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사이펀 신인상(하반기) | 윤슬
12월의 잔등 외 4편
2021년 마지막 날
생을 다한 달력을 철심에서 뜯어냈다
운동장만 한 연습장이 나왔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
아버지는 계절이 지난 달력에
낙서를 해도
그림을 그려도
뻔한 여백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숫자 하나가 지나가기를
눈썹이 하얗게 새도록 기다렸다
하얗게 바랜 매듭달의 뒷면에
모두가 잠든 밤
혼자 탈출을 꿈꾸는 낙서를 했었다
때 묻은 일 년을 보내던 마지막 순간,
어머니의 깊게 잠든 어깨너머로
늙은 바람이 들썩이고 있었다
이제는 한없이 초라해진
어머니의 등 뒤에
소리 없이 뜨거워진 얼굴을 묻고
바람처럼 울었다
까마귀 시, 마중
시골 마을을 돌며 쓰레기 봉지를 헤쳐 대는
떼 까마귀에 대해 시를 쓰려는데
억지춘양이 되었다
생각처럼 이야기가 풀리지 않아
지난번에 만났던 공광규 시인의 시집을 펼쳤다
마침, 「고독사에 대한 보고서」 에
“자식들 대신 까마귀가 집 주위를 돌며
맑게 울다 떠났다고 했다”는 구절이
두 날개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
시를 쓰려면 시를 붓고
까마귀를 노래하려면
까마귀를 찾으면 되는데
차갑게 숨어버린 너를
어떻게 마중 나가야
뜨거워질 수 있을까
결핍의 완성
밑이 빠졌다
모든 것을 불살라도
미완성 그림이다
못갖춘마디의 착각이다
채울 수 없는
욕망이 깨졌다
빈,
그릇 가득
.
.
.
달빛이 들어왔다
신이 나서 도망치던 백구가 순순히 목을 내놓았다
목을 매고 있던 줄이 끊어졌다
잠든 주인은 나올 기미가 없고
텅 빈 밥그릇에
별빛 수북한 새벽,
젖은 흙냄새를 찾아 달린다
길바닥에 납작하게 말라붙은
개구리를 일으켜
서리 맞은 안부를 묻고
까만 오디 몇 개 주워 먹고 허기를 달랬다
밥그릇은 안 된다며 인정머리 없는
잇몸을 드러내는
이웃집 대문 앞을 돌아서니
게으른 주인이 아침밥을 들고 나와 나를 부른다
저 밥을 다 먹으면 당분간
새벽이슬의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없겠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떠돌아봤자 결국
외로움뿐인걸,
동물 학대
슬픔은 개나 줘 버리라고 했다
막내딸은
어떻게 충성스런 생명에게
인간의 슬픔 따위를 줄 수 있느냐며
두 눈을 부릅떴다
슬픔을 받아먹은 개가
더 크게 이자를 붙여
돌려줄 수도 있다며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다
열 살짜리의 헤아림에도 못 미치면서
시를 쓰겠다고
치부를 함부로 끄집어낸 내가 부끄럽다
설거지통에 내 슬픔은 모두 쏟아버리고
그동안 개에게 먹인 슬픔을 찾아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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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슬
*본명 손희정
*1980년 출생
*강원대 졸업
*달빛문학회 대표
*멧돼지연구소 cs
*저서 『딸부잣집 녹턴 소통법』(공저), 『백석의 눈을 맞추다』(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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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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