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59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9월 19일(을축) 2번째기사
대왕 대비가 회간왕 부묘(祔廟)를 다시 의논하게 하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전교(傳敎)하기를,
“
회간왕(懷簡王)의 부묘(祔廟)는 의논하는 자가 한결같지 아니하니, 마땅히 조목마다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1. 혹은 황백고(皇伯考)라 일컬으면 부묘(祔廟)할 수 없다 하고, 혹은 황백고(皇伯考)라 일컬으면 부묘(祔廟)할 수 있다 하니, 그 이유를 묻는다.
1. 혹은 이르기를, ‘전례(前例)에는 모두 이와 같지 않았다.’고 하지만,
회간(懷簡)은 명(命)을 받아 세자(世子)가 되고, 명을 받아 왕(王)이 되었다. 또 본시 대종(大宗)이고,
예종(睿宗)이 비록 명을 받아 왕이 되었더라도 먼저 신하의 예를
회간(懷簡)에게 하였거든, 하물며
회간은 본시 적형(嫡兄)이니,
예종의 위에 부제(祔祭)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1. 혹은 ‘별도로 입묘(立廟)하여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고 하나, 그렇다면 장차 몇 대(代)에서 다한다는 것인가?
1.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소목(昭穆)의 차제(次弟).
1.
회간(懷簡)을 입부(入祔)하게 되면
공정왕(恭靖王)을 조천(祧遷)해야 하니, 미편(未便)하다. 〈그러나〉
공정왕이 만약 본시 불천(不遷)의 신주[主]로되
회간이 들어옴으로써 천조(遷祧)하였다면 그만이지만, 스스로 차례가 있어서 옮겼다면 어찌 통할 수가 없겠는가?”
하니,
정창손(鄭昌孫)·
조석문(曺錫文)·
윤자운(尹子雲)·
윤사흔(尹士昕)·
김국광(金國光)·
김수온(金守溫)·
이석형(李石亨)은 의논하기를,
“제1조는, 신(臣) 등의 생각으로는, 이제 별묘(別廟)를 두고 황백고(皇伯考)라 칭하자는 것은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이 제사를 주장하는 까닭으로 황백고(皇伯考)라 칭하자는 것입니다.
종묘(宗廟)에서는
예종(睿宗)에게 이미 황고(皇考)라 칭하였는데,
회간(懷簡)에게 또 황백고(皇伯考)라고 칭하면 이것은 둘을 높이는 것이니 의(義)에 편하지 못합니다. 또 황백고라고 칭한다면 축문(祝文)에도 마땅히 효질(孝姪)이라 일컬어야 하니 더욱 미안(未安)한 것이 됩니다. 제2조는, 신 등의 생각으로는, 만일 부득이하여
종묘에 부제한다면
회간 대왕(懷簡大王)을
예종의 위에 서열하여도 해로움이 없을 듯합니다. 제4조·제5조는, 신 등의 생각에는, 고제(古制)의
종묘에서는 형제(兄弟)는 한가지로 일실(一室)로 하였으므로
공정 대왕(恭靖大王)과
공정 대왕(恭定大王)도 한가지로 일실로 하고서 소(昭)가 되었으니, 이제 비록
회간을 부묘(祔廟)하더라도
예종으로 더불어 또한 일실로 하여야 할 것이며,
공정 대왕은 불천(不遷)할 것입니다.”
하고, 이육(李陸)은 의논하기를,
“제1조는, 신이 생각하기에는,
예(禮)에,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아들이 된다.’ 하였는데, 성상은 이미
예종(睿宗)의 뒤가 되었으니, 의리에 있어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득불
회간왕(懷簡王)을 황백고(皇伯考)라 하는 것은 정통(正統)을 중히 하는 것입니다. 이미 정통을 중히 하였은즉, 어찌 사친(私親)을 부묘(祔廟)할 수 있겠습니까? 황백고라 칭하면 부묘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세종(世宗)이
공정(恭靖)에게 황백고라 칭한 것을 예(例)로 한다면,
공정은 이미 일찍이 천위(踐位)하였으니,
회간(懷簡)을 왕으로 추존한 것과는 비유가 아닌 줄로 여겨집니다. 제2조는, 신이 생각하기에는,
회간왕이 비록 명(命)을 받아 세자(世子)가 되었다 하더라도 불행히 일찍 서거(逝去)하여,
세조 대왕(世祖大王)이 바로
예종(睿宗)으로 명을 청하여 세자(世子)를 삼고, 끝내는 명을 받아 왕(王)이 되었은즉, 이는
예종이 이미 적통(嫡統)이 되고 대종(大宗)이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회간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
예종이 비록 대군(大君)이 되었다 하더라도 세자와 대군의 사이에는 아직 군신(君臣)의 분수가 있지 않았으니, 신례(臣禮)를 행하였다 이를 수는 없습니다. 이제
회간왕은 법(法)에 있어서 이미 부묘(祔廟)함이 합당하지 못하다 하였은즉, 위차(位次)의 상하(上下)를 의논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제3조는, 신의 뜻으로는, 이미 대군으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은즉
회간은 마땅히 시조(始祖)가 되고 불천(不遷)하여야 되니, 어찌 반드시 다시 제사를 대신할 것을 의논하겠습니까?
고려(高麗)의
성종(成宗)이
대종(戴宗)을 부묘한 것 같은 것은 일이 옛것을 상고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법이 될 수 없고, 또
회간을 부묘(祔廟)하면
공정(恭靖)을 천조(遷祧)하는 것이 미편(未便)하다는 의논에도 또한 근거가 없습니다.
회간을 만약 응당 부묘하여야 하면,
공정은 본시 불천(不遷)의 신주[主]가 아니니, 예(例)로 마땅히 천조(遷祧)할 것이나, 이제
회간은 이미 부묘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 하였으니, 어찌
공정의 천(遷)이나 불천(不遷)을 염려하겠습니까? 대저 인정(人情)은 낳아 준 이에게 후(厚)한 까닭으로 성인(聖人)이 예(禮)를 지어서 이를 방지하였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무릇 시행하시는 바가 모두
요(堯)·
순(舜)을 본받으면서 유독 여기에만 성인(聖人)의 제도를 따르지 않는 것은 법을 만세(萬世)에 드리우는 것이 아닙니다.”
“제1조는, 신의 뜻으로 생각하기에는,
예종 대왕(睿宗大王)에게 이미 황고(皇考)라고 칭(稱)하였은즉,
회간 대왕(懷簡大王)은 비록 부묘(祔廟)하지 않았더라도 백고(伯考)라고 칭할 것입니다. 이제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고서 황백고(皇伯考)라 일컫는 것은 예(禮)에 있어서도 마땅하다 여겨집니다. 제5조는, 신의 뜻으로 생각하기에는,
예에, ‘형제(兄弟)는 한가지로 소목(昭穆)이 되어 반열로써 상부(相祔)한다.’고 하였으니,
회간과
예종은 한가지로 1세(世)가 됩니다.
공정 대왕(恭靖大王)을 옮길 수 없다고 의논하는 자는 예문(禮文)을 상고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고,
김겸광(金謙光)·
신승선(愼承善)·
정문형(鄭文炯)·
이숭원(李崇元)·
이파(李坡)·
안빈세(安貧世)·
윤잠(尹岑)·
고태필(高台弼)은 의논하기를,
“신 등의 먼저 의논은, 부묘(祔廟)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니 별도로 입묘(立廟)하여 한결같이 종묘(宗廟)의 의식에 의하는 것이 편하다 하였고, 부묘하는 절목(節目)은 마땅히 의논할 바가 아니니, 다만 별도로 입묘하게 되면 종묘의 소목(昭穆)의 서열[序]로써 친진(親盡)하고 그칠 것입니다.”
하고, 이철견(李鐵堅)·박건(朴楗)은 의논하기를,
“신 등의 생각으로는 고명(誥命)을 받아 제후(諸侯)가 되었은즉 제후의 향례(饗禮)로 제향함이 마땅하다 여겨집니다.
예(禮)에, ‘대부(大夫)는 제후(諸侯)에 부제(祔祭)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의묘(懿廟)를 대군(大君)의 집[第]에 세운 것은 아직 고명을 받지 않았을 때이나, 이제 대군이 제사를 받드는 것은 불가합니다. 또
회간왕(懷簡王)은
예종(睿宗)과 군신(君臣) 사이가 아니니, 부묘(祔廟)하여
예종(睿宗)의 위에 서차를 정하고 황백고(皇伯考)라 일컫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황효원(黃孝源)은 의논하기를,
“신의 뜻으로는 천자(天子)가 명하여 왕으로 봉(封)하였으면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묘중(廟中)에서 옛적에도 백고(伯考)로 칭한 예(例)가 있거늘, 하물며
의묘(懿廟)에게 이미 백고(伯考)라 칭한 것이겠습니까? 예(禮)라는 것은 인정(人情)에 맞추어 이를 조절해서 문식하고 권도(權道)로 하되, 중도(中道)를 얻으면 예의 경(經)이 됩니다. 백고(伯考)라고 일컬어
종묘에 부제하는 것은 예에 있어 진실로 마땅하며, 또
예종은 대군(大君)으로
회간(懷簡)을 계승하여 세자(世子)가 되었은즉,
예종의 위에 자리하는 것도 또한 진실로 당연합니다. 옛적에
주공(周公)이 제례(制禮)할 때에, 오늘과 같은 일이 아직 있지 않았으나, 그때를 당하여 오늘의 일이 있었다면 반드시 차례로써 정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정괄(鄭佸)·
박숭질(朴崇質)·
최신한(崔信漢)은 의논하기를,
“신 등의 생각에는
회간왕(懷簡王)을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함에는 불편(不便)한 일이 다섯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사친(私親)을 돌아 볼 수 없다는 것이 하나입니다. 방지(旁支)로써 대통(大統)을 입승(入承)한 임금[君]이 사친을 부묘(祔廟)한 일은 역대(歷代)에 없다는 것이 둘입니다.
예종(睿宗)에게 이미 황고(皇考)하고 칭하였으니,
회간왕(懷簡王)에게는 무엇으로 칭함이 옳을는지 그 칭호(稱號)가 심히 어렵다는 것이 셋입니다. 만약
예종의 위에다 부제한다면
예종은 친히
세조(世祖)의 전위(傳位)를 받았으니,
회간왕이 비록 일찍이 세자(世子)가 되었더라도 정위(正位)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만약 장차
예종의 아래에 부제한다면 한갓 장유(長幼)의 차례를 잃을 뿐만 아니라, 전하는
예종의 뒤가 되었으니 그 사이에 끼이는 것이 넷입니다. 별묘(別廟)에 있으면 백세(百世)토록 불천(不遷)의 신주[主]가 되나,
종묘(宗廟)에 부제하면, 친진(親盡)하면 마땅히 옮기어 조묘를 헐어야 한다는 것이 다섯입니다. 그전대로 부묘(祔廟)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 등의 먼저 의논은
회간 대왕(懷簡大王)을 부묘(祔廟)함은 옳지 못한 것으로 여겼으니, 이제 감히 다시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뜻으로 생각하기에는, 의(義)가 있는 곳에는 예(禮)가 때로 변함이 있으나, 권도로 하여서 하면 이것도 또한 예(禮)이니, 우리
세종(世宗)께서
공정 대왕(恭靖大王)에게 황백고(皇伯考)라 칭하고,
세조(世祖)가
문종(文宗)에게 칭한 것이 없었으나, 예가 아님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회간 대왕은 일찍이 동궁(東宮)의 정위(正位)였고, 이제는 왕으로 추존되었으니, 다른 사친(私親)과 비교가 아니거든, 더구나 향사(享祀)는 을 쓰고, 제사는 을 쓰니, 모두 대부(大夫)의 예(禮)가 아닌데,
월산 대군(月山大君)이 행례(行禮)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겠습니까? 대부는 제후(諸侯)에 부제(祔祭)할 수 없으니,
월산 대군이 제사를 주장함은 부당한 것이며, 의(義)에 있어서는 부묘(祔廟)하여 황백고(皇伯考)라 칭함이 마땅합니다.”
“1. 백고(伯考)라 칭하고서 부묘(祔廟)할 수 없다는 것은,
예종(睿宗)은 정통(正統)을
세조(世祖)에게 받고, 전하는
예종에게 받은 까닭으로
예종에게 황고(皇考)라 칭하고,
회간왕(懷簡王)에게 황백고(皇伯考)라고 칭하는 것이나,
종묘(宗廟)에는 정통(正統)을 상전(相傳)하는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회간왕의 부묘는 불가하다고 여겨집니다.
1.
회간왕(懷簡王)은
세조(世祖)의 적장(嫡長)으로 명(命)을 받아 세자(世子)가 되고,
예종(睿宗)은 당시에 대군(大君)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자가 비록 저부(儲副)라 하더라도 임금은 아니니,
예종이 신례(臣禮)를
회간왕(懷簡王)에게 행하였다고 이르는 것은 불가합니다.
종묘(宗廟)의 차례는
회간왕이
예종의 위에 계시는 것도 옳지 못하고,
회간왕이 또 일찍이
예종에게 신하로써 섬기지 않았으니,
예종도 또한 아우로써 그 위에 계시는 것이 옳지 못한 까닭으로 신은 두 임금의 위차(位次)의 상하(上下)는 그 마땅함을 얻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1.
회간왕(懷簡王)이 입묘(入廟)하고
공정왕(恭靖王)이 천조(遷祧)함은 미편(未便)합니다.
예종(睿宗)과
회간왕(懷簡王)은 형제의 항렬이므로 같이 1실(室)에 들어와 목(穆)이 되면,
공정왕(恭靖王)도 또한 나오지 못합니다.
1. 별도로 입묘(立廟)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면, 그 친진(親盡)하여서 그치는 것은 종묘(宗廟)와 더불어 같으니, 가감(加減)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신의 뜻으로 생각하기에는,
회간왕(懷簡王)은 이미 명(命)을 받아 세자(世子)가 되었고, 이제 또 조정(朝廷)에서 왕으로 추존하여 사시(賜諡)하고 아울러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에게 관복(冠服)을 내려 주었으니, 조정의 영명(榮命)한 예가 갖추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회간 대왕(懷簡大王)은
양도 대왕(襄悼大王)에게 존장(尊長)으로는 모형(母兄)이 되고, 일찍이 하루도 북면(北面)하여 섬기지 않았으니,
희공(僖公)을 제부(躋祔)한 것과는 비교가 아니며, 동저(東邸)로 정위(正位)하고 명호(名號)가 이미 높았으니, 번방에 있던
복왕(濮王)과는 비교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대통(大統)을 찬승(纘承)하여 한 나라를 무림(撫臨)하시니,
회간 대왕(懷簡大王)은 마땅히 일국(一國)의 봉양(奉養)으로 향사하여야 하는데, 조정(朝廷)의 명(命)이 이와 같으니, 그 종(宗)이라 일컬어서 부묘(祔廟)한들 무슨 의심이 있겠습니까? 종(宗)이라 일컫지 않으면 오히려 현양(顯揚)함에 혐의되고, 종이라 일컫고서 부묘(祔廟)할 수 없으면 편안하지 못하며, 부묘하지 못하는 데에 집착하여 종으로 일컬을 수 없는 것도 또한 편안하지 못합니다. 그 부묘한다고 해서 전하께서
예종[睿廟]의 뒤가 되는 데에 해롭지 않지만, 그 부묘하지 아니하는 경우
월산 대군 이하가 모두 대부(大夫)이니, 어찌 조(祖)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다고 이르는 것은, 신은 생각하건대, 대저 인정(人情)은 천성(天性)의 어버이에게는 후(厚)하게 하라고 말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후하게 하고, 그 후하게 해야 할 데에 있어서는 비록 마땅히 후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더라도 스스로 천성의 어버이 같이는 아니합니다. 그래서 〈사친을 돌아볼 수 없다는〉 말을 하여 억제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아울러 그 마땅히 해야 할 것까지도 천성(天性)의 어버이에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먼저 이른 바, ‘종(宗)이라 일컬어서 부묘(祔廟)할 것입니다.’고 한 것도 이것입니다.”
하고,
정숭조(鄭崇祖)·
한서구(韓瑞龜)·
유서(柳溆)·
박서창(朴徐昌)·
김견수(金堅壽)·
한언(韓堰)은 의논하기를,
“먼저 의논에, 부묘(祔廟)함은 마땅하지 않으니 별도로 입묘(立廟)하여 종묘(宗廟)의 의식과 따르는 것이 편하다고 하였으므로, 부묘의 절차(節次)는 감히 의논할 것이 아닌 줄로 알며, 다만 별묘(別廟)를 하면, 소목(昭穆)의 차례는 친진(親盡)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이 이제 삼가 부묘(祔廟)하는 의논을 보건대, 고사(故事)를 많이 근거하였으나 하나로 귀결(歸結)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회간 대왕(懷簡大王)은
혜장 대왕(惠莊大王)의 적자[嫡]이며, 비록 대통(大統)을 계승하지는 못하였더라도 천자(天子)가 명(命)하여 세자(世子)가 되었고, 또 명하여
조선 국왕(朝鮮國王)이 되었으니, 하다고 이를 수 있는데, 그 일찍이 천조(踐祚)하지 못한 것으로써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천자(天子)가 이미 명하였으니, 부묘(祔廟)하지 아니하면 순종하지 않음이요, 명하였는데도 부묘하지 않는다면 청명(請命)한 것은 정의[情]가 아닙니다. 고래(古來)로 부묘한 인군[君]이 어찌 모두 반드시 공덕(功德)을 의논한 뒤에 부묘하였겠습니까? 신 등은 가 중(重)한 까닭으로 황백고(皇伯考)라고 일컬으면 두 분을 높이는 데 혐의가 없고, 천서(天敍)로써 부(祔)하면 진실로 인정(人情)에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의논하는 자가 이르되
회간(懷簡)이 들어오면
공정(恭靖)이 나가서 조주(祧主)가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동소(同昭)·동목(同穆)이어서 스스로 1실(室)이 되면,
회간(懷簡)이 비록 부묘되더라도
공정(恭靖)은 조주가 되지 않거든, 하물며
공정은 백세(百世)토록 불천(不遷)하는 신주[主]가 아닙니까?”
하고,
최자빈(崔自濱)·
장계이(張繼弛)·
이덕숭(李德崇)·
유윤겸(柳允謙)·
김수손(金首孫)·
이혼(李渾)·
정신석(鄭臣碩)·
안처량(安處良)은 의논하기를,
“신 등의 먼저 의논에는, 황백고(皇伯考)라 일컬어 부묘(祔廟)하자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양도 대왕(襄悼大王)의 뒤가 되고서 이미 황고(皇考)라 일컬었은즉,
회간왕(懷簡王)에게 또 황고하고 칭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의논하는 자는 비록 황백고(皇伯考)라 이른다 하더라도 부묘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조종(祖宗)이 이미 행한 전례(典例)로써 이를 상고하건대,
세종(世宗)은
공정 대왕(恭靖大王)에게 황백고라 일컬었고, 또 이제 전하께서도 이미
의묘(懿廟) 에 친히 제사하며 황백고라 일컬었은즉,
종묘(宗廟)에서 황백고라 칭하여도 무방(無妨)한 까닭으로 이로써 헌의(獻議)합니다.”
하고, 이계손(李繼孫)은 의논하기를,
“신이 의논한 바는, 황백고(皇伯考)라 일컫지 아니하면 부묘(祔廟)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회간 대왕(懷簡大王)은
세조(世祖)의 적자(嫡子)로 천자(天子)가 이미 봉(封)하여 세자(世子)가 되었고, 또 국왕(國王)을 봉(封)하였으니,
예종(睿宗)으로 더불어 일묘(一廟) 가운데에 하여서 황백고(皇伯考)라 일컫는 것은 천륜(天倫)에 편안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천서(天敍)를 따르게 하소서.”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그 후사가 된 쪽을 부모(父母)로 하고, 그 낳아 준 부모는 백숙 부모(伯叔父母)로 하니, 이것은 천지(天地)의 대경(大經)이요, 생민(生民)의 대륜(大倫)이며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漢)나라 광무(光武)는
원제(元帝)를 종(宗)으로 하되 4친(四親)을 위하여는 별도로 입묘(立廟)하였고,
송(宋)나라 영종(英宗)은
인종(仁宗)의 뒤를 계승하여 별도로
복왕묘(濮王廟)를 세웠는데, 이 두 임금이 어찌 조종(祖宗)의 서열에 부묘(祔廟)하여 치제(致祭)하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만, 진실로 정통(正統)을 중히 한 때문입니다. 혹 말하기를, ‘
회간왕(懷簡王)은 이미 천자(天子)에게 명(命)을 받아서 왕이 되었으니,
종묘(宗廟)에 부(祔)하는 것도 무방(無妨)하다.’ 하나, 신의 뜻으로 생각하기에는,
회간왕은 이미 조정에 임(臨)하지 않았고, 또
양도왕(襄悼王)에게 형(兄)이 되더라도 명(命)을 받은 것은
양도(襄悼)의 뒤에 있었으며, 소목(昭穆)의 차례에도 또한 불가한 것이 있으니,
한(漢)·
송(宋) 양조(兩朝)의 예(例)에 의하여 별도로 입묘(立廟)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예(禮)에 이르기를, ‘대부(大夫)는 왕(王)을 제사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대군(大君)이 제사를 주장함도 예문(禮文)에 불합(不合)한 것이니, 혹 친히 제사하고 혹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이파(李坡)는 의논하기를,
“신은 전일(前日)에 간략하게 어리석은 소견을 진술하였으나 또 미진(未盡)한 것이 있어, 다시 천총(天聰)을 번독합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에, 유사(有司)가
도고(悼考)를 마땅히 황고(皇考)라 일컬어 침묘(寢廟)를 세울 것을 아뢰었고,
광무(光武)가 처음으로 사친묘(四親廟)를
낙양(洛陽)에 세웠다가 뒤에
장순(張純) 등의 의논으로 인하여, 비로소
원제(元帝) 이상은
태묘(太廟)에서 제사하고
성제(成帝) 이하는
장안(長安)에서 하였으며, 사친묘를
장릉(章陵)으로 옮기었습니다.
송(宋)나라 영종(英宗)은 조서(詔書)를 내려,
복안의왕(濮安懿王)의 원묘(園廟)를 세워
복왕(濮王)을 추존하여 임금[皇]으로 삼고 어버이라 일컬었으나, 이것은 모두 일찍이
태묘(太廟)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었습니다. 유독
한(漢)나라 애제(哀帝)만이
정도왕(定陶王)을 추존(追尊)하여
공황(共皇)으로 삼고, 경사(京師)에 입묘(立廟)하니, 그 뒤에
원(元)과 전조(前朝) 때에 간혹 있게 되었습니다만, 모두 성조(聖朝)에서 본받을 것이 아니며 역대(歷代)의 전고(典故)를 사서[史]에서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회간왕(懷簡王)은
세조(世祖)의 적자(嫡子)로서 이미 책봉하여 세자(世子)가 되었으니, 비록 대위(大位)에 나아가지 못하였더라도 바로 정통(正統)의 차례를 승계(承繼)한 것이니, 방지(旁支)의 과는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또 천자(天子)가 이미 왕으로 추존하였으니, 그
태묘(太廟)에 들어가는 것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종(睿宗)을 황고(皇考)라고 일컬었은즉 일묘(一廟)에서 아울러 양고(兩考)를 칭한다면 의(義)에 해로움이 있고, 만약 황백고(皇伯考)라 칭한다면 더욱 심히 편안하지 못합니다.
송(宋)나라 때,
복왕(濮王)의 전례(典禮)를 의논함에,
왕규(王珪) 등은 의논하기를, ‘후사(後嗣)가 된 자는 아들이 되어,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으니, 황백고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구양수(歐陽脩) 등은 의논하기를 ‘를 상고하건대, 남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아비를 위하여 3년을 강등하여 기년(期年)으로 하되 부모(父母)의 이름은 없애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 복(服)을 강등할 수는 있으되 이름[名]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본생(本生)의 어버이를 황백고(皇伯考)라고 일컫는 것은 전세(前世)를 역고(歷考)하건대, 모두 전거(典據)가 없다.’고 하여, 두 의논이 서로 저오(牴牾)가 되어 마침내 서로 시비(是非)하게 되더니, 뒤에 이르러,
신안 호씨(新安胡氏)는
정자(程子)의 설(說)을 인용하여,
구양수(歐陽脩)의 말[言]을 창의(暢議)로 삼아, 드디어 황백고라 칭하는 것으로 정론(正論)을 내렸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의(義)로써 이를 말하면,
정자(程子)의 설(說)이 비록 옳다 하더라도 정으로써 이를 말하면 어찌 사은(私恩)을 다 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회간왕은 정통(正統)을 이었으니,
복왕(濮王)의 방지(旁支)에다 비교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로써 보건대, 황백고라 일컬음은 미안한 가운데에서도 또 미안한 것입니다. 황고(皇考)라고 일컬으면, 의(義)에나 정(情)에 거의 둘 다 온전할 수 있으나, 다만 부묘(祔廟)하고 안하는 것으로써 말하면 의심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신은 또 뜻하건대,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고 황백고라 칭한다면 이미 부당(不當)함이 되니, 황고라 칭할 수 없다면, 예문(禮文)에만 해로움이 있을 뿐 아니라, 공애(恭愛)하는 마음에도 또한 오로지할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별묘(別廟)를 세우는 것이 편함만 같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별도로
태묘(太廟)를 세우되 그 묘제(廟制)와 제전(祭典)을 한결같이
종묘(宗廟)의 의식[儀]과 같이 하면, 위로는 1묘(廟)를 오로지한 영광을 얻고, 아래로는 봉상(奉上)의 공경[敬]을 다함이 되며, 그대로 황고(皇考)라 일컬어 능히 친한 이를 친하게 하는 의[親親之義]를 다하시면, 신은 하나를 들어서 삼선(三善)을 아우름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도 추존하여 높이는 정성을 만약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또 원묘(原廟)를
문소전(文昭殿)의 곁에 세워서, 존숭하는 예(禮)를 극진히 하면 더할 수 없이 다행하겠습니다. 대저 원묘는 근고(近古)에서 한 바이니,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예(禮)는 본시 상경(常經)이 아니요, 의(義)도 또한 옛과 같지 않으니, 마땅히 정(情)을 인연하여서 정하여야 한다.’ 하니, 반드시 예법(禮法)에 구애할 것은 아닙니다.”
“
회간 대왕(懷簡大王)은 이미 고명(誥命)을 받았으니,
종묘(宗廟)의 예(禮)를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마는, 그러나 부묘(祔廟)하여
예종(睿宗)의 아래에 있으면 서차(序次)가 편안하지 못하고,
예종의 위에 있으면 고명받은 것의 선후(先後)가 있으니 또한 편안하지 못합니다. 이제 이미
예종을 일컬어 황고(皇考)라 하였으니,
회간왕(懷簡王)을 황백고(皇伯考)라 하여서 제사를 하였다면 그 칭호(稱號)를 다시 고침이 더욱 불가합니다. 또
종묘(宗廟) 각실(各室)의 불천지주(不遷之主)와 로써 이를 계교하면,
공정왕(恭靖王)·
문종(文宗)·
예종(睿宗)은 3세(世)에 불과하니, 그대로
의묘(懿廟)에 안치한다면 비록 5세(世)에 이르더라도 향사(享祀)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거묘(去廟)한 예(例)가 있게 되면, 그 때를 당하여 비록 별도로 입묘(立廟)하여 제사하고자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신의 뜻으로 생각하기에는
의묘(懿廟)에서 납일(臘日)·사시(四時)에 크게 향사하는 제례(祭禮)와 삭망(朔望)의 제품(祭品)은 한결같이
종묘(宗廟)에 의하고, 기신(忌晨)이나 속절(俗節)에 먼저 고(告)하여 이안(移安)·환안(還安)하는 것은 한결같이
문소전(文昭殿)에 의하면 거의가 옳을 것입니다.”
“의지(懿旨) 내에, ‘혹 이르되, 「별도로 입묘(立廟)하여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소서.」 하는데, 그렇게 하면 장차 몇 대(代)에야 다하겠느냐?’고 하시니, 신 등의 의논은,
종묘(宗廟) 7실(室)의
태조(太祖)·
태종(太宗)·
세종(世宗)·
세조(世祖)는 모두 불천지주(不遷之主)라 하였으니, 이제
회간 대왕(懷簡大王)을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면 으레 3세(世)에서 옮겨야 하고, 만약 별묘(別廟)하면 스스로 한 제사[一祀]가 되나
종묘의 천조(遷祧)하는 제도[制]와 같지 않으니, 영구히 할 수 있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예종(睿宗)의 뒤를 이어 대통(大統)을 입계(入繼)하고, 벌써
예종을 황고(皇考)라 하여, 명의(名義)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회간 대왕(懷簡大王)이 비록 낳아준 의(義)는 지중 지대(至重至大)하다 하더라도, 그러나 백고(伯考)라고 칭할 수 없음은 대종(大宗)에 합한 까닭입니다. 신 등은 전일의 의논에서, 부묘(祔廟)하는 것의 근거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회간 대왕을 부묘(祔廟)한다면 형제(兄弟)가 한가지로 1실(室)이어서
공정 대왕(恭靖大王)이 천조(遷祧)하게 되는 이치[理]가 없으니, 저
공정 대왕의 천조를 의논하는 자는 예문(禮文)을 상고하지 않은 데에서 그러했을 것입니다.
회간왕은 비록 부묘하더라도 본래의 서열로써
예종(睿宗)의 위에 차례하는 것이 무방할 것 같습니다마는, 다만 명(命)을 받은 것의 선후(先後)가 있는 것도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으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상확(商確)해서 시행(施行)하게 하소서.”
“혹 황백고(皇伯考)라 일컬으면 부묘(祔廟)할 수 없다는 것은 정통(正統)을 높임이요, 예(禮)의 상경(常經)이니, 신이 황백고라고 일컬어서 부묘하기를 청한 것은,
회간 대왕(懷簡大王)은 이미 명(命)을 받아 왕(王)이 되었고, 그리고
월산 대군(月山大君)이 승사(承祀)할 수는 없은즉, 의(義)에 마땅히 부묘(祔廟)해야 함은 예(禮)의 권변(權變)입니다. 하물며 주상(主上)께서 이미 정통(正統)을 높이어
예종(睿宗)을 일컬어 황고(皇考)라 하였으니,
예에, 사당에는 두 임금이 없다고 하였은즉, 이제 또
회간왕(懷簡王)에게 황고라고 일컫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만약 별묘(別廟)를 세워서 제사하게 되면, 이것은 나라에 2묘(二廟)가 있는 것이니, 의(義)에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길보(李吉甫)·
박안성(朴安性)·
고태정(高台鼎)·
김치운(金致運)·
김자정(金自貞)·
이간(李幹)은 의논하기를,
“먼저 의논에, 황백고(皇伯考)라 일컬어 부묘(祔廟)하자고 한 것은 전하께서
예종(睿宗)을 이어서 후사(後嗣)가 되어 이미 황고(皇考)라고 일컬었은즉,
회간왕(懷簡王)에게 거듭 일컬을 수가 없는 까닭으로 황백고라 일컬음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의묘(懿廟)·
경릉(敬陵)에 친히 제사하여, 황백고라 일컬었은즉,
종묘(宗廟)나
의묘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제 황백고라 일컬어서 부묘함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신 등이 생각하기에는,
회간 대왕(懷簡大王)은
세조조(世祖朝)에 있어서 이미 세자(世子)로 봉(封)하였은즉 안으로는 계승(繼承)한 바가 있고, 황제(皇帝)가 특히 고명(誥命)을 내려 주었은즉 위로는 주품(奏稟)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친자(親子)로써 대통을 계승하셨으니, 이치에 부묘(祔廟)함이 마땅하거든, 더구나
예(禮)에 대부(大夫)는 제후(諸侯)에 부묘(祔廟)할 수 없다는 글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월산 대군(月山大君)이 봉사(奉祀)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하고,
서거정(徐居正)·
권감(權瑊)·
유자광(柳子光)·
정난종(鄭蘭宗)·
이봉(李封)은 의논하기를,
“남의 후사(後嗣)가 되면 사친(私親)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천하(天下)의 공의(公義)이요, 만세(萬世)토록 바꿀 수 없는 정론(正論)입니다.
한(漢)나라의
광무(光武)가 중흥(中興)한 것은 친히 천하(天下)를
한나라에서 받은 것이 아니었으나, 그러나 모두
유씨(劉氏)의 통서를 계승한 까닭으로,
남돈령(南頓令) 이상은 별도로 입묘(立廟)하고,
선제(宣帝)는
도원(悼園)을 설치하였으며,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이
복원(濮園)을 설치한 것도 또한 그 어버이를 사사로이 할 수 없음이었습니다.
복왕(濮王)을 의논하였을 때를 당하여, 대유(大儒)
사마광(司馬光) 등은 ‘어버이라 일컬을 수 없다.’ 하였으나,
구양수(歐陽脩)·
한기(韓琦)만이 유독 어버이라 일컬을 것을 의논하였는데, 부묘(祔廟)의 의논을 거의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물론(物論)이 이를 그르다 하였으니, 어버이라 일컫는 것도 오히려 불가하거늘, 하물며 부묘하는 것이겠습니까? 옛사람이 남의 후사가 되면 사친(私親)을 돌아보지 아니함은 천하(天下) 만세(萬世)를 위하여 깊이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가령 방지(旁支)로 입승(入承)한 자가 백숙(伯叔)의 사이가 아니고 기공(期功)의 소원(疎遠)한 친족이었다면, 그 아비, 그 할아버지, 그 증조(曾祖)를 추존하여 한결같이 모두 부묘(祔廟)하게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미
예종(睿宗)의 뒤가 되었으니, 이것은 대종(大宗)이고,
회간(懷簡)은 소종(小宗)이 되니, 어찌 소종이 대종과 합하여 부묘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제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
회간(懷簡)은 이미 명(命)을 받아 세자(世子)가 되고, 또 명을 받아 추봉(追封)되었으니, 그 부묘하는 데 있어 어찌 옳지 못함이 있겠는가?’ 하지만, 신 등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청명(請命)하여 추봉한 이것은 일시(一時)의 현양(顯揚)한 정성[誠]이고, 남의 후사가 되면 사친(私親)을 돌아보지 못하는 이것은 천하(天下)의 공의(公議)이니, 어찌 일신의 권의(權宜)로써 천하의 공의를 폐(廢)하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는 벌써
예종에게 황고(皇考)라 일컬었고,
회간왕에게 백고(伯考)라고 일컬었으나, 만약
회간을 부묘한다면 한다면 백고라 일컬은 것이 옳지 못하고, 아울러 황고라고 일컫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합니다. 이제
회간을 부묘한다면 이미 자기의 어버이가 된 것이니, 어찌 어버이를 가지고 백(伯)이라 하고 질(姪)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모두 고(考)라고 칭한다면 천하(天下)에 양존(兩尊)하는 의(義)가 없고, 만약 차서(次序)를 논할 것 같으면
회간이 비록 이라 하더라도 명(命)을 받은 것은 뒤에 있었으니,
예종의 위에 차례함은 옳지 못하며,
예종이 비록 천위(踐位)함이 먼저 있었다 하더라도
회간이 하루도 북면(北面)함이 없었으니,
예종의 아래에 차례함도 옳지 못합니다.
회간의 서차(序次)는 위에도 아래에도 또한 모두 편안하지 못하니, 전하께서 존친(尊親)하는 대효(大孝)는, 이미 위호(位號)를 추숭하시었으니 반드시 부묘(祔廟)를 해야만 성경(誠敬)을 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저 사대부(士大夫)가 남의 후사가 되어서 가묘(家廟)를 세워도 오히려 사친(私親)을 부제(祔祭)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묘(宗廟)의 중(重)함과 소목(昭穆)의 차례[序]를 그 근엄(謹嚴)하게 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신 등은 부묘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고 여겨집니다.”
“
회간 대왕(懷簡大王)은 이미 세적(世嫡)으로 천자(天子)의 명복(命服)을 받으신 것이 여러 해 전이었고, 이제 천자(天子)가 또 아름다운 칭호를 내려 주고, 은혜를 주어 왕(王)으로 삼았으니, 신 등은 생각하기를, 마땅히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여 길이 효도의 향사(享祀)를 받아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혹은 이르기를, 만약 부묘(祔廟)한다면 마땅히
예종(睿宗)의 위에 부(祔)하여야 하니, 제사를 거슬러 한다는 의논이 없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나, 신 등의 생각으로는,
회간 대왕은
예종에게 적형(嫡兄)이 되니, 위(位)로써 하면 높음[尊]이 같고, 또
예종에게 일찍이 1일이라도 군신(君臣)의 관계가 있지 않았으니,
민공(閔公)·
희공(僖公)이 군신(君臣)의 위(位)를 바꾼 것과 같은 예(例)가 아닙니다. 혹은 이르기를, ‘부묘하게 되면 어떤 어버이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하냐?’ 하겠지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후사가 된 쪽을 부모(父母)로 삼고, 낳아 준 이를 백숙부모(伯叔父母)로 한다.’ 하였으니, 이는 천지(天地)의 대의(大義)요, 생민(生民)의 대륜(大倫)이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이미
예종(睿宗)의 뒤를 계승하였은즉,
예종은 한 부모(父母)가 되고,
회간왕(懷簡王)은 낳아 준 부모가 됩니다. 또
회간(懷簡)에 대해서는
세종(世宗)이
공정왕(恭靖王)에게 대한 것과 같습니다.
세종이
공정을 칭하여 백고(伯考)라고 하였은즉 이제
회간을 칭하여 백고가 된다는 것은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혹은 생각하기를 남의 후사가 된 자는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으니, 이제
의묘(懿廟)를 추봉(追封)하여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는 것은 두렵거니와 혹 불가(不可)한 것이 아닌가 하나, 신 등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추숭(追崇)한 것은 이것이 전하의 망극(罔極)한 효도에서 나온 것이며, 천자가 준 총명(竉命)은 달리 예(禮)를 뛰어넘고 의(義)를 무릅쓴 것이 아니라, 낳아 준 이를 후(厚)하게 한 데에 비할 것입니다. 또 천자가 이미 명하여 왕(王)이 되었은즉, 대군(大君)이 효자(孝子)라 일컫고서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예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정의[情]에 미안(未安)한 바이며, 진실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백고라고 칭한다면 부묘(祔廟)하는 것과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혹 이르기를,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사황손(史皇孫)을 일컬어 황고(皇考)라 하고,
애제(哀帝)가
정도왕(定陶王)을 황(皇)이라 일컬은 것은 모두 당시에 비평을 당하고 후세에 기롱을 끼치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저들은 모두 소종(小宗)으로 대종(大宗)을 어지럽힌 것입니다. 또 아들이 아비에게 작위(爵位)를 주는 의(義)가 없는 것입니다.
회간왕(懷簡王)은 본시 정적(正嫡)으로서 이미 제명(帝命)을 받아 세자(世子)가 되었고 제명을 받아 왕(王)이 되었으며, 전하께서는 빛나게 대통(大統)을 계승하였은 즉 저
사황손(史皇孫)·
정도왕(定陶王)으로 더불어 사체(事體)가 절대로 같은 유(類)가 아니거늘, 하물며 이제
인수 왕후(仁粹王后)도 또한 제명을 받아 왕비(王妃)가 되었으니, 어머니로서 일국(一國)에 임(臨)하였으면 만세(萬世)한 뒤에도 또한 부묘(祔廟)함이 없겠습니까?”
하고, 이계전(李季專)은 의논하기를,
“부묘(祔廟)하는 의논은 신의 척박한 식견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우나, 마땅히 옛것을 참작하고 이제 것을 준거로 하여, 중의(衆議)를 좇는 데 있을 뿐입니다. 신은 아조(我朝)의
문소전(文昭殿)은 곧 예전의 원묘(原廟)라 여깁니다. 생시(生時)를 형상하여서 설치하였으니,
종묘(宗廟)의 소목(昭穆)과 같이 위차(位次)를 정하여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상례(常例)와 같지는 않습니다. 가령 위차를 더하더라도 이는 권도(權道)이므로 중도를 잃지 않는 것이니,
회간왕(懷簡王)을 아직은
문소전(文昭殿)에 부제(祔祭)하여 주상(主上)의 추모(追慕)하는 정성을 펴심이 어떻겠습니까? 신은 또 상고하건대,
한(漢)나라 경제(景帝)가
고황제(高皇帝)를 존숭하여
태조(太祖)를 삼고,
문황제(文皇帝)로
태종(太宗)을 삼아, 군국(郡國)으로 하여금
태종묘(太宗廟)를 세우게 하니, 승상(丞相)
신도가(申屠嘉) 등이 아뢰기를, ‘공(功)은
고황제(高皇帝)보다 더 큰 이가 없고, 덕(德)은
효문 황제(孝文皇帝)보다 더 성(盛)한 이가 없으니,
고황제는 마땅히
태조(太祖)의 묘(廟)가 되고,
효문 황제는 마땅히
태종(太宗)의 묘가 되어야 하니, 천자께서 대대[世世]로 조종(祖宗)의 사당[廟]에 제사를 드리고 군국(郡國)에서는 각각
태종묘(太宗廟)를 세우게 하소서.’ 하자, 제서(制書)하기를, ‘옳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공덕(功德)은 비록 잊을 수가 없더라도 은혜도 또한 폐(廢)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니, 빌건대 팔도(八道)의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한 고을에 별도로
회간왕(懷簡王)의 묘(廟)를 세우게 하고, 겸하여 영정(影幀)을 안치하여 사시(四時)에 향사(享祀)하고, 만세의 사람으로 하여금 주상(主上)을 낳아 준 임금을 알게 하여, 인심(人心)을 정하고 만세에 전(傳)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 있어서
공정 대왕(恭靖大王)에게 황백고(皇伯考)라 칭하고,
공정 대왕(恭定大王)에게 황고(皇考)라 일컬어 한가지로 일실(一室)로 하여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였으니, 이제
회간 대왕(懷簡大王)을 추존(追尊)하여 황백고(皇伯考)라 칭하고,
양도 대왕(襄悼大王)을 황고라고 일컬어 한가지로 일실로 하여 부묘(祔廟)한다면 후사(後嗣)가 된 의리[義]와 어버이를 선양(宣揚)하는 정의[情]를 병행(竝行)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
예(禮)에 이르기를, ‘남의 후사가 된 자는 그의 아들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예종(睿宗)을 고(考)라 하며, 대통(大統)이 이미 정해졌으니, 부묘(祔廟)하는 것은 미편합니다.”
하고, 황효원(黃孝源)은 의논하기를,
“
회간왕(懷簡王)은 이미 천자(天子)의 명(命)을 받아 세자(世子)가 되었고, 또 천자의 명으로써 임금으로 봉(封)하였으니,
종묘(宗廟)에 입부(入祔)하는 것은 하거늘, 하물며
예(禮)에, ‘대부(大夫)는 제후(諸侯)에 부제(祔祭)할 수 없다.’는 글이 있지 않습니까? 천자가 곧 세자(世子)로 봉(封)하였고 왕(王)으로 봉하였으니, 전하께서 대군(大君)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함은 의(義)에 미안(未安)함이 있습니다.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소재(所在)함이
예(禮)의 당연한 것이니, 신은 부묘(祔廟)하는 것이 편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칭호(稱號) 같은 것은 친제(親祭) 때에 이미 정하여졌으니, 감히 다시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듣건대,
예(禮)에, ‘대부(大夫)는 제후(諸侯)에 부제(祔祭)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존비(尊卑)의 의(義)를 명백히 한 것입니다.
회간 대왕(懷簡大王)은 일찍이 동궁(東宮)에 정위(正位)하였고, 또 제명(帝命)을 받아 왕이 되었은즉, 의(義)로는 마땅히 부묘(祔廟)하여야 하는데, 이제 별묘(別廟)에 향사하여 대부(大夫)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면 이는 왕자(王者)의 예(禮)로써 받드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뜻으로 생각하기에는 황백고(皇伯考)라 칭하여 부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아들이 되니, 의(義)에 있어 사친(私親)을 돌보지 못하는 것은 대종(大宗)을 높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성(天性)의 어버이도 또한 지중(至重)하여, 사은(私恩)을 다 끊을 수 없는 까닭으로, 역대(歷代)의 제왕(帝王)으로서 방지(旁支)에서 입계(入繼)한 자는 거의 모두가 사친을 추존(追尊)하여 혹 황(皇)이라 칭하고, 혹 황제(皇帝)라고 칭하였으나, 부묘(祔廟)함에 이르러서는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회간 대왕(懷簡大王)은 비록 추존하여 왕이 되었다 하더라도 부묘하지 못한 것은 이 뜻에 연유함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써 의논하건대, 만약 천자(天子)의 명(命)이 없었다면 부묘의 여부(與否)는 진실로 용납하여 의논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천자가 특별히 홍은(鴻恩)을 내려, 추봉(追封)하여
조선 국왕(朝鮮國王)을 삼고,
회간(懷簡)이라 사시(賜諡)하여 작명(爵命)의 대우[數]가 선왕(先王)과 호발(毫髮)의 다름이 없으니, 선왕(先王)으로 더불어
종묘(宗廟)에 병렬(竝列)하여 왕자(王者)의 대례(大禮)로써 향사함이 옳은 것인데도 그대로 별묘(別廟)에 두고 선왕(先王)으로 더불어 병렬(竝列)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천자는 명하여
조선왕(朝鮮王)을 삼았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왕의 예(禮)로써 높인 것이 아니니, 신자(臣子)의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혹은 ‘소종(小宗)으로 대종(大宗)에 합할 수는 없다.’고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한(漢)나라 애제(哀帝)와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이 모두 소속(疎屬)으로써 대통(大統)을 입계(入繼)하였고, 또 위에 있는 사람이 작명(爵命)을 내리지 아니하였으니, 그 아비를 추존하여 왕으로 삼은 것은 곧 사사로이 스스로 높인 것이어서 뜻을 정통(正統)에 오로지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회간왕(懷簡王)은
세조(世祖)의 적자(嫡子)로서 청명(請命)하여 세자(世子)가 되었은즉 진실로 소속(疎屬)에 비유할 것이 아니며, 또 천자가 봉(封)하여
조선 국왕을 삼았은즉 스스로 높인 데에 비유할 것이 아닙니다. 또 중원(中原)에서 예(禮)를 의논한 대신(大臣)이, 어찌 후사가 된 자는 사친(私親)을 돌아보지 못한다는 의(義)를 알지 못하고서 추봉(追封)하여 왕을 삼았겠으며, 또 어찌 왕을 봉(封)하였다면 마땅히 왕의 예로써 높이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바로 감히 왕을 봉하였겠습니까? 혹은 이르되, ‘번왕(藩王)의 청(請)이라
중국에서 반드시 예의(禮義)로서 절충하지 않았다.’고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가 봉(封)함을 받은 이래로 대대로 예의(禮義)를 지키었고,
중국도 또한 예의를 지키는 나라로 대우하기를 매우 중히 하였으며, 모든 번국(藩國)의 우두머리에 두었은즉, 이제 추봉(追封)하는 명(命)이 또 어찌 우리 나라를 낮추어서 경솔하게 근거없는 일을 하였겠습니까? 또 임금의 일은 반드시 기록하여야 하는데, 기록하고서 법이 될 게 없으면 후사(後嗣)가 무엇을 본보기로 삼겠습니까? 반드시 감히 아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혹은 이르되, ‘예전 제왕이 그 사친을 높이었다는 자는 들었지마는, 부묘하였다는 자는 듣지 못하였다.’고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한(漢)나라의
선제(宣帝)가 아비
사황손(史皇孫)을 추존하여
도황고(悼皇考)를 삼아, 원읍(園邑)에 두고 침묘(寢廟)를 세웠으나,
태묘(太廟)와 도궁(都宮)의 제도[制]는 없었습니다. 원침(園寢)은 곧 묘(廟)입니다.
《위현성전(韋玄成傳)》에 이르기를, ‘
고조(高祖)로부터 아래로
선제와 태상황(太上皇)·
도황고(悼皇考)에 이르기까지 각각 능(陵) 곁에 묘(廟)를 세우고, 또 각각 침(寢)이 있고, 편전(便殿)이 있었는데, 침(寢)에서는 일제(日祭)를 하고, 묘(廟)에서는 월제(月祭)를 하고, 편전(便殿)에서는 시제(時祭)를 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지금의
종묘(宗廟)는 장소[處]를 달리 하고 있어 소목(昭穆)이 차례가 없으니, 마땅히 고조묘(高祖廟)에 들어가서 소목(昭穆)이 예(禮)와 같게 하되, 태상황(太上皇)·
효혜(孝惠)·
효문(孝文)·
효경(孝景)의 묘(廟)는 모두 친진(親盡)하였으니, 마땅히 훼철하여야 하고, 황고묘(皇考廟)는 아직 친(親)이 다하지 아니하였으니 옛과 같이 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선제(宣帝) 이후는 모두
도고(悼考)로써 친묘(親廟)에 서열(序列)하여 제사해서 그 소목(昭穆)의 서열에 끼였음이 분명합니다. 후세의 명군(明君)은
선제와 같은 이가 없었으며, 당시에는 현신(賢臣)으로서
병길(丙吉)·
위상(魏相) 같은 자가 전후(前後)하여 서로 바라볼 정도였으니, 어찌
《예경(禮經)》에 기재된 것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만 감히 이렇게 한 것은 또한 인정(人情)에 연유하여서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뒤에
위(魏)나라 장제(莊帝) 같은 이는 아버지
팽성왕(彭城王)을 추존하여 황제(皇帝)로 삼아서 입묘(入廟)하였고,
고려(高麗)의
성종(成宗)은 아버지를 추존하여
대종(戴宗)이라 하고서 부묘(祔廟)하였습니다.
장제는 쇠퇴한 말엽의 임금이니, 진실로 족히 말할 것이 없지만,
성종은 바로
고려의 현왕(賢王)이니, 이로써 말미암아 보건대, 그 사친(私親)을 추존하여서 부묘한 것은 일찍이 있지 않은 것이 아니거늘, 없다고 이르는 것은 특히 상고하여 살피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혹 이르되, ‘부묘하면 마땅히 어떤 어버이라고 일컬어야 하느냐?’고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어버이[親]라고 일컫고, 백부(伯父)라고 일컫는 의논은
송(宋)의
복왕(濮王)에 이르러서 극진하였다고 여겨집니다.
사마광(司馬光)·
왕규(王珪)·
여회(呂誨) 등은 낳아준 부모를 일컬어 백고(伯考)라 하려 하였고,
한기(韓琦)·
구양수(歐陽脩) 등은 어버이[親]라고 일컬으려고 하여, 서로가 헐뜯다가
왕규 등이 축출당한 뒤에야
복왕의 의논이 정지되었습니다. 이제 백고라고 일컫는 말을 상고하면, 스스로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그의 아들이 된다는 일설(一說)을 지어냈을 뿐입니다.
《예경(禮經)》에는 본시 낳아준 아버지를 일컬어 백고(伯考)라 한다는 설(說)이 없거늘, 하물며 역대(歷代)에 방지(旁支)로써 대통(大統)을 계승한 자는 모두 낳아준 아버지를 일컬어 황고(皇高)라 한 것이겠습니까? 비록
선제(宣帝)·
광무(光武)처럼 명철한 이로써도 오히려 감히 개칭(改稱)하지 못하였은즉, 다만 의논하는 자가 정론(定論)이 없이 분분(紛紛)하게 떠드는 것이지 실지로는 일찍이 백고(伯考)라고 칭한 이가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므로
구양수는 그 황백(皇伯)이라 일컬어야 한다는 것은 전세(前世)를 역고(歷考)하건대 모두 전거(典據)가 없다 하였으며,
구양수의 이 말은 고의적으로 이기기를 좋아하여 한 말이 아니라 이에 실지를 근거하여서 말한 것이었습니다.
사마광·
구양수는 모두
송(宋)나라의 명신(名臣)이며, 문장(文章)·덕행(德行)은 서로 우열을 논할 수 없는데도 그 말이 같지 아니한 것은 각각 소견(所見)이 있었을 뿐입니다. 당시에
구양수를 지목하여 사설(邪說)이라 한 것이 어찌 공론(公論)이겠습니까? 그러나
정자(程子)도 또한 마땅히 백숙부모(伯叔父母)라 일컬어야 한다고 하였은즉, 이는 진실로 의심할 만한 것이며, 그리고
증자고(曾子固)가
복왕(濮王)의 의논을 논(論)하며, 또 이르기를, ‘집정(執政)이 왕(王)을 일컬어 고(考)라고 한 의논이 옳으며, 왕을 일컬어 백(伯)이라고 하려 한 것은 고루하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두 가지로 말한 것은 각각 그 사사로운 뜻만 따르고 서책에서 근거를 상고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모두 배우지 못한 허물인즉,
증자고의 말은 곧
구양수의 뜻입니다. 범인(凡人)으로부터 보면, 누가
정자(程子)의 말을
증자고(曾子固)보다 낫다고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주자(朱子)가
《강목(綱目)》을 수찬함에는
정자의 말을,
선제(宣帝)가
도고(悼考)를 추존(追尊)하였다는 〈글의〉 아래에다 붙이었고,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찬수함에는
증자고의 말을
여회(呂誨)의 기록에다 붙이었으니, 그 두가지 설(說)을 다 두고서 산제(刪除)하지 않은 것은 대개 감히 저를 버리고 이를 취하지 못하고 뒤의 공론(公論)을 기다린 것이거늘, 하물려
여회가
구양수를 가리켜 간사하다고 하여, 시종 탄핵하고 공격한 것이겠습니까?
주자(朱子)가
증자고의 말을
증자고의 기록에 두지 않고,
여회의 기록에다 붙인 것은, 어찌
여회의 의논이 정(情)에 지나친 말이라고 여겨 은근히 그 억제하는 뜻을 보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말하면 비록, 별묘(別廟)에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고(考)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하거든, 더구나 부묘(祔廟)하고서 백(伯)이라고 일컫는 것이 옳겠습니까? 혹은 말하기를, ‘
예종(睿宗)은 어떤 어버이[何親]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한가?’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회간왕(懷簡王)의 제례(祭禮)는 대저
복왕(濮王)에 의하여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영종(英宗)은 어려서부터 궁중(宮中)에서 자랐고 봉(封)하여 태자(太子)가 되었은즉,
영종은
인종(仁宗)에게 은의(恩義)가 중합니다. 이제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계승한 것은 바로 일시(一時)의 공의(公議)로써 결정이 된 것이니, 어찌
영종(英宗)으로 더불어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감히 먼 역대(歷代)의 일을 인용하지 못하고 우선 우리 조정으로써 이를 밝힙니다.
공정왕(恭靖王)은 일찍이
태종(太宗)을 봉(封)하여 세자(世子)로 삼고, 일찍이 선위(禪位)한다고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태종은
공정에게 백(伯)이라 칭하였고,
세종(世宗)은 백고(伯考)라고 칭한 것은 천륜(天倫)의 지친(至親)으로 정(情)에 인연하여서 일컬은 것입니다. 이제
예종(睿宗)에게 백고(伯考)라고 칭하고
회간왕(懷簡王)에게 황고(皇考)라고 칭하여서 아울러
종묘(宗廟)에 향사하면, 이는 이것을 중히 하고 저것을 가볍게 하여 정통(正統)의 높임을 훼손함이 아니고, 진실로 천륜에 순(順)하여서 인정(人情)에 합당함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의논하는 자가, 이미
예종을 황고라고 일컬었는데, 도리어 백고(伯考)라고 일컫는 것은 깊은 의심을 이룬다고 하겠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회간왕은 천성(天性)의 어버이인데도 전일에 오히려 백고(伯考)라 개칭(改稱)하였고,
예종은 의(義)로써 합한 자이니, 이제 다시 백고라고 칭한들 또 무엇이 어렵습니까? 또 후사가 된 자는 아들이 되는 것인즉 친속(親屬)의 존비(尊卑)를 돌아보지 않고 모두 고(考)라고 일컬어야 하는데,
당(唐)나라 예종(睿宗)은
중종(中宗)을 백(伯)이라 일컬었고,
송(宋)나라 태종(太宗)이
태조(太祖)에게 백이라 일컬은 것은 형제(兄弟)로서 서로 뒤가 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형제(兄弟)의 지친(至親)도 오히려 개칭(改稱)하기가 어려운데, 부자(父子)의 중함에 이르러서 바로 백(伯)이라고 고치어 일컬음은 또한 도리어 가벼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唐)나라의
선종(宣宗)은
목종(穆宗)에게는 아우[弟]이며,
경종(敬宗)·
문종(文宗)·
무종(武宗)에게는 숙(叔)인데, 그 당시의 축문(祝文)에 감히 아무의 어버이[某親]가 된다고 일컫지 못하고, 다만 사황제(嗣皇帝)라고 일컬었으니, 이제도 또한 이에 의할 것입니다.
공정(恭靖)과
문종(文宗)도 모두 칭한 바가 없으니, 만약
예종(睿宗)을 개칭(改稱)하기가 어렵다면, 다만 사왕(嗣王)이라고만 일컬어서 제향하는 것도 또한 무방(無妨)하겠습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승소(李承召)는 당시에 금옥 군자(金玉君子)라고 일컬었는데, 부묘(祔廟)하는 의논에 이르러서는 오직 아첨하는 데에 힘쓰고 하여, 도리에 어그러지는 궤론(詭論)이 아닌 것이 없으며, 회간왕(懷簡王)을 황고(皇考)라고 칭하고, 예종(睿宗)을 황백고(皇伯考)라고 칭하려는 데에 이르렀고, 또 당(唐)나라의 선종(宣宗)이 문종(文宗)·무종(武宗)에게 한 것을 따라, 단지 예종 대왕(睿宗大王)이라고만 일컫고, 고(考)라고 일컫지 않으려 하였으니, 어긋나고 망령됨이 더욱 심하였다. 평생(平生)의 학문이 쓸어버린 듯이 되었으니, 진실로 괴이하다 할 수 있겠다. 정인지(鄭麟趾)는 그 의논한 말을 보고는 이르기를, ‘이승소는 평소의 명망이 이와 같지 않거늘, 어찌 사설(邪說)이 여기에 이르렀는가?’ 하였다.”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9책 265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 / *정론(政論)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