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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문자가 있었습니다. 동이족의 분국인 은나라에 갑골문자가 있었다면 은나라보다 선진국이며 본국인 고조선에 문자가 있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단군시대 문자는 3대 갸륵 단군(기원전 2181년)때 삼랑 을보륵이 만든'가림토 문자'로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원형이며, 세종대왕 때는 훈민정음 28자로 재 창제되었습니다.
<가림토문자 38자〉
이 밖에도 단군시대에 '진서'라고 불리는 녹도문이라는 문자가 있었습니다. 이 '녹도문'이 은나라의 갑골문자의 뿌리가 되었고 갑골문자는 지금의 한자와 같은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 단독으로 혹은 그 신하들과 함께 조선왕조 때 처음 만들어진 것이아니라, 옛날의 문자를 참고하여 다시 만들어진 문자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훈민정음 재창제의 증거
1.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녹도문자〉전 조선시대(고조선)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세종실록 103권)
2.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을 모방한 것이다.(세종실록 25년)
3.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정음 스물여덟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서 보이시면서 이름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하되 글자는 옛날의 전자를 본따고,..(정인지의 해례서문)
4.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상소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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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인도 구자라트 문자, 몽고 파스파 문자, 중국 갑골문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700년 전에 일본에는 이미 원시 한글이 존재했고, 그 유물이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아히루 문자)'라 합니다.
즉, 가림토는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일본에도 전해져 신대문자인 아히루 문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로 전해진 가림토 문자의 흔적이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 남아있고, 은나라 유적지 은허에서 갑골문으로도 발굴되었습니다.
또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분국이었던 몽고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가 되었고,일본으로 건너가〈일본의 신대문자>가 되었으며, 배달국 분국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트 알파벳과 구자라트 문자의 원형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한단고기 뿐 아니라 일본, 인도, 몽고 등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나라들에 풍부하게 남아 단군조선 시대와 그 영향력을 지금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만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공식화하지 않고 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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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토 문자>
우리가 오랑캐 정도로 알고 있는 여진이나 거란, 몽고족은 사실은 가림토 문자를 사용하던 우리 민족이다.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쥬신족의 일부도 가림토 문자를 사용하였는데 이들이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로 진출하여 아메리카 인디언의 기원이 되었고, 놀라운 것은 이들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적 중에서 가림토 문자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대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에서도 우리가 뜻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한글과 대단히 유사한 문자가 사용되고 있는 것 역시 가림토 문자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http://cafe.naver.com/bulmyul1/2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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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문명과 한국사의 기원
☆우리의 역사는 지중해에서 시작되다.
*해뜨는 곳이란 뜻의 아시아,해지는 곳이란 뜻의 유럽이란 말을 처음 쓴 아시리아.그럼 왜 유독,북위35도~40도(한반도,중국 일부지역등),북위30도~40도(지중해)에 위치한 국가에서 "해가 뜨고 지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
*고대 그리스땅의 원주민으로서 비유러피언인종이었던 페라스키인은 불교이전의 산스크리트문화(샤머니즘)를 상징하며,"페라"라는 말은 "평양,낙랑"을 가리키는 고대어 "펴라"와 같은 말이라는데,과연 이들의 정체는?
*지중해 북쪽에 "흑"해가 있고,아래쪽에 "홍"해가 있는데,이것은 고대 바빌론이나 ,우리나라나 중국뿐 아니라,그리스나 이란문화에서도 나타나는 음양오행사상인 <황중앙(황)-북현무(흑)-남주작(홍)-동청룡(청)-서백호(백)>의 유물이 아닌가?
*지중해문명의 역사는,유러피언,셈인종,수메르인종,우랄알타이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BC2300년(단군조선의 개국)을 기점으로 우랄알타이인종(웅족:熊族)의 역할이 압도적이 되는데,곰처럼 머리와 눈동자가 검은 인종으로서,한국인,중국인,일본인,몽고인,터키인,헝가리인,그리스인,남러시아인,중앙아시아인들 속에서 발견되는 인종이다.
*지중해 뮤케나이에서 발굴된 미노아문자(점토판문자)와 크노소스문자의 정체는?
*미노아문명과 웅족(熊族)의 관계는 어떻게 되고, 페라스키족은 누구이며,그들은 지중해를 버리고 언제 어디로 떠났는가?
*뮤케나이와 그리스반도가 연결되는 병목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성서의 "고린도(Corinth)"와 <한단고기>에 나타난 "가림토(加臨土),<단기고사>에 나타난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와"발해문(渤海文)",그리고 속설에 진시황과 알렉산더가 단군조선의 역사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모두 불태웠다는 "산스크리트문서",또한 조선조 석학 이수광이 우리 언문(한글)이 고대 인도의 글자를 본뜬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의 바로 그 글자(구자라트문자)는 같은 글자를 말함인가?
*한글 자음의 모태가 되는 원(○),방(□),각(△)은 몽골의 파스파문자와 티베트문자,그리고 피타고라스 교리의 비밀과 일맥상통하며, 그리스문명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으로서 <고조선기>에 나오는 천부인(天符印)이라는데,그 진실은?
*고구려시대의 성곽을 쌓는 석조방식이 뮤케나이(스파르타)의 성곽쌓기와 같은 이유는? 그리고 우리나라 종묘에서 보는 기둥양식의 건물이 그리스시대의 석조건물의 기둥양식과 왜 같은 것일까?
*1946년에 공주의 한 무덤에서 발굴된 명기(明器)가 뮤케나이문명시대의 제기(祭器)인 아스코스(Ascos)와 같고,백제시대의 와당에서 지중해의 동쪽 연안인 페니키아문명과 관련되는 문자인 히브리문자가 발견된 이유는?
*경주일대서 발굴된 금관유물 중,천마총에서 발견된 푸른색의 유리잔이 스키타이 제품이고,미추왕릉에서 출토된 화려한 목걸이의 상감유리 장식에 눈썹이 가늘고,길며 오똑한 코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희색 피부의 여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이유는?
*그렇다면,종족의 이름이 아니라 "유목민"을 지칭하는 그리스인들의 호칭인 "스키타이"의 문화와 인종적인 상황은 어떤 것이었을까?
★ CF)
19세기 말엽에 독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슐레이만은 지중해의 뮤케나이 지역에서 방대한 양의 고대유물을 발굴해 냈다.뮤케나이는 그리스반도의 제일 남단에 간신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또 하나의 작은 반도이다.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에는 뮤케나이를 "巫咸"이라고 적어 놓고 있으며 이 곳에 서왕모(西王母)를 비롯해서 열 명의 무녀(巫女)가 활동하고 있다고 썼다."巫"는 고대의 연금술을 뜻한다.
슐레이만과 그 이후의 고고학자들이 그 곳에서 발굴한 소위 미노아문자(점톰판 문자)와 크노소스문자는 정체불명의 국어로 밝혀져 많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으나 완전해독에는 실패했다.
이 중에서 크노소스문자는 그림문자로 한자(漢字)의 원시형태이며,선문자B(線文字B)로 불리는 미노아문자는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의 원리와 거의 같다.
미노아문자의 권위자인 채드윅(John Chadwick)의 설명에 의하면 이 미지의 국어는 단순모음인 a,e,i,o,u 에다 자음 J,K,L,M,N,P,R,S,T,W,X,Z 로 구성되며 말을 할 때는 우리말처럼 자음에다 모음을 결합하여 사용한다.
이런 방식의 어법은 그리스의 알파벳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자체계인 것이다.미노아문자를 한글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a ------------------------------ ㅏ
e ------------------------------ ㅓ
i ------------------------------- ㅗ
o ------------------------------ ㅜ
u ------------------------------ ㅣ
모음체계는 완벽하게 일치한다.자음을 보면 다소의 변화가 있다.
K ------------------------------ ㄱ
N ------------------------------ ㄴ
L ------------------------------ ㄹ
M ----------------------------- ㅁ
S ------------------------------ ㅅ
J ------------------------------ ㅈ
X ------------------------------ ㅋ
T ------------------------------ ㅌ
P ------------------------------ ㅍ
W ----------------------------- ㅎ
자음체계에서는 우리의 자음에서 ㄷ,ㅂ,ㅇ,ㅊ 의 네 개가 빠져 있는데,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자음은 세종 이후에 정해진 것이므로 중요한 것은 모음체계이다. 다섯 개의 모음은 ㅡ 와 ㅣ 를 합친 +를 중심으로 음양오행설에 따라 네 개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슴을 보여 주고 있다.
북
(ㅜ)
서(ㅓ) + (ㅏ)동
(ㅗ)
남
이모음 구조는 정확히 5행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수메르문자인 설형문자(쇠못문자)와 맥을 같이한다.
<규원사화>에는 신지(神誌)라는 사람이 문자를 발명하게 된 동기와 그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신지는 어느 날 사냥을 나갓다가 한 마리의 암사슴을 발견한다.
곧 활을 당겨 사슴을 쏘려고 하였으나 운 나쁘게도 화살이 빗나가고 만다.그 사슴을 찾기 위해 신지는 사방을 헤매고 다니다가 한 모래사장에 이르렀다.그는 그 곳에서 사슴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신지는 그가 찾고 있는 사슴이 그 곳에다 발자국을 남겨 놓았다는 걸 알고 그 방향을 추적하기로 했다.방향은 쇠못의 머리부분처럼 넓적한 부분이 앞이었고,그 뾰족한 반대쪽이 사슴의 행방에서 뒤가 되었다.
사슴의 두 발가락이 쇠못처럼 모래바닥에다 방향을 찍어 놓은 것이다.신지는 바로 그 순간 문자발명의 힌트를 얻었으며 사냥에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사슴발자국으로 문자를 창제했다.그것이 상고문자(上古文字)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설형문자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설형문자는 쇠못(▼)을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배치함으로써 소리와 의미를 나타낸다.
ㅏ ㅓ ㅗ ㅜ ㅡ ㅣ
▼
▶ ◀ ▲ ▼ ▶ ◀ ▲
미노아문자는 설형문자도 아니고,한글처럼,질서정연한 과학성을 지녔던 것도 아니다.중요한 것은 한글과 똑같은 표현구조를 갖는다는 점이고 더욱 주목할 점은 미노아문자속에 중국의 은대(殷代)청동기로 알려진 여러 모양의 세발 제기가 나탄나다는 사실이다.
이 청동제기의 기능이나 용도는 미노아문명과 웅족(熊族)의 관계를 설명해준다.도대체 페라스키족은 누구이며 그들은 지중해를 버리고 언제 어디로 떠났는가?
분명한 사실은 뮤케나이 시대가 샤머니즘을 신봉했으며,산스크리트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페라스키의 "pera"가 평양,낙랑의 고대어인 "펴라"와 마찬가지로 그 어원이 산스크리트어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범천(梵天)을 가리키는 "Brahma"나 반야(般若)를 가리키는 "prajna"는 모두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점을 참고하면 페라스키는 불교 이전의 종교적인 "메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우리는 이 쯤에서 문제의 가림토(加臨土)문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한단고기>에 소개되어 있는 가림토문자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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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림토문자속에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의 모든 글자가 포함되고 잇다.중요한 점은 이 글자를 "가림토"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그런데 중국인은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고린도(corinth)를 "哥林多(가림다)"라고 표기하고 한글판 성서에서는 "고린도"라고 쓰고 있다.
"corinth"는 뮤케나이와 그리스반도가 연결되는 바로 그 병목과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만일 <한단고기>에 나타난 "加臨土"가 실제로 "고린도"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미노아문자(선문자B)가 곧 우리말과 같은 언어구조를 가진 문자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런데 <단기고사>에는 가림토를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라고 표현하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BC2200년 경에 단군 명가륵(名嘉勒)이 태수관(太修官)에 명하여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였는데,그 역사책을 "산수가림다"라고 했다.
이 산수가림다는 방언(方言)으로 기록된 것으로 동양사학의 원조라고 할 만한 것이었으며,그 속에는 도덕,정치,풍속,법률,그리고 신들의 계시가 모두 게재되어 있었다고 썼다.
뒤에 대야발(大野勃)이 이를 발해문(渤海文)으로 간행했다고 전한다.이것이 우리가 야사(野史)라고 말하는 <한단고기>,<단기고사>와 같은 책을 가리킨다는 걸 알 수 있다.
뒤에서 보지만 고구려나,말갈은 모두 오늘날의 지중해와 터키땅을 무대로 역사를 펼쳐갔던 나라들이다.발해는 그들의 형통을 이었다.따라서 "발해문"이라는 것은 고대 페르시아문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가림토"와 "산수가림다"가 같은 글자일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단기고사>는 실제로 그 글자의 예를 소개하지 않고 있으나,양쪽기록에서 모두 그 글자가 방언이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볼때 "가림토"와 "산수가림다"가 산스크리트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속설에는 진시황과 알렉산더가 산스크리트문서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는 설이 있다.그 속설을 참고하면 그들은 모두 단군조선의 역사난 그 문화를 말살하려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조 시대의 석학이었던 이수광은 언문(한글)이 고대 인도의 글자를 본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구자라트문자로 알려져 있는 인도의 고대 글자는 자음이 ㄱㄴㄷ ㄹ ㅁ ㅂ ㅅ ㅇ (7자)이고,모음은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과 같다.
이 글자가 가림토(고린도)문자이고,산스크리트어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것이다.실제로 한글에 있어서 자음의 모체가 되는 원(○),방(□),각(△)은 파스파문자로서 오랜 동안 티베트가 보존하고 있었다.
그 뒤 이 파스파문자는 몽골문자의 기본이 되었으나,그 근원을 살피면 역시 지중해로 올라가게 된다.
피타고라스 교리의 비밀은 원,방,각이고 그의 우주관이나 기하학이 모두 그 원,방,각의 이치에서 나왔다.분명한 것은 원,방,각의 이론은 피타고라스의 발명품이 아니고,그리스문명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 원,방,각의 비밀 원리가 <고조선기>에 나오는 천부인(天符印)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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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토문>
http://blog.daum.net/daesabu/1828498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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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어 = 범어>의 문자인 "데와나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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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어의 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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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어의 자음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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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의 자음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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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 숫자와 그 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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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어의 단모음의 실제 사용례)...모음을 가로로 붙여쓰기도 하지만 세로로 붙여쓰기도 한다.즉 모아쓰기의 변형인 것이다.
그림에서 첫 번째 모음인 한글의 'ㅏ'에 해당하는 '
'를 반시계 방향으로 90도 돌리면 한글의 모음 'ㅏ'와 똑 같은 모양이 된다. 실제로 산스크리어 글자를 쓸 때 이미 '
'이 모든 자음에 공통적으로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다른 모음으로 바꾸려면 그에 해당하는 모음을 좌우 또는 아래 위에 따로 붙인다. 그림 5에서는 장음인 'ㅏ-'가 되는 경우만 있는데, 장음 'ㅏ-'가 되는 경우에는 '
'를 자음 오른쪽에 덧붙여서 '
'와 같이 쓰고 '까-'로 발음한다.
'ㅓ'는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없고, 'ㅏ'를 반전시켜서 창작한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에서 두 번째 모음인 '
'는 음가는 한글의 'ㅣ'와같고, 쓸 때는 자음 부분 왼쪽에 '
'와 같이 쓰고, '끼'로 발음한다.
세 번째 모음인 '
'의 음가는 한글 모음 'ㅣ-'이고, '
'와 같이 쓰고 '끼-'로 발음한다.
한글의 모음 'ㅣ'는 바로 산스크리트어 장모음 '
'에서 본딴 것이다. 단모음 '
'에서 안 딴 것은 한글 모음에 장단을 구별해서 표시하지 않으므로 상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림에서 네 번째 모음 '
'의 음가는 한글의 'ㅜ'이고, 자음 아래에 '
'와 같이 쓰고 '꾸'로 발음한다.
다섯 번째 모음 '
'의 음가는 'ㅜ-'이고, '
'와 같이 쓰고 발음은 '꾸-'가 된다.
그 다음의 모음들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사용된다.
한글의 모음 'ㅜ'는 산스크리트어 모음 '
' 또는 '
'에서 따왔지만, 모양은 안 따고 자음의 아래에 쓰는 그 위치만 따왔음을 알 수 있다. 위치만 따온 것도 글자를 쓰는데 엄청난 편리를 주는 것이다.
위치만 따오고 모양은 데와나가리의 '
'가 모양이 좀 복잡하여 쓰기 힘드므로, 그냥 단순히 'ㅏ'를 시계 방향으로 90도 돌려서 사용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ㅗ'도 단순히 'ㅜ'를 반전시켜서 사용한다.

(파스파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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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완성(재창제)의 실질적인 주역...복천암의 주지승,혜각존자,신미대사 김수성(金守省)
No, 104
2006/7/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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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신미대사 그리고 한글에 관한 특집방송 부탁
* 한문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세종은,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했습니다. 기적과 같은 일을 해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한글이 아닌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중국이 되었거나 문맹자가 엄청날 것입니다. 그러나 한글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쉬운 글자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훈민정음을 주도적으로 만드 분이 바로 충북 영동 복천사에 거주한 "신미선사"라고 합니다. 이 시민서사와 한글 그리고 불교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불교TV가 발굴하여 특집으로 다루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자료를 올림니다>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
조선전기의 승려, 유.불학자
1. 내 용
충북 영동에서 부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김수온(金守溫) 선생의 형님으로 본명이 수성(守省),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모친의 뱃속에서 나올적부터 왼손 손바닥에 임금왕(王)자가 손금에 있어 부모와 삼촌들은 크나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때부터 이조에 이르는 동안 그런 사람은 나라에 역적이 된다하여 국법에 의하여 잡아 죽였던 것이기에 죽음을 면할려고 배안 병신 노릇을 아니할 수 없어 항상 손가락을 오그리고 주먹을 쥐고 살수 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잘나고 평소에 말을 잘하지 않았으나 한번 말을 내놓으면 청산유수 같았고 눈을 부리뜨면 안광이 눌리지 않는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이 될만한 기품이 있었고 관상학상으로 왕의 기상을 타고 났다고 한다.
두뇌가 총명하여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는데 글을 읽어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고 불가(佛家)에 뜻이 있어 자칭 신미(信眉)라하여 머리깍고 스님이 되었다.
세종26년에 五子 광평대군(廣平大君)을 잃고, 세종27년에 七子 평원대군(平原大君)을 잃었고, 세종28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잃는 등 3년동안에 세분을 잃으니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뉘우치던 중 병환으로 고통할 적에 문종과 수양대군 등이 지성으로 시탕(侍湯)하였으나 효험이 없던바 신미대사로 하여금 약을 쓰게 하니 완쾌하였다.
그로부터 세종은 신미대사와 가까워 졌고 신미대사의 박식(博識)함에 감탄하고 인물됨에 매료되었다.
세종은 신미대사에게 혜각존자(慧覺尊者)의 호를 내리려 하였으나 병으로 내리지 못하고 문종에게 유교를 내리니 문종은 선왕의 뜻을 받드려 왕에 오르자 사호(賜號)하니 「慧覺尊者」라 했다.
특히 세조와는 수양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세조는 왕위에 올랐어도 꼭 尊者라 불렀고 국사로 모셨으며 세조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대사를 우두머리로 효영대군(孝寧大君)과 김수온(金守溫) 등에게 불서를 언해하고 간행함에 100종에 이르렀다.
속리산 복천사(福泉寺)를 비롯하여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월정사(月精寺), 낙산사(洛山寺) 대자암 등을 중신하고 국책으로 처불함에도 소신것 불사에 힘썼으니 그 공이 지대하였다.성종10년에 열반에 오르니 복천사 남쪽 200미터에 신미부도(信眉浮屠)를 세웠으니 충청북도문화재12호이다.
2. 세조대왕과의 인연
조선조 제7대 세조대왕은 국초의 서정(庶政)을 바로 잡고 만기(萬氣)를 친재(親裁)하기에 영일(寧日)이 없는 사이에 몸에는 지독한 피부병이 걸렸다.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였다.
전날 보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여러 형제를 해치고 어진 신하들을 학살한 세조는 만년에는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회오의 길로 침잠하니 외로움과 헌전함에서 정신적인 안식처를 구하려 하였다. 이때 생각나는 이가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信眉大師)였다. 신미는 도학과 학식이 뛰어난 당대의 도승이자 학승으로서 복천사에 주석하고 있었다.
신미대사의 초청은 받은 세조대왕은 天順8년 2월 28일에 신숙주 이하 많은 신하를 대동하고 청주서 2박을 하고 장재리를 거쳐 말띠재를 넘어 큰소나무 아래까지 당도하였다 바로 길옆에는 2등변 3각형의 아름드리 낙낙장송이 가지를 길위에 드리우고 있어서 대왕이탄 연의 꼭지가 아마도 걸릴 것만 같았다.
이때 대왕은 연위에서 손으로 늘어진 소나무 가지를 가리키며「아! 저가지 아! 저가지」이렇게 외치자 그순간 늘어진 가지가 위로 처들었다 한다. 대왕은 신통히 여겨 즉석에서 정2품의 벼슬을 주었다.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2품송 이라 지금도 부르고 있다.
정이품송을 지나 복천사에 도착한 대왕은 신미대사가 주재하는 법회에 의지하여 티끌세상에 물든 자신의 심신이 부끄러움을 깨닫고 또 한편으로는 무한한 법열을 느꼈다 이는 신미대사의 무변의 법력과 도심으로 제도한 까닥이다. 세조대왕과 신미대사와는 수어지교(水魚之交)로서 평생을 은혜롭게 지냈다.
복천사 법회를 마치고 아쉽게 떠날무렵 신미대사는 세조대왕에게 청원을 하기를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는 부처님(석가여래)정골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데 오랜세월로 심히 퇴락하여 민망한 지경에 있으니 대왕께서 이보궁을 중수하시면 그 공덕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간청하자 세조는 쾌히 승낙하여 이에 바로 학열(學悅)스님을 상원사로 보내어 중수를 마치고 6월에 낙성식을 가졌는데 이때 신미대사는 상원사에서 세조대왕을 초청하였다.
때는 5.6월 염천이라 날씨가 찌는 듯 하였고 대왕의 온몸은 피부병에 덮여 이때 더욱 악화되었다. 이 사정을 누구보다도 신미대사가 잘 알고 있었기에 대왕을 초청한 것이다.
낙성식에서 진종일 땀을 흘린 대왕은 밤이되자 절에서 마련한 목욕장소에 들어가 몸을 씻는데 옥같은 석간수에 들어가니 전신이 녹아 내릴 것같이 시원하였다 그리고 나이어린 동자가 느닷없이 들어와서 고운 두손으로 등을 문지르니 심신이 날아갈 듯 쇄락하였다.
더욱 고마운 것은 나이어린 동자였다. 그래서 대왕은 등뒤에 있는 동자에게 나즉이 말을 건냈다.
「애 동자야! 너 어디사니 이렇게 고마운데가 있나」「고맙긴요! 저는 이절에 살고 있어요 대왕님」「아 그래 내가 너한테 부탁할 것이 있는데 꼭 들어주겠나? 약속해...」「예 대왕님 어느 존전이라고 대왕님의 부탁을 마다하겠습니까 무엇인지 하교하옵소서 대왕님」「참으로 기특하구나 나의 부탁은 다른 것이 아니고 나의 몸에 손을 댔다는 말을 남한테 절대로 하지 말아라.
이것이 부탁이다」세조대왕의 일말은 중대한 뜻이 있다 신하된자가 옥체에 손을 대면 극형에 처하는 법이 있기에 동자의 신상이 염려되어 한 말이다. 그러자 동자는 대왕을 향하여 저도 대왕님께 청이 있으니 꼭 들어달라고 한다.
세조대왕은 나이도 어리고 조금만 놈이 청이 있단 말이 하도 귀엽고 앙징스러워서 너의 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동자는 태연히 하는 말이「대왕님께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現身)하여 뒤에서 몸을 문지렀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마세요 꼭 약속이요」하였다.
세종대왕은 깜짝놀라 뒤를 돌아 보니 동자는 온데간데 없고 부스럼이 이때부터 치유가 되었다. 세조대왕은 신미대사의 도력에 힘입어 복천사에서는 세조대왕이 목욕했던 당시에 현신했던 문수보살의 상이 모셔져 있다.
3. 신미대사의 자비와 도력
보은 속리산에는 법주사란 이름 높은 절이 있고 이 절에 고명한 스님들이 주석하였기에 이 절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혜각존자 신미대사가 한때 이 절에 주석하여 면벽관심(面壁觀心)으로 불도에 정진하고 있을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겨울날 밤에 이 절의 중진급스님 3.4명이 헐레벅떡 정신없이 신미대사의 수도장에 문을 두드리고 뵙기를 청하였다.
내용인즉 이러하다 도둑 20여명이 벌떼같이 절에 침입하여 젊은 중들을 묶어놓고 장차 창고를 털 기세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높은 스님 신미대사 의 지시를 받으러 온것이다.
이 놀랍고도 끔찍한 말을 전한 스님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런 뜻밖의 일을 당한 신미대사는 눈하나 깜박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했다.
이 칠칠찮은 것들 떨기는 왜 떨어! 도둑이 떨 일이지 주인이 왜 떠느냐? 이렇게 꾸짖고는 명령을 내렸다.
모든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음대로 다 가져가라고 했다. 이 법주사는 토지가 많아서 일년에 천여석의 수확을 할뿐아니라 비단과 무명 기명과 잡화가 창고에 많았다 이 말을 들은 도둑들은 마음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쌀이며 비단이며 무명이며 기명등 닥치는 대로 멜빵이 끊어지도록 힘껏 짊어지고 도망을 쳤다.
긴긴 겨울밤이 보얗게 새도록 구슬땀을 흘리며 허둥지둥 도망을 쳤는데 이것이 웬일인가 밤새도록 죽을 힘을 다하여 도망을 쳤건만 법주사 경내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밤새도록 법주사만 뺑뺑 돈 셈이다 신미대사의 도력에 잡힌 것이다.
이에 놀라고 당황한 도둑떼는 겁에 질려 솜같이 나른한 몸을 이끌고 신미대사 앞에 나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신미대사는 태연히 도둑떼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너희들의 눈을 보니 모두 착한 사람이다 이 순간이라도 사악한 마음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왜들 이러느냐 마음을 바로 잡아라」라고 이렇게 순순히 타오르는 대사의 자비로운 얼굴에는 춘풍이 만면하였다 도둑들은 대사의 말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다고 한다.
4. 주요 유적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舍乃里) 속리산소재 복천암 신미선사와 한글
신미선사는 충청북도 영동의 영산김씨 가문에서 부친 김훈과 모친 여흥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 입산 전에 부친께서 진사벼슬에 등과한 후 태종 때에 영의정까지 지낼 수 있는 귀족가문 출신이기에 속가에서 사서삼경을 모두 섭렵하고 출가 입산하여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범서장경이 중국에 들어와 여러 고승들에 의하여 번역된 경전들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서로된 원전을 보기 위하여 범어 공부를 하였다.
범서경전이 부처님 뜻에 가장 근접한 경전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제4대 세종대왕은 중국의 한문 글이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문맹인이 많아 배우기 쉬운 구리들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아침조회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우리도 우리글을 한번 만들어 보자. 우리글을 만들데 집현전을 확장하고 장안에도 우수한 학자들이 많지만 이번엔 전국을 총망라하여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여 집현전에 초빙하여 가장 배우기 쉽고 이해하기 쉬워 누구나 속히 터득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글창제의 주역으로 발탁된 신미선사
그 중 유일하게도 충청북도 속리산 복천사에 주석하고 있는 신미선사가 세종대왕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게 되었다.
1443년부터 한글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하여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논의를 한끝에 신미선사는 모음, 자음, 소리글을 범서에서 착안하여 한글을 마무리 짓고 시험할 때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인하여 (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토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시험을 끝내고 우리글이 완성되었다고 세종대왕께 보고하니 임금님은 너무 기뻐하며 1446년 9월 상달에 우리글을 훈민정음이라 공포하고 우리글이 만들어졌으니 우리글로 노래도 한번 지어 보라하여 월인천강지곡과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등의 노래를 지었다.
그 후 세종대왕은 신미선사의 수고를 치하하고 보답으로 주석하고 있는 속리산 복천사에 주불 아미타불과 좌우보처관음세지 양대보살을 복각조성 시주하시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시호를 선교 도총섭밀전정법비지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라 지어 문종에게 위임하여 문종이 부왕을 대신하여 신미선사께 사호 하였다.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세상에 공포한 후 집현전에 같이 참석하였던 성삼문, 정인지 같은 유생들이 말하기를 한글에 대하여 신미대사의 공은 인정을 하되 최초 발기를 세종대왕이 하셨으니 그 공을 세종대왕께 돌리자하여 신미선사가 쾌히 승낙하니 그 후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지은 것으로 되었고 모든 문헌 등에 신미선사가 집현전에 참석함까지도 밝히지 않고 공은 왕께로 돌리기로 하였기에 거기에 대하여는 모든 문헌에도 신미대사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으나 유일하게 영산김씨 족보엔 세종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되어 있다.
유생들은 신미선사가 승려의 신분으로 한글을 주도한데 대하여 과소평가하기 시작하여 언문인 부녀자들이 뒷방에 앉아서 친정에 하소연하는 편지나 써서 보내는 글이니 통시 글(쉽다는 말)이니 하며 이것이 무슨 글이냐 장부들이 배울 글이 못 된다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미선사는 세종대왕의 뜻에 따라 누구든지 배우기 쉽게 만든 것뿐이기에 유생들의 그러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아다.
유생들은 유서에만 능했고 신미선사는 불경, 유서, 범서 등 모두에 능하여 범서에서 착안한 한글 논의에 대하여 유생들은 일체 반론도 한번 못했고 시종일관 신미선사의 뜻한 바대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집현전에서 4년간이나 학자들이 머물러 있었기에 학자들을 보살피는 한글도감으로 세종대왕은 수양대군을 명하였다.
수양대군이 존경했던 인물 신미선사를 찾아온 곳 속리산
수양대군은 오래도록 학자들을 보살피면서 그 중에서 신미선사를 가장 존경하였다. 한글이 신미선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고 덕이 높으며 지혜가 뛰어나고 점잖고 용모도 거룩하기 때문이었다.
한글을 마치고 신미선사는 집현전에서 나와 속리산 복천사로 돌아오고 그 동안 세월이 흘러 세조인 문종에게 전위하고 문종께서는 병약하시어 일찍이 서거하시자 12세 되는 어린 나이에 단종이 즉위를 하시니 수양대군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섭정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간신들은 어린 왕을 가지고 형식만 취할 것이 아니라 “수양대군께서 직접 정사를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하고 수 차례 간청하였으나 세조는 불응하며 “날 보고 역모를 하란 말이냐?”하고 신하들을 호되게 꾸짖는다.
신하들은 뜻대로 되지 않자 계속 집권 할 것을 강요하니 하는 수 없이 혁명을 일으켰다. 단종은 영월로 귀양을 보내고 수많은 신하들이 희생되었다. 어느 날 꿈에 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네가 아무리 용상이 탐이 나기로서니 어린조카를 살해까지 할 수 있느냐! 이 더러운 놈아!”하고 얼굴에다 침을 뱉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온몸에 부스럼이 생기었다.
그 당시에는 혁명중이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병에 대한 관심이 적다가 어느 정도 민심이 수습이 되자 치료를 시작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인지라 약을 써도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심신이 불안하고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용상을 보니 쳐다보기도 싫고 그렇다고 산으로 들어가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으나 그러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소나무를 보고 연 걸린다 외친 세조
그리하여 곰곰이 생각하니 지난 날 신미선사가 생각이 나서 신미선사를 찾아뵙기로 마음을 정하고 사전통보를 한 뒤에 4~5백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청주에 와서 2일간을 쉬고 보은 말티재 밑(현 대궐 터)에서 하룻밤을 자고 세조 10년 갑신 2월 28일 신해일에 말티재를 넘어 큰 소나무 밑을 지나는데 세조께서 타신 연이 소나무가지에 걸릴 것 같으므로 세조대완이 이를 보고 “연 걸린다! 연 걸린다!” 하니 연을 낮추기 전에 가지가 ‘번뜩’ 들어주어 연이 상하지 않았다.
세조대왕은 하도 이상하여 연을 멈추고 그 사실을 신하들에게 이야기하고 소나무에 대한 처리문제를 이야기하던 중 한 신하가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임금임을 알아보는 소나무이니 벼슬을 줌이 옳은 줄 아옵니다” 하고 아뢰자 세조께서는 “무슨 벼슬을 주면 좋겠는가?” 하시자 신하는 “정이품벼슬을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 자리에서 정이품 벼슬을 내렸다.(지금의 장관급을 말함)
스님들과 약속대로 정에에 복천사에 당도하니 당대의 큰 스님이신 신미선사와 수미, 학조, 학열, 사지등 많은 스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법당으로 안내 참배케 하고 3일간 기도와 법문을 듣고 마음이 평안하여졌다. 마음의 안정을 얻은 세조대왕이 환궁할때에 신미선사는 아뢰길 “강원도 오대산을 가면 월정사가 있고 월정사 위에 상원사가 있으며 상원사 위에 중대가 있습니다.
중대는 우리나라 오대 적멸보궁 중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궁입니다.(부처님 머리부분사리를 모신 곳임)그러나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단월도 가는이가 적고 건물은 도괴직전입니다. 대왕께서 복원을 해주시면 그 공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세조대왕은 즉지 “나라에서 복원해 드리지요.
이곳에서 보궁복원에 감독할 분을 보내주세요” 하여 그 자리에서 학열스님을 보궁복원 감독으로 임명하여 보내었다. 학열스님이 걸어서 월정사 입구 월정거리에 당도하니 벌써 강릉쪽에 나라에 수세 바칠 것을 상원사 적멸보궁 복원비로 올리라는 통첩이 전달되어 곡식들을 모두 머이에 이고 등에 지고 월정사 거리로 빽빽하게 들어간다.(그 당시 인부노임을 곡식으로 환산함) 복원을 마치고 같은 해 유월에 낙성식을 하면서 신미선사는 오대산에 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고 세조대왕을 초빙하였다.
“보궁복원이 다 되었으니 대왕께서도 적멸보궁 낙성식에 참석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초청을 하니 세조대왕은 쾌히 승낙을 하고 4~5백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유월 염천에 해는 길고 많은 신도들 앞에서 왕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옥대를 매었으니 땀을 흘려 부스럼이 가렵고 따가우나 손으로 만질 수도, 긁을 수도 없고, 하루 종일 괴로움을 겪다가 날이 저물고 어두워 밤 9시에 3경의 종을 치자 조용하다 다시 박이 분주함으로 “어찌하여 밖에 소란스러우냐? 하자. ”요소요소에 군사를 배치하느라 그러합니다.“ 하였다.
세조대왕은 “ 이 산중에 무슨 일이 있겠느냐” 하고 경호원들을 모두 들어가 자라고 하였다.
그것은 산골 시원한 물에 몸을 자유롭게 씻고자 함이었다. 밤 10시쯤되니 너무 조용한데 경호원들은 방에는 들어갔으나 잘 수가 없어 자라하여 방에는 들어갔으나 잠은 이룰 수 없었다. 이는 아직까지 단종편에서 자객들이 칼을 품고 암행기회만 노릴 때였기 때문이다.
문수보살을 친견한 세조
세조대왕은 우수 달밤에 물소리 나는 쪽을 찾아 나섰다. 달은 구름이 가리어 어둡고 구름이 지나가면 환히 밝았다. 물소리 나는 계곡 바로 옆은 길이요. 길옆이 계곡인지라 길 둑에서 왕관과 옥대 곤룡포등을 모두 벗어 개울 옆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개울둑에 앉아 발을 담구고 몸을 씨으니 하루종일 햇볕이 안드는 숲속에서 흐르는물이라 차기가 얼음물 같았다.
한참 기분좋게 씻고 있는데 갑자기 통~ 통! 뛰어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워지더니 대왕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 뒷모습을 보니 7~8세 되어 보이는 꼬마동자였다. 지나가는 꼬마를 향해 “야! 꼬마야 너 어디 가느냐? 예 저 마을에요. 너 이리와. 내 등을 좀 밀어다오” 하자. “예 해드리죠” 하며 꼬마가 다가오더니 두팔을 둥둥 걷고 물을 꼬막손으로 찍어다 바르며 문지르니 시원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여 장난이 벌어졌다.
대왕께서는 “야! 꼬나야 너 마을에 내려간다 하였지.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하고 약속하나 지켜야 할 것이 있느니라“ 꼬마는 ” 예. 무엇입니까?“ 제가 그 약속을 꼭 지키어 드리겠습니다."
대왕께서 말씀하였기를 “다른 것이 아니고 너는 마을에 내려가거든 대왕의 몸에 손을 대었다고 하지마라”(당시 국법으로 왕의 몸에 손을 대면 이유를 불문하고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꼬마는 “예 절대 그 약속을 꼭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대왕께서는 제 약속하나 지키셔야 합니다” 대왕께서는 “오냐. 내 너의 약속을 지킬테이니 너의 약속은 무엇이더냐” 꼬마 동자가 하는 말이
“대왕께서는 어디 가셔서 이 골짜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나무에게도 하지 마세요” 하고 하는 말을 듣고 “문수보살” 하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니 등을 밀었던 꼬마는 인홀불견이었다.
세조께서는 무릎을 탁치며 성현을 옆에다 두고도 몰랐으니 한스러웠다.
문수보살인줄 알았더라면 개인에 관한 일이나 국사에 대한 일들을 자문을 받을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는데 눈을 뜨고도 성현을 몰라보았으니 후회해도 이젠 부를 수도 따라 갈 수도 없었다. 여하튼 기분이 상쾌하여 의관을 정장하고 침실로 돌아와 단잠을 잤다.
이튼날 아침에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문밖이 환히 밝았고 땅바닥엔 지난밤에 없었던 검은 벌레 같은 것이 많이 날려 있었다. 무슨 벌레가 들어왔나 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니 움직이지 않으니 벌레는 아니었다.
양팔에 소매를 걷어 올리고 보니 그 많았던 부스럼이 모조리 다 떨어져 전신은 흉터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세조는 너무 기쁜 나머지 종이를 가져오라하여 달밤에 본 동자를 종이에다 그려서 그대로 조각케 하였다. 그리고는 점안의식을 거쳐 상원사 큰 방에 모시게 하였다.
지금의 산원사 큰방에 모셔져 있는 바로 그 문수동자이었다. 그리하여 세조대왕께서는 마음의 병은 속리산 복원사에 계시는 신미선사로부터 치유 받았고 육신의 병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님 가피로 모두 낳았다. 그 후 6~7년간 정사를 잘하였으며 지금도 상원사 앞에 세조대왕의 관광 옥대를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목욕을 하였다하여 관대거리라 부르고 있다.
신미선사는 세종, 문종, 세조 3대왕에게 존경을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에 세로 부임한 주지스님이 신심이 나서 문수동자를 모신 탁자를 청소하면서 문수동자상 밑을 닦기 위하여 문수동자상을 들자 점안시 복장물을 봉하고 창호지로 봉하였던 종이가 삭아서 복장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속에서 세조가 입었던 등지개와 봉안했던 사리, 세조대왕의 딸이 쓴 축원문등이 나와서 지금의 상원사에 보관하고 있다.
<위 내용은 속리산 복천암 월성 큰스님이 정리하신 내용입니다
속리산 복천암~정이품송 '한글루트' 였나 충청 백두대간 7백리를 가다>
조혁연 기자 chohy@jbnews.com
(16) 속리산 복천암
속리산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500m 정도 발걸음을 옮기면 신미(信眉)대사 부도탑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 1416호로, 공 모양의 탑신이 부드러운 곡선과 함께 안정감있게 흐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부도탑의 주인공인 신미대사(1403∼1486ㆍ속세고향 충북 영동)가 근래들어 세인들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다. 세종의 왕사였던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은 종종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올 상반기 한국세종한림원 총재 강상원 박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책을 내면서 이 설이 다시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지금까지의 설은
한글 창제와 관련,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이 명령을 했고,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이의 실무작업을 맡았다’ 정도로 알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 입 발음기관을 본떴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국어학자들은 ‘세종실록 계해년 그믐조’에 나타나는 ‘是月上親製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문장을 들어 이에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다. 직역하면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古篆을 모방하였다’ 정도가 된다.
이중 핵심어인 ‘倣古篆’은 ‘옛 篆字를 모방했다’는 뜻으로, 정인지가 지은 ‘훈민정음 해례’에도 이 문장이 나오고 있다. (象形而倣古篆ㆍ‘옛 篆字를 모방해 글자상형을 삼았다’)
이 문장 하나 때문에 ‘발음기관을 본떴다’라는 설은 전통한옥 창문도형, 단군시대 가림토문자, 일본 신대문자, 범어(산스크리트어), 몽고어, 고려 각필 모방설 등의 도전을 받고 있다.
◆ 어느 설이 가장 유력한가
발음기관설 외에 현재 가장 유력시되는 설은 이른바 범자(梵字ㆍ산스크리트어) 모방설이다.
조선초기 유학자인 성현(1439~1504)은 그의 저서 ‘용재총화’에서 ‘基字體依梵字爲之’라고 밝히고 있다. 직역하면 ‘그 글 자체는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정도로, ‘용재총화’는 훈민정음 반포 30년후에 쓰여진 책이다.
이수광도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諺書)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我國諺書字樣全倣梵字)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상당수 학자들은 앞서 언급된 ‘篆字’를 ‘梵磁’의 한자식 표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세종대왕이 범자를 모방해 한글을 창제했을 경우 그 중간에 범자를 능통하게 사용하는 스님이 존재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부분이 규명되지 않았다. 이의 규명작업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 현 복천암 선원장 월성(법랍 50) 스님이다.
◆ 최소 7개 증거있다
30년 넘게 이 부분을 연구하고 있는 월성스님은 “조선초기 속리산 복천암에 거주하던 신미대사가 세종을 부름을 받아 최소 7년간 복천암∼한양을 오가며 한글 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단언했다.
월성 스님은 그 근거로 ▶신미대사가 범어에 능통했던 점 ▶유학 성향이 강했던 세종이 이례적으로 복천암에 불상을 조성해 주고 시주를 한 점 ▶세종이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린 점 등을 거론했다.
이밖에 ▶수양대군 세조가 복천암을 손수 찾았던 점 ▶유학자들이 당시는 물론 세종이 죽자마자 부녀자글, 통시글(화장실글) 등의 말로 훈민정음을 비난하고 험담한 점 ▶신미대사의 본관인 영산김씨 족보에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로 언급된 점 ▶한글 창제후 실험적으로 지은 곡과 문장이 유교가 아닌 불교내용을 담고 있는 점 등을 거론했다.
◆ 구체적인 근거는 있나
월성스님은 첫번째에 대해 유학자 김수온(1410∼1481)이 지은 ‘복천보장’을 인용, “신미대사는 불경에 통달했으나 한자에 오역을 많음을 느끼고 이른바 원어, 즉 범어를 공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이는 지난 1975년 서울 인사동에서 발견된 신미대사 ‘범어진언’(사진참조)에 그대로 들어나 있다”고 밝혔다.
‘慧覺尊者’(혜각존자)라는 법호에 대해서는 “세종이 스님에게 극존칭 법호를 내린 것은 신미대사가 유일하다”며 “그 앞에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뜻인 ‘祐國利世 글귀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한글 창제와 관련, 세종이 아닌 수양대군 세조가 등장하는 것은 다소 이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월성스님은 세조의 복천암 방문도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복천보장’을 다시 인용, “세종은 유생들의 극심한 반대를 예상하고 신미대사,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5인에게만 한글창제 작업을 극비리에 명령한다”며 “이후 세조는 왕위찬탈에 대한 흉금을 말하기 위해 옛정이 있는 신미대사를 찾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는 온양과 초정에서의 목욕을 핑계삼았지만 속리산 복천암 방문이 실제 목적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때 생긴 것이 이른바 ‘정이품송 전설’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월성스님은 이밖에 “조선은 유교국가라 한글창제 실험용 책도 당연히 유교적인 내용이 됐어야 했다”며 “그러나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은 불교적인 내용을 담은 곡과 문장으로, 이것 역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월성스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창제에 신미대사 이름이 빠져있는 것에 대해 “세종 사후 유생들은 신미대사와 불교에 관련된 문구를 모조리 삭제했음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며 “다만 영산김씨 족보에 ‘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의 문구가 나온다”고 밝혔다. 직역하면 ‘守省(신미대사 속명)은 집현원 학사를 지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정도가 된다.
◆ 복천암∼정이품송은 한글길 이었는가?
현재 신미대사 한글창제 주도설은 정설화된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 학자들은 그 개연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이럴 경우 속리산 복천암-정이품송 그리고 세조가 잠시 머물렀다는 말티고개 초입의 ‘대궐터’(장재리)는 이른바 ‘한글 루트’가 된다.
지역민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백두대간 속리산에는 이런 사연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숲속에 외롭게 서있는 신미대사 부도탑은 후손된 우리들에게 역사를 바로 잡아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보은군은 이를 고증하면 엄청난 무형의 자산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자료제공ㆍ도움말: 복천암 월성스님, 충북도청 김길상(영산김씨 후손) 계약담당
◇한글기원설 또 어떤 것이 있나◇
한글 창제와 관련, 현재 정설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입 발음기관을 본떴다’라는 설이다. 그러나 세종실록 등 여러 사료에 ‘倣古篆’(옛 전자를 모방했다)이라는 표현이 보이면서 무려 20여개의 또 다른 기원설이 등장해 있다.
이중 가장 논란을 빚고 있는 설이 일본 신대문자, 고조선 가림토문자 모방설, 고려 각필부호 유래설이다. 일본학계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신대(神代) 문자는 그 모양이 한글과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자는 일본 사찰을 중심으로 조선통신사 왕래이후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문자 열등의식을 느낀 일본 일부 계층이 한글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수용되지 않고 있다.
고조선 가림토는 기서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문자로, 자ㆍ모음 38자가 한글 자ㆍ모음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위작(僞作)된 책이라는 견해가 매우 우세하다. 한 예로 환단고기에는 ‘경제’(經濟)라는 표현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이후에 등장한 단어로, 그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일제시대 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누군가 위작한 책으로 보고 있다.
고려 갈필부호 유래설은 지난 2001년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처음 제기했다. 당시 이 교수는 “고려불경을 조사한 결과, 무려 17개의 각필이 훈민정음 모양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설은 ▶고려~조선초기 승려들이 불경한자를 쉽게 읽기 위해 각필을 사용했고 ▶그 각필은 범자(梵字)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추론을 낳고 있다. 이 설은 훈민정음 범자 모방설과 선이 닿아 있거나 근친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충청 백두대간 이런 꽃이 핀다
◆ 왜솜다리 초롱꽃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백두대간 고산지대에서 볼 수 있다. 높이 20㎝ 안팎까지 자라며 잎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잎자루가 없으며 양면에 솜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잿빛을 띤 흰색 털이 빽빽이 나있다. 꽃을 줄기 끝에 둥글게 모여 달린다.
◆ 으아리 미나리아재비과의 덩굴성 여러해살이풀로 산기슭에서 주로 볼 수 있다. 고추나물 혹은 선인초(仙人草)라고도 불리우며 덩굴이 잎자루로 감아 올라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꽃은 6∼8월에 흰색으로 피고 어린 잎은 식용하고 뿌리는 약재로 쓴다.
◆ 익모초 꿀풀과의 두해살이풀로 높이 1m까지 자란다. 꽃은 7∼8월에 연한 붉은 자주색으로 피며 그리고 마디에 층층으로 달리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맛은 쓰고 맵고 그리고 차가운 성질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부인과 질환 한약재로 만이 사용된다.
자료제공: 백두대간시민보전연대 최상영(011-9841-4387) 사진영상단장
▶취재후기
속리산(俗離山)은 글자 그대로 ‘속세에서 떨어져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이런 문자적인 이미지는 말티고개를 넘을 때까지 그런대로 유지된다. 가파르고 여러차례 구비치는 길이 한번 들어가면 영영 다시 빠져나오지 못하겠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러나 이런 속리산의 이런 이미지는 법주사 초입인 세칭 ‘오리숲’에 이르러서는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우선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솔향기 가득한 송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양복에 갓을 쓴 모습이다.
이밖에 콘크리트 포장도로의 도랑이 너무 깊다. 게다가 뚜껑도 덮혀있지 않다. 따라서 아이와 함께 속리산을 찾은 방문객들은 이들은 단속하느라 여간 신경을 쓰는 모습이 아니다.
흔히 집의 이미지는 대문부터 좌우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른바 ‘첫인상 효과’이다. 이런 의미에서 법주사 오리숲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법주사 사하촌은 지금 최악의 경기침체에 빠져 있다. 국내 수학여행단이 금강산관광으로 몰리면서 더욱 타격을 받고 있다. 법주사가 본래 이미지를 되찾으려면 오리숲 분위기부터 바꿔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복천암
복천암은 공민왕과 세조가 자주 찾았던 암자이다. 그들이 찾았던 이유는 복천암의 약수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복천암은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진정스님이 창건하였으며 고려 때는 공민왕이, 조선 때는 세조가 자주 찾았던 암자라고 전해진다.
지금도 다녀간 왕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공민왕의 무량수라는 붓글씨가 그것이며, 세조와 세종의 일화들이 구전되고 있다. 세종은 암자의 신미(信眉)대사를 불러들여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 체계를 설명케 했다고 하며, 암자의 사적비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신미대사의 공로를 인정하여 한글이 반포된 후 암자에 미타삼존상을 조성 봉안케 하였으며, 이어 문종은 혜각존자라는 호를 내렸다고 한다.
복천암 선원장 월성 스님은 구참 선객이다.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지리산 상무주암에서였다. 나그네에게는 그때의 기억이 또렷하다. 암자 마루까지 빗발이 들이치고 있었는데, 두 스님이 법거량을 하고 있었다. 두 분은 상무주암의 현기 스님과 그를 찾아온 월성 스님이었다.
월성 스님은 전형적인 선승이지만 복천암에 머물렀던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을 학승처럼 깊이 연구하고 있는 분이다. 스님을 만나면 신미대사의 얘기부터 들어야 한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월성 스님의 얘기는 대충 이렇게 시작된다.
"제주도 고관사의 고불이 인사동에 나와 있었는데 그 고불의 복장에서 신미 스님의 기록이 나왔습니다. 집현전 학사였던 김수온은 신미 스님의 친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학자들이 신미 스님께서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실록에서 다 빼버렸습니다.
그러나 영산(永山) 김씨 족보에는 다 나옵니다. 왜 신미 스님께서 집현전에 참여한 사실을 유학자들이 삭제한지 아십니까? 한글 창제를 누가 주도적으로 연구했느냐는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월성 스님은 신미 스님이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댄다.
"첫 번째는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의 초석을 다진 신미대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복천암에 삼존불을 시주했고요.
두 번째의 이유는 문종은 부왕(세종)의 뜻을 받들어 유생들이 십여 번의 상소를 올려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신미대사에게 혜각존자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세 번째는 신미 스님의 주도로 한글이 만들어진 것을 세조가 4년간 보았기 때문에 스님을 존경한 나머지 복천암에 법문을 들으러 온 것입니다. 네 번째는 세조가 죽고 나자 집현전 일부 학자와 유림의 유생들이 한글을 과소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집현전 유학자들이 주도적으로 한글을 창제했다면 그렇게 반대했겠습니까?"
월성 스님은 세조와 세종의 신미 스님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미 스님이 세조에게 부탁하여 오대산에 적멸보궁을 지어 부처님 정골사리를 봉안케 하였지요. 그때 신미 스님께서는 제자인 학열 스님을 오대산으로 보내 불사를 감독케 했지요. 세조의 그런 공덕이 있었기에 상원사 앞 계곡물에서 목욕을 하다 문수동자를 만나고 다음날 등창이 다 나았다는 얘기가 전해진 겁니다.
세종이 한글 창제 후 불경을 언해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대사의 영향으로 봐야 합니다. 언해할 서책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불경부터 먼저 했겠습니까? 신미대사의 요청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에 간여한 이유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즉 표음문자인 그의 범어 실력 때문이었다. 한글 창제를 연구하던 세종이 전국 각지에서 학자들을 찾던 중 신미대사의 범어 실력을 인정하여 발탁하였던 것이다.
신미의 고향은 영동이었고, 그의 부친 김훈은 진사 급제한 후 사후에 영의정을 추증받은 분이었다. 신미도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을 마쳤고, 출가한 후에는 해인사 장경을 열람하였는데 한문 번역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어로 된 원문을 직접 읽기 위해 독학으로 범어를 공부하여 터득했다고 전해진다.
세조와 신미대사 간에 서로의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세조 10년(1464)에 기록된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이 바로 그것이다. 세조의 수기(手記)로 된 권선문은 다음과 같이 씌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일곱 가지 중요한 일이 있는데, 삼보法佛僧, 부와 모, 군君, 선지식善知識이 그것이다. 삼보는 현실을 박차고 떠남을 근본으로 하고, 부모는 자식을 키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임금은 백성을 보호함을 근본으로 삼고, 선지식은 미혹에 빠진 자를 인도함을 근본으로 삼는다.
나는 일찍이 잠저(대군 시절)에 있을 때부터 혜각존자를 만나 도가 합하고 심기가 서로 화합하였다. 매번 속진의 길에서 나를 포섭하여 이끌고 나로 하여금 항상 깨끗함을 지니게 하여 탐욕의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어찌 스승(신미대사)의 공덕이 아니겠으며, 다겁의 깊은 인연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토록 계합할 수 있으리오.
지금 내가 병이 들었음을 듣고 수백 리 밖에서 주야로 달려 나에게 이르렀으니 이것을 고상한 일로 삼지 않으면 어찌 중생을 제도하는 대비(大悲)라 할 수 있겠는가. 놀라고 감동하여 흘리는 눈물이 끝없다. 또한 스승께서는 학열 스님, 학조 스님과 함께 나를 위해 옷을 팔아 영찰(靈刹)을 중창하는 비용으로 쓰고자 함을 들었다.
스승이 나를 위해 마음 쓰는 것을 보니 나 역시 스승을 위해 감은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까닭에 나는 스승들을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얼마간의 비용을 보태 구경의 올바른 연(緣)으로 삼고자 한다. 이것이 직심(直心)의 보리(菩提)인 것이다. 이에 세자에게 부촉하여 영원히 후사(後嗣)로 드리우고자 한다.'
위의 내용은 다음에서 뽑아 옮김
정찬주, "자기를 속이지 말라", 열림원, 서울, 2005, 72-76쪽.
*위 책은 본래 성철스님이 공부하였던 암자들을 돌아보며 작가가 쓴 글로서 이야기의 주제가 워낙은 '한글'은 아니지만, 복천암을 말하다보니 끼어든 이 대목 이야기가 마침 한글 창제와 관련한 내용이어서 옮겨보았다.
□ 상원사 피묻은 적삼의 미스터리(역사스페셀)------------------------------------------------------------------------------------- 상원사 피묻은 적삼의 미스터리
□“훈민정음 창제 일등공신은 신미 스님” 훈민정음과 신미 스님’주제 특강 강 상 원 박사
“우리말의 뿌리는 실담(범어의 음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도 범어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 일등 공신은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신미 스님인 것입니다.”
지난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속리산 법주사 강원에서 개최한 특별강연회에서 한국세종한림원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은 집현전 학자도 세종대왕도 아닌 신미 스님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 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주제로 강연한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 해제본에 나와 있는 초기 표기법을 검토하면 실담에서 유래한 흔적이 매우 많다”며 “이는 훈민정음이 실담을 기초로 제작됐고 따라서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에 의해 훈민정음이 제작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박사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범어의 음가인 실담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훈민정음도 이런 범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 했던 사람은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바로 집현전 학자였던 신미 스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해 신미 스님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강 박사는 “당시 숭유억불이라는 강력한 통치이념을 추진했던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고의적으로 누락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강 박사는 “영산 김 씨의 족보와, 『복천보장』에 등장하는 기록에 의하면 신미 스님은 한학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범어에도 능통한 학승으로 집현전에 초빙돼 한글 창제에 임했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나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 박사가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한 것은 10여년 전부터다. 1994년 동국대에서 ‘원효의 중도사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경전을 영문화하는 작업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존 영문 경전 곳곳에서 오류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범어본 경전을 직접 번역해야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범어를 공부하게 됐다.
범어 사전을 통독한 것도 15회 이상. 범어에 대한 연구가 지속될수록 그는 한글과 범어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동국정운』에 나타난 한글 고어 표기법이 실담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도 알아냈다. 이를 근거로 그는 훈민정음이 실담에서 나왔고 따라서 범어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강 박사는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범어 관련설 이외에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이후 『능엄경』,『원각경』등 총 28종의 불교경전이 제일 먼저 한글로 번역했다는 점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신미 스님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왜곡된 한글창제 역사 바로잡아야”
30년간 신미 대사 자료 수집 복천암 주지 월 성 스님
“한글 창제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신미 대사가 역사 평가에서 가려져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선 초 뛰어난 학승 신미 대사의 비밀을 밝혀냄으로써 한글 창제와 관련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것입니다.”
지난 30년 간 신미 대사의 자료 수집에 전념해온 속리산 복천암 주지 월성 스님은 “신미 대사는 한글창제의 결정적 영향력을 끼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학자들의 그릇된 사관으로 한글창제의 배경과 과정이 왜곡돼 있다”며 “신미 대사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75년 사형인 탄성 스님의 권유로 복천암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월성 스님은 이 때부터 신미 대사에 관한 자료 수집에 천착했다. 신미 대사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발굴 정리하는가 하면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한 것도 수십 차례. 스님은 신미 대사의 기록을 복원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신미 대사의 기록을 복원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님이 신미 대사에 관한 자료 수집이 계속될수록 풀리지 않은 숙제가 남아 있었다. 당시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던 조선 초기에 어떻게 신미 스님이 집현전에 들어갔으며 한글 창제에 참여할 수 있었는가가 그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복천암을 찾은 영산 김씨의 한 후손으로부터 신미 대사와 관련된 족보와 대사의 친동생 김수온이 썼다는 『복천보장』을 전달받고 스님은 이 같은 의문을 하나씩 풀어갔다.
“신미 대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 스님이 어떤 인물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산 김 씨의 족보에 신미 대사는 태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귀족가문 출신이며 범자에 능통한 분이었다는 기록을 보고 신미 대사에 가졌던 의문을 하나씩 밝혀나갔습니다.”
스님은 『복천보장』과 영산 김 씨의 족보를 통해 신미 대사는 한학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범서 장경에도 능통한 학승으로 집현전에 초빙돼 한글 창제에 임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스님은 또 한글의 모음과 자음이 범어 글자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은 당시 범어에 가장 능통했던 신미 대사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특히 스님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이후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능엄경』, 『원각경』등 총 28종의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불교에 대한 깊은 식견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한글 창제의 배경에 신미 대사가 제외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또 이 같은 한글 창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신미 대사가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당시 숭유억불이라는 강력한 통치이념을 추진했던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스님은 “실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신미 대사에게 ‘선교도총섭밀전정법지비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라는 내리자 수많은 유생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는 이후 문종 대까지 계속된다”며 “이런 이유로 한글창제를 주도했던 신미 대사가 역사적으로 가려지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제는 신미 대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때”라며 “왜곡된 신미 대사에 대한 기록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한글 창제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은=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의문투성이 한글기원…신미 스님이 열쇠 성현-이수광-이능화의 梵字 기원설과 부합
□ 의문투성이 한글 기원 --- 신미대사가 열쇠
<사진설명>훈민정음 보급의 일등공신 신미 대사는 범자(梵字)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했다.(좌) 그러나 유학자들의 질시로 그가 번역한 경전마저 나중에는 삭제되는 비운을 맞는다. 초판본(中). 초판본에 들어있던 신미 대사 법호가 재판본에는 빠져있다.
지난 2001년 12월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발표한 "훈민정음 각필부호 유래설"은 신미대사가 한글창제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각필’은 고대 문헌에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한자 옆에 점과 선, 또는 글자를 새겨 넣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는 양식으로 이 교수가 고려시대의 불교경전을 조사해본 결과 각필 중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과 무려 17개가 일치하고, 자음과 모음의 체계까지도 대단히 유사함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러한 학설은 세종대왕이 수양대군 등 아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불교경전에 정통한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토록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사료를 통해 밝히고 있듯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대왕이 한글이 창제되기 4년 전부터는 정사를 돌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고, 이로 인해 가장 중요한 일과의 하나인 경연(經筵)조차 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신미대사는 당시의 대표적인 학승으로 범어를 비롯한 인도어와 티베트에도 정통했으며, 불교경전에도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신미대사가 세조 2년(1456) 범어계통의 인도 문자와 티베트어로 쓴 친필 진언과 부적류들을 분석한 허일범 진각대 교수는 "상당히 많은 분량임에도 오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한글창제와 관련해 수백년 동안 ‘범자(梵字) 기원설’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조선전기 학자인 성현(1439~1504)은 "훈민정음은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으며, 이수광(1563~1628)도 "우리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 모양을 본떴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주장들은 미국인 학자 헐버트(1863~1949) 등 외국인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도에서 범어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봉태 목사도 지난 2000년 말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을 통해 한글의 기원이 범어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학설들 또한 여전히 많은 연구와 검증의 절차를 남겨 놓고 있음에도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적극 참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범자기원설은 한글창제 당사자들이 불교경전 및 그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고 있었음을 의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자연스럽게 당시 왕과의 교분이 깊고 언해본 간행을 비롯해 경전언어에 깊은 조예가 있는 신미대사를 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실록에서는 왜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일까.
동국대 황인규 박사는 "당시 억불숭유의 정치적 상황에서 승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더욱 거셌을 것"이라며 "이는 세종대왕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자 대의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교의 이데올로기만을 숭상했던 조선시대가 초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난 94년 작고한 이숭녕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미대사만치 유명한 고승이 후세에 남긴 법어나 시, 글 한편 없이 너무나 적막한 생애를 스스로 걸어갔다"며 "학덕이 높고 국어학사상 특기할 인물이었지만 사회의 냉랭함에서 쓸쓸히 입적한 가여운 인재"라고 애석해했다.
지난 550여 년간 이념의 벽으로 인해 스스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고승 혜각존자 신미스님. 이제 그의 위상과 업적을 올곧게 복원하고 선양해야 하는 것은 이제 후학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한글 창시 자는 신미선사
탄압,배척을 받았던 시대의 불교역사와,인물에
관한 사실들은 너무나 왜곡,삭제가 많음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특히, 불교의 임진왜란 역사는 철저하게 왜곡 삭제되어 있어
민족 정기에 크나큰 치명타 까지 주고 있어 자못 심각해 짐은
한사람의 염려는 아니리라 여겨집니다.
역사 왜곡 삭제는 문화재를 파괴하는 행위나 다름없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 땅의 사이비
지식인들 하루빨리 각성 하시기를 바라면서,,,,,,,.@
한글 창시자 신미선사
신미선사는 충청북도 영동에 영산 김씨 가문에서 부 친 김훈과 모친 여흥 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 입산 전에 부친께서 진사 벼슬에 등과 한 후 태종때에 영의정 까지 지낸 귀문가문 출신이기에 속가에서 사서삼경을 모두 설렵하고 출가하여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범서로된 장경이 중국에서 들어와 여러 고승들에 의하여 번역 되었으나 마음에 차지않아 범서로 된 원전을 보기 위해 범어(梵語) 공부를 하였다.
조선 제 4대 세종대왕은 중국의 한문 글이 너무어려워 백성들이 문맹인이 많아 배우기 쉬운 우리글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우리글을 만들 결심을 하자 전국을 총망라하여 숨은인재를 발굴할때 ,충청북도 속리산 복천사에 주석하고 있는 신미선사가 세종대왕의 부름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게 되었다.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논의 한 끝에 신미선사는 모음,자음 소리글을 범서에서 착안하여 한글을 마 무리 짓고 시험할때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인하여 (법화경,지장경,금강경,반야심경) 등을 토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시험을 끝내고 우리글이 완성 되었다고 보고 하니 임금은 기뻐하여 1446년 9월 상달에 우리글을 훈민정음이라 공포하고 우리글이 만들어 졌으니 우리글로 노래도 한번 지어보라하여 월인천강지곡과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그후 세종대왕은 신미선사가 주석하고 있는 속리산 복천사에 아미타불과 좌우보처 관음양대보살을 목각조성 시주하시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시호를 ''선교도총섭밀전정법지비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라'' 지어문종에게 위임하여 문종이 부왕을 대신하여 신미선사께 사호하였다.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세상에 공포한후 집현전에 같이 참석하였던 성삼문,정인지,같은 유생들이 말하기를 한글에 대하여 신미대사의 공은 인정을 하되 발기를 세종대왕이 하셨으니 그 공을 세종대왕에게 돌리자 하여, 심미선사가 쾌히승낙하니 그후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지은 것으로 되었고 ,모든문헌등에 신미선사가 집현전에 참석함 까지도 밝히지않고 공은 왕께로 돌리기로 하였기에 그기에 대 하여는 모든 문헌에도 신미대사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으나 유일하게 영산김씨 족보엔 세종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 하였다 는 기록이 되어있다.
유생들은 신미선사가 승려의 신분으로
한글창시를 주도한데 대하여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다가 세종이 서거한 후 한글에 대하여 과소 평가 하기 시작하여 ,언문이니 부녀자들이 뒷방 에 앉아서 친정에 편지나 써서 보내는 글이니 통 통시글이니 하며 이것이 무슨 글인가 장부들이 배울 글이 못 된다고 비양 거렷다.
그러나 신미선사는 세종대왕의 뜻에따라 누구든지 배우기 쉽게 만든것 뿐이기에 유생들의 그러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았다.아니 불교를 탄압배척한 유생들의 악랄함에 그 정도의 비웃음은 가벼운 봄 바람과 같은 것이니까,,,,,.
유생들은 유서에만 능했고 ,신미선사는 불경,유서 범서 등 모두에 능하여 범서에서 착안한 한글 논의에 대하여 유생들은 일체 반론도 한번 못했고, 시종일관 신미선사의 뜻한바대로 마무리 되었다.
집현전에서 4년간이나 학자들과 머물러 있었기에 학자들을 보살피는 한글도감은 수양대군이 맡았다. 수양대군은 오래도록 학자들을 보살피면서 그중에서 신미선사를 가장 존경하였다.한글이 신미선사의 주도하에 이루워졌고 덕이높고 지혜가 뛰어나고 젊잖고 용모도 거룩하기 때문이였다.
한글창시를 마치고 집현전에서 속리산 복천사로 돌아오고 난후 세월은 흘러 세종이 문종에게 전위하고 문종은 병약하여 일찍 돌아가시자 12세되는 어린단종이 즉위를 하니 수양대군이 섭정하게 되었다.
섭정한지 얼마되지않아 수양대군을 따르는 간신들이 어린왕을 가지고 형식만 취할것이 아니라 대군께서 직접 정사를 맡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수차레 간청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계속집권할것을 강요하니 하는수없이 혁명을 일으켜 단종을 영월로 귀양보내어 죽이고 수많은 학자와 대신들이 희생 당했다.
어느날 밤 꿈에 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서''네가 아무리 용상이 탐이 나기로 서니 어린 카를 살해까지 할수 있느냐! 이 더러운놈아!''하고 얼굴에다 침을 뺕은 꿈을 꾸고 깨어보니 온몸에 부스럼이 생기엇다.
그 당시에는 혁명중이라 죽느냐 사는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에 병에 대한 관심이 없다가 어느 정도 평정이 되니 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약도 쓰고 치료를 하엿으나 백약이 무효 인지라 약을 쓰게 되면 병세가 점점 더 악화 되어 마음이 불안하고 흔들리기 시작 하였다.
용상을 보니 쳐다 보기도 싫고 그렇다고 산에들어가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으나 그러할 수도 없고 진퇴 양난 이였다.그리하여 곰곰히 생각하니 지난 날 신미선사가 생각나서 신미선사를 찾아 뵙기로 하고 사전 통보를 한뒤에 4,5백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청주에 와서 2일간을 쉬고 보은 말티재 밑 대궐터 지금 장재리에 하룻밤을 자고 세조 10년 갑신년 天順 8 年2월 28일 신해일에 말티재를 넘어 큰 소나무 밑을 지나는데, 연이 소나무 가에 걸릴것 같으므로 세조대와이 보고 연걸린다 고 하니 연을 낮추기 전에 소나무 가지가 저절로 번쩍들렷다.그리하여 연이 상하지 아니했다.
세조대왕은 하도 이상하여 연을 멈추고 그 사실을 이야기 하니 한 신하가 임금을 알아 보는 소나무 이니니 벼슬을 주자고 하자 무슨 벼슬을 주면 좋겠는가 하자 정이품 벼슬을 주는것이 좋을 듯하니그 자리에서 정이품 벼슬을 주었다.
정오에 복천사에 당도하니 당대의 고승이신 신미선사와 수미,학조,학렬.등 많은 스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법당으로 안내 참배케하고 3일간 기도와 법문을 듣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안정을 얻은 세조대왕은 환궁할때에 신미선사는 청을 한가지 드렷다. 세조가 무엇이냐고 묻자 신미선사가 강원도 오대산에 월정사가 있고 그위에 상원사가 있으며 상원사 위에 중대가 있어 우리나라 오대 적멸보궁 중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궁이 있습니다.(부처님 머리부분에서 나온 사리) 그러나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신도들도 가는 이가 드물어 건물이 붕괴 직전 입니다.
대왕께서복원을 해주시면 그공이 헛되지않을 것입니다.하니 세조께서 즉시 나라에서 하지요,
이곳에서 보궁 복원에 감독할 분을 보내주세요. 하여 그자리에서 학열스님을 보궁 감독으로 임명하여 보내었다.(계속)
“한글창제 주역은 신미스님”
한글날 특집‘훈민정음과 불교’ 梵字-티베트어에 능통…불경 간행 주도 세종이‘존자’칭호…‘집현전 참여’ 기록도
억불 정책으로 공헌가려져…재조명 있어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손꼽히는 한글.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분명하지만 한글의 기원이나 문자를 만드는데 기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의문점이 남아있다.
본지가 한글날 558돌을 기념한 특별취재에 따르면 훈민정음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혜각존자 신미(信眉, 1405?~1480?)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을 뿐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특히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2300여 쪽은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를 훈민정음으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신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도 크게 기여했을 거라는 주장이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먼저 세종대왕과의 관계다. 비록 신미대사가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세종이 죽기 5년 전인 세종 28년(1446)이지만 그 관계가 대단히 친밀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죽기 몇 달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닌 윗사람의 예로 신미대사를 대하고 있으며, 당시 신미대사가 머무르던 속리산 복천암 불사를 지원하고, 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존자’라는 명칭이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고, 더구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 영산 김씨 족보에 ‘수성(신미대사)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과 신미대사의 친동생이자 독실한 불자였던 김수온이 한글창제 이전에 이미 중앙에 진출한 상태였다는 점도 이와 관련된다는 가설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는 불교의 신성 숫자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은 새로운 문자의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김광해 서울대 교수) “방대한 양의 불경이 한글이 창제 된지 얼마 안 되는 기간에 한문본이 편찬되고 번역까지 됐다. 이는 한글 반포 이전부터 불경에 정통하고 있었으며, 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운용법과 표기법에 통달하고 있던 인사들이 있어서 이 사업을 추진했다는 증거다.”(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 같은 기존 학자들의 주장도 그 당시 대표적인 학승이었던 신미대사를 상정할 경우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특히 얼마 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한글 기원은 고려불경의 각필부호”라는 학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견해가 많다.
지난 30년째 신미대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오고 있는 복천암 주지 월성 스님은 “억불숭유의 시대로 말미암아 신미대사의 공헌은 철저히 가려지고 삭제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라도 그 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신미대사는? 신미대사는 부친이 태종 때 정승까지 지낸 양반 가문인 까닭에 입산 전 유학 경전을 섭렵할 수 있었으며 출가 후에는 대장경에 심취했다. 그러나 한문 경전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어와 티베트어를 직접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세종, 문종, 세조 때에는 경전번역 등 불사를 이끌었으며 예종이 불교탄압하려 할 때는 언문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2004-09-29/773호>
한글어지 108자 … 월인석보도 108쪽
한글창제와 숫자의 비밀
어느 종교건 특정 숫자를 신성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불교는 유독 그런 성향이 강하다. 심지어 0에서 무한대에 이르기까지 숫자를 불교적으로 해석한 『대명법수』라는 책이 나올 정도다. 이런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표면적인 목적 외에도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은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대 국문과 김광해 교수의 ‘훈민정음과 108’론이 바로 그것이다.
김 교수는 그동안 『한글창제와 불교신앙』(불교문화연구 제3집) 등 일련의 논문을 통해 창제 과정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불교의 대표적인 신성수 ‘108’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의 의도적인 조절임을 주장했다.
김 교수가 먼저 주목한 것은 ‘나랏말싸미듕귁에달아…’로 시작하는 한글 어지(御旨)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되는 한문 어지다. 한글은 모두 108자고 한문 어지는 108의 꼭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 교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더부러’ 등을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등 적어도 4글자 이상이 탈락됐다는 것이다. 또 한문 어지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而己矣’를 사용하지 않고 ‘耳’를 사용하고 있는 등 글자의 수를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담겨 있음도 함께 지적했다.
훈민정음 창제과정에 나타나는 숫자의 비밀은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 교수는 108글자의 세종 어지가 실린 『월인석보』 제1권의 장수(張數)도 108쪽임도 밝히고 있다. 특히 다른 권들과는 달리 일련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 별도의 권으로 만들면서까지 쪽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 또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의 경우 불교적인 우주관을 상징이라도 하듯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이들 경우 외에 다양한 사례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훈민정음의 창제 당사자들이 이렇듯 일련의 주도면밀한 노력을 은밀히 기울인 것은 불교 보급의 목적이 담겨 있다”며 “그러한 종교적 염원이 숫자를 조절하는 은밀한 방법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맺고 있다.
실제 세종에서 연산군 때까지 발간된 훈민정음 문헌의 65%이상이 불교관련 문헌이며, 유교 문헌은 단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
“집현전 학자들 한글창제 무관”
훈민정음에 대한 오해
한글창제는 지금까지 신숙주와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만들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이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없는 쪽으로 굳혀지고 있다.
한글창제 이후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이 집현전 학자들이며, 당시 집현전 부제학으로 실무담당을 맡고 있던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조차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상소를 올리는 것 등의 정황으로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이 돕기는커녕 몰랐던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1443년 12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선언할 때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비밀리에 추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성삼문은 한글이 창제될 무렵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신숙주는 창제 2년 전에 들어왔지만 그 다음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록에도 전혀 그런 말이 없다. 잘못된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세종께서 이런 사실을 알면 통탄할 것”이라는 여증동 경상대 국문과 명예교수의 말처럼 집현전 학자 창제설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따라서 이들 집현전의 소장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종의 명을 받들어 훈민정음의 보급에 앞장섰을 뿐이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
“집권 초 억불…중반이후 호불로 전향”
세종대왕과 불교
태종에 이어 1418년 즉위한 세종은 강력한 유교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즉위 초기 배불(排佛)에 앞장섰다. 불교를 약화시키기 위해 7개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는가 하면 “불교를 점진적으로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공적으로 유교를 내세웠지만 사적인 부분에서는 초기부터 불교에 대한 애정이 나타난다. 집권 초 사찰의 건립 보수에 앞장섰는가 하면 왕실불교를 일으키는데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
세종은 또 정권 중후반기인 즉위 20년 무렵 친불교적인 성향을 본격화하면서 조정 대신들과 불교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집권말기에 이르러서는 왕실에 내불당을 건립(즉위 30년)하는 등 적극적인 호불(好佛)정책을 추진했으며 반발하는 대신들에 대해 오히려 강력히 제지하기도 했다.
실제 세종 즉위 28년 3월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대군들이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편찬하겠다고 하자 이를 공식적으로 허락한다.
그러나 당시 우부승지 이상철, 좌승지 황수신 등이 중심이 된 조정 대신들과 전국의 많은 유생들은 세종대왕의 불교 신봉을 비판하는 상소를 잇따라 제기했다. 그러나 세종은 “경들은 고금의 사리에 통달해 불교를 배척하니 가히 현신(賢臣)이라 이를 만하다. 나는 의리(義理)를 몰라 불법을 믿고 있으니 가히 무식한 임금일 것이다.…이제 그대들의 뜻을 훤히 알겠으니 번거롭게 다시 청하지 말라.”며 대신들을 비꼬기도 했다.
세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가) 공자의 도(道)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주자가 잘못됐다고 했으나 이는 석가모니를 잘 몰라서이며, 천당지옥·사생인과는 명확한 이치가 있으며 결코 허탄(虛誕)한 것이 아니다”라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권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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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방송일: 20010915
상원사의 밤 6 (흘리고-)
# 법당 문이 열리고 6 상원사,
그곳엔 500년전부터 내려오는 불상 하나가 있다.
# 문수동자상 12 양갈래로 머리를 묶은 천진한 얼굴의 어린 동자상-
그것은 국내 유일의 문수동자상이다.
그런데 그 동자상의 뱃 속에서 이상한 유물이
한 점 발견됐다
# 피고름 속적삼 F.I 12 피고름이 묻은 비단 속적삼-
500년간 문수동자상이 간직해온 비밀,
피묻은 적삼의 사연은 무엇일까?
강원도 오대산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상원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이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24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절이죠.
그리고 육이오 전쟁 당시,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고 불태우려 하자 한암스님이라는 분이 법당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절을 지켰다는 그런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절에서 지난 84년 특이한 유물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그것도 한 동자상의 뱃속에서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속옷 대신 입었던 속적삼인데요,
목깃 부분은 떨어져 나갔고 군데군데 이상한 얼룩까지 남아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 옷을 상원사 불상에 넣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또 이 얼룩은 무엇일까요? 좀이나 곰팡이가 핀 걸까요?
이 적삼은 발견된 이후 수많은 궁금증들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속적삼의 비밀, 오늘 그 의문들을 하나하나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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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비단 적삼의 얼룩은 피고름이다.
# 오대산 전경 10 서른두개의 산봉우리와 서른한개의 계곡을
품고 있는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 상원사로 팬 10 그 정상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상원사가 있다.
# 상원사 외경 18 상원사는 신라시대 705년,
진여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건됐다.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주존불로 모시는
오래된 절이다.
# 문열리면 문수보살상과 동자상 12 (문열리면-)
만가지 다른 형상으로 현세에 나타난다는 문수보살-
특히 상원사에는 어린 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문수동자상이 있다.
# 문수동자상 T.S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소년의 모습이 완연합니다.
# 문수동자상 SK 5 동사상의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기법은
15세기에 처음 등장하는 양식이다.
# 문명대교수인터뷰 =15세기 16세기 통틀어서 조선전기 통틀어 이상이 가장 대표적인 그런 동상이기
때문에 이 상을 국보로 정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상...
# 문밖에서 바라본 문수동자상 9 그런데 지난 84년,
문수동자상을 다시 도금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복장유물이 발견됐다.
# 그래픽 / 복장과정 27 복장유물이란 불상의 내부 빈 공간에 넣는
사리, 묘법연화경 각종 유물들을 말한다.
오색실, 의복 사리, 불경과 불서,
다라니, 발원문 오색실이나 오곡, 의복, 다라니와 만다라,
그리고 불상을 조성하면서 기원한 내용인
발원문이 복장된다.
# 월정사 스케치 9 문수동자상에서는 어떤 복장유물들이 발견됐을까?
상원사의 본사, 월정사를 찾았다.
# 들어가는 PD 6 동자상에서 나온 유물들은 그 곳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전시장 팬 7 총 스물석점-
대부분은 다른 불상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일반적인 것들이다.
# 복장통, 수정구슬 4 작은 유물들을 보관하는 원통과
수정구슬,
# 사리 3 복장유물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사리-
# 불서들 14 그리고 고려말에 간행된 목판본 화엄경을 비롯한
각종 불경과 불서들이 십여권에 달한다.
# 의복 두점 풀샷 4 특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은 유물은
두점의 의복이었다.
# 다라니경 저고리 22 비단으로 만들어진 이 저고리는
바깥에 입는 겉적삼이다.
저고리의 넓은 소매와 등면에
다라니경이 찍혀있다.
이 다라니경은 외부의 여러 가지 재난으로부터
지켜달라는 의미를 지닌다.
# 피묻은 저고리 9 또 하나의 비단 저고리-
사람의 몸과 직접 닿는 속적삼이다.
그런데 이 옷에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 돋보기로 살피는 14 속적삼 전체에 좀먹은 자국이 수없이 남아있다.
사람의 분비물이 남았을 때 좀은 더욱 심해진다.
특히 찌든 때가 남았던 쉬운 목부분은 아예 떨어져
나갔다. 이것은 누군가 오랫동안 입었다는 증거다.
# 목부분 피얼룩 9 더욱 이상한 것은 옷에 남아있는 얼룩이다.
속적삼 목깃 부분에 검은 반점들이 보인다.
# 배부분 4 여러개의 반점들이 뭉쳐져 있는 형태의 얼룩-
# 전체 소매끝으로 팬 14 그것은 옆구리와 목 부분에 집중적으로 남아있고
저고리의 소매끝 부분에도
똑같은 형태의 얼룩이 보인다.
이것은 무엇일까?
# 적삼 살피는 권영숙교수 20 얼룩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부산대 의류학과 권영숙교수와
적삼을 자세히 살펴봤다.
권교수는 각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복식유물의
권위자다.
# 피얼룩 부분 12 고분이나 생활유적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복식유물들을 보존처리해온 권교수-
다른 복식유물에서도 이런 얼룩이 발견된다고 한다.
# 권영숙교수 인터뷰 =제가 복식을 다뤄보면 혈흔이 나오거든요, 혈흔흔적과 이 흔적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것은 분석을 해야
# 발견당시 얼룩 부분 풀샷팬 12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얼룩의 정체는 혈흔이다.
7년전, 속적삼이 복장유물로 발견됐을 당시의
상태를 보자
# 소매끝 줌인 11 이 얼룩이 혈흔이라면
이것은 속적삼이 몸에 있는 어떤 상처에
반복적으로 닿아 생긴 흔적일 것이다.
# 동그라미로 전체 팬 18 발견당시에는 검붉은 반점같은 혈흔이
현재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혈흔의 작은 단위 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중심색에 흰색을 띄는 다른 성질의 얼룩이
섞여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권영숙교수 인터뷰 =피의 경우 단일한 색깔로 되는데 피고름이라 그런지 희끗희끗한 부분 사이에 붉은
기운이 있었거든요. 피고름 부분과 피부분의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저는 피고름이
맞나보다 생각했었거든요, 그냥 혈흔같으면 선명하게 같은 색깔로 될텐데... 이것은
희끗희끗한 부분 안에 얼룩이 있었기 때문에 피와 고름이 엉겨있던 형상이 아닌가...
# 피묻은 적삼 12 불상에 복장되기 전
누군가 이미 오랫동안 입었던 옷,
그 속적삼의 검은 얼룩들은
몸의 상처에서 반복되어 묻은 피고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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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2
적삼에 묻어있던 이 얼룩들이 피고름이었군요
그러니까 이 적삼의 목깃, 소매끝, 그리고 옆구리 부분에는 검은 반점같은 이상한 얼룩들이 밀집해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피고름이라는 겁니다.
피고름이 묻은 속적삼을 복장유물로 넣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적삼과 함께 발견된 다른 유물들은 모두 불교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가령 사리는 불상에 부처가 살아있다는 의미에서 넣는 것이고, 다라니경 같은 경우는
번개나 폭풍, 화재 같은 것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해 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유독 이 피고름 묻은 속적삼만 불교와 전혀 상관없는, 너무나도 세속적인 유물입니다.
누군가 오랫동안 입었던 옷, 그것도 피고름이 묻은 속적삼- 과연 누구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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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피묻은 적삼은 누구의 옷인가?
# 속적삼 치수재는 풀샷 품은 66센티...
# 저고리 길이 재는 6 적삼의 주인공을 추적하기 위해
먼저 옷의 크기를 쟀다.
# 화장 재는 9 특히 목에서 소매 끝까지의 길이인 화장은
옷의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단서다.
# 93센티 3 화장은 93센티미터였다.
# 권교수 =대게 남자가 손이 길잖아요. 화장길이가 여자평균이 70정도 됩니다. 근데 이 옷은
93이잖아요. 그러니까 화장에서 우선 팔이 기니까 속옷인데도... 남자옷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생각이 됩니다.
# 사진 살피는 두사람 6 옷의 주인공은 남자-
그럼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을까?
# 백초회장저고리와 상원사속적삼 7 조선 전기 사대부의 속적삼으로 밝혀진
백초회장 저고리와 비교해봤다.
# 자료 손짓하며 살피는 6 같은 시기, 같은 용도의 옷과 직물 상태를
비교하면 신분의 차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 백초회장와 상원사적삼 미세촬영 7 직물 상태를 보다 자세히 보기 위해
미세촬영을 했다.
# 두 개 비교 8 백초회장저고리와 상원사 속적삼을
똑같은 정도로 확대해 촬영한 화면이다.
# 올의 수, 밀도 비교 12 날실과 씨실 모두
상원사 속적삼이 5배 정도 가늘며,
천이 얼마나 섬세하게 짜여졌는지를 알 수 있는
밀도도 상원사의 것이 두배 정도 높다.
# 권영숙교수 =명주가 대표적인데... 섬세함의 정도가 얼마나 밀도가 치밀하고 가볍고 부드럽게
짜졌느냐에 따라 신분이 결정이 되기 때문에... 일반인의 경우에 이렇게 고운 비단은
못 입죠
# 속적삼 바느질 상태 12 상원사 속적삼은 사대부 신분으로서는
감히 입지 못하는 옷이다.
속적삼의 바느질 상태 또한 매우 섬세하다.
# 복원 도안 10 똑같은 방법으로 바느질을 해보기 위해
도안을 만들었다.
바늘땀의 길이가 1미리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 교수 바느질하는 9 몇십년 동안 전통의복을 다뤄온 권교수지만
상원사 속적삼의 바느질을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 권영숙교수 =정말 잘 하시는 궁중 바느질이 아니고서는 안나올 정도로 섬세한 바느질입니다.
바느질이 정교하지 않으면 외형이 안나오기 때문에 정교한 점, 다른 어떤 저고리보다
도 정교하다는 점, 제가 보기엔 궁중의 옷이 아닌가
# 동자상 유물 속적삼 14 옷감의 상태와 바느질 솜씨로 볼 때,
상원사에서 발견된 속적삼의 주인공은
왕실의 사람인 것으로 추정된다.
# 자료 살피는 두사람 7 선조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
그의 속적삼이 해인사에서 발견된 바 있다.
# 광해군 옷보며 =이게 광해군 것이란 말이죠.../ 바느질이나 정교함이 거의 같았다
# 광해군 적삼 7 광해군의 옷과 바느질의 정교함이 같다면
상원사 속적삼의 주인공도 왕일 가능성이 높다.
# 중수발원문 12 (꺼내는 것 보다가-)
속적삼과 함께 문수동자상에 복장됐던 발원문-
그곳에서 속적삼 주인공에 대한 단서를 찾아봤다.
# 발원문 스케치 7 발원문은 고급스러운 푸른 비단에 붉은 글씨로
쓰여졌다.
# 의숙공주 정현조 글씨 16 그 첫머리에 발원문을 작성한 이의 이름이 보인다.
정현조와 의숙공주, 그들은 누구일까?
# 선원록 3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 선원록-
# 족보 내용 12 그곳에서 두사람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의숙공주는 조선 7대왕 세조의 딸이며
정현조는 의숙공주의 남편으로 세조의 사위다.
# 내용스케치 12 정현조와 의숙공주는 주상전하, 왕비전하,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불상을 조성한다고 발원문에 밝히고 있다.
# 연도 6 발원문이 작성된 해는 1466년, 세조 12년이다.
# 실록, 글씨 나타나기까지 6 그해의 세조실록에서 상원사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봤다.
# 글씨 스틸 8 발원문과 함께 속적삼이 복장됐을 세조12년,
그해 세조가 상원사에 있었다.
# 박물관 팬 11 그렇다면 속적삼의 주인공은 세조일까?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어첩 세조의 어첩을 살펴봤다.
# 펼쳐놓은 모습 19 상원사 중창이 결정됐던 세조10년,
신미대사와 세조가 주고받은 글이다.
그 첫장에는 불교를 믿는 조선국왕 이유라는
세조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리고 그 아래 세조의 친필 사인과 직인이 보인다.
# 학예원 어첩 펼치며 "발원문이 한문으로 나오고.. 필사본으로서의 한글 문서와"
# 펼쳐서 한글 보여주고 8 신미대사는 상원사를 중창하는 이유가
세조의 만수무강을 위해서라고 적고 있다.
# 출어의약 가리키며 "옷을 줬다는 얘기 아닌가... 출어의약"
# 글씨 스틸 8 그리고 신미는 뒤이어 세조가 상원사에
어의 몇점을 하사했다고 한다.
# 상원사 풍경 14 1464년 신미가 세조를 위해 상원사를 중창하기로
결정했을 때, 세조는 어첩과 함께 자신의 옷을
상원사에 보냈던 것이다.
# 최복규교수 =거기 보면 신미의 내용 속에 세조가 어의를 내리시어 하는게 나오 거든요. 그런 것은
분명히 다른 것도 아니고 세조가 친히 입었던 옷을 내렸다하는 것이 분명하거든요.
그러고 1466년 세조 12년에 상원사가 발원이 되어 만들어져요. 바로 그 당시 문수
동자상 복장유물로 집어 넣은거거든요. 그런걸로 봐서는 틀림없는 세조의 옷이다라고
밝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 피묻은 적삼 12 피고름으로 얼룩진 비단 속적삼-
그것은 조선 7대왕 세조의 어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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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3
이것이 세조의 어의였군요.,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신라시대 때 창건됐던 상원사를 당시 주지이던 신미대사가 세조의 만수무강을 위해 상원사를 중창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때가 1464년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세조가 중창에 보탬이 되고자 시주를 하며,
자신의 글과 신미대사의 글이 함께 담긴 어첩을 상원사에 보냅니다.
그 때 자신의 피고름 묻은 속적삼을 함께 보낸 것이죠.
그리고 2년후, 마침내 상원사 중창이 끝났습니다. 세조가 상원사를 방문한 것도 그 때였죠.
새로 조성된 문수동자상이 법당에 모셔지면서 각종 유물들이 그 속에 복장됐는데요,
의숙공주와 정현조가 쓴 발원문과 함께 세조의 피묻은 적삼이 동자상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피고름 얼룩이 남아있는 속적삼의 주인공이 세조란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세조의 속적삼에 왜 피고름이 묻어 있냐는 겁니다.
속적삼에 묻어있는 피고름의 위치를 기억해 보시죠., 목과 손목, 옆구리 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조는 그곳에 어떤 상처가 집중적으로 나있었고
반복적으로 계속 피고름이 흐르고 있었다는 뜻은 아닐까요?
도대체 어떤 병을 앓고 있었기에 세조의 몸에서 피고름이 났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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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 세조는 왜 피묻은 적삼을 동자상에 넣었는가?
# 주지와 찾아가는 =여기가 관대걸이 푯말입니다. 기념비랄까,
6 상원사로 오르는 길목에 작은 석조물 하나가 있다
# 관대걸이 8 관대걸이- 세조가 상원사에 왔을 때
이곳에 의관을 걸어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상원사주지 =입고있던 의관을 이곳에 걸어놓고 목욕을 했다해서 이곳을 관대걸이라고...
의관을 걸어났다해서 지금도 관대걸이라 그러고....
# 상원사주지와 목욕장소 찾아가며 8 (흘리고-)
# 계곡 물 흐르고 15 세조가 의관을 관대걸이에 벗어놓고
이 계곡에서 목욕을 했다는 것이다.
마침 그 곳에 한 사람이 들어가 목욕하기 좋은
장소가 있었다. 여기였을까?
세조는 목욕중 문수동자를 만났다고 한다.
# 상원사주지 =시중을 물리치고 혼자서 목욕을 했다 그러거든요. 그러는데 사미승이 지나가는데
등이나 밀어달라고.. 등을 밀고나니가 시원하더라는 거예요..
세조가 사미승에게 임금님 등을 밀었다, 등창이 있다는 이야기를 할 것 같으면
벌받을 수도 있고 민심도 안좋을 수 있으니까 어디가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라
# CD-롬으로 기록 찾는 11 전해지는 얘기대로 세조에게는 등창이 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 CD롬으로 세조가 생전에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지 검색해봤다.
# 실록 검색내용 12 세조의 병환에 대해 언급된 기록은 마흔건 이상-
하지만 병명이나 증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 현호색 기록 9 그런데 세조 12년 10월에 세조가 현호색을 가미한
칠기탕을 복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 경동시장 5 현호색이란 어떤 약재일까?
# 현호색 꺼내고 "현호색 이렇게 생겼습니다."
# 현호색 5 한약재로 쓰이는 것은 현호색 식물의 땅속 줄기
부분이다
# 약재상과장 =심장에 통증을 느끼거나 기의 흐름이 원할하지 않을 때 쓰는 걸로 알고 있다.
# 칠기와 현호색 T.S 13 칠기탕에 사용되는 약재는 인삼, 계피, 반하,
그리고 감초와 생강이다.
세조는 여기에 현호색을 가미해 복용했다.
# 동의대 찾아가는 14 현호색을 칠기탕과 함께 먹는 것은
어떤 증세에 사용되는 처방일까?
동의대 한의학과 김훈 교수는 특이하게도
조선시대 왕들의 질병에 대해 연구해오고 있다.
# 김훈교수 =칠기탕이라고 하는 것은 칠기라는 건 사람의 일곱가지 감정 상태... 칠기탕은 감정적
인 장애로 인체의 기가 뭉쳐질 때... 그래서 세조는 많은 정신적 중압감이나 스트레스
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 동의보감 6 그런데 동의보감은 칠기병과 같이 화가 왕성한
병엔 창이 생긴다고 전한다.
# 컴퓨터 앞에서 20 창은 일종의 피부병이다.
실록에 세조가 피부병을 앓았다는 기록은 없다.
# "풍습병" 기사내용 하지만 김훈교수는 세조가 자신의 병을
풍습병이라고 말한 기록에 주목했다. 풍습병이란
풍과 습에 의해 생긴 질병, 즉 관절염, 두통, 요통,
피부병을 통칭하는 병명이다.
# 김훈교수 =세조는 풍습병을 이야기할 때 온천욕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는데 조선시대
다양한 치료방법을 쓰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온천욕, 온천욕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이 사용하고 있던 방법... 세조가 온천욕과 관련지어 이야기
하는 풍습병은 혹시 피부병을 의미하는 것인지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 온양트래킹 5 세조는 풍습병에 대해 말하기 한달전
온양 온천을 다녀온 바 있다.
# 신정비 풀샷 9 수양대군 시절부터 세조가 세차례나 방문했다는
온양- 이 곳에는 세조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 비문 9 이 신정비도 세조가 발견했다는 찬 샘물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다.
세조가 온양을 자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 문화원장 =철분 성분이 많다. 알카리 성분이 많아 피부병, 관절염에 효험이 많다. 세조도
피부병 때문에 자주 온 것 같다.
# 세조 속적삼 12 세조의 속적삼에 남아있는 피고름 얼룩은
피부병 때문에 생긴 흔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떤 피부병이었길래,
피고름이 계속 흘렀던 것일까?
# 함익병선생과 컴퓨터보는 8 피부과 전문의와 함께 세조의 피부병 종류를
추정해봤다.
# 피부병 화면 12 조선시대 사람들이 앓았을 법한 피부병만도
수십가지에 이른다. 함익병선생은 그 중
괴저성농피증이란 피부병을 지목했다.
# 함익병선생 =저는 세조 임금이 이 병에 앓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연령대 4,50대에 많이 생기는
병입니다. 보시다시피 피부에 큰 괴양이 많이 생기고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면서
완전히 낫지도 않고 금방 죽지도 않고... 대개 이 병은 내과적인 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감염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자가면역질환이라는 병이 생기는건데
자가면역질환을 일으키는데 가장 큰 질환중에 하나가 사회적 스트레스입니다.
# 괴저성농피증 9 세조의 병을 현대의학적으로 추정하면
괴저성농피증이라는 병일 수도 있다.
그 병은 정신적인 압박과 사회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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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4
그렇습니다. 세조는 자신의 지독한 피부병을 없애고자 피고름 묻은 속적삼을 상원사에 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조가 상원사에 내린 어첩입니다. 여기에 보면 상원사를 중창할 때 세조가 하사한 물품들이
자세히 적혀있는데요, 한번 보실까요?
쌀 5백석, 무명포와 정포가 각각 5백필, 무명포라는 것은 면을 말하고 정포라는 것은 품질이 좋은 베를 말합니다.
또 정철이 만오천근, 정철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쇠로 공사할 때 꼭 필요한 물품이죠.
그리고 사찰을 채색할 때 필요한 염료도 하사했습니다.
정확한 수치가 기록되지 않은 채색을 제외하고 나머지 쌀과 천과 철을 모두 면포의 가치로 계산하면
면포 만필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면포 만필이라면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데요,
여길 한번 보시죠, 조선왕조실록 단종대 기록 중 하나입니다.
단종이 세종의 딸, 그러니까 자신의 고모가 되겠군요,
정안옹주에게 거처할 집을 마련하라고 면포 600필을 하사합니다. 옹주라면 당대 최고의 신분이니까 집 또한 최고 수
준이었을 겁니다.그런 집을 면포 600필이면 살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면포 만필이면 몇 채입니까? 당대 최고 수준의 저택을 열일곱채나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던 나라였습니다.
조선은 건국 이후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박탈하고, 전국의 사찰과 승려 수도 대폭 축소시켜 나갔습니다.
심지어 유신들은 승려를 좀벌레보다 못하다고 취급하며 천민처럼 대우했죠.
그런데 세조는 사찰 하나에 최고급 저택 열일곱 채를 살 수 있는 물품을 시주한 것입니다.
태조와 세종처럼 개인적으로 불교를 신봉하는 왕들도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이처럼 드러내놓고
불교를 후원한 왕은 없었습니다. 세조는 왜 불교를 이토록 후원하게 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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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세조는 왜 호불국왕이 되었나?
# 차트래킹 6 강원도 강릉에 세조가 상원사에 하사한
땅이 있었다고 한다.
# 주민과 교수 걸어오며 5 강릉 신석동의 저수지 일대-
# 주민 =섬석천인데 예전에는 중어보라 그랬다. 중들이 세운 보다..
# 중어보까지 팬 12 상원사 승려들이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었다는 중어보-
이곳이 상원사의 옛땅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 저수지 10 그렇다면 세조가 당시 상원사에 하사한 땅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 이규대교수 =기록에 의하면 세조가 산산저수지 일대를 상원사에 하사했다고 기록이 있고 이쪽
지방 유생들의 기록에 의하면 종자를 70석 종부를 이용할 만큼 큰 규모의 토지를
상원사에서 관할했다고 기록이 돼있다. 그러니까 70석의 종자를 이용할 농토였다면
굉장히 큰 규모였다고 말할 수 있다.
# 묘전일대 팬 16 한석의 종자로 2천평의 농사를 지을수 있다고 한다.
종자 70석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라면
14만평에 달하는 땅이다.
# 동네주민 =얘기 때 어떻게서 월정사 토지가 생겼냐 하니 고양이 밥으로 떼나줬다 이런
전설이죠.
# 묘전 풀샷 8 고양이밥으로 떼줬다는 상원사의 땅-
고양이와 상원사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 상원사 풀샷에서 고양이석상 15 상원사 법당 앞- 오랜 세월이 지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마모된
한쌍의 동물 석상이 있다.
# 고양이 TS 15 이것은 바로 고양이 석상이다.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양이 석상-
고양이가 상원사 법당 앞을 지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 월정사주지스님 =법당문을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서 임금 옷을 뒤로 땡기더래
요. 이 고양이 왜그래?하며 발로 차니 법당으로 쏙 들어가 탁자 밑에 쏙 들어가거든
요. ㄱ래 또 들어갈려고하면 또 나와서 밖으로 땡기고... 또 탁자 밑에 들어가고 세 번
을 그랬다가 임금이 무사를 시켜 탁자 밑을 뒤져 보라하니 탁자 밑에 단종 계열의
무사가 세조가 참배를 하면 목을 치라고 칼을 쥐고 서 있더라는게요. 그래서 고양이
덕에 목숨을 구했다는 거예요.
# 고양이에서 법당으로 팬 9 세조는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잘 키워달라며
강릉 저수지 일대의 땅을 상원사에 하사했다는
것이다.
# 고양이 석상 보이는 상원사풀샷 6 이 전설에는 세조가 숭불정책을 펴게 된
배경이 들어있다.
# 최복규교수 =자객이 나타났다는 건 실제 나타난 것은 희박한 것이고, 오히려 세조의 생각에 항상
주변에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어떤 사람이 있거나 적대시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았다는 것을 나타냈고...
# 계유정란 이미지 화면 16 세조는 피의 쿠테타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1453년, 세조는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했다.
역사는 이것을 계유정란이라 부른다.
# 단종 양위 18 2년후, 세조는 마침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조선 제7대왕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피를 부른 왕위찬탈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사육신사건 14 1456년, 세조는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등 여섯명의 대신들을
참살했다. 소위 사육신 사건이었다.
# 세조초상화 13 즉위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왕위를 위협받았던
세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세자시절부터
불교를 믿었던 세조를 더욱 불교에 빠지게 하였다
# 김상현교수 =집권과정 자체가 유교적인 이데올로기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그랬을
때 자기의 그 왕실의 권위라든지 자기의 왕권을 완성시키고 강화할려고 할 때는 오
히려 불교적인 그런 신앙과 이념에서 도움을 얻고자했던 그런 흔적이 보인다. 근데
석보상절을 일찍이 지었다던지 이후에 월인석보를 편찬하는 등 이러한 노력들이 아
마도 당시 자기의 현안, 정치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과 불교의 중흥이 연
결돼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월인석보와 불서들 15 세조는 월인석보 국역판을 손수 간행한 이후,
불교진흥정책의 일환으로 불경을 간행하고
한글로 해석하는 일에 몰두했다
세조 7년에는 아예 불경간행을 전담하는 기구를
만든다.
# 불서들 팬 5 간경도감에서 간행되고 우리말로 해석된 불경만도
수백권에 달한다.
# 서강 교형 기록 16 강력한 숭불정책을 내세운 세조 앞에서는
불교를 비난하는 어떠한 발언도 용서되지 않았다
성균관대사성이었던 서강이라는 사람은
술자리에서 불교를 비하해 처형까지 당했다
# 김상현교수 =조선초기부터 많은 유학자들이 불교를 비판하고 탄압하는데 앞장서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왕들 중에 행여나 불교를 일으킬까봐 크게 염려하고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세조실록을 보면 유학자들도 신하들이 불교를 비판하는 상소가 거의 많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정치적으로 세조가 세력을 크게 잡고 있었던 거 같고 그리고 세조가
확실하게 불교를 신앙함으로해서 신하들도 함부로 반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 상원사 세조어첩 종친 신하 사인 22 상원사에 보내졌던 세조의 어첩-
세조는 왕실종친과 신하들에게
상원사 중창에 시주하라고 명했다.
어첩에는 자신들의 재물을 내놓으며 친필로
일일이 싸인을 남긴 종친과 신하들의 이름이
남아있다.
# 신하들 사인 TS 8 종친이나 신하들 그 누구도
세조의 숭불정책에는 어떠한 반발도 하지 못했다.
# 광덕사 트래킹 6 세조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승려 우대 정책을 펼쳤다.
# 광덕사 외경 3 충청남도 천안의 광덕사-
# 어첩 3 이곳에 세조가 내린 교지가 소장돼 있다.
# 스님과 교지 살피는 "충청도 천안지 광덕사"
# 교지 내용 8 세조는 친필로 광덕사 승려들의 잡역을 감해준다는
교지를 작성했다.
# 어첩 실록 기록 15 광덕사의 승려에게 뿐만 아니라
세조는 전 승려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내렸다
"승려는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왕의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구속하거나 심문할수 없다"는
법률까지 만든 것이다.
# 식우집 26 세조는 왜 이토록 강력한 숭불정책을 펼쳤던
것일까?
세조의 불교관에 큰영향을 미쳤던 김수온의 글이다.
만민의 주인인 군주는 민생을 구제하니
출세의 차이는 있지만 중생을 구제한다는 점에서
왕과 부처가 동일하다고 말한다.
부처와 동일한 권위를 가지는 왕-
# 사찰 외경 10 바로 그것이 불교의 대중화를 통해
세조가 얻고자 했던 점이다.
# 김상현교수 =건국초기부터 유교사회를 표방해 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일반서민들 사이에서는 불교가 온전해 있음을 설정해 볼 수 있음. 그런 상황
에서 세조가 상원사를 찾아 온 과정에서 생기는 많은 설화들. 예를 들면 문수동자가
세조의 등을 밀어줬다거나 법당에 숨어든 자객을 고양이가 곤룡포를 당겨 막았다던
가 하는 것이 아마도 군주인 세조가 부처님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시사성이 는다고
하면 여전히 불심이 남아있는 서민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남지 않겠느냐.
# 세조 초상화 13 불교를 대중화시켜 백성들에게 남아있는
민심을 확보할 때, 세조는 더 이상 정통성 없는
왕이 아니라 부처의 권위를 가지는
강력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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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네, 세조는 스스로 대호불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불교를 매우 좋아하는 왕이라고 공언을 한 것이죠.
세조는 재위기간 14년 동안 그 이름에 걸맞는 호불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불교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해인사의 대장경을 50부, 금강경, 법화경, 능엄경 같은 불경은 100부씩 인쇄해
전국의 사찰에 소장시킵니다.심지어는 일본이나 유구에도 보냈습니다.
세조는 사찰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데요, 상원사 뿐만 아니라 낙산사, 유점사 등 8개의 사찰을 중창하거나
창건했으며 정업원, 복천사, 원각사 등 십여개의 사찰에 많은 토지와 노비, 그리고 각종 물품 등을 하사했습니다.
흥천사와 용문사의 종도 세조가 만들어 주었죠.
세조는 이러한 불교의 대중화를 통해 어려운 유교보다는 여전히 불교와 가까운 백성들과
쉽게 만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특히 세조의 속적삼이 오늘날 상원사에서 발견돼서 그의 호불정책을 더욱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보신대로, 이 옷이 동자상에 복장될 때 세조는 상원사를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조의 상원사행에 좀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실록에 따르면 세조가 상원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데 5일이 걸렸는데 서울에서 상원사로 갈 때는
한달이나 걸렸다는 점입니다.
세조는 서울을 출발해서 무엇을 했기에 이토록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요?
세조의 행차에 뭔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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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상원사 가는길, 유람길 아니었다.
# 상원사 10 세조가 상원사에 도착한 것은 1466년 4월 17일-
세조는 누구와 함께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왔을까?
# 출발한 날 실록기록 21 한달전 세조가 한양을 출발할 때의 기록이다.
왕세자, 내금위장 이윤손, 사장위장 정식이
세조와 동행했다.
그리고 정현조와 의숙공주등 왕실종친과
신숙주, 김수온, 노사신등이 그 뒤를 따랐다.
# 정조행차도 15 하지만 왕이 도성밖을 행차할 때
주요인물들만 뒤따르는 것이 아니다.
정조행차도에 따르면 말, 의복, 식사 등을 담당하는
시종들까지 약 천명 가까이 왕의 행차에 참여한다.
# 신병주교수 =정부조직의 반이 이동한다는 의미를 지님, 도성의 궁궐을 비우면서까지 왕의 대규모
행차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행차의 비중을 크게 둠, 세조의 행차는 당시 정부조직의
캐비니쉬, 이동하는 모습을 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음
# 오상학교수 지도 살피는 13 정부인사들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한 세조는
포천, 철원을 지나 단발령을 넘어
금강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세조의 이번 행차는 강원도로 향한 순행이었다.
# 오상학 교수 =세조는 조선시대 여타왕에 비해 굉장히 순행이 잦았던 왕이다. 세조 6년에
북부지방과 세조 10년, 12년, 14년까지 4번에 걸쳐 순행, 이런 왕들의 순행은
조선시대에 흔치 않다.
# 정조 순행 범위 6 조선시대 왕 가운데 순행을 자주했다는 정조-
하지만 그의 순행은 경기도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 세조 순행 범위 (평양까지) 15 그러나 세조의 순행은 그 범위가 상당히 넓다.
세조 6년의 순행은 평양까지 다녀온
황해도, 평안도 일대의 순행이었다.
# 보은, 청주, 온양 일대 11 세조 10년과 14년에는 충청도 일대를 순행했다.
남으로는 진천, 보은을 거쳐 청주를 지나 돌아왔다
# 금강산, 강릉, 오대산 일대 11 그리고 세조 12년에는 철원, 김화를 지나
금강산까지 다다랐다. 동해를 끼고 돌아온
그 해 순행은 강원도를 둘러본 순행이었다.
# 전체 풀샷 5 정조의 순행에 비해 세조의 순행은
그 범위가 상당히 넓다.
# 김문식교수 =특이하게 보여지는 것은 상당히 먼거리까지 간 것입니다. 대체로 왕이 궁을
떠나기 쉽지 않고 도성밖을 벗어나기 쉽지 않은데 비교적 조선후기 정조인
경우 비교적 많이 다녔다지만 경기도 일대거든요. 다닌 지역이 지금 세조는
평안도, 강원도, 한때는 경상도까지 우리나라 전영역을 걸치는 것이다
=도성을 오랫동안 비워놓더라도 자신의 정치는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안정기에
들어갔다고 과시하는 효과도 있을테고. 현지 방문하는 곳에서도 내각 대부분의
사람이 옮겨왔을 때 보이는 왕의 위엄을 보이는걸 노린게 아닐까 생각한다.
# 그래픽/서울에서 금강산까지 17 역대 어느 왕보다 먼 지역까지 그것도 자주 순행을
떠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세조12년 상원사로 가던 세조의 일정을
쫓아가 보자.
서울을 떠난 지 닷새만에 금강산에 도착한 세조-
# 세조 기록 14 도착 다음날 세조는 왕세자에게 매사냥을 시켰다.
사냥은 다른 어떤 순행에서도 빠지지 않았던
중요한 일정이다.
# 김문식교수 =사냥이란 것은 일단 오락으로서의 기능.. 자기 취미생활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국가에서 대군이 동원된 이동중 사냥이란 것은 군사훈련의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 차 트래킹 22 세조는 각 지방을 순행할 때마다
관찰사와 수령을 만나 민원을 점검하고
농사작황을 살폈다.
그것은 세조가 평소 농사의 어려움과
민생의 고통을 살피는 것이 순행이라고
말했던 바와 일치하는 일정이었다.
# 양로연도 28 세조는 매 순행 때마다 각 지역에서
노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며
양로잔치를 열었다.
이번 행차에서도 경기도 강원도의 70세 이상
노인에게 극진한 대접을 했고
8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많은 선물까지 하사했다.
# 최정용교수 =대민시책과 연관이 된다. 직접 지방을 시찰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의 생활상을 확인하
고 살피고 직접 여론 일반 여론을 수렴하여 자신이 직접 해결해주는 현장에서, 이러
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 한 것이 순행이다.
# 그래픽/ 금강산에서 양양까지 8 순행을 통한 대민시책은 금강산을 떠나
동해안으로 내려오던 중에도 계속됐다
# 동구리 기록 21 강릉에 도착한 세조는 농민 중 농가를
잘 부르는 자들을 모아 노래자랑을 하게 했다.
그중 노래를 제일 잘한 동구리라는 노비에게
가마를 태우고 의복을 하사했다. 세조는 노비조차
순행의 일정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 김문식교수 =위민정치 중 하나, 가령 천인이었던 사람이 노래를 잘해서 그 자리에서
양인을 만들어준다든가 무예가 출중한 군사를 그 자리에서 특채를 한다거나
이런 형식은 왕의 왕성이 아랫사람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보여주는 이벤트
# 그래픽/ 양양에서 상원사 6 세조가 상원사에 도착한 것은
꼬박 한달이 지나서였다.
# 최복규교수와 만과봉 10 상원사에 도착한 날,
세조는 과거시험을 열었다
당시 과거시험이 치뤄졌다고 전해지는 만과봉-
# 만과봉 스케치 14 과거를 보러 온 만명의 선비들이
도포자락에 흙을 한 줌씩 넣어와
만과봉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최복규교수 =과거에 응시해 보지도 못하고 거기에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사나 여러 가지 벼
슬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서 여기서 과거를 보겠다. 알성시죠. 그래서
주변에 있는 모든 선비들한테 통보를 했어요. 일설에 의하면 만명이 시험을 보러왔다
그러는데 뭐 만명까지는 되지 않죠. 옛날에 만명이라는 것은 많다라는 의미거든요 아
마 굉장히 많은 선비들이 와서 시험을 봤던 것 같습니다.
# 만과봉 8 이번 과거시험에서는 문과에서 열여덟명,
무과에서 서른 일곱명이 선발됐다.
# 신병주교수 =왕의 행차가 결국은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이끌어 냈다, 그런 행사
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조는 쿠테타로 집권을 한다. 그래서 자기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이라든가 반발세력에 대한 어떤 무마를 위해서 대규모 왕의 행차
를 기획하고 또 그 행차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자신의 정권획득이라든가 왕으로서 정
당성을 널리 홍보하고 그런 정치적 계산-까지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상원사 18 세조12년 상원사행-
그것은 세조 자신의 안정된 정치기반을
온 백성들에게 알리고,
대민시책을 통해 백성들의 신뢰와 민심을 얻으려는,
세조의 고도로 계산된 정치 전술이었던 것이다.
ST.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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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자신의 조카 단종을 폐하고 두 동생과 김종서, 황보인, 사육신들을 참살한
비도덕적인 왕이었습니다.
그의 불법적이고 많은 이들의 피를 부른 즉위 과정은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분명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14년이라는 재위기간동안 그가 이룬 성과는 다시 평가돼야 할 것 같습니다.
세조는 어려운 범어나 한문으로 된 불서들을 한글로 소수 번역하고,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가장 먼 지방까지, 자주 순행을 다녀온 왕이었습니다.
그것은 불교와 순행을 통해 백성들과 가까워지기 위한 세조의 위민정책이었습니다.
이 피묻은 적삼에는 세조의 인간적인 고민과 스트레스가 담겨있습니다.
정통성 없는 왕으로서 느꼈던 정신적인 억압과 그것을 만회하려는 과중한 업무가
세조가 병을 앓게된 원인이었습니다.
500년이 지나 발견된 이 한점의 적삼은
세조를 비도덕적인 왕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왕으로 다시 보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