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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호(1997). 『학문과 교육(상): 학문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3장 분과학문
3.2. 학문의 분류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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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학문의 분류기준
3.2.1. 대표적인 분류의 사례
학문 자체와 학문에 대한 논의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전자는 원저자의 의견이 반영됨에 비해서 후자는 타인들의 견해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전 절에서는 분과학문의 다양성을 짐작하게 하는 역사적 단서를 제시하였지만, 본 절에서는 그런 다양한 학문들을 어떻게 분류하고 정리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이전에 이루어진 다양한 분류의 방식을 여러 가지 사례로 예시하고, 다음에 우리 나름의 세 가지 기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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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서 그 범주 내에서 학문이 동적으로 분기해 간 역사적인 측면을 주로 대표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검토해 볼 작정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분류방식이 타당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분류방식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논자의 주관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다.
우리는 앞서 수도계를 소개하면서 그 본질적인 내용은 항상 미궁으로 남아있는 것임을 지적했다. 수도계는 부단히 변증법적인 변전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확정 지워 규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그 규정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또한 그것에 대한 우리의 언급은 우리 자신의 체험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지적되었다. 학문이 하나의 수도계에 속한다는 입장을 취해 온 우리가 여기서 검토할 학문의 분류문제도 그런 논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깨달음은 그런 한계 자체를 각성하는 것이다. 무엇이 분과학문이며, 그것들을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고래로 당대의 상황 혹은 분류하는 사람의 관심과 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그러나 어떤 분류이든지 간에 그것은 분류하는 사람의 체험의 범위에 의해 한정되게 마련이다. 여기에 어떤 일반적인 합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소 분명해지는 사실은 학문의 분류체계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위에서 지적한 수도계적인 속성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많은 의문을 갖게 한다. 또한 그 의문에 대한 어렴풋한 해답을 얻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분류의 체계는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다. 왜 그런가? 또한 같은 시대에서도 논자에 따라 그 분류방식이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제반 분류방식 가운데 독자는 어떤 것에 공감하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 놓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보는 것도 흥미있을 것이다. 학문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변천할수록 전통적인 분류는 현존의 것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만스러운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인 분류방식 가운데 어느 하나에 공감하게 마련이며, 그 공감의 근거는 논자나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의 학문적인 품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대표적인 학문의 분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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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을 점검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학문이 고대 희랍에서 발원했음을 지적했다. 그것은 시작이었고 지금은 그 진행과정의 끝이다. 따라서 특정시대의 학문 분류방식은 당대에 이루어진 학문의 발전을 반영하게 된다. 고대 희랍 당시는 학문이 아직 충분하게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개별학문의 구분이 뚜렷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에 대한 분류방식은 당시에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플라톤은 인간 영혼의 상태를 억측(pitis) · 견해(doxa) · 계산능력(dianoia) · 이성(nous)으로 구분하고, 거기에 대상세계를 대응시켰다. 대상세계는 크게 可視界와 可知界로 나뉜다. 그런데 인식이 후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학문은 계산능력 이상의 차원에서 성립한다. 계산능력에서 성립하는 학문은 수학(특히 기하학)이고, 이성 능력에서 성립하는 학문은 철학이다. 이처럼 플라톤은 이성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론적인 학문체계를 세움으로써 통일과학의 이념을 내세웠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다른 학문들이 성립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따라서 단일한 학문이 아니라 다수의 학문들이 성립한다. 그는 제일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수립하고 우리에게 낯익은 학문들의 분화를 분명히 예측한 바 있다. 그러니까 학문의 분류가 일단 본격적으로 성립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대상영역의 성격 및 목적과 관련하여, 즉 지적인 작업의 목적이 무엇이냐를 기준으로 하여 크게 이론학(theoretike episteme: 자연학 · 수학 · 형이상학), 실천학(praktike episteme: 정치학 · 윤리학 · 경제학) 제작학(poietike episteme)의 세 분야를 분리시켰다(소광희 외, 1994, pp.60-63). 이 가운데 이론적인 앎은 제작적인 앎이나 실천적인 앎과는 달리 앎 자체가 목적이고, 앎 너머의 어떤 것에 대한 수단으로서 그 가치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이에 비해서 실천적인 앎은 좋은 실천을 목적으로 삼고, 제작적인 앎은 훌륭한 제품을 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데 차이가 있다. 실천학과 제작학이 가변성(행위, 재료의 변형)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 인식이 개연적이고 특정한 외부의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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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는 데 비해서 이론학은 불변적인 것에 대한 필연적인 인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차이를 지적하면서 이론적인 앎은 그 자체로 내재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여 여타의 것들과 구분하였다. [각주 4: Aristoteles의 입장에 대하여 우리는 앞(2.2.1.)에서 비판적 관점을 택했다. 이것은 엄격하게 말한다면 학문본위의 세계관에서만 적용될 수 있는 입장이다.] 이론학은 理性的인 觀照의 학문으로서 그 자체로 최고의 학문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봉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족적이고 귀족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위계적인 분류체계는 이후 자유교육 및 직업교육의 성질과 특징을 고려하는 데 계속 영향을 끼쳐 왔다.
희랍시대에는 제 학문이 포괄적으로 융합되어 있었고, 그 분류법 역시 이론적인 근거가 불확실하고 단순하였기 때문에 분류라기보다는 단순한 나열 이상의 것으로 볼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이 이후의 분과학문 발전을 예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도 역시 철학 내에서 구분가능한 분과들을 열거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방식이 지나치게 학문 위주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말하는 앎의 형태는 오늘날의 범주로 본다면 예술이나 제반 기예의 것을 포함한다. 현재 우리는 그런 지식들이 서로 독립적인 것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예술이나 기예의 자율성과 내재성은 그 후에 확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을 내재성과 외재성에 비추어 구분하는 앞서의 방식은 학문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는 적용될 수 있으나, 예술이나 도덕의 입장에서는 타당하지 못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에서 이론학 · 실천학 · 제작학 중 존재하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이론학만이 학문의 전통을 이루었고, 그 뒤 실천학과 제작학에 대한 관심은 학문 외적인 세계로 분리되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볼 때, 제작학의 범주에 드는 예술이나 실천학의 범주에 드는 윤리의 세계는 각각 그들 나름의 내재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또한 이론적인 앎 역시 그것이 실천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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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개선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예술과 윤리의 세계처럼 실천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학문 · 예술 · 도덕은 서로 환원되거나 그 위계를 따질 수 없는 독자적인 수도계들이다. 이들은 ‘진’ · ‘선’ · ‘미’라는 서로 다른 가치를 발전시켰다. 이 때문에 학문의 가치에 비추어 볼 때 예술이 외재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가치에 비추어 보면 학문이 외재적인 것이다. 그 가치기준이 다른 만큼 어느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각각의 세계 속에서의 실천의 성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가령, 학문의 기준에 의해서 예술작품을 평가한다거나 혹은 예술의 기준에 의해서 어떤 학문적인 이론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각각을 외재적인 가치에 의해서 평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의 수도계의 가치를 다른 수도계의 가치에 비추어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당한 것은 못된다. [각주 5: 이 경우 우리는 ‘범주착오’라거나 혹은 ‘논점이탈’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그것이 부당한 이유는 ‘금’을 ‘밝기’에 의해서 평가하고, ‘전구’를 ‘무게’에 의해서 평가하는 것이 부당한 이유와 같다.
중세에 이르러 모든 학문이 카톨릭교회의 엄한 통제하에 들어가 희랍철학의 근본개념은 기독교신학을 옹호하는 데에만 이용되었다. 따라서 당시에 보편적인 체계를 완성한 스콜라철학의 학자들도 신앙은 이성에 앞서서 학문적인 사색을 지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학문이 분화 · 발전하기는커녕 오히려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학문의 분류도 고대의 것을 정리 · 답습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고대 희랍과 로마에서 분류한 ‘교양과목’이 중세의 대학에까지 지속된 것이다. 이 분야들을 처음으로 분류한 카토(Cato: B.C. 234~149)와 바로(Varro: B.C. 116~27)는 문법 · 논리학 · 수사학 · 기하학 · 산수 · 천문학 · 음악 · 의술 · 건축 등 9가지를 교양과목에 포함시켰다. 후대에 오면 이 가운데 의술과 건축이 빠지고 이른바 ‘三學(문법, 논리학, 수사학)’과 ‘四科(기하학, 산수, 천문학, 음악)’의 구분이 굳어진다. 이 분야는 이미 로마시기에 철학 · 의학 · 법학 등의 전문분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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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예비단계로 간주되었으며, 중세 초기의 敎父들도 그 전통을 따랐다. 기원 4세기에서부터 고등교육의 정식 학과목으로 채택되기 시작한 이 ‘7 자유학과(Seven Liberal Arts)’는 중세기에 거의 표준적인 학문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학문 분류방식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대로 적용되기가 어려워졌다. 근대에 들어 와서 자연에 대한 연구가 왕성해지자 많은 개별 과학이 독립 · 분화함에 따라 과학분류 자체가 철학의 한 과제가 되었다. 이즈음에 베이컨은 정신능력의 구별을 기준으로 해서 과학을 분류하는 방식을 제안하였고 그것이 널리 채용되었다. 그 분류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이홍구, 1988. p.295).
이 분류에서 구분의 원리로 삼은 것은 인간의 정신능력의 차별이다. 베이컨에 따르면, 어떠한 학문의 연구도 모두 지적인 활동이며 학문은 지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적 활동에는 기억과 상상과 오성이라는 세 가지 형식이 있다. 베이컨은 이들에 상응하여 史學 · 詩學 · 理學을 나누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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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각 개별과학을 포괄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여기서 이학은 이론적인 학문이라는 의미로서 철학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모두 포함한다. 이 방법은 19세기 초까지 그대로 학계에서 통용될 만큼 널리 알려졌다. 예컨대,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달랑베르(D’Alembert)가 백과전서를 편찬할 때 이 분류를 대체로 채택했다(소광희 외, 1994, pp.151-152). 다만 그는 시학이 학문이라기보다는 예술이라고 하여 이를 빼고, 대신 자신의 전공영역인 수학을 자연과학 속에 넣어 보완하였다. 또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듀이(M. Dewey: 1851~1931)의 도서분류표도 이 방법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그러나 분류기준으로서 정신능력을 채택한 것은 원리상 큰 난점이 있다. 사실상 모든 학문에는 기억 · 상상 · 오성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학이 기억에 치중한다는 논법은 당시의 사학에는 적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오늘날에 적용한다면 시대착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는 단순한 기억의 나열이 아니라 사실을 선택하고 체계화시키는 과정을 또한 요구한다. 이것은 개념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고, 이 때 오성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또한 오성에 대응하는 이학 역시 베이컨이 말하는 기억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상상과 오성의 능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학문의 분류는 당대의 학문의 상황과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16 · 17세기를 통해 우리가 ‘과학혁명’이라고 부르는 획기적인 현상이 일어나면서 온갖 종류의 새로운 분과학문들이 출현했다. 새롭게 천문학과 우주론 · 역학 · 생리학 · 수학 · 광학 등 앞서 역사적인 사례로 지적된 제반 과학들이 출현했다. 이들은 비록 당장 획기적인 성과를 낳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생물계와 물질계의 수많은 물체들과 현상들에 대한 지식을 낳았고, 18 · 19세기를 통하여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과학분야들을 형성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세기에는 대상의 특징에 의해서 학문을 분류하는 방법이 나타났다. 전형적인 것이 다음의 표와 같은 분트(W. Wundt: 1832~1920)의 분류이다(이홍구, 1988,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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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볼 수 있듯이 분트는 우선 학문을 형식과학과 실질과학으로 구분하고, 다시 후자를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으로 분류하였다. 그는 달랑베르의 분류 이후로 많은 학자들이 자연과학에 편입시켰던 수학을 순수 형식과학으로 구분하여 경험적인 실질과학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수학은 경험적인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경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수학에서의 개념구성은 경험의 한계를 초월한다. 경험적인 실질계는 자연계와 정신계로 나누고, 이를 다시 각각 세 가지로 구별하였다. 첫째,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인과관계에 따라 규칙적인 결합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현상론적이라고 하고, 둘째, 대상의 성질이 갖는 친근성의 같음과 다름에 따라 조직적으로 배열 · 기술하는 방향을 취하는 것은 조직론적이라고 하였으며, 셋째, 대상의 생성발달을 연구하는 방향을 취하는 것을 발생론적이라고 하였다. 또한 분트는 경험적 실질과학 중 자연과학과 대비되는 정신과학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그들은 (1) 정신과정의 학문으로서 심리학 및 그와 유사한 특수학문, (2) 정신적인 소산의 학문으로서 법률학과 경제학 등의 특수학문, (3) 이 두 가지 학문들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는 발생론적인 과학으로서 일반 역사 및 특수 역사이다. 이 중에서 심리학은 정신과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으로 특수한 여러 정신과학과 대비하여 일반 정신과학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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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하였다.
이 분류에서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당시 하나의 경험과학으로 성립한 사회과학이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정신과학과 문화과학은 주장자의 입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들이 자연과학과 대비하는 학문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같은 범주로 다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 때 분류자의 주관이 개입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앞(3.1.6.)에서 소개한 바 있듯이, 분트는 1879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세계에서 최초로 심리학 실험실을 창설한 근대심리학의 원조이다. 그의 정신현상의 연구법은 자연과학의 연구법과 별다른 차이가 없고, 또 별다른 목표를 갖지 않는다. 위의 분류는 그의 그와 같은 학문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서, 이는 학문의 분류에 당시의 상황보다는 그 상황을 해석하는 학자의 편견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의 서남학파는 대상이 아니라 방법의 차이에 의한 분류를 주장하고,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을 구분하였다. 예컨대, 빈델반트(W. Windelband: 1848~1915)는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의 차이가 대상의 차이에 있지 않고 인식목적의 형식상 특성에 있다고 보고, 그들을 연구방법으로써 분류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학문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 하나는 법칙을 구하는 ‘자연과학’으로 하고, 다른 하나는 개개 사실의 특성을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 과학”으로 하였다. 전자에 있어서 개개의 사상은 다만 보편적 현상의 하나의 실례에 불과하며, 그 현상의 공통된 성질만이 고찰의 대상이 된다. 이에 반하여 사적 과학은 과거사상을 그 개성에 따라 새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방법적인 기준에 따른다면, 심리학은 그 대상으로 말하면 자연과학과 구분되지만, 연구방법의 면에서는 자연과학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의 심리학이 보편적인 법칙의 발견에 치중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이를 자연과학에 편입하였다. 그러니까 분과학문으로서 심리학은 논자의 입장에 따라 다른 학문의 범주로 분류된 것이다.
서양의 학문사에서는 이 이외에도 많은 학자, 예컨대, 데카르트 · 칸트 ·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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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 콩트 등이 학문의 분류체계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전반적인 견해를 개진하였다. 데카르트는 분과학문의 분리 자체를 거부하고 하나의 보편적인 과학, 즉 수학에 의한 통일을 강조했다. 근래의 수학적인 모델 · 통계적인 방법 · 체계분석 · 컴퓨터 공학 등의 응용은 이런 데카르트의 시도에 부합한다. 칸트는 자연과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의 지식과 도덕 및 미적인 지식 간의 차이가 어떤 것인가를 논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에 따르면, 후자는 자연과학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비코(Vico: 1668~1744)는 학문의 개념을 정서적 언어와 비합리적인 활동까지를 포괄하는 것으로 확장했다. 실제로 그는 상상의 논리를 이성의 논리에 추가했다. 콩트는 ‘실증적인’ 분과학문을 그들 간에 점증하는 의존도와 복잡성에 따라 위계화하였다. 그에 의하면, 생물학의 연구는 화학적인 지식을 전제하고, 화학은 물리학과의 사전 접촉을 전제하며, 물리학은 수학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런 제반 분류방식은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모두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다.
학문체계의 전체의 조감도를 직접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논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동안 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논의까지 고려한다면, 그 범위는 거의 전 학문사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 주장은 계속되고 있다. 예컨대, 근래에 논리실증주의자인 에이어(A. J. Ayer, 1936)는 논리적인 일관성에 비추어 그 진위가 구분되는 분석적 지식과 감각적인 경험에 의하여 검증될 수 있는 종합적 지식만이 의미가 있고, 그 이외의 것은 무의미한 말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이 기준에 의하면, 이제까지 철학에서 다루었던 형이상학이나 가치론적 논의는 이 가운데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에이어의 입장에서는 그것들은 지식의 범주에 들 수 없는 것이다. 한편, 하버마스(1968) 같은 학자는 학문적인 지식은 어쩔 수 없이 가치와 관계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지식의 유형은 행위의 유형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보고, 주로 사건의 예언과 통제를 목적으로 삼는 ‘기술적’ 관심, 사회적 통합을 의도하는 ‘실제적’ 관심, 이 양자 간의 모순을 해결하고 지양하는 ‘해방적’ 관심을 구분하였다. 여기서 비교적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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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것은 이들이 다분히 자신의 입장이나 논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학문을 분류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무수한 학자들의 학문에 대한 분류방식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6: 학문의 분류에 대한 더 자세한 사례는 소광희 외(1994)를 참조하시오.] 그러나 그런 분류는 시대와 장소, 논자의 인식론적 입장과 수준 그리고 논의의 맥락을 감안하여 적절히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의 논의맥락에 비추어 볼 때, 관심을 가져야 할 측면은 분과학문을 교육과 관련지우는 것이다. 이 장의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분과학문을 분류하는 일은 그들을 교육의 소재로 선택하는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수도계를 가지고 교육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교육의 소재가 되는 수도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알아두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교육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대학이나 그 이전 단계의 학교가 모든 학문을 교육과정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제도로서의 제반 학교는 당대의 관심과 지배적인 세력에 따라서 대개 감당할 수 있는 숫자로 분과학문을 구분하고, 그 중 어떤 것을 선택하거나 비중을 달리하는 방식을 택해 왔다.
이와 관련하여 그 동안 많은 제안들이 있었다. 예컨대, 슈압(J. J. Schwab, 1964)은 (1) 이론적인 학문(자연과학 · 수학 · 비규범적 사회과학), (2) 선택 · 결정 · 행위와 관련된 실제적인 학문(윤리학 · 정치학 · 교육학), (3) 제작하는 일과 관련된 생산적 학문(응응예술 · 공학)의 세 가지를 추천한다. 이런 분류는 현대판 아리스토텔레스적 분류라고 할 만하다. 한편 피닉스(P. H. Phenix, 1964)는 제반 학문영역이 6가지 의미영역(symbolics; empirics; synoetics; esthetics; ethics; synoptics)의 하나에 속할 것으로 보았다. 최근에 허스트(P. H. Hirst, 1974)는 분과학문내의 명제들이 갖는 개념과 논리적인 구조 그리고 그 명제들이 평가되는 진리의 기준을 고려하여 서로 구분되는 7가지의 지식의 형식(수학 · 물리학 · 대인관계의 지식 · 종교학 · 문예 · 철학 · 도덕적 지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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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한 바 있다. 이 이외에도 우리는 수많은 제안을 접하고 있다. [각주 7: 이 방면의 더 자세한 제안의 목록은 Donald(1982)를 참조하시오.] 그러나 다양한 제안에서 아쉬운 점은 그것들이 특별히 교육의 소재 면에서 의미 있는 분류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교육의 소재라는 면에서 학문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탐구의 여지가 있다. 단지 서로 구분될 수 있는 분과학문이라는 사실만으로 혹은 그들이 다소나마 포괄적인 것들이라고 해서 곧 교육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식체계의 횡적 상대성보다는 그것들이 어떻게 분화되고 어떤 발생적 계열을 따라 발전하였느냐 하는 종적 상대성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교육이란 바로 그처럼 종적으로 상대성이 있는 지식들을 발생적으로 연결짓는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하겠으나, 발생적 측면을 고려할 때 앞서 우리가 학문의 발전단계에서 그때그때 정리해 왔던 제반 분류체계가 교육의 소재 면에서 더 큰 시사를 줄지도 모른다. 만약 그들이 학문의 각각의 발전단계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한 개체의 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한다고 가정하면, 한 개인이 학문을 통해서 거치는 각 단계의 교육의 소재는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소재의 가지치기라는 양태를 띠게 될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플라톤적인 융합적 단계에서 점차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분화되는 분류의 순서를 따라 교육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교육의 계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친 가설에 불과하며 앞으로 검증을 필요로 한다.
학문의 분류방식에 어떤 통일성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학문의 발전적 전개에 따라 양상은 시대마다 달라지고 있고, 우리의 구분법은 그 변화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학문의 구분법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분야의 의미 있는 연구를 기대하고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학문적 활동의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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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중심으로 하는 분류에는 언제나 특수성이 개재된다는 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하의 논의에서 학문의 분류를 그런 특수성을 떠나서 좀더 동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을 택해 보기로 한다. 대개 학문을 분류한다고 할 때, 그 분류의 기준으로서 (1) 사용되는 개념의 성질(친밀성, 일반성, 추상성), (2) 논리적 구조(그 영역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나 명제가 관련되는 양식), (3) 사용되는 진리기준, (4) 지식을 탐구하는 데 중요하게 사용되는 방법과 기술 등을 드는 것이 통례이다. 나는 이런 분류체계를 (1) 독특한 문제와 개념틀, (2) 진리관과 방법론의 두 가지로 요약하고, 다른 하나의 의미 있는 차원인 (3) 학문공동체를 추가시켜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한 뒤, 각각의 범주와 관련하여 분과학문이 어떻게 출범하게 되었는지를 가장 인상깊은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서 검토해 보려고 한다. 이런 논의는 하나의 새로운 소규모 수도계가 발전하는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분과학문의 시원적인 사례를 드는 또 다른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본 장의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분과학문이 출현한 사례들을 통해서 이제까지의 교육학을 반성해 볼 수 있는 비교와 비판의 준거를 얻기 위함이다. 교육학도 하나의 분과학문이며, 그것이 출현하는 과정은 하나의 소규모적인 수도계가 출현하는 경로와 같은 경로를 거칠 것이다. 교육학은 진정 하나의 특별한 분과학문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과제를 우리가 당면과제로 삼고 매진하려고 할 때, 그것은 이 특정한 학문을 새롭게 출범시키는 데 진정으로 필요한 작업인가? 이런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이 부분을 살피는 독자가 있다면, 그는 벌써 본 저서의 의도에 동참하는 셈이다.
3.2.2. 독특한 문제와 개념틀
개별학문은 그 나름의 自律的인 可解性이 있는 고유한 탐구대상을 확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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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야 한다. 그들은 서로 환원할 수 없는 독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유한 세계를 내적인 정합성에 따라 이론적으로 분할한다. 무엇이 특이한 탐구의 대상인가? 어떤 종류의 질문이 제기되며, 어떤 종류의 자료가 수집되는가? 개념적 구조는 탐구하는 주제의 이해에 공헌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분과학문마다 상이할 수 있다. 우리가 앞서 근대학문의 변천과정에서 분과학문으로 성립되는 학문의 사례로 든 것들은 모두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과정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서 독자적인 개별학문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로서의 지식의 체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후속하는 절(3.3.)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분과학문이 자율화되는 과정을 거쳤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과 똑같은 경로를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우선 그것이 추구하는 인식대상 자체가 자율적인 현상이어야 한다. 그 다음에 탐구되는 주제에 알맞은 개념적인 범주가 창출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 대상의 본질에서 일어나는 필연성에 부합하는 적절한 개념화가 진행됨으로써 시작된다. 학문을 분과화한다는 것은 자신만이 추구할 수 있는 탐구의 범위를 한정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핵심영역과 부수적인 영역을 구분하는 일이다. 어떤 대상을 특정한 내재적 체계에서만 포착하고 그 나머지를 배제하는 선별작업이 필요하다. 본질적인 것에는 주목하고 비본질적인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 무수한 시험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시험의 결과는 최종적인 단계에서 적절한 개념에 의해서 정리될 수 있어야 한다.
개념은 모종의 범주와 조직을 통해서 사고를 안정시키고 명료화한다. 그 개념에 적절한 명칭이 부연된다. 이들 각 학문의 핵심 개념은 우리들로 하여금 특이한 인식대상에 주목하도록 유도한다. 그들은 그 학문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응집력이 강한 거점의 기능을 한다. 각각은 그 나름의 고유한 개념, 그들 간의 관계를 다룬 명제들을 조직하는 원리에 의해서 고유한 맥락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독특한 의미의 세계를 창출한다. 이로써 대상세계와 여타의 세계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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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물론 분과학문 가운데서도 인문과학의 경우처럼 구조성이 비교적 느슨한 것이 있는가 하면, 논리학이나 수학 혹은 자연과학처럼 구조성이 꽉 짜인 것도 있다. 그러나 어떻든 최종적으로는 개념구조가 바로 특정한 분과학문의 현상을 그 학문의 고유한 대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세계가 서로 구분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각 분과학문은 그 가운데 하나를 고유한 인식대상으로 탐구해 온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물리학은 물리현상을 연구하고, 생물학은 생물현상을 연구한다”라는 식의 생각이 그런 태도를 대표한다. 이 말은 틀린 것은 아니다. 아니, 너무도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념적인 순환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논리적 확실성을 도출한 것에 불과하다. 물리현상 혹은 생물현상이 무엇이냐 하는 더 구체적인 요구와 더불어 문제는 더욱 어렵게 되며, 그 해답은 학문의 종사자에 의해서 어떻게 탐색되었고 개념화되었느냐 하는 복잡한 과정과 관련하여 모색되어야 한다. 사실이란 어떤 것인가? 이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사실로서 객관적으로 부각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을 사실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것에 대한 체험적 혹은 이론적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한 분야에서의 사실이 다른 분야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의 독립된 분과학문의 위상은 기존의 학문이 다루지 못한 실재, 사실, 혹은 탐구대상을 확보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에는 기존의 학문을 배타하는 메타학문적 논의가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 분과학문의 연구대상은 무엇인가? 연구방법에 있어서 다른 분과학문과 어떻게 연관되고 구분되는가? 예컨대, 자연과학에서 생물학은 유기체가 물리학이나 화학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고유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였다. 또한 수학은 그것이 자연과학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했지만, 전자가 후자에 의해서 연구될 수 없는 독자적인 특징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만 자율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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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물리학 · 화학 · 생물학처럼 어떤 경험적인 내용을 가진 실질과학이 아니라, 명시된 공리체제로부터 엄밀한 논의에 의해서 연역체제를 기술하는 형식과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학 역시 하나의 분과학문으로서의 위치를 지금까지 향유하고 있다. 그것은 그 논의가 정당화될 만한 응분의 역사를 가짐에 따라 획득된 특권이다.
그러나 그런 장구한 역사적 배경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의 새로운 분과학문의 위치를 확보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메타학문적인 타당성은 역사적으로 입증됨으로써만 일반으로부터 그 타당성을 자연스럽게 입증받게 되는데, 새롭게 주창되는 분과학문은 그것이 주창되는 시점에서는 아직 그 대상의 고유성이 충분히 입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존의 학문은 적어도 긴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경우나 그것은 그 전통적인 안목으로 사람들을 안내할 안정된 신념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이 다루지 않는 새로운 탐구영역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들과 동등한 분과학문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마치 하나의 씨앗이 거목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성장해야 하는 것처럼 모든 면에서 불리하다. 가장 설득적인 방법은 그 분야의 지식을 납득할 만한 수준과 범위로 제공하는 것인데, 신생학문은 항상 그것의 정당성을 확보할 만한 자료를 축적하는 데에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직 모든 것이 불명료할 뿐만 아니라, 분과학문의 지위를 인정받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단시일 내에 납득할 만한 자료를 축적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의 초창기에 그것을 창도한 학자는 그 불리한 게임을 이겨낼 만한 인내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마치 중량급 권투선수와 경량급 아마추어 선수 간의 한판승부와 같은 것이다. 더구나 승부를 심판하는 일반대중도 기존의 학문편에 경도되어 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분과학문이 그 나름의 자율성을 가지고 독립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역사는 이제까지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여기에는 항상 탁월한 창도자와 그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학문공동체의 끈질긴 집념과 열정이 작용하고 있다. 특정한 학문적인 대상을 포착하는 독특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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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는 비범하며 탁월한 인식능력을 가진 창도자의 독창적이고 특이한 안목에서부터 발원한다. 아무리 탐구대상이 자율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타학문을 쉽게 끌어들이는 태도를 가지고서는 그것이 제 모양으로 포착될 수 없다. 따라서 초기에는 기존의 학문의 침범을 경계하는 배타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그들은 선견지명을 가지고 자신들이 포착한 현상이 기존의 학문으로서는 탐구될 수 없다는 메타학문적인 입지를 먼저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기존의 학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이 부분이고, 새롭게 출범할 학문의 위치는 저 부분이라는 식의 구분을 가능케 하는 맥락이 어렴풋이나마 제시된다. 전인미답의 탐구영역이 확보되고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분과학문 혹은 학풍이 태동한다. 최초의 독보적인 인물이 창도한 대상에 대해서 관심과 열의를 함께 나누는 소수의 사람들이 서로 만나 큰 용기를 얻고 결속하여 서로가 서로를 뒷받침하는 지주가 된다. 하나의 강물은 그 하상에서 살펴보면, 장구한 세월을 두고 점차 폭과 깊이를 넓히면서 흐른다. 마찬가지로 분과학문의 경우에도 하나의 주제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가면서 변모하고 발전해 나간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간다”는 말은 학문이 학자들 서로가 서로를 기반과 비판의 자료로 삼아 발전한다는 말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앞선 사람의 탐험이 뒷사람에게 이어진다. 우리는 앞 절(3.1.)의 각 분과학문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분과학문의 발전에 이정표를 세운 학자들을 거명하였다. 분과학문마다 이처럼 역사상 자체의 학문형성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무수한 학자들을 마치 자신의 조상처럼 기억하고 흠모한다. 이들은 각각 그들이 소속한 분과학문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남다른 공헌을 하였다. 그들이 각 분과학문의 개론서에서나 학문사에서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것은 그들이 제안한 이론이나 지식이 지금까지 타당해서라기보다는 지금의 지식까지 발전하는 데 있어 징검다리의 돌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학문만이 추구할 수 있는 인식의 대상을 새롭게 규정하고 확장하며 혹은 수정하는 어려운 작업을 하였다. 그들의 이런 투쟁적이고 개척적인 이야기는 각 분과학문의 역사에서 선조에 대한 자랑으로 기록된다. 그들은 마치 전인미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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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이나 영토를 개척한 영웅에 상응하는 공적을 인정받는다.
우리는 그 숱한 인물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세 사람을 선택해서, 본 절의 주제와 관련하여서 그들이 이룩해 놓은 공적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들은 사회학에서의 뒤르켐(E. Durkheim: 1858~1917), 언어학에서의 소쉬르(F. de Saussure: 1857~1913), 그리고 철학에서의 후설(E. Husserl: 1859~1938)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선택된 것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은 거의 1~2년 사이를 두고 출생한 동시대인들이다. 불과 전 세기 말에서 금세기 초에 활동한 학자라는 점에서 우리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둘째, 그들은 당시까지 기승을 부리며 학문의 신흥세력을 이루었던 자연과학의 분야가 아니라, 인문 · 사회과학의 분야에 속하는 학자들이다. 이 가운데 뒤르켐은 자연과학적 방법을 그대로 준수하려고 하였지만, 소쉬르와 후설은 독특한 방법론은 스스로 고안하였다. 셋째, 그들은 한결같이 그 대상영역은 다르지만, 하나의 분과학문의 탐구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필생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들은 한 운동의 초기에 있어서 주창자에게 요구되는 뛰어난 창의력, 투쟁성, 그리고 이론적인 융통성의 희귀한 결합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그 학문이 웬만한 결실을 맺기까지 수만의 학자들이 족히 수십 년을 매달려야 할 창의력과 인내를 요하는 고된 작업을 수행하였고, 그 관심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새롭고 튼튼한 개념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들 창시자의 이론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판의 여지가 많다. 역설적일지는 몰라도 아직까지도 창도자의 입장이 금과옥조되고 있다면 그 학문은 실패한 것이며, 따라서 오늘날 그는 창도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한 분야의 창도자를 소개할 때, 우리는 그들의 입장이 지금까지도 올바른 것으로 통용되고 있느냐의 여부를 떠나 하나의 분과학문을 성립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그들이 대상세계를 기술하는 고유한 기본구조와 토대를 구축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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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회학은 자타가 인정하는 자율적인 분과학문이다. 사회학을 그 결과로서만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수천 년의 기나긴 역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과 200년 전만 하더라도 그것이 탐구하려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는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앞(3.1.8.)에서 지적했듯이 사회학의 독립된 위상의 문제는 콩트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이런 저런 학문 가운데 사회학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다는 메타학문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기존학문의 모델과 유추를 적용하여 ‘사회공학’ · ‘사회물리학’ · ‘사회정학’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였으나, 도대체 그 대상이 어떤 점에서 특수한 것이었는지는 쉽게 드러낼 수 없었다. 공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기존의 학문에 의존함이 없이 사회학 고유의 탐구대상을 고집하고, 그 현상을 독립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집념을 불태운 사람은 그 후에 나타났다. 그가 바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뒤르켐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적 사실이 타학문의 사실에 비해 ‘의존성’의 면에서 하위에 속한다는 콩트의 주장을 넘어서서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의 실재성과 독립성에 더 큰 우선성을 부여하였다. 그것은 개인으로부터 외재해 있으면서 그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는 모종의 집단적 실재인 것으로 가정되었다.
뒤르켐은 사회학이란 타학문이 주목하지 않는 사회적 사실을 탐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율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의 지위를 보다 확고하게 정립하려는 남다른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대에 이미 과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심리학을 의식하여 사회가 개인들을 단순히 합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성립시키려고 했다. 개인들의 연합에 의해서 형성된 체계는 그 나름의 특성을 가진 하나의 특수한 실재를 대표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기존의 학문에 비추어 사실을 규정하기 때문에 그것이 충분히 밝혀지기 전에는 그 실재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예컨대, 그가 사회적인 사실인 것으로 내세웠던 이른바 ‘집단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의 개념은 이미 개인주의가 미덕화되기 시작한 당대의 시대사조에서는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그 실재성을 입증하기에는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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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신비로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만약 집단의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 심리학의 한 영역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심리학으로 충분히 포착할 수 있는 인식대상인데 굳이 그것을 사회적 사실로 볼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의 반응은 이처럼 기존의 학문에 영토의 우선권을 쉽게 양도하기를 요구했다. 그래서 그는 필요에 따라 당시의 다른 분과학문에서 그 유추를 끌어내어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려고도 하였다. 예컨대, 화학적 합성물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종류의 성질을 가진 생명체를 구성하듯이 개개인의 결합에 의해서 사회가 구성되며, 그 사회는 구성원의 심리적인 특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성질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사회학은 그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할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성질을 가진 실재로서의 사회적 사실은 당시의 일반 사람들이나 학문계에게는 지금처럼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뒤르켐은 아직 그 대상의 실재성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사실의 실재성을 사람들에게 설득시켜야 하는 난제를 해결해야만 하였다. 적어도 뒤르켐 자신에게는 사회적 사실이라는 것이 분명히 실재하는 것으로 보였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 그의 <자살연구(1897)>이다. 흔히 자살을 설명함에 있어서 심리학적 · 생물학적 · 유전학적 · 기후적 · 지정학적 요인들이 제시되었다. 거기에 그는 상이한 자살률이 사회구조상의 차이, 특히 사회적 연대의식의 정도와 유형에 기인한다는 사회학적인 설명을 하고, 광범한 통계적 자료를 가지고 그 설명을 뒷받침했다. 많은 경우 그의 사회적 사실에 대한 확신은 이후의 사회학의 발전에 의해서 충분히 타당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의 관점이며, 그 당시의 관점이 아니다. 그가 그 사실을 주장할 당시의 실정으로는 오늘날의 사회학적인 제반 사실들이 모호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정에서 사회적 사실이라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오직 사회학적 탐구의 몫이라는 그의 주장은 황당하게 들렸고, 대중에 대한 그의 설득은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뒤르켐이 말하는 사회적 사실은 그 실재성이 당시로서는 뚜렷하고 충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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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증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도 그에게 있어서는 신념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적 사실이 아직 충분히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럴 때가 오리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 신념은 오늘날에 와서는 이미 기정사실로 확정되었지만, 그처럼 사회적 사실의 존재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 학문적 풍토에서는 그것을 견지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주저의 하나인 <사회학적 방법의 제반규칙(1895/1964)>에서 뒤르켐은 그런 확신과 조바심을 피력한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해서 앞으로 사회학이 취해야 할 방법을 제시하고, 끝부분에서 그가 말하는 사회적 사실이 추후에 사회학자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밝혀질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사회학은 어떤 다른 과학의 보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특징 있고 자율적인 학문이다. 사회적 실재는 특수성을 갖는다는 느낌은 사회학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런 느낌을 가져야만 특징 있는 사회학적인 훈련이 있을 수 있고, 그 훈련에 의해서 사회적 사실을 지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학이 장차 이러한 것들을 성취하여 중요한 진전을 가져와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과학이 탄생되는 과정에 있을 때, 그것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제반과학의 모델을 참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 제 과학은 귀중한 경험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무시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과학은 그것이 자체로서 독립성을 성취했을 때에만 비로소 분명하게 정립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제반 과학들이 연구하지 않는 사실들의 질서를 자체의 연구주제로 확보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
분명히 사회학이 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될 시기는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이 역할을 완수할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당장 그 작업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pp.145-146).
이 글에서 우리는 새로운 분과학문을 정립하려고 할 당시 초기의 학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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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의 고유성을 일반인들에게 설득하는 데 있어 얼마나 어려움을 경험하는지 다소나마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 뒤르켐의 사회학 이론이 얼마나 타당하게 평가받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관심 밖의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회학이 뒤르켐이 보여준 것과 같은 고유한 대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그것만을 집요하게 추구하려는 배타적 집념을 견지하지 못했다면, 오늘날과 같이 확고한 자율성을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뒤르켐은 사회적 사실이 타학문에서 탐구할 수 없는 고유한 대상이며 그 점에서 사회학은 기존의 다른 학문에 환원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았고, 이후의 사회학자들은 그의 신념과 집념의 근거를 다행히도 점차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뒤르켐이 그토록 달성하기가 요원하게만 보였던 사회학이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는 의젓한 분과학문이 되었다.
사회학이 학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정초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또 다른 하나의 분과학문이 자율화의 계기를 만난다. 이 시기에 언어학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데 남다른 노력을 한 인물은 소쉬르이다. 그가 이런 작업을 시도할 때, 언어학은 앞서의 사회학과는 다소 다른 종류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뒤르켐은 이전에 별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학문을 학문의 공화국의 한 공터에 세우는 문제에 직면했음에 비해, 소쉬르는 오래 전부터 이미 있는 언어학이라는 오래된 학문의 전통을 해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언어학을 세우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점에서 그의 공헌은 언어학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교육학이 당면한 문제나 그것을 극복하려는 우리의 시도와 너무도 그 맥락이 유사하기 때문에 특별히 독자의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다.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관련된 구체적인 현상은 성격상 混質的이고 多面的이다. 그것은 물리적 · 생리적 · 역사적 · 철학적 · 미학적 · 문화적 · 심리적 · 사회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그것은 19세기 말까지 모든 학문의 관심사가 되었고, 전통적인 언어학은 그런 단편적인 관심을 집성하는 형식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언어학은 하나의 공분모에 환원시킬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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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또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 속에 융합시킬 수도 없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단순히 종합하는 일종의 雜學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회의가 점차 대두되었다. 언어학의 특수한 대상은 무엇이냐? 언어에 있어 본질적인 것은 무엇이냐? 이런 질문과 더불어 언어학을 타학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언어 자체를 고유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으로 정립시키려는 기운이 점차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언어의 내재성을 추궁하기 위해 비본질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요소들을 다루는 외재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선택된 대상을 하나의 독특한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작업이 새롭게 진행되었다.
새로운 문제제기와 탐구의 작업에 앞장 선 소쉬르는 프랑스어 · 독어 · 영어 · 라틴어 · 희랍어를 능통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배경적 자질을 갖춘 그는 기존의 사적 언어학과 비교언어학이 언어 자체의 속성을 연구하고 있는 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새로운 언어학의 탐구에 몰두하였다. 그 때까지의 언어학이 내재성의 원리를 정립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타학문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언어학이 고유하게 부각시켜야 할 언어현상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되었다. 그는 이제까지 간과되어 온 언어학의 대상을 찾기 위해서 숨이 막힐 정도로 엄격한 학문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언어학의 자율성을 보장할 기초를 다져 나갔다. 이제까지 언어학이 대상으로 삼아왔던 혼질적인 것을 순수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맨 먼저 ‘言語(langue)’와 ‘言辭(parole)’를 구별하는 데에서부터 그 해법을 찾았다.
소쉬르(/1990)는 이렇게 말한다.
언어란 무엇인가? 그것이 확실히 본질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정한 부분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언사와 혼돈될 수는 없다. 언어는 언사의 능력의 사회적 부산물이며, 개인들이 그 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사회구성원에 의해 채용되어 왔던 필수적인 인습의 집합이다. 대체로 언사는 다방면적이고 이질적이다. 즉, 동시에 물리학적 · 생리학적 · 심리학적 등 여러 영역에 걸친다. 그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관련된다(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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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사는 어떤 개인이 어떤 순간에 언어를 구사하는 측면이며, 언어는 그 언어활동의 한정된 일부분이다. 즉, 언어는 하나의 사회적 제도로서 언사로 실현되기까지 같은 언어공동체의 뇌리에 항상 준비되어 있는 하나의 추상적인 약속체계이다. 그러니까 언사와 언어는 서로 다른 사실이다. 이처럼 두 가지 사실을 개념적으로 구분해 놓고서 소쉬르는 각각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두 가지 종류의 언어학, 즉 “언사의 언어학”과 “언어의 언어학”을 구분하였다. 전자는 구체적인 언어활동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타학문의 침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하여 후자는 언어학의 독자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소쉬르는 전통적인 “언사의 언어학”을 버리고 “언어의 언어학”을 추구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언어학이 자율적인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자기 폐쇄성을 전제해야 했다. 소쉬르는 언어를 언사의 행위뿐만 아니라 통합성과의 관련하에서만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언사에 대립된 의미의 언어는 자기충족적인 전체(a self-contained whole)이며,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끌어들임이 없이 이해될 수 있는 실재라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그 실재를 연구함으로써 언어학이 자율성을 가질 것으로 믿었다. 즉, 그는 언어를 하나의 자율적인 체제로 보고 그러한 언어체제가 가지고 있는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였다. [각주 8: Saussure의 방법론은 후에 구조주의적 방법의 시원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제 5장에서 소개될 것이다.] 소쉬르가 추구하는 언어는 기호들이 상호 관련을 맺음으로써 고유한 의미를 부여받는 닫혀진 기호체계에 해당된다. 그는 언어 외적인 사실에 의존하면 언어기술의 내재성에 편견이 개입될 우려가 있다고 보고, 일체의 외부적 학문의 개념이 언어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배타적인 태도를 시종 견지하였다. 이처럼 하나의 자기 충족적 체계로서의 언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언어학이 종국적으로 분과학문으로써 그 나름의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의 확신은 옳았고, 그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 오늘날 언어학은 자율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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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출현시킨 공로자로서의 소쉬르의 고충은 우리가 그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당시로서 그는 엄격한 학문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의미의 언어의 본질을 쉽게 밝혀낼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단순한 언어현상조차도 당시 그에게는 미궁의 실재였던 것이다. 그는 고뇌하였고 당시 그의 생각을 단 한 줄의 글로도 쓸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학술용어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 그것을 쇄신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일반이 어떤 학문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의 언어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즐거움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언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골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보다 더 절실한 것은 저에게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 말은 물론 역설적인 표현이다. 그의 소원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율적인 언어학을 창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일에 몰두했으며, 그 결과를 제네바대학에서 1907년, 1908~1909년, 1910~1911년의 세 번에 걸쳐 강의하였다. 1916년과 1922년에 제자들이 그의 강의노트를 그대로 <일반언어학 강의(1916)>라는 이름으로 재구성하여 출판함으로써 그의 고뇌에 찬 착상이 세상에 나와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통의 틀에서 안주하는 학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항상 현상유지를 원한다. 이런 풍토에서 그의 배타적인 입장은 기존의 언어학자들, 즉 소쉬르가 말하는 언사를 연구하는 언어학자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선견지명이 있는 통찰은 언어학계에 풍성하고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20세기 초두에 구조주의에 바탕을 둔 자율적인 언어학이 비로소 정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독창적 인식방법은 같은 프랑스어문화권인 스위스의 제네바와 프랑스에서는 바로 계승되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192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그학파에서 그리고 1930년대에는 덴마크의 코펜하겐학파에 의해 계승 · 발전되어, 구조언어학의 기틀이 잡혀갔다. 그리고 그 구조언어학이 결국 언어학을 독자적 학문의 위치로 격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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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타학문에 의존해야만 하였던 언어학이 이제는 타학문의 발전에 공헌하는 모델의 구실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레비-스트로스(C. Levi-Strauss)는 그의 관점을 적용하여 <구조주의 인류학(1958)>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구조주의적인 관점은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 문학비평의 자율성을 모색하는 데에 계기를 제공했다(이경수 외 역, 1991). 이들은 소쉬르의 논법을 따라 전통적인 문학연구자들이 문학과의 관련성을 찾으면서 심리학 · 역사학 · 정치학 · 경제학 등 실지로 인간지식의 모든 분야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부정하고, 문학의 연구가 ‘文學性(literaturnist)’에 국한되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비평의 자율성을 찾고자 했다.
뒤르켐이나 소쉬르가 생존했던 것과 비슷한 시기에 자신이 속한 학문공동체의 정체성을 두고 남달리 고민스러운 일생을 보낸 학자가 있다. 후설은 분과학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철학의 진로에 관심을 가졌다. 학문이 역사에 나타난 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이라면 철학도 그만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가 긴만큼 그 문제의식이나 내용도 다양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저마다 철학이란 무엇인지라는 물음을 되풀이해 왔다. 그러나 아직도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치된 해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더구나 그 동안 다양한 분과학문이 출현함에 따라서 철학은, 이제 “모든 학문을 다한다”는 왕관을 어떻든 간에 지킬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여기서 철학이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이 나오게 된다. 이전의 철학의 영토를 모두 차지할 수 없다면 이제 철학은 그 세태의 변화에 맞게 그 나름의 분과학문으로서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고유한 문제의식과 방법론의 기반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과연 철학이 그런 의미의 새로운 분과학문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현대의 철학도들이 해결해야 할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다.
이런 문제상황에서 철학은 다행히 후설이라는 철저한 학자와 만난다. 처음에는 수학을 배웠으나 브렌타노의 강연을 듣고 감동하여 철학으로 그 진로를 전향한 그는 남달리 치열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당시 위기에 처한 철학의 활로를 추궁하여 나갔다. 수학과 자연과학의 배경을 가진 그는 처음에는 산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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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할 수 있는 논리적 · 심리학적 기초에 천착하다가 스승인 브렌타노의 심리주의를 떠나기로 작정한다. 왜냐하면 당시 심리학은 경험과학에 합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신 순수한 논리주의적인 입장을 확립한다. 즉, 논리학을 경험적 심리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주관의 사유작용에서 논리적인 것을 빼내어 순수하고 객관적인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더 나아가 그는 의식의 체험을 다루면서 의식의 본질을 志向的 作用으로 보고 그 구조를 현상학적으로 해명하였다. 의식과 그것의 지향적 대상 사이의 상관적인 관계에서 본질을 즉각적으로 파악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또 지식의 확실한 근거를 찾아 의식주관성의 내재적 영역으로까지 환원해 들어가는 태도를 일층 철저하게 함으로써 선험적 현상학을 확립시키게 된다.
여기서 ‘제일철학’ 또는 “철학의 기초학” 또는 “엄밀한 학”이라고 불리는 현상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전개될 수 있었다. 이것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제일철학이 된다고 하였다(Husserl, 1950, /1965). 현상학 자체가 엄밀한 학문성을 지닌 철학, 즉 “개념상 확고하게 경계를 형성하고 있고 충분히 그 의미가 밝혀진 문제들, 방법 및 이론”을 갖춘 엄밀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 때 주창하는 엄밀학은 누가 알거나 모르거나, 또 언제 어디서나 절대적 · 보편적인 진리 그 자체를 구명하는 오직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의 독단적인 專制와 사변적인 구성을 반대하고 대상을 추구함에 있어서 “사실 자체로!”라는 구호를 표방하였다. 그는 철학이 모든 선입견을 떠나서 직접적으로 주어진 사실을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하고 완전하게 기술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논리적인 엄밀성과 실증적인 즉물성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 모든 학적 철학과 공통된 기반 위에 서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생의 철학이나 실존철학과도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후설의 고집스러운 탐구로 태동된 현상학은 그 후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나 방법론적인 면에 있어서 각 방면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Spiegelberg, 1982). 그 학파는 괴딩겐파 혹은 현상학파 등으로 불리었고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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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을 선도한 하이데거는 후설의 순수자아를 일상적인 실존으로 보아 이 실존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解釋學的 現象學”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곧 제 2차 세계대전 전후를 통해서 철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실존철학이다. 셀러(M. Scheler)는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여러 가지 구체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칸트의 형식적 윤리학과 대립되는 “實質的인 價値倫理學”이다. 또한 하르트만(N. Hartmann)은 후설의 현상학적인 방법을 특히 존재현상에 적용하여 “存在論的인 現象學”을 세웠다. 이와 같은 모든 새로운 성과에 대해서 후설 자신은 당시에 동의하거나 만족하지 않았지만, 이것들은 오늘날 철학사에서 뚜렷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3.2.3. 진리관과 방법론
모든 학문은 일정한 존재영역에 대한 인식을 목표로 하는 지적 행위이다. 인식이란 포착된 현상을 적절한 방법으로 올바르게 해명하였을 때 일련의 진술로 조직화되어 하나의 지식의 체계, 즉 학문영역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는 그런 지식을 생산해내는 규칙과 지식의 진리성이 검증받고 판단되는 기준 · 방법 · 절차 등이 포함된다. 해당 지식을 발견하고 검증하는 형식은 무엇인가? 증거의 질을 평가하는 데는 어떤 기준이 적용되는가?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사건들이 그 현상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같은 성질과 구조를 가진 것이라면, 그 세계에 대한 지식의 확립은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설명으로 충분하다. 반대로 세계가 각기 다른 성질과 구조를 가진 존재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지식확립의 방법도 또한 다양하지 않을 수 없다. 분과학문들 간에는 그 대상의 성격에 있어서 이질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탐구방법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분야가 다르면 방법도 바뀌게 마련이다. 상이한 방법은 상이한 개념적 단위와 의미를 창출해낸다. 따라서 한 분과학문이 채택하는 방법과 형식은 반드시 그 대상들의 독특한 성격에 적합한 것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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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연구방법은 그 대상과의 접촉에서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점차 개량되어 간다.
우리는 방법적 다양성을 제 5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이런 특색 있는 제반 방법은 언제나 특정한 문제풀이의 수단으로서 오랫동안 그 효과를 검증받는 가운데 발전된 것이다. 앞서의 개념틀의 조건과는 달리 분과학문 간에 서로 공유하는 방법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지식의 구조는 각 분과학문마다 고유하지만 방법의 경우 분과학문의 수만큼 그들이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그 방법이라는 것이 분과학문의 요건으로서 특별히 문제로 등장했던 사례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있는 논쟁이 많지만, 분과학문을 방법론에 비추어 구분하고자 했던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아마도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대립이 될 것이다. 자연과학은 정확한 설명과 경험적 검증을 중시함에 비해서 인문과학은 체험의 진실성과 해석의 풍부성을 강조한다. 역사적인 전통에 비추어 본다면 인문과학이 자연과학에 앞선다. 그러나 그 위세가 역전되는 시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연과학적인 방법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였다. 자연과학이 택한 방법의 효과는 너무도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인문과학에 속하는 철학자들에게서도 자연과학의 방법에 최종적인 권위를 주는 인식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인문과학의 인식대상은 결코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탐구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들 간의 방법적 논쟁은 뿌리가 깊다. 그 경위는 대강 이렇다.
근대과학이 철학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분과학문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 나름의 학문관과 방법론이 형성되었다. 이 방법은 당시까지 남아 있던 중세적인 신학에서 독립하여 과학의 자율성을 추진하는 유망한 방법론의 전통을 이루었다. 중세의 스콜라철학은 공허하게 옛날의 문헌에 나타난 것들을 믿고 따르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정된 세계관으로부터 학문을 해방시키는 데 합리적 방법론이 가세하였다. 그것은 우주 안에서 모든 초자연적인 것 내지 신비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우주 안의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명했다. 이런 합리주의적 태도는 영국의 경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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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더불어 대륙의 합리론에 공통된 것이다. 베이컨의 이성적 실험과 귀납의 여러 규칙들을 서술하고 있는 <노붐 오르가눔>은 1620년에 저술되었다. 그 후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1637년에 최초로 출간되었다. 경험을 통해서 객관적인 대상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 또는 원리를 발견해 나간다는 것이 경험론의 특징이다. 그 방법으로서 관찰 · 귀납 · 연역 · 조사 · 실험 · 계산 등이 제시되었다. 이런 과학관은 베이컨 이래 갈릴레이를 거쳐 뉴턴에 이르는 동안 성립된 것으로서 마치 그것이 학문의 모든 것처럼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런 방법론적인 경향 가운데 크게 보아서 베이컨적인 경험론과 데카르트적인 합리론이 있었다. 그들을 종합하여 정형화한 것이 칸트의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은 자연과학과 신학을 분리시키고 자연과학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유명한 저작인 <노붐 오르가눔>은 당시까지 방법론의 대명사로 군림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에 대립된 새로운 논리학이었다. 베이컨은 이 저작에서 우선 ‘우상(idola)’의 파괴 및 낡은 스콜라적인 3단논법을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종족의 우상’ [각주 9: 이는 자연현상을 관찰할 때 인간의 행위를 기초로 하여 유추함으로써 목적관련을 발견하려는 오류이다.] · ‘동굴의 우상’ [각주 10: 이는 Platon의 국가론의 동굴사례에서 연유된 용어로서 可知界를 可視界와 혼동하는 오류이다.] · ‘시장의 우상’ [각주 11: 이는 시장에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형성되는 언어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편견을 말한다.] · ‘극장의 우상’ [각주 12: 이는 자기 자신의 사색에 의존하지 않고 권위나 전통에 의지하려고 하는 편견을 말한다. Bacon은 사물 자체를 탐구하지 아니하고 극장의 무대 위에서 사실처럼 말하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등 네 개의 우상에 사로잡혀 있으며, 종래의 철학은 이들 우상 밑에서 형식적인 3단논법을 구사하여 추상적인 사변에 탐닉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그는 그가 새로이 제창한 ‘실험’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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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의 사례의 비교 및 고찰에서 자연의 일반 법칙을 찾아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른바 “귀납적 방법”이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주로 수학의 방법에 입각하여 학문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즉, 종합과 분석의 수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물질적인 사상일반을 다룰 것을 생각하여, 물질을 모습이나 크기와 같은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성질에 의해서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데카르트는 명석하고 자명한 생각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유명한 <방법서설>에서 “아주 명석하게 그리고 아주 자명하게 마음속에 품어 생각하는 것은 모두 참되다는 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 인정할 수 있다”(최명관 역, 1983, pp.30-31)라고 언명한다. 데카르트의 이성론은 학문계를 구축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방법적 거보로 평가될 수 있다. 그의 의심과 명석을 오가는 방법론적 태도는 자연히 종래의 스콜라철학적인 물질관과 충돌하게 된다. 당시의 스콜라철학에서는 예컨대, 물질의 여러 가지 성질은 “실재적인 성질”로서 그대로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먼저 물질로부터 일체의 심적인 것을 배제하고, 동시에 마음을 일체의 물질적인 것에서 해방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런 심신이원론은 서양에서 합리주의적인 방법론의 전통을 이루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은 칸트(1781)에 의해서 종합되었다. 그는 이 두 가지 인식론적인 논쟁과 대립을 선험적 비판철학에서 철저하게 비판을 가함으로써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와 가능성을 근대 자연과학을 기반으로 하여 명백히 밝히는 일을 하였다. 그는 종래의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이루는 영혼 · 우주 · 신의 존재가 참된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를 고심한 나머지 그 인식의 객관성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경험론과 합리론이 앎의 근원을 일면적으로 혹은 독단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밝혔다. 그에 의하면, 앎은 언제나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된다. 이 때 앎의 내용은 감성의 감수성을 통해서 주어지고, 또 앎의 형식은 오성의 범주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는 우리의 앎이 경험론이 말하는 경험에서 시작하지만, 그 감각적인 자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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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적으로 주어진 오성의 개념에서 포착되고 통일된다고 하여 경험론과 합리론이 사실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그런 가운데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이 분명히 구분되고, 후자의 지식만이 그 객관성을 검증할 수 있는 참된 지식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런 인식론적인 입장은 근대 이후 이룩된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인과론적인 접근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키기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로 그들은 철학, 즉 인문과학으로부터 차례로 분가하여 독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자연과학과 여타의 다른 학문들을 대변하는 인문과학 사이에는 명백한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과학의 울타리 속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학문적 위상을 복원하려는 학문관이 특히 방법론의 측면에서 등장하였다. 근대과학은 일상적인 세계상보다는 훨씬 고도의 객관성을 지닌 지식을 생산해냈지만, 과학 자체의 근본전제에 대해서는 무반성적일 뿐만 아니라 과학 이외의 면에서 포착할 수 있는 여타의 많은 인식대상을 무시하기 때문에 일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연과학을 제외한 기타의 지적 탐구는 데카르트적인 정신 · 물질의 이원론적인 도식의 토대 위에 자연과학과의 명백한 자기 구분을 위한 재정비의 과정을 밟게 된다. 그 중 두드러진 것만 들어보자.
딜타이(W. Dilthey: 1833~1911)는 정신적 제 현상의 과학적 기초를 닦고, 자연과학에 대비하여 그 분야를 방법론적으로 확립하려고 하였다. 자연과학과 대비되는 제반학문들, 즉 그의 분류에 따르면 역사학 · 경제학 · 법학 · 정치학 · 종교학 · 문학 · 건축학 · 음악 · 심리학 등을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범주에 넣고 재정비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들이 다루는 문화현상은 자연현상과 다른 독자적인 구조와 성질을 가진 것으로 구분하고, 자연과학의 분석과 설명에 의한 방법과 대조적으로 이해의 방법을 방법적인 원리로 삼았다. 그에 의하면, 정신과학의 근거는 內體驗, 즉 의식적 사실이다. 그러나 의식적 사실의 각 요소의 조직적 관계는 표상 · 의지 · 감정까지를 포함하는 전인을 기초로 한다. 이와 같은 전인에게는 외계는 단순한 현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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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며 자아와 마찬가지로 생명이 있는 외계인 것이다. 즉, 의식적 사실의 범위는 내계를 넘어서 외계에까지 확대된다. 이러한 의식적인 사실로서의 정신은 자연적 사실처럼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정신과학의 기초가 되는 과학은 종전의 자연과학적 심리학 [각주 13: 이것은 Wundt가 강조한 심리학으로서, 이를 딜타이는 “설명적 심리학”이라고 부른다.] 이 아니며, 심적인 구조의 내적인 연관을 기초로 정신생활의 내용을 追體驗하고 이해하는 기술적이고 분석적인 심리학이다. 이 심리학은 발달된 정신생활에서 나타나는 각 요소 및 유일무이한 구조와의 관련을 전형적인 인물에 근거를 두어 기술하는 것이며, 따라서 가장 완전한 역사이다.
이른바 新칸트학파는 이런 방식의 새로운 인식론의 중심적인 위치를 점유하면서 등장하였다. 그들은 칸트의 선험논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인식론적인 공헌은 자연과학을 인정하되 그것만이 참된 지식을 추구한다는 칸트의 한계를 벗어난다는 데 있다. 칸트가 주장한 바와 같이 형이상학을 배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증주의 혹은 경험주의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세운 신칸트학파는 크게 서남학파와 마르부르크학파로 나뉜다. 서남학파의 창시자인 빈델반트(W. Windelband: 1848~1915)는 “칸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를 넘어서야 한다”는 취지 아래, 칸트의 인식론의 수학적 · 자연과학적 영역의 한계를 넘어선 역사의 세계, 더 나아가서 도덕 · 법 · 예술 · 종교 등의 체험의 영역으로 인식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연과학을 法則定立的인 ‘법칙학(Gesetzeswissenschaft)’이라고 하고, 이를 個性的 記述인 ‘사건학(Ereigniswissenschaft)’으로서의 역사학과 구별하였다. 그의 이 같은 견해는 그의 제자인 리케르트(R. Rickert: 1863~1936)에 의해서 계승 · 발전되었다. [각주 14: Rickert의 주저인 <문화과학과 자연과학(1926)>은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본이 나와 있다.] 그는 자연과학과는 구별되는 좀더 차원 높은 정신과학의 영역은 드러났지만, 당시에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 제시된 딜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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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논리는 자연과학적 심리학을 정신과학으로 오인할 우려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리케르트는 역사연구에 특유한 방법을 내세워 자연과학에 대립되는 이른바 ‘문화과학(Kulturwissenschaft)’을 서술하였다. 자연과학의 방법이 자연현상으로부터 일반적 · 공통적인 것을 추상해내서 일정한 법칙을 만드는 것, 즉 반복적이며 보편적인 것을 생각하는 데 반하여, 역사과학에 특유한 방법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서로 다른 일회적인 것으로 본다. 역사학은 그 하나하나의 개성이 갖는 가치관계적 체계화라고 하면서, 그것이 몰가치적 · 법칙정립적인 것으로서의 자연과학과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칸트의 인과성의 범주가 적용되는 범위를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국한시키고, 역사와 문화과학의 영역에서는 일회적이고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그들의 현상을 통일적으로 구성하는 구성적 범주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한편 신칸트학파의 다른 부류인 마르부르크 계열은 형식과 질료라는 이원론적인 입장에서 가치설을 주장하는 서남학파와는 대조적으로, 순수이성의 일원론에 의하여 순수이성의 생산설을 주장하면서 자연을 그것에 대한 인식의 역사에 비추어 매개시키려고 하였다. 리케르트와는 달리 마르부르크학파의 창시자인 코헨(H. Cohen: 1842~1918)은 칸트의 인식비판 가운데 선험적 순수의식이 대상의 구성에 대해서 갖는 능력에 주목했다. 경험이란 사유가 스스로 내용을 산출시키면서 이것을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객관화시켜 나가는 운동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시간적 · 공간적 직관도 실은 사유작용이며, 사유 이전에 실재하였던 것은 아니다. 이리하여 그는 사유를 일체의 실재의 근원으로 보았다. 모든 개념은 그 때마다 하나의 해답인 동시에 바로 문제제기이며, 무한히 가설로서의 “미완결 상태”에 있다. 이 점에서 과학적 지식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유의 내면적인 발전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제자 나토르프(P. Natorp: 1854~1924)는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여 심적 현상과 물적 현상의 상관주의적 일원론을 발전시켰다. 그에 의하면, 학문적인 인식은 사실이 아니라 순수사유가 객관적인 세계를 근원으로부터 산출하는 무한한 동적 진행과정이며, 따라서 범주의 체계도 생성하고 발전한다. 이 원리는 문화창조의 모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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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에 적용되며, 윤리나 예술도 순수의지와 순수감정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순수의식의 합법칙적 · 객관적 산물이다.
이런 일원론적인 전통을 이어서 카시러(E. Cassirer: 1874~1945)는 자연과학적 인식은 자연현상을 함수관계로써 기술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자연과학은 자연현상과는 달리 문화적 산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자연과학은 자연과는 달리 항상 발전하는 수도계의 하나로 보는 우리의 입장과 궤를 같이한다. 카시러(1944)가 말하는 문화과학은 인문과학에 속하는 학문은 물론이고 예술적 창조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는 특히 그런 제반 문화적 체험이 상징의 형태로 표현되는 형식에 관심을 보였다. 그에 의하면, 상징형식에 의해서 표현되는 내용은 그 고유한 표현으로부터 절단될 수 없다. 언어의 의미는 회화로써는 표현될 수 없고, 음악의 의미는 신화로써는 표현될 수 없다. 그는 또한 학문의 형식이 보편적인 법칙정립적인 논리를 따름에 비해서 예술의 형식은 구체적인 보편의 논리라는 방향을 취한다고 보았다.
학문의 방법적인 문제에서의 이와 같은 두 갈래의 흐름은 당시의 제반 분과학문에서 그 방법적 특징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예컨대, 19세기의 70 · 80년대에는 경제학의 탐구법에 관해서 역사적 방법을 채용할 것인가, 혹은 계량적인 방법을 따를 것인가를 두고 역사학파인 슈몰러(G. Schmoller)와 오스트리아 학파인 멩거(C. Menger) 사이에 유명한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각주 15: 이 두 학설의 차이는 경제학이라는 분과학문을 소개하는 곳(3.1.7.)에서 언급한 바 있다.] 당시 경제학은 학문적인 성격이 뚜렷하지 못하여 방법론적 갈래가 경제학 자체의 학문적 가능성과 그 구조를 묻는 경제학인식론의 일부로 되었다. 종래의 경제학은 잡다한 지식의 결집이거나 응용심리학의 일부분인 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역사적 문화과학의 인식론적 구조가 밝혀짐으로써 경제학도 그것의 하나라는 사실이 차츰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런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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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서 “경제학상의 심리주의”를 배제하고, 경제학에 고유한 선험적인 요소를 확립하여 경제학의 개념을 순수화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이것을 이른바 “경제학상의 논리주의”라고 칭한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서 경제학의 선험적 원리는 문화가치의 성질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론의 와중에서 학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것은 항상 중요했다. 여기에는 경제학을 사적 문화학으로 보는 인식론상의 견해를 인정하면서 경제학을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과학으로 규정하고, 이 학문이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채용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베버(Max Weber: 1864~1920)와 같은 학자가 있다. 베버의 이와 같은 입장은 흔히 실증주의와 신칸트주의의 입장을 화해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의 위치를 찾았던 콩트는 사이비과학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사회과학이 엄격한 귀납법칙에 따르는 논리적 추론에 근거한 “논리 · 실험적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정신과학의 논의는 오히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문화현상의 이해를 주창한다. 그 논쟁의 중앙에 서서 베버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관찰에 의하여 외부로부터의 현상을 연구할 수 있으나, 사회과학만이 여기에 추가적으로 “공감적 내성” 혹은 ‘이해’를 통하여 주제를 내부로부터 연구할 수 있다는 절충주의적 입장을 세웠다. 해석은 역사적 개별자에 관한 개념구성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 때 역사적 개별자는 인과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본다. 이 점에서 베버는 리케르트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베버(/1949)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하나의 구체적인 사실(a concrete fact)”의 “역사적 의의(historical significance)”에 관한 아무리 단순한 역사적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완성된 형태로 발견된 어떤 것의 단순한 등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아무리 단순한 역사적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범주적으로 형성된 하나의 지적인 구성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주어진 실재에 대해서 가진 ‘법칙론적인(nomological)’ 경험적 지식을 전부 적용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타당한 내용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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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는 사회현상의 이해는 인과적으로 적절하고 의미의 수준에서도 적절한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전형적인 행위에 대한 올바른 인과적 해석이란 전형적이라고 주장되는 과정이 의미의 수준에서 적절하게 포착되고, 동시에 그 해석이 어느 정도 인과적으로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직접적인 관찰에 의한 이해”와 “설명적 이해”를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학문적인 이해란 설명적 이해를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행위자의 주관적 상태가 사회조직의 출현적인 유형에 끼친 영향의 방식과 그 역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가 말하는 이른바 ‘理念型(ideal type)’은 이러한 방법론적 형식이다. 이는 사회과학적 검토의 대상이 되는 현상의 제 특성 가운데 일부만을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폐기시키는 방식으로 얻어진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로부터 자본축적 · 합리적 계산 · 부의 유통 등과 같은 임의적으로 단순화된 관념을 추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절충적인 입장은 그 어느 것에도 철저하지 못하다는 비난도 받는다. [각주 16: 이에 관심 있는 독자는 Nagel(1963)을 참조하시오.]
위와 같은 방법상의 논쟁은 하나의 역사적인 의미를 지닐 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주장의 타당성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사실 방법에 의해서 분과학문을 구분하는 방식은 개념적인 구조에 의한 구분의 방식보다 설득력이 약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대상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법이 어떤 특정한 학문에서 사용된다. 예컨대, 물리학에서는 실험적인 방법이 더없이 유효하지만, 인간의 행동의 연구에서는 변량을 분리시키기가 그처럼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관찰자료를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쪽을 택한다. 그러나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학문 안에서도 서로 다른 방법론이 적용된다. 예컨대, 사회과학에서 뒤르켐 유의 유기체적 기능주의, 베버의 이해적 방법,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이 동시에 공존한다(Benton, 1977). 오늘날 정신과학의 고유한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던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탐구도 자연과학이 채택하고 있는 경험과학적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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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학의 연구도 이른바 경험과학적 방법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실상 이론구성의 과정에는 관찰과 실험뿐만 아니라 관련된 문헌의 해석과 창조적인 상상력이 언제나 필요하다. 따라서 분과학문의 특징으로서 방법적인 조건은 앞서의 개념적 틀과 문제의식에 결국 종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문제를 푸는 방법이나 수단을 오직 하나만으로 국한시킬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방법이란 문제를 푸는 능력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하며, 결코 문제 자체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3.4.2. 학문공동체
분과학문은 개별적인 학자들의 산물이 아니라 특정한 구조 속에서 동일한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창조물이다. 어떤 인간활동도 적절한 제도적인 환경을 만나야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 지식인은 그들끼리 규칙적으로 접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서만 그들은 공통의 목표, 방법적인 기준이나 평가의 기준, 더 나아가서는 행동의 규범을 발전시킬 수 있다. 우선 학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것 이외의 활동과는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대중의 관심과는 다른 그들만의 세계를 공유하는 집단이 필요하게 된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고독한 상태에서 지적인 생산을 한다는 사실에는 다소의 진실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자기의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동료들과 접촉하고 토론하고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다. 학자들은 동료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동의를 얻음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활동에 대해서 좀더 큰 만족과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학문공동체는 그런 전문적인 관심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것이 형성되는 자연스러운 경로는 대충 이렇다. 우선 모호한 상태나마 그 학문의 관심과 지식의 성격에 따라 앞선 창도자와 선진이 출현한다. 하나의 실낱같은 물줄기가 여러 물줄기를 만나 조그만 못을 이루고, 거기서 큰 강물로 흘러 바다에 닿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도자를 중심으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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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특수한 공동사회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서신왕래와 같은 비형식성을 가지고 관심을 공유하는 친분관계에서 시작한다. 빈번한 교류에 자극되어 공유된 견해가 발달한다. 그 다음에 그의 생각을 계승하거나 혹은 논박하는 일군의 소규모 집단이 형성되고 서서히 일련의 명칭이, 그 다음에는 학과와 학위, 그리고 학회가 잇따라 등장하고 지금과 같은 형태의 분과학문의 공동체로 굳어진다.
학자들은 그들의 사상을 동지들과 교류하고 싶은 욕구를 어느 시대에나 가지고 있었겠지만, 그 욕구를 만족시킬 만한 제도가 활발하게 발전한 것은 서양에서 분과학문이 활발하게 출현하기 시작한 17 ·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아니 그런 학문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분과학문이 발전이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분과학문과 학문공동체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발전하였다. 서로 문제 · 관심 · 개념 · 방법들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전문적인 연합체를 만들고 격의 없는 접촉을 유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문공동체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교육과 훈련이다. 학문공동체는 입문자에게 그 공동체의 전통을 전수한다. 입문자는 다음 단계로 진전하기 전에 당시에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익숙하도록 훈련받는다. 어떤 연구문제가 좋은 것이며,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학회를 통해서 회합하고 토론하며, 특정한 전문지를 통해서 그들의 지식을 표명하며 공유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연합한다. 그들은 대개 그들의 확실한 자치권을 희망한다. 분과학문의 학문공동체는 학문적인 철저성을 지키는 정도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수준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에 관해서는 하권의 제 9장에서 자세하게 검토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앞서의 취지에 따라서 분과학문과 관련하여 특별히 들 수 있는 전형적인 사례로서, 특별히 자연과학 분야의 학문공동체의 출현을 소개하는 데 그치겠다.
오늘날에는 대학이 학문공동체의 대명사로 통하는 시대가 되었다. 세계 전역의 대학들에 학과가 있고, 이 학과들 안에 여러 대학원 과정이 있으며 이들 학과에 소속한 학자들이 일정한 지역단위 혹은 더 나아가서 국제단위의 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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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만들어 정기적인 발표 · 토론 · 협의를 개최하여 서로 간의 유대를 확인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런 분과학문의 공동체를 통해서 서로 다른 학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확인하는 셈이다. 그들은 대학 내에서는 물론 대학 밖에서도 집단의 일원으로서 학문의 개별성을 주장하고 집단적인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일을 한다. 그런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분파작용은 심지어 대학의 일반적인 정책에 장애를 줄 정도로 심화되기도 한다. 아마도 대학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분과학문들이 모두 대학이라는 학문공동체에 거의 동등의 자격을 가지고 참여했을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중세 초에 설립되기 시작한 대학은 이 점에서 매우 배타적이었다. 어떤 분야는 대학에 걸맞은 전통으로 수용하고, 다른 분야는 배제한 것이다. 이처럼 대학으로부터 배제되고 문전박대를 받은 분야 가운데 하나가 자연과학이라고 하면 놀라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학자들은 일반 사회공동체가 추구하는 활동과 다른 종류의 활동을 하며, 많은 경우에 그 활동들은 상충하고 갈등한다. 하나의 전문적인 활동이 발전할 가능성을 높이는 데 불가결한 요인의 하나는 그러한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지위이다. 같은 전문직이라고 하더라도 그 위광을 향유하는 직업만이 일정한 지지와 존경을 얻어 조직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어떤 직업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수행할 만한 적격자들이 모이고 그들이 하는 일을 촉진하는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며 또 그들의 노동성과로 사회에서 존중받는 지위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세속계적인 요인은 가끔 학문계에도 그대로 작용한다. 지적인 탐구 자체가 존중받는 사회에서 학문이 번창하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 그런 신분상의 보장이 이루어지는 곳이 대학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학문공동체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만한 대상은 서유럽에서 학회가 자연과학의 진흥에 공헌한 특별한 역할이다. 역사적으로 인문 · 사회적인 분야의 경우는 어느 시대의 사회에서나 존중되었다. 이것은 사회적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자질이었기 때문에 지배층의 주된 관심대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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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그러나 자연과학이나 기술의 경우는 실제적인 것으로서 높은 인정을 받기 어려웠다. 그것은 특히 동양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서양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지적인 탐구에서 자연과학이 사회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고 다른 활동의 부산물이거나 종속적인 위치에 머무르는 한, 그것의 발전은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이 그런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서구에서의 자연과학은 독특한 방식에 의해서 이런 난점을 해결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연과학이 서구사회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문과를 중시하고 기술을 천시했던 우리 동양인에게도 타산지석이 될지 모른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의 개막시대에는 아직도 과학이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확실하게 분화되었던 것은 아니다. 학자들을 서로 연결하는 방법으로 처음에는 서신왕래가 취해졌는데, 17세기 초두에 이르러 연구를 서로 조직하는 학회가 등장했다. 먼저 이탈리아에서 1601년에 학자들의 조직이 나타났다가 1630년에 해산되고, 1657년에 새로 실험학회라는 것이 설립되었다. 영국의 런던에는 1662년에 런던 왕립학회가 발족되고, 이어서 1666년에는 프랑스 파리에 왕립과학 아카데미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학회들은 개개 학자들의 분산적인 연구를 집단화함으로써 연구를 활발히 촉진시키는 효과를 보였다. 이들은 하나의 공통언어 및 공통의 기준을 제공했고, 이러한 언어나 기준에 의해서 사회의 여러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공통의 사건과 사물을 화제로 삼을 수 있었다. 즉, 그들은 그 후 서유럽에 보급된 과학이나 기술에 의한 자연의 지배라고 하는 시대사조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런 학회가 가지는 특별한 중요성은 우리가 말하는 학문공동체의 다른 형태, 즉 대학이 차지하는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더욱 분명하다. 당시 대학은 의과대학을 제외하고는 주로 인문주의적인 지식을 서적을 통해서 그대로 답습하여 전수하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과학이 발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당시 새 과학은 내용면에서 그 때까지의 대학의 주된 조류와 부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법 면에서도 당시 대학의 기능을 벗어난 새로운 유형의 과학활동, 즉 대규모의 실험이나 많은 과학자들의 협동연구를 포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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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과학공동체가 대학에 편입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있어 학회는 실험에 의한 지식이라고 하는 새로운 유형의 지식이 사회 속에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귀중한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과학분야는, 앞서 역사적인 사실에서 살펴보았듯이, 서로 독자적인 학문분야로 세분화되어 가면서 그 분야의 전문학자 · 학회 · 학술지 · 교과서를 지니게 되었고, 이런 일이 충분히 진행되면서 대학에도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19세기 말쯤에야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자연과학의 공동체는 어떻게 존립하게 되었는가? 그 가운데 런던의 왕립학회의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1662년에 찰스 2세의 칙서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마침 국왕은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대학 밖에서 그들의 지위를 보장하는 후원자의 역할을 하였다. 당시 칙서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짐은 오래 전부터 제국의 국경을 넓히는 것뿐만 아니라, 과학과 문예의 발전에 크게 관심을 기울여 왔다. 짐은 모든 형태의 학술에 호의를 갖는 바이다. 따라서 짐은 철학연구, 특히 실험에 의한 새로운 철학을 완성하려는 철학의 연구를 장려하고자 한다.
이 척서의 상징적인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왕권은 최고의 권력을 향유할 수 있었으며, 그 권력이 자연과학의 배면에서 자연과학의 사회적 지위를 격상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국왕의 칙령에 의해 드디어 과학적 탐구는 정식으로 공인되기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거의 종교적인 활동과 같은 수준의 사회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왕의 칙령이 이전에는 성직자만이 향유하여 왔던 지위에까지 과학자의 지위를 일시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 후 서유럽 제국에서 자연과학은 일단 확보된 그 높은 지위로부터 한 번도 하락한 적이 없었다.
영국의 과학자들은 왕립학회의 설립에 의해서 최초로 학문공동체를 결집할 수 있었다. 이것은 1662년에 왕의 칙서에 의해서 설립된 것으로서 초대 특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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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96명 중에서 과학에 종사하고 있던 자는 전회원 중의 3분의 1도 안 되었고, 나머지는 과학에 관심을 둔 아마추어였다. 당시의 과학자는 연구영역이 좁은 전문가가 아니라 폭이 넓은 지식인이며, 물리학에서 신학에 걸쳐 시대를 움직이는 사조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이 학회는 관심 있는 아마추어로 구성되어 대중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회원수는 점차 증가하여 1670년대에는 200명으로 늘어났고 1800년에는 500명에 달했다. 과학자들은 이 학회를 통하여 과학활동에 종사하면서 그들의 신분을 인정받고 또 향상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일반대중은 새로운 과학자의 지위를 승인할 뿐만 아니라, 우수한 발견에는 보수를 줄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이런 학회의 설립은 과학적 행위를 제도화함과 동시에 그것을 정통화했고, 또 종전의 과학자의 역할에는 없었던 존엄과 지위를 주는 데 공헌했다.
왕립학회는 여러 가지 지위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규합하여 그들을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동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들의 상호연락과 협력을 촉진했으며 과학자를 사적인 고립상태로부터 공적인 세계로 끌어내었다. 이 특수한 집단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학회의 규약에 잘 반영되어 있다.
왕립학회의 사업 및 계획은 자연물의 지식 · 온갖 유용한 기술 · 제조 · 기계의 기능 · 기관 · 실험에 의한 발명을 증진시키는 일이다(신학 · 형이상학 · 도덕 · 정치 · 문법 · 수사 · 논리 따위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오늘날에 와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기술 및 발명의 부활을 꾀하는 것, 고금의 주요 저자에 의해 발명되고 기록되고 시행된 자연적, 수학적 그리고 기계적인 모든 것의 체계 · 이론 · 원리 · 가설 · 요소 · 역사 · 실험을 조사하는 것이다. 자연 또는 인공에 의해 생기는 온갖 현상을 설명하고, 사물의 원인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기록할 수 있는 확고한 철학의 완전한 체계를 세우기 위해서이다(Mason, /1987, p.272).
회원이 됨으로써 그들은 그 구성원으로서 당시에 지배적인 학문의 방법과는 다른 풍토 속에서 새로운 태도를 공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깊은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당시 성직자나 스콜라철학자들이 말하는 확실성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연역적 추리보다는 실험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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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에 의해서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앞에서 인용된 규약에 따라서 실제의 증거를 수집하고, 그것을 근거로 토론과 대결을 함으로써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이는 당시 권위 있고 수사학적인 서적에 의거하는 중세적인 인문주의적 방법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그들은 회합을 할 때마다 모종의 실험을 시범하여 보여주고 그 결과를 토론하는 절차를 가짐으로써, 올바른 연구방법을 습득함과 더불어 제시된 증거를 주의 깊게 음미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런 자연연구는 신의 위대한 영광을 증명함과 동시에 인류의 복지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당시의 왕립학회의 구성원들의 활동내역을 보면 그들이 진정 자연과학의 탐구 자체에 매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지원하는 편에서는 역시 그것의 외재적인 가치에 관심이 있었다. 즉, 과학이 국가발전이나 생활의 복지에 공헌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왕립학회는 새로운 실세로 등장하는 생기발랄한 사회 내부의 이익과 조화를 유지했다. 이 시대에는 경제적 사업, 특히 수공업이나 선박업이 싹텄다. 이러한 시기에 예컨대, 항해술의 발달을 촉진하는 기술은 중요한 것으로 되었다. 특히 천문학은 경도를 측정하는 데 있어 실제로 가장 유익했고, 바다의 간만의 시각을 아는 일은 항해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더 나아가 응용에 대한 관심은 기술이나 공업이나 농업까지도 포함될 정도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국왕과 궁정은 이처럼 국익에 도움이 될 만한 연구주제를 늘 왕립학회에 요구하였다. 말하자면, 산학협동이 학회의 설립으로써 자연스럽게 촉진된 것이다.
이처럼 과학이 학회라는 제도적인 배경을 가지고 토착화되었으며, 또 세속으로부터의 대중적인 지지를 얻게 됨에 따라서 그 때까지 자연과학과는 거리를 두어왔던 대학도 이제 새롭게 등장한 세력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대학은 시대의 추세에 밀려 오히려 우수한 과학자들을 그 내부로 유치하려고 하였다. 그 때부터 자연과학은 점차 대학의 중요한 교과목으로서 오히려 주인공의 위치에 오른다. 만약에 이런 배경이 없었더라면 영국의 근대과학의 발전은 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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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 지체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인 모태가 없었다면 근대과학의 급속하고도 연속적인 개화와 결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만큼 학문공동체는 학문 자체의 발전에 불가결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3.2.5. 학문적 분화의 역동성
우리는 이제까지 분과학문이 다양하게 출현하며 분화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아직도 유동적인 상태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한 유동적인 상태에서도 우리는 독특한 문제와 개념체계, 진리관과 방법론 그리고 학문공동체라는 기준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잘 조화를 이룸으로써 하나의 분과학문, 그리고 더욱 넓게 해석한다면 하나의 수도계가 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조건의 내용이 완결된 분과학문은 없다. 분과학문은 마치 생명체처럼 항상 변한다. 그것의 궁극적인 형태가 어떤 것일지는 지금으로서 단정할 일이 못된다. 그들은 언제나 얼마만큼의 잠정성 혹은 암묵성을 가지며,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계속적인 재구성의 압력을 받는다. 당시의 발전양태, 세분하려는 지적 체계의 범위와 방법적 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분자의 관심과 능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구분된다. 분과학문은 내용면에서 아직도 형성과정에 있으며, 누구도 그것을 영구적인 것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학문은 본질상 동적이다. 따라서 분과학문의 종류가 얼마나 가능한 것인지를 숫자화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새로운 개념체계, 새로운 방법론 그리고 학문공동체의 전문화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변화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항상 남아 있다.
다음의 글에서 피닉스(1964)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분과학문이 현재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언제 어떻게 발전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예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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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학문이라는 말은 어떤 변치 않는 일단의 기존 지식영역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공두뇌학(cybernetics) · 파라심리학(parapsychology) · 게임이론 · 우주항공학 등 새로운 분과학문이 정기적으로 출현하고 있다. 생화학과 과학사와 같은 새로운 조합학문이 형성되고 있다. 또한 많은 기존의 분과학문들, 약간의 예를 들더라도 이를테면, 현대물리학 · 음악 · 역사 · 신학 등의 분야에서 급진적인 내부적 변형이 진행되고 있다. 사실상, 오늘날 불과 과거 몇 십 년 전과 중요한 점에서 달라지지 않은 연구분야는 거의 없다(pp.10-11).
부단한 변화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시점에서 어떻든 학문을 분류할 필요성을 느끼며, 또 그 목록에 포함되느냐 안 되느냐에 의해서 그 학문의 이해관계에 큰 변화가 올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을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분류되는 당시의 학문적 상황,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그것을 분류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의 상황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의 분류의 의도와 그가 소속해 있는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제한받는다는 것이다.
분과학문은 일상의 세계가 각기 다른 성질과 구조를 가진 다양한 존재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탐구를 할 때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는 없다. 무엇을 탐구한다고 할 때 우리는 구체적인 현실의 무한대의 내용 가운데 어떤 선택된 부분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한 분과학문에서 유관한 것이 다른 분과학문에서는 거의 무관한 것으로 무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학문은 그 나름의 고유한 인식대상을 찾고 존재의 다양성의 한 가지 측면을 독특한 방식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문제와 방법은 그만큼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분과학문을 특징짓는 문제의 인식대상과 개념체계, 방법, 그리고 학문공동체라는 세 가지 차원에 어떤 변화가 올지 예측할 수 없다. 그처럼 중요한 차원에 대한 설명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꼭 유념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이 세 가지 차원이 결코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서로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다른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그러니까 같은 것의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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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선 우리는 어떤 대상을 탐구한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이나 이론이 없이 대상을 탐구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분과학문에서 연구하는 두 학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을 다른 개념과 이론으로 보며, 그 다른 이론적인 관점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서로 다른 대상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개념은 우리가 대상에 접근하고 탐구할 때 방법에 영향을 준다.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어떤 범위로 그리고 또 어떤 권리에 의해서 우리는 자연과학이 사실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선 무엇보다도 사실의 일반적인 특징은 물리학에 의심의 여지가 없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이 학문의 경우, “사실적인 지식”은 앞서 성립된 방법을 따르는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점은 두 번째 요점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그것은 이와 같은 사실의 매우 광범위한 특징화는 앞선 분석에 비추어서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앞서 성립된 방법의 특징은 무엇인가, 혹은 따라가야 할 길은 어떤 것인가? 하나의 경험은 그것이 논리, 후방의 지원, 수학 등의 형식적으로 이념화한 제반 과학의 언어로 기술될 수 있는 규칙적인 현상의 연속에 관심을 가질 때에만 (물리학이라는 좁은 의미에서의) 과학적인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과학적인 경험은 과학적인 방법과 더불어 조직되며 과학적인 방법과 결코 유리될 수 없다. 과학적인 경험은 이처럼 물리학자들이 ‘사실’로서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분명하게 윤곽을 잡고 구조화된 영역의 틀 안에서만 존재한다(Strasser, 1963, p.113).
위 글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일단 어떤 특정한 방법이 분과학문에서 채택되면 바로 그 방법이 분과학문의 ‘사실’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법이 “물리적인 사실”을 경정하듯이 특정한 방법이 “심리적 사실”과 “언어적 사실”을 결정한다. 이 말은 일단 어떤 방법이 한 학문에서 인정되면, 그 전통에 의해서 그 학문적인 대상이 결정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방법이 대상보다 앞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방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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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분과학문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증거하고 있다.
앞서 우리가 새로운 학문의 출현에 공헌한 사람으로 예거한 세 명의 학자들도 각기 독자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 뒤르켐의 경우는 사회학의 접근방법과 설명방식에 있어서 자연과학과 유사한 과학적 지식의 정초를 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보고 실증주의적인 방법을 택했다. 소쉬르는 실증주의와는 전혀 다른 인식방법인 구조주의적인 방법을 창안해냈다. 후설 역시 실증주의적 방법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고 철학의 고유한 방법, 이른바 현상학적인 환원이라는 특이한 방법을 창안했다. 그 각각의 학문적인 대상은 그 방법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는 어떤 실재였던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얼른 이해되기 어렵다면 하나의 단순한 예를 들어 그 점을 고려해 보자. 해리스(K. Harris, 1979)는 다음의 글에서 학문의 대상과 그 방법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매우 상식적인 비유를 들어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에 그들의 정신기능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A와 B가 사막을 통과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들의 앞에는 드문드문 서 있는 야자수와 좁은 영역의 풀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호수가 보인다. 그들은 이 현상을 탐구해 보기로 작정한다. 이제 이 시점에서 그들은 그 대상에 대해서 개념화를 할 수 있다. 만약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고, 그것을 개념화하기에 더 좋은 위치를 잡으려고 시도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그 곳에 더 가까이 걸어가거나 혹은 그것을 망원경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나 같은 일이 진행된다. 그것은 개념화가 탐구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A라는 사람이 그 대상을 오아시스로 개념화했다고 가정하자. 이 사실은 그에게 어떤 탐구영역과 어떤 적절한 방법들을 마련해 준다. 그는 자신이 자료를 수집하는 데 그의 눈을 이용할 수 있음을 안다. 그는 공간적 관계를 이용하여 물이 나오는 구멍의 깊이와 주변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야자수를 감지하고 물을 마시면서 자료를 만지고 맛을 보는 방법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앞에 있는 현상이 어떤 물리적인 구체성을 가진 것으로 가정하고, 야자수에 가려져 있는 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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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기 위해서 나무에 오르는 방법들을 쓸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B라는 사람이 그 현상을 깊이 생각한 나머지 그것을 신기루로서 개념화했다고 가정하자. 만약 사태가 그렇다면 그는 그 대상이 물리적인 구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기대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물구멍을 측정한다거나 물을 마신다거나 야자수에 기어오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개념화된 대상을 탐구하기에 적절한 방법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그가 만약 다소의 초보적인 물리학을 안다고 할 때, 그는 그 풍경을 작도하고, 온도를 측정하고, 빛을 굴절시키는 가능한 원인을 찾는 데 관심을 보일 것이다(p.8).
위의 사례는 비록 학문적인 대상의 사례를 직접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사막에서 눈앞에 나타나는 대상을 확인하는 두 가지 다른 가상적 사례를 들어 학문에서의 개념과 그것을 탐구하는 방법 간의 상관성을 매우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그 대상이 오아시스냐 아니면 신기루냐 하는 것은 지금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탐구자가 그 중 어떤 것으로 그 대상을 개념화하느냐에 따라 그 대상을 탐구하는 방법에 대한 구상도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가령 이제 위의 사례에서 A가 그 물체에 접근하면서, 그 대상이 오아시스라는 애초의 생각을 바꾸어 그것이 B가 그랬듯이 신기루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대상에 대한 생각뿐만 아니라 그것을 탐구하는 방법도 바꾸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을 맺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대상을 연구한다고 할 때 불가피하게 그것에 대한 개념, 가설, 그리고 이론을 가져야 하며, 그 개념화에 따라 방법을 선택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각각의 탐구방법에도 이미 이론이 負荷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개념과 방법이 독립된 것으로 보고 후자가 전작의 타당성을 검증하여 객관성을 보장해 준다는 종래의 고전적인 인식론이 너무도 순진한 것임을 말해 준다.
개념과 방법이 마치 바늘과 실처럼 상관을 맺고 있다면, 다음에 고려할 점은 분과학문에서 특정한 방법을 통해서 접근된 대상과 그 분과학문의 공동체 간의 관계이다. 이 양자 역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관계는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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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있다. 즉 그런 특정한 개념과 방법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곧 분과학문의 공동체이다. 학문공동체의 구성원은 정의상 그 내부에 개념과 방법을 공유하는 집단이며, 만약 그 공유성에 의문이 생기면 그것을 조정하는 활동이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러니까 학문공동체는 개념과 방법의 인간적인 측면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대상, 연구방법 그리고 학문공동체 가운데 어느 것이 先이고 後이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다. 그 우선순위는 물론 앞서 기술한 것과 같다. 연구대상이 먼저이고 방법이 뒤따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특정한 인식목적이 생기고 그 목적에 따라 특수한 연구방법이 결정되는 것이 순리로 여겨진다. 방법론이 정착되고 그 방법에 의해서 사실규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안목과 방법을 가진 학문공동체가 점차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학문공동체가 어떤 역사적인 계기로 인해서 먼저 형성되고, 그 학문공동체에서 탐구하는 것은 무조건 특정한 사실이라고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분과학문의 사례와 변칙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를 앞으로 하권 제 6장에서 교육학의 성립과정을 살필 때 더욱 자세하게 검토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