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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시인을 만나다|시집리뷰
불가능한 사랑과 고통의 내연內燃
- 정소슬의 시집 『내 속에 너를 가두고』의 시세계
안성길(시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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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중견시인 정소슬의 단 한 권의 시집 『내 속에 너를 가두고』가 제작된 것은 2006년이었다. 여기서 출간이 아니라 제작이라고 한 것은 공식적인 출판 절차를 갖추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원고를 수정 보완, 추가한 이번 시집이 정소슬의 세 번째 시집이다. 그 당시 특기할 사실은 딱 한 권이었다는 점과 시어 “가두고”이다. ‘시詩’가 시집으로 엮인다는 것은 대개 다양한 독자와의 만남을 전제한다.
그런데 그 시집이 ‘딱 한 권’만 제작되었다는 건 지금 세상은 나설 때가 아니니 억년 세월의 빙하 속에서 때를 곧 진정한 독자를 기다리겠다는 것이고, 또 창작자인 시인 스스로에게 시를 의도적으로 “가두고” 있는 것이니 자신만이 독자가 되는 즉, 그리스 신화 속 숲의 요정 에코(Echo)의 진실한 사랑을 거절해 그 슬픔에 몸을 잃고 메아리가 되게 한 나르키소스처럼, 오로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소위 리비도(Libido)가 자기 자신만을 향해 발산되는, 에코(Echo)인 독자를 처음부터 안중에 두지 않은 자위自慰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구현이라면 그것 또한 위험한 자만 혹은 자멸적 폭력에 다름 아니다.
그도 저도 아니면 숯불처럼 안으로 안으로 타들어가듯 작품의 최고 완성도를 꾀하기 위해 진공의 내면에 시를 “가두고” 온통 손발이 피투성이가 되는 걸 감수하며 벼리고 벼리는 데만 몰입하겠다는, 소위 미적 완성도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겠다는 것이라면 더구나 더 위험한 발상이다. 이미 지난 세기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Art for art's sake)의 맹점인 주객전도적 상황 곧 가장 소중한 우리의 ‘삶’과 문학의 존재 이유가 배제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원고의 5부 속, “시인만이 시를 읽는 단다/시인만이 시집을 사 본단다/현실이 그렇단다 그렇다면//시인인 나는/시인을 위해 시를 쓰는 것이리/그 시인은 또 내가 읽을 시를 쓰고/독자가 없는 시인만이 독자인/시인들 간의 매매혼賣買婚, 이 근친상간은/어째서 생긴 걸까 언제부터 생긴 걸까”(「슬픈 詩」 부분) 등 ‘슬픈 詩’ 연작들을 보니, 그 이유의 일단이 독자와 단절된 시의 현실과 더불어 다소 복합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정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오직 한 권만 제작한 이유를, “시와의 첫사랑, 그 수줍음 탓이었다. 문학 정서 차원의 소심한 부끄러움이랄까 시라는 순수 혹은 절개에 대한 배려였다”는 언급을 보인다. 또 그간 시집으로의 “공개를 거부해온 시를 15년 만에 전격 공개”하는 이유를 시라는 ‘첫사랑’을 향한 시인의 맹목이 “날로 애닮만 키워 가는 생리적 이 어처구니”를 어쩔 수 없어서 다시 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많지는 않지만 필자의 경험과 지식으로 보건데 절대적인 “순수 혹은 절개”는 무한대로 가까이 수렴될 수는 있어도 그 실체는 처음부터 없다.
따라서 시인이 영원히 간직하고픈 그 “시와의 첫사랑”을 지키는 길은 애초에 비공개로 닫아거는 폐칩廢蟄이 아니며, 시인 역시 부지불식간 그것을 인지하게 된 걸로 보인다. 오히려 일신 우일신 가열하게 시창작에의 몰입과 독자와의 소통을 위한 더욱 다양한 방법론적 모색과 시도는 저 “시와의 첫사랑”을 더욱 공고하게 해줄 걸로 생각되며 이 시집은 그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이상의 몇 가지를 종합해 고려해 볼 때 모두 64편으로 엮은 이 시집 속에서 주목되는 구절은 아래 시 「내 속에 너를 다시 가둔다」에서, “시여/시여/…/못 잊을 임, 마침내 사랑이여 순애보여/단심가 그, 절규의 곡절들이여” 이들 속에서 짚어볼 수 있겠다.
고행이었다/아니, 도탄이었다
잊으려 애쓴다는 게/오히려/무거웠던 세월
시여/시여
늘그막 귀환한/유년의/무젖은 눈시울이여
못 잊을 임, 마침내 사랑이여 순애보여/단심가 그, 절규의 곡절들이여
- 「내 속에 너를 다시 가둔다」 전문
위 시를 보면, 시인이 시인의 삶이 “시”를 향하는 순간 온통 “고행”과 “도탄”으로 점철된다. 그래서 너무 힘에 부치어 “잊으려 애”를 썼으나 끝내 못 벗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고갱이는 시인이 ‘시’를 향해 취하는 태도와 절실한 마음이 드러난 부분일 것이다. 행간의 흐름을 보면, “못 잊을 임”, “마침내 사랑”, “순애보”, “단심가”, “절규의 곡절들”로 압축된다. 여기서 “못 잊을 임”과 “마침내 사랑”까지는 비교적 “시”에의 순수한 사랑, ‘순애純愛’를 보이다가 그 뒤로 곧장 “순애보”, “단심가”, “절규의 곡절들”이란 결연한 배수진背水陣을 쳐버린다.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는, ‘순애殉愛’로까지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순애”는 ‘순애純愛’와 ‘순애殉愛’ 둘 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 핵심은 단연 “순애보”다. 곧 시인 정소슬의 이번 시집 『내 속에 너를 가두고』(도서출판 가을, 2021)는 시인의 세 번째 시집으로 “시”를 향한 절절한 애정과 열망의 파노라마적 노정을 노래하고 있다 하겠다.
2
시인 정소슬이 그 자신의 삶을 오로지 “시”로 가득 채운 “순애보”적 노정에서 가장 많이 보여주는 건 어린 날 ‘첫사랑’에의 ‘기다림’과 ‘그리움’이다.
시 「그 가시내」는 어린 시절 순수했던 ‘첫사랑’에 대한 기대와 배신에의 아픈 기억, 그 실패의 쓰라림과 생애 내내 도저히 해소되지 않는 질긴 미련, 그런 결과 가슴 저 깊은 심연에서 아이러니컬(ironical)하게도 무시로 속수무책 내연內燃하는 그리움을 보여준다.
시인은 그런 미움과 갈망이란 양가적 고뇌를 시문학을 향해 쏟는 자기 열정의 맹렬함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전이시켜 “시”를 향한 포기할 수 없는 숙명적 열망 혹은 그리움을 잘 이끌어내어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첫사랑’ 그녀를 추억하는, “손끝 봉숭아 물만 고왔지 고왔지/그 계집 거짓말처럼 고왔지” 이 구절에서 전체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만 “그 계집”이란 표현은 자칫 페니스 파시즘적이고 성차별적 폭력의 일방적 구사란 논란의 소지를 다소 안고 있어 시인의 고민이 조금 필요해 보인다.
그렇지만 시 「그 집 앞」에는 숫기라곤 없는 그래서 더욱 티 하나 없이 순수한 “접시꽃”처럼 해맑은 그리움이 만져진다. “장대처럼” 긴 “접시꽃 모가지”를 하고, 때로는 “까치발 치세우던” “담 아래 봉숭아”처럼 “담” 넘어 하염없이 훔쳐보던, 그래서 더 “지지리 눈부시던 그 집”의 “봉창에 얹힌” 첫사랑 그녀의 “코고무신”, 그러나 그것은 경화수월(鏡花水月) 거울 속의 꽃이요, 물에 비친 달일 뿐, 첫사랑의 달콤한 체취도 그지없이 부드럽고 안온할 그 체온도 없는, 오직 “그 집/앞/담 밑”까지가 시인에게 허락된 ‘짝사랑’의 비극적 거리다.
그래서 시인은 시 「고해告解」처럼 사랑은 할수록 안타깝고 고통스럽다. 그만큼 더 참사랑이 그리운 것이다. 「고해告解」의 행간을 보면, 화자는 오직 “사랑” 하나로 “훔쳐” 온 “널 여태 내 가슴속에/가둬” 놓고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까지도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몰라 “널 융해하질 못”하고 만다. 그 결과 넌 “내 심장”에 외롭게 “버려진” 채 “노박힌” 폭력적 “감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황, 즉 서로가 서로에게 “종내는 비련의 연옥”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오로지 “사랑”의 이름으로 너의 허락도 없이 널 “내 가슴속에” 품었지만 내 모든 걸 바쳐 사랑했기에 “용서” 받을 알았으나, 나의 일방적인 “사랑”은 영화 미저리(Misery, 1990)적 집착의 “감금”이었고, “미필적 사랑”은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에 의한 사랑 즉 비극적 결과가 발생할 줄 알면서 사랑한 비극적 결과임을 늦게나마 깨달아 자신을 “더는, 용서 마라!”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에게 있어 참사랑이 힘겨웠던 것은 사전 교감이란 전혀 없는 짝사랑이거나 어쩌면 스스로와 사랑에 대해 너무 이상적 기준을 들이민 것은 아닐까. 자기 자신에게는 너무 높은 자격을 사랑에게는 티 하나 없이 순수한 결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순혈주의를 요구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한편, 이 「고해告解」의 부제가 “내 귀를 잘라내고 베토벤 비창 1악장을 연주해” 달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베토벤 비창’은 원어가 ‘pathetique’ 즉 ‘슬프지만 장엄하게’라는 비장悲壯이다. 이를 일본에서 처음 ‘마음이 몹시 상하고 슬픔’이란 영어 ‘pathetic’으로 혼동 오역한 결과 비창悲愴으로 굳은 단어다. 실제로 ‘비창 1악장’을 들어보면, 비가 내리는 창밖의 밝지만 쓸쓸한 풍경을 보는 듯, 밝은데도 묘하게 밝지 않고, 몹시 절망적인 리듬인데도 다른 한 쪽에선 희망을 노래하는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너무도 간절한 “사랑”이 그 간절함 때문에 폭력적 집착의 연옥을 만든 건 아닌지 끊임없이 성찰하는 시인을 읽어낼 수도 있겠고, 달리 그런 연옥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늘 자책하고 아파하면서도 끝내 못 벗어나는 자기 연민에의 고백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 「가을 눈동자 - 절교에 대한 추억·3」 역시 계절처럼 해마다 반복되는 첫사랑에의 절절한 그리움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특히 반어적 용어와 기법, 중얼거리는 듯한 구절의 반복이 몹시 애틋하게 다가온다.
오이디푸스(Oedipus) 왕의 전설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사랑 혹은 숙명을 뜻한다. 시 「가을 눈동자」는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정도와 애틋함이 그 정점에 도달한 느낌이다. “절교”는 ‘별리’의 단호한 선언이지만 막상 해마다 “가을”이면 무한 반복되어 아예 나를 반어적으로 사랑에의 “중독”으로까지 몰아넣어버렸고 “올해도 이렇게/네가 돌아오는 길목을 기다리고” 서 있게 하고 있다는 것이니, 이들 “절교에 대한 추억” 연작시들은 죽음조차도 나를 첫사랑과 뗄 수 없는 그야말로 고통스런 ‘숙명’을 노래하고 있다 하겠다.
이처럼 앞서 「그 가시내」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시인의 첫사랑을 향한 갈망은 어느 순간 “시문학”을 향한 열망으로 전이되어 시인의 생애 내내 무시로 내연內燃하는 그리움으로 표출된다. 이는 역으로 시작詩作에 임하는 실생활 속 시인의 진지한 태도의 정도를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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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소슬의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는 현실에의 비판과 풍자다. 시 「무관심에 대하여」, 「분재」, 「저 간악한 숫자」, 「바닥 - 다보탑 앞에서」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런 시들은 그의 작품에선 주류적 경향이기도 하므로 몇 편을 더 자세히 살핀다.
「무관심에 대하여」의 경우, 사람이나 짐승이나 낯선 것들에 대한 적의는 약육강식의 생존본능으로 기인한다. 나를 처음 봤을 땐 “개”는 “꼬리를 치”는 등 내게 관심을 보이며 우호적이었지만 내가 약점인 “등을 보이는 순간 와락” 순식간에 돌변하여 내 숨통을 향해 달려든다. 자신과 무관한 존재를 그저 너그럽게 내버려두질 못하고 기어이 흑백논리에 매몰되어 편을 가르는 세상을 풍자하고 있으며 약자는 기어이 짓밟으려는 파탄의 세상인심을 질타한다. 그와 동시에 자기 내부에 도사린 병적인 편 가르기와 타인에의 부당하고 비겁한 공격성을 자조自嘲하고 있기도 한 모습이다.
우리 삶에서 진실로 소중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인간답게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분재」를 보면, 본말전도, “집마다 사무실마다” 사람들은 가장 자연스럽지 못하고 인위적인 “기형”인 “분재”를, 그것도 “비틀리고 꼬부라져 꼽추가 된” 것일수록 더 뜨겁게 열광한다.
그럼에도 그 같은 “분재”보다 열 배 백 배는 더 소중하고 그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정성”을 쏟아 돌봐줘야 할, 우리 사회에서 “기형”으로 태어나 버려지는 아기들은 속수무책 외국으로 무책임하게 “수출”해버리는 비정하고 모순된 현실을 까발려 물질적 풍요에만 매달리다 부지불식간 훼손된 인간성의 회복을 강하게 촉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간성 상실이 바야흐로 인류의 문명 전체에로까지 번져 만연했음을 시 「저 간악한 숫자」는 다분히 직설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시를 보면, “티브이”로 대표되는 매스컴의 자본재적 속성인 교환가치가 높은 화제성에만 집착하는, 반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적나라한 실체를, “저 부지런한 티브이는 살벌한 그곳”에서 힘이 센 “연합군”의 “구멍 난 철모 하나하나 일일이 세고 있었”지만, 정작 지옥으로 돌변한 힘없는 “그 땅의 주인 이라크 원주민들의/수십 만”에 달하는 주검은 눈감아버리고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는 태도를 폭로한다.
또한 사람이든 짐승이든 생명은 똑같이 귀하고 소중하건만 무너진 “아파트”에 “인부 두 명이 숨”진 사건은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되지만, “무지막지 학살당한 개미 굼벵이 꽃 풀 나무들과/야반도주하듯 쫓겨난 고라니 멧돼지 뱀 개구리들의/안부”는 그 누구도 신경 안 쓴다. 짐승들이 살 수 없으면 결국 사람 또한 살아갈 수 없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시 「저 간악한 숫자」는 온통 모순투성이인 우리 현실의 인간위주의 윤리적 파탄에 대한 분노를 대놓고 “간악한” 행위라 시인은 맹비난한다.
한편 시 「바닥 - 다보탑 앞에서」는 심장도, 아비 어미도 없는 자본이 법이고 진리인, 인간중심 사회의 윤리적 파탄이 그 탐심이 주변 사물에로까지 확산되는 현실까지 포착하여 풍자와 경종을 울린다.
시 「바닥 - 다보탑 앞에서」의 “바닥”은 우리 존재의 근본 바탕이건만 눈에 띄지도 않고 어둡고 비루해서 결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한편 눈에 쏙 들어오고 환하게 빛나는 허공은 비록 허망하지만 누구에게나 주목받는다는 점에서 이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어, “등허리가 닳아 없어진 계단 층돌”과 “보드라운 손 뒤춤에 꽂고 위세만 떨치고 선” “석탑”, “짠맛 매운맛 다 품어온 장 항아리”와 “벽장에서 빈둥거리는 도자기 화병”의 그 ‘소중함’과 ‘사회적 위상’의 괴리와 모순을 적나라한 대조로 폭로해 현실의 파탄을 꼬집는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가치전도의 현실이 그것과 무관해 보이는, “이 북풍한설, 발뒤꿈치 돋워/키 빼 올리기에” “안간힘”으로 열중하는 “저 나무”에로까지 번진 현실을 시인은 몹시 안타까운 시선으로 주목하고 있는 점이 눈여겨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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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이번 시집에서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이다. 시인이 울산 시내에서 거주지를 본격적으로 혼자 안태고향인 울주군 범서읍 망성리 고향 본가로 옮긴 지는 십여 년이 훌쩍 넘었다. 물론 근무지는 울산 시내라 출퇴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그가 좋아하는 전원에서 생활한다. 그런 결과 「쓸어버린 낙엽이」, 「달빛이 고운 날에는」, 「봄바람」, 「새벽부터 나리는 비」, 「나의 햇뜰」 등 상당한 작품들에서 자연에 안겨 사는 여유가 느껴진다.
시 「쓸어버린 낙엽이」에는 “마당”의 “낙엽”을 통해 전원에서의 서로 나누는 삶을 소리 없이 행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새삼 목격한다. 또한 「달빛이 고운 날에는」에서도 역시 자연스럽게 고요하고 맑은 전원의 “풍경” 속에서 “이슬에 옷깃이 젖은들”, “서릿발에 발목이 빠진들” “정겨운 이웃”과 사는 삶이니, 나 또한 그런 “풍경”과 더불어 살아서 마냥 행복하다고 하는 모습이다.
시 「봄바람」 역시 “내 볼에다 그의 달달한 숨소리/비벼올 것만 같은” 봄날의 전원에서의 여유와 만족이 한껏 감지된다. 시 「나의 햇뜰」 역시나 만족감이 한껏 느껴진다.
이 「나의 햇뜰」은 시인 정소슬이 복잡한 도시 안에서 한적한 전원으로 거주지를 옮긴 결정적 동인을 매우 간결하게 잘 보여준다. “밤”, “새벽”, “아침” 할 것 없이 “단 한 평”일지라도 “나의 햇뜰”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노오란 달”로 몸을 닦고 “새벽엔/이슬로 눈”을 헹궈 말 그대로 순수한 자연처럼 때 한 점 묻지 않는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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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소슬은 이번 시집 『내 속에 너를 가두고』를 통해 여러 다양한 세계를 보였는데 특히 필자의 시선에 포착된 특기할 시도는 시어의 의도적 살려 쓰기였다. 시 「나의 햇뜰」의 “햇뜰”과 「함박눈」의 ‘사랑’의 순우리말인 “다솜” 같은 말은 무척 자연스럽게 잘 어울린다.
그러나 시 「고해告解」의 “노박혀”는 ‘계속해서 한곳에만 붙박여 혹은 줄곧 한 일에만 골몰한다’는 의미의 순 우리말인데 의도는 좋았으나 앞뒤 흐름이 썩 자연스러워보이진 않아 보보였다. 그 이외의 「코스모스 연가」, 「낙엽」, 「어젯밤 꿈속에」 등 몇몇 시들에서도 그런 껄끄러움이 보여 살짝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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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시인 정소슬의 세 번째 출간하는 시집인 『내 속에 너를 가두고』(도서출판 가을, 2021)를, 어린 날 ‘첫사랑’에의 ‘기다림’과 ‘그리움’, 여러 모순이 상존하는 현실에의 비판과 풍자, 전원에서의 자연에 경도된 모습, 우리말 시어의 의도적 살려 쓰기 등 몇 가지의 방향에서 음미하고 살펴보았다. 수록된 시의 행간 곳곳에서 ‘시문학’을 향한 시인의 뜨거운 열정 또한 다수 만날 수 있었다.
시인은 태생적으로 늘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그 불가능을 꿈꾸는 불을 사랑한 ‘불나방’ 같은 존재다. 그의 생애 끝까지 너무 이상적이어서 도저히 실현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숨이 다 소진되는 순간까지 사유하고 꿈꾼다. 그것을 노래한다. 그것이 바로 이 지구별에서 시인이 존재하는 이유다.
꿈꾸지 않는 삶에는 사유가 존재할 공간도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기대도 없다. 오로지 무가치한 공허만 있을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순정한 ‘첫사랑’, 오로지 미적 혹은 온전한 문학성을 다 갖춘 시작품, 티 없이 순결한 삶, 영원히 오염을 모를 이상적인 세계, 도덕적 순결주의의 실천, 완전한 자유, 완벽한 공동체적 삶 등은 불가능하지만 꿈을 꾸어야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각곡유목刻鵠類鶩, 백조를 꿈꾸며 노력하다보면 최소한 그 언저리라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시인 정소슬의 ‘시’를 통한 꿈꾸기는 언제나 가치 있는 삶이라 하겠다.
끝으로 시인의 꿈꾸기는 언제나 집착의 대척점에 살고 있는, 즐거운 몰입이길 빌어본다.
안성길
1987년 무크지 『지평』, 1988년 『민족과 지역』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펴ᅟᅭᆼ론은 2008년 해양과문학으로 활동을 시작했. 시집으로 『빛나는 고난』『아직도 나는 직선이 아름답다』『말희의 사랑』『민달팽이의 노래』 평론집 『고래시, 생명의 은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