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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한정 쪼아대는 소리마저 정교함에서 한올한올 부처님의 모습이 나온다. 둥근 선으로 시작 차츰 얼굴과 손발이 생기고 코 입 마침내 눈동자와 표정, 입가의 온화함이 생기는데 마치 석불을 만드는 것이 나이라 돌 속에 숨어있는 모습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 같다. 오랜 풍광에도 변하지 않는 자태를 뉘라서 모르겠는가.
사람들은 돌 작업은 정교하지 않은 일로 알고 있지만 실은 한 치의 오차를 미룰 수 없는 것이 돌로 만든 작품 세계다.
돌산과 석공소 백제시대 사람들은 익산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보석이었다.
한국최고의 석탑인 미륵사지석탑이 있는데 이는 익산이 돌의 주산지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이겠다. 익산益山을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산에서 이로운 것이 많이 난다는 뜻이 아닌가. 질 좋은 돌이 풍부하니 그런 익산에서 훌룡한 석공들이 배출되는 것으 당연할 것이고 미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 많다. 30년 전만해도 돌의 현장에 가면 어디서나 80%이상은 익산사람들이었고 청와대 영빈관 돌이 황등석으로 그 우수성을 알 것이다. 그 중심지에서 하루도 정 소리를 자신의 숨소리로 알고 살아온 석공명장 권오달(66)씨를 만나러 가는 현장에는 또 하나의 작품이 탄생가기위한 신음같은 기계음이 분주하다.
도련님이 돌을 만나다
권오달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에서 안동권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사망하자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당시 육사출신으로 육군부위 정삼품자리까지 차지한 분이었다. 안동권씨 양반 집안이라는 기개가 대단하였는데 일본치하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오자 농지 개혁등으로 집안이 하루아침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때가 14살 때, “가난하여 중학교조차 다닐 수 없는 지경었는데 그전에 집안의 일을 하던 시종이 있었는데 이름도 모르는 그분이 집안이 몰락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어머님한테 권오달 도련님을 자신이 밥은 굶기지 않고 잘 보살 필 테니 걱정 말고 맏겨 달라고 하며 데려갔는데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돌을 다루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항상 양반을 강조하시며 비늘있는 고기는 먹지 말고 아무리 추워도 곁불을 쬐지 말아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시던 분이었기에 만에 하나 돌 일을 한다고 데려갔다면 아무리 무너져가는 집안이라 할지라고 나서지도 보내지도 안했을 것이다.
“그때 돌 일을 하러 간다면 아무리 어려운 형편이라도 보내지 안했을 겁니다. 저 역시도 어떤 일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길을 나섰고요. 생각지도 안했던 돌과의 만남이 평생지기가될 줄은 몰랐지요.”
비록 막일을 하여도 시종은 권오달을 도련님으로 극진히 대접을 하였다. 힘든 일과 고단한일은 자신이 하고 행여 다른 사람이 힘든 일을 시키거나 야단치기라도 하면 잘 봐달라는 부탁도하여 영원한 도련님으로 모셨다. 그렇게 생활한 것이 8년이었을 무렵 그분이 돌아가시자 의지 할 곳이 없었다.
“당시는 어느 공장에서 일을 하기 보다는 절구통이나 맷돌같은 필수품이 필요한 집에서 돌로 만들어주고 돈을 받는 식이었지요.”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군대에 입영을 하였고 월남을 지원하여 군생을 월남에서 하였다.
돌이 나를 키우다
26세에 제대한 그는 잠시 건축 일을 하였지만 그다지 적성이 맞지 않았다.
서울 망우리에 석재공장에 취직을 하였는데 “당시 회사 사장은 힘든 돌 일을 뭐하러 배우려고 하느냐고 말류 했지만 어려운 할아버지 어머니 처 자식등 7식구를 먹여 살려야 할 처지로 여지가 없었지요. 그래서 장갑 값이나 주어도 좋으니 일을 하게 해달라고 했지요.”
당시 월급 3,000원을 받고하는 일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노동의 고초가 따른 것은 당연하였다. 일본에 수출하는 일을 하였는데 “일을 하다가보니 돌 일을 하는 공장보다 일본어 통역을 하는 사람들이 수입이 좋아 돈을 더 버는 것을 보고 일본어를 배워야 겠다고 맘을 먹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배깔고 이불 뒤집어쓰고 몰래 일본어 공부를 하였습니다. 3년 정도하니 대화가 가능해지더라고요. 또 돌일 하는데도 전문 용어가 일본어가 많았기도 하였고요.“
진안석재 오명근 사장 밑으로 회사를 옮겨 4년간을 일을 하였는데 당시 공무원 월급이 10,000원정도 였는데 석공은 40? 만원을 넘는 쌀7가마니 정도의 수입이 되었다.
32세 되던 해 당시 황등에 살던 이종천이란 사장이 운영하던 전라미술석공장에 데려와 내려오게 되었다.
황등 돌이 최고의 제품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권오달은 최고의 돌이 나는 익산에서 일을 하는 것을 굳지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교회 장로였던 사장님은 형상 즉 돌상이나 특히 불교적인 불상등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다양한 제품등이 제한된 것으로 인하여 공장이 잘 될 리 없었지요. 내가 내려 온지 3년 정도 되어 회사가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곡절 끝에 자신이 해보겠다는 의지로 현재의 자리 신용동에 터를 잡고 공장을 만들어 지급에 으르게 된다. 불상이나 동물상등 원하는 것은 제대로 만들고 잇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권오달의 공장은 유명세를 타게 된다.
남쪽 산등허리에서 승부를 걸다
1978년 자본금 40만원으로 명세기 자신의 공장을 세우게 된다.
회사의 이름을 남강南岡이라고 지었는데 자신이 있던 양평은 한강이북인데 남쪽 남 산등허리 강을 사용하여 남쪽에 있는 산등허리를 이용하여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마음으로 남강으로 이름을 지었다.
객지 생활은 아는 사람도 없고 정을 나눌 친구들이 없다보니 돈을 빌릴 수 가없으니 자금회전이 어려웠다.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회포를 풀 만한 사람도 없었다.
“당시 함열에 석산을 하시는 김철환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제가 그 분한테 100만 원정도 빗이 있었는데 갚을 길이 없었지요. 그래서 사자상을 조각하여 돈100만원을 갚은 것으로 해달라고하자 그분은 물건으로 빗을 받는 건 처음이라며 허락 하였지요 돌도 꽤 좋은 질이 엇는데 아무한테나 주지 않했어요.”
권오달은 사업을 하면서도 남에게 줄 돈은 안주고는 못 배기는 성품이었다. 특히 명절 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돈은 갚아야한다는 철칙이 있었다.
“제가 30년이 넘는 공장을 운영하면서 직원의 월급을 한 번도 늦게 준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저의 경영철학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일을 할 때는 내가 좋아서 한다기보다 먹고 살기위하기 위함이었을 테니 실수하지 않으려했습니다..” 돌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의리하나 남달라서 서로의 경사는 꼭 챙기는 사람들이라 동료의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며칠을 빠지는 것은 예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주말에 맞추어 월급을 주었다고 한다.
그렇듯 작품시공은 철저하게 납기는 확실하게 하다 보니 소문이나 제법 잘되었다. 그러나 15여년의 정도 지나니 중국산이 밀려오기 시작 하였다. 그래서 일본수출을 국내공사로 방향전환을 하였다.
그러면서 익산 돌의 우수성을 대내외로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돌을 홍보할 수 있는 방법은 축제의 장을 만들어 보자고 당시 대한광업공사 소장과 김승문과장등과 제1회 돌 문화 축제를 시작하게 된다. 시단법인체 설립과 돌 문화 보존회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7회까지 이사 및 제전위원장을 하다가 8회에 인수인계를 하였다.
지금도 어찌되었든 돌 문화 축제가 돌의 홍보효과는 누리고 있다 손 치더라도 정작 우리 시민과 석공인들 에게는 제대로 된 당초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정말로 아쉽다고 한다.
주인공이 들러리가 되서야
석공인이 주인이 되어야 한고 일반인이 내빈으로서 그 혜택을 누려야 하는데 지금은 축제가 상당히 변질되어 주객이 바뀐 실정이라고 한다.
“지금 돌 문화 프로젝트라고해서 하고 있는데 올은 일인지 의문이 많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제대로 마무리가 되지못하면 상당한 후유증도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수한 석공들이 많은데 다른 사람들이 와서 설치고 하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이곳의 순수한 아사달 후예는 정말로 몇이나 될까 주객이 바꾸니 현상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국제화에 다른 조치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갈수록 저하되는 석공들의 위상이 재정립되어야한다는 것이지요.
사라져가는 석공예 기술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석공업은 5000년을 이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희귀직종 중 하나가 되어간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이를 위해 최근부터 후배 양성을 시작했다. 명장들의 자신의 기술을 쉽게 전수해주지 않는 것에 반해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기술은 가르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이제는 기술을 전수하야 될 때가 온 것 인줄 알았죠.석공예도 전망 좋은 업종 중 하나입니다. 힘들다고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희귀성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사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야무지게 가르치고 있다.
권명장은 30년이 넘게 자신의 일기를 썻고 지금도 쓰고있다고 한다. 그것이 나중에 후배들에게 자료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란다.
미륵사지가 걱정 된다.
“우리 돌 일을 하는 사람의상징적이고 긍지를 삼게되는 것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최고의 현존하던 미륵사지석탑은 우리가 아사달의 후예라는 것이 입증 되었지요. 그런데 지금해체 하여 다시 복원을 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닙니다.” 권오달명장은 비록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그냥 놔둬도 몇백년을 갈 수 있을 텐더 해체 하는 것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고한다.
200여명이 넘은 아사달의 후예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한마디라도 자문을 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제가 당시 유흥준 문화재 청장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해체하는 방법보다 현존하는 모습에서 잘 보존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 올다고 하였지요. 그런데 얼마 후 실무자한테 알아서 잘 할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연락이 왔더군요..” 명세기 석공 명장이라서가 아니라 아마 우리 돌 일을 하는 분들의 생각은 거의 저와 같은 입장일 것이라고 강조한다.
돌에도 그들끼리 끌어당기는 인장력과 견고성등으로 보면 사람과 같이 유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잇습니다. 지금 미륵사지같은 경우는 정말로 노년기인데 거기에다 지금 만들어서 유년기의 돌을 접목시킨다면 미고나상도 어울리지 않을 뿐 더러 서로의 궁합이 맛을 수 가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노인의 뼈와 유년기의 뼈를 접목시키며 그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황등 돌과 예술
황등돌은 인장력이 우수하고 보는이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는 색깔이 곱고 지루하지 않은 고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특히 회백색 및 쑥색으로 철분함량이 적어 비를 맞으면 은은한 쑥색으로 햇빛에는 화사한 원색으로 숨쉬는 생명력을 가진 돌이란다.
중국산 같은 경우는 철분이 많기 때문에 수명이 짧다. 철분은 녹을 만들어내는 박테리아같은 것이 있단다. 황등돌은 미세하기 때문에 철분이 적어 그 자태를 오래토록 유지할 수 있단다.
그런 돌이 있는 곳에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대통령보다도 혁혁한 고을세운 유명한 삶보다도 매력적인 직업이 석공입니다. 이들은 나증에 이름조차 만나보기 어렵지만 우리 작품은 몇 백년 천년이 지나도 끄떡없이 이름이 남기 때문에 대충 만들 수 는 없는 것 이란다 한 조각이라도 예술성과 작품성은 심혈을 기울여 가능하면 사람들에게 그 싫증나지 않는 작품 가치가 충분한 작품을 만들기에 노력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돌의 형상을 보면서 대충 깍아서 만든다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섬세하고 오묘한 작업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돌을 다루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얼굴의 가에 미소를 만드는데 조금만 돌이 떨어진다든지 방향이 틀어지게 되면 그 미소의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지요. 손끝 모습 하나도 대충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작품의 내면과 외면이 같이 나타내야 정말로 좋은 작품입니다. 그것이 다르게 되면 흉내만 낸 것이 불과하지요 그래서 내공이 쌓이려면 얼마의 수련기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떤 예술이고 순식간에 이룰 수 없는 것이 예술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장대를 세우는데 그것을 세우는 것은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쓰러지지 않고 오래 잘 서있게 하는 것은 학문입니다. 그 예술성과 과정이 적당하게 배합되어야 예술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대를 이을 수 있어 다행
대게의 예술인들을 보면 당사가 자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족에게 꼭 한두 사람은 그 대를 잇고 피를 못 속이는 사람이 있다. 큰아들 권대식(32)씨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둘째아들 권대출(19)씨는 대학생신분이니 권오달 석장에게는 2남2녀가 있어도 굳이 힘든 일을 시키려하지도 안했지만 대를 잇겠다고 나서는 자식 또한 없었다,
하지만 다행일까 대학교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전남 영광에서 교직에서 근무하던 둘째 사위가 장인의 대를 잇겠다고 팔을 걷어 부쳤다.
“내 자식도 일을 안 시키고 다른 일을 시키는 마당에 어쩜 남이나 다름없는 사위가 하겠다고하니 선뜻 찬성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그의 의지가 곧고 재능 또한 타고난듯하여 지금은 제일을 도와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 제법 잘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제다 6년 전에 암수술을 받아 건강이 좋지 않아 이일을 그만둘까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저의 대를 잇겠다는 생각에 참 고마울 따름이고. 힘이 됩니다..” 행여 이 일을 시켰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하는 사위에게 가르침은 엄하게 한다고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고요 그 덕에 사위는 석공기능사와 석공예기능사 자격증을 입문한지 2년 만에 취득을 하였다.
비록 대학까지 마친 사람이니 창의적인 머리에다 기능까지 갖추어 진다면 그 발상에서 좋은 작품이 생기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하고 있다고 한다.
권오달이 걸어온 길
부인과의 사이에 2남2녀를 둔 1944년 권오달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서 안동권씨 양반집안에서 태어난다. 큰아들 권대식씨는 회사를 다니고 둘째아들 권대출씨는 학생이다.1981년 익산 신용동 현재의 자리에 공장을 설립한 그는1993대한진흥공사 석공예 훈련원 강사, 1994년에는 기능올림픽 전국대회 심사위원을 역임하는등 감사패, 공로패등 50여회에 수상을한다.
1996년에는 문화재 수리 자격증을 취득하고, 민속공예품 익산시 특산단지 지정을 받는다.
1997년에는 석공예 직업훈련 전문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1998년 대한 전문건설협회 인정 기능사 선발심사위원 으로 취임하였다. 이윽고 1998년에는 대한민국 석공 명장으로 지정되어 명실상부한 명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해11뤙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고 2004년에 익산시장 표창을 받는다.
익산 문화원 이사 서동문화제 이사, 전국 돌 문화축제 제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5년에는 석공예 명장 선정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2006년에는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화재과 객원교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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