폭압적인 권력을 해체한 ‘실천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을 떠올리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붉은 피가 낭자한 혁명’과 무자비한 ‘권력투쟁’을 떠올린다.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숭배자와 더불어 가장 많은 적대자를 가졌으며 20세기 후반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왜 레닌은 국제정치의 중심적 대립축이 되었을까? (45)
서구에서 가장 성공한 맑스주의 정당이자 엥겔스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칼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이 소속된 독일 사회민주당 ... 일차대전이 발발한 그해 12월 독일 사회민주당은 칼 리프크네이트((Karl Liebknecht, 1871-1919)를 제외한 전원이 전쟁국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했고, 그 스스로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를 배신함으로써 제2인터네셔널(1889-1914)은 붕괴되었다. (46) [토지의 공산화, 사회체(socius)의 연대화, 개인에서 노력과 긴장의 리좀화, - 이 삼위상이 본성상 조화, 공명, 공감으로 이루어질 때 인민의 공산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 세 가지가 합의하지 않은 자들은 트르와제르(3R: 저항, 봉기, 혁명, resistence, revolte, revolution)을 모르는 자들이다. (48VKJ)]
제2인터네셔날의 붕괴 ... 그것은 바디우가 말한바 같이 ‘대재앙’(disaster, dis+astro).. 이었다. (46) [유럽전쟁(1914-1918)은 유럽인들의 방황이었으며, 유일신앙이 자본주의에 의해 표출되어 유일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제국을 만들다 실패하여, 미국에게 유일신앙(자본)의 제국을 넘겨준 사건이었다.] [[정치에서 정체의 변화를 혁명이라 부르는데, 정체의 변화는 파라다임의 변화에서 오는데, 나로서는, 이 변화를 겪는 것이 급변(catastrophe theory, 스토아의 conflagration)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프랑스 혁명과 달리 20세기 정치적 급변은 전쟁 상황이었다. 1차 대전의 끝내기에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2차 대전의 끝내기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는 것이 그 예이다. / 20세기 후반에는 계급으로 환원이 아니라 실재성에 위상 즉 리좀의 확장에서 보아야 할 것이고, 21세기는 다양체의 연관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48VKJ) ]]
그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불균등 발전에 의한 중층 결정을 ‘약한 고리론’으로 발전시켜 ‘제국주의 전재의 내전으로의 전화’라는 테제를 제시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10월 혁명을 이끌었다. (47)
그가 헤겔 논리학을 공부할 때는 제국주의 전쟁의 참화가 임박한 시기(1914-1915)였으며, 그가 국가와 혁명(L'Etat et la Révolution, 1917)을 썼던 시기(1917년 8월-9월)는 1917년 2월 혁명이후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한 탄압과 총사령관이었던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쿠데타가 진행되던 때였다. (48)
제2절 레닌, 맑스주의 혁명가를 대표하는 이름 48
레닌이 카단대 법학과에 입학한 1887년(열일곱), 그의 형(알렉산드로 일리치 울리야노프)은 제정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3세에 대한 암살계획으로, 21살의 꽃다운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레닌은 형을 흠모하였지만 .. 그는 형이 걸었던 길 나로드니키즘(러시아 인민주의)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적이었다. (49)
1905년(1월)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켰던 "피의 일요일"만 하더라도 짜르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짜르=아버지라는 대중의 환상에서 시작했다. 그들은 차르를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겼으며, ‘가퐁 신부’와 함께 궁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군인의 발포로 대중이 죽자 사람들은 본노했다. (50) [분노와 공포의 이중성이 카타스트로피 이론의 정점이다]
바쿠닌(Mikhail Bakunin, 1814-1876)과 크로포트킨(Pyotr Kropotkin 1842-1921) 등 아나키즘이 번창하고 네챠예프(Sergey Nechaev, 1847-1882)와 같은 테러리스트들이 등장했던 것 ... (50)
인민의 벗이란 무엇이며 그들은 어떻게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싸우는가?, 1894와 같은 글을 통해 줄곧 나로드니키들이 꿈꾸는 비자본주의적 길이 공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했다. .. 핵심골자는 첫째 비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과거 회귀적인 낭만적 유토피아이며, 둘째 소수 영웅적 테러리즘이었으며, 셋째 이 둘은 사실상 농노제 해방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로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저발전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51)
그가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을 비판했던 것은 ‘인간 해방은 대중 자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맑스의 격언을 따랐기 때문이다. (52)
레닌은 바로 이점에서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반역자’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에 주목했다. 따라서 레닌은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양자를 연결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변혁적 정치 주체의 형성을 가장 중요한 실천적 과제로 삼았다. (53)
1895년 9월, 레닌은 나중에 멘셰비키의 지도자가 된 마르토프(Yulii Osipovich Martov, 1873-1923)와 함께 상트페테스부르크에서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건설하면서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53)
제3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건설: 경제주의자들과의 투쟁, 그리고 ‘외부’ 48
원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당대회는 1898년 러시아 민스크에서 열렸다. .. 개최당일에 모든 대표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 당시에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54)
레닌 1900년 12월 말, 독일 뮌헨에서 플레하노프(Plekhanov, 1857-1918) 마르토프 등과 함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기관지 이스크라(L'Iskra, L'Etincelle)를 창간하였다. (55)
1903년 2차 당대회에서 레닌과 마르토프는 당원 자격 조건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 볼셰비키는 1917년 10월혁명 때까지 ‘다수파’가 되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당시 멘셰비키 지도자였던 마르토프나 악셀로드와 친했으며, 1917년까지 그들의 편이었다. .. 1912년 프라하에서 있었던 6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이들 두 개의 정파는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조직이 되었다. (55-56)
그렇다면 무엇이 노동자 자신의 ‘내부’이고 ‘외부’인가? 그것은 노동조합적 계급의식과 사회민주주의적 계급의식이다. 레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노동자 계급의 ‘자생성’과 ‘의식성’을 구분하면서 ‘노동조합적 계급의식’과 ‘사회민주주의적 계급의식’을 나눈다. .. 정치 안에서 ‘노동조합적 정치투쟁’과 ‘사회민주주의적 정치투쟁’을 구분한다. (58)
‘노동조합적 계급의식이나 투쟁’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에 관련된 투쟁으로 자본-임노동이라는 자본주의 매커니즘 ‘안’에 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적 계급의식과 투쟁’은 자본-임노동 매커니즘 그 자체를 파괴하고 그 스스로 보편적 계급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메커니즘 ‘밖’에 있다. (59) [한 사회에서 부분으로서 조합 사회체(Syn-Socius) 와 정당 사회체(Part-Socius)를 달리 설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조합은 ‘안’에 있어서 정체(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하니 ‘밖’에 (전위)정당을 만들어서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식으로 들린다. / 자의식은 '안'에 있고 기구(협의체, 회의)는 안에도 밖에도 있을 수 있다.]
당시 레닌이 ‘경제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은 자본-임노동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갈등, 투쟁이 발전하여 사회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60)
따라서 레닌의 악명 높은 테제, ‘외부로부터 도입’에서 ‘외부’는 노동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노동의 교환 메커니즘의 내부(노동조합의 안)냐 외부(노동조합의 밖)냐에 있다. 그리고 여기에 ‘외부로부터의 도입’이라는 레닌의 테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사유의 특징이 주어져 있다. (61-62)
제4절 당파성과 주체의 형성: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 62
레닌은 언제나 노동자계급이라는 당파적 위치를 고수했다. “보편적 진리란 오직 철저하게 당파적인 입장을 통해서만 표명될 수 있다. 진리는 정의상 한쪽 편이다.”(62) - 세바스티앙 뷔젱 외 2인, 레닌을 반복하기, 23쪽
[경제주의자들의 당파성에 반대하여] 그러나 “레닌이 외부성을 고집한 궁극적인 의미는 ‘적절한’ 계급 의식이 ‘자생적’으로 생기지 않으며, 노동자 계급의 ‘자생적 경향’에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자생적’이란 것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기 때문에 ‘적절한’ 계급의식은 고된 노력을 통해서 쟁취되어야 한다.” (65) [레닌의 외부는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가 고된 노력을 통해서 “세포-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 시간이 필요하며, 긴장과 노력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파리꼬뮨을 보고 나서 “공산당 선언”을 정정한 맑스의 입장 선회 이후 맑스주의 정당은 기존의 국가를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맑스의 입장이 국가 권력에 대한 장악으로 바뀐 것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성장하면서부터였다. (64)
레닌은 파리꼬뮨 이후 맑스의 정정을 알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국가와 혁명(L'Etat et la Révolution, 1917)을 썼다. 여기서 그는 맑스주의의 국가에 대한 혁명론을 파괴와 대체, 소멸의 변증법으로 규정한다. (64)
레닌은 1905년 혁명 당시에도 국가권력이 되는 것은 ‘소비에트’라고 말했다. (65)
하지만 맑스-레닌이 사유한 민주주의는 대의제적 의회민주주의가 아니다. (65)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은 각각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해를 대변한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정당은 자본-임노동이라는 동일성 안에서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임노동자 이해가 아니라, 그것을 벗어나 자본-임노동 자체를 폐기하는, 무산자로서 ‘프롤레타리아의 보편화’ 및 정치권력의 주체로 바꾸어 놓는데 있었다. (65) [행동하는 양심, 깨어있는 시민, 인민의 자기 형성이 본래 인간성의 실현이다. 그 인간성이 심층이다. 심층에서 인민들 간의 연대란 변증법적이다. (49PMD)]
[레닌의 전복적 사유] 그것은 바로 ‘내용(노동)’이 ‘형식(조직)’ 생산하고 규정한다는 일반적 상식을 전복하고 오히려 당이라는 형식이 프롤레타리아라는 정치적 주체화라는 내용을 규정하고 생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은 바울이 예수를 형식화하고 라깡이 프로이트를 형식화한 것처럼 레닌이 “당을 역사적 개입의 정치적 형식으로 정의함으로써 맑스를 형식화했다”고 말한다. - 지젝 “혁명이 다가온다” (66) [나로서는 형식(형상)을 세우는 것은 관념론화로 기우는 경향이라 본다. 교회의 성립이 노예의 재산(생산물)을 차지하기 위한 방법들 중의 하나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이 매개물의 역할을 하는 것은 변증법적 과정이 어렵고 또한 성공이 드물기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
따라서 당은 전 인민의 관점에서, 사회민주주의라는 미래 사회를 건설하는 관점에서 투쟁과 사건에 개입하고 구성원들을 조직한다. (66)
당원은 노동자와 다르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자신의 생존권을 향상시키는데 몰두하는 노동자가 아니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해방이라는 짐을 조직 형식에 의해 부여받음으로써 비로소 그 스스로 자신을 자각하는 ‘주체’이다. (67) [생명체든 물체이든 자연 속에 있다는 자각이 정체성이며, 보편적 해방은 인성의 회복이다.]
레닌은 마르토프(Martov, 1873-1923)가 당원의 자격 조건을 ‘당의 명령을 수행하는 활동’에 멈춘 것을 비판하고 그 스스로 당적 형식에 의해 강제되는 주체로, 즉 ‘당내의 기관에 직접 참여하는 자’로 정의했던 것이다. (68) [당 내에서도 인민 속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조차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레닌의 조직론을, “모든 당 기관의 당 중앙부에 대한 맹목적 복종”과 “사회혁명당 주변 인물과 조직화 혁명 단위 사이의 엄격한 구별”이라는 두 가지 원리에 근거한 중앙집권주의 규정하면서 모든 비판을 여기에 맞추었다. (68)
레닌 사후, 아마도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람시(Gramsci, 1891-1937)일 것이다. 그람시는 맑스주의 정당 또는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있어야 할 것”을 창출하는 권력의 의지적 집합체이자, 새로운 대중의 정신을 대중 스스로 창출하게 하는 “창조자요 선도자”로 규정했다. ... 그는 자신의 유물론을 레닌적 전통에 입각해서 ‘실천적 유물론’으로 규정하고 당시 러시아 공산당(혁명 후 개칭) 내에 존재하는 기계적 유물론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 [인민 속에서 인민이 인민에 의해 인민을 위한 .. ]
제5절 실천적 유물론: 전복적 사유와 주체의 자리 70
[전복적 사유: 들뢰즈 개념인 것 같은데... 방향의 이중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경제주의적이고 진화론적 러시아 맑스주의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플레하노프(Plekhanov, 1857-1918)였다. (70)
레닌은 과학이나 보편을 ‘제3자의 눈’으로 본 ‘경험적 사례들의 다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체제나 인식, 독단을 벗어날 수 있는 ‘사건의 고유성’을 읽어낼 수 있는, 특수한 주체의 위치, 그 당파적 개입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주체의 끼어들기가 불가피하다면 문제는 그 ‘끼어듦’이 그 사건의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존재의 위치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72) [논자의 과학과 보편이란 문제가 정치적 연관 속에서 논의될 수 있는 주제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보편은 형이상학의 문제, 과학은 제반 논리학(학문)의 문제이며, 정치와 사회체(의회, 국가)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일 것이다.]
레닌의 실천적 유물론이 설정하고 있는 주체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것이 아니라 ‘기괴한 어떤 것’에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며 그 진리를 생성하고자 한다. (72) [기괴한 것은 레닌의 용어일까? 아래 글에서 보면 일상이 아닌 “사건”일 것인데, 이런 해석적 표현도 들뢰즈의 특이성, 자체성(ipséité)에 닮았는데, 사건의 고유성이 있는 경우이다.]
1905년혁명과 1917년 2월 혁명은 객관적 정세에 의해 기존의 일상을 파괴하면서 돌출된 사건이었다. ... 1905년 혁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후 스톨리핀(Stolypine, 1862-1911)의 개혁 정치라고 하는 반동기가 시작되었다. (75)
[유물론과 경험비판론(Matérialisme et Empiricocriticisme, 1909)] 이 당시 레닌의 정치적 개입이 가지는 이중적 특정은 원칙의 단호함과 전술 운용의 유연함이다. (75) [정치에 대한 실천적 행동이 사회체의 유동성과 진화성(혁신성, 개조성)을 인정하는 편에서면 의지적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다. 변화와 혁명은 의지적 개입이라는 측면을 인정하는 것이다]
제6절 1917년 소비에트: 무장한 예언가와 인민의 권력기관 76
레닌의 정치적 개입은 언제나 비판의 무기를 무기의 비판으로 바꾸어 놓는,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무장한 예언자’로서의 주체의 자리를 고수해왔다. (76) [형상의 질료 개입을 인정하는 것인데, 질료의 형상 형성 작업까지는 아직도 중요한 차원이 아닐 경우이다.]
레닌은 1917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될 수 있는 「사월테제(Thèses d'avril)」[“당면한 혁명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임무”라는 제목]를 발표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심지어 지노비예프(Zinoviyev, 1883-1936)를 비롯하여 크룹스카야까지 ‘혹시 레닌이 미친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였다. (76)
에초 ‘소비에트’는 1905년 혁명 당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노동자 대중의 파업을 조정하는 기관으로, 대중들 자신에 의해 창조된 조직이었다. (77)
1905년 당시 레인의 ‘노동자 농민의 동맹에 근거한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전술은 원칙적으로 1917년 레인의 ‘소비에트 혁명’ 전술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따라서 1905년에는 민주주의 혁명의 급진화, 보다 폭넓은 투쟁 동맹의 확대가 필요했다면, 1917년 혁명에서는 ‘소비에트’가 임시혁명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그 스스로 ‘임시 혁명정부’가 되는 전술이 필요했다. (79) [사회의 제도와 조직들 구석구석에 혁명적 재코드화가 될 수 있을 경우에 임시 혁명정부 전술은 타당할 것이다.]
소비에트는 공산주의자들, 또는 혁명적 노동자들의 조직체가 아니다. 그것은 혁명 기관이자 대체 권력체이지만 ‘당’이 아니며 대중의 민주적 자치 권력체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레닌주의적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으며, 노동자 대중을 벗어난 사회 혁명적 대중 조직화를 새롭게 사유할 필요성이 있다. 그람시는 그 스스로 레닌주의자를 자처했으며 부르주아가 만들어 놓은 시민사회와 국가 장치 사이의 균열 가능성, 이용 가능성을 탐색했다. (80-81)
그람시는 여기서 다른 가능성, “새로운 문화의 창출을 위한 가능성과 필연성”을 보았다.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 지식인’이 아니라 ‘유기적 지식인’의 역사적 블록의 창출이라는 과제를 제출했다. 이것은 단지 보루로서 기능하는 시민사회의 진지전과 관계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사회주의 혁명과 관련되어 있다. (81) [시민사회의 문화의 새로운 창발은 사회의 혁명이며 인격성에서 질적 변화를 가져다 준다. ]
그람시는 “헤게모니 개념의 정치적 발전은 정치적 실천의 진보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학적 진보까지 대변한다” .. “정치정당은 ‘사실상의 권력’을 지니고 있고 헤게모니적인 기능을 행사하며 ‘시민사회’ 속의 이해들 간의 갈등을 균형지우는 역할도 수행한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사실상 정치 사회와 깊이 얽혀 있어서 모든 시민들은 오히려 정당이 군림도 하고 통치도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는 이러한 현실에 입각할 때 전통적인 형태의 헌법을 창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오직 가능한 것은, 국가의 목표가 바로 국가 자신의 종식과 소멸이라는, 다시 말해서 정치사회를 시민사회로 재흡수한다는 원칙의 체례를 창출하는 일이다”(81) - 옥중수고 I 268.
제7절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제3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시대의 맑스 82
맑스-엥겔스가 1세대 맑스주의 역사를 대표한다면, 제2세대 맑스주의 역사를 대표하는 사람은 카우츠키-베른슈타인 대 레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각각 제1인터네셔널과 제2인터네셔널, 제3인터네셔널을 대표한다. (82)
수정주의 논쟁은 1896년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이 미래(Die Zukunft)에 「사회주의의 여러 문제」라는 논문을 연재하면서 시작되었다. .. 따라서 이후 수정주의 논쟁의 핵심으로 부각된 것은 ‘제국주의’와 ‘의회제’였다. (84)
[맑스는 1867년에 아일랜드 독립지지로 돌아서면서, 민족해방과 수탈에 관심을 갖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제국주의는 이런 맑스의 이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식민지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전재’으로 전화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85)
<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L'impérialisme, stade suprême du capitalisme, 1916)>
레닌은 제국주의의 다섯 가지 지표(독점제, 금융과두제, 자본 수출, 영토 분할, 국제 독점의 세계 경제분할과 열강의 영토 분할)로 규정하면서 그 당시의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이 ‘독점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85)
그 당시 카우츠키(Kautsky, 1854-1938)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리프크네히트(Liebknecht, 1871-1919)나 로자 룸셈부르크의 혁명적인 분파와 베른슈타인류의 개혁적인 당 지도부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자임하는 ‘중앙파’적 입장을 취했다. 반면 레닌은 아주 단호하면서 극단적으로 편향된 입장을 취했다. (86)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눈으로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 전화’라는 슬로건은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자국의 패배를 오히려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7) [마오의 등장도 내전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극한적인 사유의 정치학은 오직 ‘혁명가 레닌’만이 주창할 수 있는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식의 사유가 ‘혁명가 레닌’을 만들었다. 이것은 그의 정치적 사유가 극단적인 당파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학은 어설프게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 부르주아 지배의 참상을 타협적으로 교정하려 하기보다는 모순을 극대화하고 두 개의 적대적 세계 가운데 프롤레타리아의 세계를 선택하는 당파적 실천, 특히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연결되는 무기의 비판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실천을 수행하는데 있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레닌은 서유럽 맑스주의와 전혀 다른 혁명적 맑스주의 전통을 만들었다. (88)
그리고 마침내 소비에트 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최초의 맑스주의 혁명가가 되었으며, 서유럽에서 정통이 되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맑스주의(카우츠키의 맑스주의)에 벗어나 이후 제2차대 세계대전까지 이어지는 반파시즘 투쟁과 민족해방 투쟁을 이끌었던 제3인터네셔널을 창설한 제국주의 시대의 ‘맑스’가 될 수 있었다. (89)
제8절 레닌 반복하기 90.
맑스주의가 추구하는 혁명은 미지의 혁명이다. 이 미답의 영역을 실천적으로 개척한 사람은 레닌이었다. (90) [혁명, 인민의 삶에서 인민이 스스로 인격성을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는 1917년 혁명이후 제헌이회 소집 선거를 실해 했으며, 군대로 이를 강제 해산했다. 1921년 2월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이 일어났으며 레닌은 이를 진압하고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 분파활동을 금지 시켰다. (91) [권력의 수렴은 재영토화이며 새코드가 필요하다.]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흔히 레닌 이후 트로이카로 불리는 카메노프(Kamenev, 1883-1936), 지노비예프(Zinoviyev, 1883-1936), 트로츠키(Trotsky, 1879-1940) 사이의 권력 투쟁의 결과였는지 모른다. 어쨌든 트로이카에 끼지 못했던 스탈린은 이 과정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레닌을 자신의 권력에서 가장 중요한 화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92)
스탈린에게 반복되는 레닌은 언제나 정세들에 묶여 있는 레닌이라는 텍스트 안에 있다. (92)
지젝은 ‘생성 중인 레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레닌으로의 변증법적 회귀는 ‘좋았던 옛 혁명기’를 향수 속에서 재연하는 것도,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옛 프로그램을 ‘새로운 조건’에 맞추는 것도 아니다. 그 보다 더 이 귀환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대전 - 더 정확히는 1914년의 파국으로 진보주의라는 긴 시기가 정치적 이념적으로 붕괴하고 난 뒤 - 이라는 조건 속에서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는 ‘레닌의’ 제스처를 현재 지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세바스티앙 뷔젱 이외, 레닌 재장전, 23-24.
* 참고문헌 95
* 미주 96-97.
(49PMD)
# 인명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 제정 러시아의 혁명가ㆍ무정부주의자. 귀족 출신으로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잡혀서 시베리아에 유배 가던 중 탈출하여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무정부 운동을 지도하여 제일 인터내셔널에 참가하였으나, 마르크스와 주도권을 두고 다투다가 제명되었다. 저서에 ≪신(神)과 국가≫ 따위가 있다.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 유태계 독일 사회주의자. 미래(Die Zukunft)에 「사회주의의 여러 문제」라는 논문을 연재했다. 제국주의의 독점자본 문제보다 보통선거를 통한 의회제로 개혁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반 파시즘을 주장한 이탈리아 지식인, 정치인 그리고 지도자와 사상가.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이며 지도자.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서 투옥되었다. 그는 문화 및 정치적 리더십을 분석하였고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를 비판하는 문화적 헤게모니 개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메네프(Lev Borisovich Kamenev, 1883-1936) 러시아의 정치가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원으로 혁명운동에 가담하였고 볼셰비키 최초의 정치국 국원,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등 당과 정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후에 반(反)스탈린파로서 숙청.
카우츠키(Karl Kautsky, 1854-1938), 암스테르담,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 그는 빈대학교 재학시절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1880년 취리히로 이주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케렌스키(Aleksandr Fyodorovich Kerensky, 1881-1970) 소련의 정치가. 1917년 이월 혁명 후 사회 혁명당 당수로서 임시 정부의 수상 겸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반혁명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시월 혁명으로 실각하여 1918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코르닐로프(Lavr Georgyevich Kornilov, 1870-1918) 제정 러시아의 군인. 1917년 이월 혁명 후 러시아군 최고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17년 8월과 시월 혁명 후 두 차례 반(反)혁명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전사하였다.
크로포트킨(Pyotr Alekseyevich Kropotkin 1842-1921) 러시아의 혁명가, 지리학자, 아나키스트. 《한 혁명가의 회상》(Memoirs of a Revolutionist, 1899), 《상호부조론》(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 1902)
쿠벨라스키(Stathis Kouvelakis, s.d.) 그리스 시리자의 전 중앙위원이었으며, 지금은 민중연합에 속해 있다.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정치이론과 교수로, 이전에는 파리8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했다. 관심사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전통, 독일철학과 비판이론이며, 저술로 『Philosophy and Revolution: From Kant to Marx』(2002)가 있고, 뱅상 샤르보니에와 함께 『Sartre, Lukacs, Althusser: De marxistes en philosophie』(2002)를 편집했다. 그 밖에 『레닌 재장전』을 펴냈다.
나데즈다 크룹스카야(Nadezhda Krupskaya, 본명 Nadezhda Konstantinovna Krupskaya, 1869-1939), 러시아 제국의 여성 교육학자이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교육학자 겸 정치가이자 저술가이고, 레닌(Vladimir Lenin)의 부인.
레닌(Lénine Ленин, Vladimir Ilitch Oulianov Влади́мир Ильи́ч Улья́нов, 1870-1924)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 혁명가로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특별히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이자,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인 동시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지도자로 인정받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흔히 알려진 니콜라이 레닌이라는 이름은 혁명가로서 그가 사용하던 가명이다.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1919) 독일 정치가, 스팔타쿠스 동맹, 독일 공산당 창당. / 칼의 아버지,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 1826-1900) 독일의 사회주의자. 한때 생시몽 주의자. 카를 마르크스의 측근으로 독일 사회민주당을 창설했다(마르크스주의).
마르토프(Yulii Osipovich Martov, 1873-1923) 러시아 혁명가, 멘세비키 지도자인 마르토프 는 노동계급의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캠페인을 벌였고, 체카의 권력 남용 및 레닌과 트로츠키의 '권력 집착'을 비난했다.
네차예프(Sergey Gennadievich Nechaev, 1847-1882). 제정 러시아의 혁명가직업 혁명가당의 조직을 꾀하는 등 극단적인 혁명 운동을 주장하였다. 동지를 살해하고 망명하였으나, 뒤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惡靈)>은 이 사건을 취재한 것이다.
플레하노프(Georgy Valentinovich Plekhanov, 1857-1918) 제정 러시아의 혁명 사상가. ‘노동 해방단’을 조직하여 수정주의와 투쟁하였으나, 레닌과 대립하고 멘셰비키를 지도하여 소비에트 정권을 부인하였다. 저서에 ≪사적 일원론(史的一元論)≫, ≪유물론사 연구≫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 폴란드 출신의 독일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이며 사회주의자, 철학자 또는 혁명가이며, 레닌주의 비판자이다.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 소련 공산당 서기장(1922-1953)과 국가평의회 주석(1941-1953).
스톨리핀(Piotr Arkadievitch Stolypine, Пётр Аркадьевич Столыпин, 1862-1911) 러시아 제국의 총리였다. 1906년 7월 21일부터 1911년 9월 18일에 암살될 때까지 차르 니콜라이 2세 밑에서 대신회의의장(총리)을 역임하였다.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 소비에트 연방의 전 해군 군사인민위원(1918 - 1925), 외교관, 정치가, 사상가, 노동운동가, 볼셰비키 혁명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지노비예프(Grigory Yevseyevich Zinoviyev, Григо́рий Евс́еевич Зин́овьев, 1883-1936), 유태계,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가이다. 레닌 사후 소련공산당을 이끌었으나, 스탈린에게 숙청되다.
1875 독일 사회민주당 (獨逸 社會民主黨,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SPD, 에스페데) 1875년 창당.
1889(19살) [프랑스 혁명 100주년] 파리에서 ‘제2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적 조직이 결성되었다. 제2인터내셔널 시대(1889-1914)에 독일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자인 K.J. 카우츠키의 지도 하에 있었다. 당시 독일사회민주당은 다른 여러 국가의 특수한 조건에 따라 혁명의 방법을 달리하는 개량주의를 표방하였다.
1905년 1월 러시아 혁명의 출발점은 1월 9일에 발생된 "피의 일요일 사건"이었다
1905년 4월 25일~5월 10일 / 런던 - 볼셰비키들만의 회합.
1919 제3인터내셔널, 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1919-1943)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를 코민테른(Comintern)이라고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제2인터내셔널이 와해된 후 러시아의 레닌의 지도 하에 각 국 노동운동 내의 좌파가 모여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된 것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사상적 기초로 중앙집권적 조직을 가지며 각국 공산당에 그 지부를 두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통한 사회주의의 달성이라는 노선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2인터내셔널과 구별된다. / 1943년 해산되었다. 그러나 1995년 11월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프랑스․독일․브라질․인도 등 29개국(북한․베트남․중국 불참)이 참여한 가운데 재창설되었다.(49P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