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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인
본 명 : 강은교(필 명:강은교)
생년월일 : 1945-12-13 [양]
주 소 : 부산시 사하구 동아대학교 국문과교수실(우편번호:604-714)
연 보
<<70년대>> 동인
1945 서울 출생
1968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
1974 시집 <풀잎> 발간
1975 제2회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
1978 시집 <빈자일기> 발간
1984 시집 <붉은 강> 발간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허무집>, 70년대동인회 (1971)
시집 <풀잎> , 민음사 (1974)
시집 <빈자일기> , 민음사 (1978)
시집 <그대 곁에 머무는 말은(공저)> 우석출판사 (1980)
시집 <소리집> , 창작과비평사 (1982)
시집 <붉은 강> , 풀빛 (1984)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 , 문학사상사(1987)
시집 <바람노래> , 문학사상사(1987)
시집 <순례자의 꿈> , 나남 (1988)
시집 <슬픈 노래> 자유문학사 (1988)
1945년 함경남도 홍원 출생하여 경기여고, 연세대 영문과,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 학위를 취득하였다. 동아대 국문과 교수, 버클리대 방문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동아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68년 월간 <사상계>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외 2편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PSB 문화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허무집><빈자일기><소리집><우리가 물이 되어><바람노래><오늘도 너를 기다린다><어느 별에서의 하루><등불 하나가 걸어오네>등이 있고, 산문집 <그물 사이로><추억제><누가 풀잎으로 다시 눈뜨랴><달팽이가 달릴 때>등과 동화집 <숲의 시인 하늘이><저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삐꼬의 모험>, 그리고 시화집 <어느 미루나무의 새벽노래><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등이 있다.
그 외 시선집으로 <풀잎><슬픈 노래><사랑비늘>등과 연구서 <한국근대문학비평사>등이 있다.
[출처]빨래 너는 여자 / 강은교 |작성자마경덕
바리움에 대해서 질문 드립니다.
벤조디아제핀계(정의;주로 진정,수면작용,항불안,근육이완,항경련작용을 한다.)에 속하지만.
바리움정(복지부분류:정신신경용제)은 성분이 디아제팜인데여..
디아제팜이라하면 수면작용에 효능을 갖고 있는게 아니라 항불안제,골격근경련 완화제,마취전 투여,소발작 간질 치료보조제로 쓰입니다.
디아제팜이라고 많이도 불리우며, 바리움이라도 불리는 이약은 향정으로 분류 되어 나라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 의약품입니다.
확실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독성이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향정도 용량별로 있구요, 의사선생님이 처방을 내리면서 설마...중독이 될정도로 먹이시겠습니까??
그런 걱정마세요.
(그리고 정신과 병동에서 하루이 이약을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복용하여 6개월이상 먹어도
나가면... 금단 하나 없이 잘만 약 안드시던데요...너무 안드셔서 도로 들어들 오시지만 ..^^:;;)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오후의 만남
‘은교’는 이쁘다. 오래 전에 나는 은교恩喬라는 이름을 만나면서 가슴이 설레었던 기억이 있다. 상상의 이름 ‘銀交’란 ‘은의 교직交織’ 같은 것으로, 언어의 울림과 느낌이 진정 아름답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지었을까. 어릴 때 공초의 ‘허무혼의 죽음’이란 어구에 반해 안절부절 못했던 것처럼, 그토록 큰 아름다운 이름이 이미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대한 정의는 자신이 그린 마더 테레사에게서 읽는다. 한없이 따스한 빛을 띤 테레사 수녀를 보면서 은교 시인은 ‘아름다움엔 점수가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녀를 만나보고 은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기가 참 편함을 느낀다. 은교는 시인이다. 그외의 어떤 수식어든 그녀에겐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어쩐지 ‘교수’ ‘선생님’ ‘독신녀’ ‘아줌마’ 등이 다 시큰둥하다. 내겐 누님뻘이어도.
지 금 나는 어느새 항구 도시 부산에서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득한 도시, 거대 부산. 아득함, 아슬함…. 아아, 내가 그 곳을 다녀왔던가. 언제, 내가 그녀를 만났던가. 송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1202호의 낯선 오후, 그녀의 서재. 얘기를 나누고 새마을호 마지막 밤열차를 집어타면서 난 부산을 빠져나왔지, 황급히. 온통 그녀의 동그만 얼굴과 우수의 빛이 드리운 눈망울을 뒤로 하면서. 나는 이틀간의 진한 연애를 마치고 돌아온 뒤 아주 진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어떤 후유중을. 동행한 W시인과 부산 시인들의 흥청거림과 뜨거운 노래 뒤로. …아직도 여전히 현란해라. 은교의 ‘햇빛이’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속에서 나는 어떤 ‘빨래’를 널려고 하는가. 순간, 이상의 <날개>가 생각나고 아내가 아프다는 그에게 준 ‘하얀 정제약’ ‘최면약 아달린’을 발견(그때까지 ‘나’는 그 약이 해열제로만 안다. 그걸 한달동안 아스피린으로 알고 먹히운 것이다)하는 서사적 화자 이상李箱. 그는 소설에서 내뱉는다.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라고. 그리고 나서 감동적인 비극성 구절을 남긴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나는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날개야 다시 돋아라./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것 역시 이카로스의 날개가 아닌가. 은교는 이카로스가 밀초로 붙인 날개짓으로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높은 곳(태양을 향해 날아가다?)으로 오르다가 녹아 추락한 신화에 대해, 이카로스를 시인에 비유하는 훌륭한 시각을 지닌다. 그녀에 의하면 규범 이상으로 상승하려는 자가 바로 시인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예술은 언제나 규범을 벗어나며, 바로 ‘일탈逸脫’을 의미한다는 것. 들뢰즈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묶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인용하면서.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 <빨래 너는 여자> 전문
시 집 《어느 별에서의 하루》1) 첫장을 펼치면서 나는 강한 충격을 받는다.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진다니. 시선이 거기에 꽂혀 옴짝 못한다. ‘바리움barium’이란 중금속으로, 일종은 X선 진단시 조영제造影劑(X선이 투과되지 못할 정도)로 쓰이며 맹독성이다. 의약품으로는 뇌 정맥·동맥을 원활히 교합시키는 지독한 신경안정제라는 것. 그런 탓일까, 내가 ‘바리움’격인 이상의 ‘아달린’을 생각한 것은. 나는 그녀에게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한없는 가벼움’을 느낀다. 내 딸아이 보름이가 초등학교 졸업 전 날에 자른 단발 모습에 스스로 ‘랄랄라’ 하며 웃던 그 귀엽고 상긋함에 버금가는.
한편 이영진은 시집 해설에서 이 작품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명쾌히 언급한다. 그녀가 지금 ‘화해’ 몸짓을 하는 중이라고. 또한 ‘눈부신 구원’과 ‘생동감’에 이른다는 말에도 한껏 공감한다. 하지만 나는 ‘바리움처럼 깨끗하게 표백된 햇살이 쏟아’(해설 112쪽)진다는 표현에는 선뜻 수긍(동조)하기 어렵다. 그 금속이 부드러운 은백색임은 분명하지만, 이 시구는 비극적 환희나 가벼움·산뜻한 슬픔 등을 동반하고 있다는 게 내 중심생각이다. 또 바리움이란 중금속이 이 작품에서 만큼은 간단치 않은 존재로 등장한다고 보고 있다. 그녀는 나와의 대화에서 ‘투약’의 고통을 토로한 바 있다. 너무 심한 고통스러움에서 진정 벗어나고 싶었고 또 지금도 벗어나고 싶다고. 이 약은 현재까지 그녀에게, 하늘이 내린 원초적 형벌(=天刑)을 다스리는 섬뜩한 독극물이자 효험있는 유일한 생명선(!)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경우, 긴장을 풀 수가 없어서 마냥 두렵다. ‘왜 그녀가 하필 바리움을 예로 들었을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설자도 ‘강은교의 비극적인 세계인식의 태도가 크게 바뀐 것은 아니’(113쪽)라고 했지만. 시가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다의성의 것임을 인정한다 해도 작품 속 바리움이 풍기는 농도가 너무 짙다는 혐의를 간과하긴 어렵다. 시적 화자의 죽음과 삶을 넘나들고 그것을 조절하는 핵심 모티프, 바리움. 그렇다면 독자가 보는 시의 얼개는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의 상상력. 시적 화자는 한쪽에서 ‘빨래 너는 이웃집 여자’를 바라본다. 나는 여기서 산문시 1연과 2연에서 확연히 구분 지은 열 개의 쉼표와 여섯 개의 마침표에 주목한다. 1연에서 쓰인 10개의 쉼표는 파노라마처럼 쉬임없이 펼쳐진다. 어떤 무거움이 가벼움으로 빠르게, 그러나 어떤 표집점으로 서서히 전이된다. 빨래라는 보편적 이미지로 미루어 볼 때, 시적 화자는 자신을 매우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러므로 자신을 진종일 괴롭게 만드는 뇌를 ─ 빨래처럼─ 깨끗이 세척하고픈 것이다…. 위와 같은 추리·분석은 ‘(세탁한)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이라는 시구에서도 입증된다. 살은 빨래다. 빨래는 살이다. 집적거린다는 의미의 ‘어물거리는’ 바람·구름들은 우리네 삶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인자因子들이리라. 2연은 각 문장 끝마다 마침점이 찍혀 있다. 이로 볼 때, 쉼표는 현재진행형이지만 마침표는 현재완료나 과거시제다. 2연에서 ‘넌다’ ‘건다’ ‘들려온다’ ‘뛰어간다’는 진행형을 썼어도 그 끝엔 반드시 종지부를 찍었다. 이는 무슨 뜻이 담긴 걸까. 흥미로운 것은 ‘아기 원피스’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하던 ‘그 여자’가 아기 원피스를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거는 포즈를 취한다. 1연의 빈 허공이 주는 불투명·불확정성이, 2연에 와서는 경쾌할 정도의 자신감으로 나타나 꽉찬 허공을 보인다. 허공도 때로는 일정한 공간이 된다는 것이 한편 그녀의 시적 논리다. 그것은 곧 삶의 자신감이자 대단한 의욕으로 나타난다. 이윽고 아기의 명징한 울음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지금까지 연출하던 ‘무용’을 끝내고 화급히 달려간다. 작품 속 ‘아기’란 생생한 삶의 증표. 거추장스럽게 걸쳤던 ‘구름’ 같은 나부렁이들을 물리치며 달려가는 여자. ‘그 여자’는 곧 자연스럽게 시적 화자로 연결된다. 여기서 빨래와 바리움의 관계도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바리움으로 세탁한 빨래? 시적 화자를 빨래로 환치, 분석해보면 흥미롭지 않을까. 실제로 그녀는, 뇌신경이 혼돈의 심각한 상태로부터 탈출하고 싶다. 그만큼 그녀의 카타르시스를 향한 정염은 무섭다. 그녀는 늘 자신을 위협하는 숱한 카오스적 요인과 싸운다. 목숨이, 그만큼 경각의 위치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다. 그녀는 외롭지만 그래도 혼자 산다. 시인이자 정치 지망생인 ‘남자’와는 연전에 헤어졌고 딸이 서울 H대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근황과 심경이 더욱 알고 싶어졌다. 조바심쳐진 것이다. 그녀에게 삶의 빛이 있을까. 있다면 얼만큼?
시인 본인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부산 송도에서 감천길로 가는 길이 막혀 찻속에 있다가 빨래 너는 여자를 보았다고. 바리움이란 신경안정제를 시에 삽입하는 게 마음에 걸려 매우 망설였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바리움’을 넣은 것은 바로 지난 날의 절박한 젊음이 진하게 묻어있었던 까닭이라고. 그 상처투성이 젊음을 반추하는 시는 시집마다 언뜻언뜻 보인다.
은교를 만나기 직전, 영화 《샤인shine》을 보았다. 부산행 바로 직전, <호암아트홀>에서였다. 가족과 함께 벼르고 벼르던 <몽유도원도>를 보러 갔다가 좋은 영화 냄새를 맡고는 내친 김에 빨려들어간 것이다. 나는 2층 특별실에 안치된 그림에서 안견의 붓의 흐름을 보았다. 세필細筆의 흐름을 보았다. 세밀한 붓에 놀아나는 운지運指의 미려한 떨림을 보았다. 어느새 그들의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선생 안견의 눈에 서린 몽롱을 보았다. 나는 저 절멸絶滅의 끝을 몽유하는 착각에 빠진다. 그림에도 둔재인 나는, 흐리멍덩한 빛살 사이로 영롱한, 그래서 아름다운, 부유하는 삶의 유전에 대한 환시에 빠진 듯, 그러므로 다시는 이런 그림을 바로 볼 수 없다는 집요執拗에서 그림의 중앙에 떡 버티고 선 채 손으로 유릿장만 빠득이며 만져댔다. 훔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유리에 손을 대어 녹인 뒤 예리한 칼로 그림을 오려내고 싶었다. 흐물흐물, 유리의 부드러움을 밀고 들어가 청동의 빛나는 엄숙한 손으로 그림만 건져올리고 싶었다. 도대체 저게 어디에 가 있단 말인가. 넌 왜 거기 있지, 감시의 눈이 잠깐 섬나라 애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서 문득 나는 화가 최욱경(1940~1985)을 만난다. 이미 죽은 그녀다. 아니, 죽은 자는 그/그녀라는 인칭대명사를 밝힐 필욘 없다. 모독이다. (죽은 자에게 성별이 무어 필요하랴.) 웃음이 예쁜 제자 하연이가 ‘열린책들’에 가서 단 한 권 남은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2)을 얻어왔다. ‘5피트 2인치의 작은 키, 43킬로의 체중으로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5백호짜리 대작을 그리고 있는 최욱경을 보면’화산 같은 여자‘라는 느낌이 든다….’3) 권투 선수처럼 눌린 욱경의 코가 인상적이다. 못도 생겼다. 그런데 빛난다, 눈이. 그의 구호가 ‘일어나라! 좀더 너를 불태워라!’였던가. <샤인>, <욱경>, <샤인>, <욱경…>. 그리고 <몽유도夢遊圖>. 그리고 강은교. 불태워, 불태워라, 불태워라. 이렇게 나는 조용히 읊조린다.
<샤인>은, 현재 세계 순회 공연 중인 호주 출신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빗 헬프갓David Helfgott(1947년생)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콧끝이 찡, 눈물샘을 마냥 자아낸 상영 시간이 지금도 아쉽다. 한 가지, 비발디의 <영광>·사랑의 테마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 카페에서 손님들을 압도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 등도 영화 장면에 섞여 단연 압권이다. 내가 가장 기억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1등만을 강조한 아버지가 한동안 버렸던 아들의 기숙사를 찾아오는 장면. 아버지의 지나친 엄격성 때문에 아들이 천재의 연주 솜씨를 닦지만, 그만큼 아들은 상대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버릴 수 없다. 그는 몹시 당황한다. 냉장고를 여닫으며 부들부들 떤다. 같은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 마치 시인 천상병의 쉬임없는 중얼거림. 천재는 다 그런가. 헬프갓, 천상병, 헬프갓…. 불탄 노잣돈을 가지고 천상天上으로 간, 천상 시인인 천상병 아저씨와 이름도 ‘help─god’처럼 여겨지는 데이빗 헬프갓은 무언가 어울리는 듯. 한 장면―. 아버지는 아들의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본다. 이때 아버지의 안경은 길게 금이 갔고 그걸 스카치 테잎으로 붙인 너머로, 말 못할 연민과 아쉬움과 아픈 눈빛이 클로우즈업 된다. 바로 저거다! 나는 안경알 중심부를 지나간 투명 테이프에 의미를 부여한다. 안경을 미래지향형/이상理想으로 푼다. 애비의 미래, 아들은 정신병자가 되었다. 그 어려운 라흐마니노프 곡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완벽히 소화한 아들이 아니었던가. 말없이 바라보는 애비의 눈길. 그리고 테이프에 묶인 두 눈, 깨어진 두 눈. 연민 어린 응시. …‘테이프를 붙임’이란 여기서 ‘그래도, 그래도 잃고 싶지 않은 아들에 대한 신망’의 또다른 암시 아닐까. 헬프갓 아버지의 눈빛. 깨진 안경으로 암시되는 저 기대 심리가 결국은 아들이 가진 병의 굴레를 벗기는 것이다. 마치 어떤 경우도 아무 말씀도 아니하고 묵묵히 바라보는 나의 아버지처럼. 그렇다, 아버지는 신기할 만큼 그랬다. 단 ‘한마디’도 내게 간섭한 적이 없다. 욕설을 한 적도, 때린 적도. 어떤 문제든 늘 침묵했고 무언으로 아들에게 맡긴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헬프갓 역의 제프리 러시에게서 ‘광기狂氣’를, 아버지 역의 아민 뮬러 스탈에게서 또한 무섭게 타오르는 열정을 발견한다. 그 눈빛을 강은교에게서 문득 감지한다. 은교는 오직 눈만 살아있다. 그러한 그녀가 젊은 시절, 쓰러진다.
(스물 일곱 해를 맞은) 1972년 2월 21일 아침, 나는 이상한 초조와 불안으로 집안을 서성대고 있었다. 빨래통에는 지난 일요일 했어야 할 빨래들이 지저분한 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씻어 주기를 기다리는 아침 식기들, 옷가지들이 흩어져 있는 방, 아파트 전체를 흔드는 소음, 건너집의 세수하는 소리, 문 닫는 소리, 또 아침 햇빛에 더욱 들끓어보이는 먼지들……. 게다가 임신 6개월이 넘은 내 몸은 꼭 오뚜기 인형 같았다. (…중략…) 어느 일부터 해치울 것인가를 망설이다가 우선 빨래부터 하기로 했다. 빨래는 가끔 신경안정제의 구실을 한다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사실이다. 수도꼭지를 틀고 가득 차 있는 물 속에서 옷들을 뒤흔드는 쾌감, 나는 10시에 출근하려는 작정으로 일을 서둘렀다. 그런데 마지막 빨래를 헹구고 나서 세수를 하려고 급히 세면대의 물을 트는 순간, 나의 머릿속에서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사고였다. 뇌동맥이 끊어진 것이다. (…중략…) 의사는 확정된 나의 병명을 부드럽게 말해 주지 않았던가? .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선천성 뇌동맥 정맥 기형畸形>.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살아온 것이 기적이다. 언젠가는 터질 핏줄이었으니까.(…중략…) 나의 아기들, 그 아기 중의 하나가 나와 살기 시작한 지 일곱 달이 되는 지난 1972년 12월에 떠나갔다.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그이와 나는 우리의 남은 가난한 재산을 다 바쳤지만 구할 수 없었다. 그 아이의 불확실한 목숨은 이미 우리의 권한 밖에 있었다. 지난 1972년 11월부터 떠나기까지 두 번에 걸친 그 아이의 입원은 나에게 또 한번 투병의 아픔을 안겨 주었다./세상에 나서 인큐베이터 속에서 3달을, 나머지 짧은 시간을 우리와 함께 산 그 아이의 목숨, 산소호흡기로 호흡했고, 사물의 이름 하나도 발음해보지 못한 채 갔다.4)
A. V. Malformation. 선천성 뇌동맥 정맥 기형. 응급수술을 했으나 머릿속 터진 핏줄 하나는 도저히 봉합할 수 없어 다시 닫았다. 한 개는 현재도 약으로 다스리고 있지만 언제 또 터질지 모른다. ‘뚝’ 소리, 그 소리가 절대 울려나오지 말아야 한다! 그녀는 우리들에게 말한다. 어떤 일이든 수술하지 마세요, 목소리 울림이 저 깊은 데서 묻어나왔다. 그럴 것이다, 그녀는 매사 엄정하고 냉정히 일을 다스릴 수밖에 없다. 그녀가 20대에 삶의 큰 파고波高를 넘어 부산에서 대학 선생으로 있기까지, 그녀를 버티게 한 건 문학과 혈육인 외딸이리라. 그러나 어쩐지 그녀의 눈에서 불안감이 보인다, 전율이 언뜻. 그가 말했다. (은교에게서는 가끔 남성성이 보인다. 극단의 언어를 사용할 때 더욱 그렇다. 잠시 그는 숙연해진다.) ‘전율戰慄’에 대해서 음미할 글이 있다. 그녀는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하는 글에서 ‘예술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힘’을 <전율>이라고 표현한다. 전율을 느꼈다는 것은 ‘정신의 피(血)적 스파크를 일으킨 것’이라고.5) 끈적끈적. 시의 시작은 중학 시절 박두진의 <해>라는 ‘시의 리듬과 리듬이 주는 시의 긴장’6)을 통해서 비롯했고, 일종의 경련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전율:긴장↔경련, 그들끼리의 요란한 충돌, 마지막 단계인 소외 의식. 이 선상에서 시인은 말한다. ‘모든 예술은 소외의 힘에서 창조된다’고. 내게는 진실로 외롭고 고독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이처럼 극한의 단계에서 누적된 혈액이 불특정하게 튀었으니 뇌동맥·정맥이란 실핏줄이 운명적(선천성)으로 터질 수밖에. 고감도 전율의 여성 강은교. 대화 중에 그녀의 눈을 살핀다. 혹시 소혹성에서 괴비행체 U.F.O를 타고온 건 아닌가. 시간을 거슬러와 혹성 지구에서 놀다간 파충류 영화 속 우주인? 혹은 국산 드라마 의 여주인공처럼 눈빛이 허옇게 타드는 건 아닌가, 하고. 신과 교감하려는 여자, 신과 교감하는 귀기鬼氣의 여자…. 어쩜 그녀는 밤마다 지구 밖 누군가와 홀로 모르스 부호를 주고받는 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은총·교감·감사 등이 요즘의 그녀가 갖는 일상적 삶의 큰 부분인 건 틀림없다.
은교의 시정신은 확고하다. 오로지 ‘문학과 사회’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현대시는 사시私詩의 범주를 벗어날 때만이 동시대에 사는 타인의 정서의 줄을 건드릴 수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는다. 그것은 아마 타인에게 나의 정서를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정서의 극선(極線)을 슬쩍 갖다대야 한다는 믿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나의 정서가 타인의 정서를 강요하지 않고 타인의 정서 속에서 주관화되는 일을 가능하게 할 것’7)이라고 전한다. 문학이란 동시대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초기시나 산문을 통해 비쳐진 시인의 모습은 민중적 이미지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시집 《벽 속의 편지》나 근작시집 《어느 별에서의 하루》 등 3권이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음을 의아해 하는 점도 분명 이상한 일이긴 하다. 그게 참 억울하고 이상해요! 그리곤 살픗 웃는 은교. ‘부마민중항쟁’ ‘이한열 사건’ ‘박종철 치사 사건’ 때도 민중의 승리를 위한 축시/조시를 썼던 그다. 그렇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그가 민중시인이라곤 보지 않는다. 얼핏 짚는다면, 민중적 시인? 왠지 그녀는 요즘 시인으로서의 민중의식에 한계를 느낀다. 열흘간의 인도 여행에서 ‘답 아닌 답’을 얻었다. 그래서 이전에 최인호가 ‘길 없는 길’을 쓴 건 아닐까. 《벽속의 편지》까지는 사회성이 짙은 시를 썼다. 시집 《빈자일기》를 펼쳐 보자. 이 시에서 은교의 ‘빈자’를 바라보는 눈을 상상해보자
그곳 천정은 불붙은 태양이었고 바닥은 썩은 이빨의 늪이었다. 싸우는 이마 갈피로 등뼈 갈피 갈피로 언제나 종이 울렸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황혼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임종을 알리는 종이.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그보다 먼저 흘러갔다. 늦은 손목 눈짓 사이에서, 번쩍이는 번쩍이는 허리띠 황금 돛대들 사이에서 흘러가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 굳은 피 한 점 던질 때까지, 누군가 쓸데없는 제 죽음 하나 내버릴 때까지, 우리가 헌 그 죽음 입고 검은 종소리 한 겹 듣지 않을 때까지.
─ <貧者日記─구걸하는 한 여자를 위한 노래> 부분
은 교는 말을 잇는다. 카프카처럼 한 시대를 꿰뚫는 눈을 가진 내면적인 작가가 되고 싶다. 카프카는 이 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작가가 아니던가. 그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했지만 한편으로 대단한 리얼리즘을 추구하지 않았던가, 열변하는 은교 시인의 눈이 나의 한쪽을 직시한다. 곧 부끄러워진 나는 옷깃을 여민다. 질 들뢰즈는 당대의 카프카를 ‘매우 정치적인 작가’로 취급했다 한다. (실상 카프카는 당대를 가장 치열하게 부딪치며 산 작가가 아닐까.) 실제로 그녀는 초기에 삶과 죽음의 문제로 고독과 허무의 줄기를 온몸에 칭칭 감으며 살았다. 1970년대는 관념적인 허무를 사랑하기도. 뭇시인들은 그래서 은교를 허무와 민중 사이에서 고독을 은밀히 즐겨온 시인으로 읽곤 한다. 어느 모로는 양면성을 띠었다고도 할 수 있다. 위험할 정도로 은교는 심신의 안팎에서 거칠게 포효했다. 그의 구원한 주제는 ‘사회’였으므로. 나아가 그녀의 허무혼은 스스로 무서울 정도다. <허총가 1>을 보면 ‘한밤중에 붉은/햇덩이 뜬다/하늘로 가자./하늘로 가자.//풀 눕고 모래 눕고/새들도 누운 다음,/돌아온 강물 끝에. 뻘바람에./지붕울 거두어./지붕을 거두어’로 시작되어 ‘그림자 되어 너./한 꿈 그림자 되어 우리 함께/오늘도 수만 잠/헛되고 헛되었으니’로 끝난다. 그런 ‘허무’라는 이름의 바람이 오늘날까지 불고 있다. 산문집 《허무수첩》은 지난 해 정월에 출간됐다…. 그렇게 무엇인가로 가닿기 위해 그녀는 연속 허무라는 노를 젓는다. 나는 그녀 뒤에서 청승맞게 노래를 부른다. ‘여자의 운명은 사랑이기에…눈물의 밤배는 내 님을 싣고 다시는 못 올 길을 저어만 가요. 울리는 마음도 아프겠지만 울고 있는 이 가슴도 쓰리답니다….’ 정말 청승맞게. 흡.
1990년대에 와서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나선형적인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변증법적 리얼리즘? 글쎄, 아리송하지만 모든 면이 그녀에게서 절실했던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허무라는 딴딴한 물질이 역사 전체를 받든 것을 전제로 육화肉化하는 역사를 추구, 공동적 이상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흔적을 보인다. 허나 누가 뭐래도 은교의 삶에 있어 중심 화두는 《빈자일기》의 맨 첫장에 숨어 있다.
모든 존재는 홀로 사라질 수 없다.
함께 연락함으로써 비로소 존재는 이루어지고,
드디어 깊이 사라진다.
이 처럼 그녀의 <존재론>은 여늬 사람과 같지 않다. 그렇다면 그녀가 ‘함께 연락’할 수 있는 곳/것은 어데인가. ‘비로소 존재’가 이루어질 것/곳은? 놀랍다. 20년 전 시집의 중심 생각이 아직 그녀를 지배하고 있다니. 그때는 온통 죽음의 벽을 넘나드는 지친 삶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모든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은 절대로 홀로 사라질 수 없다. 그녀의 시편에 등장하는 마침표에 힘이 들었고, 때때로 엄숙하기까지 한 이유를 나는 발견한다. 그래, 은교 시詩의 마침표마다 너무 명료한 찍힘이, 안착의 효效가 심안에 비친다. 은교, 무섭다. 나는 김성한의 <바비도>를 끌어올린다. 화형불에 바비도라는, 종교의 반역도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진실을 태워버린다는 괴로운 양심에 떠는 헨리 왕자를 끌어당긴다. 은교, 네가 무섭다. 쉬임없이 되뇌이는 그대 붉은 입술이. (은교 詩의) 죽음의 피리어드가 굼틀대며 삶의 콤마로 옮겨가는 모습이 보인다. 사라지지 말라, 은교.
눈 떠야 하리
시든 꽃 대궁에 누운 별빛을 지나서
몸살하듯 내리는 한밤 무서리를 지나서
서슬 푸른 바람끝
새벽과 새벽이 맞닿은 곳
거기 맨 몸으로
일어서야 하리
녹두꽃은 녹두꽃 마른 허리를 비벼라
담장이는 흰 눈에 풀풀
감긴 머리칼을 풀어라
등에 진 땅이 무거워
엎드려 흐느끼는 돌멩이여
씻어라 진흙구덩이 너의 눈물로
별보다 눈부시게 너의 속살로
― <소리 9> 부분
나 의 어머니도 병명이 비슷했다. 그리고 발병한 지 10년째, 많이 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은교에게서 어머니 흔적을 찾는다. 엄니는 아팠다. 중2 때부터 자취방을 가졌던 나는, 가끔 엄니가 찾아와 내 방에 흩어진 원고지며 구겨진 글들을 말끔히 다림질해 놓으셨다. 술에 젖었던 나의 청년기는 더 심했다. 다녀갈 때마다 아들을 만나지 못할 때도 ‘나의 서랍은 반듯한 원고지가 채곡채곡 쌓여 있었다//등단기념 축하연에 참석하려던 그날 저녁 6시, <뇌졸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엄니는 쓰러지셨다… 그제서야 나는 알았다 오실 때마다 엄니가 풋풋한 백제어로써 못난 아들의 여린 詩의 주름을 펴주신 것임을//엄니의 휘인 뼈마디 꺼끌한 주름 겹겹을 내가 다림질할 수 없을까’.8) 나는 울었다. 그런데 엄니를 들쳐엎고 병원을 두 곳이나 갔는데도,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며 황급히 쫓아낸 의사들의 비정에 난 지금도 가슴이 쓰리다. 뇌경색·출혈 과다로 곧 죽을지도 모를 몸뚱이를 치우기 싫다는 의도였다. 최욱경은 작지만 강은교는 작지 않다. 욱경의 눈은 매섭지만 은교의 눈빛은 강한 듯 깊은 빛을 담았다. 허무라는, 고독이라는 이름의 빛. 샤인…. 예쁜 웃음과 함께 눈빛만 거듭 생생하다. 허나 그늘이 드리웠다. 우수憂愁라는 그물망이 마음의 심해深海에, 눈의 저 안에. 은교를 만나면 아슬아슬해진다. 아파트 내부가 전부 책으로 너저분하다. 화장실 가는 척하다가 안방·건넌방·부엌 등을 훔쳐딛어봐도 마찬가지. 책이 그저 여기저기 쌓여 있으므로 발 딛기가 겁난다. 나랑은 체질이 안 맞다. 내 별명은 ‘정리 맨man’인데. 내가 언제 말끔히 책을 정리해줬으면. 입구서부터 조금 황당해진다. 혼자 사는 여자니까 그렇지, 집을 가리키기 위해 동행한 부산 시인 송유미가 말한다. 또 덧붙인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향내에 ‘샤넬 넘버 화이브’예요, 라고. 그렇다면…. 마리린 먼로가 잠자리에서 걸치고 잤다(?)는 그 향수香水다. 1번에서 5번, 20번에서 24번까지 모두 10개의 샤넬들. 그중에서 세계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향수가 곧 1922년에 개발된 5번이란다. 기록에 의하면, 1370년 당시 80세인 헝가리 왕비 엘리자베드가 최초의 향수인 ‘헝가리 워터’를 사용했다고. 꽃잎에 알콜을 부어 증류시킨 것으로 폴란드 왕이 구혼했다고 전하니, 향수란 매혹(또는 성적 매력)을 뿌리는 신비한 요소를 그윽히 지녔나보다. 나는 이 향내를 맡고서 은교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우리가 방문한 이 시간만 살아있기로 꾸몄을지도 모르겠다. 시인 강은교는 싱싱한 대학생들에게서 삶의 기쁨을 훔친다. 그래서 강의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강의 시간에 수다 떠는가. 살아 있기 위해, 그걸 증명해 보이기 위해?
책 들 위에 싱싱한 프리지아가 있고 향기도 서렸다. 부산 촬영작가 정애자는 수줍은 듯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불상을 비롯, 불교적인 대상들을 작품으로 다룬다는 그녀. 나의 쓰잘데 없는 참견(?) 중에도 은교 시인을 마냥 촬영한다. 시인 W는 한쪽에서 유미 시인과 속삭이듯 말하다 듣곤 한다. 우리들의 대화 중에 떠들 수는 없으므로. 나는 그녀가 내놓은 진향眞香의 홍차를 든다. 지금은 오후.
강태: (입에 대고 나서/맡은 뒤/마신 뒤) 차암, 좋네요. (나는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 본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 본다. 사진을 위한 피사체의 모습으로 바닥에 앉았다. 약간 진한 화장, 얼굴 피부를 살짝 덮었다.)
은 교: 열흘 정도 인도 등지를 다녀왔는데, 오는 길에 스리랑카에서 산 거예요. 다만 그들 나라도 이젠 문명에 많이 길들여졌더군요. (쓸쓸히 웃는다. 다시 조용히 차를 들이킨다. 역시 웃음은 여성미를 다시 ‘느끼게’ 한다. 편안하고 좋다.) 그녀는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 나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다. 피곤해 부산역 너머로 가기조차 싫어한다. 교통난은 이곳도 서울 만큼이나 엄청나다. 가끔 대학원생의 안내로 등산을 한다. 지난 해 정월 초하루는 토함산으로 해돋이를 보러갔었다. 새벽 4시 출발, 경주 톨게이트 앞에서 떠오르는 맑은 해를 보았다, 박동이 컸다, 경이로움이었다. 올해도 남해 바닷가로 일출을 보러갔지만 날이 흐려서 아쉬웠다. 수술 이후부터 신경안정제인 딜란틴·바리움을 복용했다. 후유증 탓이다. 그러다가 또 대경련에 빠져 얼마 전에 테그레톨이란 약으로 바꿨다. 이 극약(?)들은 너무도 독해 그녀로 하여금 몇번이고 자살을 시도하게 만든다. 언젠가 나는 <자살론>을 그럴 듯하게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한때 자살을 미화하여 유미적인 생각에 빠져 스스로 겁을 낸 적도 있다. 지은이 어윈 스텡겔Erwin Stengel은 우선 자살에 대한 일반적 금기 사항을 낱낱이 캐올린 오스트리아 산産 영국의 정신과 교수다. 10여년 전 기록이지만 우리 강화도의 경우, 자살률이 인구 10만 명당 44. 6명(여자 27. 8명, 남자 61.7명)으로 세계보건기구에 의해서 가장 높은 자살률(43.0명)을 보인 인도 마두라이 지방보다 더 높은 놀라운 사실이 입증되었다. 지은이에 의하면 자살이란 ‘행위’와 ‘자기 손으로 죽는 사람’도 포함한다. 그러다 보니 ‘코호트 연구’(조사자가 일정 집단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개인의 탈락, 나머지는 어떻게 사는지를 연구하는 방법)도 동원되었다. ‘자살의 역사적 배경’에 착안한 알프레드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를 보면 17세기초만 해도 자살자는 흉악한 범죄로 간주해서, 자살 미수자의 목숨은 고통을 주며 끊어주었고 그 시신을 훼손하기까지 했다. 영국은 재산 몰수를 했는데 무려 1870년까지 실시됐고 미수자는 1961년까지 투옥 당하기도 한다. 성서조차도 자살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구약의 삼손·사울·아비멜렉·아히도벨 등의 자살 기록은 있으나 그들을 비난하거나 금기시한 부분은 없어보인다. 신약의 유다의 경우도 명쾌한 해석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를 배반한 것보다 자살함으로써 ‘저주 운운’ 한 것은 훨씬 나중이다. 자살을 처음으로 허용한 나라는 그리이스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를 보면 운명의 장난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지만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녀는 최초로 목을 매어 죽는다.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최초의 자살자다. 호머를 비롯하여 그리이스 신화의 죽음이 대개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살을 국가의 범죄라고 단언하고 <파이든>에서 소크라테스를 지키는 병사의 비유에는 ‘노여움’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극약을 접한 태도를 이중성으로 취급, 복잡한 논법으로 다스린다. 즉 겉으로는 자살을 부인하지만 죽음이란 한없이 바람직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9) (헨리 몰세리는 그의 책 <자살론>을 통해 말한다. 개인적인 문제로 둘 게 아니라 민족적·사회현상의 시각으로 바라보자고. 요즘의 자살론은 어떤가. 대체로 도덕적인 문제라기 보다 정신과 의사의 몫으로 취급하는 성향이 짙다. 그런데, 은교 그녀의 뼈와 뇌수를 찌르는 고독감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슬아슬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흐느낀다, 안개가 주는 적막감 속에서.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 <진눈깨비> 부분
또 <붉은 강 1>은 ‘그대는 깊디깊은 강/슬픔들이 저녁되어/그 누더기옷을 벗으니//그대의 온몸을 빨갛게 물듭니다./끝에서 다 쓰러진 꿈 하나/비틀거립니다/몰래 춤춥니다’라고 그렸다. 그래도 그녀는 산문을 통해 생의 의욕을 강하게 내비친다. ‘길은 좁고 더럽다/먼지들이 떠돈다.’ ‘무척 자유롭게 보인다.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자유의 섬들, 펄럭인다. 허공을 펄럭인다.’10)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낚싯대를 찾는다. 진정한 자유를 낚고자 한다. 은교는 때때로 매끄러운 물고기 몸에서 자신의 벗겨지는 몸의 허물을 목격한다. 그리고 외친다. ‘삶은 얼마나 가혹한가/햇빛은 얼마나 뜻없는가’(<어떤 흐린 날>)라고 독백하면서, 자신을 힘겹게 하는 억압으로부터 대탈주를 꿈꾸는 것이다. <연애>는 밖으러 나가 돌아오지 않는 ‘그대’를 하나, 둘, 셋, 계속 등불 밝히면서 애타게 기다리는 화자 모습을 그렸는데, 매우 솔바람 소리 같은 작품으로 <어떤 흐린 날>의 반대급부에 위치하고 있다.
아기 때부터 그녀는 지나치게 똑똑했다. 그게 흠이었다. 1945년 12월 13일,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나 100일 만에 어머니 등에 엎혀 서울로 월남할 때, 러시아 병사의 총이 겨눠진 틈을 비집고 빠지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가만히 말한다. 울지 말아라. 아기 은교는 무서웠지만 울음을 꾹 참는다. 그래서 온 가족이 무사할 수 있었다. 경기여고 시절, 그녀는 안타까울 정도로 공부벌레였다. 수영 시험이 있었는데 공부 때문에 별로 연습치 않았지만 독하게 헤엄쳐 점수를 받는다. 요새도 수영장을 간헐적으로 다니는 중. ‘옷을 벗는다는 기쁨’(?) 때문이란다. 이 무한한 자유에의 갈망! 스케이트 시험도 있었지만 잘 타지 못했기에 기어가서 라인을 통과(시험도 통과)한 지독한 여고생이었다. 영문과에 들어가 엘리어트·딜런 토마스·버지니아 울프·김수영 등에게 곧 빠진다. 김수영은 그러나 너무나 빠른 한계를 인식시켜주어, ‘너무나 사랑했기에’ 금방 그의 곁을 떠난다. 그러다가 연세문화상 수상(줁67)·월간 <사상계>로 등단(줁68)·<샘터>에 입사(줁70), 김형영·정희성 시인 등과 <七十年代> 동인을 만들어 활동하는 중에 동인회에서 첫시집 《虛無集》(줁71)을 발간한다. 그들 正男·厚明·恩喬·炯榮 등이 동인지를 꾸미기 위해 ‘목신牧神의 집’에서 만난 일화(나중에 建漢·喜成 시인 참가)는 《소리集》의 김형영 발문에 흥미롭게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겁 없었다. 당시 잘 나가는 《현대시》와 《신춘시》를 예리하게 비판하고 틀에 박힌 시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인다. 그때도 은교 시인은 역시 말이 적었다고 한다. 《虛無集》은 신석정 시인의 지적대로 ‘대담한 터치’ ‘주제를 이끌어나가는 투명하고도 비범한 수법과 아울러 밑바닥에 깔려 반짝이는 지성적인 비관성이 추호도 생경하지 않고 서정으로 차분히 감싸고 있는’ 시집이란 극찬.(김형영의 글을 재인용.)
칼릴 지브란K. Gibran의 《예언자》를 문예출판사에서 출판(줁75)하고, 에밀리 디킨슨E. Dickinson 시선을 번역(줁76), 민음사에서 내다. 그리고 동아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줁83)되면서 긴 여정을 끝내고 부산에서 삶의 닻을 내린다. 그 해에 인도를 처음으로 여행. 오랜 동안 칩거한 탓인지 수상은 적은 편으로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줁75)과 제37회 현대문학상(줁92)을 받았다.
그녀는 쓴 책도 많다. 시집으로 《허무집》(줁71) 《풀잎》(줁74/시선집) 《빈자일기》(줁77) 《소리集》(줁82) 《붉은 강》(줁84/시선집) 《우리가 물이 되어》(줁86/시선집) 《바람노래》(줁87) 《어떤 미류나무의 꿈》(줁88/시화집)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줁89) 《그대는 깊디깊은 강》(줁91/시선집) 《벽 속의 편지》(줁92) 《어느 별에서의 하루》(줁96)를 출간한다. 산문집으로는 《그물 사이로》(줁75) 《추억제》(줁75) 《도시의 아이들》(줁77) 《누가 풀잎으로 다시 눈뜨랴》(줁84) 《어두우니 별 뜨는 하늘이 있네》(줁85) 《순례자의 꿈》(줁88/문학선) 《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 못하면서》(줁93) 《허무수첩》(줁96) 등이 있으며, 동화집엔 《하늘이와 거위》(줁94) 《숲 속의 시인 하늘이》(줁96)도 있다. 그 외 역서와 비평연구집 《한국 근대 문예비평사 연구》(줁89/공저)도 썼다. 다만, 시선집이 많다는 건 그녀의 유명세를 의미하거니와, 다수의 산문집 또한 내 마음이 괜히 애꿎다….
그녀는 이제 토마스 만의 역사소설도 가치를 상실했다고 생각해서, 이상李箱을 다시 읽게 된 기쁨을 누리고 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단어 하나 줍기를 갈망, 집착하기도 하고 ‘현재가 나를 만진다. 나는 현재를 만진다’11)는 해법을 깨닫고 ‘현재’를 진실로 사랑키로 했다. 다음 시는 낯선 현재들 아래 놓여 있는 연민의 대상을 그리고 있다. 차암 따뜻하다.
거기
눈썹이 검은 아들과
가슴이 두꺼운 어머니와
깊은 어깨의 아버지
그리고 목이 긴, 붉은 딸이
있을 것이다
그림자 하나씩
따뜻이
메고 있을 것이다
― <불빛> 전문
그 리고 이름 없는 꽃이거나 틈도 좋아한다. ‘허공의 방’에 안주하기를 원한다. 산문집 《허무수첩》엔 ‘허무, 그 출렁이는 뼈에게 바침’이란 구절이 나를 사로잡는다. 허무를 출렁이는 뼈라니. 뼈가 출렁인다니. 그녀의 허무주의에 대해 평론가 이영섭(경원대)은 말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억압된 외부적인 사회 현실의 상황 속에 젊은 시절 그의 허무주의는 올바른 삶을 지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현실 대응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허무주의는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 과도기적인 대응 의식으로서의 존재 의미가 있을 뿐’12)이라고. 현실을 벗어나 관념적인 미망에 빠질 때 위험천만하지만 강은교 시에 그런 위험은 없다는 전제도 함께. 그럴지도 모른다. 김형영도 《소리집》 해설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은교는 허무를 두려워한다. 그는 허무라는 공간 속에서 홀로 견딜 수 없는 시인이다. 무언가와의 만남, 화해, 그리고 출발해야겠다는 것에 은교의 진실이 있다’고. <불빛>과 같은 온기溫氣를 그녀가 갖고 있음에랴.
강 시인은 기형도·곽재구·김형술 시인들에게 호감이 가나, 젊은 시인들에 대해 불만도 많다. 상상의 세계는 대단하지만 말초적 경향이 짙어 실망스러우며 경험의 축적이 없어보인다는 것.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심사하면서 놀란 것은 인생의 스승이 없어뵈고 진지함이나 문학에 대한 진정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사유思惟의 깊이도 없다고 또한 단언한다. 문학은 일단 음악이나 미술과는 다른 것 아녜요? 언어로 표현하므로 당연히 깊은 사유가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문학은 기술이 아니기 때문. 그녀는 그래서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문예창작과’에 대해 다소 시큰둥하다. (오해가 있지만) 시인들에 대한 불만은, 우리가 80년대라는 엄청난 늪을 뛰어넘었는데도 왜들 그리 ‘사회’를 망각하고 있는지 안타까운 마음. 진정 이 사회를 고민하는 자들이 적은 게 사실일까. 많이 고민하세요, 은교가 내게 속삭인다.
강태:지방·서울의 거리감은 없나. 은교: 왜, 있다. 거대한 부산이기에 점차 지역성이 사라지지만, 이제 부산도 ‘동네문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스스로 소외시킨다고 보면 어떨지.
아 버지는 이승만 정권 시절 정부 각료를 지낼 정도로 한때 집안이 쟁쟁했다. 그전에는 조선일보 기자직에도 있었다. 春山 강인택. 《개벽》지 운영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기억에, 당신의 도교사상이나 정치철학을 연재하기도. 아버지가 바로 자신의 문학 선생이었다고 실토하는 그녀. 은교는 1968년 코스모스 졸업 시 단 두 명이었는데, 30년전의 그 동창을 우연히 만나 차를 나누는 자리에서 흥미로운 이야길 듣는다. 여대생일 때 그 친구와 마주한 술자리에서 ‘난 꼭 시인이 될 거야’라고 외쳤다는데 자신은 전혀 기억이 없다고. 그렇지, 취하면 필름이 끊기니까. 대학 재학 시 교사가 되고 싶어 교직을 들었으나 F학점을 받게 될 처지. 학점을 따고 싶어 담당교수에게 가서 당돌히 ‘신춘문예에 투고할 시를 쓰느라고 공부를 못했어요’라고 했더니 ‘그럼 그만 두라’고 냉정히(당연하지!) 말해서 그 길로 수강을 그만두었다는 姜고집.
결국 무덤에 돋는 풀만이 영원하며 푸를 수 있는 한의 푸른 색이며, 어느 다른 곳의 풀보다 아름답다는 사실도 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영혼과 고통이라는, 두 비료로써 자라나기 때문이다.13)
그 녀는 계속해서 읊는다. 이런 풀들, 영혼의 잡풀들이 주는 의미를 이처럼 캐고 싶어 한다. ‘우리는 혼 없는 시대 그러므로 신(神)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그 신과 혼이 주시게 마련인 ‘추억’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존재라는 것이 실은 추억이 되고 있는 것임을 모르면서 살고 있다고나 할까./그러나 이제 이렇게 현대화한 시대가 우리를 상실시켜 갈수록 우리는 ‘우리를 상실시키지 않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이다./그것은, 실로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하는 그것은 ‘혼들의 추억제’― 그것인지도 모른다.14)
은교를 비롯한 부산 작가를 귀하게 만날 수 있었다. 우선 부산대의 김준오 교수. 그의 《시론》을 접한 나로서는 꼭 한번 만나고픈 평론가였다. 좋은 시인 김형술(<세계사>·<전망>에서 시집을 낸 바 있다)과 우리를 당신의 차에 태워 태종대 부근에서 ‘씽씽회(膾)’를 사주셨다. 그는 부산 문단의 대부격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부산을 사랑한다. 그의 음성과 낯빛에 역력하다.
나는 미문화원(또는 부산우체국)에서 가까운 골목에 위치한 ‘찻집 누리에’(☎051-464-7376)에서 부산 시인들의 기타 반주에 맞춰 생노래도 듣고 부르기도 했다. 특히 내가 오래 전에 작사한 70년대 노래들을 서규정·김형술 시인 등이 기억해주어 놀라웠다. 부산은 항구다. 항구는 역시 부산이다. 거대 도시 한켠에 이런 ‘아름다움’들이 낭만으로 아직 남아 있다니.
그곳은 또한 ‘추’라는 젊은 여류화가의 삶터다. 담배를 멋지게 피우는 여자 추 씨는 얼마 전에 집을 불에 태웠다는데 그중 몇 개의 화집을 시집 등과 함께 진열했다. 그 여자와 사진도 찍었다, 얼떨결에. 남자 동생이 시중 든다. <부산매일신문>의 문화부 기자 성경애를 만난 곳도 거기다. 건강하고 귀여웠다. 출판사 <빛남>을 방문했더니 나보다 10년 연상인 李祥介·林明秀 시인이 자기 시집을 선물한다. 뜻밖에도 최영철 시인을 만났다. 그는 <열음사>에 있었지, 아마. 오랜 기억. 시집 《야성은 빛나다》를 선물 받았다. 젊은 시인들의 정기 월례 모임 자리에서였다. 꿈결 같다. 《시와 사상》의 실질적 맹주 정영태·김경수 시인, 《현대시》 2월호로 등단한 김혜영 등이 진정 고맙다. 특히 내과 전문의專門醫 김경수 시인은 이틀씩이나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강경주·윤홍조·이선형·정익진 시인들도 고맙기만 하다. 강 시인은 어쩜 그리도 사람이 좋게 생겼는지…. 또 어떤 이가 있을까. 정말 서울로 올라오기 싫었다. 잊지 못할 자갈치 시장의 싱싱한 횟감들. 지금 나는 은교 시인을 만난 뒤 맺어진 부산 시인들과의 정을 그리워하고 있다.
황지우의 글. 마치 ‘삶이 견딜 만한 정도의 크기를 갖는다는 것, 크지 않으면서 속이 빵빵하게 차 있다는 것, 내밀함, 담백함, 번들번들하지 않는 것, 빛나지 않는 광채, 트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15)을 얘기한 그의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에 대한 중심말은 가히 은교의 시에도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은교는 질 들뢰즈를 읽는다. 《감각의 논리》는 그녀에게 큰 위안이 되고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논문은 실로 탁월한 해법서라고. 그러고 보니 책들이 여기저기 덤벙덤벙, 있다. 어디선가 쟈스민 향香이 은은히 흐르고. 은교는 외친다. ‘현재에 몰두하라!’ 이것이 자신들이 사는 유일한 길. 거기에서 비로소 시를 일으키라…. 그러는 그녀의 눈빛이 열을 뿜는다. 등불을 좋아하고 파도를 좋아하는 그녀다. 은교의 ‘이미지’에 관한 글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관념과 당신을 옭아매는 감정들을 벗어나 실재에 닿을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라. 이미지를 만들어라. 언어는 당신의 원고지를 미리 점령하고 있는 관념 또는 감정을 떠나 이미지가 될 때 대상의 그림, 또는 대상의 음악을 읽는 이의 가슴 속에서 연주할 것이다.
관념은 감정의 분비물이기 쉬우며 또한 감정은 관념의 분비물이기 쉽다. 거기 이미지는 없다. 우리에게 충격을 줄 이미지는.
이미지로 하여금 실재에 도달하게 하라. 그것이 ‘구현’이며 ‘육화(肉化)된 형상화’일 것이다.16)
― <릴케의 편지─이미지에 관해서> 부분
[출처] [글]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오후의 만남 (강은교) |작성자 나타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