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노을05 원문보기 글쓴이: 관천
8.15 해방정국의 생생한 사진 기록[93장]
자유당 정권 초기, 첫 공개하는 귀한 사진들!! 미국이 참전해 대한민국을 구해 주었을까? 전 세계에서 초대대통령의 동상이 없는 국가는 대한민국뿐, 북한은 김일성동상이 5,000여개 된다는데... 오늘의 대한민국을 외국인은 미스테리국이라 한다. 1945-46년 한국에 일본군 무장 해재를 위해 한국에 진주한 미군과 함께 한국으로 와서 찍은 사진들이다. 차앞 범퍼에 워저 있는 도구는 찰조망을 자르는 장비. 유럽에서 기록사진을 촬영하든 미통신부대 (미군은 통신 부대가 기록 사진을 찍는 업무를 담딩한다)는 히틀러의 패망으로 배를 타고 58일간의 긴 항해 끝에 유럽의 반대쪽에 있는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일본이 항복을 하고 그해 9월 이들은 오키나와에서 배를 타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상륙하는 미군과 함께 인천에 상륙했다. 요원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장비. 악의가 없는 천사 같은 어린아이의 눈을 가진 이 노인이 정말 내 마음을 사로 잡는다. 평화로운 모습으로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다. 해방직후, 아버님 친구도 일본에서 돌아왔으나 그들은 고위직에 있었는지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서 내렸을 정도로 일본에서 잘 살았었다. 이야기는 1960년초, 아버님 친구들이 모여서 식사를 할때 직접 그분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다. 그래도 감이 잡히지 않았으나 윗사진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옷을 입고 돌아왔는지 상상을 할수가 있게 되였다. 이들이 신은 군화와 복장이 아마 일본군의 군복이 아닐가하는 추정을 해본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38선 이북에 진추한 소련군인들과 Don O'brien. 정말 많이 들어서 이들이 나는 어릴때 괴물같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북한에 진주한 많은 소련군인들이 형무소에 같여 있든 죄수들도 섞여 있엇다는 사실을 나이들어 문서를 검색해서 알게 되였다. 평양에서 피난온 연세 많은 이웃으로 부터 소련어로 다와이(내놔), 호로쇼(좋다), 니엣(No)라는 말을 배울 정도였으니 수많은 소련군의 만행을 들으며 자랐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을 통칭해서 로스케로 불렀다. 길에서서 지나가는행인들의 팔을 검사해서 차고 있는 시계를 모조리 뺏어서 자신의 양팔에 차고다니다가 태엽을 감을지 몰라 작동하지 않는 시계는 버렸다고 했다. 베개로 이용해 잠잘때 사용하다가 배가 고프면 비고 있는 검은 빵을 뜯어 먹으며, 영하 30도의 한 겨울에도 철길에서 철로를 베고 잠을 잔다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들의 모습. 군표(점령지에 주둔한 군대가 발행하는 돈으로 현지에서만 통용이 가능하다)를 찍어 들고 다니며 가위로 잘라 가며 사용한 소련군의 영향으로 북한 경제에 큰 혼돈을 주기까지 했다. 내가 상상했든 괴물의 모습 못지 않게 이들에게서 야비함과 잔인함 마져느껴진다. 철로에 서있는 일본군의 장갑으로 무장한 열차를 발견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상륙하는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특별 제작한 장갑 열차의 모습이다. 남한을 통치하는 군정장관 하지 중장이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모습이다. 사진을 찍은 오브라인은 아름다운 역사에 매료 되였다고 했으나 서울근교 어디에 이런 역사가 있었는지는 알수가 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 환영행사. 내부모님 세대들의 모습이 보인다. 보이스카웃과 구경하는 시민들. 눈길에서 비록 집신을 신고, 여기저기 기은 두루마기를 입었으나, 이분의 눈에서 발산하는 섬득할 정도로 무서운 눈빛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보이며, 일제에 압제에도 끄떡없이 버터낸 무서운 저항력을 간직한 기가 느껴진다. 집회에서 통역을 하시는 모습은 아마 한국에서 그당시 미국유학을 다녀온 저명한 인사가 틀림없다. 하지 장군이 남긴 일화가 있다. 그 내용은 한국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자 장군은, 계란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을 해서 현실을 무시한(현실을 몰라서) 말로 오랫동안 한국사회에 회자되였든 말을 남겼다.
한강 철교를 촬영하는 오브라이엔. 한국 어머니의 당당한 모습이 보이는 이한장의 사진에서 한국 어머니들의 공통 분모인 어떤 역경도 이겨내는 어머니의 사랑이 느껴진다. 화물과 승객을 동시에 수송하는 이 화물기는 한국에서 미군의 수송업무를 당당하기 위해 배치 되였다. 이런 모습은 경기도 지방이 아닌 남쪽 지방에서나 볼수 있었든 모습이다. 광복후의 서울은 현재와 달리 일본 처럼 차량은 왼쪽 통행이었다. 내가 보는 사진속의 인물은 여자가 틀림없어 보인다.
일제는 만주지방에 주둔한 왜병들의 겨울철 옷을 만들기 위해 묶여 있지 않고 돌아다니는 길개를 잡을수 있는 권한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개를 잡아 고기는 먹거나 팔고 가죽은 일본정부에 바쳤다. 개털이나 가죽으로 만든 겨울 목도리는 육이오 전쟁중에도 주로 만주지방에서 내려온 동포들이 많이들 사용했다. 성조기를 든것으로 보아 미군환영 행사장 처럼 보인다. 영문으로 미군의 출입을 금지하는 팻말이 붇어있고 뒷쪽에 미군 헌병도 보인다. 서울 어디서나 볼수 있었든 인력거, 어머님과 함께 타기도 했든 이 인력거는 6.25전쟁 수복후 서울로 돌아오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러 어린나에게 궁금중을 불러 일으켰었다. 일제는 조선인들만 고통을 준게 아니고 문화재까지 돌보지 않아 지붕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일본군의 99식 소총은 회수해서 한국국방 경비대가 사용했으나, 그외 군수품의 행방은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 볼수가 없다.
그 궁금증을 풀수있는 사진이 바로 김포비행장에 줄줄이 서있는 일본군 전투기다. 연합군이 Code Name Sonia로 불렀든 이전투기들은 Mitubishi K1-51 Type99 기종이다. 20여대로 보이는 이 전투기들은 건국후 들여온 10대의 연습기 창랑호 보다 백배나 전투력을 갖춘 기종이다.
이 전투기들 다 어디갔지?. 진주한 미군은 일본 열도와 한국내에 남은 일본군의 모든 전투기나 탱크와 각종무기는 모조리 잘라내거나 아니면 불도저로 갈아뭉개 고철로 만들어 한대도 남기지 않았다. 2차세계대전후 나치 독일이 남긴 무기도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살아남은 장비로는미군이 연구용으로 선택된 몇개의 무기는 예외였다. 아편으로 알려진 이마약은 일본이 한국인을 이용하기 위해 아편을 사용했다는 증거물로알려졌다. 아편까지 이용해 한국인을 착취한 이들에게 우리국민들은 몇년전에 동일본 대지진때 의연금을 걷고 낸 한국인들,
그렇게 36년을 격고도 도와주면 독도문제 들고 나오지 않을것 처럼 믿엇든 한국인들 참 너무 순진하다.
아마 일본군에 징집 되였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조선이 해방 되였다는 사실을 읽을수 있고,
소녀가 신고있는 나막신(일본어 - 게다)과 신사의 생생한 모습에서 일본이 남긴 잔재가 무엇인지를 읽을 수가 있다.
# 사진의 신사가 있든 자리에는 현재 도서관과 공연장이 들어서 있다.
원래 남산에는 두개의 神社가 있었다고 한다. 이사진에 보이는 남산위 신사와 현 동국대학교 근처에 또다른 신사가 있었다고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