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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일반적인 중세부근의 시대를 배경으로 톨킨의 세계를 상식으로 하는 월드를 운영하는 마스터의 자료를 제공하고 플레이어에게 참고자료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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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드래곤 술집'이 있어요. 1층에 테이블 5개하고,
바텐더가 있고요. 2층에 방이 있어요. 방은 5개 에요."
"난 바텐더와 이야기해요,"
"난 방을 잡고 올라가서 쉬어요. 남녀 방 나눠서 2개를
구하고요. 10gp 를 던져줘요."
"전 술 마시는 다른 누가 있나 살펴봐요."
"린드는 저쪽 테이블의 한 남자가 라엘린을
노려본다는 걸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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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
3명은 복도 첫 방이고, 여자 둘은 그 옆방이에요."
"예. 라엘린에게 물어볼게 있어요. 옆방으로 가요."
"갔더니 셀린은 1층에서 바텐더와 이야기하고 있고
라엘린 혼자 있네요."
"음, 예, 들어오라 그러고, 무슨 일인지 물어봐요."
"다음날 아침!"
"뭐가 다음날 아침이야!!!!"
"불소급!"
"뭐가 불소급이야! 뭐가!"
사소한 문제는 제쳐두고, 세세한걸 알아봅시다. 천편일률적인, 지극히 그냥 게임 같은, 벽돌 타일로 디귿을 만들고 상점주인 딸랑 있으면 되는 그냥 컴퓨터 RPG의 한 장면이 아닙니다. 더 생명력을 가져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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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버언 이야기니 당연히 테버언. 그런데 왜 지난번엔 당연한 테버언 이야기를 안 했냐구요? 그건 무척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전에도 언급했듯, 그때는 필자가 배가 고파서......
지금은 배부르니까 자야죠. 테버언에 대한 걸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그 다음엔 테버언의 소품 잡기에 대해 알아봅시다.
tavern은 [t-ae-ve-r-n]입니다. 태번이죠. 왜 테버언이라고 부르냐고요? 소드를 끝까지 스워드라 부르는 사람에게 가서 물어봐요. 하지만 잘못된 건 잘못된 거니까 국법준수모범시민이 되기 위하여 이하 태번으로 부르겠습니다.
태번을 가만 살펴보면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주류를 판매하며, 식사가 가능하게 식사도 팔고, 숙박도 가능하고... 오호라 생각나는 곳이 있군 요.
"여보~ 주모~ 여기 탁주 한 사발과 국밥 한 그릇 내오게. 그리고 내 사나흘 쉬어갈 터인데, 거처가 있는가?"
오옷. 완벽하군요. 하지만 우리 나라 주막은 숙박비는 따로 받지 않았답니다. 멋지죠? 여행 객들을 위해 필수적으로 생기는 곳. 바로 태번입니다.
오랜 역사를 통해. 현대보다는 오히려 더욱 과거에 세계 곳곳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는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태번이라는 공급이 있었습니다. 무역, 여행, 순례 기타 등등. 그래서 그 기능을 나누어서 생각해보죠.
주류를 파는 술집, 숙박을 위한 여관, 식사를 위한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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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바빌로니아 시절. BC 1800년쯤 그러니까 인도에서 인더스문화의 전성기가 최고조를 막 넘어갈 무렵.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률인 함무라비 법전이라는 것에는 밀주업자의 목을 치라고 써있답니다. 그게 역사에 현존하는 최초의 법률이라니 당연히 법률상에 최초로 언급된 술집에 대한 내용이라면 내용이겠죠. 국영술집에서 술 마시면 술맛이 나려나... 흠.
고대 페르시아도 광대한 도로망이 있어서 여관들이 사람걸음 매 하루거리마다 줄줄이 생겼답니다. 바그다드부터 바빌론까 지 상인들의 길을 따라 숙소들이 생기고 12-13km정도의 거리마다 있었다니 가히 태번의 전성시대. 때때로 외진 곳에는 망루까지 있는 요새였답니다. 조폭 없는 태번인지, 무적 조폭 술집인지. 한때 40인의 산적 시나리오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렇게 외진 곳에서 산적들의 공격을 받는 시나리오를 했었죠. 참가자가 한 마디 하더군요. '저놈들은 산적이 아니라 들적이야!'. 참고로 다른 말로는 '초적'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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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시대에는 집회, 숙박, 이벤트 행사 등을 위한 종합 공동 시설물인 '레스케'가 있었고 , 레스차이leschai라는 지역주민과 외지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장소도 있었죠.
뒤에 외국인들이나 무역상, 외교사절, 정부관리들이 사용하는 숙박업소 판도케이온, 파트네 phatne도 있었습니다. 외국인 전용 태번이라...뭔가 쓸만할 거 같지 않아요? 이종족 전용 태번이라도?
고대 로마에는 술집다운 술집이 있는데 '루파나르lupanar'라는 사창가나 장터, 구석진 슬럼가 등에서 문 잠그고 영업했고, 밤에는 얼굴 가린 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도박을 해댔다는데, 모험가들에게 잘 어울리는 걸지도요. 뭐 그리 깨끗하진 않았을 것 같군요. 그 외에도 이름만 나와서 잘 모르겠는데 로마 제국시대에 데베르소리아deversoria 라던가 타베르나 이tavernae는 건달이나 잡배, 범죄자들이나 부랑자들이 우글대는 곳이었고, 당연히 때때로 범죄자들 소굴이기도 했답니다. 2000년 이전에도 조폭은 술집을 끼고 있던걸 보면, 술이 만죄의 근원인 걸까요?
다 이런 건 아니어서 하류 여인숙인 카우포나caupona와 고급 선술집의 형태인 타베르나 메리토리아taberna meritoria에서는 맛있는 요리와 정식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서는 아치형 지붕이 있는 긴 방의 구조로 꾸며져 있었으며, 시중드는 소년들이 반(半) 부동자세로 서 있고 주인은 한쪽 끝의 높은 단 위에 앉아 있었다는데 이게 무슨 식당인지 술집인지--; 마치 방석집 같군요.
그런 것들 외에도 땅이 넓어서인지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그 대로를 따라서, 역 체제(驛遞制)에 따라 도로변에 숙박할 수 있는 역을 두어 관리나 군인의 숙박, 물자수송 등을 맡겼는데, 로마에는 뭐 특별히 국영사업이라는 명시가 없었는지, 일반인의 여행이 빈번해지자 민간인이 경영하는 숙박업소도 생겨납니다.
예를 들면 마구간이 딸린 스타블룸, 실내 목욕탕을 갖춘 데웨르소리움, 하층계급용 카우포나, 음식점과 술집을 겸한 타베르나, 일류 요리 집을 겸한 포피너 등의 여관이 생겼죠.
khan이라는 류의 술집/여관은 도시 쪽에서 발달한 것으로서 로마여관들은 중앙에 정원을 빙 둘러서 축사와 숙식시설이 있습니다. 어랏. 이것 술집 '칸'과 비슷한 구조인 걸요? 앗! 그 술집은 징기스칸의 야만족들처럼 호탕하게 배터지게 술 마시자 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심오한 뜻이 있었을 줄이야!
아무튼 로마는 세계정복도 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어 영국에 돈 받고 재워주고, 먹여주는 '여관과 술집'을 전파시키게 됩니다. 부지런한 로마죠? 대체로 그렇듯 아류가 한술 더 뜹니다. 그건 퍼브를 이야기하며 설명하죠.
태번의 장도 '바텐더'죠. 바- 텐더. 바를 지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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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는 유럽풍 술집을 말합니다. 바bar는 말 그대로 가로놓인 막대기인데, 말을 묶는 바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술을 파는 카운터가 옆으로 길쭉하니까 그랬다는 설도 있고. 휴게 소나 시골집을 나타내는 말인 보어bower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아무튼 바의 경우는 데브레 뭐시기나 타베르 뭐시기에 비해 태번에 더 가까워서 여인숙을 겸하는 곳이 많았답니다. 그러니 가게 앞에 고삐를 맬 횡목이 있었겠죠.
비슷한말로 퍼브도 있습니다. 원래 퍼블릭 하우스라고 해서 게나 고둥이나 다 들어오는 집이란 뜻인데, 옛날 영국에서 일반법률(common law)에 의해 여행자에게 술, 밥, 집을 제공 하게 하는 법률이 있어서 여인숙과 술집에 대하여 돈 내고자 하는 여행자 모두를 받아야하는 의무가 생겼답니다. 그래서 퍼브는 졸지에 떠돌이들을 책임져야하는 사회적 의무를 가지게 되어버렸죠. 흠 바텐더가 괜히 모험가들에게 친절한 것도 아니었군요. 뭐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법보다는 맘만 먹으면 여관을 깨끗하고 맑은 암반수 채수장으로 만들어버릴 PC가 더 두려웠을 지도요.
튜더 왕조의 영국은 여인숙을 선발하고 칙령으로 마구간을 관리해야했고, 거기에 왕실우편이나 파발용 마구간을 관리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오 민간자본 유치로군요. 이 글은 RPG이야기가 아니라 벤처 창업 상담인가 봅니다. 뭐 나름대로 나쁘지 않으니 계속 이야기 하죠.
어쨌든 그래서 여관과 술집을 겸한 가게가 여러 곳에 줄줄이 생겼습니다. 환타지의 태번도 이것을 표현하려는 거겠죠. 돌아다니는 친구들은 많지, 교통은 불편하지. 결국 따지고 보면 환타지 세계의 '그곳'은 태번보다는 '퍼브'에 가깝습니다만, 뭐 이렇게 됐네요. 사실 아파트, 빌라, 콘도 다 의미는 틀어져도 잘 쓰고 있잖아요?
법률 이전의 초창기의 퍼브는 색슨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러 사람이 드글드글 모여 사교와 오락과 2차를 즐기던 맥주 집부터 유래합니다. 옛 퍼브에는 정원, 볼링용 잔디밭 이 있었고, 맥주를 만들 자체 양조장을 가진 곳도 있었답니다.
이건 뭘 가져다 붙여도 잘 붙겠는데요. 어떤 곳은 심지어 오락회, 음악회, 모임, 개인 클럽 등의 시설을 제공해 아예 문화시설이 되어버리는 일도 있었고요. 술집에 그런 것이 붙다니... 놀이문화가 성인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여전하네요. 술 먹고 음악회라...신기한 음악이 나올 지도요. 아니면 지구상에서 가장 격렬한 댄스가 나올지도...
실제로 영국최초 개인클럽도 월터 롤리경이 만든 '머메이드 태번'이었으니까요, 참 셰익스피어가 단골이었답니다.
1600년대의 일부 퍼브가 비공식 주화까지 만드는 곳도 있었다는데, 게임 코인이 아니라 알코올 코인이라 불러야할까요? 버스토큰이나 오락실 카드제라던가, 적립되는 e코인의 개념일 까요? 뭐 현금교환을 주인이 보장했다고 하니, 돈 없어서 술 못 먹는 경우는 없었겠군요. 쌀 퍼다주면 술집전용 코인으로 줬을까요?. 그냥 액면이 똑같으면 그 코인 아무도 안 쓸 테니 20%할인해줬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참 비슷하죠?
우리 모험가들에게도 똑같이 해 줄 수 있겠군요. 우리 가게에선 '핑크드래곤 코인만 받아! 그걸로 술도 사고, 도박도 할 수 있지!' 라던가, 아니면 그곳 주인장의 의뢰도 받을 수 있겠군요. '어째 코인을 10000개를 만들었는데 우리 수중의 코인만 벌써 30000개가 넘어! 어떻게 좀 해결해주게!' 라는 것은 너무 뻔한 것인가요?
1800년쯤부터는 교통이 편해져서인지 오락실에 DDR들어차듯 퍼브가 돈 되는 사업이었는지 술집만을 전담하게 되고, 설론(싸롱.saloon)으로 고급화되죠. 지금도 영국 웨일즈나 쪽에 는 400년 넘게 영업하고 있다고 하니, 언제 관광 가거든 한번 가봐도 될 일입니다. 모험거리가 필요했나보죠? 그걸로 대본 만들었을지도?
중세에는 다시 복고풍으로 돌아가서, 중세초기에는 교통도 복고풍이 되어서 여관업도 점점 쇠퇴하고 서민이 신앙심 하나로 떠나는 순례일정만이 거의 유일한 여행활동이 되다보니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은 수도원에만 있었습니다. 칼뱅이 스위스의 최대 산업인 '용병'과 '숙박업'을 금지시킨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걸까요. 아무튼 우리의 모험가들은 이제 여행 중에 는 절간 같은 수도원에서 자게됐습니다. 이거 수도원에서 자면 틀림없이 일이 나던데, 모험가들 오래 살긴 힘들겠군요. 하지만 그나마 다행입니다. 공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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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에서 십자군 전쟁이 나면서 순례여행의 인기의 주가가 쫙쫙 오르고, 상업이 부흥하게 되죠. 뭐든 전쟁 나면 뭔가 되는걸 보면 믿기 힘들지만, 전쟁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건 맞 나봅니다. 하기야 다 빠개고 써대니 많이 만들어야겠죠. 군수 산업이 돈이 되는 걸까요? 뭐 그거야 십자군과 일자군들 사정이고, 거기에 관심 있을 모험가들은 그리 가고 준비성 있는 모험가나 태번 놈팡이들은 태번이나 신경 쓰죠?
어쨌든 대량의 물자와 병사, 그리고 거기에서 뭔가 잉여이익을 취득하는 많은 잡다한 상업들이 돌아가기 시작하죠. 군대 입소장 가면 군용품이나, 이름표, 반창고, 펜하고 수첩, 별별 걸 앞에서 다 팔잖아요. 수험장에서 컴퓨터용 사인펜 파는 거나.
상업이 잘 돌아가자 수도원, 길드, 개인 사업가들이 영리목적의 숙박시설들을 많이 짓기시 작했답니다. 그 무렵에는 먹을 것, 연료, 침구 등등은 손님이 알아서 준비해야했습니다. 개별 선택메뉴인가요? 소모품, 서비스품 제공 금지인 걸까요? 이런 발전적인 서비스를 했다니... 세상에 정말 공짜는 없군요. 잘하면 태번 하나로 탁탁 털어먹을 수 있겠는데요. 저도 자물쇠 대여료를 따로 받은 적은 있지만, 침구류, 식품 심지어는 벽난로 장작 값까지! 창문 사용료와 물통 사용료, 요강과 매화틀 사용료까지 모두 받을 수 있겠군요.
영국에서는 헨리 씨가 수도원을 탁탁 털어 버린 데다가, 마차 여행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16세기말까지 6,000여 개의 여관이 세워집니다. 흠. 우리 나라와 비슷하군요. 우리 나라는 간판에 호텔, 모텔이라고 써진 것만 6000개는 가뿐히 넘을텐데...
이런 여관은 르네상스시대에 융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술집을 겸한 인Inn으로서 다시 옛 모습을 찾아갑니다. 음식 편을 다룰 때도 느꼈지만 왜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습니다. 거대한 퇴보의 시대. 드래곤 때문이었을까요?
태번 안에 들어가기 전에 밖에 간판이 있습니다. 누가 부셔버렸을 수도?
초기의 여인숙이나 술집은 용, 사자, 돌고래, 술병, 양초, 백조 등의 그림으로 자신의 가게를 표시했습니다. 누드 고블린이나, 때때로 특이한걸 달았을 수도 있죠. 정말 신발이나, 정말 칼...
간판은 점포 위에 매달거나 앞에 놓아두거나 처마에 걸었습니다. 문맹률이 높았던 만큼 모두 그림이 사용되었죠. 그렇다고 게임처럼 술집은 어떤 모양, 잡화점은 어떤 모양이라기보 다, 초창기에는 그냥 '이름'을 표시하는 용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 여관주인의 신원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고, 여관이다라는 걸 표시하기도 했고요. 주막의 초롱이라고나 할까요?
간판은 고대 이집트 때도 있었고, 그리스, 로마도 간판을 사용했습니다.
로마는 특히 간판을 표식의 목적을 넘어 광고문안을 표시하기 위해 벽에 하얀 도료를 칠하고 광고를 했답니다. 그림광고라...
대부분 글자 따위는 모르니까, 내용을 알리기 위해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상징적인 도안을 고안했는데 이런 경쟁에서 간판은 점점 복잡해지고, 의미심장해집니다. 그리고 그 발전에 따라 약속체계가 자연스레 만들어지죠. 법으로 제정한 것도 아니지만, 서로의 편의성 때문이죠. 이발소 간판 같은 것 말이에요. 목욕탕 간판이나.
로마의 시대의 간판은 현재 많은 자료가 남아있는데, 포도주를 판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선술집에 걸어두는 담쟁이 넝쿨가지 모양의 간판을 만들었고,(지금도 특정지역에서는 일반 적입니다.) 전당포 간판으로 세 개의 금빛 공이 쓰였고, 치료소의 피와 붕대를 나타내는 빨간색·흰색 줄무늬도 이때부터 특정업종을 말해주는 간판이었죠. 지금은 치료소가 아닙니다 만... 뭐 하얀 가운 입은 거야 비슷하지만.
반드시 용도를 표시하기 위한 간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문장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었죠. 현대로 따지면 메이커라고나 할까요? 웰치스라던가 맥도널드라던가, 리바이스라던가... 아니면 그냥 생각 없이 인상적인 그림도안을 간판으로 내거는 경우도 있고요.
주점 이름이라... 붉은 용의 주점. 삐걱거리는 침대 주점, 빛나는 향기의 주점, 흑곰과 오리 3형제 주점. 핑크 드래곤 주점, 전장의 북 주점, 쌍방패 주점, 두겹 늑대머리 주점....
간판 이야기는 그쯤하고, 자려면 침대가 있어야죠. 뜨뜻한 방바닥이 좋지만, 원래 떠돌이들이던 그네들은 바닥에 터잡기 보단 벽난로나 뭐 이런걸 선호한 모양이라서, 아무튼 침대라는 물건이 있습 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고대 이집트, 그리스의 유물에도 침대가 있는걸 보면 꼭 떠돌이의 산물은 아닌 거 같죠? 침대는 단순히 잠자는 공간을 넘어서 수면용, 식사 때 기대어 앉는 것, 독서용, 접견용 등등의 뒹굴뒹굴 양식의 침대가 있었고, 뭐 그렇게 따지면 지금도 다양한 목적으로 쓰이고 있죠. 침대 위에서의 전투도 재미있을 듯 한데? 거인침대 위의 전투로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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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초기 고왕국 시대에 동물모양의 다리가 달린 침대가 있었고, 금으로 발라놓은 파라오의 침대나, 죽은 사람 묘에 넣는 죽은 사람을 위 한 침대 등, 요람에서 침대까지. 침대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었죠.
그리스에는 클리네라는 침대가 있어서 4각형 다리가 널찍한 상판에 달려있고 중요한 건 머리받침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디자인이 드디어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침대에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로는 폴리페몬이나 다마스테스라는 도둑의 이야기인데 철침대 위에 자기가 잡아온 사람을 눕혀서 침대 길이에 맞게 다리를 뽑거나, 잘라냈다는 이야기죠. 알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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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흥미로웠던 그리스의 문화에 대한 로마의 반응은?
로마는 그리스와 기본적으로 같은 모양의 침대였지만 나무 말고도 청동,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장식이 마구 호화스러워집니다. 돈으로 바르나보죠?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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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단순미의 복고풍 중세에 오면 다시 거대한 밥상을 연상시키는 다리 4개에 상판 하나의 단순한 형태가 유지됩 니다. 침대에 기대서 밥 먹는 게 일반적인 침대의 다른 목적 중 하나였으니까 밥상이 맞긴 맞았을 지도요.
십자군 전쟁 즈음인 12세기부터 중세영주들의 저택에서는 외풍을 막기 위해 천장에 커튼을 내리고 그 안에 목재 침대를 설치하는 모양이 유행이 됩니다. 마치 욕조 커튼 처럼요. 그러면서 침대에서 밥 먹는 습관이 없어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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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침대를 고달프게 할 테스터의 첫 시조가 탄생한 거죠. 테스터는 일반적으로 조각된 나무로 기둥을 하고 천을 줄줄이 늘어뜨리기도 합니다. 실제 테스터라고 부르는 물건이 등장한 것은 14세기입니다. 우리 마스터들이야 호화로운 침대라고 하면 무조건 사각 천장에 화려한 천 먼저 감고 보지만...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이 출간되고, 쇠로 만든 화약무기가 나오고, 물레바퀴가 광범위하게 퍼지고, 영국의 장궁이 프랑스의 석궁을 박살낸 크래시 전투의 시대, 백년전쟁의 시대인 14 세기에 드디어 '비싼 침대'를 표현하기 위해 마스터들이 잘 써먹는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먼지를 막기 위해 침대 위에 설치하는 천개(天蓋:tester)가 등장합니다만, 상류계급의 잘사는 사람들의 저택에 퍼진 것은 콘스탄티노플이 망하고, 잔다르크가 화형을 당하던 시절 고딕시대 15세기 이후입니다.
테스터는 4개의 기둥을 세우는 게 일반적이지만, 누울 때 발이 가는 풋보드 쪽에 양끝에 2개의 기둥을 세우고 머리 부분은 쓰개형태로 된 것, 천장에 매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가장자리는 돌출해있고, 조각이나 위 장식 천을 주렁주 렁 달아서 장식을 했습니다.
테스터라는 용어는 라틴어 testa('머리'를 뜻함)에서 온 것인데, 원래는 투구 머리에 달린걸 말하는 것인데 중세시대부터 침대천장인 천개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후기고딕의 시작인 마키아벨리와 영국의 헨리8세 시절인 16세기가 되면서 침대는 점차 가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테스터는 뭐 의무사항인 듯 필수적으로 달리고, 테스터의 4개 기둥은 쥐 파먹은 것처럼 우렁우렁 예술성을 뿜어내고, 머리판에는 화려한 장식이 곁들여지고, 테스터는 고급(비싼)직물의 커튼을 치렁치렁 둘둘 감게됩니다.
아! 커튼. 커튼 이야기도 하려 그랬는데. 기왕 커튼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지루하기도 할텐데 커튼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죠.
커튼은 알다시피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하고 바람을 막고, 시선을 막기 위해 늘어트려 놓은 천입니다.
무거운 천을 써서 추-욱 늘어져서 아름다운 주름이 생기는 커튼을 특별히 드레이퍼리라고 하죠. 휘장이라는 뜻입니다. 또 문에 다는 무거운 커튼을 '포르티에르'라고 하죠.
그리스에서는 이 포르티에르가 방 칸막이의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시대의 2-6세기의 모자이크를 보면 아치의 지주사이에 커튼을 친 것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중세 필사본에 보면 커튼이 현관에 잡아 매어진 형태로 나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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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대해 한소리 하자면, 2층에서 싸우다가 칼로 찌르고 발로 차버린 악한 NPC A!! 창문 쪽으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시공을 초월, 20세기의 창문을 뚫고 유리를 부수며 다시 중세의 돌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1300 - 1500년, 그러니까 하이 고딕 건축양식이 도래하며, 총이라는 물건이 처음 나오고, 백년전쟁이 나고, 판금 갑옷이 개발되고, 탑 형태의 풍차가 유럽에서 사용되고,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게 망해서 소피아성당이 이슬람성 전이 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던 중세 말기까지! 건물의 창문에는 나무 덧문이나 두꺼운 천이 달렸습니다. 유리가 아닙니다. 이런, 커튼 이야기하다가 창문 이야기까지 나왔군요. 뭐 갑자기 침대 이야기로 돌아가기 뭐하니, 침대에 대하여 또 다른 이야기 를 하자면....
중세 말 시대에 또 특이한 물건이 하나 나옵니다. 트런들 베드라고 해서 주 침대 밑에 밀어 넣을 수 있는 한단 낮은 침대를 아실 것입니다.
이 침대는 원래 하인용 침대로 주인의 몸종들이 주인과 함께 잘 때 사용했던 침대입니다. 틀을 참나무로 만들고 양 측면에 구멍을 숭숭숭 뚫어서 가죽끈이나 천으로 배드민턴이나 테니스 채처럼 끈을 누벼서 바닥을 만듭니다. 마치 매트리스의 효과랄까요? 거, 배드민턴 채 위에서 자면 잠이 잘 올까...... (사실 이 배드민턴 채 모양의 침대는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끈을 전부 하나로 하면 한군데가 끊어져도 전부 갈아야하니, 구역별 모듈형 끈 꿰기(?)를 권유했습니다. 대단하죠? 하지만 구역별 끈꿰기를 하면 한쪽이 늘어나도 다른쪽이 보충해주지 않기때문에 쿠션감이 좀 떨어지는걸.--;)
이 트런들 침대는 18세기말까지 계속 사용됐습니다. 지금도 신기한 거나 실용적인걸 좋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사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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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가 목성의 위성과 토성의 고리를 발견하던 시절, 포크가 드디어 음식을 찍어 입에 넣는 용도로 사용되던 시 절, 메이플라워호가 세계최강국이 되려고 배타고 떠나던 시절, 데카르트와 케플러가 죽고, 최초의 커피전문점이 옥스 퍼드에 가게 내던 시절인 이탈리아 바로크의 시대 17세기 중엽 무렵부터 침대의 천개와 커튼에 태피스트리를 줄줄 박게됩니다. 16세기와 다른 점은 침대의 장식이 나무에서 천으로 옮겨갔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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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침대가 다시 예전의 용도를 찾게 됩니다. 하기야 비싼 돈 들여서 발라놨는데 최대한 자랑 해야죠. 침실은 가장 은밀한 부분이라 누가 안 들어오면 그 비싼걸
아무도 안 봐 줄 거 아니겠어요?
그건 그렇고, 사실 침대가 지금처럼 그렇게 사적인 공간은 아니었다는 것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중세지배계층에게 공과 사를 구분하라는 말은 이중인격을 가지라는 말보다 더 이상하게 들렸을 겁니다.
가장 유명하고 보편적인 테스터가 이때 등장합니다. 이른바 침대 의장용 테스터죠. 16, 17 세기의 테스터는 거대한 구조를 자랑했고 침대를 덮는 천개와 그 받침기둥들의 정교한 조각이 특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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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때는 의회에 참석하는 국왕이 정의의 침대 litdejustice라는 호화로운 침대에 앉았고,(국회의사당에 침대라니요.) 알현 실에는 알현의 침대를, 자신의 일상적인 침실에는 테스터가 있는 4기둥 침대를 설치하고, 측근들을 불러 공무를 보고 귀부인들을 위해 후비(后妃)의 침대라는 것도 만들었답니다. 거참... 침대가 확실히 대단하긴 대단하죠? 다시 오지 않을 침대의 전성시대일지도요. 하지만 이건 시작입니다. 왕이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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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침대는 앞에 설명한대로 사방에 커튼이 쫙쫙 드리워지고, 위에 테스터가 덮이고, 중간에 -루이 14세가 한 짓이 일반화가 될 때쯤?- 침대가 소파와 의자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커튼을 자루모양으로 잡아매게 됐답니다.
루이 14세는 공사를 막론 궁중모임을 왕의 침실을 중심으로 열렸는데, 침대이야기는 아까 했고 하던 커튼의 이야기 를 하자면, 침대뿐 아니라 침실의 가구에 전부 층층으로 늘어진 커튼을 달고 '밸런스'라 부르는 새로운 커튼이 등장합니다. 침대 밑으로 쳐진 것, 가구 밑으로 처진 것... 등등.
루이 15세는 한술 더 떠서 침대용 커튼과 그에 어울리는 창문용 커튼을 환상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다양하게 장식하여 리본·코드·술·활 모양의 장식물 등을 주렁주렁 달아놓습니다.
징하죠? 참고로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만든 왕이고, 루이15세는 14세의 증손자이고, 그리고 루이 16세는 루이15세의 손자랍니다. 루이 16세는 누구인줄 알죠? 마리 앙트와네트의 남편이 잖아요.
말 나온 김에 베르사이유 궁전 이야기나 할까요? 화장실 없는 건 다들 알죠? 정말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거짓말이면 거짓말이라는 말도 나올 만도 한데 안나온걸 보면. (편집자주: 베르사이유 궁전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단지 미로처럼 꾸며져 있어 모르는 사람은 이용할 수 없지요.)
크죠. 그냥 큰 게 아니라 돈이 억수로 부어져서 재정적으로도 재상 콜베르도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전체적인 경비가 14세 집권 말까지 8천만 리브르가 들어갔는데 이 돈이면 당시 아름다운 영지를 갖춘 영주의 장원을 6백 개를 구입할 수 있는 액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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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약간 과장된 것 같다기보다 불공평하군요. 앞서 전체적인 경비는 루이 14세 집권기간 전체동안 수백 명의 관리자와 기타 등등 모든 걸 포함한 돈인데, 왕의 일대기동안 궁전에 쓴 돈을 전부 합쳐서 장원을 몇 개 살수 있었다니, 여기서 배울 것은 '불공평한 비교'가 아니라, 상대를 비방하기 위해 저런 불공평한 방법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나리오를 짤 때 플레이어에게 잘못된 정보로 한 NPC를 잘못 평가하게 하고자 할 때 이런 방법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보세요.
아무튼 베르사이유 궁전은 정원사로부터 석공에 이르기까지 전문가 750명을 고용했고 정원에서만 250명이 투입되었습니다. 왕실 성당, 오페라, 왕과 왕비의 아파트먼트, 뒷 정원의 그랑 트리아농, 프티 트리아농 궁전,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의 초가, 대 운하 소 운하로 불리우는 십자가 호수, 정원의 숲 속의 많은 분수대, 피의 성 베르사이유입니다.
정리 참 안 되는 가운데, (우리 침대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언제 끝날까요?) 장원을 600개 살수 있었다니 그게 뭔지나 알아보죠. 장원은 manorhouse라고 하며, 중세 영주 성들과 다른 점은 방어적 기능이 덜한 것입니다. 중세 영국의 영주들은 대체로 거의 장원이었는데 (한자 로 莊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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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란 섬나라가 대륙에 비해 치안이 잘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돈이 없어서 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장원이 아무래도 성 같은 것보다야 살기가 편했기 때문이죠.
장원은 큰 방이 가운데 있고, 그 주변에 주방과 가족실을 연결한 단순 명료한 구조로, 부지를 해자Moat로 두르거나 탑 문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찔리는 게 있었나보죠?
큰 방에는 바닥난로를 설치했고, 아름다운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창문은 크게 하는 게 유행이었는지 큼직큼직했고, 유포, 유지로 창호를 발랐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알고있는 벽난로는 희망봉을 발견하고,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절인 15세기경부터 생겨납니다. 스토크세이 성, 펜스하스트 플레이스, 오크웰즈 매너, 코티 매너 등이 유명한 장원입니다. 흠.. 이런 거 600개라... 쳇 별거 아니군. 쳇, 쳇,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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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장원의 집 구조뿐만 아니라 그럼 그 600개에 포함된 아름다운 영지에 대해 알아보죠. 장원은 로마가 농장을 가지고 노예를 시켜 경작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농장은 별장 주변에 있었는데 villa라고 불렀죠. 실제 중세에서도 장원을 라틴어로 윌라 라고 합니다.
이 장원이라 부르는 땅은 점점 커지고, 지주들은 다수의 농민에게 임대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소작도 빌라라고 불리었고, 점점 늘어갑니다. 유럽 전체가 거지가 되는 중세의 시작입니다. 토지소유자가 옛날 노예를 다루던 오리지널 빌라처럼 소작농에게 압력을 행사하자 소작농은 콜로누스라는 반 자유농으로 지위가 내려갑니다. 소작농 하면 매여 사는 사람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임차농민'일뿐입니다. 마땅한 계약관계이죠. 하지만 머리털 나고 두발로 걷는 사람이란 종자 들은 쥐꼬리만한 거라도 남에게 무언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거 같으면 그걸로 왕 노릇 하려는 종자라서, 소작농은 점점 자유를 잃어갑니다.
비잔틴 제국이 살살 망해가면서도 우상이네, 성상이네 쌈 벌이고 있을 8세기 무렵 프랑크 왕국 시대에는 영주들과 국왕이 짝짜꿍해서 만든 법률이 통과됩니다. 지주가 소작농에 대한 재판권·행정권까지 가지게 됩니다. 불수불입권(不輸不入權)이라 부르는 이 2가지 특권에 의해 장원제도가 확립되게 되어 대 교회, 수도원, 지주는 장원영주로서 각기 소국가와 같은 지배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렇게 농민은 앉아서 노예가 되어갑니다. 물론 들고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런 '불법적인' 무엄한 노력들은 '합법적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이쯤에서 침대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더 자세한 장원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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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은 영주가 직접 관리하는 직영지와 농민 보유지 및 공동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직영지는 다시 영주의 저택(manor house와 직영 농장으로 나누어집니다. 직영농장은 또 관리인의 주거 혹은 영주의 집무실과 창고가 있었습니다.
그 규모는 간단히 말할 것이 아닙니다. 비잔틴제국이 영토를 확장하는 시대인 9세기의 프랑스 수도원의 경우에는 24개 장 원 중 22개 장원에 직영농장이 있었고, 장원의 넓이는 평균 2.3㎞에 이르렀습니다. 농장은 대체로 보리밭이며 그 밖에 포도원, 채소밭이 있었습니다. 과수원에 대하여는 전편을 참조하시길.
직영이 아닌 농민 보유지는 대부분이 후페(Hufe)를 단위로 하였는데, 1후페는 10∼15ha 정도 그러니까 100미터 x 100미터 짜리 땅이 10개에서 15개! 입니다. 25000평에서 37500평이죠. 이 땅은 대체로 보리밭을 주로 하고 건물 부지, 과수원 등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앞의 수도원의 경우 각 장원마다 약 60후페의 농민보유지가 있고, 1가구가 1후페를 가지는 경우, 2,3가구가 1후페를 공동 보유하는 경우가 서로 비슷했답니다. 반반씩 그럼 한 장원 당 30가구+ 60-90가구 = 90~120가구로 군요.
이들 보유농은 장원마다 1~3개의 촌락이 구성되었습니다.
아라비아 숫자가 최초로 라틴어 원고에서 사용되던 11세기의 보름스 주교령 장민단 규칙 등의 문헌에 자유농민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만, 그 수가 점점 줄어든 것은 자유농민이 영주의 보호를 필요로 해서 스스로 장원에 소속된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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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물지대의 후페는 생산량의 약 10%를 냈고, 그렇지 못한 지역은 주에 2-3일의 부역을 징수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를 농민이 농노serf였다는 것 은 아닙니다.
생각보다 넓은 지역입니다. 후페는.
영주 재판권이 있기는 했습니다. 당시 영주의 재판범위는 농민 보유지에 대한 민사 외에도 범죄에 관한 형사권을 가 지고 있었고 국왕으로부터 불수불입권을 획득한 대 영주는 최고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서의 수도원 같은 교회영주는 그 재판권을 일반인인 대 영주에게 위탁하였고, 위탁받은 영주를 포크트Vogt라 불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농노제도라고 유추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보름스 주교령 장민단 규칙 제2조에는 농민 보유지의 단위 후페가 <토지와 노예들>로 명시되어있기 때문이며, 표준적 농민인 후페를 보유한 농민은 노예를 거느린 부농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주 3일이라는 부역은 노예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경미한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즉 당시의 영주와 농민은 노예의 지배자로서 동일 계급이었고, 영주는 재판권이 있었지만 농민을 지배하는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며, 보호자로서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고전장원이라고 구분하며 프랑스에서는 아라비아과학이 빛을 발하던 10세기까지, 독일에서는 보름스 조약으로 교황과 황제가 대충 화해하는 12세기 무렵까지 지속되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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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를 지대 장원이라 부르며 대체로 우리가 알고있는 농노의 시작입니다.
직영지는 사라지고, 장원의 농민은 1/4후페 정도를 소유하고 가족 노동력을 경작했습니다. 당시 농민은 법률용어로는 빌랭 villain, 속칭 세르프serf라 하여 익히 알고있는 생산물의 30%라 는 고 세율의 땅세를 영주에게 내었습니다.
고전장원시대의 부농적인 후페 보유 농민에 비해서 영주에게 귀속된 채로 거의 농노가 됩니다. 또 장원영주는 농민에 대하여 재판권을 행사하며 이것을 이용 과다징수를 꾀하게 됩니다. 인두세(chevage)라고 하는 소액의 세금을 부과시켰다가 13세기에 농민의 저항과 대 영주의 농민회유정책으로 인해 폐지되고 14세기 에는 백년전쟁으로 인한 징수의 확대에 대해 대규모 농민반란 < 자크리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 이후 농민의 지위는 차츰 개선되었습니다.
복고한 중세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나오는 18세기가 되서야 다시 정상이 됩니다. 라부뢰르laboureur라는 예전 후페 보유농 같은 토지소유자(自作農)가 생기고 큰 농토를 바탕으로 농업자본가로 상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789년 이들 농민은 프랑스 혁명에 참가하여 봉건영주를 몰아내고, 장원을 해체하여 진정한 자유농민이 됩니다. 속칭 누구들이 말하는 지주와 농민의 투쟁사 이야기도 이 이야기인가 싶네요.
다시 침대 이야기,
룻소가 사회 계약론을 출판한 18세기에선 유럽의 저택들이 방 많은걸 자랑으로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작고 개인적인 방들이 생기는 추세와 함께 침대의 테스터도 경량화, 간편화, 단순화가 되어갑니다.
에스카플로네의 보스 아이작 뉴턴이 살았고, 파렌하이트가 수은 온도계를 만들고, 로빈슨 크루소와 걸리버 여행기가 출간되고, 불소버에 의해 은도금이 발명된 18세기 로코코시대에는 이제 왕이 하던걸 귀족이 따라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유행이란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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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고 혈통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 '응접실 생활'이 침대까지 끼어서 유행을 합니다. 이른바 뉴턴이 살던 과학적 시대라 이 부분은 많은 기록이 세세하게 남아있습니다. 침대는 커스텀이라던가 유니크하게 줄줄이 개인취향으로 만들어져서 테스터가 침대의 절반만을 덮은 천사의 침대, 전부 덮은 왕비 침대, 테스터에 왕관 달아놓은 제왕 침대, 아예 이름으로도 테스터를 어떤 꼴로 만들어놨는지 짐작이 가는 돔 침대, 철봉을 엿가락처럼 휭휭 휘어서 만든 테스터에 빌로드를 걸어놓은 폴란드 침대 등등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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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영주들로부터 시작된 이 침대와 테스터 중 가장 일반적인 모습으로 알고있는 4개 기둥에 4면에 커튼을 달아 놓은 침대는 영국에서 널리 보급되어 레 미제라블이 쓰여지고,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고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나는 19세기 중반까지 유행합니다.
그 후에야 실용적인 면으로 좀 들어가서 쇠파이프 침대 등 등으로 침대는 과학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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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는 상판과 머리판headboard, 발판footboard, 바닥, 다리, 매트리스로 구성됩니다. 미국식은 머리판만 있고, 유럽식은 발판도 있습니다.
보통 시트와 담요만을 사용하는데, 현대는 스프링 매트리스가 있지만, 없던 시절은, 담요와 시트, 베개를 씁니다. 난방이요? 그건 따로 해야죠. 장작 패다가 벽난로에 쑤셔 넣고 불질러요. 불? 알아서 피세요. 돈주고 불씨를 얻어오던가, 파이어 볼을 쏘던가.
침대의 크기는 그 당시 기록을 못 구한 관계로 대신 한국 KS규격을 보자면 높이 30센티, 폭은 싱글이 1미터, 세미더블이 1.2미터, 더블은 1.36미터이고 길이는 일반적으로 197센티 정도입니다.
긴 이야기 드렸습니다. 지루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군요. 전혀라구요? 오, 그럼 우리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는데, 가구에 대해 알아볼까요?
가구는 대단히도 현대적인 개념으로서 침대와는 달리 이집트는 고사하고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도 가구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고 하는지도요? 하하)
가구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중세입니다. 중세 봉건제도가 쭈욱쭈욱 잘 나갈 무렵 영주들은 계절마다 사용하는 저택을 소유하고, 옮겨다니며 영내 순시를 하며 사는 것이 관례였답니다. 그래서 저택을 옮겨다닐 때는 의자와 테이블을 옮겨가는 생활 형태가 만들어졌는데 그런 이유로 중세가구들은 이동이 편하도록 분해가 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용어에도 차이가 나는데, 유럽 쪽에서는 '모빌'이라는 말이 (뭐 국가마다 발음은 틀리지만) 가구를 뜻하는 말입니다. 라틴어 모빌리스mobilis에서 유래한 거죠. 움직일 수 있는 것.
미국의 퍼니쳐는 중세 프랑스어 퓌르니르furnir에서 유래하여 설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벽난로나 창틀, 문짝도 모두 포함하는 단어이죠. 길거리에 있는 전화부스도 스트리트 퍼니쳐라고 하는걸 보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가구는 아시다시피 편의성보다는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중세부터 와트가 증기기관을 만드는 18세기까지는 귀족의 점유물이었기 때문이죠.
프랑스 혁명 세기, 18세기에 영국은 가구제작의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오늘날 유럽의 '클래 식가구'의 표준이죠. 프랑스도 루이 15, 16세 그리고 나폴레옹 시대에 걸쳐 화려한 로코코양 식과 고전주의가 가구단지를 휩쓸고, 프랑스의 목공기술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르네 상스 이후 가구는 조용히 살다가 20세기 와서야 다시 빛나고 있는데 아르누보니 뭐니 요즘 말은 모르겠고 , 더 가면 밑천 나올 거 같고 환타지도 아니니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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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번 이야기한다고 해놓고 숙박, 태번 발달, 침대, 장원, 궁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몇 분은 짐작하셨겠지만 이번 호의 주제는 '주'였습니다. 지난 호는 '식'이었죠.
다음달은? 모두 짐작하셨듯이 '의' 입니다.
점점 딴소리로 가는 태번 이야기의 화자 백룡이었습니다.
하지만 뭐든 알아두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법. 중세 그림 한 장을 보더라도 예전과 보는 눈이 틀려졌다면, 더 세세한 부분에 시선을 보낼 수만 있다면 이 글은 그 가치를 다한 것입니다.
다음 호에 뵙겠습니다.
제목 " 테버언 이야기 - 자기 전에 옷 갈아입기."
부제: "옷? 난 +1 체인 팬티에 스터디드 런닝셔츠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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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에
대한 사항-
작성자: 하얀용WhtDrgon. whtdrgon@bigfoot.com
작성일: 2000. 09
기 타: TRPG 웹진 조이돔에 기고했던 글.
저작권표시 및 비상업적 이용 포함, 작성자에게 문의
후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