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현판 복원을 보면서(1)
궂은 날씨만큼이나 답답하고, 속상한 소식만 계속되더니 오늘은 반가운 소식이 하나 떴다. 작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 때 큰 상처를 입고 만신창이가 됐던 숭례문 현판이 복원되어 7일부터 고궁박물관에서 전시된다고 한다. 숭례문 현판 복원을 계기로 숭례문에 한 번 천착해보는 것도 우리 것을 아끼고 보전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는 영남불교문화연구원으로서는 의의 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그 역사적 내력을 대강 간추려 본다.
현판이란 건축물의 유래나 의미를 담은 이름을 나무판에 새겨 건물의 정면 중앙 처마 밑에 설치하는 장엄이다. 중국에서는 진(秦)나라 때부터 사용한 흔적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현판은 안동시 청사에 걸려있는 <안동웅부>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이다. 둘 다 12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란 왔던 공민왕이 손수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새로 복원된 숭례문 현판이 화재 전의 현판보다 훨씬 원형에 가깝다고 문화재청이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1961년 해체 수리 때 현판도 함께 보수 했는데, 그때 글자에 색을 입히면서 글자의 획 끝이 뭉개져 버려 날렵한 글씨의 묘미가 사라져 버려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번 복원에서는 그 미세한 부분까지 다 살려 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은 것은 서울 상도동의 지덕사에 보관되어 있는 탁본을 저본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탁본은 150여 년 전 양영대군 후손인 이승보가 경복궁영건도감 제조를 맡았을 때 탁본해서 양영대군의 사당인 지덕사에 두고 가보로 삼아왔던 것이다.
<수리 전의 모습> <수리 후의 모습>
세로 350cm 가로 150cm, 무게 150kg에 달하는 이 숭례문의 현판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글씨가 누구의 작품인지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글씨가 장중단아하고 힘이 넘치고 아름다운 것이 양영대군의 서체와 닮았고 당시의 정황으로 봐서 양영대군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완당전집>>에서 조선초기의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하고,
이유원은 <<임하필기>.에서 ‘연전에 남대문을 수리할 때 양영대군의 사손 이승보 대감과 윤성진 대감이 문루에 올라가서 글씨를 살펴보았더니 공조판서 유진동의 글씨였다’하고,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숭례문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짓고 글씨는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했다.
정난종은 세조 때 대과에 급제한 명필로 글씨가 종과 비석 등에 상당수 남아 있다. 2005년 식목일에 불타서 녹아버린 낙산사 동종의 종명이 바로 정난종의 글씨다. 숭례문의 글씨가 정난종이 쓴 것이라면 최근 들어 정난종의 작품이 연거푸 수난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소생이 대구불교방송(FM 94.5MHZ) ‘무명을 밝히고’란 프로에 ‘우리 역사가 품은 불교’를 주제로 매주 화요일 5시 28분부터 방송하고 있는데 요번 화요일에 해인사 <강화경판고려대장경> 얘기를 하면서 공교롭게도 정난종 이야기를 하였다. 목판대장경을 만들지 못했던 일본은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내내 끈질기게 대장경 인쇄본을 요구해 왔다. 왕실과 지방의 호족들이 얼마나 자주 요구해 왔던지 세종임금님은 아예 목판 자체를 일본에 넘겨 주자고까지 했다. 계속된 일본의 대장경 청구에 정난종은 ‘대장경은 비록 글자로 채워졌지만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나 요구 하는 대로 다 줄 수는 없고 화엄경, 법화경, 능엄경 같은 것을 뽑아서 주는 것이 좋겠다.’면서 적당히 일본을 달래는 수준에서 외교관계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보통, 우리나라 건축물의 당호는 석자로 되어 있고, 간혹 넉자로 짓기도 한다. 기념물이나 소중한 건물에는 당호를 현액하게 되는데, 가로 현판을 많이 쓰는 편이다. 그런데 숭례문 현판은 세로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음양오행설을 생활화 해왔다. 물론 음양오행이 중국에서 발생되었지만 실제 생활에 적용한 것은 우리가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단 것은 풍수지리의 비보에서 연유한다. 비보라는 것은 ‘사람이 병들거나 기가 허하면 약을 먹거나 침을 맞거나 뜸으로 치유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천이 병들거나 허할 때는 인공적으로 기를 보충해 주는데 그것을 비보라 하는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 광화문 숭례문을 남북으로 연장시켜 나가면 한강 너머 관악산에 이르게 된다. 관악산은 산 모양이 오행으로 볼 때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는 화산형이다. 혈(정해진 지점)에서 바라보는 쪽을 안산(남주작)이라고 하는데 안산이 화산형이면 그 혈에는 안산의 화기가 미쳐 불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다, 서울의 안산인 관악산이 화산형이기 때문에 서울에 불이 자주 일어난다는 게 풍수지리의 원리다.
우리가 적을 만났을 때 취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극단적으로 보면 항복하든지 아니면 끝까지 싸워서 이기든지 지든지 하는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숭례문의 현판에서는 조선 건국시의 자신에 찬, 굳건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바로 관악산의 화기와 정면 대결하는 뜻으로 현판을 타오르는 불꽃의 운동모습인 세로로 걸게 된 것이다. 불의 운동은 상승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비보책으로 채택된 것이 현판 세로로 걸기다.
<불타기 전의 현판>
<화제 때 현판을 떼내는 모습>
<땅에 떨어져 부서진 모습>
숭례문이라는 이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숭례문의 례(禮)는 오상(인의예지신)의 하나로 오행상으로 화에 배당된다.
오상을 오행에 적용시켜보면 어질고 인정많은 인(仁)은 생명이 움트는 봄의 계절로 목에 해당한다. 사물을 밝게 비춰서 투명하고 예의바른 예는 화의 기운인 여름이다. 의리를 뜻하는 의(義)는 서리 내리는 가을로 금이다. 고요히 사색하는 지(智)는 물(水)에 속하고 계절로는 겨울이다. 믿음을 뜻하는 신(信)은 어느 곳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앙으로 계절로는 늦여름에 해당 한다.
숭례문이란 이름에는 남쪽이란 뜻과 불이라는 뜻과 여름이란 뜻과 붉은 색이란 뜻과 쓴맛이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앞 글자인 숭(崇)역시 불꽃 염(炎)과 통하니 더더욱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활활 타오르는 자체의 불기운으로 관악산의 불기운을 제압하려 한 당시의 사상과 사회상이 숭례문 현판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또 상생상극의 원리로는 수극화(水克火), 즉 물이 불을 끈다. 이 원리를 적용해서 승례문 앞에는 큰 못을 팠는데 남지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이름 짓는 데부터 현판 거는 데까지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첫댓글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좋은 자료 보고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궁금합니다.새로지어도 국보입니까?
석재는 100% 그대로, 장소도 그대로 목제는 50% 이상을 다시 사용하기 때문에 국보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문화재청에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래서 해석은 '녹피에 가로 왈'자라 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