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성공회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저녁기도
2007. 7. 7.
Westminster Abbey, London, UK
3pm Evensong
James O’Donnell, Master of the Choristers
누가 이전에 나에게 영국이 어떻고 유럽이 어떻고 하는 얘기를 하면 그냥 남 얘기인줄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기회는 예기치 않게 오는 모양이다. 출장 중 주말을 런던에서 보내는 것으로 하고, 우선 주일미사는 가톨릭 Westminster Cathedral에서 드리는 것으로 계획했다.
한편으로 영국성공회를 대표하는 Westminster Abbey에서 역시나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그곳 합창단의 소리도 혹시 들을 기회가 있을까 궁금했다.
홈페이지를 찾아 보니 토요일 오후에 “Evensong”이라는 것이 계획되어 있었고, 윌리엄 버드(William Byrd)나 토마스 톰킨스 (Thomas Tomkins) 같은 작곡가의 곡명이 나와 있었다.
Evensong이라면 evening song을 줄여서 나온 말 같은데, 아마도 가톨릭 성무일도의 저녁기도 같은 것이 아닐까? (나중에 알아보니 원래 성공회에서 가톨릭의 저녁기도 (vespers)와 밤기도(compline)를 합쳐서 구성한 것이라 한다.)
한편 그 때는 일반 입장시간 이후인데, 그리고 평소 시간에는 입장료도 상당히 비싸던데, 개방시간 이후에 거행하는 evensong에 나같이 성공회 신자 아닌 여행객도 자연스럽게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일까 싶기도 했다.
어쨌거나 시도는 해 볼 만한 일.
Westminster Abbey, 서쪽 및 북쪽에서 본 모양.
시간여유를 두고 Westminster Abbey 서편 정문 쪽으로 갔더니 철문이 살짝 열려 있고 안내자들이 서 있었다.
Evensong에 참석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점잖게 성당 안쪽으로 안내해 준다.
곧 이어 웅장한 성당 내부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이 온몸으로 영국 역사를 담고 있는 곳!
일정 간격으로 서 있는 관계자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벌써부터 분위기에 살짝 압도된 상태로 북쪽 복도를 따라 들어갔다.
수많은 왕과 유명인들의 무덤이기도 한 이곳.
헨리 퍼셀과 에드워드 엘가와 본 윌리암스의 이름들이 바로 내 발 밑으로 지나간다.
어딘가에 뉴튼과 헨델도 묻혀 있으리라.
아래 십자 모양으로 된 부분이 성당 건물. (출처 wikipedia.org)
그림아래 오른쪽 Great west door로 들어가서 아래쪽 복도를 따라
“Quire”라고 된 성가대석 쪽으로 가도록 안내자들이 인도해 주었다.
(방문한 사람이 옆으로 빠져서 관광객으로 돌변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있을 것 같다.)
안내를 따라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성가대석 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금빛과 푸른빛이 아찔하리만큼 화려하다.
그 가운데 서 있던 안내자가 내 자리를 지정해 주는데, 아니, 성가대석 셋째줄?
이건 합창단이 바로 내 앞 줄에 올 분위기가 아닌가.
완전히 얼떨결에 그 자리에 앉은 나의 머리 위를 금빛 삼각지붕이 덮어 준다.
Westminster Abbey의 성가대석 (Quire).
안내자가 지정해 준 내 자리는 왼쪽편 셋째줄 가운데쯤. 합창단 바로 뒷자리!
사진출처 http://flickr.com/photos/carolinaren/2341043017/
여전히 내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 상태에서 자리에 비치된 전례서와 안내지를 살펴 보았다.
“성공회 신자, 다른 종파 신자, 신앙을 가질지 의심 중에 있는 분 모두 환영합니다.”
다행히 나도 환영받을 대상에 들어가는구나.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좀 일찍 온 사람들이 성가대석 양쪽의 셋째 줄에 앉았고 그 다음에는 그 옆 북문에 가까운 공간에 마련된 의자에 줄지어 앉았다.
이윽고 오르간 전주가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모르기는 해도 프레스코발디쯤 되지 않을까.
그러다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 저쪽에서 무반주 합창이 터져 나왔다. 순간 온몸에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느낌. 이런 소리가 가능한 것이었던가!
보이소프라노와 남성의 소리가 이 장대한 성당을 휘감아 울리는데, 녹음으로 듣던 소리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아멘” 뒤에 남은 소리는 내가 세상에서 들어 본 가장 아름다운 여운이었다. (입당송: Henry Loosemore, O Lord increase my faith)
다시 오르간이 조용히 울리는 가운데 합창단이 줄지어 들어오고 양쪽 두 줄에 자리를 잡았다.
정말 내 바로 앞자리에 합창단이 온 것.
대략 세어 보니 소년들이 22명쯤, 카운터테너가 섞인 성인 남성이 12명쯤 되었다.
Westminster Abbey Choir의 소년 단원들. 그 날 합창단원 모두 이런 복장이었다.
출처 공식홈페이지
http://www.westminster-abbey.org/__data/assets/thumbnail/0004/9256/31950.jpg
주례자가 예식을 시작하고 곧 독창과 합창이 무반주로 “주님 내 입시울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당신 찬미 전하오리다” 하는 기도를 계-응으로 주고받았다
(Humphrey Clucas, Versicles and Responses. 가톨릭 성무일도에서는 아침기도를 이 구절로 시작하는데, 성공회에서는 이 Preces라는 부분이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에 있다고 한다).
다시 말로 하는 기도 후 오르간 반주와 함께 시편을 노래하는데 그 소리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여기서 합창단의 역할이란, 수도원의 성무일도에서 바로 그 수도자들이 하는 역할이다.
한국에서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성무일도에 여러 번 참석해 보았으니, 수사님들이 단선율로 부르는 저녁기도의 아름다움을 익히 기억하는 바이다.
노래도 좋지만 그것은 그분들의 기도와 삶 자체... 그런데 여기서는, 그와 비슷한 예식을 최상급 합창단이 최상급의 음악으로 거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서에 이어 시작한 노래는 William Byrd가 영어 가사에 작곡한 "The Great Services" 중 Magnificat(마리아의 노래)이었다.
다성 합창이 포지티브 오르간과 함께 맑게 울려 나오는데, 앞에 있는 합창단원의 악보를 넘겨다 보니… 무려 10성부곡!
그리고는 이 Magnificat 하나가 거의 10분 가까이 이어진다.
다음 독서 후 같은 작품 중 Nunc Dimittis(시메온의 노래)가 다시 5분여…
이제는 아예 기가 질려 버린다.
이게 무슨 대규모 연주회나 부활시기의 큰 전례도 아니고, 지금은 비교적 한가한 7월달의 토요일 오후가 아닌가.
참석한 회중이라고 해 봐야 백여 명이나 되었으려나?
더구나 evensong 일정이 수요일 빼고는 매일같이잡혀 있던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 온 것일까!
굳이 많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가장 아름다운 기도를 드린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아도, 영국 성공회와 영국 합창의 자부심이 여기 보인다.
계속해서 여러 기도가 낭송 또는 합창으로 (호모포닉 또는 폴리포닉) 이어졌고, 토마스 톰킨스(Thomas Tomkins)의 다성음악 앤섬(anthem) “Almighty God, the fountain of all wisdom”이 다시 수 분…
그리고 예식 마지막에는 안내지에 나온 악보를 따라 회중 합창으로 “O quickly come, dread judge of all”하는 노래를 다같이 불렀다.
이 노래의 여운이 끝남과 동시에 오르간 후주가 시작되고, 전례자와 합창단이 그와 함께 행렬을 지어 퇴장했다.
멘델스존의 전주곡과 푸가 e단조. 비교적 작게 시작한 음악이 8분여 동안 고조되면서 건물 전체를 뒤흔들 만큼 장엄하게 끝났다.
휴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장 한 시간동안의 음악 저녁기도.
……
내가 본 여행 안내책자에는 이런 예식에 대해서 잘 나와 있지 않고, 건물과 역사에 대한 소개와 개방시간 정도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하기야 대부분 여행객들에 이런 일은 관심 밖일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나 전례에 관심있는 사람이 영국에 갈 기회를 얻는다면, 아마도 꼭 고려해야 일이 이런 곳에서 전례 안에 실제 숨쉬는 음악에 흠뻑 젖는 것이 아닐까?
참고로 기도에 오는 사람한테 입장료를 받을 수는 없는 법.
음악 없이 일반 입장시간에 건물을 구경하는 것은 개인 15 파운드 (한국돈 약 3만원).
마음껏 돌아다니기는 어려워도 여기 들어와서 한 시간동안 엄청난 음악과 함께하는 것은 공짜다.
출처 :전례음악(천주교) 글쓴이 : 이봉섭