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창작과 비평 당선작)
장마의 딸
손유미
장마는 당신
참 예쁜 당신의 이름
넌
내가 낳았을 리 없는 장마의 딸,
너만 오면 예보에도 없던 장마가 시작 돼.
이불이 마르질 않잖니
축축한 불행 위에서 자는 건 이제 지겹구나
흥건한 웅덩이를 보고 질색하는 나의 마미
이 배꼽이 당신과 닮았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나
장마는 내 의도가 아니에요
내 말은 듣지도 않는 나의 마미,
변(辨)을 하자면
나는 건조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태생이 질척질척이지만 배꼽은 잊고
쩍쩍 갈라진 틈으로 살고 싶었어요
발밑 사탕처럼
반짝,
밟히다
깨지고
부서져
알룩달룩한 설탕가루로 날아가는
그런 건조함을 매일 상상했습니다
1
(오늘은 얼굴이 내일은 이름이
나의 마미, 마침내 당신은 처녀로 돌아가는 거에요)
장맛비가 요란한 오늘, 우리
주니어의 역사를 새로 쓸까요?
이십년 전 번개가 내 배로 옮겨 붙던
그날을 기억해요
2
(2013 창작과 비평 당선작)
사과를 기다리며
전문영
1
할머니는 오래된 노래를 지우듯 화분의 잎을 닦는다
사과가 담겨 있던 스티로폼 망이 찢어지던 날
땅에 떨어졌던 사과는 모두 묻었다 그 자리를 더듬듯
할머니는 스티로폼 망으로 꽃을 만들어 가지 끝마다 매단다
사과는 이제 없는데 저 조그만 해먹 위에서 무엇이 쉬고 있는지
할머니는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2
어느 날 손가락들이 한 나병 환자를 두고 갔다
그것은 달밤의 계곡물 위로 사과가 떠내려가는 일과 같고
이후 그녀는 늘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사과를 영영 잃어버렸다고 말하면서도
혹시 진딧물이 기어오를까 두려워 발밑을 살피는 것이다
매주 목요일 내가 그녀의 등에 물을 끼얹으면
그녀는 안심한다 사과 먹는 벌레가 다 쓸려 내려간다고
샤워기를 등에 갖다 대면 그녀의 손등은 살짝 구부러진다
이제 막 사과를 쥐려고 하는 사람처럼
창문은 얼룩져 밖을 헤아릴 수 없고
그녀는 사과 같은 건 모두 놀이터에 있다고 믿는다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놀이터에서
한 소녀가 발을 굴러 그네를 띄우고 있다
그 어떤 사과도 도달하지 못했던 천진한 곡선을 그리며 3
발바닥이 깨끗하게 펴진 채로 공중에 떠오른다
그 순간의 출렁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바나나, 멜론, 포도, 복숭아…… 다만 사과는 아닌 그 무엇이다
소녀는 아직 사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3
조카는 사과밭 사이를 뛰었다 숨었다 정신이 없다
일교차가 심할수록 사과는 덜 시어진다고 하니
조카는 분명 지금 달아져가는 중이다
어른의 손가락은 아이들의 첫 사과인지도 모른다
내 검지를 쥔 조카의 악력이 대단하다
다섯 손가락이 각자의 위치로부터 힘껏 내 검지를 밀어낸다
조카는 기도란 미는 힘이라는 것을 벌써 안다
기도가 기도를 밀고
손바닥이 손바닥을 밀듯이
사과나무가 자신의 손목을 밀어내자
나뭇잎은 간구하던 몸짓 그대로
손끝이 조금 말려든 채 흙 위에 눕는다
사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4
(2014 문학과 사회 당선작)
울타리의 노래
이설빈
1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어른들은 점잖게
펜스를 들추고 넘어가
마치 펜스라는 게
치마 속에 있다는 듯이
여기, 나는 펜스에 걸터앉아
모든 걸 넘겨봐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노래는 혀까지 미치지 못하고
눈썹에 고인 땀방울이
잠깐, 빛을 받아 넘쳐서
먼 지평의 굵은 턱선을 강조하는 시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바람이 불 때만 의미를 갖는 예민한 솜털처럼
성급한 땀방울 하나
내가 이룬 모든 걸 거꾸로
그늘 속에 드리우고 있어
있지,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아직도 목초지는 멀어
2
내가 이룰 것들이란 다 무엇일까 5
한 획의 비행운?
점진적인 책갈피의 이동?
열두 개의 그림자 태엽?
노예선의 새로운 깃발?
주머니가 덜 마른 코트?
커다란 굴뚝을 입에 물고
여기, 나는 완강히 버티고 서서
모든 걸 넘겨 보낼 작정이야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맞아
내 검은 워커는 진창에서 얻었지
무릎까지 푸욱 잠겨서
비석에 새겨진 이름에는 이끼가 자라지
입술을 뒤덮는 콧수염처럼
3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건초지는 발밑에 영원처럼 머물고
노래도 새들도 떠난 둥지에는
느긋한 노을 한 줌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걸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어
알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나를 가리키던 시간들
내가 될 수 없던 몸짓들
그것들 모두가
내 생의 단위로 자라날 때까지
여기, 나는 펜스에 기대서서
그 모든 걸 굽어봐
4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아기들은
펜스를 기어서 지나가
마치 펜스라는 게 6
텅 빈 빨랫줄인 것처럼
사람들, 눈부신 속옷들
바람에 멀리 날려 가고
목초지만큼 멀어져 가고, 나는
여기, 기다란 그림자 되어
펜스를 넘어서는데
하나, 둘…… 눈이 멀어
울타리를 지워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