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옥 수필집
[땅에서 빛나는 달] (우인북스 2022)
수필로 그린 수채화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다. 윤재천 교수는 수필은 붓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며 삶의 진실한 고백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수필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수필집 한 권을 읽으면 작가의 자서전을 읽는 것과 맞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그만큼 작가를 충실히 드러내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천득은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隨筆이라고 했지만 이방주 평론가는 수필은 붓을 잘 닦아서 쓰는 修筆이라고 말한다. 일상의 모든 雜事가 수필의 소재로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붓을 잘 닦아 정제된 언어, 심미적인 감성으로 쓴 글이라야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다.
작가 김산옥의 문체는 화려하진 않지만 어느 한 군데 걸리는 곳이 없이 물 흐르듯 흐른다. 붓을 잘 닦은 흔적이 역력하다. 잘난 체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지도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전하는 속삭임이다. 그만큼 솔직하다. 솔직함 때문에 독자로부터 더욱 공감을 얻는다.
<아깝지 않아>에서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 우렁각시가 되어 살았’던 작가는 ‘내 수고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하는’ 가족이 은근히 섭섭하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조건 없이 살아온 그 길이 싫증이 나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진다’고 고백한다. 왜 아니겠는가. 아무리 현모양처라 하더라도 중년의 여성이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생각이다.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명품 스카프를 보면서 ‘이 나이 먹도록 검소하게 살아왔으니 까짓거 하나 나에게 선물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뇌까리면서도 선뜻 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순전히 오기였다>에서는 명절 준비를 하다말고 허접한 차림새로 지름신을 대동하여 자기보상을 위해 명품 가게를 찾는다. 그곳에서 만난 경제권을 남편에게 빼앗긴 명품녀에게 던진 말, ‘난 내가 힘들 때마다 나를 위해 선물을 해요.’라며 호기롭게 말한다. 그날의 지름에 대한 대가를 앞으로 전전긍긍하며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게 하는 대목이다.
자아로 회귀의 긍정적 수용
우리는 들에 있는 돌이나 꽃을 무심코 지나치다 어느 날 문득 그들로부터 경이로움을 발견할 때가 있다. 돌이나 꽃이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데 보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성스러움이 깃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중년의 여인으로서 작가 역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그냥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다. 어느 날 말하려고 하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거’라는 대명사를 자주 쓰게 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이 듦에 대하여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가득 담아두었던 생각을 덜어내 뇌를 가볍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긍정적 수용의 자아 발견이다.
내 자리인 양 늘 앉아있던 식탁의 한쪽 ‘그 자리’는 벗어나고 싶지만 결국 도로 찾게 되는 자리다. 그 자리는 착한 며느리병, 착한 아내병, 착한 천재병이라는 지나친 배려가 만들어낸 스스로 자처한 고생의 자리였음을 깨닫는다. 나 스스로를 옭아매며 살았던 <그 자리>를 이제 미련 없이 버리고 자신을 향해 걸어가려 한다. <물갈이>에서는 변화를 싫어하는 남편에 맞서 과감하게 집 안 분위기를 바꾸고 나서 스스로 대견해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물갈이는 결국 견고한 장벽에 도전하는 자신에 대한 물갈이였다. 귀촌을 꿈꾸어 온 작가는 현실적으로 이루지 못하는 꿈을 이 책의 표지 사진인 커다란 그림 액자를 집 안으로 들여옴으로써 귀촌을 대신한다. 작가는 이렇게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이 아니라 긍정적 수용을 택함으로서 독자들까지도 마음을 잔잔하게 만든다.
긍정적 자아 인식으로부터의 관계
자아의 발견과 존재의 확립은 관계를 아름답게 한다. 관계(關係)에서 관(關)은 본디 빗장을 의미하는 말로 빗장과 빗장을 연결해주는 것을 가리켜 관계라고 했다. 중국은 오랜 역사상 전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요새라는 의미로 관계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와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처세술이라는 의미로 변할 만큼 우리는 관계에서 많은 갈등을 겪기도 하고 이를 해소하면서 삶을 살아간다. 사람인 이상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빗장과 빗장을 연결하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든 관계의 중요성은 우리 일상에서 소홀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인간관계의 첫걸음은 자아의 인식이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긍정적인 사람은 관계에서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런 면에서 김산옥 수필가의 글은 따뜻하다. 소설처럼 격정적이거나 치열하지 않다. 잔잔한 호수 위를 노니는 백조처럼 고요하다. 그 안에서 사랑을 찾아낸다. 특히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애틋하다.
남편에게 세수를 받으며 느꼈던 손길을 병환 중인 시아버지에게 다시 되돌린다. 기어이 오고야 말 아버님과의 이별 앞에서, 며느리의 손끝으로 따뜻한 모성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들뜨지 않는 계절>에서는 딸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자식 앞에서 당당하게 큰소리칠 수 있는 어머니가 과연 얼마나 될까? 어머니들은 늘 자식에게 죄인 같은 느낌으로 산다. 마음껏 다해 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이다. 자식도 이제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어머니와 딸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사위가 좋아하는 호박잎 쌈을 위해 내리사랑을 전하는 장모님의 사랑은 ‘노란 호박꽃이 알 품듯 애호박을 안고 달빛처럼 등 밝힌다.’ 사랑의 등불은 ‘땅에서 빛나는 달’이 되었다. 작가는 가족에서뿐만 아니라 후배인 우렁각시에게서 사랑을, 도반의 언니에게서 받은 친절에서 더불어 사는 행복을 느낀다.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사랑으로 행복지수가 높아짐을 이 책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수필집 전체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따뜻하다. 앞만 보고 걸어온 길을 모퉁이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미소를 짓는 듯하다. 수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글맛이다.
구성의 새로운 시도
많은 수필이 유비(類比)구조를 갖는다. 동일된 하나의 주제를 위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서 현재의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방법, 또는 어떤 화제를 끌고 가다가 다른 화제로 전환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대부분 결미 부분에서 의미화 작업을 하면서 주제를 부각시킨다. 그런데 작품 <물갈이>와 <기로>에서는 주제가 같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서사를 나란히 병치하는 것으로 마쳤다. 작가의 해석 없이도 독자는 오히려 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갈이>에서는 덕천마을 주민의 반대급부에도 불구하고 개발을 감행하여 결국 ‘현대적이고 편리한 도시 하나가 탄생’하는 서사 ①과, 남편의 굳센 반대를 이겨내고 낡은 집을 수리한 결과 새롭게 태어난 집이라는 서사 ②를 나란히 병치함으로써 변화란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보여준다. <기로>에서는 초원의 누 떼가 이동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강한 모성애와, 어릴 적 일찍 엄마와 헤어졌다 뒤늦게 다시 만나게 된 친구의 이야기를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모성’이라는 주제를 부각시켰다. 두 개의 서사 사이에 아무런 장치가 없어도 독자는 자연스럽게 두 서사의 공통점에서 주제를 더 강하게 인식한다. 이러한 기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연상의 과정을 한 번 더 거치게 함으로써 흥미를 더한다. 작가의 새로운 구성 시도가 돋보인다.
<산옥이 나무>에서는 화자를 작가가 아닌 전나무로 설정하여 작가는 오히려 작품 속에서 옆으로 비껴앉는 방법을 구사하였다. 제재인 전나무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주제를 부각시키는 방법을 통해 수필은 화자가 작가 자신인 1인칭이라는 굴레를 벗어났다. 그래서 신선하다.
평이한 소재에서 얻은 삶의 수채화
김산옥 수필가의 [땅에서 빛나는 달]은 평범한 일상에서 소재를 찾아 일상의 언어와 잔잔한 목소리로 공감을 얻어낸다. ‘달 주변의 구름을 덧칠해 달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듯이 주제를 빛나게 하기 위한 소재는 대단한 것들은 아니지만 자신에게는 하나 같이 소중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의 발걸음에서 건져낸 소재들은 소박하고 친근하다. 수필은 자질구레한 소재를 가지고도 그 속에서 삶의 잔잔한 무늬를 그린다. [땅에서 빛나는 달]은 삶을 수필로 그린 한 폭의 수채화이다.
첫댓글 와, 수필에 대한 사색과
땅에서 빛나는 달을 꼼꼼하게 읽으셨군요.
평론도 잘 쓰십니다.
애쓰셨습니다.
처음 쓴 거라 많이 부족할 겁니다.
청탁을 받고는 솔직히 난감했는데 기회라 생각하고 용기를 냈습니다.
덕분에 공부 많이 했지요.
이방주 선생님의 평론 가운데 작가와 독자와의 징검다리가 되고싶다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삶을 수채화로 그려낸 새로운 시도의 수필작가를 만나보고 싶어지는 평론입니다. 감사합니다~잘 읽었습니다.
지식이 짧아 어렵고 고상하게 쓰지도 못 하지만 평론하는 사람과 작가만 알아들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진 않았습니다.
독자가 평론을 읽고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시도했습니다.
제 의도가 어느정도 읽힌 것 같아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평론에 입문하셨네요.
처음부터 좋은 글을 쓰셨네요.
김산옥 수필가의 수필집
《땅에서 빛나는 달》이미지도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투브 '글마당길 53'에서도 낭독했습니다
@강현자 이 분 작품으로는 서로 소통했던 분인데 이 책은 보내주지 않으셨네요.
김산옥 수필가님이 행운이시네요. 강샘이 이렇게 성심성의껏 리뷰를 해주시고 낭독까지 해주셨으니까요. 작가의 마음을 읽고 하나하나 꿰뚫어 보는 삶을 수필로 그린 한 폭의 수채화로 표현하신 부분이 너무 멋지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대선배님의 작품집을 감히 리뷰했습니다. 민망하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평론, 축하드립니다.
평론을 통해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섰는데, 성공하셨습니다.
감상 잘 했습니다.
김산옥 에세이 '땅에서 빛나는 달'을 한 권 읽으면 작가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눈에 선합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그분의 성격까지도 알 것 같은 느낌입니다.
강렬하지 않으면서 온화하게 다가오는 글의 분위기가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했습니다.
그 책을 읽고 싶네요.
리뷰 쓰는 강현자 쌤의 모습이 여러가지로 상상됩니다. 부럽네요.
에궁~ 어떤 모습을 상상하셨을까요?
난 애중샘의 행안부장관 표창 받는 것이 부럽고만요 ㅎㅎ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