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인의 자세 工夫人의 姿勢
지금부터 우리는 전통강원(삼장원)에서 불교를 공부합니다.
공부란 세속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정성을 다하여 그 마음을 위대하게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불법 문중에서의 공부는 키우고 줄일 것이 없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므로, 깨우침을 가르치고 배우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교육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만나 함께 공부하게 된 것은 여러 생에 맺은 인연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만날 수 없는 것인데 참말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법고(法鼓)를 울리는 것이 누가 먼저 치고 누가 늦게 치는 구별이 있겠는가?
누구나 치는 사람이 임자다.
모든 법은 동시(同時) 동처(同處)라 선후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원각경에 [오랫동안 공부한 사람을 중히 여기지도 않고 처음 배우는 사람을 가볍게 여기지도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속에서는 선후배의 관념이 철저하지만, 불법 문중에서는 평등성지이기 때문에 선후배가 평행일직선인 것입니다.
이러한 위치에서 우리 삼장원 교육과정에서 우리의 자세입니다.
원이삼점(圓伊三點) [⛬]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점 하나가 위에 있으니 횡(橫 가로)도 아니고, 점 둘이 아래 있으니 종(縱 세로)도 아니다.
그렇다고 점 셋이 각각 떨어져 있으니 병(竝 아우름 )도 아니며 또 그렇다고 별(別 갈라짐)도 아니다.
그래서 기신론에 부즉불리(不卽不離)라 ‘서로의 관계가 가깝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 했습니다.
여기서 지극히 중요하게 해야 할 것은 신, 구, 의 3업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몸과 입과 마음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루어야 할 것이 우리의 자세다.
몸은 생노병사(生, 老, 病, 死)가 있고 마음에는 생주이멸(生, 住, 異, 滅)이 있으나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옛날 송광사에 두월스님은 공양주가 특별대우를 하므로
[내가 어찌 공양주에게 은혜를 보답할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치며 [내 마땅히 쌀 3말로 보답하리라] 하였다.
[그러면 언제 줄 것인가 내일 아침이면 혹 마음이 변할지 모르니 지금 당장 주자] 하고 즉시 쌀 3말을 주었습니다.
모든 일은 생각이 났을 때 즉시 해야 한다.
생각이 변하면 망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려면 생각이 3번이나 변한다고 한다.
죽기 전에 마음먹은 것을 실수 없이 실천해야 합니다.
또 불법 문중에 들어와서 지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아는 생각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차문내 막존지해 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안에 들어오면 지식으로 아는 체하지 마라] 하였으니,
지해(知解)만 내면 패가망신(敗家亡身) 한다.
모르면서 아는 체하고, 없으면서 있는 체하고, 못난 것이 잘난 체하다가 죽은 사람이 많다.
불법의 큰 바다에서 보면 이 세상 어떠한 철학자 과학자도 큰 바다의 한 방울 물거품이다. 모두가 지해종사(知解宗師)다.
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타는 놈이 있다. 나는 놈을 쏘는 놈이 있다.
그렇다고 쏘는 놈은 안 죽나? 쏘는 놈을 또 쏘는 놈이 있다.
그래서 잘난 체하면 안 된다.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 한다면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그러니 적라라 정쇄쇄(赤裸裸 淨灑灑)하게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리고 한 모양 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공부할 자세(姿勢)를 갖추어야 합니다.
절에 간다고 머리 깎고 세수하고 목욕하고 몸만 깨끗하게 하지 말고 그 마음속을 텅텅 비워버려야 한다.
물건을 담으려면 빈 그릇이 있어야 한다.
빈 그릇이 없다고 먹다 남은 그릇에 새 밥을 담으면 쉽게 상하게 된다.
그러니 앞에서 공부하고 알았던 것을 송두리째 다 털어버리고 시작해야 합니다.
고관대작이거나 박사나 농부, 상인, 큰스님, 사미나 그건 상관이 없다.
모두 한 맛 평등한 모습으로 시작해야 한다.
먼저 먹던 밥그릇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깔끔하게 청소한 뒤에 백지상태에서 강의를 들어야만 합니다.
불법에는 계정혜(戒定慧) 3학이 있다.
戒는 그릇이고, 定은 물이고, 慧는 달이다.
그러니 戒를 존중하여 그릇을 청정히 하고, 그 청정한 그릇에 定의 물을 담아, 慧의 달이 밝고 깨끗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옛사람이 이르기를 [戒의 그릇이 완고(完固)하여야 定水가 맑고 깨끗하고, 定水가 맑아야 지혜의 달(慧月)이 어디든지 나타난다(방현方現)고 하였다.]
우리가 법당에서 향을 피우는 것은 戒고, 다기에 옥수를 올리는 것은 定이며, 초를 켜는 것은 慧에 해당한다.
계를 잘 지키면 향이 타는 것처럼 몸에서 향내가 나고, 선정에 들면 잡념에 흔들리지 않아 다기 안에 물처럼 고요하고 행복하며, 촛불을 켜면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무명의 번뇌 망상을 밝혀 지혜의 달이 세상을 비추는 것입니다.
부처님 계율이 현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계가 나올만한 이유가 있고, 그 계와 같은 여건은 현대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문자나 언어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뜻을 따라 새겨 나가면 고금시종(古今始終)이 없는 것이 戒이다.
부처님 당시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이불 덮고 잠을 자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입멸하실 무렵 아난존자가 물으니 [이계위사 以戒爲師] 하라
[계로서 스승을 삼아라] 한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버리고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지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재능이 넘쳐 복덕을 감하기 쉽다.
혼자 아는 체하면 다른 사람이 업신여긴다.
그러므로 역대로 불법을 구한 이들이 알기 전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던 것이다.
버리는 자만이 설 땅이 있기 때문이다.
법화경의 상불경(常不輕)보살은 이와 같은 사실을 능히 잘 증명하여 주고 있다.
열반경에 [무릇 마음이 있는 자는 모두 다 성불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살피고 살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참회합니다. 행복합니다.
일체중생도 행복하여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