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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달밤(月明夜)
글 올리고 며칠 지나서 보니 첨부했던 사진자료들이 모두 사라졌더군요ㅠ
다시 사진넣는 작업을 하다보니 일이 너무 커져 포기했다가
마무리했습니다.^^
한글파일도 첨부했으니 기초자료이지만 필요하신분은 활용하십쇼.
〔 이순신 장군 동상 자료 총정리 〕
안녕하세요. 대전에 달밤입니다.
지난 3월 진해에서의 학술대회 및 답사 후기를 작성하면서 느꼈던 궁금증들중 거북선을 포함한 큰 주제는 능력밖이라 제외하고 그나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마음이야 장군님 초상화까지 함께 살펴보고 싶었지만 또 그래야 충무공 이순신 像의 변화과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되면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 이번엔 이순신 동상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참고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과 동상에 관해서는 격군님께서 작년에 쓰신 「광복 직후 이순신 선양과 표준 영정의 봉안」 논문과 2018년에 발행한 『충무공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서』 란 단행본과 더불어 박계리 「충무공동상과 국가이데올로기」 논문이 가장 대표적이라서 이 자료들을 많이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전국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주요 동상 현황표 - 2023년 4월 30일 현재 | |||||
번호 | 제작년 제작자 | 위치 | 재질 / 규모 | 주요 특징 및 비고 | 동상 정면 사진 |
1 | 1952년 4월13일 / 윤효중 작가 | 경남 창원시 진해구 북원로터리 | 청동 / 동상 4.82m 대좌 4.18m 전체높이 9m / 무게 약 3톤 | 1. 최초 이순신장군 동상 2. 이순신 동상중 최초로 문화재 지정 (창원 근대건조물 제1호) 3. 임진왜란 발발 육주갑 기념 제작 4. 고증 논란 발생 (공인영정인 김은호 작 이순신 영정과 동상이 많이 다름) | |
2 | 1953년 5월31일 / 김경승 작가 | 경남 통영 남망산 공원 | 청동 / 동상 4.82m 대좌 4.18m 전체높이 9m / 무게 약 3톤 | 1. 동상건립문과 박계리 논문에는 1952년 11월 19일 제작으로 나오나 실제 제막식은 늦게 진행되었음. 2. 진해 충무공상의 고증논란때문에 김경승은 김은호의 표준영정을 모본으로 삼아 제작 3. 두정갑 대신 두석린 갑옷에 칼도 두손으로 잡지않고 허리에 참. | |
3 | 1955년 12월22일 / 김경승 작가 | 부산 용두산 공원 | 청동 / 동상 3.8m 대좌 8.2m 전체높이 12m | 1. 부산포해전의 승리를 기리기 위하여 제작 2. 이번엔 통영 충무공 동상이 오히려 중국식 복제라며 고증논란 발생 윤효중이 반박하며 도와줘 작업진행. 3. 목에 두른 포를 오른쪽 어깨밑으로 내린것외에 통영 남망산것과 유사. | |
4 | 1967년 4월28일 / 탁성오 작가 | 전남 여수 자산공원 | 청동 / 동상높이 약 4m 추정 대좌 10m 추정 전체높이 14m | 1. 박정희 대통령 하사금으로 제작한 첫 동상 2.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는 북채(등채X)를 들고 있어 칼 이외의 장비가 최초로 등장. 3. 부동자세에서 벗어난 최초의 이순신 동상 (오른발을 앞으로 내밈) 4. 하체에 비해 상체비율이 과대하게 발달하여 부자연스러움 | |
5 | 1968년 4월27일 / 김세중 작가 | 서울 광화문 광장 오른손으로 칼을 든 유일한 동상인줄 알았는데 1974년 강진 금강사 앞에 세운 동상도 이것과 자세, 표정이 거의 비슷함. | 청동 / 동상 6.93m 대좌 10.56m 전체높이 17.49m | 1. 대한민국 대표 이순신 동상 (전체크기 2등) 2. 박정희 대통령의 애국선열조상(彫像) 세우기 제1호 사업 3. 설립초기부터 현재까지 고증문제로 인한 재건립과 이전 논쟁이 계속된 동상 4. 대한민국의 중심 세종로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 할 인물의 동상을 세워라! | |
6 | 1973년 3월30일 / 미상 | 경남 사천 노산공원 | 청동 / 동상 2.5m 대좌 3.5m 전체높이 6m | 1. 김경승 작가 이후 왼손으로 칼을 잡은 동상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다시 최초 이순신 동상인 진해 윤효중식의 두 손으로 칼을 모아 잡은 형식으로 회귀한 유일한 동상임 2. 1976년과 1978년에 세워진 같은 사천지역의 선진리성과 대방진굴항, 모충공원의 이순신 동상들은 모두 김경승식으로 왼손으로 칼을 잡음. | |
7 | 1973년 12월 / 김경승 작가 | 서울 국회의사당 로텐더홀 | 대리석 (건물내부라는 특수성 때문) / 동상 2.4m 대좌 1.76m 전체높이 4.16m | 1. 유일한 대리석 동상. 2. 통영,부산에서 만든 동상을 바탕으로 하되 장검은 김세중 작품 모방 중앙청에 제작 설치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들어서며 다시 국회로 이전. 3. 국회라는 상징성으로 작가의 친일행적 논쟁 4. 결국 2015년에 철저한 고증을 거쳐 새로 만들면서 이 동상은 국가기록원으로 이관. | |
8 | 1974년 8월15일 / 탁연하 작가 | 전남 목포 유달산 공원 | 청동 / 동상 3.7m 대좌 약4m추정 전체높이 약 7.7m 추정 | 1. 문화공보부 심의필증 제1호 이순신 동상. 2. 동상은 일본쪽을 정확한 각도로 바라보 도록 중심선을 기준으로 투구까지 약 0.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3. 왼손으로 칼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마치 칼을 뽑을 듯 들어 올린 최초의 이순신 동상. | |
9 | 1976년 4월11일 / 김대성 | 경남 사천 선진리성옆 진삼국도 | 청동 / 동상 2.65m 대좌 3.85m 전체높이 6.5m | 1. 개인이 (재일교포 사업가 윤익성) 사재로 제작한 최초의 이순신 동상. 2. 통영 남망산공원 동상과 기단부분은 동일한데 동상모습은 칼을 쥐지 않고 반듯하게 바닥에 대고 있는 상태로 다름. 3. 2003년 도로가 새로 나며 약 700미터 이동 하여 재설치하면서 기단석을 전면 교체하여 형태도 완전 바뀌었음 | |
10 | 1978년 5월20일 / 미상 | 경남 사천 대방동 대방진 굴항 | 청동 / 동상 약 2.5m 추정 대좌 약 4.5m 추정 전체높이 약 7m 추정 | 1.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된 대방진굴항 (거북선을 숨겨둔곳)에 삼천포청년회의소가 세운 동상. 2. 비슷한 시기에 사천 진삼국도변에 세운 동상과 갑옷, 투구등은 비슷한데 칼은 바닥에 짚지않고 왼손으로 잡은채 옆으로 비켜 들고 있으며, 오른팔은 거의 그대로 내려뜨린 모습이다. | |
11 | 1986년 3월 20일 / 이일영 작가 | 경남 진해 해군 사관학교 (현재 해군교육 사령부 정문 이전) | 청동 / 동상 약 2.5m 추정 대좌 약 3.5m 추정 전체높이 약 6m 추정 | 1. 무기 대신 등채를 든 최초 이순신 동상으로 기존 갑옷(두석린)과는 다른 형태(두정갑)며 전면 옷고름을 최초 표현 2. 2015년 11월27일 해군사관학교 앞에 새로운 동상을 만들며 2016년 3월 해군교육사령부 정문 앞으로 이전 설치 3. 1946년 해사 개교후 40년뒤에 해군의 상징인장군의 동상을 해군도 아닌 해사졸업생(제9기)들이 제작한 것은 아쉬움이 큼 | |
12 | 1997년 2월 / 미상 | 경남 사천 모충공원 | 청동 / 동상 약 2.5m 추정 대좌 약 1.5m 추정 전체높이 약 4m 추정 | 1. 사천(삼천포 포함)에서 4번째로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 (단일지역 최다 조성) 2. 1997년에 세웠는데도 동상모습은 1970년대 사천지역 동상과 유사함. 3. 공원내에는 1952년 11월 19일 세운 '성웅이순신공덕기념비'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 더 일찍 이곳에 동상이 세워지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움. | |
13 | 1999년 4월 28일 / 최승호 교수 | 충남 아산 신정호 관광단지 | 청동 / 동상 8.45m 대좌 7m 전체높이 15.45m | 1. 문화관광부 고증아래 현충사 표준영정을 사실기법으로 묘사했다고 하나 둔중함. 2. 이 동상부터 갑옷 전면부의 옷고름을 너무 강조 3. 충무공 탄신해인 1545년에 맞춰 동상의 전체높이를 제작하였음 (크기에 최초 의미부여) 4. 동상 뒤편에 대형 부조작품 최초 설치(높이 4m, 넓이 28m 규격은 충무공 탄신일) | |
14 | 2005년 8월 14일 / 정욱장 교수 | 경남 통영 이순신 공원 | 청동 / 동상 5.2m 대좌 12.14m 전체높이 17.34m 9개월 공사 총 10억원 (동상 5억원) | 1. 한산도에서 학익진을 지휘하는 충무공 이순신의 당당한 이미지 표현. 2. 전체적으로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과 비슷한데 왼손으로 잡은 칼은 보다 더 과장되게 표현 (동상 5.2m, 칼 5.1m) 3. 오른손 검지를 펴서 적을 가르키는 최초 동상 4. 전체 크기 세번째 | |
15 | 2008년 10월11일 / 미상 | 전남 진도 이충무공 승전공원 | 청동 / 동상 15m 대좌 15m 전체높이 30m 3년간 공사 예산 총 18억 무게 약 30톤 | 1. 전체높이 30m로 대한민국 최대 크기의 이순신 장군 동상. 2. 울돌목의 빠른 유속과 전투의 긴박감을 이끄는 장군의 비장함 표현 3. 동상 손가락 방향은 일본을 지나 태평양까지 4. 갑옷은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자료와 명량대첩을 재현한 방송 등을 근거로 제작 | |
16 | 2012년 5월9일 / 이동훈 작가 | 전남 해남 울돌목 고뇌하는 이순신 | 청동 / 동상 2m 대좌 약1.2m추정 전체높이 약3.2m추정 | 1. 전체높이 약 3.2m의 가장 작은 이순신 像 으로 울돌목 건너편 진도에 세워진 가장 큰 동상과 대조적. 2. 갑옷을 입고 칼을 든 수많은 동상과 달리 동다리 차림에 지도를 든 최초의 이순신 동상 3.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바라보며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며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 | |
17 | 2012년 5월9일 / 김대길 교수 | 전남 여수 중앙동 이순신 광장 | 청동 / 동상 6m 거북선 1.5m 대좌 6.4m 전체높이 13.9m 약 9억원 소요 | 1. 대좌 위에 거북선을 놓고 그 위에 동상을 세운 최초의 이순신 像 2. 1967년에 세운 자산공원 동상처럼 왼손엔 칼을 짚고 오른손엔 북채를 쥐고 있으며 복장도 유사함 3. 제작과정의 문제로 인하여 뉴시스 이종승 회장 건립후 여수시에 기부채납 | |
18 | 2015년 11월27일 / 김영원 작가 | 경남 진해 해군 사관학교 | 청동 / 동상 4.97m 대좌 6.14m 전체높이 11.11m | 1. 조선수군의 주무기인 활을 왼손에 든 최초의 이순신 동상으로 오른손에 등채, 왼쪽 어깨에 쌍룡검을 메고 있는 실전 모습 2. 전체높이 11.11m는 해군창설일, 기단높이 54cm는 이순신 나이, 기단안 조명등수는 12척배, 주변판석 330조각은 왜적선수 등 상징 3. 이순신 동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모범사례 | |
19 | 2015년 11월2일 / 하도홍 작가 | 서울 국회 의사당 로텐더홀 | 대리석 / 전체높이 약 4m 추정 약 5억5천만원 | 1. 고증논란으로 새롭게 만든 최초 이순신 동상. 청동이 아닌 유일한 대리석 동상. 기존 동상은 국가기록원 이관(전시X) 2. 새 동상은 표준영정을 기준으로 복식과 무구는 유물 등의 고증을 통해 임란 당시 표현. 장검 대신 쌍용검 교체 3. 기존것과 같이 백색 대리석으로 제작 (옆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고려) | |
20 | 2017년 4월28일 / 미상 | 경남 남해 이순신 순국공원 | 청동 / 동상 약 5m 추정 (칼길이 포함) 대좌 약6.19m추정 전체높이 11.19m 동상포함 총 280억 | 1. 노량해전을 모티브로 판옥선 위에 올라타 칼을 뽑아 들고 지휘하다 왼쪽 가슴에 총탄을 맞고도 전투를 독려하는 모습 (칼을 뽑아든 최초의 이순신 동상) 2. 전체 무구의 구성과 갑옷 등은 해군사관학교 신 이순신 동상과 비슷. 3. 동상주변에는 높이 5m, 길이 220m의 대형 도자기벽화에 노량해전의 출정, 승리 기원, 전투, 순국, 오늘의 모습 등 5개 장면 재현 | |
21 | 2019년 11월11일 / 미상 | 목포 고하도 해상데크 | 청동 / 동상 약 2m 추정 대좌 약 2m 추정 전체높이 4m | 1. 명량대첩 이후 전력정비를 위해 106일 동안 고하도에 머무른 개선장군 이순신의 동상 2. 복식이나 자세 등 전체적인 동상의 모습은 진도 이충무공 승전공원의 이순신 동상을 닮았으나 동상의 크기는 비교가 안됨(2m : 15m) | |
22 | 2019년 말 / 미상 | 전남 여수 율촌 장도공원 | 청동 / 동상 약2.5m추정 대좌 약3m추정 전체높이 약5.5m추정 | 1. 활을 쏘는 모습을 한 최초의 이순신 동상. 2. 동상의 색상이 청동의 단색이 아니라 팔토씨를 진하게 처리하는 등 색감의 변화를 준 최초의 이순신 동상. 3. 산업단지를 조성하며 급하게 만들었는지 자료가 전혀 없으나 나름 조각상은 고증을 거쳐 잘 만든 것으로 보임 | |
23 | 2021년 2월24일 / 미상 | 충남 아산 내포신도시 테마광장 | 청동 / 동상 약2.5m추정 대좌 약2.5m추정 전체높이 5m 폭 1.3m | 1. 내포신도시 테마광장에 충청남도의 15개 시군을 대표하는 기념물로서 아산시가 새롭게 세운 이순신 동상. 2. 기단부를 판옥선과 물결을 모티브로 심플하게 제작하였다. 3.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동상임에도 불구하고 왼손에 칼만 한자루 들고 있으며 오른팔은 어정쩡하게 들어 올리고 있다. 사정이 있겠지만 아쉬움이 남는 동상이다 |
자 그럼 이제부터는 전국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진해 북원로터리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경남 창원시 진해구 도천동 북원로터리
나. 제작일 : 1952년 4월 13일(박계리 2004년 논문에는 4월 16일)
다. 제작자 : 윤효중 작가
라. 규 모 : 동상 높이 4.82m, 대좌 4.18m, 총 9m / 청동 (무게 약 3톤)
마. 특 징 : 대한민국 최초 이순신 동상
바. 지정현황 :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호(이순신 동상중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지정문화재)
1950년 해군에서 주관하여 동상 건립기성회(회장 마산시장 강봉용)를 구성하고, 마산, 창원, 통영, 고성, 김해 등 여러곳에서 성금을 모아 1952년 4월 13일 건립하였다.
조상자는 윤효중이며, 동상 앞면의 제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규모는 총 높이 900cm, 동상 높이 460cm이고 좌대 뒷면에는 노산 이은상의 찬문을 아래와 같이 새겨 붙였다. - 출처 :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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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임진왜란 발발 6주갑 – 제장명 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4월 13일 경남 진해에서는 윤효중(1917~1967)이 조각한 이순신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는 전쟁중이었던 1950년 11월 11일 해군창설기념일에 해군통제부 사령관 김성삼에 의해 발의되었다. 그는 해군창설일인 11월에 맞춰 해군발생지로 인식되어 온 진해에 이순신 동상을 설치하기로 한 후 동상건립위원회를 구성 한 뒤 마산, 창원, 통영, 고성, 김해 등에서 3천만원의 기금을 갹출하여 그해 12월 8일 윤효중에게 제작을 의뢰하였다.
그러다가 1952년 제막을 할 때에는 당시 제작비 총 1억 6천만원, 연 인원 3천여명(진해군지에는 780명)이 동원되어 국책사업화 되어 있었다. 윤효중 작가는 약 1년간이라는 긴 세월로 그 원형을 완성하였고 해군 공창에서 불철주야 약 1개월여의 단시일 내에 동상을 완성하였다.(이와 관련하여 연합뉴스 2019. 04. 24 기사에서 당시 제작에 참여했던 이진수 옹(95세)은 "당시 국내에서 4m가 넘는 대형 동상을 만들 수 있는 곳은 해군 조함창 뿐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10여명의 대원이 4개월 이상 주형을 만들고 쇳물을 부어 동상을 만들었다"면서 "우리 손으로 만든 충무공 동상이 진해만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순신의 탄신일인 4월 2일 안치식 후 4월 13일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특히 1952년 4월 13일은 한일회담에서 치바 망언이 있은후라서인지 제막식은 보다 성대하게 열렸다. 이순신 동상의 전면에는 이승만의 친필 휘호가 새겨졌으며, 제막식과 더불어 각종 체육대회가 기념으로 열렸다. 이처럼 해군과 관련되어 동상을 설치함으로써 근대국가의 해군이 전근대국가의 수군 장수와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고, 근대 해군의 연원으로서 이순신의 수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이순신의 모습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자. 작가 윤효중은 이순신이 죽기 전일 비장한 결심을 하고 눈물로 기도하였던 순간을 이순신 생애에서 가장 성스럽고 웅장한 순간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기도를 막 끝내고 일어나는 순간, 조금의 상념도 없는 상태에서 칼을 짚고 먼 하늘을 바라보던 그 순간적인 포즈를 작품화하기로 결정하였고, 동적이기 보다는 정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왼쪽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일어서는 순간이 표현되어 오른쪽 발은 뒤로 뻗어져 있고, 왼발이 앞으로 나와 있으며 허리는 뒤로 젖혀진 자세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비록 일어나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지만, 작품에 움직임이 너무 많으면 오래 두고 보기에 싫증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비록 순간의 포즈이지만 침착한 동양적 감성에 적합한 정적인 자세로 결정했다.
얼굴 표현의 경우김은호가 『징비록』을 근거로 선비와 같은 모습을 표현한 반면, 윤효중은 『징비록』의 문헌을 인정하면서도 백호 윤휴의 문집을 근거로 하여서 선비 같으나 선비보다는 강한 인상을 한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윤효중의 상은 김은호의 상보다는 보다 남성적인 단단한 체구와 용모를 지니고 있다. 이는 전쟁 상황이라는 것과 해군발생지라는 장소적인 특성이 결합되면서 좀 더 남성적이고 무사적인 모습이 강조되었다.
동상 제막식에는 이승만 대통령 이하 정부 고관, 국회의장을 비롯한 국회의원 다수와 유엔한국부흥위원단장 및 내빈 다수가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천여 명 이상의 군중들이 제막식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러한 인파는 전쟁 중이라는 시대적 절박함의 표현이었다. 반공이데올로기를 표상하기 위하여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선택한 것이 얼마나 파급력이 컸는지를 입증한다.
그런데 진해의 이순신 동상 제작에서 가장 문제되었던 것은 고증문제(고증위원 : 최남선, 이은상, 김영수, 군남우, 김은호 등)였는데, 한산도 김은호 작 무장본 이순신영정과 윤효중의 모형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김은호 작 한산도 영정이 기념사업회가 직접 봉안하였고, 문교부가 공인한 영정이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이미 정부에서 공인한 김은호의 이순신상을 따르지 않는 것은 정치적 • 교육적으로 문제가 되니 이를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윤효중은 역사상 • 문헌상의 기록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김은호의 상을 약간 보충하고 수정하여 제작할 수 있게 허용해 줄 것을 재차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기념사업회와 해군 측의 이순신 기념을 선점하려는 주도권 다툼이 있었다. 다시 말해 진해 동상은 기념사업회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라 해군에서 추진한 것이기 때문에 양자 간의 시각차가 존재한 것이었다.
- 출처 : 제장명, 「광복 직후 이순신 선양과 표준 영정의 봉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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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후로 해군이 주관하여 해마다 충무공 탄신기념일을 맞이하여 충무공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추모 행사를 개최해 오다가, 1963년부터는 행사 주관 기관이 이충무공선양회로 이관되면서 군항제를 개최하고 있다. 2017년 동상 주변시설을 정비하여 동상 좌우에 타원형의 내벽을 조성하고 이곳에 이순신의 생애와 활약상을 새겨서 이순신정신을 함양하는데 효과를 거두고 있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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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설명 (양식적 특성 및 미술사적, 역사적 가치 및 의의)
1952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해군 진해통제부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의 협력을 얻어 조각가 윤효중 씨가 1년여에 걸쳐 고심 제작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동상은 금 13일 오후 2시에 진해 장충단 앞 로타리에서 제막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길이 16척, 무게 3톤의 거대한 충무공의 동상은 주야 일관작업으로 진해 해군공창에서 주조된 것이다. 동상은 오늘 거행될 제막식에 앞서 지난 2일 충무공의 탄생일에 해군공창에서 튜럭으로 운반되어 장충단 앞에 동일 오후 3시에 안치되었던 것이다”라고 작가와 후원, 주조처, 크기 등에 대해 전하고 있다.
동상은 1950년 11월 11일, 해군창설기념행사에서 김성삼 준장이 발의하고 해군과 관리, 유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기로 하였다. 모형을 완성하자 발주자와 작가 사이의 본격적인 계약체결에 들어가 1951년 7월 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9월 30일에 동상 원형을 완성하였다. 이후 신익희, 안호상, 홍종인 등 정치인과 미술계, 사학계의 권위자를 초청하여 상평의회(像評議會)에서 의견일치를 보아 11월 15일 높이 16척의 원형 제작을 완료하였다. 당시는 커다란 상을 주조할 곳이 마땅치 않아 해군 공창에서 한국 최초의 대주조작업이 이루어졌다. 1952년 3월 28일에 건조하였는데 진해통제사령관은 동상 제막식에 동원된 연인원이 3천명이라 하였지만 『진해군지』에서는 동원된 연인원이 780명이라고 기록하였다. 원래 4월 2일에 제막식을 가지려 하였으나 당시 충무공 탄신 기념행사를 4월 13일에 거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날로 미루어졌다.
동상은 갑주를 갖추고 칼을 앞에 모두어 잡았으며 신체의 프로포션이 세장한 편이다. 머리에는 복발형 투구를 썼는데 정개(頂蓋)에는 상모가 있고 두정(豆釘)을 박았다. 목가리개 좌우에도 두정을 박았는데 얼굴 깊이 눌러 씌워 있고, 갑옷 아래 갖추어 입은 전복 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다.
정면에 매우 긴 의식용 장검을 수직으로 세워 두 손은 이를 잡고 있는데, 칼집까지 꽂혀 있는 상태여서 금곡 홍유릉의 무인상이 좌측에 칼집을 매달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몸이 정면을 향한 수직이고 신체 중심에 의식용 큰칼이 길게 자리잡고 있어 절제, 엄숙함이 느껴진다. 또한 투구부터 발끝까지 길고 무거운 갑옷으로 가려져 육체의 근육이 덜 나타나 신체성은 줄어든 반면 드러난 손의 불끈한 힘줄이나 근육의 표현과 눈길을 이끄는 큰칼을 통하여 무장의 이미지는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견고하고 두터운 갑주로 덮여있고 또 긴 치마와 긴 칼, 수직적인 자세 등은 고요하며 엄숙한 고전적 형태미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 동상은 그동안 건립의 계획만 알려지던 충무공 동상이 최초로 건립된 역사적인 작품이다. 전각에 모셔지는 진영으로만 존재하던 충무공의 이미지를 조각으로 만들어 공간에 건립한 것이다, 물론 진영과 용모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여러번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충무공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구성해내는 데 작가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후 통영과 부산에 김경승이 세운 충무공 동상이 얼굴 표현에 집중하고 진영에 충실한 것과 달리 인체 전체의 괴량감을 통해 인물이 지닌 힘과 의지를 표현하려 한 작품으로 동상을 제작할 때 본 적이 없는 선현의 모습을 정신적으로 해석하여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한 자유스런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 등록문화재로서의 가치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 건립 계획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고, 거국적인 모금활동도 있었으나 정작 동상이 건립된 것은 6.25전쟁 중 국난극복의 의지로 진해에 세운 이 동상이 최초이다. 국토 곳곳에 존재하는 충무공 동상 중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전통적인 능묘 석인상 중 무관상을 기반으로 하여 조선시대 장군의 조각적 도상을 창안하였다는 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유입된 말을 탄 장군상 등과 차별되는 점이다. 제1공화국 당시 외빈들이 오거나 국제적인 반공회의가 있을때는 이곳에 들러 기념촬영 등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국가적인 기념조형물이 많지 않던 1950년대에 충무공 동상은 한국을 상징하는 이미지에도 어느 정도 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충무공 동상이며 공공의 성격을 띠는 조각으로서, 동상 개막을 축하하며 진해 군항제가 시작되었다는 점 등도 이 동상이 중요한 문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단지 과거 인물을 재현하는 데 멈추지 않고 사회, 축제 등의 의미를 가짐으로써 동상의 새로운 역할을 보여준 것이다. 앞에 모두어 잡은 칼과 기다란 갑주 등이 고전적인 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한국적 전통과 서구적 미의식의 결합을 시도한 예를 보여준다.
- 출처 :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 조각분야 목록화 조사 보고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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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자 1의 조사보고서 >
1) 현황 : 생략
2) 현상
ㅇ 방형 화강암 기단 위에 약 5미터 높이의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음. 이순신 장군은 갑옷을 입고 양손으로 칼을 잡고 남쪽을 향해 서 있는 모습임.
기단 정면에서 “忠武公李舜臣像”이라고 세로로 쓴 동판이 부착되어 있는데, 현재는 삭제되어 있지만 “李承晩 謹書”라는 글자가 병기되어 있었음. 기단의 뒷면에는 이순신장군을 칭송하는 내용의 글을 이은상이 짓고 손재형이 쓴 동판이 부착되어 있음. 기단부 및 동상은 제막 당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주변경관은 여러 차례 변경된 것으로 추정됨.
3) 내용 및 특징
ㅇ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양손으로 칼을 다부지게 잡고 멀리 바다를 응시하며 서 있는 모습임.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은 조선왕릉의 무석인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왼발을 앞으로 살짝 내밀고 가슴을 젖히고 멀리 앞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인해 장군상으로서의 당당함이 느껴짐. 이 상은 흥미롭게도 관람자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인상을 받게 되는데, 정면에서 보면 부동의 자세로 다부지게 서 있는 모습이고, 4/3 측면에서 보면 여유롭게 서 있는 듯하며, 상의 우측에서 보면 왼발을 앞으로 내딛고 걸어 나오는 듯 한 모습으로 움직임이 내포되어 있음. 이러한 조형적 특징은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했음을 의미함.
ㅇ 이 동상은 1950년 11월 11일 해군창설 제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당시 진해 통제부사령관이었던 김성삼이 발의하였고 해군과 관리, 유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을 추진하여 세워진 것임. 이는 한국전쟁 동안에, 임진왜란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전쟁을 종결시킨 최고의 공로자인 이순신장군의 동상을 해전의 터인 바로 진해 앞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진해에 세울 필요가 있었고 국민 성금을 모아 건립한 것임. 1952년 4월 13일에 이승만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과 많은 중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거행되었는데, 이후 건립되는 이순신장군 동상의 모본이 된 첫 번째 동상임.
ㅇ 이 동상의 원형은 윤효중이 제작했으며 동상 주조는 함선과 병기를 제조하고 수선하던 해군공창(海軍工廠)[지금의 해군 군수사령부 정비창]의 시설을 이용했음. 당시 16척(약 482㎝)의 대형 동상을 주조할만한 주물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군 시설을 이용한 것인데, 이는 한국 최초의 대형 동상임.
4) 등록가치 및 근거기준
ㅇ 본 유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충무공이순신 장군의 동상이며 1952년 한국전쟁 중에 국난극복의 의지를 담아 제작된 것으로 시대성이 있음.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근엄하면서 적극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였으며 이는 광화문 이순신장군 동상 등 후대에 제작된 이순신장군 동상의 전범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음. 제막 당시의 사진과 비교해 볼 때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정성이 있음. 전반적으로 동상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1952년의 동상 제작 기술을 알 수 있는 자료임. 제작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으며 예술적 측면에서 가치가 있어 유물 자체로는 등록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음.
5) 종합의견
ㅇ 본 유물은 일반 동상에 비해 조형성이 뛰어나고 한국 최초의 이순신장군의 동상이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등록문화재로서 가치가 있음. 단, 동상 제작자 윤효중이 친일논란의 여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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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자 2의 조사보고서 >
1) 현황
ㅇ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당시 최고의 조각가인 윤호중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그는 당시의 충무공 후손들의 골상을 참고하는 등 매우 사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함
2) 현상 : 생략
3) 내용 및 특징
ㅇ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을 1952년 4월 13일 오후 2시 진해 해군통제부 앞 장충단네거리 광장에서 거행되었음. 제막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신익희 국회의장과 각부 요인, 무초 미국대사, 프리스코 극동함대사령관 등 10여 만명이 참석하였음. 이순신 동상은 13척(앞의 조사자1은 16척으로 표현 -필자)에 달하는 거대하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이 동상을 제작한 윤효중과 13명에게는 각각 공로장과 상장이 수여되었음.
4) 문헌자료
ㅇ 동아일보 1951년 2월 21일자, 이충무공 동상 건립 .
ㅇ 동아일보 1951년 4월 20일자, 이충무공 동상 건립사업 추진 .
ㅇ 동아일보 1951년 6월 4일자, 충무공 동상 기공식 .
ㅇ 동아일보 1951년 7월 3일자, 충무공 동상 건립 정초식 성황 .
ㅇ 동아일보 1951년 10월 2일자, 충무공 동상 원형 감상회 .
ㅇ 동아일보 1952년 1월 5일자, 임진년은 충무공의 해 .
ㅇ 동아일보 1952년 3월 4일자, 충무공 동상 제막식 .
ㅇ 동아일보 1952년 4월 1일자, 충무공 동상 4월 13일로 연기 .
ㅇ 동아일보 1952년 4월 4일자, 충무공 동상 진해 장춘단 광장에 안치 .
ㅇ 동아일보 1952년 4월 4일자, 충무공 동상 건립 사업 촉진 .
ㅇ 윤효중, 無窓無想(上), 충무공 공상을 제작하고 , 동아일보 1952년 4월 6일자.
ㅇ 윤효중, 無窓無想(中), 충무공 공상을 제작하고 , 동아일보 1952년 4월 7일자.
ㅇ 윤효중, 無窓無想(下), 충무공 공상을 제작하고 , 동아일보 1952년 4월 8일자.
ㅇ 경향신문 1952년 4월 11일자, 충무공 동상 제막식에! 임시열차 .
ㅇ 동아일보 1952년 4월 11일자, 특별열차도 달린다. 충무공 동상 제막식 .
ㅇ 동아일보 1952년 4월 13일자, 충무공 동상 제막의 날 .
ㅇ 경향신문 1952년 4월 15일자, 충무공 동상 제막식 성대 .
ㅇ 경향신문 1952년 4월 16일자, 충무공 동상 제막식에서, 이대통령, 무쵸대사 치사.
ㅇ 동아일보 1953년 3월 31일자, 뜻깊은 각종 행사 개최, 충무공 동상 건립 1주년 맞아.
ㅇ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윤효중, 친일인명사전 2, 민족문제연구소, 716-718쪽.
5) 등록 가치 및 근거기준
ㅇ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조각가 윤효중이 제작하였음. 1951년 6월 8일 동상건립기공식을 성대히 거행하였으며, 동상 제막식을 1952년 4월 13일 해군통제부 앞 장충단 네거리 광장에서 거행되었음
ㅇ 이충무공 동상은 얼굴과 갑주 등이 아주 세밀하게 만들어져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음. 그리고 동상 앞면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글이, 뒷면에는 노산 이은상의 글이 새겨져 있음. 이 동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충무공 동상으로, 당시 제작된 50환 지폐그림은 이 동상의 모습을 본 딴 것임
ㅇ 우리나라 최초의 이충무공 동상이라는 점과 동상건립기성회에서 모금을 통해 조성되었다는 점 등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음. 그러나 이 동상의 제작자 윤효중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조각품을 다수 제작하였고, 해방 후에도 이승만의 동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있음
6) 보존정비 및 활용 착안사항 : 생략
7) 종합의견
ㅇ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충무공 동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조각가 윤효중에 의해 제작되어 1952년 4월 13일 제막식이 거행되었음. 동상 제막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였으며, 당시 제작된 50환 지폐그림은 이순신 동상 모습을 본 딴 것임. 동상 앞면에는 이승만의 글이, 뒷면에는 이은상의 글이 새겨져 있음. 충무공 동상은 얼굴과 갑주 등이 아주 세밀하게 만들어져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음. 이 동상의 제작자 윤효중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조각품을 다수 제작하였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의 동상도 제작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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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자 3의 조사보고서 >
1) 현상 : 생략
2) 내용 및 특징
ㅇ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입상으로 큰 칼을 잡은 양 손의 핏줄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었음. 투구와 갑옷 및 인체의 사실적 형상 표현은 이후 건립된 이순신장군 상의 모본이 되었음. 투구의 높은 장식 위로 솟아오르는 일자형 구도로 이순신장군의 강건한 면모를 전달함. 한편 한쪽 발을 앞으로 내민 포즈로 인해 측면상은 정면과 달리 움직임이 있으며 바람에 날리는 갑옷자락과 목에 두른 긴 스카프의 움직임으로 부드러운 생동감을 내포. 무인의 용맹함과 함께 기품있는 인격체로서의 이순신 장군상을 표현하고자 했음.
3) 등록가치 및 근거기준 : 생략
4) 종합의견 : 생략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회의 최종 의결사항 결과 : 부결 (사회적 합의 필요)
-출처 : 문화재청, 2017년도 문화재위원회 제8차 근대문화재분과 회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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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고증문제 관련 자료
이 동상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52년 4월 비로소 제막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고증 문제였는데, 충무공기념사업회가 봉안하였고 문교부가 공인한 한산도의 김은호 작 무장본 충무공 영정과 윤효중의 모형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충무공기념사업회에서는 이미 정부에서 공인한 김은호의 충무공상을 따르지 않는 것은 정치적, 교육적으로 문제가 되니 이를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윤효중은 아무리 김은호의 작품이 절세의 걸작이라고 하여도 자신이 예술가인 이상 예술품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다른 작가의 작품을 그대로 따라만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윤효중은 역사상 문헌상의 기록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김은호의 상을 약간 보충하고 수정하여 제작할 수 있게 허용해 줄 것을 재차 요구하였고 이것은 예술가의 특권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윤효중은 이은상을 비롯한 몇몇 고증인들과의 토론속에서 작가 자신의 생각도 변화하였고, 2회에 걸친 감상회 결론은 미술인에게 맡기기로 결정함으로써 윤효중은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지금의 상을 제작할 수 있었다.(중략)
김은호의 무장본과 윤효중의 작품이 눈에 띄게 다른 부분은 갑옷의 형식인데, 마지막까지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 갑옷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이었다 한다. 김은호의 무장본의 경우에는 비늘이 달린 두석린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것에 비해 윤효중의 <충무공상>은 비늘이 달리지 않은 두정갑을 착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정갑은 겉에는 두정을 박았고, 안에는 세 겹의 가죽 편을 빽빽이 붙여 아주 견고한 갑옷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윤효중은 당시 김은호의 한산도 충무공상 복식 의장을 조사하니 우리나라 것이 아니라 중국 것임이 판명되었고 이에 우리나라 고유의 복식이 있음을 알게 되어 자신의 동상에 표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복식사에서는 이 두 종류의 갑옷 모두가 조선시대 때 사용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윤효중 충무공상의 목에 두른 포(布)는 김은호 상에 비해 길게 늘여져 있는데, 이는 작품의 효과를 돕기 위해 작가가 일부러 길게 늘였다고 밝히고 있고, 받침돌은 건립위치와 주위환경이 평범한 산천이라 현대적인 기하학적 구성을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소박한 맛을 내려고 애썼으며 이러한 취지와 재정상의 문제로 자연석을 이용하였는데 잘 조화되었다.
충무공상의 얼굴 표현에 있어서는, 김은호가 『징비록』을 근거로 선비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하였다면, 윤효중은 『징비록』의 문헌을 인정하면서도 윤백호 문집에서 충무공을 묘사한 ‘亦자강용’을 근거로 하여 선비 같으나 선비보다는 강한 인상을 한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실지로 윤효중의 상은 김은호의 상보다는 보다 남성적인 단단한 체구와 용모를 지니고 있다. 화면에서도 팔에 강인한 힘줄이 잘 표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박계리, 「충무공동상과 국가이데올로기」,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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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상 뒷면에 있는 건립기 -
어허 민족의 태양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단기 3878년 3월 8일 서울에서 나시어
단기 3931년 11월 19일 노량바다에서 순국하신 어른이니 그는 54년 동안의 일생을
다만 정의에 살으시었고 임진란 7년 싸움에 오직 그의 힘으로 나라를 건지었으며 한몸을 버리시어 겨례를 살리시니 우리들의 영원한 지도자시요 역사적 은인이시라 진실로 거룩한 뜻과 자취 하늘과 땅과 더부러 길이 빛나리로다
단기 4285년 4월 13일
진해 군항대 여러 고을 유지와 해군 장병들의 성금으로 세우되,
손원일, 김성삼, 정금모, 강봉용, 김태수 등이 보살폈으며,
윤효중은 조각하고 이은상은 글을 짓고 손재형은 쓰다
2. 통영 남망산공원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경남 통영시 동호동 남망산공원
나. 제작일 : 1953년 5월 31일(동아일보 5.21기사 근거)
- 1952년 11월 19일(건립문, 박계리 논문 근거)
다. 제작자 : 김경승 작가
라. 규 모 : 동상 2.4m, 대좌 3.4m, 전체높이 5.8m / 청동
1955년 8월 건립한 것으로서 조상자는 김경승이다.(1955년으로 나옴-착오가 있는듯)
- 출처 :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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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남망산 공원은 일명 충무공원이라고도 부른다. 높이는 약 80미터로 벚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져있는 이 산 정상에는 이순신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 동상은 임진왜란 발발 6주갑을 맞아 전쟁 기간 중인 1952년 음력 11월 19일에 건립되었다. 통영군임진6주갑 충무공기념사업위원회가 건립한 이 동상은 갑주본으로 갑옷을 착용한 이순신이 왼손에 칼을 들고 오른손은 허리띠를 잡고 서 있는 모습이다. 동상 뒷면에는 이순신의 생애에 대한 요약 글과 동상을 건립하게 된 배경에 대해 새겨져 있다. 그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선민(先民)께서 왜란을 겪으시던 임진년이 이에 여섯 번째 도리였나이다. 오늘의 국정(國情) 그 당시의 간난(艱難)을 방불케함이 있거늘 우리 어찌 충무공 이순신 어른의 모습을 그리워하지 않사오리까? 순국하신 대의(大義) 일월(一月)같삽고 애민(愛民)하신 은혜 우로(雨露)같사와 이땅의 초목금수(草木禽獸)에도 미쳤삽거든 어찌 감히 구리쇠 한덩이로 성상(聖像)을 구현한다 하오리까마는 호가잔월(胡笳殘月)에 우심전전(憂心展轉)하시던 그 지성(至性)의 면모 만분의 일이라도 추모할까하와 3십만 우리 통영군민은 이에 정성을 다하와 이 동상을 삼가 건립하나이다.”
한편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바로 아래 계단으로 내려오면 충무공시비(忠武公詩碑)가 세워져 있다. 이 시비는 동상이 건립된지 2년 후인 1954년 늦가을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통영군지부위원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시비 전면에는‘한산도가’가 한글로 새겨져 있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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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립문 2개 내용 -
민족의 이름 위에 태양같이 빛나는 성웅 이순신 어른은 인종 원년 을사 3월 8일에 탄생하시어 선조 31년 무술 11월 19일에 순국하시었다. 옳고 바른 것만 지키어 우뚝하였던 성웅은 부정과 패도의 형극로에서 50이 가깝도록 불우를 겪었으나 신묘년 2월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되시자 임진란 벽두부터 백전백승의 위공으로써 남해의 철벽을 지으시고 계사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시어 군세의 진작과 아울러 민생부흥의 거역을 이룩하셨으며 정유년 2월에 악당의 음해로 원옥에 갇치고 일명을 얻은 백의종군 길에서 다시 통제사 되시어 탕진된 폐허를 맡으셨으나 “상유십이”의 대기백과 “미신불사”의 대신념으로써 330과 마주쳐 전승한 명량대첩의 기적을 창조하시고 다음해 노량대전에서 최후로 적을 무찌른 대장선 위에서 북채를 잡은채 귀천하시었다. 문덕과 무위의 여러 면을 고루 갖추신 성웅은 54세의 한뉘를 받치어 애민으로써 애국하였고 충민으로써 충국하시어 마침내 신망국활의 훈업을 남기신 것이다.
우리 선민께옵서 왜란을 겪으시던 임진년이 이에 여섯 번째 돌아왔나이다. 오늘의 국정 그 당시의 간난을 방불케함이 있거늘 우리 어찌 충무공 이순신 어른의 모습을 그리워하지 않사오리까 순국하신 대의 일월같삽고 애민하신 은혜 우로 같사와 이 땅의 초목금수에도 미쳤삽거는 어찌 감히 구리쇠 한덩이로 성상을 구현한다 하오리까마는 호가잔월에 우심전전하시던 그 지성의 면모 만분의 일이라도 추모할가하고 30만 우리 통영군민은 이에 정성을 다하와 이 동상을 삼가 건립하나이다.
단기 4285년 임진 구11월 19일 통영군임진6주갑충무공기념사업위원회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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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2일 발간된 통영시지에 의하면 이 충무공 동상은 한국전쟁으로 이 고장에 피란온 조각가 김경승(金景承)이 제작한 것인데 임진왜란 6주갑을 기념하여 1952년 임진년 공의 순국 일인 음력 11월 19일에 제막했다고 동상 좌대 뒷면의 동판(銅版)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 공사가 예정보다 늦어져 이듬해인 1953년 5월 31일 오전 9시에 제막되었다고 나와 있다.(필자 확인결과 동아일보 5월 21일자 기사에는 5월 31일 상오 10시로 나옴)
이 동상의 건립을 위하여 당시 통영에 주둔했던 육군공병대의 장비가 동원되었고 시내 중·고생들이 곡괭이로 정상의 돌을 깨어 평탄작업을 하였다. 또한 전 통영군민이 동상건립을 위해 십시일반 성금을 보탰다라고 서술되어있다.
한편 2009년 10월 21일 남망산 공원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제목으로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내용은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2년 충무(통영)시민이 성금을 모아, 1953년 5월 31일 동상을 준공했다. 전쟁으로 피폐하고 모두 어려웠던 시절, 통영사람들이 뜻깊은 정성을 모으고 미래를 개척하려는 의지를 모아 만든 것이 바로 남망산 이순신 장군상이다. (앞·중간 생략) 청동제 동상의 높이는 2m40cm, 대리석제 자대의 높이는 3m40cm, 합계 5m80cm 높이로 조각가 김경승 선생 작품’이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시 홈페이지에 의하면‘충무공원이라고도 불리며, 벚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높이 80m의 남망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공원이다. 남동쪽으로 거북등대와 한산도, 해갑도, 죽도 등의 한려수도의 절경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산꼭대기에는 1953년 6월에 세워진 이충무공의 동상이 서 있다’고 돼 있다.
또 포털사이트 다음에서는 남망산공원 이순신 장군 동상을 클릭하면 백과사전에‘(중간 생략) 산 정상에 1953년 6월에 세워진 충무공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 높은 곳에서 갑주에 긴 칼을 옆에 차고 한산대첩을 이룬 남해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2015년 1월 30일자 경남 모일간지는 ‘(기사중간 생략) 이 동상은 1955년 세워졌는데, 주민들 성금으로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보도했다.
사후 이 충무공 일지 제목으로 인터넷에 올라있는 것을 보면 ‘1955년 8월 통영시 남망산공원에 충무공 시비, 충무공 동상, 한산대첩비를 세우다’라고 돼 있다.
시 홈페이지 관리 및 통영시지 발간도 통영시에서 다 관장함으로(부서는 다르지만)동상 건립일 오류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남망산 공원의 이순신장군 동상 건립일이 시 홈페이지의 1953년 6월이 맞는지, 통영시지에 서술한 1953년 5월 31일이 맞는지, 시에서는 정확한 검증을 하여 오류를 수정하고 기록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시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여행객들이 올리는 블로그 등에 참조 할 수 있도록 동상 부근에 안내 글이라도 세우는 것도 검토하여야 할 것 같다.
- 출처 : 한산신문 2020.09.11 공청식(한산신문 부설 미래정책연구소장, 박사)
남망산 공원, 이순신 장군 동상건립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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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북원로터리에 우리 나라 최초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우는 과정에서 발생된 윤효중 작가의 고증논란을 지켜본 김경승 작가는 고증위원이었던 김은호의 표준영정을 모본으로 삼아 한산도 제승당에 있는 무장입상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동상으로 제작하였다. 즉 두정갑 대신 바람 한점 들어가지 못하게 단단히 동여맨 두석린 갑옷을 입고 칼도 두 손으로 모아 바닥에 짚지 않고 왼손으로 허리에 차고 있는 아주 정적인 모습이다. 다만 아래 참고사진에 나오듯이 무장입상 초상화속 오른손은 허리에 붙여서 그대로 내리고 있는데 비해 동상에서는 요대[허리띠]를 움껴 잡고 있어 팔꿈치가 90도에 가깝게 꺽여 있다. - 필자
3. 부산 용두산공원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부산광역시 중구 용두산길 용두산공원
나. 제작일 : 1955년 12월 22일(용두산공원 홈페이지:1956년 3월 20일)
다. 제작자 : 김경승 작가
라. 규 모 : 동상 3.8m, 대좌 8.2m, 전체높이 12m / 청동
1955년 12월 부산 시민의 정성을 모아 건립하였으며, 조상자는 김경승이고, 동상 찬문은 이은상 선생이 지었다.
- 출처 :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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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동상 제막식은 이십이일 상오십일시 시내 용두산에서 함부통령을 비롯하여 이민의원의장 손국방 이문고양장관 그리고 육해공군의 고급장성 다수 참석아래 성대히 거행하였다. 배부산 시장의 개회선언으로 개막된 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이경남지사의 식사가 있은 후 충무공동상의 제막과 우남공원비의 제막이 있었다.
충무공동상이 제막되자 부산항내에 정박중이던 국내선박들은 일제히 고동을 울려 남해의 수호신으로 고히 잠드신 충무공의 영령을 추모하였다.
식은 계속하여 이대통령의 훈사를 함부통령이 대독하고 이지사의 동상찬문낭독과 부산여고생의 충무공의 노래 제창 그밖에 이민의원의장을 비롯한 다수인사들의 축사가 있은 다음 식을 끝마쳤다.
- 출처 : 1955년 12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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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용두산공원 동상
부산 용두산에도 충무공 동상이 건립되었다. 경상남도지사 양성봉이 발의하고 기념사업회가 김경승(金景承1915~1992)에게 의뢰하여 제작하였다. 경상남도 지부가 도민 한 사람당 1원, 학생당 2원씩을 모든 삼백 칠십여 만(3,782,217)환의 성금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경상남도 보조비 5백만 환과 부산시의 3백만 환 및 동상초상의 판매이익금 3백 50만 환의 기금으로 제작에 착수하게 되었다. 부산 동래 금정산의 화강암을 채취하여 석대로 하고 부산의 조선주물기계공장에서 20여 척의 동상 주물 작업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부산 용두산에서 1955년 12월 12일에 건립하였다.
용두산이라는 장소가 지닌 위치는 지리적 측면에서 이순신 동상의 건립에 양호한 장소로 평가받았다. 우선 부산시내로부터 거리상 가까운 위치여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이 가능하였고, 동시에 남해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서 이순신상이 위치하기 좋은 지점이었다. 더군다나 이순신상은 쳐들어오는 왜적을 향하여 남쪽을 바라봄으로써 남해를 전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안치되었다.
이 동상은 도민과 학생들로부터 기금을 받는 과정을 삽입함으로써 제작 시작서부터 대중들이 이순신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여 쉽사리 동상의 이데올로기가 대중들에게 투여될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당시의 어려운 여건에서 기금의 조성은 반강제적인 성격을 띠었지만, 이는 그만큼 이순신에 대하여 대중의 관심을 환기할 수 있었다. 동상 자체는 기념사업회가 의뢰한 만큼, 기념사업회의 일원이었던 김은호의 모본에 충실하였다.
그런데 동상이 건립되기 2년여 전인 1953년 6월에는 경상남도에서 이순신동상의 복식 고증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당시 총 제작비 500만 환의 기금으로 제작을 시작한 동상의 모형이 이 해 6월초에 완성되었는데, 고증문제가 부각되었다. 이를테면 동아일보 1953년 6월 3일자 기사가 참조된다.
이 동상에 입혀진 복식 구상이 전번에 이조시대 무인들의 복식에 대한 역사적 고찰의 적합성 여부에 대해서 한참 말썽이 많았던 李堂 金殷鎬씨 작품(현재 한산도 제승당에 안치해 둔 충무공 영정)과 거의 비슷한 것이라는 데서 적어도 민족의 찬란한 英氣를 상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등 의학적 고찰도 없는 애매한 억측에 의하여 구상 밑에 중국식 복제로 꾸며진 동상을 그대로 건립한다는 것은 민족적 양식이 허용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유지 및 사계의 권위가들의 여론은 비등하여 사업당사자들의 올바른 시정이 있기를 재촉하고 있다. 즉 과거 이조시대에 사용해오던 우리나라 고유의 갑주와 투구가 상금도 엄연히 존재하여 있고 또한 수차에 걸쳐 이당작품인 영정에 그려진 갑주 및 투구의 모순이 지적 천명된 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번에 건립될 동상 역시 중국식 복식을 가하여 제작케 하였다는데 논의의 중심이 있는 것이라 한다.
김경승 조각가가 만든 이순신 동상 모형이 중국식 복제를 착용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진해의 동상을 조각한 윤효중 조각가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이에 반박하고 있다. 이를테면 (1)이조시대의 병서(兵書)인 무예도보통지에 있는 도해(圖解)에 나타난 것, (2)창덕궁 내에 있는 갑주 및 투구, (3)민족박물관 소장품, (4)덕수궁 박물관 소장인 임진왜란 정상을 그린 병풍에 나타난 인물복식, (5)정규장군(정발장군의 오기로 사료됨) 사당에 있는 갑주 및 투구, (6)부산진 순절도에 나타난 어떤 장군의 투구 등등을 종합 고찰한 결과 그 색채나 외부인의 대소원각(大小圓角), 또는 제작에 있어서 인을 외부에 붙였느냐. 내부에 붙였느냐 하는 차이는 있으나 그 복제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효중씨의 반박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부산 용두산 공원의 이순신 동상은 김경승 조각가의 원안대로 제작이 추진되었다.
광복 이후 건립된 동상인 진해 • 통영 • 부산 등지의 이순신 상은 구체적으로 적군과 싸우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전쟁지도자로서 이순신의 이미지가 부각되었다. 이를 위해 이순신상은 갑옷을 입었고, 남해를 바라보며 남해 저편의 적군을 응시하는 근엄하고 육중한 자세로 당당하게 서 있다. 결국 이 시기의 이순신상에는 선명한 반일 이미지가 부각되었고, 여기에 당시 상황으로 인해 반공의 이미지가 결합되었다. 이는 이순신 동상의 건립과 제작에 국가기구들이 개입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이순신은 국가차원에서 집권 세력에 의해서 기억 • 기념되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순신에게 반일과 반공의 의미가 강력하게 부여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이라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기반이었던 반공이데올로기를 적극 표명하려 하였다. 당시 국민들의 반일정서에 힘입어 반공이데올로기를 반일이데올로기에 결합시키는 역사적 소재로 이순신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권의 국가 이데올로기 정책 속에서 이순신은 국토수호의 신으로 다시 부활하였다.
친일파가 각종 국가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독립국가의 정당성 자체가 의문에 싸일수록 이승만 정권은 이순신 상의 부활에 더욱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반일투사처럼 보여지기를 원했다. (후략)
- 출처 : 제장명, 「광복 직후 이순신 선양과 표준 영정의 봉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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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승의 <충무공 동상>
용두산 충무공상은 경상남도 도지사 양성봉 씨가 발의하여서, 충무공기념사업회 경상남도 지부가 도민 한 사람당 1원, 학생 개인당 2원씩을 모은 삼천칠백여(3,782,217) 환의 성금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경상남도 보조비 5백만 환과 부산시에서 3백만 환 및 동상초상의 판매 이익금 3백50만 환의 기금으로 조각가 김경승에 의해 제작되었다. 부산 동래 금정산의 화강암을 채취하여 석대로 하고 부산의 조선주물기계공장에서 20여 척이나 되는 동상주물작업을 완료한 후 부산 용두산에 1955년 12월 22일 건립되었다. (중략)
부산 용두산공원의 <충무공 동상>은 김경승이 1952년 11월 19일 통영의 남망산공원에 건립한 <충무공 동상>과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용두산 동상이 크기가 더 크고 목에 두른 포가 남망산 충무공상과는 달리 오른쪽 어깨 밑으로 내려와 있다는 점 이외에는 거의 유사하다.
진해 충무공상의 갑옷이 논란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김경승은 남망산 충무공상을 두정갑이 아닌 두석린 갑옷으로 제작하였다. 포즈도 윤효중의 상과 달리 칼을 두 손으로 잡고 있지 않고 허리에 차고 있다. 이러한 도상은 김은호의 <충무공>과 갑옷과 포즈에서 유사하다. 김경승은 윤효중의 충무공상이 고증 문제로 곤란함을 겪는 것을 지켜보면서, 당시 윤효중 동상의 고증을 담당하였던 인사들중의 일원이었던 김은호의 작품을 모본으로 삼아 제작하는 것이 보다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하였던 듯하다. 또한 윤효중의 예와 같이 충무공기념사업회 측으로부터 당시 공인을 받았던 한산도의 김은호 <충무공 영정>에 맞추어 제작할 것을 요구받았을 가능성도 크다 하겠다. 따라서 용두산과 남망산 충무공상들은 고증 문제로 인한 논란에 휩싸이지는 않았지만, 윤효중의 상이 둔중한 갑옷을 입고 있으나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동세를 암시하는 사실적인 둔중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던 것에 비해 도식화되어 있다. 김은호의 모본에 보다 충실하였기 떄문이지 않을까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일제시대에는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보다는 이순신이 태어난 시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중요했고, 따라서 이순신의 생애 전반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이순신 초상의 복식도 구군복을 입고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충무공 초상에서는 특정 시기의 구체적 행동이 연상되지 않는다. 일본과 적대적으로 대립되는 구체적인 장군 이미지보다는 암울한 조선시대의 훌륭한 인격자를 그리려고 하였고 이를 통해 추상적 성품이나 인격을 드러낼 수 있는 상을 완성해 내고자 하였다. 이에 비해 해방 이후의 이순신 동상인 진해, 통영, 부산의 충무공상은 구체적으로 적군과 싸우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전쟁지도자로서의 이순신, 싸우고 있는 이순신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이순신 상은 구군복 위에 갑옷을 입었고, 남해를 바라보며 남해 저편의 적군을 응시하는 근엄하고 육중한 자세로 당당하게 서 있다.
이를 통해 선명한 반일 이미지가 부각되었고, 이에 반공의 이미지가 결합되었다. 이 시기, 일본이 중국, 소련뿐만 아니라 북한과도 손을 잡으려고 하자, 이승만 정권은 스스로를 소련 중국, 북한 일본이라는 반공 전선의 맨 앞에서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선봉대라 여겼다.
- 출처 : 박계리, 「충무공동상과 국가이데올로기」,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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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공원과 이순신 동상
한국전쟁이 종전되기 전, 지역 신문에는 충무공의 추도식이 1951년 4월 13일에 있다는 신문 기사가 났다. 음력 3월 8일 이순신의 생일을 맞아 통영 忠烈詞에서 해군본부의 주도로 추도식을 거행한다는 것이다. 이 추도식의 의미를 ‘中共오랑캐가 侵略한 국가 重大危機에 더욱 公의 遺志를 밧들어 우리 國民은 더욱 굿게 盟警하여야 될 것이다. (중략) 李忠武公의 情神을 한층 더 받들기 爲하여’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을 방어하는 ‘抗倭’라는 전근대의 정치적 의미를 ‘反共’이란 이데올로기로 변용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또 中共을 오랑캐라고 표현함으로써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외적 또는 오랑캐와 싸우는 전쟁으로 동일시하였다. (이하 일부 생략)
부산에서는 충무공기념사업회 주최로 충무로광장에서 기념식을 가지고 시내 극장에서 이 사업회 편찬위원장이었던 李殷相과 해군 준장의 강연, 음악이 있는 행사를 가졌다. 이 기념식의 목적도 ‘王辰倭難을 처물리신 公의 偉勳을 顯揭하고 그 忠武情神을 바드려 祖國守護에 三千萬이 殿起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용두산공원에 충무공의 동상을 세울 것이라는 계획이 1951년 10월에 나왔다. 이순신의 160주기를 앞두고 경상남도에서는 용두산에 동상을 건립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추진 중이던 이순신의 화상이 결정되면 바로 동상을 세울 것이라고 하고 공원 이름도 용두산공원에서 忠武公園으로 변경할 것이라고 하였다. 뿐만아니라 기념관도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세워진 것은 1952년 진해의 것으로 해군에 의해 1950년 11월에 계획된 것이었다. 부산은 1953년 통영에 이어 1955년 세워졌고, 통영과 부산의 동상은 모두 조각가 金景承에 의해 제작되었다.
부산의 이순신 동상은 계획을 수립하고 조각가가 작업에 착수한 지 무려 5년 만에 완공되었다. 5년보다 늦어지게 된 것은 동상 조성을 위한 기금 부족에서 초래되었다.도민, 중고등학생 등에게 강제 기부에 가까운 모금을 벌였지만 전쟁 직후의 상황으로 빠르게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산 용두산공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은 1955년 12월 22일 제막식을 가졌다. 그날은 우남공원 명명식과 우남공원비를 제막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당초 경상남도가 충무공원으로 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대통령의 호를 딴 공원이 되었다.-(중략)- ‘忠武公李舜臣像’이란 동상의 휘호를 이승만이 직접 썼을 뿐 아니라 대통령의 호를 붙인 우남공원비가 제막된다는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 동상을 용두산공원에 세운 이유는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 땅에 첫발을 올려 놓은 곳이 바로 여기였기로 그날의 고난을 뼈저리게 기억하자 함이요 (중략) 7년 동안 싸우던 중에서도 부산 앞 바다의 큰 승첩이 가장 결정적이었기로 (중략) 여기가 이 나라의 관문이라 (중략) 국토수호의 피어린 정신을 안팎으로 나타내자 함이니’라는 말 속에서 알 수 있다. 즉 부산포해전 승전의 기억, 국토수호 인식이라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충무공 동상이 제막되자 부산항 내에 정박 중이던 국내 선박들은 일제히 고동을 울려 남해의 守護神으로 이순신을 기념하였다.
대통령의 글씨와 대통령의 호를 붙인 공원, 부통령 이하의 정부 관료의 등장, 육해공군의 제막식 참석 등으로 보아 이순신 동상을 세우는 일이 국가가 얼마나 적극 개입했던 행사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중략)
국가 차원에서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이순신 동상을 세움으로써 부산지역의 역사와 장소의 의미를 확인하게 하고 국가 안위 및 승전을 위한 상징물로 인식하도록 하는 한편, 선원들에게 수호신으로 승격시킴으로써 국가 이데올로기가 약화되더라도, 우남공원이란 명칭이 사라지더라도 이순신 동상은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 이하 생략....
- 출처 : 양홍숙, 「부산의 임진왜란 기념물 조성과 도시경관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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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문 내용
여기 서 계신 어른은 우리 겨레와 함께 영원히 같이 가시는 거룩한 지도자 충무공이시다.
그는 오색 찬란한 역사의 면류관이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태양이니
진실로 우리들의 자랑이요 영광이요 또 힘이요 생명이시다.
일찍이 이조 인종 원년(서기1545) 삼월 초팔일 서울에서 나시어 오십 사년간을 누리시고
선조 삼십일년(서기 1598) 십일월 십구일 새벽 노량 바다에서 적탄 아레 돌아 가셨으나
그 무렵 무너지는 나라를 한 손으로 떠받드신 위대한 은공은 강산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동포를 위하여 뿌리신 피는 자자손손 만대의 혈관속에 흘러 드신 것이다.
이제 그의 동상을 구태어 이 곳에 세우는 뜻은 저 임진란때 왜적이 이 땅에 첫발을 올려 놓은 곳이 바로 여기였기로
그날의 고난을 뼈저리게 기억하자 함이요
또 그가 왜적과 더불어 칠년동안 싸우던 중에서도 부산 앞 바다의 큰 승첩이 가장 결정적이었기로
그것을 외치며 자랑하자 함이요 그리고 또 여기가 이 나라의 관문이라 예서부터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국토수호의 피어린 정신을 안팎으로 나타내자 함이니 겨레여 두 팔을 들어 그를 찬양하고 또 그의 앞에 맹서하자.
동포를 살리려고 붉은 피를 뿌리신 이여 겨레의 가슴마다에 임은 살아 계시니이다.
강산에 서리신 뜻은 천추만대 푸르리이다.
단기 사천이백 팔십팔년 십이월 이십이일 김경승은 조각하고 이은상은 글을 짓고 동명서예원 오제봉은 글씨를 쓰고
경상남도 지사 이상용은 도민 전체의 힘과 정성을 모아 여기에 삼가 이 동상을 모셔 세우다.
주조 한국기계주물제작주식회사 대석 최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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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충무공 동상의 조영은 국난극복 의지의 표명이며 국가에희 충성과 복종, 헌신의 가시화 작업이었다. 전쟁을 통해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 초인간적 용기를 발휘한 전쟁영웅을 통해 성스러운 인물과 장소를 설정하여 집권층이 전쟁을 자신의 영예로운 역사로 변형시키고 전유하는 선봉에 충무공 동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동상이 선 장소를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공원으로 명명하는 식과 동상 제막식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충무공 동상이 국가를 수호하여 평화를 가져온 인물의 상징으로 채택되어 대통령의 호인 공원의 이름과 결합하여 마치 장충단에 선 이순신 장군 동상과 같은 상징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김경승의 충무공 동상은 윤효중의 동상에 비하면 갑옷안에 입은 전복 길이가 짧게 표현되어 그 안에 입은 바지가 확실히 드러난다. 얼굴은 세밀하게 표현되었는데 김은호가 그린 진영과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윤효중의 동상이 김은호가 제작한 진영과 닮지 않았다는 점이 비판되자 그에 대한 반응이었으며 동시에 세밀하게 얼굴을 표현하는 김경승 인물상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옷의 모양이 중국식이냐 조선식이냐를 놓고 대립하는 등 충무공 동상의 올바른 모습에 대한 논의는 195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후략)
- 출처 : 조은정, 『동상 –한국 근현대 인체조각의 존재방식』,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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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승의 첫 이순신 장군 동상였던 통영 남망산때는 고증문제 크게 불거지지 않았는데 두번째 작품인 부산 용두산 공원 충무공 동상때 오히려 중국식 복제라며 고증논란이 발생하자 우리 나라 최초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진해에 세우는 과정에 고증문제로 힘들었던 윤효중이 오히려 김경승 작가의 동상에는 큰 문제가 없다며 반박글을 실어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전체적인 동상의 형태는 첫작품인 통영 남망산과 비슷하나 약간 더 풍체가 좋게 만들었고 기단부도 3층석탑의 기단을 연상케 한 뒤 마지막에 동상을 황금비율 크기로 설치했다.
가장 눈에 뛰는 차이점은 동상 전면부 목에 두른 포의 끝을 오른쪽 어깨 아래로 늘어뜨리며 마무리 한 점이다.. - 필자
4. 전남 여수 자산공원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종화동 자산공원
나. 제작일 : 1967년 4월 28일
다. 제작자 : 탁성오 작가(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에는 탁성호로 나옴)
라. 규 모 : 동상 약 4m 추정, 대좌 10m 추정, 전체높이 14m / 청동
여수시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재일 여수친목회의 찬조와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로 1년여의 공사 끝에 준공하였다. 동상 앞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비(박정희 대통령 하사금으로 제작한 첫 동상)와 뒤편에는 숭모성금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노산 이은상이 지은 충무공 찬가와 거북선 찬가가 손재형 선생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 출처 :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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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 종화동에 위치한 자산공원 정상에는 이순신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 동상은 1967년 4월 28일에 건립한 것인데 동상 좌대 정면에 ‘성웅 이순신상’ 이라고 새겨져 있다. 동상 형태를 보면 왼손에는 칼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북채(칼 이외의 기물이 최초로 등장)를 들고 있다. 이 동상은 여수 충무공이순신장군 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주관하여 건립하였는데 그 취지를 이순신 광장 입구에 새겨 놓았다. 다음이 그 전문이다.
“여수는 옛날의 전라좌수영 충무공이 좌수사로 부임하여 앞날에 닥쳐올 전쟁을 위해
온갖 훈련과 방비를 갖추며 특히 세계 해전사상에 빛나는 거북선을 만든 곳이 여기요
또 공의 본영이 여기였으므로 여기는 가장 인연 깊은곳 그의 계시던 곳임을 기념하고
또 구국정신을 길이 받들고자 전국 국민들의 성금을 거두어
여기에 이 동상을 세운 것이다.”
고증위원 김상기, 이병도, 이은상, 이흥직, 최순오, 노석경
설계 및 조각 탁성오, 전서 손재형, 시공 박헌동
1967년 4월 28일 여수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세움
동상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손재형이 글씨를 쓴 ‘거북선찬가’가 새겨져 있다. 이 땅 겨레의 혈관속 줄기찬 전통의 힘을 뭉쳐 구만리 하늘이라도 솟구쳐 오를 불기둥 같은 정성을 뭉쳐 피와 땀과 슬기와 금강석보다도 더 굳은 얼을 뭉쳐 한바다 창파 위에 던지니 슬기롭다 그 이름 거북선! 그것은 힘이었다. 정성이었다. 그리고 캘 수 없는 얼덩이였다. 파도높이보다 더 높은 자세로 휩쓸고 달리던 바다의 성벽이었다. 승리의 역사를 짓고 바다 위에선 조용히 그 모습 거두고 말았어도 겨레의 가슴마다에 새겨진 오! 우리들의 힘이여 정성이여 그리고 캘 수 없는 얼덩이여!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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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제작한 첫 이순신 동상으로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는 북채를 들고 있어 칼 이외의 장비가 최초로 등장하는 동상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비례로 볼대 이 동상은 하체에 비해 상체비율이 과대하게 발달하여 약간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든다. - 필자
5. 서울 광화문 광장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서울시 광화문 광장
나. 제작일 : 1968년 4월 27일
다. 제작자 : 김세중 작가
라. 규 모 : 동상 6.93m, 대좌 10.56m, 전체높이 17.49m / 청동
이 동상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총재 김종필)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주관으로 추진하여 1967년 9월 16일 기공, 7개월여만에 완공되었다. 폭 6.5m, 길이 15m의 땅 위에 완공된 동상은 대석과 좌대, 그리고 동상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면 대석 양끝에는 청동주물의 독전고(직경 1.2m, 높이 80cm) 2개가 놓여지고 그 앞에 제단이 있다.
좌대 하층부분은 앞으로 넓게 뻗어나와 그 위에 높이 1m, 길이 3m나 되는 청동주물 거북선이 놓여 있다. 그리고 좌대 좌우면에는 석부조로 배진도와 해전도가 6m 높이로 새겨졌으며, 좌대 뒷면에는 건립내용과 박정희 헌납이라고 새긴 청동판과 노산 이은상의 찬문이 아래와 같이 청동판에 새겨져 있다. 제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 찬 문 -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 초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이다.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왜란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적에 쓰러지는 국가민족의 운명을 한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례의 제사를 받으리라.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 출처 :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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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正 熙 獻納
題字 朴 正 熙 書
銘文 李 殷 相 撰
彫像 金 世 中 作
西紀一九六八年四月 日
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
서울신문社 建立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은 정부의 산하단체였던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제1호 사업결과물)와 서울신문사의 공동주관으로 1968년 4월 27일 건립되었다. 1967년 3월 20일 착공하여 13개월(앞에는 7개월로 나옴) 만에 완공된 것인데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였다.
동상의 제원을 살펴보면 30평 화강석 좌대 위에 세워진 동상의 전체 높이는 17미터이고.[※ 정확하게는 총 높이가 17.49미터로 좌대 10.56미터, 동상 6.93미터이다.] 전면 대석 양끝에는 청동주물의 독전고(督戰鼓)두 개가 놓여 있으며, 좌대 하층 부분에는 높이 1미터. 길이 3미터 되는 청동 주물 거북선이 있다. 또 좌대 좌우에는 배진도(配陣圖)와 해전도(海戰圖)가 6미터 높이로 새겨졌으며, 좌대 뒷면에는 이은상 씨의 명문(銘文)이 청동 주조로 들어가 있다.
왜 이곳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졌을까? 직접적인 배경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에 변형된 조선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지만, 그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할 애국선열 동상의 인물지정에 대한 배경으로 "세종로와 태평로가 뻥하니 뚫려있어 남쪽 일본의 기운이 강하게 들어오게 되므로 이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던 당시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국가의 심장부로 통하는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하여 국가를 수호하는 지킴이의 의미를 지닐 선열조상의 인물로서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1950~60년대 당시 전국에 많은 애국선열들의 동상이 세워지던 가운데 광화문의 이순신동상은 애국선열조상위원회의 의뢰로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였던 고 김세중 선생 [※ 종교조각가이며 기념물조각가이기도 했던 김세중 선생은 절두산 성당과 혜화동성당의 부조 등 종교적 주제를 형상화하는 조각작업과 장충동 유관순열사 동상, 파고다공원 3.1운동 기념부조 등을 비롯한 많은 애국기념물의 조각제작에도 참여한 바 있다.]에 의해 설계, 제작되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김세중 선생이 제작한 많은 기념물들 가운데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며 또한 가장 빼어난 수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동상의 조각적 특징은 기념비적 상징성에 있다. 그것은 형상의 완전한 사실성 보다는 그 인물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인 것이다. 각 조각가마다 다른 표현 성향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광화문 이순신동상의 이러한 특징은 종교조각과 애국상징조각에 평생을 바쳐온 조각가 김세중 선생의 표현맥락으로 보기도 한다.
자세의 상징성은 종교조각물이나 기념조상에 있어서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표현 언어이다. 그는 삼각산과 경복궁을 배경으로 보이는 도심 중앙의 차도 사이에 그 위치가 지정된 이순신동상의 자세와 그분이 보여주신 호국정신의 표현에 있어서 무사적 동세보다는 상징적 수호자상의 자세를 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징적 표현자세를 택하게 된 가장 중요한 배경은 역시 국가 중심으로 통하는 길목에 놓일 호국성웅상이라는 위치와 인물의 특성이 지니는 맥락이다.
동상의 모습은 늠름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선 채 국가의 중심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으며, 오른손에 칼을 든 모습은 칼이 상징하는 실천적 힘과 호국에의 신념을 의미한다고 한다. 광화문 이순신동상이 지닌 설계상의 특성은 차도의 중앙분리대라는 공간에 맞추어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교적 넓은 공간이기에 큰 규모를 지니고 높은 좌대에 놓여 있어 멀리서도 이순신의 동상을 바라볼 수 있으며, 차를 타고 지나가며 또는 가까운 보도에서는 좌대의 아랫부분에 놓인 거북선과 좌대 양 옆의 해전도를 볼 수 있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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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세중의 <충무공 동상>
박정희의 역사인식은 우리의 역사를 패배의 역사, 文弱의 역사, 타율의 역사, 모방의 역사로 인식하는 식민사관과 맞닿아 있다. 박정희는 이러한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대신 이러한 역사를 없애 버리려 하였다. 구체적으로 박정희는 우리의 역사와 전통 전반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유독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강조했고, 그들을 성군, 성웅으로 규정했다.
박정희에게 있어 이순신은 폐허에서의 벅찬 새 역사 창조를 일깨워준 구국의 영웅이었다. 박정희는 이러한 이순신에 자신의 이미지를 오버랩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박정희에게 세종대왕은 퇴영과 침체를 거듭한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황금기를 구가한 번영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박정희는 이순신과 같은 자신을 통해 퇴영과 침체에서 벗어나 세종시대와 같은 황금시대를 재현하겠다는 메시지를 이미지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애국선열건립운동의 첫 사업은 충무공동상, 두 번째 사업은 세종대왕상이 제작되어 세워지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김유신과 같이 외적을 무찌르거나 통일에 기여한 조상을 이 시대에 본받아야 할 선현으로 선택하였다. 특히 삼국통일의 공헌자인 김유신 장군을 시청 앞에 세워, 말을 타고 지금 북진통일을 위해 북으로 처들어 가고 있는 자세로 제작하였고, 을지문덕 장군은 김포 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첫 관문인 한강대교에 북을 향해 높이 칼을 뽑아든 형태로 세워 반공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표상시켰다. 또한 청소년들에게 호국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자기 한 몸을 바친’ 유관순의 영웅담을 강조했다.
이와같이 박정희의 편향적 역사관 속에서 그가 선별한 역사적 영웅들의 목록이 애국선열조상건립 선열 목록과 많은 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광화문의<충무공>상의 제작 동기에 대해서도 박정희는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이 연설에서 그는, 국토의 북반부를 강점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침범하려고 노리고 있는 판국에 당리당략을 고집하여 국론의 통일이 되지 않고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국가의 큰 이익을 외면하는 몰지각한 행위들이 사회 각층에서 아직도 근절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임진왜란 때와 유사함을 강조하며 충무공을 우리가 따라야 할 민중의 지도자, 민족의 태양으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 지도자를 따라 조국 근대화의 과업이라는 민족적 대열에 한 사람도 낙오 없이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중략)
광화문 '충무공 동상'은 지상에서 투구 끝까지 16•8m. 그중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좌대가 10•5m, 원상은 6•3m로 구리로 주조했다. 座臺 전면에는 거북선을 구리로 본떠 앉혔는데 뱃길이가 2•79m이다. 배 앞머리 좌우엔 지름 1•2m의 북, 좌대 측면엔 배진도와 해전도를 부조했다. 조각가 김세중이 작업을 맡았다.
충무공상은 복부를 앞으로 내밀어 매우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특히 턱을 바싹 당기고 눈을 지릅떠(부릅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내었다. 칼을 오른손에 잡고 있어서 降將 같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칼의 크기로 보아 필요시 자유스럽게 뽑아낼 수 있는 실전용의 칼이 아니라 지휘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儀式用의 칼이라는 주장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상은 우측 다리가 앞서고 있음에도 무게 중심이 아직 왼쪽다리에 실려 있어서, 오른팔의 지휘봉(?)을 높이 치켜들며 오른발로 무게중심을 옮기기 직전의 움직임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내려다보는 시선 속에서 자신의 군사들, 국민들을 향해 곧 지휘봉을 높이 들며 "나를 따르라"라고 소리치기 직전의 긴장감이 내포되어 있다. 이승만정권기 충무공동상의 시선이 바다 저편의 적군을 향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광화문 동상의 시선은 자신의 바로 앞에 서 있는 자신의 군사들, 국민들을 향하고 있게 구성하였다. 지도자의 움직임 직전의 응축된 긴장감과 카리스마는 국가주의를 표상하는 지도자 박정희의 이미지와 오버랩되는 것이다. 박정희는 이 광화문 충무공상의 모형제작부터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조각가 김세중의 작업실을 두 번이나 들러 살펴보았다. 그가 흡족해하였듯이, 이 동상은 박정희의 국가주의를 표상하기에 적합한 카리스마를 이미지화 해내었다.
애국선열건립위원회에서는 특히 동상의 주조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박정희가 헌납하여 수도의 심장인 광화문에 세워질 이 동상의 파손이 쉽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위원회는 서울신문 동경지사장에게 명해서 일본 동경미술대학과 일본미술가연맹에게 의뢰하여 일본의 주조공장을 추천받아, 당시 애국선열건립위원회 총무간사를 맡고 있던 한교택과 김경송 교수가 서울에서 주조공 4명을 인솔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주조공장에서 2개월간 연수를 받도록 하였다. 또한 귀국 후에는 주조공장을 2곳 선정하여 융자를 알선하여 주조기기를 새로 마련하는 등의 공장시설을 보완하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애국선열조상건립을 기회로 한국의 주조기술이 발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을 입증하는 예이기도 하다.
2) 김세중 충무공상의 재건립 문제
광화문 충무공동상의 고증문제는 동상이 건립된 직후부터 제기되었으나, 이슈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의 똑같은 문제제기가 1975년 이후 1977년 사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이슈화되면서 논란 끝에 1980년 2월 광화문 충무공동상 재건립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정책은 여론의 반대와 갑작스런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1980년 5월 전면 백지화되었다.
그렇다면 1960년대 말에 이미 제기된 문제가 왜 1970년대 후반에 다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고증의 문제로 제기된 사안은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후반이나 별다르지 않다. 1. 칼을 오른손에 잡고 있어 항장(降將)의 모습이며, 2. 갑옷자락이 발끝까지 내려와 무인의 활달한 기질을 잃었고, 3. 좌대 양옆 북(戰鼓)이 뉘어져 있어 전쟁 분위기가 묘사되지 않았다는 등의 비판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의 논리도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후반간의 차이점은 없다. 1. 오른손의 칼은 지휘봉으로 볼 경우 무리가 없고, 2. 전고는 조각의 형태구조상 뉘어놓은 것이 보다 안정감을 주며, 3. 나라의 재정이 어려운 때 동상을 헐고 다시 세우는 사업이 낭비라는 점이다.
그런데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후반의 사항 중 다른 점이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동상 재건립을 요구하는 주체가 원하는 핵심 요인은 고증의 문제라기보다는 바로 동상의 이미지 문제 때문이었고 동상의 재건립을 요구하는 중심 주체가 바로 서울시와 문화부로 대표되는, 바로 동상을 건립한 주체였던 정부였다는 점이다.
1973년 10월 30일에 이충무공 영정심의위원회에서 장우성의 <충무공>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이후 광화문 충무공상은 표준영정 지정보다 5년이나 이전에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충무공상이 표준영정과 같지 않다는 것이 문제화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서울시는 학자가 다시 제기한 광화문 동상의 고증문제를 지지하며 광화문 충무공상을 표준영정에 맞게 재건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화계와 일반 시민들의 반대가 거세자, 서울시는 1977년 문공부에 이전에 대한 질의를 하였고, 이에 대해 문공부는 ‘표준영정을 기준으로 다시 세우라'는 회신을 통해 서울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부가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장우성의 <충무공>은 충무공의 장군 이미지보다는 관리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애쓴 작품이다. 따라서 충무공의 복식은 갑옷도 구군복도 아닌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복인 상복을 입고 사모를 쓰고 있다. 문공부의 표준영정을 기준으로 다시 세우라는 주문은 충무공의 이미지를 장군의 이미지에서 관리의 이미지로 변화시키라는 주문인 것이다.
따라서 광화문 충무공상을 헐고 새로 건립할 충무공상의 모형을 본 김원용(서울대 고고학과 교수 -필자)의 언급, 즉 “새로 세운다는 동상의 모형도를 보니 조용한 문인상처럼 보여 오히려 현재의 것보다도 무인의 기질이 더 결여된 것 같다.”는 언급은 이를 입증한다.
문화계의 반증과 경제적 이유로 재건립을 반대하는 일반시민들의 비난 속에도 서울시가 강행을 계속하자 여론의 질타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당시 2억3천만 원의 예산을 들여 새로운 동상을 제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는 이 시기 자신의 이미지를 변경하고자 하였던 박정희의 이미지와 오버랩된다.
서울시는 예산 부족으로 계획을 진행시키지 못하다가 1980년 예산이 확보되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충무공 동상 재건립위원회를 설치하고 새 동상의 모형까지 제작하였으나 문화계와 일반 시민들의 반대와 더불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서거라는 정치상황과 맞물리면서 정책을 철회한다.
박정희시대 때 전국에 충무공동상이 세워졌다. 1971년 난국초등학교(조선일보 1969년 5월 30일자에는 서울 충무초등학교 학생들 캉통 등 폐품팔아 충무공 동상 세웠다고 나옴)에서 어린이들이 모은 폐품을 판 돈으로 학교 교정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운 것과 같이 이들 대부분은 국민들의 성금으로 설립하도록 하여 직접적으로 국민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후략)
- 출처 : 박계리, 「충무공동상과 국가이데올로기」,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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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考 證 不 在 -
이충무공 동상과 거북선
제멋대로 만든 배의 모형 / 구조 전체가 실전엔 부적
전투위한 갑옷 너무나 길고 / 작대기 같은 칼 일식 손잡이
민족의 태양이라 하여 온 국민의 숭앙을 받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광화문 네거리에 건립되었다. 장군의 탄생일을 하루앞둔 27일 제막식이 거행됐다. 그의 출생지 서울에 동상이 세워진 것은 오히려 늦은감이 없지도 않으나 온 국민이 한결같이 경하하여 마지않을 쾌사라 할 것이다.
그러나 충무공은 세계적인 명제독인데다가 동상 위치가 내외국인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곳이고 보면 그의 동상이나 거북선모형은 미학적인 견지에 앞서 정확한 고증하에 만들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충무공을 연구한 사람의 눈으로 살필 때 적지않은 異論이 있다. 장군의 얼굴 모습은 생존시의 畵가 없기 때문에 남의 작품을 쉽게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餘他는 최선을 다하여 고증했어야 할 것이다.
지면관계로 간추려서 아주 중요한 몇 가지를 동상부터 지적해 보기로 한다.
1. 갑옷은 전투를 위한 활동복이므로 무릎을 내려갈 수 없다. 장군이 녹둔도의 전투에서 왼쪽다리에 적의 화살이 박힌 것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2. 戰服도 발에 밟힐 정도로 치렁치렁 길수는 없다.
3. 칼이 작대기 같고 손잡이가 倭刀식이다. 칼은 굽어야만 잘 베어진다. 장군의 환도는 도장 태귀연, 언복 등이 만든 것으로 결코 왜도가 아니다.
4. 토시는 팔꿉을 덮지 않을 정도로 길어야 한다.
5. 두 다리를 너무 벌린 자세는 당시의 예절상 재고할 점이다.
6. 戎垣必備나 경주부사의 유품인 투구와 갑옷은 동상과 다르다.
7. 장군은 뛰어난 명궁이다. 활을 든 장군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군대는 검술로는 왜를 당할수 없을 뿐 아니라 칼은 군법이 추상같다는 말과 같이 주로 斬刀로 사용되었다. 쉽게 말해서 督戰用이다. 동상은 적을 노려보는 모습이지 지휘관으로서 부하에게 위엄을 보이는 장면의 그것은 아닐 것이다.
거대한 동상에 비해서 거북선 모형은 너무 빈약하다.
무슨 파충류가 발밑을 기어가는 듯한 인상이다. 총체적으로 龜頭를 달고, 배의 형태이기 때문에 龜船이지 너무나 엄청난 고증부재가 바로 이 거북선 모형이다.
1. 龜頭폭은 넓어야 사람이 포를 쏘기 위해서 자유로이 昇降할 것이다.
2. 船幅은 頭,腰,尾의 너비가 각각 다르다.
3. 船底는 좁고 船腹이 넓어야 한다.
4. 船尾는 길어야 한다. 船底板六十四尺 最上板一百三十三尺
5. 櫓는 보트의 그것이 아니라 끝부분만이 넓을수 없다.
6. 砲口와 砲穴은 密着될 수 없다. 당시의 포는 오늘의 그것과 같이 後裝砲가 아니다.
7. 龜背에는 十字細路가 있어야 한다.
8. 귀배에 꽂은 칼은 정연하게 일열로 꽂아서는 안된다.
9. 귀배에는 문이 있어야 한다. 取明과 귀배에 사람이 기어 올라가 돛을 달고 떼야하기 때문이다.
10. 철갑의 표시가 없다.
11. 방패의 네 귀퉁이에는 고정장식이 상하를 막론하고 부착되어야 한다.
12. 應援旗같은 괴상한 기는 도대체 무슨기인가
13. 귀배에 돛대는 왜 없는가
이번에 세워진 이충무공의 동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보는 거대한 것이다. 그만큼 비용도 많이 들였을 것이다. 또한 동상은 한번 세워지면 영원토록 보존되어야 하며 따라서 만인은 그 동상과 거북선 모형을 봄으로써 참모습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상과 같이 결함이 많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선의의 두려움에서 이 단문을 쓰는 바이다.
- 최석남 전육군통신감 이충무공연구가
- 출처 : 동아일보 1968년 4월 27일 5면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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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이순신 동상의 고증 논란 >
世宗路忠武公銅像이 잘못됐다 - 다시 만들기로
얼굴이 현충사 표준영정과 상이 / 오른손에 꽂힌 칼들어 降將誤認
갑옷자락길어 武人모습 아니다 / 戰鼓가 누워 勇躍분위기 흐리다
서울 한복판 세종로네거리에 세워진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잘못 조각되었음이 밝혀져 문공부와 서울시가 새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충무공동상은 지난 68년 4월 27일 세종로네거리에 세워졌는데 얼굴모습이 현충사에 보관된 표준영정(73년 10월 30일 표준영정으로 지정)과 다르고 칼집에 꽃힌 칼을 오른손에 들고 있어 마치 항장(降將)으로 오인될 염려가 있으며 갑옷자락이 발목까지 내려가 활달한 무인(武人)의 모습을 엿볼수 없고 전고가 누워 있어 전장에서 용약무쌍하게 싸우는 분위기가 묘사되어 있지 않다는 점등이 전문가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
서울시는 문공부와 협의, 정확한 얼굴모습, 칼을 과연 왼손에 들어야하는지(오른손으로 칼을 빼야하기때문), 복식은 어느정도로 표현해야하느냐는 점등에 관해 타당성 있는 합의점을 찾아 현존 동상의 잘못된 점을 고쳐 새로 동상을 세울 방침이다.
- 출처 : 동아일보 1977년 5월 10일자 7면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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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武公(충무공)의 影帳銅像(영정동상)考證(고증)이 잘못됐다
全國(전국)에 散在(산재〉한 20여개가 모두 容貌(용모)달라
正確(정확한) 典據(전거)…武人風貌(무인풍모)살려 製作(제작)해야
서울 세종로네거리에 세워진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동상이 각종 문헌이나 연구에 의한 忠武公의 이미지와 부합되지 않는다는 시비가 있어 서울시가 文公部에 이의 정확여부를 有權 해석해줄것을 요청、忠武公 동상에 대한 관심이 새삼 일고있다。
그러나 전국 20여개가 넘는 충무공의 각종 동상이나 影帳은 모두 고증의 결함을 안고있는 실정이다。
근세에 제작된 영정 중 최초라 할수있는 1932년 東亞日報社의 顯忠詞 건립시 靑田 李象範 화백의 具軍服(구군복)영정은 舊韓末(구한말)의 舊軍官制(구군관제)에 의한 服制(복제)를 援用(원용 )했던것이다。1950년 4월 文敎部(문교부)가 忠武公紀念事業會(충무공기념사업회)와 함께 공인했던 以堂(이당)金殷鎬(김은호)화백의 帽帶本(모대본〉영정과 甲富本(갑주본)영정은 충무공을 따라다녔다는 중이 그린 伐橋本(벌교본)의 사진(납북된 李重華(이중호)씨 소장)과 柳成龍(류성룡)의 「懲怒錄(징비녹)」에 나오는 「容貌雅飭(용모아칙) 如修謹之士(여수근지사) 「有中服氣(유중단기)」 「寡言笑(과언소)」등 단편적 기록을 참고하고 崔南善(최남선)李芮燾(이병도) 李殷相(이은상) 卞榮映(변영만) 朴鍾和(박종호) 黃義敎(황의단) 鄭貪普(정인보) 孫晉泰(손진태) 씨등 당대석학들의 고증을 통해 확정했던 것이다。
현재 顯忠詞(현충사)의 月田(월전)張遇聖(장우성) 화백의 표본영정은 53년에 제작、봉안됐으며 이때 靑田(청전)의 具軍服(구군복)영정은 忠武鑿梁廟(충무착양묘)에 옮겨졌다。以堂(이당)의 帽帶本(모대본)은 昇州(승주) 海龍忠武詞(해용충무사)에서 불타없어진뒤 무명화가의 甲胄本(갑주본)으로 대체되었고 또한 以堂(이당)의 甲胄本(갑주본)은 閑山島制勝堂(한산도제승당)에 봉안됐다。이밖에 月田(월전)의 井邑(정읍)忠烈詞(충렬사)영정을 비롯、갖가지 영정과 동상은 거의 以堂(이당)의 영정과 柳成龍(류성용)의 단편적이고 추상적인 기록에 의존하였을뿐 충무공을 직접 옮긴 그림이나 기록이 전하여지지 않기때문에 한결같이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柳成龍(류성용)의 「容貌雅筋(용모아칙) 如修謹之士(여수근지사)」란 기록의 「공의 얼굴이 단아하여 수양、근신하는 선비와 같다 」 는 표현은 충무공의 이목구비나 구체적인 용모를 표현하는것은 아닌 것 같다。임진란때 의병장인 金德齡(김덕령)장군은 그의 초상을 본 加蔣淸正(가등청정)이 「참으로 장군의 용모 」라고 찬탄하고 自戒(자계) 할이만큼 기골이 장대하고 武人(무인)의 풍모를 지녔음이 확실한데도 後人(후인)의 기록에 이 「容貌雅飭(용모아칙)如修謹之士(여수근지사)」란 찬사가 나온다.
따라서 이 표현은 文武(문무)의 차별이 엄격하던 조선조 관료제도 아래서 國家(국가)에 有功(유공)한 武人(무인)을 文人(문인)으로 禮遇(례우)하는 慣用修辭(관용수사)일뿐이라는 說(설)이 설득력을 지닌다。즉 「혈기왕성한 武人(무인)의 풍모」로보다는 학식과 품격을 겸비한 「如修謹之士(여수근지사)」란 말이 더욱 품위를 인정하는 禮遇(례우)였던 것이다。
이러한 막연한 기록보다는 洪字遠(홍우원)(1605~1687)의 「南波集(남파집)」이나 尹鐵(윤전)(1617~1680)의 「白湖集(백호집)」에는 더욱 뚜렷한 충무공의 武人的(무인적)인 용모의 기록이 있다。비록 충무공 在世時(재세시)의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더라도 시대적인 차이가 근소하고 확실한 典據(전거)가 있었을 것이므로 앞으로의 새동상 제작을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가 되어야할 것이다。
- 출처 : 동아일보 1977년 5월 12일자 5면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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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의 5대 문제점
광화문을 지키고 있던 이순신 장군께서 쓰러졌다. 1968년 4월 광화문 네거리에 동상이 서게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에 변형된 조선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지만 그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각가 김세중 측의 전언) 그때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한민국의 한복판에서 ‘온갖 역사적 사건’을 지켜보던 이순신 장군은 ‘속이 썩어 붕괴 위험’에 처했고, 이에 장장 40일동안 입원치료를 받는다고 한다.
이순신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우리 어린이들이 존경하는 인물 1위인 그는 우리에게 ‘역사적인 인물’을 넘어 던지는 뭔가의 느낌이 있다. 그것은 패배와 설움에 북받혀 발버둥친 질곡의 조선역사가 남긴 ‘승리의 상징’, 부당한 권력과 권모술수의 책략을 뿌리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걸어간 ‘올곧음’에 바치는 겨레의 찬사이다. 하물며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겨 종살이 생활을 40년 가까이 한 우리에게 그는 ‘구국과 항일’의 구심점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광화문에 금간 소식’ 보다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이유였을 거다.
며칠전 나는 울적한 마음에 광화문 이순신 동상에 문병차 가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사실 동상에 가까이 가서 살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새롭게 조성된 세종대왕 동상을 지나 이순신 동상 뒤편으로 다가선 나는 순간 충격에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박정희 헌납> 거기엔 그렇게 써 있었다. 나는 순간 사람이 있는줄 모르고 화장실 문을 잘못 열은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헌납이란 단어는 천황폐하의 만수무강과 대일본제국의 승리를 위해 바쳤던 ‘비행기 헌납’같은 일들을 연상시킨다. 박정희는 누구에게 이순신 장군을 헌납한 것일까? 설마 천황에게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단어는 나에게 너무나 큰 놀라움을 던져주었다. 대통령 박정희도 아닌 개인 박정희가 ‘이순신 장군 동상’을 헌납했다면 대상은 누구였을까? 국가, 민족 뭐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다면 이 동상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비를 털어서 만들어진 것이었을까?
혹떼러 갔다가 혹 붙인 느낌으로 더욱 울적해진 나는 그곳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에 따른 음모’ 뭐 이런 유언비어가 한때 있었던 것을 생각해 냈다. 군사독재를 위해 세종로에 충무공 동상을 세웠다는 류의 그런 소문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이순신 장군 동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를 살펴보다가 나는 정말 ‘광화문 동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이 동상이 1980년 철거될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77년 5월. 서울 시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다. 문화재 전문가들에 의해 여러 차례 고증 잘못이 지적되자 서울시가 ‘문화공보부 영정심의위원회’에 정확성 여부를 심의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시민들은 “성웅의 조상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느냐”라며 관계 당국을 성토했고, 서울시는 1979년 5월 문공부에 충무공 동상을 다시 만들어 세울 것을 요청해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이후 펼쳐진 어수선한 정국으로 이 결정은 실행되지 못했다. 도대체 이 동상은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 동상에 대해 5대 문제점을 제기한다.
1) 이순신 장군은 과연 항복하는 장군의 모습인가?
이 문제의 핵심은 칼을 오른손에 들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칼을 뽑을 수 없는 모습이고 이는 항복한 장수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이다. 김세중측은 이점에 대해 “ 장군이 왼손잡이일 리는 없지요. 왼손에 칼을 쥐고 있다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쟁 때의 상황입니다. 동상의 콘셉트는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으로 뭔가를 쥐고 있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 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김세중이 조각을 조성할 때 참조했다는 이당 김은호의 영정과 바로 모순됨을 알 수 있다. 김세중이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조각할 때, 참조했다는 이당 김은호의 영정에는 이순신 장군이 칼을 왼손에 잡고 있다. 또한 광화문 동상이 아닌 이순신의 다른 동상 혹은 영정 그림 등과 비교할 때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발언이다.
‘갑옷만을 참조했다’는 김세중의 진술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김은호의 영정과는 다르게 오른손에 칼‘을 잡은 모습을 표현했는가 하는 것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과연 김세중측의 말처럼 “ 전시가 아닌 평화의 시기”를 상징하기 위해 그렇게 된 것인지, “단순한 작가의 불찰”로 인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2) 이순신 장군의 칼이 일본도이다.
이순신 장군의 칼이 일본도라는 지적에 대해 김세중 측은 “현충사의 칼은 일본도가 맞습니다. 197.5㎝나 되는 긴 칼에 대해서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에 끌려갔던 도장(刀匠) 태구련(태귀련 혹은 태귀운이라는 설도 있다), 이무생이 장군에 잡혔어요. 장군은 ‘첩자가 아니냐’고 문초한 뒤 칼 두 자루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일본에서 일본도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일본도는 당시로서는 최신예 검(劍)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상의 칼은 현충사 칼을 모델로 했지만 실제 비율보다 축소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또한 “칼이 한국의 검이냐 일본도냐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칼 자루에 석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의 색이 변하는도다. 한바탕 휘둘러 쓸어 없애니 강산이 피로 물드는구나(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라고 적혀 있습니다.”고 말한다. 현충사의 이순신 장검이 지닌 본연의 의미, ‘일본을 물리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강조되어야 하지 ‘일본도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현충사에 소장된 보물 제326호 이충무공(李忠武公) 장검은 조선식 쌍수도(雙手刀)에 속하며 무예도보통지에 의해서 “장검. 용검. 평검이라고도 불리며, 칼날의 길이 5척, (동호인 1척), 자루 1척 5촌. 7척짜리도 볼 수 있다.”고 정의되어 있다. 이 칼은 실전용이 아닌 의전용 칼이므로 길이가 1미터 97센티, 칼집에 넣었을 때는 2미터를 넘는 크기이다. 만약 이 칼을 짚었다면 당연히 키보다 높은 칼을 묘사해야지 허리정도까지 오는 칼로 표현될 수 는 없다. 허리에 차는 칼, 혹은 그보다 작은 칼을 묘사하려면 이순신 장군이 패용한 실전용 칼 ‘쌍룡검’을 묘사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장검의 길이를 축소, 일본도를 만들어 놓고 ‘현충사의 칼’이 일본도라는 변명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이 들고 있는 장검(長劍)은 보물 제326호 이충무공(李忠武公) 장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길이뿐만 아니라 칼날의 곡률(曲率)을 보더라도 이충무공 장검이 상당히 큰 곡률을 갖는데 반해서 세종로 동상의 장검은 거의 직선에 가까울 정도로 곡률이 작다. 동상의 칼은 일본도 혹은 일본도의 변형일 뿐이다.
3) 이순신 장군의 갑옷은 ‘중국 갑옷’이다.
조선식 갑옷은 두루마기처럼 입는 형태로 만들어지고, 중국식 갑옷은 덮어 쓰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어깨 부분이 조각으로 덮여져 있다는 점을 볼 때, 조선식이 아니라 중국식 갑옷인 점이 명백하다.
김세중측은 자신의 과오로 이순신 장군의 갑옷이 중국식으로 표현된 것을 ‘갑옷의 모양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순신 장군 영정을 참조했고 복식 전문가인 석주선씨의 고증도 얻은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김세중은 정확한 고증과 연구를 거치지 않고 그저 조선왕릉의 무인석(武人石) 몇점을 참조하여 만들었다는 소문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말이다. 전문가의 조언을 얻었다면 ‘이당의 초상이 중국식 갑옷임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 동상이 얼마나 ‘객관적 고증과 연구’없이 진행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4) 이순신 장군의 얼굴은 왜 표준영정과 다른가?
광화문 동상의 얼굴을 놓고도 지적사항이 많았다. 특히 현충사에 걸려있는 국가 표준영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김세중 측은 “ 장군의 실제모습을 전해오는 영정은 없으며,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께서 그리신 이충무공의 영정이 1968년 광화문 충무공동상이 제작된 지 5년후인 1973년 이순신장군의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고 변명하고 있다. 나아가 조각가인 김세중과 비슷하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이에 아내인 김남조 시인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다빈치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고 하지만 작가와 닮았다는 말은 가족 입장에서 할 수는 없는 겁니다. 나라의 큰 인물과 비교할 수 없지요.” 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김세중은 조각상을 건립하면서 당시에 존재했던 이순신 장군의 영정중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위의 사진들은 당시까지 그려진 이순신 영정중의 대표작이고, 이순신 장군을 상징하는 주요 장소에 실제로 걸려있던 영정이었다. 그런데 김세중은 이 초상중에 어떤 점도 참조하지 않았다. 특히 월전 장우성의 그림은 현충사에 53년도부터 봉안되어 있었고, 당시의 화폐 100원 동전, 500원 지폐 등에 사용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월전의 그림도 조금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월전 장우성의 영정이 지닌 문제를 별도로 하고)
갑옷의 고증을 통해 이당의 그림을 참조하고 있다고 밝힌 조각가가 얼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영정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점은‘고증과 연구’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을 의미한다. 동상, 초상화와 같은 작품은‘작가의 개성’을 억제, 사실관계를 살피고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임이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작업을 수행하지 않고 1973년에야 ‘표준영정’이 지정되었기 때문에 어떤 영정도 참고하지 않았다는 말은 옹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나아가 김세중측이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초상화 혹은 동상을 제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적절치 않은 듯하다. 안중근 혹은 유관순의 얼굴을 그리거나 제작할 때, 제작자의 얼굴과 닮아 버린다면 ‘사실을 전달’하려는 제작의 목표와 심각하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 김세중의 얼굴과 닮았다’는 의혹에 대해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는 답변은 받아들일 수 없다.
5) 장군이 지휘하는 북은 왜 누워 있는가?
전장에서 북은‘전쟁을 지휘’하는 장수의 지시이다. 이에 전장의 북을 독전고(督戰鼓: 전투를 독려하는 북)’라고도 부른다. 평화시에도 북은 전쟁을 예고하거나 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 쓰인다. 설화에 나오는‘자명고(自鳴鼓 : 스스로 울리는 북)는 낙랑국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주는 국방의 상징이다. 그런데 광화문 동상 앞의 북은 옆으로 누여져 있다. 이는 전장을 독려하고 군사를 호령하여‘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낸‘용맹한 이순신’의 이미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군의 탄환을 맞은 뒤,‘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한 뒤, 조카인 이완에게‘계속해서 북을 쳐 전쟁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일 새벽, 이순신이 한창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때에 이순신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곧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이순신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회와 완,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비록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그대로 기를 휘두르면서 독전하기를 계속했다(『이충무공 전서』의 「이분 행록」).
제승당에 걸린 ‘노량해전도’는 이런 역사적 전거에 입각해 북 옆에서 쓰러진 이순신 장군을 묘사했다. 물론 북은 똑바로 서서 언제라도 장군을 맞을 태세로 그려졌다. 민족의 가슴 속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 최후의 모습, 혹은 불패의 장군의 모습을 묘사하지 못하고 북을 뉘어‘장군으로서 지휘’하는 모습을 형상화 하지 못한 것은 최악의 실수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글 : 혜문 스님 /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조선왕조실록환수위 간사. 조선왕실의궤환수위 사무처장. 대한불교조계종 승려
<참고자료>
동아일보. 1977. 5.10 (세종로 충무공 동상이 잘못 되었다- 다시 만들기로)
동아일보. 1977. 5.12 (충무공의 영정 동상 고증이 잘못 됐다)
조선일보. 2009.1.31 (이순신 동상과의 대화… 김남조 시인에게 듣다 )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 할 동상을 세우라
동아일보. 2004. 10.9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 칼은 일본도”)
재단법인 김세중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출처 : 한겨레 오피니언넷 <훅> 20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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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 스페셜 리포트 ] 2011.01.19.
“더이상 내 칼을 일본도라고 비난하지 말라!”
이순신 동상 ‘40년 논쟁’ 5대 쟁점의 진실을 밝힌다
최근 서울 광화문 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의 보수와 맞물려 불거진 논쟁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논쟁은 1968년 조각가 김세중(1928~1986)이 제작한 충무공 동상이 세종로에 들어선 이후 1970년대부터 시작됐고, 5년에서 10년 정도의 주기를 거치면서 무려 42년이 지난 2011년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국민이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이 사안의 요점은 동상이 잘못된 고증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세간에서는 이번에 문제를 제기한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본부’(사무총장 혜문 스님) 측에 의해 속칭 ‘이순신 동상의 5대 문제점’이라는 내용으로 회자되고 있다.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본부의 문제 제기는 △동상 속 충무공이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어 패장의 모습이며 △쥐고 있는 칼이 일본도이고 △입고 있는 갑옷이 ‘중국 갑옷’이고 △동상의 얼굴이 충무공의 표준영정과 다르며 △동상 앞의 독전고(督戰鼓)가 서있지 않고 뉘어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이에 대해 옹호하는 측은 예술가로서의 창작에 관련된 소관이라는 점과 제작 당시의 상황을 들어 동상에 대한 변론을 하고 있다. 논쟁을 얼핏 보면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측의 논거가 일리 있는 듯 보이고 그냥 놔두어야 한다는 측의 변론이 미흡해 보인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정작 다른 데 있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논쟁의 핵심 중 상당 부분에서 근본적인 오류가 존재한다. 지적하는 측의 근거와 반박하는 측의 변론들 자체가 잘못된 정보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증에 입각한 증거 자료와 논리로서 냉정히 풀어가야 할 사안이 주관적인 오해 아래 불필요한 소모전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충무공 동상으로 야기된 논쟁이 간과하고 있는 문제에 관해 고증과 자료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쟁점 1. 충무공 동상은 항복하는 장군의 모습인가?
▶ 문제제기 측 주장 : 동상 속 충무공은 칼을 오른손에 들고 있다. 이는 항복한 장군의 모습이다.
▶ 동상 제작자 측 주장 : 오른손에 칼을 든 이유는 전쟁 종료라는 개념으로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이다. 오른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다.
칼을 어느 손에 쥐는가를 기준으로 승장·패장의 논리를 적용하여 문제로 삼는 쪽이나, 작가가 동상의 모습에 부여한 의미는 창작의 영역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는 쪽 모두 지극히 관념적인 해석을 하고 있으며 문제 자체가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 문제의 핵심은 동상 속 충무공이 ‘칼을 차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2000년 전부터 칼의 휴대 방식은 원시부족이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차는 것이지 드는 것이 아니다. 왕의 주위에 검을 들고 서있는 운검(雲劒)과 별운검(別雲劍)들은 예외의 경우지만 임진왜란 당시는 물론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장군이든 장령이든 무관이든 문관이든 칼을 휴대하는 자는 당연히 차고 있어야 했다.
패검(佩劍)이란 칼의 명칭은 말 그대로 ‘차는 칼’을 의미하는데 ‘세종실록(世宗實錄)’‘군례서례(軍禮序禮)’의 기록을 보면 ‘패검은 우리말로 환도(環刀)라 한다’고 했다. ‘융원필비(戎垣必備)’에는 환도를 ‘이 칼이 환(環)이라 명명된 것은 칼집이 있고 고리를 만들어 이 고리에 끈을 묶어 찼기 때문에 환도라 하였다’라고 설명되어, ‘환도’라는 용어 또한 그 자체로서 ‘차는 칼’을 의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지금 전국 여러 곳에 세워진 충무공 동상 거의가 왼손이건 오른손이건 간에 손에 칼을 들거나 쥐고 있고 혹은 가운데로 모아 짚은 모습(조선시대 그림에서 장수와 병사들이 이런 식으로 시립 또는 도열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만 지휘관의 경우엔 해당되지 않기에 이 또한 정확한 고증은 아니다)을 하고 있는 것은 모두 잘못된 고증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잘못된 고증은 비단 광화문 동상만의 문제가 결코 아닌 대한민국에 소재한 충무공 전체 동상의 문제이다.
만약에 충무공이라면 과연 어땠을까 하고 의문을 가진다면 저 유명한 시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즉 전투에서 벗어나 시름에 빠져 앉아있는 상황에서도 충무공은 칼을 풀어 쥐거나 들지 않고 차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 옳게 문제제기를 하려면 ‘왜 차고 있어야 할 칼을 쥐고 있느냐? 그것도 오른손에?’라는 식으로 해야 한다.
전시 상황이라면 칼을 왼손에 들었을 테지만 전쟁이 끝난 뒤 승자의 모습이기에 오른손에 쥐게 했다는 작가 측의 해명은 오히려 문제제기 측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자충수가 된다. 전쟁이 끝나 평화가 왔기에 일단 칼은 풀었으니 갑옷을 벗기 전 한번 칼을 짚고 감상에라도 젖고자 하는 모습이란 말인가. 정말로 작가가 그런 모습을 상정한 것이라 한다면 이 경우엔 당연히 칼은 왼손에 들어야 한다. 문제제기 측의 주장처럼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언제라도 칼을 뽑을 수 있는 상태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전쟁을 끝내고 칼을 풀어 손에 잠시 든 것이라 해도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국가의 위기에 항시 대처해야 할 장군이라면 평시나 전시나 승전후일지라도 항상 칼을 뽑아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무장의 기본이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이 조국 수호의 충심을 표현한 것이며 의지의 표현’이라는 말은 설사 작가의 유족 측에서 창의력이란 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일방적으로 부여한 모호한 의미로 느껴질 뿐 설득력이 부족하다.
쟁점 2. 충무공 동상이 쥐고 있는 칼은 일본도다?
▶ 문제제기 측 주장 : 동상의 칼은 일본도이다.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검은 많이 휘어있는, 즉 곡률(曲率)이 상당히 큰 데 반해 광화문 충무공 동상의 장검 곡률은 직선에 가깝다. 광화문 동상 속 충무공이 들고 있는 칼은 일본도이거나 일본도의 변형일 뿐이다. 제대로 된 고증이라면 충무공의 실전검인 쌍룡검을 들어야 한다.
▶ 동상 제작자 측 주장 : 아산 현충사의 칼(이 충무공 장도 두 자루)은 원래 일본도가 맞다. 제작자는 현충사 칼을 모델로 동상의 칼을 제작했을 뿐이다.
‘동상의 칼은 일본도가 아니다’가 정답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확인할 필요없이 일본도에 지식이 있는 일본인에게 동상의 칼 사진을 보여주고 묻길 권한다. 충무공 동상의 칼을 일본도라고 대답하는 일본인이 있다면 그는 자국의 칼을 모르는 문외한이 분명하다. 광화문 충무공 동상의 무엇을 보고 도대체 일본도라고 하는가.
동상의 칼은 칼집 안에 들어있어 칼날의 형태는 확인되지 않으니, 밖으로 보이는 칼집과 칼자루를 살펴보자. 동상 속 충무공이 쥐고 있는 식의 외장을 가진 일본도는 없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동상의 칼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도의 전형인 가타나(刀)의 모습은 물론 우치가타나(打刀·다치에서 가타나로 바뀌는 중간 단계의 칼)나 다치(太刀·허리에 차는 긴 칼)와도 확연히 다르다. 그 이유는 조형된 동상의 칼이 투박하고 충무공 장도와 구조적 비례가 맞지 않아 얼핏 원본과 다르게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조형에서 조선 환도의 형태적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연 동상의 칼은 아산 현충사 충무공 장도와 어디가 다르고 어디가 같은가? 충무공 장도의 외장에 보이는 구성요소들이 모두 적용되었나? 결론을 먼저 말하면 구성요소는 거의 적용되었다. 작가가 비례적용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장식의 크기와 간격을 임의로 왜곡시켰다. 예를 들어보자. 동상이 쥔 칼자루의 머리장식은 충무공 장도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칼날과 칼 손잡이 사이의 장식인 코등이 또한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테두리 부분은 흉내를 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충무공 장도의 코등이와 세부적 차이가 있기에 일본식 코등이로 보기 어려운 결과를 얻었다.
칼집에는 분명히 패용장식이 보인다. 한데 패용장식의 두 개의 환 사이 간격이 원본의 간격보다 많이 좁아져버렸다. 또한 칼집 끝 장식은 원본의 크기보다 필요 이상으로 커져버렸다. 빠뜨린 장식도 한 개 있다. 원본에 있는 칼자루 하단 장식은 아예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본의 날렵한 외형이 동상의 칼에서는 투박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런 미비한 재현들이 동상의 칼을 실제 칼과 달라 보이게 하는 근본적 요인이 되어버렸다. 작가가 왜 이런 식의 실수를 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전체적인 비례가 어긋나게 재현한 점이 충무공 장도와 동상이 쥔 칼을 얼핏 다른 칼로 보이게 하는 근본적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애초 비례적 축소만 정확히 했다면, 구태여 일본도다 환도다 하는 세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없었을 문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는 작가의 불찰이다. 그러나 사진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제작자 측의 주장대로 미비한 재현이나마 동상의 칼이 충무공 장도를 본으로 하고 임의 축소해 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려면, 동상의 칼에 참고했다던 충무공 장도의 길이를 축소할 때 비례적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 칼집의 곡률을 변형한 점, 일부 장식을 임의로 원본과 달리 변형하거나 생략한 점, 그리고 전체적으로 투박한 외형으로 만들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충무공 장도와 다른 칼로 보이게 하는 오해의 소지를 만든 점을 지적해야 옳은 것이다.
동상 제작자가 칼자루 부분의 줄감기 방식을 현충사 칼과 다르게 한 것도 논란의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 동상의 칼을 일본도라 주장하는 이들은 동상 칼자루에 보이는 줄감기 방식을 흔히 증거로 내세운다. 줄감기 방식은 정작 임진왜란 당시 어떤 일본도에서도 사용하지 않았던 시대불명의 방식이다. 당시 일본의 X자 교차매기식 줄감기를 수용한 조선환도에서도 이런 식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가 동상 칼자루의 줄감기 형태를 이런 식으로 만든 것은 정말로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일본도라서 비판받아야 할 것은 결코 아니며 유물을 참조한다면서 임의로 변형해 근거없는 끈감기 방식을 동상의 칼에 적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얼핏 교차매기처럼 보이지만 동상이 쥔 칼의 손잡이끈 형태를 자세히 보면 두 줄로 교차하여 감아올린 방식이 아닌 한 줄로 꼬아 감아올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은 임진란 당시는 물론 에도시대에도 ‘정식 일본도’에 차용했던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877년 세이난(西南)전쟁 때 사쓰마의 맹주였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군이 사용했던 일부 도검에서 이런 식의 칼자루 줄감기를 사용한 경우가 확인된다. 즉 일본의 근대에 들어서야 드물게 보이는 유형인데, 이마저도 2차대전 당시 일본이나 조선의 조병창에서 제작된 ‘정식 군도(軍刀)류’에서는 볼 수 없고 동남아의 현지에서 급조해 줄을 감은 경우 드물게 확인되는 유형이다. 또한 중국제 일본군도의 모작이나 중국의 사제(私製) 칼에서 많이 확인되는 형식인데 이러한 줄감기 형태 때문에 동상이 쥔 칼을 일본도라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면 광화문 동상 칼의 원형인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가 일본도라는 논란을 살펴보자. 제작자 측이 이 칼이 일본도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장도 칼자루의 X자 교차매기식 줄감기 방식이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고성능 무기였던 일본도의 일부 요소(칼자루의 파지를 견고히 해주는 효율적 기능)를 조선의 도검에 받아들인 결과다. 이 줄감기가 조선의 보편적인 방식 중 하나로서 수용된 사실은 1813년 ‘융원필비’에 수록된 관제 군용‘환도’의 도해에서도 확인된다. 이 도해는 당시 조선 군사들이 사용하던 환도 제도(制度)에 칼자루를 교차매기(일본도의 줄감기 유형 중 하나인 히네리마키)로 줄을 감는 방식이 정착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차매기식 줄감기 형태를 들어 일본도라고 단순하게 간주한다면 임진란 이후 조선 중·후기 군영의 장졸들은 환도가 아닌 일본도를 사용했다는 결론이 되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상의 칼이 일본도란 제작자와 그 가족들 주장은 충무공 장도를 크게 오해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무생, 태귀련이 어떤 연유로 이 칼을 만들었든 이 칼은 결코 일본도가 아니다.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는 일본도적 요소(칼날의 규격과 혈조(血漕·칼날에 낸 흠)의 형식 + 코등이 장식) 두 가지를 제외한 모든 부분은 조선시대 도검의 전형(조선시대 도검의 전형에는 일부 중국적 요소가 오래전에 수용되어 조선식으로 변화된 부분도 있다)에 속하는 칼이다. 결국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는‘일부 외래적인 요소와 조선환도의 주된 요소가 당시의 시대상황에 의해 결합되어 만들어진 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충사 충무공 장도 칼집의 패용장식은 이 칼이 조선환도의 전형이라는 점을 확인해 준다. 이 칼집의 패용 양식은 전형으로 정착된 형태이며 패용장식에 무늬를 넣은 은입사(銀入絲)의 연화당초 문양과 모란 문양 역시 조선 무구 유물에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유형이다.
충무공의 용검이라는 쌍룡검 역시 마찬가지다. 손잡이끈이 결락되어 있기는 하지만 쌍룡검의 칼자루에는 줄을 교차매기로 감았던 증거(마름모꼴 흔적)가 남아있다. 즉 임란 당시 충무공의 용검에도 이미 교차매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줄 감는 방식 하나를 보고 칼을 일본도라 분류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쌍룡검마저도 일본도로 격하시키는 자충수를 두는 것이다. 아울러 이순신 장도의 칼자루에 매인 가죽끈 사이로 보이는 돋을새김한 동편(27쪽의 교차매기를 한 조선시대 환도 사진 중 경인미술관 환도 칼자루에서도 확인된다)은 칼날과 자루의 결합을 견고히 보완하기 위한 마무리 장식으로 일본, 중국의 도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조선환도 특유의 기능성 장식 중 하나이다.
일본도와 조선환도의 구분에 대한 세간의 일반적 인식은 칼날이 많이 휜 것은 일본도, 직선에 가까울 정도로 곡률이 작은 것은 조선환도라는 식이다. 한데 문제제기 측에서는 오히려 동상의 칼이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에 비해 곡률이 작아 직선에 가까운 점을 지적하면서 동상 속 칼은 일본도 혹은 일본도의 변형이라고 비판한다. 문제제기 측이 상당히 큰 곡률을 가졌다고 주장한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의 곡률은 실제로는 완만한 편에 속한다. 오히려 이 정도의 곡률은 조선시대 환도 유물에서 드물지 않게 확인된다. 장도의 곡률만을 들어 일본도라 단정해서는 안된다.
과연 조선시대 도검의 곡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 300여점에 달하는 조선시대 도검 유물 중 환도 유물의 도신도해(刀身圖解)를 겹쳐 놓으면 일반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곡률의 편차가 너무도 다양하여 단적으로 정형을 말하기 어렵다. 물론 가장 많은 곡률의 빈도가 있고 그것이 상대적으로 일본도의 평균적 곡률보다 작은 것은 맞지만 그것을 조선환도의 기준 곡률이라고 확정지을 만큼 통계상 비율이 높지 않다. 즉 조선시대 환도 유물들이 보여주는 칼날 곡률은 다채로워서 우리 칼의 특정 곡률을 주장하기는 애매한 상황이란 것을 안다면 곡률 시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원융검(元戎劍)이라고도 불리는 쌍룡검(雙龍劍)은 제작자가 1968년 동상을 만들 당시에는 관련 사진이 발견되기 전이라 정보가 없었다. 충무공의 용검(用劍)인 쌍룡검이 존재했다는 것은 19세기 초의 기록인 박종경(朴宗慶)의 ‘돈암집(敦巖集)’‘원융검기(元戎劍記)’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실물의 존재와 형태에 대해 제작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다. 쌍룡검이 수록된 조선미술대관이 1910년에 발간되었다지만 도록에 수록된 사진을 통해 칼의 실물이 확인된 것은 서지학자인 고(故) 이종학 선생이 이 책을 입수해 공개한 1984년이다.
즉 동상을 세운 1968년 시점에는 쌍룡검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도 없었고, 설사 존재했음을 알았다고 해도 형태와 규격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이름만 전해오는 칼을 참고할 여지는 애초에 없었다. 새로 동상을 만들 기회가 생긴다면 쌍룡검의 사진을 참고하여 적용해야 하겠지만, 자료와 정보가 없는 당시 상태에서 제작자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칼인 장도 두 자루(명 신종의 하사품인 귀도鬼刀 두 자루와 참도斬刀 두 자루는 명나라에서 제작한 칼이므로 당연히 해당되지 않았을 것이다)를 참조하여 동상에 응용하여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사진 속 쌍룡검 칼집의 패용장식 위로 칼을 허리에 차기 위한 띠돈장식(이 장식은 임진란 당시 유성룡 도검이라 전해지는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즉 임진란 당시에도 칼의 패용에 띠돈을 사용했던 것이다)이 보인다. 즉 쌍룡검을 동상에 적용할 경우에도 칼은 차는 것이지 결코 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현재 동상이 쥔 칼에 대해 바른 문제제기를 하려면 ‘이순신 장도를 참조했다면서 왜 제대로 재현하지 않았는가?’를 지적하면서 ‘새로 만들 동상은 이순신의 용검인 쌍룡검을 차야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쟁점 3. 충무공 동상은 중국 갑옷을 입고 있나?
▶ 문제제기 측 주장 : 조선식 갑옷은 두루마기처럼 입는 형태로 만들어지고, 중국식 갑옷은 덮어쓰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순신 동상은 어깨 부분이 조각으로 덮여 있다는 점을 볼 때 조선식이 아니라 중국식 갑옷인 점이 명백하다.
▶ 동상 제작자 측 주장 : 이당의 이순신 영정을 참고했고 복식전문가 석주선의 고증을 받았다.
광화문 충무공 동상의 갑주에 문제가 많은 것은 분명하다.(행주산성에 세워진 권율 장군 동상의 갑옷도 거의 동일하다.) 두루마기형 갑옷을 입지 않았다거나 피박형 갑옷을 입고 있어서가 아니다. 작가의 임의 해석이 시대와 국적이 불명한, 조선도 중국도 아닌 모호한 갑옷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동상에 고증의 잣대를 적용하여 볼 때마다 특히 눈에 거슬렸던 점은 첫째가 투구였다. 동상이 쓰고 있는 복발형 투구의 챙 밑에 당연히 있어야 할 이마가리개 장식이 생략된 것 때문인데, 자료가 부족한 1960년대라 해도 고증에 충분한 정도의 조선 투구 유물은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아무리 작가의 창작 관련 부분이라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동상이 입은 갑옷 후면의 망토였는데 이 부분은 필요치 않은 사족(蛇足)이기에 눈에 거슬렸다. 결국 충무공 동상의 갑주가 현존하는 유물의 형식과 일치하지 않음은 물론 동상 제작 시 참조했다는 이당 김은호의 충무공 영정에 묘사된 갑주 역시 마찬가지로 고증 미비의 문제가 있다. 다만 기억할 점은 동상이 좀 더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작되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동상 제작 당시 고증이 과연 어디까지 가능했겠는가에 대한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를 제기한 측의 주장처럼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갑옷 유물 중 두루마기형 갑옷이 다수를 차지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장수 갑옷이 무조건 도포식의 두루마기형만 있는 것은 아니며 상의와 갑상의 2중구조로 구성된 갑옷(조선 후기 수군절도사였던 여반呂攀 장군의 갑옷) 또한 유물로 존재한다. 상하 2중구조의 갑옷은 서울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에서도 확인되는데 이러한 예들은 이순신 장군이 임란 시에 반드시 두루마기형 갑옷을 입었을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게 한다.
필자는 피박형 갑옷이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제기 측의 주장과는 달리 덮어쓰는 갑옷은 당·송대 유행했던 고형갑옷에 속하며 원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의복형 갑옷이 주류를 이룬다. 명대의 중국 갑옷에는 지역에 따라 여러 유형이 있어 덮어쓰는 유형도 존재했지만 주류는 두루마기형 갑옷과 같은 의복형 갑옷이었다. 다만 문제제기 측에서는 명대 갑옷의 착용법을 덮어쓰는 방식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명대의 피박형 갑옷은 조선의 두루마기형 갑옷과 같은 의복형 갑옷에 피박을 별도로 다는 형식인 것이며 이는 청대 팔기군의 갑옷도 동일하다. 문제는 임란 전후의 조선에도 피박형 갑옷이 존재했는가 여부에 대한 것인데 조선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자료들이 있기에 속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니 피박만을 들어 ‘중국 갑옷’이라 주장한다면 문제제기 측의 의견 자체도 또 다른 왜곡을 유발할 수 있다.
조선 전·중기의 갑옷에 대한 고증 여부와 피박형 갑옷은 현재도 학계에서 논쟁 중인 상태이며 전문연구자들은 최소한 피박형 갑옷의 조선 전기 존재 가능성에 대해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임진란을 전후한 시점의 그림(또는 당시의 원화를 후대에 모사한 그림)과 책자의 도해’에서 피박형 갑옷이 빈번히 확인되는 데 비해 조선 중·후기의 임진란 묘사 그림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가 있다. 이 그림은 임진란 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을 주축으로 한 여진족 토벌을 기념하여 참가했던 장수와 장령들을 기록하기 위해 전투 직후에 그렸던 그림을 조선 후기에 다시 모사한 것이다. 그림 하단의 명단에는 이 토벌전에 충무공이 우화열장(右火烈將)의 신분으로 종군한 사실이 적혀있는데 임란전 그림 속 조선 장수와 군사들 모두 피박형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모사도라 할지라도 원래 그림은 임진란 이전에 병마절도사의 명으로 화공이 그린 것이니 화공이 당시의 복장을 마음대로 상상할 여지는 없다. 후대에 이를 모사한 화공 역시 원래 그림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그림은 그 당시의 조선군 복식을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두 번째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다. 임진왜란이 1598년에 끝나고 21년이 지난 1619년(광해군 8년)에 간행된 임란 당시의 충신, 열녀, 효자 등의 일화를 담은 이 책의 도해에도 피박형 갑옷이 다수 확인된다. 전란의 상흔이 조선 전국에 뚜렷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도해에 그려진 조선 갑주(갑옷과 투구)의 모습에 피박이 보이는 것은 어찌할 것인가. 단순히 원화를 그린 화공의 무지로 간주하기에는 일반 병사들의 복식이 너무도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어 장수의 갑옷만 왜곡하여 그렸다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광해군은 임란 당시 전장의 실상을 생생히 경험한 군주에 속한다. 책의 발간을 주도하여 명한 광해군이 책자 속 도해에 묘사된 조선군 복장의 허실을 지적하지 않았을 것이라 보기는 불가하다. 즉 문제가 없기에 도해가 실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 피박형 갑옷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세 번째 그림은 조선 후기에 그려진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이 있다. 북관유적도첩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함경도 지역에 있었던 전투를 기록한 그림인데 이 그림들에서는 두루마기형 갑주와 피박형 갑주가 동시에 그려져 있다. 이는 직책과 직능에 따라 갑주의 형태가 여러 유형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물로서는 러시아의 ‘표트르대제 인류학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된 피박형 조선 갑옷이 있다. 이 갑옷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이런 자료만 봐도 임란 전후의 시기에 조선에 피박형 갑옷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속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작자 측이 변론을 하면서 동상 제작 당시 참조했다는 이당 김은호의 충무공 영정에 묘사된 갑옷(갑옷의 형태와 갑옷 각 부위의 문양) 자체도 문제지만, 제작자가 여기에 자의적 해석을 곁들여 제작한 동상의 갑주를 제작한 것이 더욱 문제를 촉발시킨 것은 분명하다. 제작자 측은 김은호의 영정을 참고한 외에도 복식전문가에게도 고증을 받았다고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문제는 복식전문가가 꼭 갑옷전문가이기는 어렵다는 점에 있다. 갑옷을 연구하려면 단순히 복식에 대해서만 알아서는 접근이 불가하고 전투복식에 대한 전문적 지식은 물론 갑옷에 수반되는 장비와 무기 등에 대한 지식이 함께 필요하다. 갑옷은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기능적 요소는 물론, 함께 착용되는 장비나 수반되는 무기와 함께 전체를 일습(一襲·한 벌)으로 이해할 때 진정한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상이 제작되던 1960년대 중반의 시점은 유물에 대한 전문가라 하더라도 접할 수 있는 자료가 극히 한정적이었고 연구도 미비하며 척박한 수준이었다. 지금과 같이 인터넷만 치면 정보와 자료가 풍부하던 시절이 결코 아니었고 전화 한 통화로 풍부한 사진자료가 들어있는 도록을 퀵으로 당일에 배달해 주는 시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동상을 세운 지 거의 20년이 지난 1987년이 되어서야 문화공보부에서 비매품으로 출간한 ‘한국의 갑주’라는 책자가 간행되었다. 당시 국내외에 있는 갑주를 최초로 집대성한 이 책의 발간 이전에는 박물관 근무자나 연구자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소속된 기관의 유물 외에는 갑주 유물의 사진정보조차 접하기 어려웠다. 현 시점의 연구가 1980년대 말에 비해 진척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비약적인 성과를 이루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상황이다.
하물며 1960년대 당시의 수준이 얼마나 척박한 상황이었는지를 이해한다면 당시 고증이 가진 한계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이는 현충사의 충무공 장도를 일본도로 단정했던 당시 도검연구 수준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은 문화재위원(1960년대는 조선시대의 전통도검과 갑옷에 대해 전문가가 거의 전무한 시절이었다)들이라 해도 한정된 자료만 알고 있었고 전문연구 역시 육군박물관과 같은 군사유물 소장기관에서 극소수 연구자만 관련된 제한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쟁점 4. 충무공 동상의 얼굴은 왜 표준영정과 다른가?
▶ 문제제기 측 주장 : 동상의 얼굴이 현충사의 충무공 국가 표준영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 동상 제작자 측 주장 : 예술가들은 은연중에 작품 속 인물 얼굴을 자신과 비슷하게 한다고 하지만, 충무공 동상의 얼굴이 작가와 닮았다는 말은 가족 입장에서 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애초 시비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사안이다. 기존 언론을 통해 해명되었듯이 충무공을 직접 보고 그린 초상화는 애초 존재하지 않으며 동상 제작 당시에는 표준영정이 지정되지 않았다(BUT 1950년 4월 김은호 作 한산도 무장본 영정을 문교부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공인 –필자). 표준영정 지정 이전에 그려진 모든 초상화와 영정은 모습이 제각각이었고 작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그린 상상화였다. 더구나 작가는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였다. 그런 상황에서 동상의 제작자 역시 자신만의 이순신 얼굴을 만들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창작의 자유에 속하는 영역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충무공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누구도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임란 당시 충무공과 절친했던 유성룡의 두 가지 증언이 남아있다. 유성룡은 임란 후 쓴 징비록(懲毖錄)에서 젊은 시절 충무공의 모습을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는 단아하여 마치 삼가 수양하는 선비와 같으며 당찬 면이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유성룡은 또 태촌집(泰村集)에서 49세이던 충무공의 아픈 뒤 여위고 초췌한 모습을 묘사하며 “그의 언론과 지모는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하고(여위었다는 의미) 상(相)도 입술이 뒤집혀서 마음속으로 여기기를 ‘복장(福將)은 아니로구나’ 하였는데”라고 말하고 있다.
표준영정은 어떠한가. 표준 영정 제작자가 가장 오래된 충무공 초상화를 참조하여 그렸다면 그래도 의의가 있겠지만 실존하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충무공 초상화(이것 역시 당대의 그림이 아니므로 상상화에 속한다)는 정작 표준영정으로 정해진 모습이나 다른 작가들이 그린 어떤 초상화와도 닮지 않았다. 그러므로 동상 제작 후에 지정된 표준영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차라리 그 이전에 비록 상상화일지라도 조선시대에 전해지는 유일한 충무공의 초상화를 들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바른 접근이다. 작자 미상의 조선시대 충무공 초상화는 동아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작가 유족의 주장은 어떠한가.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 유족 측의 말이 매우 합당하며 예의를 지키고 있다고 본다. 저 정도의 답변이면 감정을 절제하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응대한 것이 느껴진다. 초기 동상 문제가 불거졌던 1977년 당시 동상의 얼굴에 대해 제기된 문제는 ‘서양인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코가 높고 얼굴이 각졌으며 눈썹과 눈 사이가 가깝고 눈꼬리가 높이 올라간 눈매(이 부분은 청전 이상범의 이순신 영정 그림을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등으로 인해 제기된 지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2010년을 지나 2011년 1월에 이르는 현 시점에서는 갑자기 제작자와 비슷하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눈매와 코의 모양 얼굴형에서 제작자 사진과의 유사점을 찾기 힘들었는데, 다른 것은 차치하고 특히 눈꼬리가 치솟은 치켜뜬 눈매와 각진 얼굴형 때문에 더욱 동의하기 어려웠다.
쟁점 5. 戰鼓가 누워있는 문제는?
▶ 문제제기 측 주장 :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북이 눕혀 있어 패전을 뜻한다
▶ 동상 제작자 측 주장 : 최근에 제기된 주장인 탓인지 제작자 측에서 별다른 반박은 없었다.
동서양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좌대 위에 세워진 커다란 전고(戰鼓)를 체격이 우람한 거한이 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전고를 세워놓는 것이 올바른 형식이라면 설사 전쟁이 끝나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다 할지라도 항상 유사시를 대비하여 세워져 있어야 할 것이고 그럴 경우라면 문제제기 측의 지적이 옳다. 그러나 이 역시 재고의 여지가 있다. 전고를 세워놓고 치지 않고 눕혀놓고 쳤다면 어떨 것인가. 세워놓고 전고를 치는 경우도 있지만 눕혀놓고 치는 경우도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임진란 전 전투를 묘사한 기록화인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를 다시 보면 시전부락의 포로를 장양공 이일이 추국하는 장면 하단에서 조선군이 좌우로 두 개의 전고를 눕혀놓고 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전고를 눕혀놓고 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이뿐만 아니다. 전고를 거치하는 제3의 방식도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그림 중 충무공의 함선(판옥선은 커녕 어선 정도의 모습이므로 이 그림이 판옥선을 보지 못한 화공의 상상화임을 알 수 있다)에 묘사된 전고를 치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 경우 북을 치는 방식은 세워놓은 것도 아니고 눕혀놓은 것도 아닌 매달아 놓은 방식이다. 더구나 육지도 아닌 바다 위라면 세워졌거나 매달린 전고를 치는 방식보다는 눕혀놓은 전고를 치는 것이 물결에 흔들리는 배의 갑판 위에서 쳐야 하는 고수의 입장에서는 훨씬 안정적일 가능성도 부정하기 어렵다. 통영 앞바다의 한산도 제승당이 소장하고 있는 ‘노량해전도’에는 매달아 세워놓은 전고가 그려져 있지만 이 역시 현대에 그려진 상상화일 뿐이다. 진실이 궁금하지만 임란 당시 충무공 함대의 배를 직접 타본 사람이 없고 이에 대한 연구도 미미하니 현재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전고를 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충무공의 함선에 전고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다만 세워진 전고인지, 매달아 놓은 전고인지, 아니면 눕혀놓은 전고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식으로 과거를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실증사학의 원칙으로 이 사안을 평가한다면 이 또한 문제제기 측의 주장이 현재의 선입견에 입각한 속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 충무공 동상을 제작할 때 적용할 고증 요소
현재까지 밝혀진 연구와 유물, 문헌을 통한 고증을 근거하여 적용할 수 있는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칼의 휴대와 관련, 들거나 쥐거나 짚지 말고 반드시 차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경우 칼은 왼편에 패용토록 한다.
2. 칼의 형태는 충무공의 용검인 쌍룡검으로 하되 규격은 80㎝ 이상 1m 미만으로 한다.
3. 갑주와 관련, 투구는 현존하는 다수의 원수(元帥)용 투구 중에서 선택하고 갑옷은 두루마기형과 상하분리형 갑옷 중에서 고형(古形)(-정확히 어떤 것을 말하는지??? -필자)으로 택하여야 한다. 피박형 갑옷은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는 부분이니 새로운 동상에서는 일단 제외한다. 현재의 동상에 보이는 망토는 없애도록 한다.
4. 얼굴은 현재의 표준영정 역시 충무공의 진짜 얼굴과는 관계 없으니 시비의 여지가 없도록 기록을 참조한 표준영정을 다시 만들고 이를 동상 제작에 참고하여야 한다. 표준영정 제작에는 유성룡의 충무공 묘사와 현존 조선시대 유일한 충무공 초상화를 참고해야 한다.
5. 신장과 관련, 충무공의 키가 특별히 크다는 기록이 없으니 신장은 당시 표준치 정도로 상정하면 된다. 무인이므로 무예수련에 의해 키가 보통이라 하더라도 근골은 발달한 체형일 수 있다. 노량해전 당시 충무공은 54세이고 당시로서는 노인에 속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임란 당시의 남자 성인의 평균신장은 약 160㎝이니 이 정도 혹은 약간 큰 정도의 인물이 90㎝ 전후의 환도를 패용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이를 적용한 비율로 확대하여 장군의 모습을 재현한다.
6. 장군의 지휘봉인 등채를 새로 동상에 집어넣을지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등채는 무장한 지휘관들이 들던 등나무 재질의 채찍으로 지휘와 지시를 할 때 쓰였다.
글쓴이 : 이석재 현재 경인미술관의 2대(代) 관장으로 재직 중인 필자는 우리나라 전통무기 연구의 권위자이며 특히 전통도검에 관한 한 독보적인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국내외에 소재하는 거의 모든 한국전통무기유물을 직접 조사·분석한 유일한 연구자로서 1만여점에 달하는 한·중·일 도검 및 무구유물을 수집한 국내 최대 소장가이기도 하다. 방대한 유물 분석과 폭넓은 자료인용을 토대로 한 그의 연구는 반론을 불허하는 치밀한 논증으로 유명하며 특히 인검(寅劍)을 비롯한 조선시대 도검 연구가 대표적 업적이다. |
- 출처 : 주간조선 [ 스페셜 리포트 ] 2011.01.19. 이석재 경인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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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권진규의 대규모 회고전이 있은 이듬해, 2010년에 세간의 관심을 끈 동상과 관여된 기사가 각종 매체의 지면을 장식했다. 세종로의 <충무공 동상>과 남산의 <안중근 의사 동상>에 관한 것이었다. 두 동상 모두 건립한 지 50여 년의 시간이 흘렀으므로 오래되어 낡거나 균열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검토 후 결과에 대한 처리방안 매우 달랐다. <충무공 동상>은 정밀 진단하여 잘 보존한다는 것이고, <안중근 의사 동상>은 낡고 균열이 갔으니 새로이 세운다는 것이었다. 2010년 <충무공 동상>을 과학적으로 조사하여 내린 결론은 이랬다.
“서울 광화문광장 전면부에 설치되어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6년대 말, 동상 재료(청동합금)도 구입하기 어려웠던 시절, 특히 동상 제작 기술이 아직 발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동상 제작에 참여한 분들이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온 힘과 노력을 기울여 모든 국민의 기대 속에 제작, 설치된 동상이다. 따라서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우리나라 근대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사료되며, 이에 이 문화재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동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대 기술로 완전하게 보수하여 잘 설치하자.” (66) 나형용,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보수에 즈음하여』, 『한림원소식』, 한국과학기술한림원, 2010년 3월호.
1967년 9월 19일 터를 다지는 동상 건립 기공식이 있었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라는 소식까지 전해졌던 <충무공 동상>은 10월에 건립되리라 하였지만, 이듬해 4월에야 제막식을 가졌다. 제작 중이던 동상의 크기를 높이라는 의뢰가 있었기 때문에 4미터 높이에서 6.4미터로 높였기 때문이다. 조각가는 각고의 노력으로 형태를 다시 크게 만들었고, 당시 커다란 주물을 뜨는 데는 재료도 기술도 부족했던 터라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에 이르렀다. 대광공업사에서 청동(구리와 주석합금)으로 주조-조립하였다. 나형용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이 동상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높이 6.5m의 큰 동상으로, 하나의 주형으로 주조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형발(型拔, pattern daft)이 가능한 범위에서 석고 모형을 분할(6등분)한 후, 그에 맞추어 철골을 만들고 점토질 점결제를 첨가한 주물사를 다져서 상형(cope)과 하형(drag)을 조형한다. 그리고 조형된 주형을 약 1,000도 정로 가열-소성(燒成)한다. 이렇게 소성한 주형의 표면(실물과 접촉할 면)에 수용성 흑연계 도형재를 바른 후, 잘 건조한다. 그리고 하형에 중자(core)와 상형을 조립하고 쇳물이 유출되지 않도록 단단히 결합한 후 주형에 쇳물을 주입하게 된다. 이와 같은 주조법으로 동상을 주조할 경우에는 동상의 두께가 약 10~20mm 정도로 매우 두껍게 주조되며, 또 두께가 균일한 동상을 제조하기 어렵다. 그리고 주형을 약 1,000도 정도로 가열할 때 주형이 변형되거나 또는 충분히 가열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쇳물 주입 시 파손되어 주물사 혼입(sand inclusion) 등의 주조결함을 발생하게 된다. 이와같이 따로따로 주조된 부분 주물을 잘 끝손질한 후, 동상으로 조립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동상 재료와 동일한 조성의 용접봉을 사용하지 못하고 외국에서 수입한 구리용접봉을 사용하였으며, 또 직류발전기를 설치하여 직류전기 아크(arc)용접법으로 용접하였다.” (67) 나형용, 앞글.
하지만 이 동상 또한 결코 평탄치 않은 세월을 보내었으니, 얼굴 모습이 고증이 잘못되었고 오른손에 칼을 잡은 모습이 패장(敗將)이며 북이 옆으로 누워 있고 갑옷의 길이가 너무 길다는 등의 논란에 휘말려 철거 시비에 휘말려 왔던 것이다. (68) 「여적」, 『경향신문』, 1977. 5. 11. 그러다가 결국 1980년 서울시는 문공부의 재건립 통보를 받았고 철거를 감행하기로 하고 예산까지 확보하였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조각가는 묵묵히 최선을 다하였던 작품이라고밖에 하지 않았으며 곧 세종로에서부터 철수될 것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철거 논란은 무산되었고 다시 2000년대 중반 도시 정비를 하며 이건이 논의되었으나 여론에 힘입어 자리를 고수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 다시 이건논의가 진행되었고 곧 실행에 옮겨질 것으로 보였지만, 세종로를 정비하면서 광장을 조성하고 동상 옆과 앞에는 분수가 치솟아 12척의 배로 23승을 올린 의미라는 12.23 분수가 설치되었다.
세종로에 <충무공 동상>이 선 것은 1968년 4월 27일로 박정희 대통령 부처가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받들자 민족의 얼’이란 제목의 「대한뉴스」에서는 “우리 겨레라면 누구나 흠모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세종로 한복판에 우뚝” 세워졌음을 알리고 있다. 박 대통령의 헌납으로 김세중 교수가 조각한 동상은 보통 사람의 열 배가 넘는 크기로 동양에서는 가장 큰 것이라며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치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아아 임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고 찬탄하였다.
김세중이 제작한 <충무공 동상>은 물결치는 망토와 발 가까이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전복 자락들이 서구의 고전적 미를 연상시킨다. 사실과의 부합 여부 이전에 작가적 상상력이 극대화되어 이상화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다. 고증위원회 등에서 갑옷이나 전복의 맞고 틀림에 의해 조정된 형태라기보다는 넘치는 위용과 장엄함을 추구한 작가의 의도가 여느 동상보다 많이 개진된 것에 틀림없어 보인다.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에서 유진오 박사 및 작가 김세중과 악수를 나누고, 이튿날 박정희 대통령 부처가 향한 곳은 아산 현충사였다. (중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명장이었고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아 온 인물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일 때 해군에서는 진해에 동상을 세워 외적으로부터 국토수호를 다짐하였고. 부산 용두산공원에서도 그 동상을 세운 터였다. 그런데 비록 성금 모금이 따랐을지라도 제1공화국에서 <충무공 동상>의 제작을 발의하고 일을 진행한 주체는 해군이나 경찰 등 대통령이나 국가가 아닌 조직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 세종로에 선 동상의 경우는 박정희 대통령이 9백만 원이 넘는 헌납금을 조각가에게 직접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위원회까지 만들어 체계적으로 애국선열의 조상을 만드는 일의 첫 작품이었다. <충무공 동상>이 건립되기 이전까지 건립된 선열의 동상은 산발적으로 여러 조직과 그들의 목적에 의해 제작, 설치되었던 것이다. (후략)
- 출처 : 조은정, 『동상 –한국 근현대 인체조각의 존재방식』, 2017
6. 경남 사천시 노산공원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경남 사천시 서금동 노산공원
나. 제작일 : 1973년 3월 30일
다. 제작자 : 미상
라. 규 모 : 동상 2.5m, 대좌 3.5m, 전체높이 6m / 청동
1973년 3월 30일 삼천포어민협의회에서 주관하여 지방 유지의 협찬을 받아서 건립하였다. 좌대 뒷면의 동판에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길이여 반듯하도다. 군사는 밟을 것이요 소인은 본받으리라.”(시경에서)
- 출처 :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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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1973년 3월 30일 삼천포 어민협의회에서 건립한 것으로 사천에 있는 3기의 동상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동상 형태는 창원(진해구) 북원로터리의 이순신동상과 같이 갑주를 착용한 가운데 두 손으로 칼을 맞잡은 모습으로 조각하였다. 동상의 뒷면에는 詩經의 한구절을 인용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길이여 반듯하도다. 그 곧음이여 화살같도다. 군자는 밟을 것이요, 소인은 본받으리라.”라고 하면서 이순신의 올곧은 정신을 본받자는 취지의 글을 새겨 놓았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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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공원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당시 삼천포 어민협의회 박동진, 천용욱, 김수출씨 등 어민 14명과 김기홍, 이삼술, 박균용씨 등 10명이 협찬하여 건립된 동상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뒤에 새겨진 글귀를 보면 “길이여 반듯하도다 / 그 곧음이여 화살 같도다 / 군자는 밝을 것이요 / 소인은 본받으리라”(詩經에서)라는 내용의 글씨가 큼지막하게 양각되어 있고, 그 아래 삼천포 어민협의회 회원 14명의 명단과 협찬한 10명의 명단이 보인다. 글쓴이는 그때 국회의원이었던 최세경으로 되어 있다.
7. 서울 국회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서울 국회의사당 – 최초 중앙청 중앙홀 설치, 현재 국가기록원 이관
나. 제작일 : 1973년 12월
다. 제작자 : 김경승 작가
라. 규 모 : 동상 2.4m 대좌 1.76m 전체높이 4.16m / 대리석
이 석상은 1973년 총무처에서 주관하여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상을 김경승씨에게 의뢰, 그 당시 중앙청 중앙홀에 설치하였으나 1986년 동건물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섬에 따라 현대 조각인 이 두 작품이 박물관 내에 위치하게 되어 박물관의 성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여론에 따라 민의의 전당인 국회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 1990년 12월 24일 이 두 석상을 원형대로 철거하여 국회의사당으로 옮겨 로비 입구 양편에 세워졌다.
- 출처 :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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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내 이순신 장군 동상의 문제점
-기록과 유물을 중심으로- 이상훈(해군사관학교박물관)
Ⅰ. 국회 내 이순신 동상 형태
제작자 김경승(1915~1992) / 재질 대리석 / 크기 높이 416cm 동상본체 높이 240cm
II. 국회 내 이순신 동상 문제점
1. 표준영정과 초상 상이 2. 중국식 갑옷(피갑) 착용 3. 중국식 투구 착용
4. 중국식 갑옷(신갑) 착용 5. 일본도 파지형 일본도의 형태
III. 대표적 초상화 및 동상 분석
0 초상화 및 동상의 특징
- 초상화는 대부분 관복,구군복 차림으로 동상과는 다른 경향을 나타냄
- 갑주 착용 초상화는 벌교지방에서 전해진 것을 기본으로 그린 김은호 작이 대표적임
* 초상화 제작 시 고증은 역사가, 문필가 등이 담당하고 자료를 제공했다고 하나 갑주 부분 고증 미흡
- 80년대 이전 동상 대부분은 김은호 작 초상화를 기본으로 제작,갑주 차림으로 칼을 차고 있으나 고증이 미흡하며 80년대 이후 점차 보완 개선됨
0 초상화
O 동상
IV. 향辛 건립 시 고려 사항
1. 초상 및 전체 이미지
- 기존 동상은 시조의 내용을 근거로 장검 패용 이미지 형상화
- 전통 갑옷 착용시 <이순신 장검>차림은 맞지 않음
- 표준 영정을 중심으로 동상의 초상도 통일 필요
- 관련기록 내용을 해석하여 작가의 에술성으로 표현
<참고자료>
0 시조 한산도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외 애를 끊나니 《청구영언>
한산섬 달 발근 밤에 위旱에 흔자 안자 일장검 겻해노코 긴한숨하는 밤의 어듸셔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긋나니 < 해동가요>
0 기록 속의 여러 모습
《난중일기> 계사년 6월 12일 을미
아침에 흰머리 여남은 뿌리를 뽑았다.
흰 것이 어찌 싫겠느냐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까닭이다.
유성룡 <<징비록>>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는 단아하여 마치 삼가 수양하는 선비와 같으며, 당찬 면이 있었다.
고상안 <<태촌집(泰村集)>>
통제사는 동년(같은 과거시험에 합격함)이기 때문에 며칠을 같이 지냈는데 그 언론과 지모는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고 후덕하지 못하고 상(相)도 입술이 뒤집혀서 마음속으로 여기기를, '복스런 장수는 아니구나...‘
2. 갑옷 및 투구
- 기존 동상은 조선식 갑옷 및 투구에 대한 연구없이 고증
- 중국이나 일본의 고전소설 삽화 영향이 큼
- 김은호 작 초상화가 유일한 근거이지만 고증 부실
- 조선의 고위 무장들이 착용한 두석린 갑옷 또는 두정갑 차림이 타당
< 참고자료>
경주부윤갑옷(두석린갑),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3. 지휘 기물
기존 동상은 <이순신장검>을 기본으로 하여 제작 / 일부 학자 등 일본도에 가깝다고 주장
- <이순신장검>보다 패용 도검류(환도, 운검)으로 대체 필요
- 도검류 이외 설제 지휘기물인 등채(일종의 지휘봉) 표현 고려
< 참고자료>
V. 결 언
현재
- 실적으로 얼굴 및 분위기의 표준영정과의 차이점이 있고
- 조선시대 착용 갑옷 및 투구와 상이하며
- 장검의 형태 및 파지법 등의 전통과의 차이가 있음
향후
과거 자문위원들의 고증내용을 참조하고, 정확한 유물자료 및 문헌내용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사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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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이순신동상의 문제점과 그 해결을 위한 토론
김일환 수석연구원(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
1. 문제제기
최근 국회 본회의장에 세워져 있는 김경승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고증 미흡에 따른 문제와 함께 작가의 친일논쟁이 새로운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민족정신의 표상으로서 국회에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중국 또는 왜색으로 채색되어 있다하여 비판되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동상 제작상의 문제로 중국식 투구, 중국식 갑옷, 도검의 양식이 일본도라는 점과 파지법이 일본식이라는 점 등이 쟁점이다. 이러한 국적 불명의 충무공 동상의 문제점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작가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친일 경력이 많은 인물이라는 점이 새롭게 주목되어 논쟁은 더욱 커겼다. 이점이 층무공 동상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 위치하는 것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하는 근거로 지적되고 있다.
이 문제는 새삼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68년에 김세중에 의해 제작되어 세종로에 세워진 충무공동상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유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종로의 층무공동상의 문제가 국회로 옮겨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유사한 사례는 언제라도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나아가 친일작가들에 의해 제작된 역사인물상이 많이 산재하고 있기에 항상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다. 차제에 이 문제의 해결책을 분명히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국가적 조형물은 국민의식을 계도하는 교육적 목적이 크므로 그 작가의 사회적 입장과 행적이 중요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먼저 동상 자체의 고증미흡문제와 작가의 친일문제를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고증문제를 거론하면 작가들은 소위 '작가주의'를 방패막이로 내세운다. 이것은 예술작품은 작가정신의 결과물이기에 대상물에 대한 해석과 표현이 반드시 fact에 근거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동상이 단순한 예술적인 조각품이라면 상관없지만,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한 것은 그 역사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갖기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인물을 추앙하고 기억하게 하는 교육적 역할이 크다는 점에서 고증의 철저는 꼭 필요하고도 중요한 것이다.
2. 충무공 동상의 고증문제
국회에 세워진 김경승의 충무공동상은 1973년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18년전인 1955년 부산 용두산 공원에 있는 충무공 동상을 만든 적이 있었다. 두 개의 충무공 동상은 형태상 차이가 없다. 그리고 그 동상의 근거는 1950년에 그려져 한산도 제승당에 봉안된 이당 김은호의 武裝立像의 초상화가 그 바탕이었다.김은호가 그린 칼을 들고 갑옷을 입은 모습의 충무공은 이후 모든 충무공 동상의 모본이 되었다. 1952년 진해에 세운 윤효중의 동상도 우여곡절을 겪고 세워졌지만 칼과 갑옷이라는 형태는 번함이 없다.
김경승의 부산 용두산 공원에 있는 충무공 동상은 김은호의 武裝立像의 초상화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한 동상이다. 1968년 세워진 김세중의 광화문 이충무공 동상도 이당 김은호의 초상화틀 바탕으로 하였지만 장검이나 갑옷자락 등이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다. 문제가 되는 김경승의 1973년 만들어진 국회 이충무공 동상은 김은호의 초상화를 바탕에 둔 용두산 동상을 토대로 하면서 장검은 유독 김세중의 작품을 모방하여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김은호류의 무장입상 형태의 동상은 작가주의도 아니며 순전히 작가들의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한 것이다.
조선시대 무관의 상징 무기는 일본과 달리 칼이 아니라 궁시였다. 따라서 武將을 표현할 때 칼을 상징물로 하는 것 자체가 역사성에 부합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무인선발고시인 무과시험에 궁시는 있어도 도검과목은 없다. 조선시대 도검으로 環刀가 있지만 이것은 불가피한 접전시 사용하는 비상용 상용 무기이다. 『난중일기』에도 거의 대부분 이순신이 활을 쏘는 기사는 풍부하지만 환도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특히 수군의 경우, 전투무기는 화기와 궁시가 중심이었다.
설사 도검을 표현한다해도 문제는 많다. 우선 동상에 보이는 이순신의 칼은 실전용이 아닌 長刀이다. 현층사의 장도를 모델로 초상화틀 그린 것은 김은호의 실수이며 고증위원들의 무지의 소치였다. 만약 칼을 찬 이순신을 표현하려면 이순신의 用劍인 雙龍劍을 佩用한 모습이어야 한다. 이 칼은 1910년에 발간된 『조선미술대전』에 실려 있다. 雙龍劍은 이순신이 전투에서 사용한 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전투용 도검인 環刀이다. 환도의 길이는 보통 80-100cm이다. 따라서 동상의 칼은 짧아야 한다. 또 환도는 차는 것이지 손에 들고 있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동상에서 보듯이 파지법도 사실과 거리가 덜다. 이런 까닭에 긴 칼을 손에든 김세중, 김경승 등의 충무공 동상은 김은호의 무장입상 초상화의 오류가 영향을 주어 이후 작가들이 모두 모방한 결과물이다. 톡히 김경승온 이당 김은호를 가장 층실하게 copy한 작가이다.
갑주도 유사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충무공이 전투시 갑옷을 입었다는 것은 『난중일기』내에도 나온다. 다만 어떤 종류의 갑옷을 입었는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현재 충무공동상에서 어깨를 감싸는 피박형 갑옷은 중국형이고 우리의 전통적인 갑옷인 두정갑옷이나 두석린 갑옷으로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충무공동상에서 보이는 피박형 갑옷이 중국 갑옷이라는 주장은 일면 타당한 것 같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에도 피박형 갑옷을 입는 사례는 여럿이 발견된다. 이것은 전통시대 무기체계에 대한 무지의 결과이다. 『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나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서 발견할 수 있다. 원래 무기는 대적하고 있는 상대와 비교우위에 있을 때 무기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무기발달은 국경이 없고 진화의 속도가 빠른 것이 그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도 중국이나 일본의 무기체계를 끊임없이 연구하였고 그 장점이 확인되면 진품을 구해서 샘플로 삼아 그 장점을 모방하면서 무기체계를 개량하고 발전시켜왔다. 따라서 갑주의 경우에도 중국 것을 모방하여 제조한 사례가 많았고 전란기인 임란시기에는 특히 그랬다. 따라서 충무공이 피박형 갑옷을 착용했는지, 않았는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다만 한국형 갑옷을 입혀야 하겠다고 한다면 두석린 갑옷은 조선후기에 일반화되는 갑옷이라 맞지 않고 두정갑옷은 성종대부터 출현한 사례가 있어 가장 근사하다.
이러한 고증의 문제점이 발생한 원인은 시대적 한계가 컸다. 그것은 조형물 제작시 그 조형물이 가진 역사성이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상황에서 한정된 지식에 의존하여 제작되었다. 특히 충무공동상 제작 당시는 조선시대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무기체계는 어떻게 발달했는지 등과 복식사에 대해 학문연구가 층분치 못했다. 그래서 관련 전문지식과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대에 동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오류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작가의 친일논쟁
국가적 조형물 제작이 붐을 이루던 해방 이후와 개발독재시대에 제대로 교육받고 조형물을 제작할 수 있는 유능한 작가들은 일제시대에 일인들에게 교육받고 그들에게 인정받은 소수의 예술가들 뿐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전적으로 조형물 제작을 주도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두 가지의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발주자 측에서는 조형물 건립 자체에만 의미를 두었지, 이것을 제작하는 작가의 친일성향과 그것이 후세에 미치는 영향을 주목하지 못했다. 따라서 발주과정에서 이들을 배제시켜야 했다. 그러나 상기한 이유로 유능한 작가를 얻기가 어려운 시대적 제약이 있었다. 작가의 입장에서도 문제가 있다. 이들이 전국적으로 국가적 조형물 제작을 회피하지 않은 것은 이런 조형물을 자신이 제작함으로써 자신의 어두운 과거행각을 감출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작품을 통해 작가적 역량을 과시한다는 욕망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올바른 민족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과거에 친일행각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이 민족과 역사의 상징물로 남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 작품이 갖는 민족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퇴색된다. 따라서 후세들에게 교훈을 주는 교육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형물은 너무 많다. 국회의 이순신 동상은 대표적인 한 사례일 뿐이다.
해결방안은 이런 유사사례를 모두 조사하여 이런 조형물을 현 위치에서 퇴출시키고 새로운 조형물을 제작할 필요성이 크다. 그러기 위해서는 큰 진통이 따르더라도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또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정책적 의지와 뒷받침이 절실히 요청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본 토론회가 그 불씨를 지피는 출발이 되면 좋겠다.
8. 목포 유달산공원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전남 목포시 유달산공원
나. 제작일 : 1974년 8월 15일
다. 제작자 : 탁련하
라. 규 모 : 동상 3.7m, 대좌 약 4m 추정, 전체높이 7.7m / 청동
1974년 8월 15일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 건립추진위원회에서 건립하였다. 동상건립 경위에 관하여는 두 개의 동판에 새겨진 건립기와 찬문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 建立記 -
忠武公精神을 구현하기 위한 木浦市民의 정성을 모아 護國의 化身 李舜臣 장군의 銅像을 세웁니다. 여기에는 忠武公의 피와 땀이 어린 高下島의 흙을 간직하여 이 銅像으로 하여금 忠武公의 얼을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碑銘은 朴正熙 대통령께서 揮毫하셨고 卓銘(鍊의 오타 –필자)河 선생이 조각을 李殷相 崔淳雨 崔永禧 선생의 史科에 의한 考證 심의를 거쳐 1974년 7월 12일 尹胄榮 文化公報部長官의 이름으로 심의 필증(이순신 동상 제1호 -필자)을 얻어 李殷相 선생의 글을 徐喜煥 선생의 글씨로 새겨서 이 銅像을 靑史에 남깁니다.
- 찬 문 -
여기 한국 민족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서 계시다. 장군은 죽음 속에서 나라를 구원해 낸 민족의 은인이요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계신 애국정신의 상징이시다. 장군이 일찍 임진왜란 때 1597년 9월 명량승첩 뒤 10월 29일 우수영으로부터 이곳 고하도에 이르러 이듬해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무릇 108일 동안이나 여기서 머무르며 서해를 가로막아 전선 만들고 군량 모으고 군사를 훈련하며 진을 쳤었다. 그러므로 목포 앞바다에는 장군의 숨결이 배어들었고 지금도 다도해 하늘을 바라보면 장군의 모습 나타난다.
"저 산, 저 바다에 서려 있는 님의 맹세 조국의 제단에 자기 한 몸 바치셨네. 피묻은 발자국 따라 나도 그 길 가오리다.
- 출처 :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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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에는 목포의 역사와 함께 설치된 여러 가지 조형물들이 곳곳에 있다. 저마다 상징성과 기념할만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순신 동상이다. 유달산 동구 계단을 올라가면 늠름한 모습의 이순신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충무공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1974년에 세워졌다. 이 동상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 중 문화부(당시 문공부)에 등록된 제1호로 알려져 있다. 이은상이 찬하고 서희환이 쓴 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계신 애국정신의 상징이시다. 장군이 일찍 임진왜란 때 1597년 9월 명량승첩 뒤 10월 29일 우수영으로부터 이곳 고하도에 이르러 이듬해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무릇 108일(실제 106일) 동안 여기서 머무르면서 해를 가로막아 전선을 만들고 군량을 모아 군사를 훈련하면서 진을 쳤었다. 그러므로 목포 앞바다에는 장군의 숨결이 베어들었고 지금도 다도해 하늘을 바라보면 장군의 모습이 나타난다.
"저 산, 저 바다에 서려 있는 님의 맹세 조국의 제단에 자기 한 몸 바치셨네. 피 묻은 발자국 따라 나도 그 길 가오리다.”
동상의 뒷면에는 “충무공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목포시민의 정성을 모아 호국화신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세웁니다. 여기에는 충무공의 피와 땀이 어린 고하도의 흙을 간직하여 이 동상으로 하여금 충무공의 얼을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상의 바로 앞에는 노적봉을 지키는 노인암이 있다. 이순신 동상은 노인암과 노적봉을 응시하며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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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정신의 상징 이순신 장군 동상
유달산 초입의 계단을 올라서면 맨 처음 관광객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만나게 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 충무공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1974년 5월 20일 총 209명으로 된 이충무공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1974년 8월 15일 유달산 내에 세워졌다. 비명은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 탁련하(卓鍊河) 선생의 조각을, 이은상·최순우·최영희 선생의 사료에 의한 고증 및 심의를 거쳐, 1974년 문화공보부 등록 제1호가 되었다.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 계신 애국정신의 상징이시다. 장군이 일찍 임진왜란 때 1597년 5월 명량승첩 뒤 10월 29일 우수영으로부터 이곳 고하도에 이르러 이듬해 1598년 12월 17일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무릇 107일(실제 106일) 동안 여기서 머무르면서 해를 가로막아 전선 만들고 군량 모으고 군사를 훈련하면서 진을 쳤었다. 그러므로 목포 앞바다에는 장군의 숨결이 베어들었고 지금도 다도해 하늘을 바라보면 장군의 모습이 나타난다. 저 산, 저 바다에 서려 있는 님의 맹세 조국의 제단에 자기 한 몸 바치셨네, 피 묻은 발자국 따라 나도 그 길 가오리다.” (이은상이 찬하고 서희환이 쓴 비문)
높이 370cm, 너비 160cm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피사의 탑처럼 옆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는 동상은 중심선을 기준으로 했을 때 투구까지는 약 0.5도 기울어져 있다. 동상이 일본이 있는 쪽을 정확한 각도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장군의 사후에도 일본의 동향을 살피고 기운을 약하게 만들어 다시 침략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또 칼을 뽑는 순간의 자세를 나타내고자 하여(다른 동상들과는 다르게 오른팔을 들어올리는 자세를 취한 최초의 동상 – 필자) 기울어지게 동상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 출처 : 목포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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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는 목포시장 및 해군 제3함대사령관 등 각급 기관단체장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충무공 동상앞에서 이충무공 탄신제를 개최한다. 기관장들의 참배시간에 맞춰 천자총통을 발사(포소리만^^)하기도 한다.
한편 제전식은 고하도에서 진행되며, 제전식이 거행되는 오전 10시경에는 해군함정과 해양경찰경비정, 목포항에 정박되어 있는 모든 선박에서 뱃고동을 일제히 울려 충무공의 얼을 기념한다.
9. 경남 사천시 선진리성 옆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경남 사천시 선진리성 인근 진삼국도변
나. 제작일 : 1976년 4월 11일
다. 제작자 : 김대성
라. 규 모 : 동상 2.65m, 대좌 3.85m, 전체높이 6.5m / 청동
1976년 4월 11일 재일교포 윤익성(개인이 만든 최초의 이순신 동상)씨가 고향 발전에 기여하고자 건립하였다. 조상자는 김대성이며, 주조는 삼용공업사에서 맡았다. 사천해전지로 들어가는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 출처 :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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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처음에 선진리성 들어가는 길목인 석거리 한가운데 있었는데 2003년 12월에 도로가 새로 나면서 원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약 700미터 정도 떨어진 4차선 도로 옆으로 옮겨 세웠다.(이전하며 기단석을 전면교체하면서 높이도 약간 키우고 형태도 완전 변화되었음- 참고로 처음 세울때는 기단의 모습은 통영 남망산공원에 김경승 작가가 세운것과 똑같았으며, 동상모습도 언뜻보면 거의 비슷한데 왼손으로 칼을 비스듬히 들고 있지않고 바닥에 대고 있으며, 갑옷의 세부 모양과 투구의 모습과 어깨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끈 등 세부적인 면에서 보면 다른게 확인된다. -필자)
- 건립문 -
임진왜란때 일신을 바쳐 나라를 지키신 충무공이순신장군의 애국정신을 흠모하고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용현면 달호리 출신인 윤익성선생이 충무공동상을 건립한 것이다. 선생은 소년시절에 나라 잃은 백성들이 슬픔속에서 지낼적에 청운의 꿈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간 이래 각고풍상을 겪은 오늘날에 와서 이제 당당한 주권국가가 된 고향땅에 대성금의환향하여 충무공께서 거북선을 출동시켜 왜적선을 격멸시킨 유서깊은 선진해전지 입구 이 자리에 충무공의 유비무환정신을 사표로 한 것이니 그 뜻을 높이 받들어 국민총화단결하여 나라지킬 마음을 새로히 할 것이다.
10. 경남 사천시 대방진굴항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경남 사천시 대방동
나. 제작일 : 1978년 5월 20일
다. 제작자 : 미상
라. 규 모 : 동상 약 2.5m 추정, 대좌 약 4.5m 추정, 전체높이 약 7m 추정 / 청동
이 동상은 1978년 5월 20일에 삼천포청년회의소가 주관하여 세워졌다. 이 동상의 뒷면에는 노산 이은상이 지은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 계신 이 어른은 우리 겨레와 함께 영원히 같이 가시는 거룩한 지도자 충무공이시다. 그는 오색찬란한 역사의 면류관이요, 영원히 꺼지지 않은 민족의 태양이니 진실로 우리들의 자랑이요 또 힘이요 생명이시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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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된 대방진굴항에 세워진 동상으로 선진리성 부근에 세워진 동상보다 2년뒤에 만들어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기단의 형태도 다르고 동상의 자세도 완전히 다르다. 즉, 왼팔은 칼을 비스듬히 들고 있는데(선진리 동상은 그대로 반듯하게 바닥에 대고 있음, 반면에 통영 남망산공원 동상은 이렇게 비스듬히 들고 있음) 오른팔은 오히려 살짝 굽혀서 그대로 늘어뜨리고 있다(선진리 동상은 팔을 굽혀 배꼽쪽에 대고 있음, 반면에 통영 남망산공원 동상은 허리에 대고 있음).
다만 어깨에서 허리쪽으로 연결되는 대각선 방향의 끈은 토영 남망산공원 동상처럼 표현하고 있다. 투구의 삼지창 부분도 다르다. 세부적으로는 다른 부분이 많다. - 필자
11. 경남 진해 해군사관학교 구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경남 진해 –최초 해군사관학교 설치, 현재 해군교육사령부 정문 앞
나. 제작일 : 1986년 3월 20일
다. 제작자 : 이일영 원장
라. 규 모 : 동상 약 2.5m 추정, 대좌 3.5m 추정, 전체높이 약 6m 추정 / 청동
1986년 3월 20일 건립하였다. 해군사관학교 9기생이 사관생도의 충무공정신 함양과 필승해군의 전통계승을 위하여 졸업 30주년기념으로 모교에 헌증한 것으로서 조상자는 남산미술원(원장 이일영)이 맡았으며 고증은 이강칠, 조성도가 담당하였다.
- 출처 :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이순신유적도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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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무기 대신 등채를 들고 있는 최초의 이순신 동상으로 기존 갑옷(두석린)과는 다른 형태인 두정갑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 갑옷 전면부에 요대 대신 옷고름을 표현한 최초의 이순신 동상이다.
동상의 왼손은 허리춤에 대고, 오른손은 등채를 들고 길게 뻗어 당당하게 호령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이 동상은 2015년 11월에 새로운 동상을 만들게 되자 2016년 해군교육사령부 정문 앞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해군사관학교 개교후 생도들에게는 신과도 같은 존재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해군이 아닌 해사졸업생(제9기)들이 제작해서 기증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 필자
12. 경남 사천시 모충공원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경남 사천시 송포동 모자랑포
나. 제작일 : 1997년 2월 26일
다. 제작자 : 미상
라. 규 모 : 동상 약 2.5m 추정, 대좌 약 1.5m 추정, 전체높이 약 4m 추정 / 청동
이 동상은 삼천포 모충라이온스클럽에서 국제헌장전수기념 봉사사업으로 1996년 2월 26일에 건립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2월 26일에 준공하였다. 왼쪽 팔로 칼을 든 갑주상으로 조각된 동상이다.
사천시에서는 성웅이순신공덕기념비(1952년 건립)와 이순신 동상이 설치되어 있는 이곳을 단장하여 2010년 10월에 모충공원을 조성하였다. 이순신의 구국정신을 민족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승전으로 이끈 사천해전 전승기념비를 길이 보전하고 기념하는 한편 시민의 정서적 추모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고 안내판에 씌어져 있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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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사천(삼천포 포함)에서 4번째로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1997년에 세웠는데도 동상의 전체적인 형태는 90년대가 아닌 70년대 사천지역 동상과 유사하다. 특히 1976년에 세워진 선진리성 앞에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공원내에는 1952년 11월 19일에 세운 성웅이순신공덕기념비가 있어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 좀 더 일찍 이곳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지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 필자
13. 충남 아산시 신정호관광단지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충남 아산시 방축동 신정호관광단지내
나. 제작일 : 1999년 4월 28일
다. 제작자 : 최승호 작가
라. 규 모 : 동상 8.45m, 대좌 7m, 전체높이 15.45m / 청동
이 동상은 이충무공 서거 400주년을 맞이하여 (사)성웅이순신장군 동상 건립추진위원회에서 1999년 4월 28일 건립하였다. 이 동상의 조각은 최승호(아산 출신 -필자)가 담당했으며, 높이는 이순신의 탄생년을 상징하는 15.45m이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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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아산시 방축동 신정호국민관광단지 내에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 장군 상(忠武公 李舜臣 將軍 像)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은 이 충무공 탄신 400주년 기념을 위해 문화관광부의 고증아래 충무공 표준영정을 기본모델로 제작됐다.
동상의 크기는 높이 8.45m의 단일 동상으로는 국내최대(國內最大)의 규모이며, 좌대(座臺)를 포함한 높이는 15.45m로서 충무공이 태어난 1545년을 상징한다.
동상 뒤편의 부조벽은 학익진(鶴翼陣 : 학이 양 날개를 펴듯이 치는 진형)으로 유명한 한산도 대첩을 형상화(形象化)한 것으로, 부조 전체의 높이는 4m, 넓이 28m로 이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을 상징한다. - 출처 : 언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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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문화관광부 고증 아래 현충사 충무공 표준영정을 사실적 기법으로 묘사했다고 하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풍채가 너무 좋으셔서 약간 둔중한 느낌이 든다.
이 동상부터 요대 대신에(안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옷 전면 옷고름을 너무 강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옷고름은 1986년 해군사관학교내에 남산미술원 이일영 원장이 만든 이순신 장군 동상에 처음으로 보이지만 이곳처럼 강조하지 않았다.
이 동상부터 동상을 제작하면서 크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즉, 동상의 전체높이를 충무공 탄신해인 1545년에 맞춰 15.45m로 제작하였고, 동상 뒤편의 부조작품도 높이 4m, 넓이 28m로 만든 것은 이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처럼 동상 뒤편에 대형 부조작품을 설치한 것은 이 동상이 최초의 사례이다. 2008년도에 진도의 이순신 동상 건립되기 전까지는 동상의 크기만으로는 최대였다. - 필자
14. 경남 통영 이순신 공원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경남 통영시 정량동 이순신 공원
나. 제작일 : 2005년 8월 14일
다. 제작자 : 정욱장 교수
라. 규 모 : 동상 5.2m, 대좌 12.14m, 전체높이 17.34m / 청동
이 동상은 2017년 현재 우리나라에 건립된 이순신동상 중 3번째로 높은 규모를 자랑하는 동상으로 2005년 한산대첩제 기간인 8월 14일 세워졌다. 이 동상은 한송재단 하원대 이사장의 헌금으로 조성되어 충무공이순신장군동상건립추진위원회에서 주관한 가운데 울산대 미술과 정욱장 교수의 조각으로 건립되었다. 동상의 앞면에는 이순신이 명량대첩 하루 전에 말한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친필 어록이 새겨져 있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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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대학교 미술대학 정욱장(45·조소전공) 교수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413주년을 맞아 14일 경남 통영에서 제막식을 가질 이순신 장군 동상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통영시는 한산대첩축제 마지막 날인 14일 오후 6시 세계 4대 해전인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한산대첩 전적지가 내려다 보이는 통영시 망일봉공원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을 갖는다.
긴 칼을 옆에 차고 진두지휘하는 모습이 조각된 동상 규모는 가로 29m, 세로 29m, 높이 17.34m. 인물동상 높이만 5.2m이며, 옆에 찬 칼의 실제길이는 1.97m보다 확대된 5.1m이다. 화강석 좌대 전면에는 이순신 장군의 일기에 나오는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란 뜻의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정 교수는 "세계 4대 해전에 걸맞게 한산대첩의 역사, 지리, 교육적인 면이 강조될 수 있도록 설계했다"며 "한산대첩의 승리 전법이 된 학익진 형태를 바탕으로 당시 지휘하는 충무공의 당당한 이미지를 표현했다"고 소개했다.
동상 제작에는 10억원의 사업비로 9개월이 걸렸으며, 순수 동상 제작비 5억원은 한송재단 하원대 이사장이 지원했다.
-출처 : 경상일보 2005년 8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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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볼 때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과 비슷한 분위기인데 왼손으로 잡은 칼은 광화문동상 보다 더 과장되게 표현(동상 5.2m, 칼 5.1m)하였으며, 오른손 검지를 펴서 적을 가르키는 최초의 동상이다. -필자
15. 진도 이충무공 승전공원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전남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녹진항
나. 제작일 : 2008년 10월 11일
다. 제작자 : 미상
라. 규 모 : 동상 15m, 대좌 15m, 전체높이 30m / 청동
2008년 10월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은 좌대 15미터, 몸체 15미터로 총 30미터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동상이다. 녹진항 이순신 동상 앞 해상이 실제 명량해전이 벌어진 장소로 판단된다. 동상 형태는 왼손에 칼을 잡고 오른손으로 명량해전지를 가리키고 있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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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2005년부터 전국 공모와 문화체육관광부 영정심의위원회의 엄격한 심의 등을 거치며 3년간 17억여 원을 들여 세운 동상은 기단 15m, 동상 15m 등 전체 높이 30m로 전국 곳곳에 세워진 충무공 동상 가운데 가장 크다. 1968년 세워진 서울 세종로의 동상은 좌대 18m, 동상 7m 등 전체 높이가 25m(17.49m -필자)이다. 통영 한산도와 충남 아산, 전남 여수·목포 등의 동상은 17~9m 규모라고 군은 전했다. 동상은 청동 30t을 들여 제작됐으며, 왼손엔 칼을 들고, 오른손은 지휘봉(없음 -필자)을 들고 울돌목 쪽 하늘을 향해 힘차게 치켜든 형상이다. 동상의 갑옷은 용산 전쟁기념관 전시자료와 명량대첩을 재현한 방송 프로그램 등을 근거로 삼아 만들어졌다고 군은 밝혔다.
허은무 진도군 관광진흥담당은 "명량해전 당시 긴박한 전투를 독려하는 이순신 장군의 비장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다른곳의 동상과 달리 역동적 자세로 만들었다"며 "동상 주변에 승전공원을 조성하는 등 녹진리 일대를 진도의 대표적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녹진 이충무공동상 건립문 -
1597(정유)년에 이르러 일본이 다시 침략해 오자 성웅 이순신장군께서 이 울돌목을 지키셨도다. 17일 동안 진도에 머무실 제 군민은 군선을 수리하고 부자지간 젊은 장정 모두 수군으로 출전하여 13척의 전선을 이끄시는 이충무공을 도우셨다.
9월 16일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133척과 맞서 진도군민과 함께 필생즉사 필사즉생의 각오로 싸워 하늘마저 감동시킨 명량대첩을 이룬 충무공 이순신장군에 호국충정의 얼을 기리고져 이곳 울돌목에 진도군민의 뜻을 모아 본 동상을 건립하다.
2008년 10월 11일 진도군수
16. 해남 울돌목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전남 해남 울돌목
나. 제작일 : 2008년 10월 11일
다. 제작자 : 이동훈 조각가
라. 규 모 : 동상 2m, 대좌 약 1.2m 추정, 전체높이 약 3.2m 추정 / 청동
이 동상은 이순신 장군이 13척으로 133척의 왜선을 무찌른 명량대첩의 현장인 전남 해남 문내면 우수영 울돌목 주변에 세워져 있다.
큰 칼을 차고 조선 앞바다를 호령하는 수많은 동상과 달리 갑옷이 아닌 군인의 평상복 차림으로 칼 대신 지도를 들고 있다. 왜군의 침략에 대비한 전략을 구상하면서 외롭게 고민하는 모습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마디로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바라보며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 안내문 -
명량의 고뇌하는 이순신상!
풍전등화와도 같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외롭게 고뇌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아군의 배 13척으로 왜군의 133척을 무찌르기 위하여 외롭게 시름에 잠긴 장군의 모습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극대화하기 위한 설정이다.
장군의 동상은 대체적으로 크고 웅장하며 검을 들고 호령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국내에서 가장 작고 유일하게 동다리(당시 군복)를 입고 검이 아닌 지도를 들고 있으며 육지부가 아닌 밀물시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도록 기획하여 죽음으로 충성을 다짐하는 한국적인 기개와 호국정신의 장군상으로 표현하였다.
2008년 10월 11일 명량대첩축제 개막일을 기념하여 울돌목 바위 위에 장군의 조각상을 세우다.
기획:전라남도지사, 제작:해남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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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은 2014년 12월 특허청에 상표 등록 출원을 해서 2015년에 상표등록이 완료되었다. 지방자치단체가 동상을 상표 등록하는 것은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조각가 이동훈씨가 2008년 10월 명량대첩 축제 기념물로 제작한 청동 재질의 이 동상은 높이 2m, 너비 65㎝ 규모다.이 동상은 바닷가에 있다보니 2022년 12월 말경 새벽 만조 이후 바닷물이 빠져나가면서 거센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 당시 만조에 가까워 물속에 잠긴 동상은 크게 파손된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동상을 지탱하는 하단부 시멘트와 앵커 볼트가 부식된 것으로 확인됐다. 무게 1톤의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지 1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거센 조류와 높은 염도에 부식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해남군은 업체와 협력해 동상을 바로 세우고 염도에 강한 순간 접착 시멘트로 고정하는 작업을 벌였다.
1. 가장 작은 이순신 像 으로 울돌목 건너편의 가장 큰 동상과 대조
2. 갑옷을 입고 칼을 든 수많은 동상과 달리 동다리 차림으로 지도를 든 최초의 이순신 동상
3.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바라보며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며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 - 필자
17. 전남 여수 중앙동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여수시 중앙동 730
나. 제작일 : 2012년 5월 9일 약 9억원
다. 제작자 : 김대길 교수
라. 규 모 : 동상 6m ,거북선 1.5m, 대좌 6.4m, 전체높이 13.9m / 청동
이순신 광장의 입구부분이라 할 수 있는 로터리에 우뚝 서 있다. 이 동상은 좌대 위에 거북선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순신이 서 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이 동상의 원형은 자산공원의 이순신 동상을 따랐다고 한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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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민영뉴스통신사 뉴시스의 이종승 회장이 전남 여수시에 이순신장군 동상을 기부했다. 이 회장은 9일 여수시 진남관 망해루 앞 중앙동로터리에서 열린 이순신장군 동상 제막식에서 "여수세계박람회의 성공 개최와 원도심 활성화, 이순신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싶어 이순신장군 동상을 건립해 기부했다"고 밝혔다.
동상건립 운동은 지난해 4월26일 시민 980명과 지난 3월5일 시민 2,055명이 '이순신장군 동상을 건립해 진남관과 이순신광장 일원을 역사문화의 장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보내면서 시작됐다. 여수시는 그동안 시의회에서 “자산공원에도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며 예산(9억원)을 삭감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여수시의 안타까운 사정을 전해들은 뉴시스 이종승 회장은 이순신동상을 기부키로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여수시는 계획대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한편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장군이 거북선에 올라서 바다를 바라보며, 왼쪽 손에 장검을 들고 오른 손으로 북채를 쥐고 수군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동상은 기단에서부터 13.9m 높이로 청동주물로 제작된 이순신장군 모형 6m, 거북선 1.5m, 화강석으로 제작된 좌대 6.4m로 이뤄졌다. 자산공원에 있는 거북선 찬가와 충무공 찬가를 탁본해 돌북 형태의 노래비에 그대로 새겼다.
- 출처 : 뉴시스 2012년 5월 9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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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대좌 위에 거북선을 놓고 그 위에 동상을 세운 최초의 이순신 像이며, 전체적인 형태는 1967년에 세운 자산공원 동상처럼 왼손엔 칼 오른손엔 북채(등채X)를 들고 있으며 복장도 유사하다. 다만 자산공원에 이미 이순신 동상이 있는 것을 포함하여 시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시의회에서 예산을 삭감하는 등 제작과정의 문제로 인하여 뉴시스 이종승 회장 건립후 기부채납한 동상이다. - 필자
18. 경남 창원시 진해 해군사관학교 신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진해 해군사관학교 앞
나. 제작일 : 2015년 11월 27일
다. 제작자 : 김영원 작가
라. 규 모 : 동상 4.97m, 대좌 6.14m, 총 11.11m / 청동
이 동상은 충무공탄신 470주년 해군창설 70주년을 기념하여 2015년 11월 27일 건립하였다. 동상과 좌대(받침대), 기단으로 이루어진 동상 조형물에는 그 하나하나마다 역사적 의미를 담아 조형물만 보더라도 이순신의 삶과 업적을 고스란히 되새기게 된다.
- 동상 부분
약 4,97미터 높이의 청동주물로 제작된 동상은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을 바탕으로 고증된 두정갑과 투구를 착용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활과 화살, 이순신이 실전에 사용했던 쌍룡검을 함께 휴대하여 완전무장한 이충무공이 등채를 들고 전장에서 지휘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동상의 왼손에 쥐고 있는 활은 수군의 주력무기이면서 이순신이 생전에 즐겨 쓰던 무기로 실제 '난중일기'에 가장 많은 기사횟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의 얼굴 역시 표준영정에 기초해 「징비록」에서 언급한 바대로 온화한 선비상에 가깝게 재현하였다.
- 좌대 부분
동상을 받치고 있는 좌대는 임진왜란 당시 주력함선인 판옥선을 기초로 형상화한 것으로 좌대 상부의 전면에는 「이충무공전서」에서 집자(集字)한 ‘忠武公 李舜臣 像(충무공 이순신 상)’ 명판이, 후면에는 이 충무공의 생애 연표가 새겨졌다. 좌대 아래 부분 앞면은 귀수가, 좌우와 뒷면은 한산,명량,노량의 3대 해전도가 부조로 들어갔다. 좌대 밑단에는 당시 조선 수군의 첨단무기라 할 수 있는 천자총통 4문이 좌대의 네 모서리 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동상 부분을 제외하고 좌대에서 지면까지 높이는 약 6.14미터로 동상의 높이(약 4.97미터)와 합하면 해군창설일(11월 11일)을 나타내는 11.11미터에 이른다.
-기단 부분
좌대를 품은 형태의 기단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원형(圓形)의 수경 시설로 조성되었다.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주력함선인 판옥선을 개념화한 형상을 지닌다. 이것의 직경도 해군창설기념일을 의미하는 11.11미터이며, 그 높이는 이 충무공의 나이(54세)를 상징하는 0.54미터다, 기단 안에는 11개의 조명등이 설치된 조각 돌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었는데 좌대 자체가 판옥선 형태인 점을 고려하면 총 12척(충무공 동상 기단 1척 + 주변 11개 작은 조각 = 12책)의 판옥선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상징한다. 충무공의 '금신전선 상유십이‘를 개념화하여 만들어진 기단이라고 보면 된다. 기단 앞부분에는 해군 정비창에서 제작한 청동 거북선이 배치되어있으며, 총 길이는 199cm이다. 199의 숫자는 독도함의 전장 199m에서 가져온 상징적인 숫자이다. 기단 주변의 판석은 330조각으로 이루어져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된 명량해전 당시 적선 수를 연상케 한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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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금강사 앞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74년에 만들어졌으며, 그 옆에는 2004년 2월에 만들어진 김억추 장군 동상이 있는데(-열선루님 조언) 칼 대신 왼손에 활을, 오른손에 화살을 들고 있어 조선시대 인물 동상중 최초로 활을 든 동상이다. 이는 명량해전에서 김억추 장군이 구루시마로 추정되는 적장을 한발의 화살로 죽이고 난 뒤, 또다른 두명의 왜장을 한발로 동시에 죽이는 등 맹활약을 했기때문으로 생각된다.(설명자료제공 열선루님^^)
1. 조선수군의 주무기인 활을 왼손에 든 최초의 이순신 동상으로 오른손에 등채, 어깨에 쌍룡검을 멘 실전 모습
2. 전체높이 11.11m는 해군창설일, 기단높이 54cm는 이순신 나이, 기단안 조명등수는 12척배, 주변판석 330조각은 왜적선수 등 상징
3. 이순신 장군 동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모범사례라고 할 수 있다. - 필자
19. 서울 국회 신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서울시 국회의사당
나. 제작일 : 2015년 11월 2일
다. 제작자 : 하도홍 작가
라. 규 모 : 동상 약 2m, 대좌 약 2m, 전체높이 약 4m 추정 / 대리석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2층에 자리 잡고 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2일 달라졌다. 18대 국회 때부터 왜색이 짙다는 지적을 받아온 기존 충무공상이 철거되고, 역사적 고증에 부합하도록 새롭게 제작한 충무공상이 설치된 것.
국회사무처는 이날 정의화 의장, 정갑윤 부의장, 박형준 사무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 충무공상 제막식을 거행했다. 정 의장은 제막식에서 “충무공상 주변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충무공의 굳은 절개와 높은 인성을 되짚어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존 충무공상은 1973년 정부가 중앙청에 설치했던 것을 1990년 국회로 이전한 것이다. 이 석상은 그동안 중국풍 갑옷를 입고 일본식 검을 들고 있는 등 역사적 고증이 불분명한 복식과 무구가 표현돼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이에 국회사무처는 역사적 고증에 부합하는 새로운 충무공상을 제작하기로 하고, 용모, 조각, 무구, 복식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2013년 5월 자문위원회 구성(외부 4인, 내부 3인, 조용진 자문위원장(미술해부학박사), 박가영 숭의여대교수 등)를 통해 각 분야의 고증을 거쳐 새로운 충무공상을 제작했다.
새로운 충무공상의 용모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표준영정(이 표준영정을 기준으로 한 다른 동상들과는 달리 이마가리개 때문에 투구 아래 눈의 모습이 마치 안경을 쓴 것 같은 모습으로 보임 –필자)을 기준으로 했다. 복식과 무구는 유물 등의 고증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모습으로 표현했다. 무구의 경우 수양용 장검에서 실전용 쌍룡검으로 교체했다. 기존 작품은 고 김경승 작가의 작품이었고, 이번 석상 제작에는 하도홍 작가가 참여했다.
애초 이 문제는 새누리당 이명수 의원이 지난 2011년부터 정책토론회를 통해 제기한 내용이었다. 그는 19대 국회에서도 이를 계속 지적하며 1억 원의 예산을 확보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3일 CNB와 대화에서 “시간이 걸린 이유는 고증이 어려웠기 때문”이라며 “왜구를 무찌른 장군이 왜색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때마침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의 한일정상회담도 열렸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국에서 이순신 동상을 바로 세우게 돼 굉장히 뜻깊다”며 소회를 밝혔다.
석상 아래 설치돼 있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라는 글귀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석상의 교체 비용은 총 5억5000만 원이 들어갔다고 한다. 국회사무처 관계자는 이날 CNB와 통화에서 “재료비, 인건비, 설치비 등을 합쳐 총 예산은 5억5000만 원”이라며 “기본적으로 세종대왕 석상의 크기와 재료 등을 맞춰서 제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국회내 이순신 장군 석상이 교체되면서 또 다른 왜색 논란을 빚고 있는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의 동상도 교체될지 주목된다.
- 출처 : 2015. 11. 3 cnb뉴스
1. 고증논란으로 새롭게 만든 최초 이순신 동상으로 기존 동상은 국가기록원 이관(전시X)
2. 새 동상은 표준영정을 기준으로 복식과 무구는 유물 등의 고증을 통해 임란당시 표현. 장검대신 쌍용검 교체
3. 기존것과 같이 백색 대리석 제작(옆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고려)
4. 고증문제로 인하여 새롭게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동상의 제작과정에 대해 오픈된 자료가 너무 없다.ㅠ - 필자
20. 경남 남해 이순신순국공원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경남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125
나. 제작일 : 2017년 4월 28일
다. 제작자 : 미상
라. 규 모 : 동상 약 5m 추정, 대좌 약 6.19m 추정, 전체높이 11.19m / 청동
이 동상은 높이가 11.19미터인데 적의 총탄이 가슴을 뚫는 순간에도 부릅뜬 눈으로 칼을 높이 들고 공격명령을 외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바닥은 판옥선이 파도를 가르며 전장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으로 ‘必死則生 必生則死’와 명조팔사품의 하나로 전장에서 군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달았던‘독전기’에 새겨진 글귀인‘督戰’과 ‘적과 싸움에 있어 명령을 어긴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뜻의‘凡軍臨敵不用命者處斬’을 각각 새겨 넣었다.
동상은 청동 주물로 노량해전 당시 판옥선 장대 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도 가슴을 움켜쥐고 끝까지 전장을 힘차게 지휘하고 있는 이순신의 역동적인 모습과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구조물은 판옥선의 돛대를 형상화하여 꼭대기에 대장선을 의미하는‘帥’자의 깃발을 달았다.
- 출처 :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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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순국공원 상징조형물
이곳 관음포는 1598년 11월 19일 7년간의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일어났던 곳으로, 이순신장군이 철군하려는 왜적을 맞아 ‘단 한척의 배도 살려 보내지 않기 위해’ 일으켰던 해전이다. 이 해전은 풍전등화에 놓였던 조선을 구하고 아무런 명분 없이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처절한 깨우침을 가르쳐 준 위대한 해전이었다. 이날 전투에서 이충무공은 적진의 한 가운데에서 ‘이 원수를 모조리 무찌를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던 하늘과의 약속을 실천하였으며, 적의 총탄이 가슴을 뚫는 순간에도 부릅 뜬 두 눈으로 칼을 높이 들고 공격명령을 외쳤다. 비록 그 전쟁은 400여 년 전에 이미 끝났지만 이순신장군의 순국 혼은 지금까지도 남해 관음포에 살아 숨 쉬며 이곳을 찾는 후세인들에게 평화수호와 나라사랑의 소중함을 가슴속에 일깨워 주고 있다.
이 상징조형물은 문화체육관광부 남해안관광클러스터사업으로 선정된 ‘이순신 순국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노량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공모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이순신장군의 순국일에 맞춰 전체높이 11.19m로 제작되었으며, 바닥은 판옥선이 파도를 가르며 전장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으며,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는 ‘必死則生(필사즉생), 必生則死(필생즉사)’와, 명조팔사품의 하나로 전장에서 군사들을 독려하기위해 달았던 ‘독전기(督戰旗)’에 새겨진 글귀인 ‘싸움을 감독하고 사기를 북돋워준다’는 뜻의 ‘督戰(독전)’과, ‘적과 싸움에 있어 명령을 어긴자는 처참’한다는 ‘凡軍臨敵不用命者處斬(범군임적불용명자처참)’을 각각 새겨 넣었다. 동상은 청동 주물로 노량해전 당시 판옥선 장대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도 가슴을 움켜쥐고 끝까지 전장을 힘차게 지휘하고 있는 이순신장군의 역동적인 모습과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구조물은 판옥선의 돛대를 형상화 하였고, 꼭대기에는 대장선을 의미하는 ‘帥(수)’자 깃발을 달았다.
표석에는 ‘忠武公李舜臣(충무공이순신)’ 여섯자를 새겼는데,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유적 내에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사 예문관제학’을 지낸 ‘이익회(李翊會)’가 쓴 이충무공 유허비에서 탁본하여 옮겼다.
㈜예홀에서 시공하고 ㈜건화에서 책임감리를 맡아 이순신장군의 탄신 472주년인 2017년 4월 28일에 건립되었다.
- 출처 : 남해군청 관광시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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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비를 포함한 280억 원을 투입해 조성된 순국공원은 8만 9468㎡의 부지에 20동의 건축물과 6기의 조형 구조물을 포함해 호국 광장과 관음포 광장 2개로 구성돼 있다.
조·명·일 수군 전몰자의 순국의 뜻을 기리고 한·중·일 삼국의 화합과 동북아의 평화를 상징하는 이순신 순국공원의 대형벽면에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 출정해서 순국한 내용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도예명인인 한얼도예 이호영 도예가와 아티스트 프로모션 그룹 아트셀시(대표 김은숙), 한국화작가 김범석, 김호민, 배형민, 이동환과 민중미술작가 조정태가 콜라보레이션해 세계 최초의 평면도자기에 최대 규모의 도자기 벽화를 제작했다.
높이 5m, 길이 220m의 대형 도자기 벽화는 가로, 세로 50cm x 50cm의 평면도자기를 3,800여 장을 붙여서 만들었으며, 벽화는 5m 높이에 100m, 50m, 16m, 34m 길이의 네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벽화는 90여 차례의 가마 불을 때야 가능했으며 8,000여 장의 평면 도자기를 구워야 한다. 평면 도자기 한장을 만들어 내기 위해선 1차 소성 후 그림을 그려서 2차 소성을 해야 하는데 22시간씩 두번을 때야한다.
도자기 벽화가 완성되기까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터짐 없는 단점을 극복한 대형 평면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도예 장인이자 명인인 이호영 도예가를 빼놓곤 성립될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도예분야의 1세대인 故 이현승 선생의 아들인 이호영은 기존의 청자와 백자, 분청 한국도자기 전통기법에서 탈피한 평면형 도자기 제작기술로 발명특허를 받은 도예명인이다.
외부에 설치 후 시간이 지나도 터져서 보수를 해야 하는 부분이 없는 문화재급 대형도자벽화의 가능성을 실현해내고 있는 도예가 이호영의 행보는 최대 90cm x 220cm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출전한 전투인 노량해전의 내용을 담고 있는 도자기 벽화는 출정, 승리기원, 전투, 순국,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담고 있는 5개의 장면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리나라 남해바다 깊이, 저마다의 신념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군 전몰자의 순국의 뜻을 기리고 한·중·일 삼국의 화합과 동북아의 평화를 상징하는 이순신 순국공원의 의미는 지구촌이라 일컫는 글로벌한 맥락에서 가장 인간답고 큰 의미의 공공기념물이다.
- 출처 : 2017년 3월 24일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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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노량해전을 모티브로 판옥선 위에 올라타 칼을 뽑아 들고 지휘하다 왼쪽 가슴에 총탄을 맞고도 전투를 독려하는 모습으로 칼을 뽑아 든 최초의 이순신 동상이다.
전체적인 무구의 구성과 갑옷 등은 해군사관학교 신 이순신 동상과 매우 비슷하다. - 필자
21. 목포 고하도 해상데크 개선장군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전남 목포시 고하도 해상데크
나. 제작일 : 2019년 11월 11일
다. 제작자 : 미상
라. 규 모 : 동상 약 2m 추정, 대좌 약 2m 추정, 전체높이 4m / 청동
고하도는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06일 동안 머무르며 수군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던 군사 요충지다. 지금은 판옥선을 겹겹이 쌓은 모습의 전망대가 섬 한가운데에 우뚝 세워져 있어 전시관과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전망대를 중심으로 섬 양쪽 끝까지 해상데크 길이 설치돼 있다. 이곳은 숲속을 가로지르는 산책길이기도 한데 길목에 시화가 전시돼 있어 걷는 게 지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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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명량대첩 이후 전력정비를 위해 106일 동안 고하도에 머무른 개선장군 이순신의 동상이다. 복식이나 자세 등 전체적인 동상의 모습은 진도 이충무공 승전공원의 이순신 동상을 닮았으나 동상의 크기는 비교가 안됨(2m : 15m)
동상 뒤편에는 아주 작은 거북선 모형을 하나 얹어 놓았다. 차라리 놓지 않는게 좋았을 듯^^ - 필자
22. 여수 율촌 장도공원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전남 여수시 율촌면 여동리 장도공원
나. 제작일 : 2019년 말
다. 제작자 : 미상
라. 규 모 : 동상 약 2.5m 추정, 대좌 약 3m 추정, 전체높이 약 5.5m 추정 / 청동
여수에는 ‘장도’가 두 곳 있는데 하나는 웅천동에 자리 잡은 예술의 섬 장도이고 다른 하나는 율촌면 여동리에 자리 잡은 임란 구국의 섬 장도이다.
원래 장도는 송도, 대늑도, 소늑도와 함께 광양만에 떠있는 여동리에 속한 네 개의 섬마을 중 하나였다. 장도는 섬 모양이 노루를 닮아 노루장‘獐‘자를 써 장도라고 하는데 섬 주변의 수심이 낮아 남해안 패류의 보고였지만 율촌산단이 조성되면서 매립되어 육지가 되고 말았다.
장도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이순신장군 동상이 보인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칼 대신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이순신장군의 동상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항상 긴 칼 옆에 차고 근엄한 모습으로 세상을 호령하는 모습이었는데~ 활 쏘는 충무공의 동상은 처음 본 듯하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늘 활쏘기 연습에 매진했으며 부하들에게도 '적의 머리를 베는 것보다 활로 사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동상 앞에는 거북선 조형물이 있고 뒤에는 장도해전에 참가한 장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동상의 오른쪽에는 정찬주 작가의 대하역사소설 <이순신의 7년>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글이 적혀 있고~ 동상 왼쪽에는 “이순신 마음은 한국인의 마음이다” 오른쪽에는“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장도해전 이야기”가 적혀 있다.
충무공의 임란 22번째 해전인 장도해전에서 조명연합군은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 왜군 3,000명을 수장시켰다고 한다 - [출처] 힐링여수야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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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활을 쏘는 모습을 한 최초의 이순신 동상이다.
더 특이한 것은 동상의 색상이 청동의 단색이 아니라 팔토씨를 진하게 처리하는 등 색감의 변화를 준 최초의 이순신 동상이라는 점이다.
산업단지를 조성하며 업체에서 급하게 만들었는지 자료가 거의 없으나 나름 조각상은 고증을 거쳐 잘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필자
23. 충남 아산 내포신도시 이순신 동상
가. 소재지 : 충남 예산시 삽교읍 목리 687-3 내포신도시 테마광장
나. 제작일 : 2021년 2월 24일
다. 제작자 : 미상
라. 규 모 : 동상 약 2.5m 추정, 대좌 약 2.5m 추정, 전체높이 5m / 청동
충청남도는 도청이 내포신도시로 이전함에 따라 신도시 테마광장을 통해 시군의 특색을 살리며 충남도민화합을 도모하고자 각 시군을 상징하는 조형물 설치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에 아산시는 초상화와 역사적 자료 등 자문과정을 거쳐 이순신 장군의 기개와 애국심, 영웅적 모습을 높이 5m, 폭 1.3m 크기의 동상으로 표현한 조형물을 설치했다.
해당 조형물은 공모 절차를 통해 ‘충무공의 충혼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테마로 이순신 장군, 판옥선, 물결(파도)을 모티브로 제작했으며, 사람들에게 장군의 꿋꿋한 기개와 애국정신을 알려 애국심을 고취하고 교육적 효과를 이끌어냄과 동시에 충무정신이 살아있는 충절의 고장 아산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이낙원 아산시 공원녹지과장은 “이순신 장군의 성장지인 아산에서 앞장서서 애국과 헌신의 역사를 가슴 깊이 기억하며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 발전하고자 동상을 건립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 출처 : 2021.02.24. 아산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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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내포신도시 테마광장에 충청남도의 15개 시군을 대표하는 기념물로서 아산시가 새롭게 세운 이순신 동상인데 기단부를 판옥선과 물결을 모티브로 심플하게 제작하였다.
다만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동상임에도 불구하고 왼손에 칼만 한자루 달랑 들고 있으며 오른팔은 어정쩡하게 들어 올려 가슴안쪽을 향하고 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아쉬움이 남는 동상이다. - 필자
▣ 사족
조은정님의 『동상』이란 책에 1950년대 충무공 동상 일람표를 보니 1957년 경남 거제 옥포에 김경승 작으로 이충무공건(전의 오타)승기념 작품이 있는것으로 나와 초기자료라서 꼭 넣어야 할 것 같아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자료가 없고 딱 하나 2020년 거제시 공식블로그 글을 겨우 찾아 다시 한칸을 만들어 내용을 추가하며 사진자료를 찾는데 거제시 블로그에 나오는 이순신 동상이라는 기록사진은 아무리 보아도 통영 남망산것과 비교해볼때 배경만 약간 다를뿐 기단부 석축의 숫자와 모양 및 흐리지만 동상의 모습 그리고 뒤로 보이는 철제 울타리와 산세까지 모든게 똑같아서 다시 국가기록원 사진들을 확인해본 결과 동일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거제시청, 거제문화원, 그리고 동상이 있다는 아주동 주민센터까지 전화해서 몇 분과 통화한 결과 거제 옥포 대승첩 기념탑이 있는 아양근린공원에는 1950~60년대에 세운 이순신 동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동상이 아니라 김경승 작가가 대승첩 기념탑의 기단부에 충무공의 상반신 부조상과 거북선이 나오는(첫 출전인 옥포해전에는 거북선 없었음) 부조상을 작업한 것을 동상으로 잘못 표기한 것입니다.
그래도 나름 충무공의 첫 승전지인 옥포해전의 중요성으로 1957년에 제작한 옥포 대승첩 기념탑과 옥포정에 관련된 가장 자세한 정보들이 담긴 자료라서 행당 글을 링크(https://m.blog.naver.com/geojecity/222097250621)합니다. - 지금은 잘못된 사진은 수정요청을 해서그런지 삭제되고 없습니다.
참고로 요즘은 이곳 아양근린공원은 거의 모르고 1996년에 준공한 옥포대첩기념공원이 일반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는군요.)
끝으로
조은정님의 『동상』 에 나오는 문장을 공유합니다.
"동상은 그 시대 소통의 도구였다."
"동상은 삶의 한 장소에 위치하지만 사건이나 역사 그리고 인물을 환기시킨다.
환기된 역사는 개인의 경험과 결합하여 새로운 역사의 의미로 확장된다.
그렇게 동상은 과거의 인물을 소환하여 오늘을 경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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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 세워지고 자리를 옮기고 사라져가는 시간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세상의 덧없음이다.
그럼에도 공공의 장소에 어느 샌가 솟아있는 낯선 동상들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우리의 공간에 대한 추억을 그리하여 각인된 역사의 기억을 소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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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일, 존경해야 할 인물에 대한 동상 제작은 그 시대의 관념이다.
(중략)
그런데 그 사건이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없을 때
그 동상의 의미가 대중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때,
소외받는것은 당연하다.
생갬새의 닮고 달지 않음, 혹은 그 인물을 상징하는 방식의 옳고 그렇지 않음,
혹은 관심도 없던 동상을 제작한 작가의 역사의식에 의해서도 동상은 사라지고 다시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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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하지 않은 모습,
그것은 권위의 모습이었으며
그 시대가 이해하는 선현의 모습이었으며
또한 동상제작을 자문하고 고증하는 지식인들이 지닌 생각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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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달밤(月明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