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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배경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① 제자라고 하는 헬라어 “마데테스”는 “배우는 자, 생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선생”(헬, 디다칼로스), 또는 “랍비”의 상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예수님은 열두 제자 외에도 다른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 특별히 열두 제자를 “보내심을 받은 자, 사절, 사신, 차사”의 뜻을 가진 “사도” (헬, 아포스톨로스)라 칭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왜, 열두명의 제자를 두었을까요?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상응하는 신약시대의 새로운 영적 열두 지파를 세우고자 합입니다.
② 먼저 사도에 대한 말씀을 잠시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도 사도가 있는냐 없는냐에 논란이 많습니다. 자기들이 서로 사도라 부르고 사도를 세우는 교단은 기존 교단에서 대체로 이단으로 정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엡 4:11절 말씀에 근거하여 사도적 기름부으심이 있는 자들이 오늘날에도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에베소서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 예수님의 열두 사도의 수는 변할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사도라고 칭함을 받아도 열두 사도에는 절대로 못들어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의 열두 사도라고 주장하면 마치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한 지파를 추가하는 것과 같고, 또는 기존의 열두 사도 중 하나를 빼고 자기가 들어가고자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새예루살렘 성의 기초 보석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면 더 이상 변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 그래서 사도바울도 자신의 사도됨에 대하여 수없이 많은 변증을 해야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오늘날 대부분 사도라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지만, 열두 사도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바나바도 사도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바울과 마찬가지로 광의의 사도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4: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③ 그리고 예수님은 70인을 따로 세우시기도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사도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지만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전도하러 다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임에 분명합니다.
[누가복음 10: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들은 구약 이스라엘 70인 장로에 상응하는 신약시대의 장로의 숫자입니다.
이들은 열두 제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서 장로와 같은 자들인 것입니다.
열두 지파에서 세워진 기존의 이스라엘 장로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넘겨주는 세력의 한 부류가 되어 예수님 나라에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7: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세워지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서 새로운 장로들이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장로가 되시는 분들, 어떤 장로가 되어야 할지를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열두 지파에서 형성된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는 구약적 장로가 되면 안됩니다.
2. 예수님께서 제자를 뽑은 기준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어떤 기준으로 뽑으셨을까요?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뽑으셨는데 누가 제자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눅 6:12-13)
▶ 예수님께서 원하는 자들을 사도로 불렀습니다.
[마가복음 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많은 사람들이 열두 제자에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뜻대로 생각대로 더구나 투표로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을 사도로, 제자로 부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예수님께서 원하는 자들이었을까요?
① 대체로 배우지 못한 분들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배우지 않은 학문이 없는 범인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그래서 오늘날 학식이 없다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랍비와 같은 자들에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요 7:15)
[요한복음 7: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그 이유이 무엇일까요? 새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넣고자 함입니다(마 9:17)
기존의 종교적인 틀 안에서 랍비들로부터 배운 사람들이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존의 종교의 틀이 있는 사람들은 그 틀을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종교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의 대부분은 멸시를 받던 갈릴리 출신으로 어부들이 많습니다.
▶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많이 배워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
너무 지식이 많아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식이 높은 자, 이성으로 가득 잡혀 있는 자는 예수님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깨어지기만 하면 바울처럼 크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세상의 진리로 가득찬 우리들 속에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방해하는 세상 진리를 다 내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속에서 사탄이 심어놓은 거짓 진리들이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말씀의 진리 앞에서 버리고 새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것들을 배설물로 여겨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빌 3:8)
→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② 자기의 일에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열두 제자 모두를 부르시는 모습이 성경은 다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표적인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자기의 일에 열심히 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야고보와 그의 형제 야고보도 열심히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깁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누가복음 5:5-11절을 보면, 이들은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라고 부르는 마태의 경우도 비록 유대인들에게는 죄인 취급 받았지만 세금을 걷기 위하여 세관에 앉아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열심당원인 시몬도 오늘날 태극기 부대처럼 애국운동한다고 많이 뛰어 다녔을 것입니다.
엘리사도 열두 겨릿소로 밭을 갈고 있을 때에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습니다(왕상 19:21)
게으르면 주님의 제자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부지런한 자가 사용됩니다.
그가 열심히 하던 자기 일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랐어도 그가 했던 일도 직. 간접으로 다 주의 일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사람을 낚는 전도자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실 때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막 1:17)
예수님께서도 부지런한 분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습니다 (요 5:17),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막 3:20, 6:31)
▶ 성경은 여기 저기서 게으른 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게으른 종은 악한 종과 동격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전도서, 잠언에서도 게으른 자의 결말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전도서 10:18]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잠언 15:19]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사도바울도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엡 5:16, 골 4:5)
③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다 내려놓고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등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에 재산1호일 수 있는 배도, 그물도 버려두고, 부모까지 버려두고 예수를 따릅니다.
버려두고(헬, 아페네테)는 버리다는 뜻과 같이 내팽개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 능동적으로 단호히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능동태).
사람들이 제자의 길을 걷는데 방해가 되는 것 중 하나가 가족들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부모, 형제보다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아도 안되고, 부모의 장사까지도 믿지 않는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 맡기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눅 9:52-62)
제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우리들은 이것을 결단하지 못하니 참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할 네 가지 사항
① 제자는 스승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 제자와 스승 관계는 함께 있는 관계입니다
스승과 분리되어 있으면서 그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이 제자라면 성령님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따르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모습이므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요한복음 15장에 기록된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와의 관계인 것입니다.
▶ 요한복음 15장에 비유로 기록된 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님께 가지로서 우리들이 붙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제자는 스승에게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열매를 맺게 되는데, 열매 맺는 자가 참 제자라는 것입니다 (요 15:1-8).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 반대로 마귀와 함께 있으면 마귀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잡혀 있으면 모세의 제자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요 9:28)
누구와 같이 있느냐?가 누구의 제자이냐 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함께 있음으로 스승의 모든 삶을 배우고, 생각을 알게 되고,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에 지역교회에 오지 않고 계속 그 교회 영상 예배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아직 있습니다. 그는 그 교회 붙어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상 예배는 가르치는 자와 진정한 교통이 되기 어렵고, 성도들간에도 교제도 어렵습니다.
▶ 함께 있다는 것은 눈과 눈이,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번째 율법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므로 그의 얼굴이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 드러난 것입니다. 만일 그가 소리로만 들었다면 과연 그 영광이 그의 얼굴에서 나타났을까요? 아닙니다.
[출 34: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우리들이 스승이신 주님을 닮아 주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얼굴을 하나님과 맞대고 함께 있을 때에 가능한 것처럼, 스승과 함께 있을 때 스승의 인격과 실력이 그대로 그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② 제자는 스승에게 배워야 합니다.
[마가복음 4: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항상 가르치셨습니다. 못 알아 듣는 것을 다시 풀어 가르치시기도 했습니다. 제자는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제자공부” 열풍이 불었습니다. 저도 여러 번 제자공부를 하고 수료도 했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랑의 교회는 제자공부로 성장한 교회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자와 스승 관계는 뜻 그대로 우선적으로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삶을 가르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게 됩니다.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스승을 만나서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님의 가르침도 배워야 합니다. 성령님도 우리들의 스승이십니다(고전 2:13).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③ 가르침을 받은 것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인터넷 FOLLOWER 수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제자의 삶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켜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를 결코 제자라고 할수 없습니다.
배웠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마치 운전면허를 땄지만 운전하지 않아 장롱면허가 되어 운전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마치 주초없이 집을 지은 것과 같아 배운 것이 헛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행동으로,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앞서 제자를 뽑은 기준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에,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즉각 따랐던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부름에 즉각 반응하여 따랐기에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배운 것을 따라 살아야 진정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나라 제자공부가 여러모로 좋은 열매를 맺었지만 어떤 분들은 제자공부가 한국교회를 쇠퇴하게 했다고도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머리만 키웠다는 것입니다. 머리만 커졌으니 사사건건 목회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영적이지 못하고 지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성은 늘었지만 영성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배운 것을 삶으로 실천하여 손발이 튼튼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머리만 자란 영적 가분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성령을 받으신 후에 하나같이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가 대부분 순교를 당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살아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대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90요 8:31)
④ 진정한 제자와 스승의 관계는 계약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과거에 사은회라는 모임도 많았습니다. 은사의 은혜를 생각하여 지난날의 은사를 모셔 놓고 대접하는 모입니다. 지금은 그런 용어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 사이가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많은 부분 돈의 관계로 묶인 계약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돈 내라, 그러면 내가 가르쳐 주마! 이런식입니다.
▶ 스승과 제자가 제대로 붙어 있을 수 있는 힘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신뢰입니다. 신뢰는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스승과 제자, 제자와 제자 간에 사랑과 신뢰가 없으면 참 스승과 제자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스승이 싫어지면 영적 기름부으심이 흘러 내려가지 않습니다. 중보도 안됩니다. 미움, 원망, 불평이 그 기름부으심을 차단합니다. 서로 사랑관계에 있을 때 스승은 그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이 흘러내려 가듯이 흘러 내려가는 것입니다 (시편 133:1-3)
물론 스승도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수종드는 똘마니 세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모세를 수종들고, 엘리사가 엘리야를 수종들듯이 스스로 수종들 수는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수종들었던 그들은 스승과 같이 휼륭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잘못된 스승 만나면 계속 똘마니 노릇만 하다가 마치게 됩니다. 전국으로 몰고 다니면서 스승이라고 하는 자의 사역에만 동원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돈벌이에 활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그대로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치유하는 것이 예수님의 3대 사역입니다.
제자를 삼고 가르치신 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자기에게 있는 그들에게 능력과 권세까지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육신적인 필요도 공급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2: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②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제자를 삼기 위함입니다.
자기가 제자 되는 것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가 또 다른 사람들을 제자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유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러므로
▶ 제자에서 스승으로 나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좋은 스승을 잘 만나야 하고, 좋은 스승도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께서 꿈꾸셨던 천국,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맺는 말>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절에서 일반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가 많지 않다고 했는데, 오늘날에는 참 스승도 많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니 여기 저기 스승을 찾아 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3절에서는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르기 위하여 스승을 많이 두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메뚜기 뛰어 다니듯이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스승과 제자 관계가 무너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좋은 스승을 만나도 떠나는 제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66]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가룟 유다는 마귀가 들어가 마귀의 제자가 되어 스승인 예수님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제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자의 길을 계속 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제자의 길은 곧 스승의 길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그 길은 결코 편한 길이나 쉬운 길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길 끝에는 천국이요, 영생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들이 제자의 길을 가고, 다른 사람들을 제자 삼으면 이 땅에서 모든 민족이 주를 찬송하는 그날이 올 것입니다.
[시편 67:3]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 그날이 올 것입니다.
[하박국 2: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우리 모두 이날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고 또 다른 제자를 낳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