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의 역사(A history of Buddist philosophy)는 스리랑카 출신의 저명한 불교학자인 칼루파하나의 역작이다. 남방불교의 중심지에서 태어나 우리가 경멸적인 용어로 부르는 소승불교의 영향하에 성장기를 지내다가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에게서 언어철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하와이 대학의 교수로 있다. 저자는 본인의 제한된 시각에만 머무르지 않고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상좌부불교(소승)와 대승불교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양 진영의 화해를 모색하는 활동을 해왔다. 상좌부니 대승이니 하는 것에 불교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것은 그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포함하고 있는 지의 여부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초기불교의 핵심사상인 무아, 무상, 연기, 중도, 사성제, 팔정도에 대해 고찰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영원한 개인적 실체인 아트만과 전체적 실체인 브라흐만을 부정한 비토대주의, 비본질주의, 비실체주의라고 요약한다.2부 연속과 불연속에서 그는 불교철학사의 흐름을 개괄하면서 이런 불교내에 초월적 실체나 개아를 인정하려고 하는 절대주의적 요소를 주장하는 여러 분파의 출현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려고 하는 사건에 대해 고찰하는데 이 부분이 대단히 흥미롭다. 이 고찰에서는 상좌부불교의 분파 뿐만 아니라 우리가 대승불교라고 부르는 것 중에 어떤 경전도 가혹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원한 실체나 초월적 존재를 부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절대주의적인 견해가 오염되기 시작했는데 점차 심해져서 이 경향을 바로 잡을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아소카 왕이 후원한 3차 결집이었는데 당시 결집의 주관자인 목갈리푸나 팃사는 여러 갈래의 절대주의적 분파와 논쟁을 함으로써 그 견해들을 불교에서 추방하는데 일단 성공한다. 이 논쟁은 논사라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힌두교에서 인정하는 영원히 불변하는 개별적 실체 - 아트만 -인 개아가 있다고 주장한 분파가 있었는데 경량부와 독자부라는 분파였다. 또한 영원한 전체적 실체- 브라만 - 를 주장한 분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설일체유부이다. 이들은 모든 것은 실체가 있다. 즉 자성이 있다라고 주장하였는데 불교내에 발생한 가장 근본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분파였다. 이런 잘못된 견해는 지금도 횡행해서 불성이 있다든가 현상계를 떠난 어떤 초월적인 것이 있다는 오해를 계속 불러일으키고 있다. 세번째 분파는 초월론자들인데 여래는 죽어서도 영원히 존재한다고 하는 견해였다. 이 견해에 의하면 붓다는 모든 것을 다 알고 포섭하는 전체지를 갖춘자가 되는데 생전에 부처가 절대로 대답하지 않은 무용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신봉한 분파였다. 이런 절대주의적 경향은 일단 논사에서 논파되어 수면 밑으로 잠수하게 되었다.
불교사상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중관론을 제창한 나가르주나(용수)와 오직 마음 뿐인 유식을 제창한 바수반두(세친)인데 저자는 이 두 사람을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전승하고 발전시킨 인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절대주의적 본질주의적 사고는 우리 인간이 범할 수 밖에 없는 오류인데( 영원불멸한 절대자나 초월자를 상정하지 않으면 몹시 불안하지 않는가, 무엇이 실재하지 않느다고 해도 불안하지 않은가), 불교내에서도 이런 경향은 끊임없이 출몰한다. 니가르주나는 당시 횡행하는 이런 경향에 대항하여 의타적으로 일어나는 존재의 본질은 실체라는 개념과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며 존재의 비실체성을 논증한다. 존재가 비실체적이다면 아울러 비존재 역시 존재의 변형이므로 실체가 없다. 모든 우주가 연기성인 비실체성이듯이 깨달음, 또는 깨달은 자 역시 무자성이다라는 것이 결론이다.
금강경에 대해 저자는 초기불교에 충실한 대승경전이라고 평하고 있다. 절대주의적 본질주의적 개념화를 일체 부정하는 논리로 일관된 금강경은 희한하게도 공이라는 표현도 거의 없지만 존재의 무자성, 비실체성을 갈파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전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대승경전인 능가경과 법화경에 대해 저자는 부처님이 그렇게 부정하려고 했던 힌두교의 브라만같은 초월적 실체, 본질주의적 경향에 오염된 잘못된 경전이라는 혹평을 하고 있다. 절대적 불성, 본래 깨달음 등등 경험적 세계를 초월한 절대불변의 실체를 상정한 두 경전은 저자가 보기엔 가장 비불교적인 사상이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 선불교를 언급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견해가 보인다. 보리달마로 부터 5조까지 이를 때의 소의경전은 능가경이다. 그러나 6조 혜능부터는 금강경으로 바뀌는데 그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한다. 절대주의적 본질주의적인 비불교적 사상으로 부터 비절대주의 비본질주의 비토대주의적인 불교적 사상으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신수대사의 게송은 이렇다.
"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 묻지 않게 하리"
거기에 대한 혜능의 게송은 이렇다
"보리는 원래 나무 없고 거울 또한 틀이 아니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먼지가 일까"
신수의 게송은 형이상학적인 실체(명상을 통해 다다른 궁극적인 실체, 자신의 본성)를 전제하고 있지만 혜능의 게송은 그런 형이상학적 개념을 해체한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게송의 차이가 능가경에서 금강경으로의 이행을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능가경의 전통을 이어 받은 선불교가 조동종이며 금강경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 임제종이라고 설명하면서 두 파간의 실제적 차이에 대해 언급하며 임제종이야 말로 불교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동종은 무조건적인 개념의 해체와 바로 불성을 가르킴이 종지이므로 공안도 무척 엉뚱하다. 그러나 임제종은 개념이 해체와 더불어 유익한 개념의 재건을 허용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따라서 이 두 파에서 쓰고 있는 공안 역시 학문적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가 20년 전이니 아마 이런 분석이 이미 되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신앙과 신학은 늘 충돌한다. 신앙이 깊은 사람은 신앙이 비판과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일종의 모욕을 느낀다. 성서무오설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불경이 모두가 다 진리라는 생각을 할 수는 없다. 불멸후 2500년이 지났고 수많은 왜곡과 곡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초기불교경전에도 당시의 편견과 누군가의 주장이 부처님의 입을 빌려 설해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하물며 그 이후에 결집된 경전의 내용에 문제가 없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에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비판적 이성 역시 포기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덕목이다. 현재에 있어 어느 것이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이고 어느 것이 이질적인 것인지를 가려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자 올바른 신앙이겠다. 단지 믿는 것으로만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서울에서 부산에 갈 때 처음에 0.1도만 틀려도 목적지와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되듯이 믿음에는 올바른 방향이 있어야 겠다. 그런 면에서 이런 탁월한 학자들의 저작들이 불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하나 묻고 싶다. 불성이 있는가? 불성에 자성이 있는가?
오직 모를 뿐.
첫댓글미로운 소재인 것 같습니다. 구입해서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모습이 있는 상대성은 무아, 무상입니다. 무아, 무상이라고 아는 내 마음은 절대성입니다. 절대성은 영원하며, 불성이며, 자성인가요? 그 모든것을 떠났기에 절대성입니다. 소위 근본불교를 운운하며 선불교의 불성, 자성, 마음을 논하는자는 어리석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모든 것들이 단지 말마디임을 모르는 자들의 견해입니다. 허공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영원한 것도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닌, 모든 이분법을 떠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직 모를뿐 입니다.
모든 이분법을 떠난 것은 허공뿐만 아니라 만법입니다. 상대성이라는 현상계도 단멸도 아니고 상주도 아닙니다. 그거야 말로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는 중도입니다. 허공에다가 모습 이란 단어를 넣어도 말이 됩니다. 선불교의 모태인 대승불교의 출현에 크게 이바지한 용수보살의 중관사상을 보아도 존재와 비존재의 무자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서 무아, 무상을 아는 '내'마음이 나오고 그게 절대성입니까. 영원한 자아인 아트만과 구별이 안갑니다. 혜능선사의 맥을 이은 백봉선생님도 허공도 자성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말마디에 메이는 것을 걱정하신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글을쓰고, 보는 마음에, 我相이 있었는지, 아니면 허공이 쓰셨는지,,,
만약 그러셨다면, 두분다 챔피언입니다. ㅋㄷ
나는 상대성을 초월한 불변의 나입니다. 절대불변의 초월적인 나입니다. 이러한 내가 없다면 불교공부해서 무엇합니까? 그런데 이 나의 성격이, 성품이, 모습이, 기능이 허공과 같아서 허공성이라 이름합니다. 허공에 대하여 천명의 부처님이 출현하셔도 한마디 정의를 할 수가 없기에 무아라고 하며 자성이 없다고 합니다. 허공이 모든 것을 포함하듯이 허공성이 모든 것을 포함하기에 중도라고 합니다. 모든 중생이 동일한 허공성을 공유하기에 중도라고 합니다.허공성을 알때에 비로소 가공되지 않은 자비행이 나옵니다. 괴로운 상대성이 절대성에서 나왔음을 알때에 제대로 괴로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아의 나, 비아의 나입니다.
책소개나 타 매체에서 소개된 강연은 '불교계 뉴스'란으로 옮겼습니다. '좋은 인연 그늘 밑에'는 도반들의 글을 올리고 탁마하는 곳이니 널리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