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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 03 마 5:4 애통하는 자의 복 찬송: 88, 91장
우리는 지난 두 주에 걸쳐 천국 헌법인 팔복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주어졌는가, 그리고 그 첫 번째인 “심령이 가난한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헌법이 지시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수준은 이것이다’를 말씀하셨다는 것이었다. 즉, 천국 백성의 자격은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여덟 가지의 복된 증상이 그 마음에서부터 한없이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요구를 지켜 낼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팔복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돌아보고, 그 삶을 이 팔복에 맞추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난주에 ‘심령의 가난함’은 소유의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자존심을 꺾은 상태임을 살펴보았다. 천국 백성에게 ‘심령의 가난함’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십자가에서 버리신 그 죽음을 본받아, 자기를 죽이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생각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심령의 가난함’ 다음에 ‘애통할 것’에 대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심령의 가난함이 시작이 되어, 이에 근거하여 애통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심령의 가난함’은 내 것을 전혀 내세울 수 없는 상태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에는 슬픔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비어 있는 상태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비어 있음 뒤에 하나님께서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상태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바라봄은 무한하신 하나님 존전에 있는 나의 허무함을 깨닫게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다.
따라서 애통이란 자기 자신을 올바로 인식하고 자각한 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어 있음을 바라볼 때, 하나님으로 인해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자각이다.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의 수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준에 자기가 얼마나 도달하지 못했는가를 실감하고, 이 거리가 좁혀질 수 없다는 것으로 탄식하는 증상이 바로 ‘애통’이다.
성경에 나타난 애통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를 잃었을 때 느끼는 자연적 애통, 가룟 유다의 애통처럼 죄로 말미암은, 쓸쓸하고 서글프지만 회개함이 없는 애통,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경건한 슬픔’인 은혜로 말미암은 애통이다. 이 세 가지 애통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회개를 동반하지 않는 애통이기에 천국의 기준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심령이 가난하여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슬픔을 느낄 수 있고 회개할 수 있는 자만이 천국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번째 애통만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이 ‘경건한 슬픔’인 애통은 또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시 51:9-11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이 시편은 다윗의 시로, 충성스러운 부하인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하고 그 부하를 전장에 보내 죽이는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희희낙락할 때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 죄를 지적받고 한없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고백한 시이다.. 그래서 이 시편에는 다윗의 참담한 심정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죄를 지어놓고도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았던 자신에게 놀라며 '내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죄’라는 고백을 이 시에 그대로 담아 놓고 있다. 이것은 내 안에 죄가 가득 들어 있으니 감히 하나님 앞에 자랑은 커녕, 하나님 존전에 무릎 꿇고 기어서도 올 수 없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주여, 내 죄를 보지 마시고 내 속에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다윗은 애통을 통해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 즉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인 것을 깨닫는 고백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를 지키기에 우리가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한탄이며, 내세울 것이 전혀 없이 오직 죄뿐인 마음으로 나아올 때 하나님만 의지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애통이라는 것임을 알려 준다. 따라서 성령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첫 번째 애통은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자각함으로 느끼는 슬퍼함과 하나님 앞에 자비를 호소하는 죄를 회개함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롬 7:21-24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마음속에 있는 갈등을 통해 애통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조차도 이러한 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볼 수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는 그 바울이 여전히 그 마음에 죄의 법이 존재하여 곤고함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보라. 물론 이것은 바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존재하는 애통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여전히 사탄의 통치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이 겪는 갈등인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그 마음에서 싸우는 것을 느끼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비탄에 빠진다.
따라서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애통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그것을 이길 힘이 내 안에 없음을 깨닫고, 내가 주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자각과 함께 나의 두 손을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여 도와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참된 회개가 이 애통함을 통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애통은 세상의 자랑과 자부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붙들게 한다.
셋째, 시 119:136-139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개인적인 애통을 넘어서서 사회적으로 타인을 향한 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율법을 찬미하는 찬양시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며 지키는 자의 기쁨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시인이 자기의 율법 사모함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향한 갈망 또한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율법 안에 들어오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그 말씀대로, 요구하는 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복된 길일진대, ‘왜 이것을 모르고 다른 길로 가고 있느냐’는 간절한 애원인 것이다. 얼마나 이러한 상황이 안타까웠으면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라는 말을 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인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않는 자’, ‘주의 말씀을 잊어버린 자’를 향해 애통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세 번째로 시편 119편에서 말하는 애통은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죄악과 불의로 가득한 것을 슬퍼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지금 세 가지 애통의 종류를 살펴보았다. 죄를 지었지만 죄를 깨닫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애통,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공존하여 곤고해하는 애통, 그리고 사회의 불의를 향한 슬픔과 안타까움으로부터 생겨나는 애통이다. 이 세 가지를 통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엎드리어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과 함께 자신과 타인을 향한 도우심을 호소하며 애걸하는 것이 애통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애통’은 죄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샘솟아난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반역하고 원수가 되었던 것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영혼에 진실이 결핍된 것에 대한 애통이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죄악에 대한 애통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통은 언제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느끼는 마음과 같이 생겨난다. 즉 ‘심령의 가난함’으로 자기의 자존심을 꺾은 자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죄인 된 모습을 보이는 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의 긍휼과 자비만이 나를 살릴 수 있나이다.’를 고백하며 자기 자신과 타인을 향해 애통하는 자로 나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 ‘애통’은 처음 회개했을 때나 아니면 무언가 큰 잘못을 했을 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애통하였던’이 아니라 ‘애통하는’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애통해야 할 일이 늘 있다는 것, 즉 하루하루의 삶이 애통하는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렇다면 왜 이런 애통이 계속되는가?
지나온 인생을 잠시 회고해 보라.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절망과 한숨 때문이다. 만일 우리에게 좌절과 고통, 애통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울게 하셨고 한숨짓게 하셨고 애통하게 하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생각하게 되었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값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지은 죄만큼 계속해서 벌을 내리지 않으신다. 여기에 대한 증거는 바로 십자가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 5:8)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으셨다. 우리에게 죄값을 치르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회개요, 상한 심령이다. 죄값을 치르라는 것이 아니다. ‘돌이켜라. 너희가 하나님을 버리고 너희 욕심대로 네 멋대로 갔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께 돌아오라. 하나님에게서 떠났던 마음을 돌이키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길에서 돌이키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존귀와 영광으로 관 씌우려고 우리를 훈련시키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위하시고 복주시기 위해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 세상이나 가정에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아주 많이 있으므로, 위로를 받기 위해 교회에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중에 복음으로부터 오는 위로, 애통하는 마음에 주시는 위로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형식은 보이나 그 내용은 없는 껍데기 신앙인이 너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셔서 나로 하여금 애통하게 하시고 그 애통을 통하여 나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위로요, 가장 큰 복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가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살아가면서 느끼고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애통하는 마음을 통하여 나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데, 그 깨달음은 바로 하나님의 위로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즉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위로라는 가장 큰 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애통하는 자이며, 이 애통함에 하나님의 위로가 언제나 우리를 감싼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애통하는 자답게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능히 도와주실 수 있는 분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삶을 살아감으로 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가득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이런 귀한 성도가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