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호프
엘리자베스 리드 호프 부인(Elizabeth
Reid, Lady Hope, 결혼 전 성은 코튼(Cotton), 1842년 12월 9일 ~ 1922년 3월 8일)은 1882년에 영국의 자연학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사망하기 직전에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1915년에 주장한 호프 부인(Lady Hope)으로 여겨지며 영국의 복음주의자(evangelist)다. 그 때 나눈 대담 중에 다윈이 진화 이론을
철회했다고 호프는 주장했다.
일대기.. 1
호프 부인의 이야기.. 2
기사 원문.. 2
다윈의 자식들이 부인하다.. 3
이후에 재탕된 이야기와 학술적 연구.. 4
엘리자베스 코튼은 1842년
오스레일리아의 태즈메이니아(Tasmania)에서 영국의 장군인 아써 코튼 경(General Sir Arthur Cotton)의 딸로 태어났다. 1877년에 35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보다 34세 연장자이며 부인과 사별한
퇴역한 제독 제임스 호프 경(Admiral Sir James
Hope)과 결혼함으로써 캐리던의 호프 부인(Lady
Hope of Carriden)이 되었다. 제임스 경은 4년 후에 사망했다.
1880년대 초에 호프 부인과 그녀의 아버지는 복음주의적인 금주 운동(temperance movement)에 참여했으며 찰스 다윈의
집이 있는 다운(Downe)에서 6마일 정도 떨어진 켄트의 베켄햄(Beckenham, Kent)에서 살았다.
1893년에 호프 부인은 자신보다
24세 연장자인 아일랜드 사업가 데니(T. A. Denny)와 재혼했지만 “호프
부인”이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했다.
데니는 1909년에
사망했다. 다윈이 사망한 지 33년이 지난 1915년에 메사추세츠 노스필드(Northfield, Massachusetts)에서 열린 성경 총회(Bible
conference)에서 호프는 다윈과 만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19220년에 그녀는 시드니(Sydney)에서
유방암으로 사망했으며 그곳에 묻혔다.
호프 부인의 이야기
호프 부인의 이야기는 미국 침례교 신문 <Watchman Examiner(파수꾼)> 1915년 8월 15일자에
처음 등장했다. 그 이야기 앞에는 노스필드에서 1915년 7월 30일에서 8월 15일까지 열린 여름 성경 총회(summer Bible conference)에 대한 4쪽짜리 보고가
실려 있었다.
원문은 이렇다:
내가 요청을
받아 유명한 교수인 찰스 다윈 씨를 방문하여 동석한 것은 영국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화창한 가을
오후였습니다. 그는 사망하기 전 몇 달 동안 거의 늘 몸져누워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품위 있는 풍모를 볼 때마다 우리의 왕립 미술원(Royal Academy)의 대형 그림(grand picture)으로
어울린다고 느끼곤 했는데, 이 특별한 날만큼 그것을 강하게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약간 짙은
보라색 색조를 띠는, 수를 놓은 보들보들한 실내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습니다.
베개에 기댄
채, 그는 켄트(Kent)와
서리(Surrey)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답고 놀라운 석양빛으로 이글거리는, 숲과 옥수수 밭으로 이루어진 멀리까지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방에 들어섰을 때 그의 고귀한 이마와 품위 있는 얼굴은 기쁨으로 빛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저 너머
풍경을 가리키며 창문 쪽으로 손을 흔들었는데, 다른 손으로는 늘 숙독하고 있던 성경을 펼쳐 들고 있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읽고 계신가요?” 나는 침대 곁에 앉으면서 물었습니다.
“히브리서요!” 그는 대답했습니다. “여전히 히브리서를 읽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고귀한 책(The Royal Book)’이라고 부릅니다. 위대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어떤
구절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그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창조 역사와
그 위대함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표명한 강한 견해를, 그 다음에는 창세기의 앞 부분 몇 장(chapters)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약간 언급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는 매우 괴로워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손가락이 강하게 실룩거렸으며 번민의 표정이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저는 미숙한 생각들을 품은 젊은이였습니다. 저는
늘 모든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의혹들과 제안들(suggestions)을 쏟아냈는데 그 생각들이 들불처럼 번져서 저도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들로 하나의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하느님의 신성함”과 “이 책의 위대함”에 대해 몇 문장 더 이야기 한 후, 늘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성경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에게는
밭(garden)에 서른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정자(summer
house)가 있습니다.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그곳을 가리켰습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이야기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당신이 여러 마을에서 성경을 읽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일 오후에 그곳의 하인들, 소작농들, 그리고 이웃 몇 사람이 그곳에 모이도록 했으면 합니다.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무엇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까요?” 내가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요!” 그는 분명하고 강렬한 어조로 답한 후
그보다 낮은 소리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행하신 구원에 대해서요. 그것이 최고의 주제 아닙니까? 그리고 당신이 그 사람들과 찬송가를 몇 곡 같이 불렀으면 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악기로 이끌면 될 것입니다. 그러지 않나요?” 이런 말을 하면서 그의 얼굴이 환해지고 생동감으로 넘쳐서 놀라운 표정이 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까닭은 그가 이렇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만약 3시 정각에 당신이 그 모임을 연다면 이 창문이 열릴 것이며 당신은 제가 그 노래에 동참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 기억할
만한 날에 품위 있는 그 노인과 아름다운 그 주변 광경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윈의 자식들이 부인하다
다윈의 가족은 모두 이 이야기를 부인했으며 그에 맞서 싸웠다. 다윈의
아들 프란시스(Francis)는 1918년 5월 28일자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종교에 대한
우리 아버지의의 견해에 대한 호프 부인(Lady Hope)의 이야기는 순전히 거짓입니다. 거짓이라고 제가 그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지만 어떤 답변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불가지론적(agnostic) 관점은 제가 편집한 『Life and Letters of
Charles Darwin(찰스 다윈의 삶과 편지들),
Vol. I.』의
304~317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제가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은 마음대로 출간해도
됩니다. 사실, 그래 주신다면 저도 기쁠 것입니다.
1922년에 이 이야기가 되살아난 이후에 다윈의 딸 헨리에타 리치필드(Henrietta
Litchfield)는 1922년 2월 23자 <The Christian(기독교도)>에 실린 “Charles Darwin’s Death-Bed: Story of Conversion Denied(찰스
다윈의 임종: 개종에 대한 이야기가 부인되다)”라는
제목이 붙은 R.B. 리치필드의 부인(Mrs. R.B. Litchfield) 명의의 기사에서 이렇게 공표했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곁에 있었으며, 호프 부인은 그 분이 마지막 병마로 고생하시는 동안에도 다른 병에 걸리셨을
때에도 곁에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분이 심지어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 분의 사상이나 믿음의 어떤 부분에도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그 당시나 그 이전이나 자신의 과학적 견해 중 어떤 것도 철회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개종했다는 이야기가 미국에서 날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그 모든 이야기에는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1958년에 다윈의 손녀인 노라 발로우(Nora Barlow)가 편집한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 찰스다윈 자서전(The Autobiography of Charles
Darwin)』이 재출간될 때에는 초판인 1887년 판에서 프란시스 다윈이 빼 버린 여러 구절들이 복원되었다.
이후에 재탕된 이야기와
학술적 연구
호프 부인은 1919~1920년 경에 『Battlefield of Faith(신앙의
전장, 1940)』의
저자인 보울(S. J. Bole)에게 보낸 편지에서 약간 다른 이야기를 썼다. 원문은 폴 마스턴(Paul Marston)
박사의 기사에서 볼 수 있다.
그 이야기는 널리 퍼져서 대중적 전설이 되었다. 그 주장은 1955년 10월이 되어서도
<Reformation Review(감화 평론)>에 그리고 1957년에는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의 월례 의사록(Monthly Record)에 재출간되었다.
그 후 그 이야기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로날드 클라크(Ronald
W. Clark)의 『The Survival of Charles Darwin(찰스 다윈의
유물)』에서는 그
이야기를 설명하기는 하지만 아주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다. 1994년에 열린 대학(Open University) 강사이자 전기 작가 제임스 무어(James Moore)는 『The Darwin Legend(다윈 전설)』을 출간했는데 거기에서 1881년 9월 28일에서 10월 2일 사이에 프란시스와 헨리에타는
집에 없었지만 찰스의 부인 엠마(Emma)는 있었을 때 호프가 다윈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호프가 이후에 이야기를 윤색했다고 주장했다. 무어는 자신의 평가를 2005년에 출간한 『Darwin - A ‘Devil’s Chaplain’?(다윈 – ‘악마의 사도’?)』에서 약술한다. 폴 마스톤 박사의 기사에는 다른 분석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 결론을 뒷받침한다.
그는 1915년 기사와 호프 부인이 나중에 쓴 편지 사이의 불일치점들에 주목한다. 나중에 쓴 편지에서는 다윈이 침대가 아니라 소파에 누워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좀 더 그럴 듯하다. 또한 거기에는 다윈이 성경을 “늘 숙독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케냐 복음 연맹(Evangelical Alliance of Kenya)의
의장인 보니파세 아도요(Boniface Adoyo)를 포함한 몇몇 현대 창조론자들이 이
주장을 계속해서 이용했다. 그렇지만 21세기 초에 가장 영향력
있는 창조론 조직들 중 하나인 켄 햄(Ken Ham)의
<해답은 창세기(Answers in Genesis)>는
이 전설을 강하게 폭로했다.
---------------------------------------------------
이덕하 옮김 (2011-01-22, 초벌 번역)
원문: http://en.wikipedia.org/wiki/Elizabeth_Hope
참고문헌 목록, 각주 등은 번역하지 않았으며, 링크(hyperlink)도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원문을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